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의 여행
신혜 글.그림 / 샨티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42 ― 힘든 앎, 힘든 사람, 힘든 뜻
 : 신혜, 《먼지의 여행》


- 책이름 : 먼지의 여행
- 글ㆍ그림ㆍ손글씨 : 신혜
- 펴낸곳 : 샨티 (2010.2.16.)
- 책값 : 12000원



 (1) 아이하고 보내는 하루란


 아이와 함께 바깥마실을 나오려고 했더니 비가 주룩주룩 내립니다. 아직 아이 비옷을 마련해 주지 못한 까닭에 아이를 걸릴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애 아빠가 아이를 한팔로 안고 우산을 받으며 걷습니다. 아이도 비 때문에 걸리지 못함을 알고 있는지 아빠한테 안겨 가면서도 내리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여느 때라면 바둥바둥하면서 얼른 내려 달라 했을 테지만 아빠 품에 꼬옥 안긴 채 한손으로 우산대를 잡습니다. 아이는 품에 안겨 우산을 함께 잡으며 다니고 싶은가 봅니다.

 아이를 안고 우산을 받아 본 분은 알 텐데, 이러한 몸으로 몇 분 걸어도 팔이 저리고 힘듭니다만 한두 시간쯤을 이렇게 걷는다 한다면 내 팔은 내 팔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팔이 저리더라도 이렇게 걸을밖에 없고, 이렇게 걷는다고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팔은 저리지만 세 식구가 함께 바깥마실을 할 수 있으니 기쁩니다.

 생각해 보면 여느 식구들은 으레 자가용을 몰고 있으니, 비가 오건 눈이 오건 날이 맑건 흐리건 이냥저냥 자동차에 타고 움직입니다. 추운 날에 추위를 느끼며 걸을 일이 없을 테고, 더운 날에 더위를 느끼며 걸을 일이 없겠지요. 눈이 오는 날 눈을 느끼며 걷는 요즘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비가 오는 날 비를 느끼며 걷는 오늘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워낙 아기수레 없이 아이를 키웠고, 자가용 또한 없이 아이와 살고 있습니다. 아이랑 바깥마실을 다닐라치면 아이 기저귀며 옷가지며 잔뜩 짊어지고 다닙니다. 21세기 한국에서 여느 식구라 한다면 자가용에 아기수레며 갖가지 물건이며 잔뜩 챙기고 다닐 테지만, 우리 식구는 아기 옷가지에 천가방을 여럿 챙기고 다닙니다. 걸어서 저잣거리를 찾아가고, 한참 둘러본 다음 물건을 장만하며, 장만한 물건은 등에 메는 가방과 어깨에 걸치는 천가방에 담아 집으로 걸어서 돌아옵니다. 오늘처럼 비오는 날이라면 아이까지 품에 안고 우산을 받는 몸으로 걸어서 돌아옵니다.

 제 어린 날을 더듬어 봅니다. 더 어린 날은 떠오르지 않으나 일고여덟 살 적부터 떠오르는데, 어머니는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서 물건을 장만했습니다. 어머니가 물건 사러 나갈 때에 따라나서면 시내 구경도 하지만 길에서 무언가 얻어먹을 수 있고, 어머니랑 함께 어울릴 수 있어 좋았습니다. 버스 타기 또한 신나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머니가 장만한 물건을 함께 나누어 들고 오는 일쯤이야 아무것 아닙니다. 시내 구경에 버스를 타고 주전부리를 할 수 있다면 무슨 심부름인들 못하겠습니까. 어린이일 때 어머니와 저잣거리 마실을 다닌 일이 몸과 마음에 생생히 아로새겨졌기 때문이라 할 수 없으나, 우리 아이하고 저잣거리 마실을 다닐 때에는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사든 안 사든 바깥바람을 함께 쐬고 돌아오는 길이 즐겁습니다. 이래저래 몸이 고단하고 힘들어, 집으로 돌아온 뒤 그대로 나가떨어지거나 곯아떨어지더라도 저녁나절에 깨어나고 보면 개운하고 후련합니다.

 저잣거리에 나간다 한들 따로 무언가 가르치거나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그저 아이 스스로 이리 촐랑 저리 촐랑 들여다보고 구경하는 양을 지켜봅니다. 아이는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면서 사람들한테 알은체를 하고 웃음을 띄우며 때때로 손을 들어 가리키며 “넌!” 하는 한 마디를 합니다. 저잣거리에서 아이를 귀엽게 바라보는 어른들은 사탕이나 만두나 국화빵이나 떡을 한 점 집어 주곤 합니다. 아직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를 할 줄 몰라 아이보고 “자,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하고 꼬박꼬박 말을 걸지만 두 번 가운데 한 번만 고개를 까딱까딱 하면서 인사를 합니다.

 어린 날을 되새기노라면, 어머니를 따라나선 저잣거리 마실도 즐거웠고 홀로 심부름을 하던 일도 즐거웠습니다.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키면 부리나케 계단을 뛰어내리고 달음박질을 하며 가게로 갑니다. 어머니가 내어준 돈은 한손에 꼭 움켜쥐고 달립니다. 주머니에 넣을 수 있으나, 주머니에 넣고 달리다가 빠진 적이 있습니다. 가게에 닿고 보니 돈이 없어 화들짝 놀라 오던 길을 헐레벌떡 돌아가 돈을 주워 다시 달린 일이 새삼스럽습니다. 가게에 들어서기 앞서 후욱 하고 큰숨을 들이쉬며 숨을 고릅니다. 가게 이곳저곳을 잽싸게 둘러보고서는 사야 할 물건을 얼른 골라 셈대에 올려놓습니다. 셈을 치를 때면 으레 가게 아주머니가 “심부름을 왔구나. 착하지.” 하면서 50원쯤 에누리를 해 주곤 했습니다. 이렇게 에누리를 해 주시면 10원이든 50원이든 몰래 감추어 집으로 돌아와서는 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아 나중에 오락실에 가거나 군것질을 합니다. 때로는 만화책을 사고 어느 때에는 우표를 삽니다.

 퍽 이르다고 할는지 모르나, 집에서 스무 달짜리 우리 아이한테 심부름을 시킬 때가 있습니다. 엄마가 밥을 하며 먹을거리 한 점을 포크에 찍어 “자, 아빠 드시라고 해.” 할 때가 있고, 페트병에 담긴 물병을 아이한테 안기며 “자, 엄마한테 갖다 드리렴.” 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아이는 스스로 걸상을 끌어 개수대 앞에 착 갖다 붙이고는 부엌살림이 훤히 보이는 자리에 올라가서 이것저것 만지며 놀기를 좋아합니다. 방에 창문을 열어 놓으며 공기갈이를 할라치면 방까지 걸상을 들고 올 수 없으니 낑낑대면서 창가에 걸상을 대 달라고 합니다. 걸상을 번쩍 들어 창가에 대 놓으면 아이는 영차영차 기어올라가서는 창가에 착 붙고는 바깥바람을 쐬며 골목길을 내려다봅니다.

 하루 내내 아이하고 어울리며 지켜보면, 아이는 쉴새없이 뛰고 걷고 말하고 놀고 달려듭니다. 아직 스스로 오줌을 가리지 못하니 때 맞춰 쉬를 시킵니다. 배고파 할 즈음 밥을 차려서 먹이고, 하루에 두 번쯤 똥을 눌 때에 잘 받아서 치우고 닦입니다. 엊그제 아이가 손가락을 다치는 바람에 요 며칠 못 씻기지만, 날마다 아침빨래를 하면서 머리를 감기고 몸을 씻깁니다. 그러고는 낮에는 낮잠을 한 번 재웁니다. 낮잠을 안 자고 놀 때가 있으나, 이렇게 낮잠 없이 놀면 저녁에는 아이가 부리는 짜증이 대단하며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데다가 새벽에 자꾸 깨며 칭얼거립니다. 어제 한 빨래가 다 말라서 갤 때쯤 아이는 어느새 다시 배가 고파 저녁을 차려야 하고, 저녁을 차리고 함께 먹고 치우고 하노라면 그만 하루해가 저뭅니다.

 이 나라 숱한 남자들이 몸소 ‘전업주부’ 노릇을 해 본 적이 없는 까닭에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빠듯하게 하루를 보내며 날짜를 모르는지’를 살피지 못합니다. 밥때는 왜 이리 금세 돌아오고, 빨래는 왜 날마다 수없이 쌓이며, 날마다 치우고 쓸고 닦아도 이튿날이 되면 어인 먼지가 이리 다시 쌓이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이러면서 아이한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히고 바깥마실을 시킵니다. 혼잣몸으로 아이를 훌륭히 잘 돌보면서 돈벌이까지 척척 해내는 분이 있다지만, 이렇게 척척 해내는 분들은 스스로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기에 당신한테 쏟는 시간이 하나 없고, 나중에 나이가 많이 들면 갑작스레 몸이 무너지기 일쑤입니다.

 오늘도 아이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는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안기고 하다가는 두 시간 만에 비로소 ‘혼자 놀기’를 합니다. 혼자 놀기란 온갖 인형과 놀잇감을 방바닥에 아무렇게나(어른이 보기에는 ‘아무렇게나’이고 아이한테는 아이 ‘나름대로’) 늘어놓는 놀이입니다. 예전에는 그저 늘어놓기만 하다가 요사이는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기도 하지만, 이렇게 돌려놓는 일은 드뭅니다. 인형을 통에서 다 끄집어 낸 다음 인형 담던 통에 아이가 들어가 쭈그려앉으며, 머리띠를 둘이나 셋이나 넷을 한꺼번에 머리에 씌우고 헤헤거리며 웃습니다. 아빠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니, 아이는 인형통에 들어가 쭈그려앉다가는 아빠 사진기를 끙끙대며 잡아당겨서는 켭니다. 그런데 또 끙끙대기에 “왜?” 하고 물으며 바라보니, 사진기에 사진이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 앞서 메모리카드를 비웠거든요. “미안해. 곧 사진 만들어 줄게. 엄마 사진 찍자.” 하면서 엄마 사진을 몇 장 찍어서 아이한테 사진기를 건넵니다. 지난주쯤 엄마가 팔찌 놀잇감을 아이한테 보여주었더니 아이는 길쭉한 종이를 팔찌처럼 팔에 감으며 놉니다. 그러고는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책 하나를 들고 아빠한테 다가옵니다. 이 그림책을 펼쳐서 보여주고 읽어 달라며 “빠빠! 빠빠!” 합니다. 그림책을 두 번 읽어 주고, 길쭉한 종이를 아이 왼팔에 감싸 줍니다. 종이 팔찌를 아이가 벗기더니 끙끙거리기에 다시 팔찌를 만들어 주니 팔찌가 벗겨질세라 한쪽 팔을 가만히 든 채 사진기로 다가가 한 번 들여다보고는 엄마 무릎에 앉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일어나 옹알옹알거리면서 온 방을 돌아다닙니다. 이제 곧 배고프다고 칭얼거릴 테니까 밥상을 차려야겠지요. 오늘 하루도 참으로 빠르게 한 시간 두 시간 지나갑니다. 어버이한테는 참으로 빠른 나날인데 아이한테는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아이한테는 더없이 더딘 나날일까요. 어버이한테는 그지없이 고단하고 바쁘니 날이 갈수록 하루하루가 더 짧다고 느끼는 셈이고, 아이한테는 더 오래 많이 놀고픈데 엄마 아빠가 오래오래 저하고만 놀아 주지 않으니 지루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면서 길디긴 하루라고 느낄까요.


 (2) 힘들게 살며 힘들게 얻은 《먼지의 여행》


 1984년에 태어나 ‘여느’ 아이와 같이 여느 제도권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다음 대학교까지 마친 분이 어느 날 문득 ‘남들과 비슷하거나 똑같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비슷하거나 똑같이 살아야 하는 나날’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어 조용히 부모님 집을 떠납니다. 부모님 곁에서 떠나 홀로 돈 없이 나라밖을 돌아다닌 젊은 넋은 한 해 동안 일본과 인도와 네팔과 태국과 중국을 거쳐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짧지 않은 나날을 나라밖에서 돈 없이 돌아다니며 마주한 사람과 삶이 마음속에 깊이 스며든 젊은 넋은 도무지 ‘제도권 틀 그대로’ 살아갈 재주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라고 하는 목숨 하나는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면서, 이렇게 먼지와 같은 목숨이기에 참 좋고 가볍고 밝으며, 나한테도 남한테도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 아님을 새삼 느낍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갈피잡지 못하고 있으나, “괜찮아. 다음 길은 다음 걸음에 보일 거야.” 하는 생각을 고이 품습니다.

