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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엄마! 마음이 자라는 나무 21
유모토 카즈미 지음, 양억관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엄마가 내려준 ‘고운 목숨’ 선물을 깨닫기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9] 유모토 가즈미, 《고마워, 엄마》



 어릴 때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는 그리 안 많습니다. 좀더 오래 많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안타깝다고 느끼지만, 어떻게 보면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그리 안 많기 때문에 한 마디 두 마디 오래오래 되새기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한 마디 두 마디 더욱 곰곰이 돌아보고 한결 깊이 가슴에 새기고자 하지 않나 하고도 느낍니다.

 제 고향이며 삶터는 인천이기 때문에 웬만한 볼일을 보자면 서울로 길을 나서야 합니다. 저는 운전면허가 없을 뿐더러 앞으로 면허를 딸 생각이 없고 자동차 장만하거나 굴릴 주머니가 없으니 자전거로 시잉씽 달리거나 전철을 탑니다. 혼자 지낼 때에는 으레 자전거를 달렸고, 옆지기와 함께 살면서는 전철을 즐겨 탑니다.

 옆지기와 전철을 타고 서울을 오갈 때는 으레 출퇴근 발걸음으로 붐비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때에서 살짝 벗어난 때이곤 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사람은 많기만 했는데, 요 몇 달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때에 움직이니 그야말로 옴쭉달싹 못하면서 사람들한테 시달립니다.

 사람들한테 시달리는 일은 고달프거나 괴롭지 않습니다. 제가 시달리는 만큼 제 옆에 선 다른 사람들도 다 다른 느낌과 크기와 세기로 시달리고 있으니, 서로서로 매한가지이거든요. 다만 하나, 서로를 들볶는 사람들 매무새가 고달프고 괴롭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됨됨이가 얕거나 모자란 움직임과 몸짓에 치이고 밟힐 때에 쓰라리고 슬픕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저나 형을 따끔하게 나무라던 말 가운데 하나를 요사이 아주 뼛속 깊이 느낍니다. “사람이 사람 앞을 지나다니면 안 돼.”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어디로 가려고 할 때 앞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이이 앞으로 지나가지 말고 뒤로 지나가라고 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이를 어기면 따끔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좁은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마루에서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으시면 어디로도 갈 수 없어 안절부절이었습니다. 쉬가 마려도 움직이지 못하고 눈치를 보아야 했고, 제발 어른이 제가 안절부절 어디로도 못 가고 있음을 느껴 주기를 기다리며 애타게 바랐습니다.


.. 나는 물론 아빠의 장례식을 지켜보았으며, 관 속에 누워 있는 아빠의 얼굴에서 살아 있을 때와는 다른 뭔가를 느끼고 겁에 질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빠의 죽음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아빠는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 엄마도 나도 언젠가는 아빠처럼 그 어두운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은 너무도 밝고 힘차서, 내가 두려워하는 그런 어두운 구멍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 그럭저럭 학교에 도착하고 나면 엄마가 걱정이었다. 아빠처럼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 피곤한 나머지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닌지, 혹시 지금 이 시각에 나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  (22∼25쪽)


 동인천역에서 빠른전철을 탈 때, 사람들은 저마다 먼저 타려고 달려듭니다. 제 뒤에 서 있던 이들이 어느새 달음박질로 빈자리를 하나씩 꿰찹니다. 실랑이를 벌이기 싫고, 갑작스레 새치기하는 사람하고 다투기 싫어 으레 그냥 서서 갑니다. 용산역에서 내려 1호선으로 갈아타야 할 때에도 내리는 사람들은 우르르 쏟아지며 달음박질인데 저 같은 사람은 손쉽게 밀치고 밟으며 ‘먼저 자동계단에 타려’고 애씁니다. 저는 자동계단을 안 타고 돌계단만 밟으니 어차피 자동계단 쪽으로 가지 않으나, 옆이고 뒤고 제 앞으로 휙휙휙 달음박질하는 사람들은 무섭기까지 합니다. 시청역에서 내려 표를 끊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사람들 매무새는 무시무시합니다.

