어려운 글쓰기 (어렵다)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나무가 들려주는 노래를 못 듣는다. 그래서 마음을 안 기울이는 사람한테는 ‘나무랑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온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나무를 켜서 말려 마름하고는 집을 짓거나 살림을 짜기가 어렵다. 자칫 뒤틀리기 좋다. 힘만 쓴다고 해서 집이나 살림을 얻지 않는다. 그래서 온마음을 다하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살림이나 삶을 짓기’가 어렵다. 모든 사랑을 쏟지 않는다면 글 한 줄에 서린 뜻이나 숨결을 읽지 못한다. 한글이나 영어를 눈으로 죽 들여다본다고 해서 ‘읽기’라고 하지 않는다. ‘들여다보기 = 읽기’일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랑을 쏟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알기’가 어렵다. ‘어렵’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알 수 있거나 할 수 있거나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마음을 쓰고 들이고 쏟고 나누고 펴고 기울이고 움직여서 하나가 되어야 할 테지. 마음을 쓸 줄 아는 사람한테는 글쓰기가 안 어렵다. 마음을 그대로 쓰는 글이다. 마음을 쓸 줄 모르는 사람한테는 글쓰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글읽기도 어렵다. 마음을 쓰기에 삶을 짓고, 마음을 기울이기에 살림을 펴며, 마음을 나누기에 스스로 사랑을 길어올린다. 글이란, 마음길을 펴는 사람이 손수 거두어서 함께하려는 열매이다. ㅅㄴㄹ



[어렵다]

1. 알거나 하거나 듣기에 하나도 헤아리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이다 (하나도 헤아리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이라 알지 못하고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다)

 * 어린 누이한테는 어려운 일이야

2. 삶·살림이 막히거나·가난하거나·숨을 돌리지 못하거나·마음을 열거나 놓을 수 없어서, 지낼 만하지 않거나 견딜 만하지 않다 (살림을 꾸릴 만하거나 제대로 살 만하지 않다)

 * 먹고살기가 어려운 이웃을 못 지나쳐요

3. 말이나 글이 어떤 뜻인지 읽거나 알거나 받아들이거나 새기거나 느끼거나 헤아릴 만하지 않다 (말이나 글이 어떤 뜻인지 읽어내거나 알아내지 못하다)

 * 나한테는 읽기 어려운 책이에요

4. 말·마음·뜻·몸짓을 바깥이나 둘레로 나타낼 만하지 않으나, 꼭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여기면서 마음을 단단히 하다

 * 어렵게 걸음해 주셨는데 어쩌나

5. 마음이나 느낌을 맞출 만하지 않다

 * 너하고 놀기는 좀 어려워

6. 가까이에 있거나 곁에서 따를 만하지 않다 (꺼리다. 거북하다)

 * 낯선 사람을 어려워합니다

7. 무엇을 이루거나 해낼 일이 거의 없을 듯하다

 * 오늘까지 닿기는 어려울 듯한데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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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의 별


 너는 우리의 별이야 → 너는 우리 별이야 / 너는 우리한테 별이야

 저 하늘의 별처럼 → 저 하늘 별처럼 / 저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내 마음의 별과 같아 → 내 마음에 별과 같아


  “-의 별”이란 얼거리로 붙인 토씨 ‘-의’는 덜어내면 됩니다. 또는 알맞게 토씨를 붙일 수 있어요. 사이에 꾸밈말을 넣어도 되어요. ㅅㄴㄹ



사람이 죽으면 모두 하늘의 별이 된다는데 할아버지 별은 어디 있는 걸까요

→ 사람이 죽으면 모두 하늘나라 별이 된다는데 할아버지 별은 어디 있을까요

→ 사람이 죽으면 모두 하늘로 가서 별이 된다는데 할아버지 별은 어디 있을까요

→ 사람이 죽으면 모두 하늘로 올라 별이 된다는데 할아버지 별은 어디 있을까요

→ 사람이 죽으면 모두 하늘에서 별이 된다는데 할아버지 별은 어디 있을까요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권정생, 우리교육, 2000) 58쪽


조금 큰 젖먹이동물을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예요

→ 조금 큰 젖먹이짐승을 만나기란 하늘 별따기예요

→ 조금 큰 젖먹이짐승을 만나기란 하늘에서 별따기예요

→ 조금 큰 젖먹이짐승을 만나기란 하늘에 돋은 별 따기예요

《도롱뇽이 꼬물꼬물 제비나비 훨훨》(이태수, 한솔수북, 2016) 78쪽


“밤하늘의 별 같아서 지어진 이름이지.” “로맨틱해요∼.”

→ “밤하늘 빛나는 별 같아서 지은 이름이지.” “멋져요!”

→ “밤하늘 별 같아서 붙인 이름이지.” “사랑스러워요!”

→ “밤별 같아서 붙인 이름이지.” “아름다워요!”

《내가 걸으면 꼬리에 닿는다》(우노 타마고/오경화 올김, 대원씨아이, 2018) 18쪽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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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한테 왜 ‘패러디 동시’를 시키지?