 젊은 넋은 스스로 제도권에서 벗어나려고 용을 쓰던 나날과 굳이 용을 쓰지 않으면서 제 삶고리를 느끼며 보내던 나날을 글과 그림으로 남겨 놓습니다. 모르는 노릇입니다만, 제도권 울타리에서 하루하루 보냈을 때에는 구태여 제 삶을 글이든 그림이든 남길 까닭이 없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내 삶이든 네 삶이든 다 비슷비슷하니까요. 내 어버이 삶이든 동무 어버이 삶이든 거의 같거나 닮았으니까요. 이리 보거나 저리 보거나 엇비슷한 옷에 차림에 얼굴에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뿐이니까요.

 내 길이 아닌 제도권 길을 걷기에 무엇이 기쁨이고 무엇이 슬픔인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아니, 알아야 할 까닭이 없고, 알지 않아도 되며, 알지 않더라도 잘못될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애써 눈을 두어 살피라고 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남들이, 아니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바라거나 시키는 대로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나다운 삶을 나답게 찾거나 즐길 까닭이 없는 한편, 나다운 삶을 나답게 찾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좀더 높다 하는 대학교 졸업장을 움켜쥐면 되고, 이 졸업장으로 연봉을 한푼이라도 더 주는 큰 일터를 찾아서 들어가면 되며, 정 안 되면 집식구들이 꽤 잘사는 짝꿍을 찾아서 시집장가를 가면 되는 세상 얼거리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맞는 좋은 짝꿍을 찾아 빛나는 사랑을 꽃피우는 젊은 넋이 있습니다만, 이 나라 젊은 넋들 가운데 어릴 때부터 ‘빛나는 사랑’을 스스로 하도록 배운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이 나라 젊은 넋이나 푸른 넋이나 어린 넋 가운데, 제 둘레에 빛나는 사랑을 곱게 꽃피우는 어른을 마주하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늘 보느니 돈바라기 어른이요, 으레 보느니 이름바라기 어른이며, 노상 보느니 힘바라기 어른입니다. 국가경쟁력이니 세계경쟁력이니 무한경쟁이니 하면서 나다운 내 삶을 찾는 길은 경쟁력이 하나도 없는 못난쟁이 헛놀음이라는 생각만 키울 뿐입니다. 주식이니 펀드이니 아파트이니 투자이니 처세이니 경영이니 자기계발이니 하면서 옳은 삶이나 바른 삶이나 예쁜 삶이나 멋진 삶하고는 동떨어진 채 살도록 내몰리고 있을 뿐입니다.

 힘겹게 떠돈 삶을 《먼지의 여행》이라는 책에 조촐히 담은 앳된 넋은, 여태껏 보낸 스물 몇 해를 훌훌 털어 보내면서 아무것도 또렷하지 않은 가시밭길을 가고자 다짐합니다. 아무래도 《먼지의 여행》을 쓴 젊은 넋을 키워 온 어버이한테는 가시밭길일 테지만, 이 책을 쓴 젊은 넋으로서는 풀숲길이리라 봅니다.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으며 한 해 두 해 온갖 풀이 돋아나고 자라난 길 없는 길이리라 봅니다. 왜, 사람들 떠난 자리이면 시골이든 도시이든 풀이 돋아나잖아요. 서너 해쯤 지나면 제법 큰 나무가 자라나 있고, 사람손을 하나도 안 탄 채 열 해쯤 되면 어느새 집 모양은 찾아볼 길이 없이 숲으로 바뀝니다. 《먼지의 여행》을 쓴 젊은 넋은 바로 이러한 풀숲길을 찾아서 걷고 있습니다. 때로는 풀숲길에 발자국을 남겨 젊은 넋 뒤로 누구나 따라올 수 있도록 할 수 있고, 때로는 젊은 넋 발자국 하나 안 남기면서 풀숲에 조용히 녹아들도록 할 수 있습니다. 몇 사람쯤 밟는다고 해서 풀숲은 꺾이거나 시들거나 사라지지 않거든요.

 곰곰이 헤아려 보면, 《먼지의 여행》을 쓴 젊은 넋은 이녁대로 반가운 풀숲에 들어가 풀빛을 온몸 가득 받으면서 푸른빛을 받아들인다고 하겠습니다. 전업주부이자 밥벌이하는 아빠로 살아가는 저로서는 저대로 살가운 풀숲에 들어가 제가 좋아하는 풀빛을 온마음 가득 껴안으면서 푸른결을 곰삭인다고 하겠습니다. 남이 걷는 길을 괜히 따라 걸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 좋고 반가우며 살갑다면 남이 걷는 길을 따라 걷는 노릇이 아니라, 남이 걸었든 안 걸었든 내 깜냥껏 신나게 걷는 셈입니다. 내가 걷는 길이기에 가시밭길이어도 좋고 풀숲길이어도 좋으며 한길이어도 좋고 골목길이어도 좋습니다. 내가 바라는 삶이기에 혼자 살아도 좋고 옆지기를 만나 살을 섞어도 좋으며 아이를 낳아 복닥이며 살아도 좋습니다.

 안 힘들게 살아가면 안 힘들게 살아가는 대로 세상을 보면서 내 삶을 다스립니다. 힘들게 살아가면 힘들게 살아가는 대로 세상을 부대끼면서 내 삶을 추스릅니다. 주머니 넉넉한 채 살아가면 주머니 넉넉한 눈높이로 세상을 헤아리면서 내 삶을 보듬습니다. 가난한 몸뚱이로 살아가면 가난한 몸뚱이로 세상을 살피면서 내 삶을 어루만집니다.

 손글씨와 손그림이 정갈한 책 《먼지의 여행》을 덮으면서, 이 책을 일구어 낸 젊은 넋 ‘신혜’ 님이 앞으로 서른 살을 맞이할 때까지는 어떤 길을 얼마나 더 힘겹고 벅차게 부딪히고 뒹굴면서 새로운 얼굴과 몸빛으로 거듭날는지 궁금합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즐겁게 잘 싸우겠지요. 즐겁게 잘 싸우고 즐겁게 잘 어깨동무하며 즐겁게 잘 울고 잘 웃으며 하루하루를 뜻있게 되새길 테지요.


 (3) 힘들이지 않고 다시 읽는 글월


 유행처럼 나도는 손글씨나 손그림이 아니라, 젊은 넋 스스로 반가이 맞이했던 삶을 꾸밈없이 담아낸 손글씨와 손그림으로 이루어진 책 《먼지의 여행》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던 대목을 되읽습니다. 가슴에 아로새기는 책은 두 번 되읽고 세 번 곱읽을 때마다 새록새록 스며듭니다. 성경을 수없이 되읽고 곱읽는 분들은 어떤 교리나 주의주장이 아닌 당신 삶을 아름다이 가꾸고픈 마음으로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수없이 되읽고 곱읽겠지요. 저는 저한테 반갑고 기쁘며 고마운 책을 하느님 말씀으로 삼으며 차근차근 되읽고 곱읽습니다. (4343.3.5.쇠.ㅎㄲㅅㄱ)


[11∼13, 18, 44∼45쪽] 이 느낌은 시골 마을에서 가난하게 자라며 고생도 해 보고 사람들과 정도 나누며 살아온 부모님은 이미 알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도시에 살면서 시키는 공부만 하고 거래와 경쟁을 당연히 여기며 자란 나에게는 특별했습니다 … 대학을 졸업할 때쯤 사회와 부딪치며 다행히도, 내가 먼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16년 동안 책상에 앉아 공부했지만, 비싼 돈 들여 입시 교육을 받았지만, 실제 삶에 도움이 되는 건 배운 게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대학 졸업장과 각종 자격증이 사회의 변화에 따라 쓸모없는 종잇조각이 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 그것밖에 얻은 것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심한 허탈감을 느꼈다 … 아, 이렇게 길들여져 있었구나.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이 낯설 정도로 하라는 것만 하고 배우라는 것만 배우도록. 권위자의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교육받았던 것이다.

[13, 28∼29, 32쪽] 돈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돈이 먼저가 아니라 하고 싶은 게 먼저가 되더군요 …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순수하게 참여할 수 있다는 느낌은 정말 뿌듯하고 기쁜 거였다 … 내 주변 친구들은 모두 바빠서 한 달에 한 번이나 겨우 만났다. 만나도 각자 고민거리가 많아 상대의 말에 귀기울이지 못했다. 부모님과도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의견 차이 때문에 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 가진 게 없어서 오히려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돈이 있으면 자기 돈으로 필요한 것을 구하면 되니까 그 이상으로 사람들과 관계 맺을 필요가 없었지만 돈이 없을 때는 사람의 마음과 연결되어야 필요한 걸 얻을 수 있었다.

[50, 51, 136, 161쪽]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제일 바라는 건 그저 내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사는 건데, 그분들이 정해 놓은 길이 내 행복과 건강에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나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면, 부모님이 가장 바라는 것을 위해서라도 지금 갈등을 각오하는 게 낫지 않을까? … 난 부모님과 대화할 줄 몰랐다. 부모님도 나와 대화하는 법을 몰랐다 … 아름다운 일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고,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싶은 거라고, 아버지에게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삶을 상상하지 못했다 … 콜카타에 있을 때 한 한국인 여행자가 말했다. “당신이 배우고 느낀 사랑을, 당신의 변화를, 부모님께도 느끼게 해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다람살라에서 만난 여행자가 말했다. “네가 진실한 삶을 위해 사는 이상, 너의 부모님도 그런 삶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어.”

[80쪽]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 없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으면, 머리속이 점점 단순해졌다. 먹고사는 문제보다 지금 내 마음을 사랑에 열어 두는 것에 집중하게 됐다 … 돈 가지고 여행하며 돈 계산, 여행 예산 짤 시간에 우리는 만족한 마음으로 많은 친구를 사귀며 멍하니 떠가는 구름을 볼 수 있었다.

[95, 124, 178쪽] 다행히, 길에서 순례자들에게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약을 나눠 주었다. 나의 고통을 자신들의 고통으로 느끼고 도와준 그들이 고마웠다 … 자신이 아무것도 없이 홀로일 때, 비로소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 내 마음을 따라 여행하면서, 없이 사는 것이 내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것도 알게 됐다.

[133∼134쪽] 사진 찍기를 원하는 아이들에게 카메라가 없어서, 대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색연필로 초상화를 그려 주기로 했다. 카메라로 찰칵 찍고 말 순간을 천천히 그림으로 그리며, 나는 아이들과 친해지는 과정에 집중하게 되었다.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아이들이 나를 오래 쳐다보고, 나도 아이들을 오래 바라봤다.

[189, 207쪽] 천국은 죽어서, 예수를 믿어야만 가는 게 아니었다. 예수가 말한 사랑을 실천하면, 살아 있는 그 순간이 천국이 되는 거였다 … 나를 둘러싼 세계를 새롭게 창조해 나아가는 것, 이게 진짜 예술이 아닐까? 이렇게 나의 삶이 예술이 되었을 때 내가 일상에서 표현하는 모든 것들도 예술이 될 거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하고 싶은 건 글 그림 음악이 아니라 나의 몸과 마음이 분열하지 않는 일, 하나가 되는 일, 그 길을 찾는 일이다.

[220쪽] 나에게 여행은 유명한 곳을 구경하려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나에게 익숙한 영역,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새롭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필요한 걸 배우기 위해서였다. 유명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은 색다른 쇼핑을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리고 쇼핑은 어디를 가나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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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 웅진책마을 52
오카 슈조 지음, 김정화 옮김, 이윤엽 그림 / 웅진주니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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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만 사는 아파트숲에서 생각하는 자연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6] 오카 슈조,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



 도시 물질문명, 환경파괴, 입시지옥, 공장과 기계, 자동차와 아파트, 이기주의와 무관심,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 들이 얼크러져 자꾸자꾸 뒤틀리는 사람들 삶을 ‘동물 우화’ 틀로 담아낸 어린이문학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를 읽었습니다. 어린이문학에서 이 같이 무겁고 큰 이야기를 다룰 수 있구나 싶어 놀라운 한편, 곰곰이 헤아리면 오늘날은 어린이문학에서고 어른문학에서고 이와 같은 이야기는 잘 안 다루고 있으니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지난날이라고 해서 이러한 이야기를 즐겨 다룬 문학작품이 많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다룬 인문책이라고 얼마나 되겠습니까. 곧잘 나오기는 하지만 제대로 읽히는 일은 드물고, 더러 나오기는 하여도 밑바탕까지 샅샅이 살피며 다루어 내지는 못하기 일쑤입니다.