 이 같은 아침저녁 전철길에 모질게 시달리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옆지기와 아기를 다시 만날 때 잔뜩 절고 지치고 힘이 없습니다. 쉬 짜증을 부립니다. 마음이 메말라 가고 차가워지고 쌀쌀맞고 맙니다.

 경쟁을 바라지 않고 경쟁을 하기 싫으며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면서 살고 싶기에, 제아무리 큰돈을 선물로 준다 할지라도 이렇게 뭇사람 물결에 휩쓸리는 일은 힘듦을 넘어 가슴이 아립니다. 왜 이렇게 우리들은 서로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듯 뜀박질을 하며 ‘내가 더 먼저’와 ‘내가 더 빨리’와 ‘내가 더 많이’가 되어야 할까요. ‘나와 네가 함께’나 ‘나와 네가 나란히’나 ‘나와 네가 즐겁게’로 거듭나기는 어려운가요.

 모두들 똑같은 ‘어머니’한테서 아름답고 맑은 목숨 하나 선물로 받은 몸일 텐데, 우리는 왜 내 몸이나 네 몸을 아름답게 여기지 못하나요. 왜 우리 몸을 서로서로 맑게 돌아보거나 건사하지 못하나요.


.. 나는 다림질을 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달려가 편지를 내밀었다. “오사무네 엄마, 아기가 새로 태어나니까 오사무는 필요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아기가 죽었다고 오사무더러 가지 말라니, 정말 너무해. 오사무가 너무 불쌍해.” 나는 세탁비누 냄새와 탕약 냄새가 밴 할머니의 앞치마에 얼굴을 묻고 눈물과 콧물과 침을 묻혔다. 얼마 후, 내가 얼굴을 들어올리자 할머니는 밤이 든 양갱을 주었다. 눈물과 콧물이 마구 뒤섞여 있던 목 안으로 부드럽고 달콤한 양갱이 넘어가자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  (115쪽)


 우리 어머니라고 안 서두르며 살지는 않았으나 ‘괜찮아!’ 하고 짧게 내뱉으며 우리 몫을 덜 가지는 모습을 곧잘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몫이 더 있다고 해서 우리가 더 배부르지 않음을 넌지시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른 이가 우리와 견주어 훨씬 배부른 데에도 우리 몫까지 얌체처럼 가로채더라도 ‘괜찮아!’ 하고 아쉬움 없는 한 마디를 뱉어냈습니다.

 우리 옆지기를 돌아봅니다. 우리 옆지기는 ‘괜찮아!’를 꺼내지 않으나 ‘됐어!’를 꺼냅니다. ‘우리가 안 가져도 돼!’를 꺼냅니다. 우리 두 손에 든 몫은 거의 없거나 텅 비었음에도 ‘됐어!’를 꺼냅니다.

 저는 옆에서 허전하다고 느끼며 ‘뭐여? 굶으라고?’ 하고 생각하지만, 이내 ‘그래, 조금 굶는다고 우리는 죽을 일이 없지.’ 하고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우리 살림에 은행계좌 숫자가 늘어날 턱이 없으나 그 밑바닥하고 이마를 맞대는 얼마 안 되는 숫자마저 선선히 털어내어 (우리보다 그 돈푼을 바라는 자리에 있는 고운) 이웃한테 어느새 다 나누어 놓고 있습니다.


.. 예전에 엄마와 내가 살고 있던 그리운 그 방을 보고 나는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좁고 이렇게 천장이 낮은 방에서 살았던가 하고. 그렇지만 덜거덕거리는 덧문을 열자 포플러는 변함없이 이쪽을 엿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그 시절의 추억이 눈앞에 펼쳐졌다. 창문턱에 자그만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나의 모습과 식탁에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  (158∼159쪽)