어린이하고 동시를 즐기는 동시놀이는 언제나 새롭겠지. 어린이는 어른이 시키지 않아도 놀이를 하듯이 말을 하고 글을 쓴다. 어린이는 ‘동시’란 이름을 몰라도 신나게 글놀이를 한다. 그러나 적잖은 어른·동시인·교사는 으레 아이들한테 “동시 베껴쓰기”나 “동시 흉내내기(패러디)”를 시키고 만다. 그들도 어린이로 살았으면서 정작 어른이란 몸을 입고서는 어린이 숨결을 잊은 셈이다. 어린이는 무엇이든 스스로 짓고 빚으면서 활짝 웃는데, 어른 흉내나 시늉을 하도록 내몰면서 어린이 날갯짓이나 활갯짓을 송두리째 꺾는 셈이다. 생각해 보라. 어른 흉내를 내면서 ‘패러디 동시’를 쓴 아이들이 앞으로 어떤 글을 쓸까? 잘 쓰든 못 쓰든 스스로 제 삶을 제 나름대로 엮어서 이야기로 꽃피운 아이가 아니라, ‘잘 썼다는 추김질’을 받는 ‘어른 동시’를 고스란히 베껴서 쓰다가 흉내를 내야 한다면, 이 아이들 마음에 새로운 눈길이 싹트기 좋을까? 어른이나 어버이로서 아이들하고 글놀이를 할 적에는 꼭 하나만 하면 된다. 아이들이 어떤 글을 쓰든 모두 받아들일 노릇이다. 가끔 띄어쓰기나 맞춤법을 알려주면 되는데, 이마저도 거의 안 알려주면 된다. 아이 스스로 나이가 들며 스스로 다 알아차릴 테니, 일찌감치 띄어쓰기나 맞춤법을 가르쳐 줄 일도 없다. 그저 어깨동무하면 된다. 그저 어른이나 어버이 스스로 하루를 이야기 짓는 살림으로 누리면서 웃으면 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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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글쓰기



아는 것만으로는 아는 데에서 그치지 싶다. ‘아는’ 사람은 ‘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는 사람은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이다. ‘안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 ‘하는’ 사람도 있으나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알면서 하지 않는다면, 이이가 아는 것이란 무엇일까? 이와 맞물려, ‘하는’ 사람이 있다. ‘알’지는 못하나 그냥 ‘하는’ 사람은, ‘하다’ 보니까 어느새 ‘알’기도 한다. 하면서 스스로 배우고, 차근차근 익혀 가는 동안 저절로 아는 셈인데, ‘한다’고 해서 다 ‘알’면서 하지 않을 뿐더러, 꾸준히 배우거나 익히더라도 ‘잘 하는’ 몸짓에서 그칠 뿐, ‘아는’ 길에는 접어들지 못할 수 있다. 누구나 ‘알’ 수 있고, ‘알’려고 ‘배우’는 길을 걸을 만하다. 그런데 알기만 한다면, 배우기만 한다면, 익히기만 한다면, 이때에 우리는 무엇이 될까? 아는 채로 끝나고 배우는 채로 끝나며 익히는 채로 끝날 테지. 그래서 앎과 배움과 익힘을 함으로 녹이는 길도 늘 함께 걸을 노릇이지 싶다. 옛말에 “낫 놓고 기역 글씨 모른다”고 하는데, 이는 앎 하나만 다룬다. 낫을 놓고 기역이란 글씨를 읽을 줄 ‘알’면 무엇이 달라질까? 낫이 있으면, 이 낫으로 풀이나 나락을 베는 ‘함’을 스스로 누리도록 움직여야 비로소 앎은 앎대로 살아나지 않을까? 그리고 낫을 쥐어 풀이나 나락은 벨 줄 알되, 낫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 이때에는 늘 무엇을 하기는 하되, 어떤 길을 가는가를 바라보기 어렵겠지. 배워서 알든, 들어서 알든, 읽어서 알든, 익히면서 알든, 안 다음에 할 일이나 갈 길이란, 스스로 즐겁게 꽃을 피울 삶을 짓는 몸으로 무엇이든 ‘하는’ 하루이지 싶다. 무엇이든 ‘하면’ 된다. 밥을 하든, 빨래를 하든, 소꿉놀이를 하든, 이야기를 하든, 글쓰기나 책읽기를 하든, 돈을 버는 일을 하든, 나들이를 하든, 참말로 ‘하면’ 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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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노래



우리 집 아이들이 여덟 살에 이르기까지는 두 아이 입에서 터져나온 말을 되도록 모두 수첩에 받아적었다. 두 아이가 터뜨리는 말은 언제나 꽃말이면서 노래였으니까. 큰아이가 열 살이 넘을 즈음부터는 큰아이 스스로 제 말을 제 공책에 제 손으로 적도록 이야기한다. 열 살 문턱에서 큰아이는 제 말을 저 스스로 제 공책에 적기를 쉽지 않다고 여겼지만, 열한 살을 넘어서고 열두 살에 이르니, “응, 그 말을 내가 공책에 쓸게.” 하면서 매우 또박또박 즐겁게 잘 쓴다. 우리 어른은 누구나 아기로 태어나서 어린이로 자란다. 우리 어른도 아기일 무렵부터 여덟 살을 지나 열 살 문턱을 넘고 열두 살이 될 즈음, 참말로 “모두 시인”이기 마련이다. 깨닫든 못 깨닫든 누구나 시인이다. 이런 시인 곁에 있는 어른이라면, 어린이가 문득문득 터뜨리는 말을 수첩에 옮겨적으면 된다. 옮겨적는 대로 언제나 노래가 되고 시가 되는걸. 시를 쓰기 어렵다고 여기는 분이라면 아주 쉽게 시를 쓸 수 있다. 몸은 서른 살이나 쉰 살이나 일흔 살이어도 되지만, 마음은 여덟 살이나 열 살이나 열두 살로 바꾸면 된다. 이렇게 마음을 바꾼 몸을 즐거이 받아들이면서 두 손에 연필하고 종이를 쥐어 보자. 이렇게 하면 누구나 언제라도 상냥한 시인이 되어 아름답게 노래를 꽃피우는 글을 써서 나눌 수 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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