 아무래도 우리들이 우리 삶터를 좀더 낱낱이 깨달으며 하나하나 바로세우거나 아름다이 가꾸고자 한다면, 우리를 둘러싼 온갖 슬프고 씁쓸한 이야기를 꾸준히 다루면서 가다듬으리라 봅니다. 아쉬운 대목은 아쉬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바로잡을 테고, 반가운 대목은 반가운 그대로 껴안으면서 널리 나눌 테지요. 그러나 모두들 더없이 바쁜 나머지, 내 삶이 어디로 흐르는가를 옳게 가누지 못합니다. 다들 그지없이 힘들고 돈벌이에 매인 탓에, 나와 내 이웃 삶이 어떻게 엮이어 있는지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 “아휴, 어떡해. 언제까지 여기 갇혀 있어야 하지? 다음주부터 학원에서 중학교 입시 수업이 시작되는데…….” 요시코가 한숨을 쉬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때 학원 걱정을 하다니, 난 기가 막혀서 요시코를 보았다. “중학교 입시? 아직 5학년인데?” “유명한 사립 중학교에 들어가려면 지금도 좀 늦은 편이야. 넌 걱정 안 돼? 공부 뒤처질 텐데.” ..  (60쪽)


 우리는 어린이였을 때부터 신나게 뛰놀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어린이였을 때 골목이든 들판이든 갯벌이든 바다이든 산이든 어디이든 마음껏 쏘다니며 신나게 뛰어놀았다고 떠올리는 사람은 하나같이 나이가 제법 든 분들뿐입니다. 1980년대 뒤에 태어난 사람들이나 1990년대 뒤에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재미있고 거리낌없이 뛰놀던 어린 나날’을 되새길 만한 분이 얼마나 될는지요. 1970년대로 살짝 거슬러 올라가 헤아리면 또 얼마나 될는지요. 날짜를 앞당겨 2000년대에 이 땅에서 태어나 자라는 어린이한테는 놀이터가 얼마나 되지요? 2010년대에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랄 어린이한테는 놀이터가 마땅히 있다고 할 만한지요?

 아파트숲에 꽁꽁 갇힌 조막만한 놀이터에 햇볕과 바람과 무지개와 빗줄기와 눈발이 얼마나 깃들는지 궁금합니다. 쉴새없이 오가는 자동차들이 뿜는 배기가스와 시끄러운 소리가 어린이한테 얼마나 좋은 동무가 될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한테 흙 한 줌이나 돌멩이 하나를 쥐어 보도록 할 만한 터가 어느 만큼 남아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물수제비를 뜰 만한 물가나 바닷가가 아이들 보금자리 가까이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비롯하여 우리 아이들 모두한테 ‘좋은 어린 날’이 아닌 ‘더 이른 나이부터 공부에 매달려야 더 좋은 대학교에 남을 누르고 들어갈 수 있고, 대학교에서도 더 공부만 붙잡아야 더 크고 돈벌이 잘 되는 회사에 들어가 남을 내려다보며 값진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다’고 가르치거나 길들이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 아빠는 산에 오를 때는 늘 준비를 게을리하지 말라면서 옷과 스웨터, 비상 간식과 라이터를 반드시 배낭에 챙기게 했다. 솔직히 나는 그걸 좀 우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아빠가 옳았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건빵과 초콜릿으로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배고픔도 조금 덜하고 추위가 사라지자 어느 정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 산포도는 시었다. 으름은 달았지만 씨가 너무 많았다. 처음으로 날밤을 먹었다. 하지만 버섯은 날로 먹을 수가 없었다.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었지만 배는 조금도 부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동물들은 이런 것만 먹고도 참 팔팔하게 잘도 움직이는 것 같았다 ..  (14, 37쪽)


 빨래를 할 때면 늘 곁에 붙어서 아빠가 빨래하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따라하는 우리 아이입니다. 빗자루를 들면 저도 빗자루질을 하고파 하고, 걸레질을 하면 저 또한 걸레질을 하고파 하는 우리 아이입니다. 이제는 키가 제법 자라 걸상에 혼자 낑낑거리고 올라서서는 엄마 아빠가 도마질을 하고 밥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구경하곤 합니다. 젓가락질이며 책읽기이며 볼펜 쥐기이며 옆에서 늘 바라보는 대로 배우고 따라하는 우리 아이입니다.

 백 마디 말로 가르칠 수도 있으나, 한 가지 몸짓보다 더 깊이 가르칠 수 없겠구나 싶습니다. 아니, 몸짓이란 가르침이 아닙니다. 어버이가 살아가는 매무새는 고스란히 아이한테 이어집니다. 대물림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우리 어버이들이 살아가는 모양새를 고스란히 물려받으면서 저희들 삶을 새롭게 꾸린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어버이들께서는 당신 삶을 어떻게 꾸리고 있으온지요. 바삐바삐 살아가는 우리 어버이들은 우리 삶터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며 어떤 몸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즐기고 있으온지요.

 스무 달짜리 우리 아이는 사진기를 제법 잘 다룹니다. 가끔 고 자그마한 손으로 무거운 사진기를 들고는 찰칵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셈틀을 켤 줄을 알고, 자판을 두들길 줄 압니다. 여느 집 아이였다면 텔레비전을 켤 줄을 알 테며 이리저리 다른 곳으로 돌릴 줄 알겠지요. 어버이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를 아이들이 귀로 가만히 들으면서 흥얼흥얼 따라하며 익힐 테고요.

 ‘신동’이라는 아이도 있겠으나, 아이일 때 곁에서 바라보는 그대로 쏙쏙 받아들이면서 배우고 커 가는 아이들이라 하겠습니다. 어버이들이 남녀평등을 잘 헤아리면서 살아간다든지, 이웃사랑을 즐거이 나누면서 살아간다든지, 잘못된 사회 얼거리를 바로잡는 데에 마음을 쏟는다든지, 동네를 곱게 여미는 데에 힘을 기울인다든지 한다면, 아이들은 이러한 어버이 매무새를 스스럼없이 바라보고 배우며 제 몸으로 삭여낸다고 느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버이가 보여주는 온갖 얄궂거나 짓궂거나 씁쓸한 모습 또한 아무렇지 않게 배우고 따르고 길들어 간다고 느낍니다.


.. 순간, 손 안에서 버둥거리던 새끼 토끼가 천이 찢어진 틈으로 머리를 쏙 내밀었다. 빨갛고 동그란 토끼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토끼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눈을 본 순간 도끼로 내리칠 기력이 푹 꺾여 버렸다. 하지만 이 토끼를 놓치면 나는 굶어서 꼼짝도 못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것은 죽음을 뜻했다. 가엾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토끼의 목숨을 빼앗는 수밖에 없었다 … 난생처음 내 손으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서 먹으려고 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무서운 짓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  (156∼157쪽)


 어린이문학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라는 작품은 이 땅 어버이들이 아이들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보라고 일깨우고자 애씁니다. 아이들한테는 어버이들이 보여주는 얄딱구리한 모습을 고스란히 배우거나 물려받지는 말도록 깨우치려고 힘씁니다.

 ‘숲속 짐승들이 사람들을 잡아서 사람이 저지른 죄값을 따지는 대목’을 보면 멧돼지 검사는 “너는 마음에 걸렸고, 마땅찮았다고 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적은 없었어. 생각은 그렇게 했는지 몰라도 하나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어. 연구실에서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고. 당신 연구는 대체 무엇을 위한 연구였지? 그저 당신은 자기가 좋은 일만 하면서 만족하고 살았지(98∼99쪽).” 하고 외칩니다. 멧돼지 검사는 농사꾼부터 학자와 도시사람과 어린이까지 무슨무슨 잘못을 저질러 숲을 망가뜨리거나 자연을 어지럽히거나 짐승들을 괴롭혔는지 이야기합니다. 이 지청구를 마무리하며 ‘자연 목장’에서 ‘원시 사람’으로 돌아가 살도록 판결을 내립니다. 자연 목장에서 목숨이란 무엇인가를 밑바탕부터 다시 생각하라고 이야기합니니다. 엉엉 울면서 자연 목장으로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에는 한 해 두 해 세 해 흐르는 동안 옳은 길을 깨달아 풀려난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끝까지 옳은 길을 깨닫지 않으며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외치다가 죽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라는 작품은 아이한테나 어른한테나 가장 깊이 들여다보거나 돋보아야 할 대목이라면 바로 ‘자연’이요 ‘자연다운 삶’이요 ‘자연스러운 사람’이라고 소리높여 외칩니다.

 책을 덮으면서 《금수회의록》(안국선,1908)과 《동물농장》(조지 오웰,1945)이라는 작품이 떠오릅니다. 한국사람이 쓴 《금수회의록》과 영국사람이 쓴 《동물농장》과 일본사람이 쓴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는 어슷비슷한 글감과 주제를 다룬다고 느낍니다. 영어권 사람들로서는 《금수회의록》과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를 읽을 일이 없겠지요. 일본사람들로서는 《금수회의록》이라는 작품을 볼 일이 없을 테고, 영어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사람이 빚은 작품 《금수회의록》부터 《동물농장》과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를 모두 읽을 수 있습니다. 세 가지를 함께 읽은 사람으로서, 세 작품은 저마다 다른 눈높이와 눈썰미로 우리 삶을 걱정하고 우리 앞날을 밝게 일구고자 하는 마음이 깃들었다고 느낍니다. 다만, 2010년에 번역된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는 그릇이 살짝 모자라고 번역 또한 조금 어설프구나 싶습니다.


.. 한여름 멱을 감으며 신나게 놀던 강도 이제 더러워져서 아이들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요. 사람들을 위한 개발이었지만 오히려 개발로 인해서 사람들은 소중하고 풍요로운 자연을 잃고 말았어요. 이런 개발을 계속해서 밀어붙여도 괜찮을까요? 과연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거라 할 수 있을까요? ..  (글쓴이 말)


 우리 집은 신문을 안 보고 텔레비전이 없기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하고는 꽤 동떨어져 있습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물길이라든지, 이름을 바꾸어 네 줄기 큰강을 손질한다는 일이라든지, 다가온다는 선거라든지, 겨울올림픽이라든지 거의 어느 일에도 눈길을 두지 않습니다. 아니, 눈길을 못 둔다고 할는지 눈길을 둘 값어치를 못 느낀달는지 그렇습니다. 밖에서 만나거나 어울리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곤 하는데, 이런 소식 저런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 나라는 참으로 갈 길이 멀다고 느낍니다. 아니, 이런저런 소식이 아니더라도 동사무소에 가 보고 무슨무슨 공공기관에 가 보면 이 나라는 참 아찔하다고 느낍니다. 아니, 저잣거리 마실을 다니고 큰길로 한 발자국 나서고 보면 이 나라는 참 무시무시하다고 느낍니다. 경부운하이든 4대강이든 정치판에서만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자락 구석구석에는 ‘또다른 이름으로’ 경부운하가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를 얽어매는 국가보안법은 언제나 ‘또다른 이름으로’ 우리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곤 합니다. 과자봉지를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지는 아이들을 볼 때에도, 좁은 골목을 무섭게 내달리는 오토바이와 자가용을 볼 때에도, 번쩍번쩍하는 옷가게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모습을 볼 때에도, 커다란 할인매장에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볼 때에도, 수없이 새로 짓는 아파트더미를 볼 때에도, 전철에서 먼저 타고 먼저 내리려는 사람들한테 밟히고 밀리면서도 늘 느낍니다. 우리 나라는 참 모질고 팍팍한 나라임에 틀림없다고.