 지난주에 제 새 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이주에 또다른 새 책이 하나 나오고, 다음주에 또다른 새 책이 하나 나옵니다. 석 주에 걸쳐 세 가지 책이 나옵니다. 그동안 밀려 있던 책입니다. 이 세 가지 책을 한꺼번에 그러모아 음성에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보낼까, 아니면 세 번에 걸쳐 따로따로 보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전화를 자주는커녕 가끔도 잘 안 하는 주제이니, 세 번 따로따로 편지와 함께 책을 부쳐야 옳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체국에 갈 겨를이 거의 없으나, 가방에 책 담은 편지꾸러미를 늘 넣어 놓고는 낮나절에 길을 지날 일이 있으면 얼른 우체국에 가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렇게 다짐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들내미 새로운 책을 얼마나 기쁘게 맞아들이며 즐겁게 읽어 주실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여태까지 어머니가 아들내미 책을 놓고 이런저런 느낌이나 생각을 꺼내어 본 적이 없으니, 잘 썼다고 여기는지 엉터리라고 여기는지 하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즐겁고 흐뭇하게 편지 몇 줄을 적어 보내려 합니다. 따로 말씀이 없어도 저 스스로 잘 쓴 책이라면 잘 썼고, 잘못 쓴 책이라면 스스로 잘못 썼음을 깨달아야 할 노릇이겠지요.

 책에 적힌 이름은 제 이름 석 자이지만, 제 이름 석 자가 책 하나에 새겨지기까지는 내 어버이가 쏟고 들인 땀과 피와 사랑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땀과 피와 사랑과 믿음을 돌아본다면, 제가 쓴 책은 제가 쓴 책이라기보다 제 몸뚱아리와 손길을 빌어 내 어버이와 내 어버이를 낳은 또다른 어버이와 또다른 숱한 어버이들이 빚은 열매요 보람이라고 느낍니다. 저로서는 이 피와 땀과 사랑과 믿음을 제 책들에 알알이 담았는가 못 담았는가를 헤아릴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 어느 날, 할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나이가 든 다음에, ‘그때는 참 젊었었지.’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단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그러면서도 자유롭게 살아야 해.” 평소 욕심 많고 질투심 많고 독설가였던 할머니가 그런 가슴 찡한 말을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그 외증조할머니의 딸이다. 할머니는 외증조할머니가 정해 준 상대와 얌전하게 결혼하여 자식 넷을 키웠는데, 역시 그 할머니에게도 마음껏 다 살지 못한 자신의 다른 모습이 있었던 모양이다 ..  (글쓴이 뒷말/182쪽)


 이야기책 《고마워, 엄마》를 읽습니다. 어머니가 ‘작품 주인공’ 만한 어린 날부터 겪은 아픔이 고스란히 되풀이되고 있었음을 ‘작품 주인공’은 ‘당신이 어린 날 어머니 나이’가 되면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작품 주인공이 보낸 어린 나날에 주인공네 어머니가 ‘어린 주인공이 앓고 겪고 부대끼는 슬픔과 생채기’가 덧나지 않도록 하려고 오래도록 말없이 참고 기다리고 헤아리고 있었음을 ‘주인공이 어머니가 된 다음은 아니고, 주인공이 어머니 나이에 가까워지’면서 시나브로 깨닫도록 마련해 놓고 있는 줄을 깨닫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되어 무엇을 깨닫고 있다 할 수 있을까요. 옆지기는 딸이 아닌 어머니가 되어 무엇을 깨닫고 있다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두 사람은 우리 딸아이한테 무엇을 느끼거나 깨닫도록 하루하루 삶을 이어간다 할 수 있을까요. 오늘 하루 보낸 삶이 먼 뒷날 우리 딸아이가 ‘제 엄마 아빠 나이’로 다가설 즈음 무엇을 느끼도록 할까요. 우리 삶자락이, 우리 삶자취가, 우리 삶결이 우리 딸아이 앞날에 어떤 이야기로 다가설 수 있게끔 일구거나 가꾸거나 보듬거나 껴안고 있을까요.

 엄마한테는 엄마가 있으며 딸이 있습니다. 딸한테는 엄마가 있으며 뒷날 스스로 엄마가 됩니다. 스무 해이든 서른 해이든 마흔 해이든, 어느 만큼 햇수를 살아내면서 차근차근 ‘목숨 선물’을 사랑과 믿음을 실어 물려줍니다.