 그런데 이렇게 모질고 팍팍한 나라인 까닭에 1908년에 일찌감치 《금수회의록》이라는 작품이 나왔고, 2010년에는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라는 작품이 번역됩니다. 뒤틀리는 우리 삶터가 더는 뒤틀리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 또한 어김없이 있어, 우리 모습을 우리 스스로 차분하게 돌아보면서 올바로 일구자고 용쓰는 사람들 땀방울이 하나둘 모입니다. 우리는 어영부영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람들인 한편으로, 아름답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한테는 바쁘고 힘든 삶 그냥저냥 맞추어 살자는 몸가짐 하나와, 바쁘고 힘들기에 더 즐겁고 알차게 살자는 매무새 하나가 함께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느 쪽 길을 고를지는 우리한테 달렸습니다. 내 삶을 어떻게 즐기면서 나눌지는 우리 하기 나름입니다. 우리는 한결 곱고 맑은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우리는 더욱 못나고 꾀죄죄한 사람으로 굴러떨어질 수 있습니다. 한 달 벌이 다문 백만 원으로 기쁘고 벅찬 나날일 수 있고, 한 달 벌이 천만 원으로도 모자라고 어두운 나날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도 있고 숲속에도 있으며 우리 마음과 몸 속에도 함께 깃들어 있습니다. (4343.3.4.나무.ㅎㄲㅅㄱ)


 ┌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웅진주니어 펴냄,2010)
 ├ 글 : 오카 슈조
 ├ 옮긴이 : 김정화
 ├ 그림 : 이윤엽
 └ 책값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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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타델의 소년 카르페디엠 21
제임스 램지 울만 지음, 김민석 옮김 / 양철북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37 ― 멋진 삶, 멋진 사람, 멋진 길
 : 제임스 램지 울만, 《시타델의 소년》



- 책이름 : 시타델의 소년
- 글 : 제임스 램지 울만
- 옮긴이 : 김민석
- 펴낸곳 : 양철북 (2009.10.29.)
- 책값 : 9500원



 (1) 세 사람이 함께 걷는 길


 한 집에서 살아가는 우리 세 식구이지만, 저와 옆지기는 서로 살아온 길이 다릅니다. 그런데 살아온 길만 다르지 않고 생각하는 길도 다릅니다. 좋아하는 길도 다르며 바라보는 길도 다릅니다. 어느 누군들 안 그러겠습니까만, 다 다르게 살아오고 다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 집에서 어우러져 살아간다는 일이란 대단한 어깨동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에는 미처 못 느꼈습니다. 저와 형이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일도 놀라운 어깨동무였습니다. 저와 형 스스로도 놀라운 일일 테고, 어머니와 아버지한테도 놀라운 일입니다. 제아무리 어버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당신하고 다른 사람이요 삶이니까요.

 날마다 아이를 보면서 새삼스레 느낍니다. 이 아이가 옆지기하고 살을 섞은 다음 태어난 목숨이요 우리가 키우는 아이이지만, 이 아이가 스스로 꾸리는 삶이나 이 아이가 바라보는 삶은 엄마 아빠하고 다릅니다. 엄마 된 옆지기나 아빠 된 제가 바라보거나 생각하는 눈길 그대로 아이가 바라보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마음읽기를 할 때가 있으나, 마음읽기를 한달지라도 서로 같은 길을 걷는 삶은 아닙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용하게 세 식구가 어우러지며 한 집안을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곰곰이 들여다보면 더없이 재미나게 세 식구가 얼크러지며 한 살림을 꾸린다고 하겠습니다.

 아침에 옆지기가 빗자루를 들고는 집안을 청소하겠다고 외쳤습니다. 한 엿새쯤 서로 집 치우기를 못한 탓에 먼지가 꽤 쌓였고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날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저대로 힘들었고 옆지기는 옆지기대로 힘들어 여러 날 그냥 손 놓고 지냈습니다. 옆지기가 건넌방부터 슥슥 쓸기에, 바닥에 널브러진 이불을 안고 앞마당으로 나와서 탕탕 텁니다. 이불을 다 털고 나서는 걸레를 빨아 바닥을 훔칩니다. 쓸고 닦기를 마친 다음에는 국수를 끓여 아침 밥상을 차립니다. 밥을 안 먹고 땡깡 부리고 칭얼대기만 하는 아기를 어르고 달래어 겨우 잠재웁니다. 애 아빠는 아침부터 여러모로 시달리고 바쁘기만 해서 아무 일손을 못 잡는다고 푸념합니다. 옆지기는 애 아빠 푸념을 듣고는 ‘내가 혼자 느긋하게 치우고 쓸고 닦으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애 아빠가 걸레질을 하면 머리카락을 다 훔치지 않는다 합니다. 당신은 걸레를 새로 빨아 발로 슥슥 문지르면서 다시금 닦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라고 걸레질을 하며 새로 빨고 다시 닦기를 안 하겠습니까. 먼저 먼지와 머리카락들을 훔치려고 한 번 닦고, 한 번 빨아서 다시금 닦으며, 또 한 번 빨아 마무리 걸레질을 하곤 합니다. 서로서로 쓸고 닦기를 해 온 버릇이 다르니, 애 아빠는 애 아빠대로 옆지기 청소 매무새를 못마땅해 하고, 애 엄마는 애 엄마대로 애 아빠 청소 매무새를 마땅찮아 합니다. 그러나, 이모저모 헤아리면서 애 아빠 마음대로 집안 치우기를 하기보다는 애 엄마 마음이 홀가분하도록 집안 치우기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이 다음에 함께 집안 치우기를 할 때에는 제 버릇을 조금씩 고쳐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집안을 쓸고 닦으면서 아이한테 일감 하나 맡길 수 있습니다. 아빠가 빨래를 할 때에 어느새 물소리를 듣고는 후다닥 달려와서 옆에서 빨래하는 시늉을 하며 물놀이를 하는데, 집안을 쓸고 닦을 때에도 아이가 쥘 만한 빗자루나 걸레를 따로 마련해 주면 더 좋겠지요. 그런데 애 아빠 된 사람은 ‘얼른 치우기를 마치고 아빠 일 좀 하자’는 생각으로 혼자 바빠맞습니다. 아이는 엄마 아빠가 집안을 치울 때 무엇을 생각할까요?

 엊저녁 밤마실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옆지기가 한 마디를 합니다. “바쁘면 당신 먼저 집으로 들어가요.” 따로 바쁘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아이가 잘 안 따라온다고 골 부리는 모양새가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무언가 다른 일을 해야 하는 듯 보인 듯합니다. 틀림없이 밀린 일이 많아 집에 돌아가면 아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함께 마실을 나올 때에는 ‘숱한 일이 더 밀리면 식구들이 다 잠든 결에 조용히 하면 되지.’ 하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살아가고자 따로 여느 회사나 모임에 몸을 안 담으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제 걸음 매무새는 ‘아주 바쁜 사람’으로만 보이겠구나 싶어, 걸음을 더 늦추고 옆지기 뒤로 처지며 밤골목 사진을 몇 장 찍습니다. 그런데 아빠를 앞질러 가던 아이가 걸음을 멈추고 아빠를 쳐다보며 “어! 어!” 하고 부릅니다. 아빠 왜 안 오느냐고 부르며 기다립니다. 아빠가 부르든 엄마가 부르든 저 보고픈 것 다 볼 때까지 꼼짝 않기 마련이고 저 가고픈 대로 가려고 발버둥이면서, 아빠가 저 뒤에서 뭔가 꾸물거린다고 부릅니다. 엄마 생각 다르고 아빠 생각 다르며 아이 생각 다릅니다.

 날마다 아이 사진을 서른∼마흔 장 남짓 찍고 있습니다만, 나중에 아이가 커서 이 사진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철든 나이가 될 때에는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합니다. 아이 개인생활을 건드렸다거나 아이 인격과 인권을 쑤석거렸다고 아빠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는 않을는지요. 왜 멋대로 이런 모습 저런 모습 안 가리고 다 찍어 놓았느냐고 성을 내지는 않을는지요. 애 아빠 된 몸으로 아이를 사랑한답시고 아이 사진을 누리사랑방(블로그) 같은 데에 올려놓는다지만, 아이 눈높이와 아이 삶으로 돌아볼 때에 이렇게 하는 일은 아이한테 못할 짓이 될 수 있겠다고 깨닫습니다. 아이는 저 스스로 바라지 않던 ‘제 모습 공개되기’가 사람들 앞에 떡하니 내보이는 셈이니까요.

 이제 고작 두 돌이 채 안 된 아이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저런 생각을 하는 일이 섣부른지 모릅니다. 앞으로 아이가 자란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고 여길 만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은 하루하루 참으로 금세 지나갑니다. 몇 해 사이에 ‘엄마 아빠’라는 낱말 말고도 숱한 말을 재잘재잘 종알종알대는 어린이로 자라날 테고, 동무들하고 사귀며 뛰어논다며 어린이집에 보내 달라 할 터이며, 초중고등학교 다니는 나날(또는 학교를 안 다니며 푸름이를 보내는 나날) 또한 화살과 같으리라 봅니다. 오늘이야 이 집에서 함께 뿌리내리며 살아간다지만, 앞으로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될 때에는 어엿하게 제금을 나며 따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아이 삶자락을 하루에 서른∼마흔 장쯤 담아내는 사진찍기는 마땅히 못 할 뿐 아니라, 한 달에 한두 장 담아내는 사진찍기마저 힘들 수 있습니다. 사진쟁이 삶을 꾸리는 아빠이기에 아이 삶을 사진으로 담는다고 하겠지만, 아이 삶을 사진으로 담는 일이 아빠한테만 좋자고 하는 일인지 아이와 함께 좋자고 하는 일인지 아이한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일인지 제대로 갈피를 잡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저는 저대로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꿈을 품으며 살아가는 목숨 하나이면서 아빠 자리에 서야 하고, 옆지기는 옆지기대로 당신이 사랑하는 뜻을 붙잡으며 살아가는 목숨 하나이면서 엄마 자리에 서야 할 테고, 아이는 아이대로 스스로 사랑하는 길을 찾으며 살아가는 목숨 하나로 서야 하니까요.

 날마다 숱한 집일을 부대끼면서 ‘우리한테 아이가 없었다면?’ 하고 생각할 겨를이 있을 턱이 없으나, 밤에 아이가 잠든 뒤에 옆지기가 때때로 묻곤 합니다. ‘우리한테 아이가 있지 않던 때가 생각나요?’ 하고. ‘우리한테 아이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하고. 졸리고 고단하니 생각마저 귀찮습니다. 그러나 졸리고 고단해서라기보다 ‘아이가 없는 삶’을 꿈조차 꾸지 못합니다. ‘아이가 없는 삶’이었다면 그러한 삶결대로 우리 두 사람이 새로운 길을 다투기도 하고 어깨동무도 하면서 보냈겠으나, 고운 빛살 하나를 살뜰히 어루만지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니, 옆지기는 옆지기 나름대로 어루만졌겠지요. 이 땅에서 남자로 태어나 살도록 짜맞추어진 애 아빠는 목숨 하나가 이루어지는 흐름과 목숨 하나를 느끼는 넋하고 목숨 하나를 애틋하게 사랑하는 눈길이 무엇인지를 늘그막까지 옳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라 봅니다.


 (2) 《시타델의 소년》이라는 푸름이문학


 푸름이문학(청소년문학) 《시타델의 소년》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시타델’이라는 이름이 붙은 깎아지른 묏부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본 산쟁이가 아직 없던 지난날, 이 묏부리 꼭대기에 이르고자 했다가 죽은 사람네 어린 아들이 ‘산에서 부르는 소리’가 아닌 ‘산이 산 그대로 곱게 서 있으면서 보여주는 모습’에 차츰 젖어들면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가까이 다가서는 삶을 보여주는 빼어난 문학작품입니다. 어린이한테든 푸름이한테든 저마다 가슴에 고이 껴안을 꿈이란 어떻게 다스리면 좋고, 이렇게 다스리는 꿈을 어떠한 결로 차근차근 이루어 가는가를 살뜰히 보여주는 문학작품입니다. 저는 이 책 《시타델의 소년》을 덮으며 어린이문학가 이원수 님 작품 《숲속 나라》가 떠올랐습니다. 다루는 줄거리가 다르고 이야기 펼침새가 다르며 나타내려는 넋이 다른 두 작품이지만, 두 작품을 읽을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보여주는 매무새는 매한가지입니다. 바로 ‘꿈’과 ‘사랑’과 ‘사람’과 ‘꽃’과 ‘어깨동무’입니다.

 꿈이란, 아이한테나 어른한테나 앞으로 맞이할 새날을 비롯해 오늘 하루요 어제까지 보낸 나날입니다. 머나먼 앞날에 이루어진다는 꿈이지만 않습니다. 지나온 하루하루가 쌓이면서 차츰 마무를 수 있는 꿈입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가면서 비로소 이루어 내는 꿈입니다.