 틀림없이 아침저녁으로 지치는 몸이 되고, 지치는 몸에 따라 지치는 마음이 됩니다. 그러나,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 히유 한숨 한 번 몰아쉬면서 새삼스레 이맛살 주름을 문질러 지우고 곰곰이 되씹습니다. 나를 들볶는 모든 사람들 누구나 누군가한테 ‘아이’요 모두들 ‘어머니’가 있는 고운 목숨임을 느끼고자 합니다. 아직 이이들 스스로 누군가한테 ‘아이’요 ‘어머니’가 있음을 살피지 못하지만, 언젠가 모두들 제자리를 깨닫고 고운 목숨이 무엇인지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엄마는 엄마이기에 고맙고, 나는 나이기에 고맙습니다. (4342.11.25.물.ㅎㄲㅅㄱ)


 ┌ 《고마워, 엄마》(푸른숲 펴냄,2009)
 ├ 글 : 유모토 가즈미 / 옮긴이 : 양억관
 └ 책값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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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로 말해요 - 농인 아내, 청인 남편이 살아가는 이야기
가메이 노부타카.아키야마 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 / 삼인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127 ― 사랑으로 말해요, 삶으로 말해요
 : 아키야마 나미+가메이 노부다카, 《수화로 말해요》



- 책이름 : 수화로 말해요
- 글ㆍ그림 : 아키야마 나미, 가메이 노부다카
- 옮긴이 : 서혜영
- 펴낸곳 : 삼인 (2009.8.14.)
- 책값 : 11000원



 (1) 사랑으로 말해요


 북미 대륙에서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는 아미쉬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단순하고 소박한 삶》(리수,2009)이라는 책에서 읽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 나라에 알려진 ‘아미쉬 이야기’는 조각조각일 뿐, 이처럼 우리 눈썰미로 아미쉬 마을을 어깨동무하면서 풀어낸 이야기책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나라밖에서 나온 몇 가지 ‘아미쉬 이야기’ 책을 찾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 두레마을 얼거리와 삶을 책 몇 권을 훑으며 돌아보면서, 좀더 낱낱이 알기가 쉽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이번에 나온 책을 찬찬히 읽으며, 이들 아미쉬 삶은 더없이 ‘오래된’ 틀을 지키고 있으면서 ‘잘잘못을 함께 껴안고’ 있음을 느낍니다. 문명을 거스른다기보다 ‘제 삶을 고스란히 지킨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이들 아미쉬 마을에는 예배당이 없고 전기가 없으며 자동차와 텔레비전과 전화와 인터넷과 컴퓨터 모두 없습니다. 성경이나 사제나 전도사 또한 없습니다. 스스로 걷는 길이 옳다고 여겨도 굳이 당신 이웃한테 당신들 믿음을 퍼뜨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당신들 딸아들이 아미쉬 마을에 남지 않겠다고 하면 스스럼없이 떠나보냅니다. 그저, 다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탄소발자국으로 치자면, 아미쉬 마을은 놀랄 만큼 푸른빛입니다. 지하자원을 다른 데에서 캐내지 않으며, 지하자원을 얻으려고 전쟁무기를 갖추어 싸우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몰지 않으니 굳이 새로운 물건을 밖에서 사 오지 않습니다.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는 모두 손수 마련합니다. 가게에서 사는 옷이란 없고, 집 또한 손수 짓습니다. 기름을 쓰지 않으니 기름값이 치솟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을 안 보고 인터넷을 열지 않으니 시시콜콜 자질구레한 세상일에 얽혀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삶은 어느 모로 본다면 따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에 ‘산에 가서 혼자 살아라’ 하는 그 말대로 살아갑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시골에서도 텔레비전과 전기와 자동차 없이 살겠다고 하면 ‘미친놈’이라 여기거든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땅에서는 ‘혼자 살 만한 임자 없는 산’이 없고, 섣불리 산에 들어가 홀로 살려고 하면 법을 어긴 사람이 됩니다.

 예배당이며 성경이며 사제이며 없는 아미쉬 마을이지만, 집집마다 돌아가며 예배를 본다고 합니다. 집집마다 이웃이 다 함께 모여서 함께 예배를 볼 때에는 ‘마을에서 함께 보는 성경을 비로소 꺼내어 읽’고는 도로 제자리에 놓으며, 여럿이 모인 자리는 밥을 한 끼니 나누어 먹고 마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가면서도 이들 아미쉬 마을 사람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믿음이 깊고 믿음을 잘 지키며 믿음을 잘 나누고 있구나 싶습니다. 이 또한 어느 모로 보면 놀랄 만한데, 다른 모로 보면 놀랄 만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매이지 않고 예배당에 매이지 않으며 사제 말씀에 매이지 않습니다. 예부터 내려온 ‘올바른 삶’을 붙잡으며 참다운 ‘하늘나라 삶’을 섬기고 따릅니다. 이리하여 아미쉬 마을 사람들은 자물쇠 없이 살아가고, 도둑이 물건이나 돈을 훔쳐도 신고하거나 앙갚음하지 않으며, 식구들이 몹쓸 사람한테 총에 맞아 죽어도 외려 몹쓸 사람을 용서합니다.

 모든 구석에서 믿음직하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하다고만 여길 수 없는 아미쉬 마을이지만, 이들 마을 사람들이 꾸리는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말하며 사랑으로 손 내미는’ 매무새는 더없이 믿음직하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옹근 믿음이란 스스로 옹근 삶일 때 비롯하니까요. 가없는 나눔이란 스스로 가없이 나누는 삶일 때 펼쳐지니까요. 열린 사랑이란 스스로 나와 이웃을 고르게 사랑하는 삶일 때 샘솟으니까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라는 책을 읽으면, 여러모로 훌륭한 아미쉬 마을이지만 가부장제 문화라든지 가정폭력 문제 이야기가 함께 나옵니다. 좋은 모습과 나란히 있는 궂은 모습입니다. 모든 곳에서 빈틈없이 좋지 않고, 어느 구석에서나 얄궂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기에 좋고 나쁨을 나란히 안고 있겠지요. 그예 우리하고 다른 대목이라면, 우리들은 끝없는 경쟁과 학벌과 계급과 돈과 욕망과 물질문명과 편리주의와 부동산과 개인주의와 따돌림을 그치지 않으며 자질구레한 시시콜콜 이야기에 꽁꽁 옭매여 있습니다. 우리들은 내 밥그릇에서 한 숟가락을 덜어 이웃하고 나누는 삶을 꾸리지 않을 뿐더러, 내 밥그릇을 반으로 나눈다든지 1/3로 나눈다든지 하면서 이웃사랑을 함께하지 않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학벌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얼굴과 몸매 가꾸기, 더 크고 빠른 자가용 몰기, 비싸고 높은 집 장만하기에 소용돌이처럼 휘둘리며 대단히 바쁘게 살아갑니다. 숨돌릴 겨를이 없고 이웃을 들여다볼 틈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돌아보거나 가다듬을 새가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사랑으로 말할 짬이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사랑으로 말을 건넬 생각이 깃들지 않습니다. 우리한테는 사랑으로 어깨동무하겠다는 매무새가 자리잡지 않습니다.


 (2) 삶으로 말해요


 지난달 저녁나절, 서울에서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길에서, 제 옆에 선 할배 둘이 있었습니다. 할배 둘은 큰 몸짓을 하면서 자꾸 제 팔꿈치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책을 읽으며 성가시고 번거롭기에 뭐 하는 할배들인가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니, 두 할배는 손말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닌 손으로 나누는 말이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토록 사람 미어터지는 전철에서 손말을 하자면 어쩔 수 없이 내 옆구리를 찌를 수밖에 없겠군.’

 지지난달 저녁나절, 이날도 하루일을 고단하게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전철길이었습니다. 젊은 사내 둘이 저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면서 큰 몸짓을 하고 있었습니다(사이에 낀 제가 뻘쭘하도록). 저야 책에 눈을 박으니 아무렇지 않기는 했는데, 목아지가 아파 잠깐 목을 쉬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제 옆에 선 두 사내가 손말을 주고받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이렇구나. 이 젊은이들이 입으로 나누는 속삭임이었다면 나란히 서서 갔을 테지만, 손으로 주고받는 말을 하자니 서로 두 걸음쯤 떨어져서 마주보며 이야기를 할밖에 없었군.’