 사랑이란, 아이와 어른 모두한테 가장 아름다울 마음입니다. 착함도 너그러움도 다소곳함도 따스함도 넉넉함도 바지런함도 올바름도 모두 사랑에서 샘솟습니다.

 사람이란, 아이이든 어른이든 똑같은 목숨이요 아름다운 숨결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도 사람, 어른도 사람입니다. 여덟 살배기도 사람, 여든 살 할매도 사람입니다. 우리들 누구나 사람이고, 우리들이 날마다 차려서 먹는 밥상에 오르는 풀이나 곡식이나 고기 또한 ‘사람과 같은 숨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사람을 생각하는 문학이란, 서로서로 어우러지는 목숨고리를 깨닫도록 이끕니다.

 꽃이란, 아이하고 어른하고 어울려 살아가는 터전입니다. 바로 자연입니다.

 어깨동무란, 아이가 어른하고 같다는 소리, 곧 서로 평등하다는 소리입니다. 평등은 평화와 이어지고 평화는 통일하고 끈이 닿습니다. 통일은 민주하고 한동아리이고, 민주는 자유와 벗삼습니다.

 《시타델의 소년》이라는 작품은 시타델이라는 이름이 붙은 묏봉우리 하나를 바라보는 아이와 어른한테 꿈과 사랑과 사람과 꽃과 어깨동무는 어떻게 얽히고 설키면서 곱게 빛을 내는가 들려줍니다. 《숲속 나라》라는 작품은 아이들이 이루어 가는 ‘숲속 나라’와 이 숲속 나라를 망가뜨리려는 어른들을 견주어 보여주면서 허물과 스스럼이 없이 이룰 참답고 아름다운 꿈과 사랑과 사람과 꽃과 어깨동무는 어느 나라에서 어떠한 땀방울로 일굴 수 있는지 들려줍니다.

 멋진 삶이란 누가 언제 어떻게 꾸리는지를 보여줍니다. 멋진 사람이란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알려줍니다. 멋진 길은 어느 곳에 어떻게 마련되어 있는가를 밝히고 일러 줍니다.


 (3) 하나하나 곱새기며 읽기


 푸름이문학 《시타델의 소년》은 묏부리를 온몸으로 껴안는 산쟁이들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야기감은 묏부리와 산쟁이입니다. 그러나 묏부리와 산쟁이를 빌어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밑바탕에 무엇이 있는가를 차근차근 되새겨 보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훌륭한 문학에서도 비슷할 텐데, 이야기감을 무엇으로 삼느냐는 그리 눈여겨볼 대목이 아니고, 이야기틀을 어떻게 다루느냐 또한 그다지 살펴볼 대목이 아닙니다. 판타지여야 더 훌륭하다거나 생활문학이라야 더 알차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곰곰이 돌아볼 대목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이고, 찬찬히 되새길 대목은 ‘어떻게 살아가느냐’입니다.

 좋은 문학이라면 바로 이 두 가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와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짚어내는 매무새가 알차면서 훌륭하다고 느낍니다. 《시타델의 소년》을 읽으며 가슴 깊이 뭉클하다고 느낀 글월을 한 줄 두 줄 되읽어 봅니다. (4343.2.13.흙.ㅎㄲㅅㄱ)


[12, 113쪽] 루디는 골짜기를 따라 솟구친 웅장한 봉우리들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광경을 호텔 주방의 창문으로 보았다 … 루디는 마을 입구에 도착했고, 삼가 분 뒤에는 시냇물을 가로질러 맞은편 길을 따라 걸어갔다. 루디는 조명이 필요없었다. 별빛으로 충분했다. 풀밭의 거무스름한 비탈 사이로 어스름한 그림자가 보였다.

[15, 35, 90, 97쪽] 사람들은 산에 오르는 게 아니라 산을 정복했다 … “외삼촌은 아빠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럼. 프란츠 러너 씨는 네 아빠를 기억하지. 모두들 네 아빠를 기억해. 사람들은 네 아빠를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한편으론 네 아빠가 미쳤다고 생각해.” 캡틴 윈터는 소리를 낮춰 웃었다. “이제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그 사람들 생각이 맞을지도 몰라.” … “하지만……, 그걸 메면 균형을 잃을 텐데요.” “그렇겠지. 이걸 메면 균형을 잃겠지. 실제 산행이라면 어떤 게 나을까? 균형을 조금 잃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니면 춥거나 배가 고파 죽는 게 낫겠어?” … “이제 알겠니? 내가 왜 이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지? 네 아빠는 산이 너무 가팔라서 죽은 게 아니야. 네 아빠는 정복욕이나 명예욕 때문에 죽은 것도 아니었어. 네 아빠는 그 능선에서 산으로 오르내릴 정도의 힘은 남아 있었어. 하지만 자기를 고용한 에드워드 경을 버려 두고 갈 수 없었던 거야. 네 아빠는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한 거야. 시타델 산의 정상에 나부껴야 할 네 아빠의 빨간 셔츠가 어디서 발견되었는지 아니? 에드워드 스티븐슨 경한테서야. 네 아빠는 얼어죽어 가면서 셔츠를 벗어 스티븐슨 경의 몸을 덥혔지.”

[19∼20, 101쪽] 루디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루디는 빙하로 올라가서 살펴보고 연구하고 측정하는 일을 계속했다. 루디는 이 일을 하기 위해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교회 예배를 빼먹기도 했다. 지금은 호텔 주방에서 도망쳐 나왔다. 루디가 이런 행동을 할 때마다 엄마는 눈물로 호소했고, 외삼촌 프란츠는 모진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루디는 신경 쓰지 않았다 … 루디는 언제 두려움을 떨쳤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건 테오 아저씨가 암벽 아래에 매달린 채 어떻게든 올라오려고 발버둥을 칠 때였다. 그리고 테오 아저씨가 불평 한 마디 없이 자기 생명을 루디한테 맡겼을 때였다.

[37, 63, 219쪽] “젊을 때는 꿈을 꿔야 해.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그 꿈을 잊지 말아야 하지.” … 테오 아저씨가 루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서 가! 이 개구쟁이야! 네 아빠의 아들답게 산을 타지 못한다면 힘들게 돌아올 필요도 없어.” … “한 가지 더. 문제에 부딪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는 ‘아빠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네 자신에게 물어 봐.”

[171쪽] 루디는 베낭을 둘러멘 뒤 등반을 시작했다. 루디는 혼자서 광대한 침묵을 뚫고 등반했다. 하지만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제 루디는 하느님 아버지와 진짜 아빠와 함께 산을 오르고 있었다 … 루디는 감정이 복받쳤다. 예전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미친 듯이 기뻐하지도, 요들을 부르지도, 승리에 들떠 고함을 지르고 싶지도 않았다. 더 낮은 산을 정복하고 기뻐 날뛰던 때와는 달랐다. 그러기에는 너무 깊고 강력한 감정이었다. 루디가 마침내 도착한 높고 신비스러운 장소에서 고함을 지르는 건 불경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311쪽] “올라가. 목표를 향해. 승리를 향해. 쿠르탈 마을 사람들이 환호하며 네 이름을 부를 거야. 스위스가 네게 축하의 인사를 건넬 거야. 영웅이 되는 거야. 시타델 산을 정복한 영웅 말이야. 네 아빠가 못 이룬 꿈을 이루는 거야.” 아빠가 못 이룬 꿈을 이룬다. 루디가 눈길을 떨구었다. 시타델 산의 정상은 사라졌다. 꿈도 사라졌다. 무감각한 꿈의 세계가 서서히 걷히며 현실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현실의 세계는 산에서 바라보는 하늘만큼이나 깊고, 차갑고, 깨끗했다. 루디는 고개를 돌려 삭소를 쳐다본 뒤,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팔걸이 붕대를 만들 거예요. 그러고 나서 함께 내려가는 거예요.” 루디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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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아이들 (반양장)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133 ― ‘서울에 핵발전소를!’ 하고 외치는 마음
 : 히로세 다카시, 《체르노빌의 아이들》



- 책이름 : 체르노빌의 아이들
- 글 : 히로세 다카시
- 옮긴이 : 육후연
- 펴낸곳 : 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06.9.6.)
- 책값 : 8000원



 (1) 어린이책을 안 읽는 어른


 아파트에 살지 않을 뿐더러 아파트에서 살 생각이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동네 골목을 다닌다든지 이웃 동네를 다닌다든지 하다 보면, 자그마한 집이 송두리째 내몰리거나 사라진 다음 아파트가 들어서는 모습을 봅니다. 큰 도시이든 작은 도시이든 온통 아파트밭이고, 깊이깊이 들어가는 시골이 아니고서야 아파트 자락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 나라 터전이라고 느낍니다.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많이 살고 있으며, 새 아파트는 꾸준히 올라섭니다. 아파트마다 이름이 다르고, 새롭고 더 멋스럽다고 하는 이름이 나날이 늘어납니다. 환경운동 하는 분들이나 환경정책 내놓는 공무원이나 우리 말보다는 영어를 조금 더 좋아해서 ‘에코’라는 말마디가 나날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 ‘에코’를 어디까지 쓰고 있는가를 헤아려 보려고 누리그물에서 찾아보니 에코하우스, 에코샵, 에코뮤지엄, 에코프랜즈가 줄줄이 나옵니다. 그리고 ‘에코메트로’가 나옵니다. 지하철공사가 ‘지하철’이라는 낱말보다 ‘메트로’를 좋아하고 있기에 철도공사가 무슨 환경정책을 내놓았나 싶어 더 들어가 살펴봅니다.

 저야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라 몰랐다 할 테고, 아는 분들은 익히 알고 있었을 텐데, 에코메트로란 아파트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에코메트로라는 아파트에는 ‘에코 영어마을’이 있고 ‘에코파크’가 있으며 ‘에코브릿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세상하고 담을 쌓으며 살아가는 내 하루하루는 아닐 텐데, 세상사람들이 쓰는 말이 너무 어렵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즐기는 말이 더없이 골치아픕니다. 세상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말이 몹시 어지럽습니다. 우리는 수수하게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어떤 물결을 타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꾸밈없이 어깨동무하는 삶이란 머나먼 이야기요 까마득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는지요.

 2000년대를 지나 2010년대를 맞이한 요즈음은 책마을에서 어린이책 목소리가 조금 더 높습니다. 2020년을 맞이하면 어린이책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리라 봅니다. 그런데, 어린이책 목소리가 높아지는 다른 한켠에서 보면 푸름이책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사랑한다는 분들이 ‘만들거나 읽히거나 쓰거나 옮기는’ 책은 ‘갓난아기부터 초등학교 6학년’ 사이에서 맴돕니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사이에서 읽힐 푸름이책은 몇몇 사람들만 만들거나 읽히거나 쓰거나 옮깁니다. 더욱이, 제도권학교에 깃들지 않는 푸름이를 헤아리는 책은 훨씬 적습니다. 대학생이 되는 아이들한테 맞춘 책은 꽤 있으나, 대학생이 되지 않으며 세상과 부대끼는 젊은이한테 맞춘 책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어린이책 갈래를 놓고 동시와 동화, 또 판타지와 생활동화, 또 어린이글과 무엇무엇 들을 자잘하게 가르기도 하며, 이제는 웬만큼 눈높이를 다진 어린이문학 비평을 찾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세상 여느 흐름으로는 ‘어린이문학 비평’은 ‘어른문학 비평’에 견주어 낮은 자리이고, ‘어린이문학 이야기나 창작’은 ‘어른문학 이야기나 창작’과 견주어 눈높이가 낮은 듯 여깁니다. 소설책을 읽지 않는다고 소설책 내는 출판사 편집자나 영업자가 되지 말란 법이 없으나, 어린이책을 즐겨읽지 않으며 어린이책 내는 출판사 편집자와 영업자가 많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기까지 어린이책 하나 차근차근 살피는 어른이 드물고, 아이한테 어린이책을 읽히려고 할 때에도 스스로 먼저 깊이깊이 읽으면서 옳고 바르고 알맞고 즐겁고 따스하고 사랑스레 골라서 읽히는 어른은 더욱 드뭅니다. 따지고 보면, 초등학교 교사 가운데 ‘어린이책을 즐겁게 읽으며 넉넉히 안다’고 할 만한 분이 얼마나 있습니까. 중고등학교 교사 가운데 ‘청소년책을 신나게 읽으며 두루두루 안다’고 할 만한 분이 얼마나 있는지요.