 새로 짓는 지하철역 둘레에 자동계단 놓는 공사를 으레 합니다. 예전 전철역 둘레에 자동계단 놓는 공사를 새로 벌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승강기를 마련합니다. 장애인과 어르신을 생각하는 공사입니다. 그런데,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자동계단이나 승강기는 마련하면서 정작 ‘여느 길가 건널목’ 마련은 제대로 안 하기 일쑤입니다. 건널목은 너무 띄엄띄엄 놓기도 하고, 건널목으로 맞은편으로 가자면 빙 돌아야 하도록 마련하기도 합니다. 오로지 자동차가 술술 지나가는 데에만 교통 얼거리를 짜맞추기 때문입니다. 제 고향마을 인천에서는 ‘지하상가 상권을 지켜 준다’면서, 한길가에 건널목을 마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몰든 무거운 짐을 나르든 낑낑거리며 지하도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무단 횡단’을 해야 합니다. 더욱이 새벽 느즈막하게 지하도 문을 열고 저녁 열한 시 무렵에 지하도 문을 닫으니, 이때에는 ‘아주 마땅히’ 찻길을 아슬아슬하게 가로질러야 합니다.

 우리 옆지기는 몸하고 마음에 장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옆지기가 앓는 장애는 우리 나라에서는 장애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 우리 옆지기와 같은 장애를 앓는 이웃이 꽤 많으나, 정부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정부에서 이러한 장애를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다기보다, 여느 사람들이 이러한 장애를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하기에, 무언가 옳고 알맞춤하게 ‘장애인권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비장애인’일 때에 ‘장애인’을 어떻게 마주하고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동무요 이웃이요 한식구로 지내는지를 터무니없을 만큼 모르기 일쑤입니다. 학교에서 장애인권 교육을 하지 않기도 하지만, 집에서 장애인권을 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장애인권을 다루는 책이 드문드문 나오기는 하지만, 거의 모두 ‘딱한 눈길’로 바라보는 책이요, 불쌍하게 여기려는 줄거리인데, 그나마 이런 책조차 잘 안 팔리고 거의 안 나옵니다. 눈물샘 쥐어짜내는 이야기책은 곧잘 대박을 터뜨린다든지, 《오체불만족》 같은 책은 아주 드물게 많이 팔리는데, 《다르게 보는 아이들》이나 《나는 아들에게서 세상을 배웠다》 같은 이야기책은, 또는 《도토리의 집(사랑의 집)》이나 《머나먼 갑자원》 같은 만화책은 읽히지도 팔리지도 이야기되지도 않기 일쑤입니다.

 우리 삶으로 들여다보지 않아서라고 할까요. 우리 삶은 오로지 ‘비장애인 눈길’에만 맞춰져 있는 탓이라고 할까요. 우리 삶으로는 남보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며 더 많이 자랑하다가 더 많이 쏟아내야 한다는 수렁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우리 스스로 꾸리는 삶이 그리 아름답지 못하니, 내 이웃을 아름다이 바라보며 껴안기 어렵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 일구는 삶이 그리 훌륭하지 못하니, 내 동무를 훌륭하게 여기며 서로 손 맞잡기 힘들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 꿈꾸는 삶이 그리 사랑스럽지 못하니, 내 식구를 꾸밈없이 받아들이기 벅차지 않습니까.

 우리는 왜 1등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왜 더 많은 연봉을 받아야 하나요. 우리는 왜 더 낫다는 대학교에 가야 하는가요. 우리는 왜 ‘내 집(이라기보다 아파트) 마련’을 꼭 해야 하나요.

 우리 마을은 나라안팎에서 1등 도시가 되어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수출 1위가 되어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우리 나라 국민소득이 세계에 첫손으로 꼽혀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서울과 부산 잇는 철길이 두 시간 만에 뚫려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서울과 부산을, 또 서울과 인천을 잇는 물길을 닦느라 어마어마한 돈을 건설비에 들여야 할 까닭이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우리 삶터를 얼마나 아늑하게 지켜 주고 있습니까.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우리 둘레 농사꾼과 가난한 사람들한테 얼마나 도움이 되고 있습니까. 골목동네 재개발과 재건축과 재생사업과 재정비는 골목동네 사람들 삶터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대학교 학문은 우리 터전을 어떻게 가꾸는 데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습니까. 초중고등학교 교육은 무슨 길을 걷고 있습니까. 딸아들 키우는 우리 어버이는 우리 딸아들한테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우리 삶은 무슨 이야기를 건네고 있을까요. 우리 삶은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을까요. 우리 삶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요. 우리 삶은 무슨 그림을 어디에서 누구하고 어떻게 그리고 있습니까.


 (3) 《수화로 말해요》라는 책 함께 읽기


 이야기책 《수화로 말해요》를 읽습니다. 손말을 쓰면서 살아가는 아가씨와 입말을 하며 손말을 익힌 사내가 가시버시가 되면서 겪고 복닥이고 부대끼고 헤아리고 맞아들인 여러 삶자락을 담은 책입니다. ‘장애인권’을 말하는 책은 아닙니다. 장애인 아픔을 외치는 책은 아닙니다. 하나도 없는 장애인권 정책을 꾸짖는 책 또한 아닙니다.

 《수화로 말해요》는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똑같은 사람임을 들려주는 책입니다. 장애인이기에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지는 않으나, 장애인인 까닭에 한 번 더 사랑을 받을 만하고 더욱더 사랑스레 어울릴 만큼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살며시 일러 주는 책입니다.

 이 책을 덮으며 여러모로 생각했습니다. 저한테는 아무 힘이 없으나, 저한테는 꿈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이 나라 고등학교 과정에서 ‘제2외국어’로 ‘손말(수화)’이 정규과정으로 들어가는 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꿈꾸었습니다. 이리하여 나중에는 중학교 과정에서 ‘영어와 같은 자리에서 외국어 한 가지’로 배울 수 있도록 교과목을 마련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고 꿈꾸었습니다. 또는, 고등학교 ‘제2외국어’ 과정으로 ‘손말’이나 ‘점글’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반드시 배우도록 하는 날이 오기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면서 대학교에서는 이를 더 깊이 헤아리며 ‘토익 토플 점수’를 반드시 받도록 하는 제도와 마찬가지로,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손말’이나 ‘점글’ 가운데 하나를 통역사처럼 주고받을 만큼 익혀야 졸업장을 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여느 회사에서 새 일꾼을 뽑을 때에, ‘손말’이나 ‘점글’ 한 가지를 하는 기본조건을 마련하고, 둘 모두를 할 수 있다면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꿈꾸었습니다.

 홀로 품는 꿈이지만, 이 꿈을 사랑스레 껴안으면서 책을 다시 펼칩니다. 밑줄을 그으며 읽은 대목을 새삼스레 거듭 읽어 내려갑니다. (4342.11.17.불.ㅎㄲㅅㄱ)


[33, 100쪽] 나는 부엌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 농인의 언어는 수화이므로 시각적으로 확 열려 있는 편이 편리하고 쾌적할 것이다. 만약 농인이 사회의 지배자라면 세상의 건축물 구조는 아마도 지금과 전혀 다를 것이다 …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가 태어나면 곤란하다는 사람도 제법 있다. 얼굴을 마주보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제삼자를 내세워 말하게 한다. 그러나 이건 상당히 무례한 태도다. 농인에게 “당신은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어요.” 하는 거나 같다.