 저부터 어린이일 때에 마땅한 어린이책을 읽지 못하고 컸던 일을 깨달은 나이는 스물세 살 무렵입니다. 어릴 적에 읽지 못한 좋은 어린이책을 읽자고 다짐한 나이는 스물너덧입니다. 아름답게 여민 어린이책을 스물을 훌쩍 넘긴 나이에 비로소 손에 쥐면서 ‘어린이책을 어린이일 때에 읽지 못하면 마음밭이 이렇게 가난할 수밖에 없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어린이일 때에 어린이책을 읽지 못했다면 어른이 된 다음에라도 읽어야 하는데, 어른이 되었으니 어린이책을 안 읽는다고 하면 ‘어른으로 살면서도 어른다움을 떠올리거나 추스르기 어렵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어린이책은 어린이가 읽는 책입니다. 그리고 어린이책은 어린이부터 읽는 책입니다. 또한 어린이책은 어린이를 비롯한 누구나 읽는 책입니다. 어린이책은 누구보다도 ‘어린이 스스로 읽을 수 있도록’ 눈높이를 맞추면서 ‘어린이를 널리 아우르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거이 읽을 수 있게끔’ 일구어 낸 문화요 선물입니다.


 (2)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


 어린이책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읽었습니다. 2006년 가을에 나온 책을 책상맡에 오래오래 올려놓고 지내면서 야금야금 읽었습니다. 히로세 다카시 님이 ‘아줌마다운 힘’으로 원자력발전소 문제를 깊이 파헤치면서 부드럽고 포근하게 감싸안은 어린이문학인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환경사랑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마땅히 가야 하는 바른 길을 마땅히 안 가면서 마땅하게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한테 마땅한 사랑과 믿음이란 무엇이고, 마땅한 삶과 사람이란 어떠한가를 따스하고 넉넉하게 보여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그런데 번역이 너무 얄궂고 엉성해서, 이 반갑고 좋은 책을 오래오래 묵혀 두었습니다. 아니, 처음 반 해 동안은 엉성한 번역을 한 줄 한 줄 모조리 고쳐쓰면서 읽었는데, 이렇게 반 해 동안 더디더디 글다듬기를 하며 읽자니 힘들어서 두 손을 들었습니다. 2004년에 우리 말로 나온 《잃어버린 숲》(레이첼 카슨)을 읽을 때에도 너무 어설픈 번역 때문에 도무지 책을 읽을 수 없어 한 줄 한 줄 글다듬기를 하며 읽은 적이 있습니다.

 번역이란 나라밖 말을 잘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우리 나라 번역가들은 나라밖 말은 훌륭히 잘할는지 몰라도 우리 말은 너무도 못합니다. 나라밖 문화와 삶터와 이야기도 깊고 넓게 헤아리는 한편, 우리 문화와 삶터와 이야기를 깊고 넓게 헤아려야 하는데, 슬기롭고 따스하게 어우르면서 번역길을 가는 분은 생각 밖으로 많지 않습니다. 더욱이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어른책이 아닌 어린이책입니다. 《잃어버린 숲》이야 처음부터 어른책으로 나왔기에, 웬만한 어른들은 어설픈 번역을 읽으면서도 글쓴이 마음을 어느 만큼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설픈 번역으로 어린이책을 옮겨내면 아이들은 어찌해야 하지요? 아이들 눈높이에 걸맞지 않을 뿐 아니라, 아이들 마음밭을 일그러뜨릴 걱정이 있는 낱말과 말투로 번역을 하면 어찌하지요? 쉽고 깨끗한 말을 골라서 쓴다는 테두리로 되는 번역이 아닙니다. 쉽고 깨끗한 말이란 밑바탕입니다. 알맞고 올바르며 슬기로운 말을 찾아야 합니다. 창작을 하는 분들이 글 한 줄을 적바림하면서 들인 땀과 품과 마음과 사랑을, 번역을 하는 분들 또한 한 줄 두 줄 옮겨내면서 땀과 품과 마음과 사랑을 바쳐야 합니다. 이는 책느낌글을 쓰는 비평가한테도 마찬가지인 대목입니다. 창작하는 사람 마음이 되어 번역을 하고, 창작하는 사람 매무새 그대로 비평을 해야 합니다.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쓴 히로세 다카시 님이 ‘아줌마다운 힘’으로 이 책을 써냈다고 적었습니다만, ‘아줌마다운 힘’이란 ‘아이 엄마로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보여주는 힘’입니다. 오늘날 우리 터전에서 ‘아줌마’란 말마디는 얄궂거나 나쁜 쪽으로 흔히 쓰이지만, ‘아줌마다운’ 삶이란 더없이 아름답고 싱그러운 삶입니다. ‘어머니다운’ 삶 또한 매한가지입니다. 목숨 하나 보듬으며 지낸 삶에다가 이 목숨 하나를 기나긴 나날에 걸쳐 키워내는 보람이 어머니 삶입니다. 아줌마 삶은 할머니 삶으로 이어지기 앞서 아이 스스로 무럭무럭 크면서 또다른 어른이 되면서 새로 아이를 낳아 키우도록 이끌어 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힘이란 바로 목숨을 아끼는 삶이고, 목숨을 사랑하는 삶이며, 목숨을 지키는 삶입니다.

 이오덕 선생님처럼 ‘우리 글 바로쓰기’를 알뜰살뜰 잘 이루어내야만 좋은 문학이나 창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글 바로쓰기’란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사람한테 밑바탕입니다. 때로는 잘못 쓰거나 아직 잘 몰라서 어설피 쓰는 대목이 있을 수 있을 터이나, 말이 말다웁도록 가다듬고 글이 글다웁도록 보듬는 일이란 창작하거나 번역하는 사람한테는 밑바탕입니다. 이 밑바탕이 되면서 작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밑바탕으로 히로세 다카시라고 하는 아줌마 한 사람이 어떤 넋과 몸가짐으로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이 땅 아이들하고 어른들한테 선물로 베풀어 놓았는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는 분들은 익히 알 텐데, 원자력발전소이든 화력발전소이든 전기를 만들어 내면서 환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우리가 쓰는 전기를 얻어내자면 그만큼 환경을 망가뜨려야 합니다. 책 하나를 만들 때에도 나무를 베어야 하는데, 나무베기로 그치지 않고 물과 기름을 많이 써야 하며, 벤 나무를 실어나르고 종이공장을 돌리고 또 무엇무엇을 하는 데에 드는 자원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를 하는 공장을 돌리자면 마땅하게도 전기를 써야 합니다. 다 만든 책은 책방에 놓이기까지 짐차에 실려 가는데, 짐차를 만들 때에도 적잖은 자원과 전기를 썼겠지요. 책방에 놓인 다음에도 전깃불을 켜 놓고 우리들을 기다리고요.

 소련 체르노빌에서 원자력발전소가 터졌고, 미국 드리마일에서 원자력발전소가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숫자로 치면 몇 안 된다 할 텐데, 몇 안 되는 원자력발전소인데 이 몇 가지만으로도 온누리 사람들이 벌벌 떱니다. 화력발전소가 터졌을 때에도 벌벌 떨 테고, 태안 앞바다에 기름이 흘러넘쳤어도 소름이 돋지만, 원자력발전소 하나 터지거나 말썽나는 일에 견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체르노빌의 아이들》 맨 끝쪽에 글쓴이가 밝히듯, “도쿄에 핵발전소를!”이거나 “뉴욕에 핵발전소를!”이거나 “서울에 핵발전소를!”이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전기를 가장 많이 쓰는 데가 어디이겠습니까. 바로 서울입니다. 서울에 사는 부자들만 전기를 쓸까요? 서울에 사는 가난뱅이들은 전기 없이 살 수 있을까요?

 발전소를 지어야 하면 어떠한 발전소를 지어야 하는지부터, 전기를 쓰며 살아가는 우리 살림살이는 어떻게 가누어야 하는지를 곰곰이 돌아보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터전인 우리 자그마한 동네부터 ‘지금 이대로 꾸리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거나 좋은가?’를 되새기자고 하는 이야기책 《체르노빌의 아이들》입니다. 아무런 주의주장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넌지시 푸근한 이야기로 이와 같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체르노빌의 아이들》입니다. 누구보다도 아이들이 함께 깨닫고 아이들로 살아가는 그 나이부터 우리 삶과 목숨과 사랑을 싱그럽고 곱게 되새기면서 푸른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라는 어린이문학 《체르노빌의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우리 아이가 어느 만큼 큰 다음에 읽히고 싶고, 아이한테 읽히고 싶은 마음에서 한 줄 한 줄 글다듬기를 하면서 읽었습니다. 다만, 저도 아직 글다듬기를 훌륭히 해내지는 못하기 때문에, 앞으로 더 힘껏 애쓰고 마음을 쏟아서, 아이가 열 살이 될 때쯤에는 빈 공책에 이 책을 손글씨로 하나하나 새로 옮겨서 적어 놓고 싶습니다.


 (3) 아쉬운 대로 되읽는 책


 우리 스스로 좀더 나은 삶을 바란다면, 우리 스스로 좀더 나은 말과 글을 주고받을 수 있게끔 애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한결 나은 삶을 꿈꾼다면, 우리 스스로 한결 나은 말과 글을 나눌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번역은 여러모로 아쉽지만, 아쉽다고 느끼는 번역이라면 아이들 앞에서 이 책을 ‘어떻게 새로 읽으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며 읽을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더 좋은 마음으로 더 오래오래 즐기고 싶어서, 밑줄을 그으며 읽은 대목을 하나하나 적어 봅니다. (4343.1.25.달.ㅎㄲㅅㄱ)


[12쪽] 창밖으로 보이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점점 불길이 거세져 일 미터가량 되는 높이의 불꽃이 상공에 커다란 원호를 그리며 계속 세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이게 우리가 믿어 왔던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발전소였단 말인가요?”

[22쪽] 열쇠를 꽂고 시동을 건 안드레이는 가속페달을 밟으려다 문득 땅바닥을 훑어보았다. 땅에 떨어진 새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새는 꿈틀거리며 죽어 가고 있었다. 이반과 이네사가 이 공기 속을 그냥 걸어나온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을 날아다녔을 새가 죽어 가는 것을 보면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35쪽]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 본 지가 얼마만인가. 이반이 어렸을 때에는 잠들어 있는 얼굴을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곤 했는데, 안드레이는 어리석게도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자식을 끌어안고서 행복을 맛보고 있었다.

[52쪽] “엄마!” 이반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타냐가 모르겠다고 하자, 이반은 말을 이었다. “혼자 죽는 것은 괜찮아요. 하지만 아빠와 엄마, 그리고 이네사도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어요. 그런데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있다니…….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무서워요. 엄마는요? 어떻게 해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우린 어디로 가는 거죠? 폭발 이후로 내 방에 있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아빠도 없고, 학교도 없어요. 전부 사라졌어요. 강해진다는 것,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도 좋은 일이겠죠. 그러나 우습지 않아요? 숨만 붙어 있는 것이 새로운 인생이라니, 그건 사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는 만약 아빠가 …….”

[82, 83쪽] 농민들은 스트레리초프라는 사람을 내세워 군인들에게 격렬히 항의하고 있었다. 그들은 할 말이 많았다. 원자로가 폭발했기 때문에 대피하라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과 소는 어떡하란 말인가? 온 정성을 기울여 키운 이 가축들은 농민들에겐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군인들이 가축들을 모두 버려두고 떠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그것도 총구를 들이대면서 말이다. 밭은 또 어떡하란 말인가? 마음속으로 ‘올해는 제발 알차게 열매 맺기를’ 기도하면서 불알이 얼어붙는 추위를 무릅쓰고 땅을 갈고, 또 해가 뜨기도 전에 들로 나가 종자를 뿌리고 비료를 주곤 했던 그 밭을 어떻게 두고 떠나란 말인가? 농민들에게 소와 양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었다. 밭작물도 단순한 식물이 아니었다. 스트레리초프와 농민들에게는 생명이자 삶 자체였던 것이다 … 군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의도대로 군중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군인들에게는 최고 능력이자 군인된 보람이었던 것이다. 차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몇몇 사람들이 비난하기 시작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농민들의 저항은 무산되었고, 별 수 없이 군인들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114∼115쪽] 사실상, 의사나 간호사보다 아이들의 공포심이 백 배는 더 컸다. 이 병원으로 오기 전에 어떤 아이는 동물의 시체를 밟았고, 어떤 아이는 눈앞에서 부모가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았다. 또 농민들이 강제로 피난하는 모습도 보았고, 검문소에서는 잔인하게도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한꺼번에 이런 끔찍한 일들을 겪게 된 아이들은 이제 마지막으로 감옥 같은 병원 안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17쪽] 이네사의 입에서 쥐어짜는 듯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와 병실 안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이네사는 아무리 힘을 주어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감독관은 탈진 상태로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이네사를 보고 있으면서도 상태가 어떤지 가까이 다가와 살펴보지 않았다. 병실 안에는 이네사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불꽃이 꺼져 가고 있는 아이들만이 누워 있었다. 아이들은 아직 죽고 싶지 않다고 기도했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자신의 몸 위에 드리웠음을 느끼고 있었다.

[154, 157쪽] “저도 각오는 돼 있어요.” “어리석은 말은 하지 마라.” 마르쿠츠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몸이 좀 이상해요. 이런 느낌은 처음이에요. 제게 아무것도 감출 필요 없어요, 선생님. 이젠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손도 발도 전혀 말을 듣지 않고, 몸이 제 몸 같지 않아요. 괜찮아요, 이렇게 약한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한 번 똑똑히 봐두고 싶었어요. 인간이 죽을 때는 이렇게 되는군요. 이젠 각오가 돼 있어요. 아파서 괴로워할 때는 그래도 아직 살아 있다고 느꼈었는데 …….” … 이반의 시체는 거센 바람만이 불고 있는 황야에 매장되었다. 그곳에는 꽃다발도, 눈물을 흘려 주는 사람도 없었다.

[160쪽] 타냐 역시 아무것도 몰랐다. 남편 안드레이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했다. 타냐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얼마나 무서운 직업이었단 말인가. 자신은 왜 좀더 일찍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이렇게 끝날 줄 미리 알았어야 했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반과 아네사를 지금과 같은 불행한 상황으로 이끈 것이 자신들이라는 생각까지 이르자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글쓴이 말/165∼168쪽] 그제서야 나는 ‘내 생각이 틀림없다’ 확신하고, 팸플릿을 만들어 번화가에서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팸플릿을 받아든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스리마일섬에서 그렇게 큰 사고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원자력 발전소를 염려하지 않았다. 때문에 ‘양식 있는 인간이 일본에는 이다지도 없는가’ 낙심하면서 돌아오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 이 책은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될지도 모를 현지에서는 관심과 함께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전히 대도시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없었다. 물론 하루하루 일상에 쫓기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장의 생계활동과 큰 상관없어 보이는 핵의 위험성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는 건 쉬운 일이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엔 에너지 문제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대도시 문제인데, 정작 대도시 사람들이 그런 것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도쿄에 핵발전소를!》이라는 책이다. 제아무리 대안 부재를 내세우며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성을 논하더라도, 그런 핵발전소를 도쿄에 세울 수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다 …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란 것도 알고 보면 원자ㆍ수소폭탄 산업을 경제적으로 성립시키려는 상당히 무리한 방법일 뿐이다 … 나는 현재의 어른들이 정말로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길 바란다 … 절망적인 상황을 모르고는 참 희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의 어른들이 주는 허무감은 퇴폐를 향해 간다. “어른들을 본받지 마라”는 것은 그러한 무의미한 허무와 냉소를 거절하고, 현실을 직시하며 새 희망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 원자력 발전소의 물질적 피해 등은 수치로 나타내면 그뿐이지만, 죽는 것은 어디까지나 단 하나뿐인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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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의 의미 - 어느 재일 조선인 소년의 성장 이야기 카르페디엠 14
고사명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16 ― 아픔과 슬픔이 함께 있어 좋은 책
 : 고사명, 《산다는 것의 의미》



- 책이름 : 산다는 것의 의미
- 글 : 고사명
- 옮긴이 : 김욱
- 펴낸곳 : 양철북 (2007.7.2.)
- 책값 : 8700원



 (1) 좋아하는 책을 사서 읽고 나누며 살기


 제가 더없이 사랑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저한테 좋다는 느낌이 드는 책을 찾아나서고, 두 손 두 다리 온몸이 고단하도록 책을 살핀 다음, 좋아하는 책을 쥐어들어 기쁘게 울고 웃으며 읽고, 이렇게 읽은 책을 옆지기한테 건넨다든지 느낌글을 쓰고 나서, 둘레에 건네주거나 느낌글을 쓰던 얼거리 그대로 저 스스로 살아내는 일입니다. 좋아하는 책을 찾아나서서 사고 읽고 나누면서 살아가는 일이란 저한테 둘도 없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일입니다.

 요 며칠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이라는 일본 만화 하나를 보면서 이 같은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이 만화책은 200쪽이 채 안 되는 작은 판이요 2009년에 나왔는데 8000원이나 합니다. 요사이 만화책에서 8000원이란 값이란, ‘애장판’이나 ‘소장판’이라는 이름을 달고 400∼500쪽은 되는 녀석한테나 붙이는 값입니다. 여느 만화책 한 권은 요사이(2009년 첫머리∼2010년 첫머리)에 4200원 합니다. 그러니까, 여느 만화책 두 권 값이요 딱히 애장판이나 소장판도 아니면서 떡하니 8000원입니다. 아무래도 대본소판 만화가 아니라 이러한 값을 붙였다 할 텐데, 그래도 참 비쌉니다. 비싸기 때문에 한참 망설였는데, 책 뒤쪽에 ‘카마쿠라의 바닷가 마을을 무대로 펼쳐지는 봄볕처럼 따스하고 청량한, 네 자매의 속 깊은 이야기들’이라는 소개글이 적혀 있어서 골랐습니다. 책값으로 8000원을 치르고 나서 ‘만화가 그저 그렇다’면 이 돈을 고스란히 버릴 뿐 아니라, 책을 읽던 시간마저 버리는 셈이지만, ‘카마쿠라 바닷가 마을’이라는 말마디와 ‘네 자매 속 깊은 이야기’에 이끌렸습니다. 우리로 치면 ‘보성 바닷가 마을’이나 ‘삼척 바닷가 마을’쯤 되는 터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인 셈이요, 만화책에서 너무도 뻔하게 나오는 사랑타령과 판타지싸움판타령에서 훌쩍 벗어나 있거든요.

 만화책을 펼쳐 읽으며 꽤 괜찮다고 생각하고 느끼고 받아들입니다. 웃어야 할 대목은 신나게 웃도록 그림을 그리고, 울어야 할 대목은 북받쳐 울 수 있게끔 그림을 그렸습니다. 조그마한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마을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네 사람 애틋한 이야기를 담아낸 줄거리를 곱씹으면서, ‘왜 우리 나라에는 이렇게도 넓고 갖가지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도 늘 뻔하고 너절한 이야기에 그치는 줄거리밖에 못 만날까’ 싶어 아쉽습니다. 무엇이든 서울로 모이고, 어떤 책이건 영화이건 뭣이건 서울을 다룹니다. 서울에서 서울 이야기를 쓰고 서울에서 사고팔립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오늘날 우리네 문화와 사회와 정치는 온통 ‘서울에서 생산하고 서울에서 소비한다’입니다. 서울에서 전철로 한 시간만 달려도 인천골목길이 있지만, 인천골목길을 놓고 ‘골목길이다!’ 하고 여기는 문화예술인이든 여느 사람이든 매우 드뭅니다. 부산사람 스스로 부산골목길을 얼마나 곰삭이고 느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강릉에 사는 아끼는 동생은 강릉골목길이 참 예쁘다며 꼭 보러 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강릉골목길을 이야기한 서울사람은 아직 못 만났습니다. 목포골목길이든 고흥골목길이든 고령골목길이든 진주골목길이든 영월골목길이든 화천골목길이든 …… 도시나 시가지를 이룬 곳에는 어김없이 있는 골목길, 논밭을 이룬 곳에는 반드시 있는 고샅길, 이들 자동차 아닌 사람들이 한복판에 서면서 빚어내는 살가운 삶마디를 알알이 느끼며 나누려는 움직임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옆지기 부모님이 살고 있는 일산에 나들이를 가면 으레 여러 식구가 둘러앉아 연속극을 봅니다. 저는 이때에 비로소 연속극을 구경합니다. 여러 시간에 걸쳐 여러 가지 연속극을 죽 보노라면 늘 뻔하게 맺는 줄거리로구나 싶은 한편, 또 하나 늘 뻔하다 싶은 모습을 찾아봅니다. 바로, 어떠한 연속극이든 ‘역사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 아니라 한다면 모조리 서울에서만 찍습니다. 역사 이야기도 으레 궁중 이야기를 다룰 때에는 서울이 무대입니다. 원주에서 펼쳐지는 연속극, 청주에서 이루어지는 연속극, 문경에서 펼쳐지는 연속극, 남원에서 이루어지는 연속극은 찾아보지 못합니다. 지역에서 지역사람이 주인공이 되어 이루어내고 전국사람이 함께 즐기는 연속극을 찍으려 하는 몸짓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 곳곳 다 다른 터전에서 다 다른 모양새와 넋으로 살아내면서 부대끼는 이야기를 한 올 두 올 알차게 여미면서 서로 반갑게 껴안으려는 움직임은 도무지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좋아한다는 책을 내놓는 출판사는 하나같이 서울에 있습니다. 이제는 땅값이 싼 경기도 파주로도 많이 옮겨 갔다지만(돈이 있는 출판사만 들어갔지만), 모두들 서울에서 돌고 돕니다. 서울에 있는 작가들이 서울에 있는 출판사에서 책을 내어 서울에 있는 책방에서 팔리고 서울에 있는 언론사에서 기사로 다루며 서울에 있는 헌책방으로 흘러든다고 할까요. 하기는, 인천에서 살고 있는 저부터 인천에서는 좀더 넓고 깊게 책을 만나기 힘들어 바지런히 서울마실을 해야 합니다.

 며칠 앞서 서울 용산에 자리한 헌책방 〈뿌리서점〉에서 “20세기 미술의 발견”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묶음책 가운데 하나인 《코코슈카》를 장만했습니다. 코코슈카라는 그림쟁이는 ‘오스카 코코슈카’입니다. 이분은 당신 그림에 ‘OK’라는 이름을 남겨 놓았습니다. 좋은 그림쟁이 좋은 그림을 보면서 좋은 느낌을 선물받아 참으로 좋다고 느끼는 가운데, ‘OK’라는 이름 때문에 한참 웃었습니다. 그저 ‘OK’라서 웃었습니다. 비아냥거리는 뜻이 아니라 재미있어서 웃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알파벳으로는 ‘OK’이지만, 우리 말로는 ‘옥’이겠네 싶어 또 한 번 웃었습니다. 데굴데굴 구르는 나뭇잎을 보며 웃을 때가 있듯, 그냥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저하고 옆지기가 한참 웃으니, 옆에서 지켜보던 아기도 함께 웃습니다.

 지난 2009년 12월 31일에 맞추어 사진책 《윤미네 집》이 나왔습니다. 이 책에 깃들인 사진을 찍은 전몽각 님은 몇 해 앞서 돌아가셨습니다. ‘윤미네 집’에서는 아버지이자 남편 제사를 1월 1일에 함께 지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삿날 하루 앞서 책이 나왔고, ‘윤미네 집’에서는 새해 첫날 차례상을 올리면서 《윤미네 집》을 두 권 함께 올려놓으며 기쁨과 슬픔을 나란히 느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홀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차례상이든 제사상이든 먹을거리만 올릴 수 있지 않구나. 차례상이든 제사상이든 우리 스스로 무엇을 기리고 아끼고 나누며 함께하느냐를 돌아볼 수 있구나. 다가오는 설에 우리 식구가 아무 데에도 갈 수 없다면 우리 깜냥껏 차례상을 차리고 지난해에 내가 써낸 책 몇 가지를 올려놓으며 옛어른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올려도 되겠구나.’

 제가 써낸 책을 제사상에 올릴 수 있습니다. 제가 읽고 그지없이 좋았던 책을 제사상에 올릴 수 있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 가운데 참 마음에 드는 녀석을 제사상에 올릴 수 있습니다. 격식이나 예절이라고 하지만, 격식과 예절에 앞서 마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격식이든 예절이든 맨 처음에는 마음을 바치거나 나누면서 사랑하려는 흐름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두 눈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아닌 가슴팍으로 느끼는 마음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옷차림이나 생김새가 아닌 맨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을 하나하나 돌아볼 때에, 이 책들은 틀림없이 ‘좋은 줄거리’이거나 ‘훌륭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줄거리와 훌륭한 이야기를 넘어서면서 ‘따뜻한 마음’이요 ‘넉넉한 사랑’이었으리라 봅니다. 대단하지 못한 줄거리라 할지라도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으면 저한테는 좋은 책입니다. 훌륭하지 못하다고들 일컫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넉넉한 사랑이 실려 있으면 저한테는 좋은 책입니다. 저는 제 두 눈이 아닌 제 마음으로 읽는 책이 좋습니다. 아니, 저는 열여섯 살 푸름이였을 때나 스물여섯 살 젊은이였을 때나 서른여섯 살 애 아빠일 때나 한결같이 제 마음을 톡톡 두드리면서 살포시 어루만지다가는 와락 껴안는 책이 좋습니다. 머리에 담는 지식이 가득한 책은 그저 자료로 책꽂이에 꽂아 놓습니다. 마음으로 나누는 사랑과 믿음이 어우러진 책이라야 비로소 여러 해에 걸쳐 제 책상맡에 올려놓고 수도 없이 되풀이하며 읽고 삭입니다. 새롭게 읽고 삭이기를 거듭합니다.


 (2)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이란


 《산다는 것의 의미》는 오래된 책입니다. 우리 말로 옮겨진 지는 세 해이지만, 일본에서는 퍽 예전에 나왔습니다. 한겨레이지만 한겨레가 살아가는 남녘에서든 북녘에서든 뿌리내리지 못하고 일본에서 뿌리내린 한 사람이 한국말이 아닌 일본말로 적바림한 책입니다. 한국사람도 조선사람도 아니요 일본사람 또한 아닌 떠돌이 같은 넋이 일본땅에서 부딪히고 아파하고 슬퍼하면서 괴로워 뒹굴던 이야기를 아주 차분하게 펼쳐내는 책입니다.

 아무래도 모든 아픔과 슬픔을 딛고 섰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아픔과 슬픔을 겪어야 했으며 이 책을 써내는 그때에도 아픔과 슬픔이 늘 길동무처럼 옆에 나란히 있기 때문일 테지요. 아픔과 슬픔에 짓눌린 사람이 아니니까, 아픔과 슬픔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니까, 아픔과 슬픔이 우리 삶에서 좋음과 기쁨처럼 늘 곁에 있는 벗임을 깨달았다면 아주 차분하게 나 스스로 걸어온 길을 적바림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삶이란 눈물과 웃음이 함께 있는 발자국입니다. 삶이란 괴로움과 싱그러움이 나란히 있는 걸음걸이입니다. 삶이란 고단함과 개운함이 엇갈리는 길목입니다. 삶이란 낮과 밤이 갈마드는 하루하루입니다. 내내 낮이지 않고 노상 밤이지 않습니다. 줄곧 어둠이지 않고 내처 밝음이지 않습니다.

 내내 낮이거나 내처 밝음이라면 눈이 너무 고달픕니다. 우리는 잠을 자야 합니다. 잠을 자지 않고 어찌 삽니까.

 사람은 누구나 밥을 먹고 똥을 눕니다. 사람은 누구나 물을 마시고 오줌을 눕니다. 사람 아닌 목숨도 매한가지입니다. 동물뿐 아니라 식물도 먹은 만큼 내뿜거나 내보내야 합니다. 돌고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주고받기입니다. 주기만이 아니요 받기만이 아닙니다.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면 탈이 납니다. 먹기만 하거나 누기만 할 때에도 말썽이 생깁니다. 낮이 있는 만큼 밤이 있어야 하고, 바지런히 일하는 만큼 신나게 놀아야 합니다. 힘껏 하루를 보냈다면 한갓지게 하루를 쉬어야 합니다.

 이리하여 1932년에 일본에서 태어나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간 ‘고사명(김천삼)’ 님은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 하나로 ‘도무지 삶이란 뭐지?’ 하는 길찾기를 합니다. 마흔세 살이 당신 외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픔이 어떠한 아픔인가를 돌아보고, 이 세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가냘픈 목숨은 당신 외아들뿐이 아님을 헤아리며, 아이들과 어른들 누구나 내 삶이 어떠한 삶인가를 짚지 않는다면 삶과 죽음이란 다르지 않음을 곱씹습니다.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 많고, 죽었으나 살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버젓이 살아 있다지만 죽었다느니만 못하고, 아련히 죽었다지만 언제까지나 마음속에서 살아남아 빛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땅 아이들한테, 아니 이 땅이 아닌 일본땅에서 일본사람으로 살아가는 아이들과 일본땅에서 일본사람이 될 수 없는 채 살아가는 재일조선인과, 한국땅에서 이웃나라 한겨레와 일본 아이들 모두 얼마나 아픔과 슬픔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굽어살피지 못하는 모든 아이들과 어른들한테 바치는 책이 《산다는 것의 의미》가 아니랴 싶습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요, 삶은 삶대로 아름답고 죽음은 죽음대로 아름답습니다. 살아 있을 때에는 살아 있는 모든 기쁨과 웃음을 슬픔과 눈물과 함께 누려야 합니다. 죽어 묻힐 때에는 흙으로 기꺼이 돌아가면서 내 뒷사람과 뭇 목숨붙이한테 고맙다는 인사말을 남겨야 합니다.


 (3) 수없이 되읽는 말마디


 2007년에 나온 《산다는 것의 의미》를 2008년에 읽었는데, 2009년 한 해 내내 이 책을 끌어안고 지냈습니다. 이제 2010년을 맞이하며 제 마음 한켠에서 살포시 내려놓고 우리 집 책시렁 한쪽에 얌전히 옮겨 놓고자 합니다. 제 어설프고 어줍잖은 마음밭을 일구어 준 고마운 책 하나한테 즐거웠다는 인사말을 남기며, 새로운 책 하나로 이 마음밭을 다시금 일구어 보고자 합니다. 책상맡에서 책시렁으로 옮겨 놓기 앞서, 한 번 더 책장을 뒤적이면서, 그동안 밑줄을 그은 대목을 또박또박 느린 글씨로 적바림해 봅니다. (4343.1.16.흙.ㅎㄲㅅㄱ)


[7, 79∼80, 115, 188쪽]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지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한 번이라도 들어 본 사람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 비가 오는 날은 나막신을 두 손에 들고 맨발로 뛰었습니다. 나는 비오는 날이 좋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커다란 우산을 쓰고 가방이나 운동화가 비에 젖을까 봐 쩔쩔맬 때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빗속을 뛰어다녔습니다 …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건져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 인간의 상냥함이란 참된 조선인, 참된 일본인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인종과 상관없이 모두가 인정하는 참된 인간이 되려고 노력했을 때 나보다 힘겨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법입니다.

[18∼19, 46쪽] 어머니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어머니는 처음부터 남길 만한 유품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결혼할 때도 결혼사진을 찍을 돈이 없었다고 합니다 … 어머니는 가난에 허덕이다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에겐 어머니의 죽음이 당신 책임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 아버지와 한바탕 싸움을 끝내면 새엄마는 너무나도 슬픈 눈으로 우리 형제를 바라봤습니다. 그러다가도 금세 독기가 오른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슬픈 눈빛은 고통스런 생활을 온힘을 다해 버텨 내려는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20, 24∼25, 200쪽] 우리는 왜 우리의 이름이 떳떳하게 불리는 조선에서 태어나지 못했던 것일까요? 아버지는 언제 일본으로 건너오게 된 것일까요? … 전쟁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무척이나 괴롭혔습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슬피 울었습니다. 같은 일을 당했다면 분명 일본인도 울지 않고서는 견뎌 내지 못했겠지요 … 특히 어떤 선생님은 내가 아직도 일본식 이름을 쓰지 않고 조선 이름을 쓰고 있다는 데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온 나라가 전쟁에 뛰어든 판국에 정부가 시키는 대로 일본 이름으로 바꾸지 않으니, 눈에 거슬렸을 것입니다.

[26∼27, 74쪽] 일본어에는 일본어만이 지닌 향기가 있습니다. 일본인은 자신들의 언어가 부드럽고 단아하다고 말합니다. 조선인에게는 조선어가 있습니다. 일본인이 일본어를 사랑하듯 조선인은 조선어를 사랑합니다. 조선어에는 조선인만이 느낄 수 있는 향기가 있습니다 … 일본 학교에 다니는 일본인이 일본어를 사용할 수 없다면 일본인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조선어를 배우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아버지는 조선어로 얘기했고, 우리는 일본어로만 얘기했습니다. 부자 간에 마음을 주고받는 언어가 서로 다르다니 기막힌 일입니다.

[49, 66, 127쪽] 우리 집은 천장에도 신문지가 발라져 있었습니다. 동생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천장은 우리들에게 무척 유용한 놀잇감이었습니다. 나는 천장에 붙여 놓은 신문을 통해 처음 글씨를 배웠습니다 … 입학식 날입니다. 우선 내 또래의 아이들이 그렇게 많다는 데 놀랐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대부분이 새 교복을 입고 있다는 데 놀랐습니다. 마지막으로 나 말고는 전부 어머니가 있다는 데 놀랐습니다 … 시치린마치의 아이들이 바다를 사랑한 것은 맨몸으로 뛰어들어도 거리낌 없이 우리를 받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영은 옷을 입지 않아도 되기에 옷이 더럽다고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닷물이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 주기 때문에 드넓은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나가야의 숨막히는 생활도 멀리 사라집니다.

[61, 64, 75쪽] 그런데 세상에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 집엔 살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거의 없어서 도둑 걱정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자물쇠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 한편으로는 도둑이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나가야의 빈집을 털 정도였으니 찢어지게 가난했을 것입니다. 부리나케 바지를 벗고 똥을 쌀 때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을 것입니다. 똥을 싸고 있을 때 사람이 들어오면 정말 큰일이니까요 … 모두가 가난했으니 가난이라는 말조차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소학교에 입학해 나처럼 가난하지 않은 일본 아이들을 알게 되면서, 내가 가난하다는 것과 내가 아는 조선인 대부분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깨달음이 내 삶에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87, 174∼175쪽] 학교에서 멋대로 날뛰면 안 된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바로 학교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아버지 말대로 학교는 공부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내게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학교는 나를 가난하다고 놀리고, 조선인이라고 놀리고, 어머니가 없다고 놀리는 곳입니다. 학교는 나를 괴롭히는 곳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곳을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 사카이 선생님은 모두를 평등하게 대했습니다. 선생님의 마음속엔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내가 조선인이라고 경멸하지도 않았고, 가난하다고 해서 우습게 보지도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내게 화를 낸 것은 내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며, 가난에 짓눌려 눈치나 봤기 때문입니다 … 4학년 때 담임은 나라는 학생보다 학교 규칙이 먼저였습니다. 내가 왜 손톱을 자르지 않고 지저분하게 길렀는지를 궁금해하기보다는 학교 규칙을 어겼으니 혼을 내야겠다는 식이었습니다.

[145, 149쪽] 폭력 속에 갇힌 인간은 폭력에 눈이 멀어 폭력이 명령하는 대로 마구 폭력을 휘두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폭력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 나는 모두에게 조롱받았던 말의 폭력에 대해 팔의 힘을 행사하는 폭력으로 맞서 싸웠고, 그 순간 나 자신이 폭력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 버린 셈입니다 … 다른 사람의 처지를 함부로 조롱하는 인간은 상대방을 비웃기 전에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비웃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 우리는 매일 아침 학교에 오자마자 세계지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언제쯤 우리가 만든 일장기 모형을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에 붙일 수 있게 될지를 이야기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만든 일장기를 워싱턴이라고 쓴 곳에 붙일 경우,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워싱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얼마나 많은 집이 불타고,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어머니를 잃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234쪽] “이제 겨우 해방됐으면서 뽐낼 틈이 어디 있어?” 그리고 아버지는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일본사람은 조선인을 괴롭혔다. 조선인이 어려울 때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이 뒤집혀 일본사람들이 어려워졌다. 그럼 조선인은 어떻게 해야겠느냐? 일본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짓밟고 괴롭혀야겠느냐? 남에게 원한을 사면 나중에 그 원한이 나한테 돌아오는 법이다.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는 서로 돕는 게 사람의 도리다. 사람의 도리를 짓밟으면 해방도 머잖아 끝이다. 일본사람이 우리에게 한 짓을 용서해 줘야 그게 진짜 해방이다. 앞으로 좀 살 만해졌다고 일본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또다시 조선을 망하게 할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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