[41쪽] “아내는 청각장애인입니다.”라는 표현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 부부의 생활 감각으로는 ‘청각장애인’이란 말은 서류에서나 사용하는 표현이다. ‘본적’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관공서에서 어떤 절차를 밟는 등 정해진 상황에서 쓰는 말이지 평소의 대화에서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 하물며 “아내는 귀가 불편합니다.” “귀에 핸디캡을 갖고 있습니다.”라니, 그런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렇게 에둘러 하는 애매한 표현은 고양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짜증의 원천이다. 게다가 농인의 핸디캡은 귀의 문제가 아니라 수화를 포용하지 못하는 언어 정책에서 생겨나는 정보적인 핸디캡이기 때문에 사실하고도 맞지 않는다 … 일본 과자점의 견본 앞에서 수화로 말장난을 하며 웃는 우리를 가게의 판매원은 어떻게 봤을까. 아마도 뭘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설명을 해 줘도, ‘농’이라는 말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다면, 그리고 실감할 수 없다면 웃을 수 없을 것이다. 번역하기 힘든 웃음이다.

[56∼57, 89쪽] 편리한지 어떤지하고는 관계없이 우리는 늘 수화로 말하며 살고 있고, 그것이 창문 너머로는 계속되는 것일 뿐이다. 수화 특유의 대화 예절은 유리창 너머에서도 잘 지켜져야만 하며, 따라서 실은 그러한 장면에서의 적절한 행동 방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사정이 드라마에는 그려지지 않는다. 게다가 수화를 공용어로 인정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보통 때는 농인들이 큰 불편을 감수하도록 해 놓고는, 이런 데에서만 수화를 조금 보여주고 “수화는 편리하다”며 재미있어 하는 것도 농인에게 실례라는 생각이 든다 … 애당초 음성으로 얘기한다는 건 자신의 목소리가 들릴 때 가능한 것이다. 수화통역사에게서 “농인이 구화를 하는 건 사람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이 나라 통역사의 수준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61, 86쪽] 한 친구가 “여기서는 집 밖에서 수화를 하면 빤히 쳐다봐.” 하고 투덜거린 적이 있다. 실제로 레스토랑에서 보통 때 하듯이 수화로 얘기하며 식사를 하는데 사람들이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똑바로 바라보면 금방 눈길을 돌리는 사람이 많다는 걸 학습해 온 내가 ‘무례하네요. 나는 구경거리가 아니라구요.’ 하는 기분을 담아 노려봤는데도, 그들은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우리를 계속 힐끗힐끗 보면서 소곤거리는 데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게 이곳 사람들이 지닌 의식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 나는 청인인 만큼 주변의 청인들의 몰이해한 발언이 전부 내 귀에 직접 들려온다.

[85, 92, 127쪽] “수화는 고유의 문법을 가진 언어예요. 몸짓도 아니고 음성언어를 그대로 옮기는 수단도 아닙니다. 수화를 학습하는 건 일반 어학을 공부하는 것과 똑같이 힘들어요. 수화만을 사용하는 대학이나 학회도 있습니다. 만약 수화가 단순한 몸짓이라면 그런 건 불가능하죠.” … 그런대 대학생활을 하다 보니까 100퍼센트 들리지 않는 핸디캡이라는 게 정말로 굉장했다. 특히 영어 수업은 소리를 못 알아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커리큘럼으로 되어 있고, 그런 만큼 압박감도 아주 크다 … 수화통역자를 양성해 필요할 때에 지원하는 대학은 없다. 지금까지 일본의 대학은 수화통역자가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학생끼리 서로 돕는다’, ‘자원봉사 정신의 소중함’을 운운하며 통역의 책임을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넘겨 버렸다.

[96∼97쪽] 나는 세상에서 흔히들 말하는 ‘장애인’이라는 종별에 속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래서 거북이와 결혼을 하려고 했을 때 거북이의 가족이 크게 반대했다. 가장 큰 이유는 결혼 상대인 내가 ‘장애인이니까’였던 모양이다. 우리는 우리의 결혼을 그렇게 반대하는 부모님의 성을 잇는 것이 싫어졌다 … 또한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경우보다 농인이기 때문에 차별당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느끼므로 여권론을 논하기 전에 우선 인간으로서 농인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이 급하다.

[103, 104, 112쪽] 태어난 아이가 청인이라 하더라도 물론 사랑스럽겠지만, 농인 부모에게는 청인인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에게 어떻게 수화를 받아들이게 할지가 가장 큰 걱정거리다 … 수화를 공부하는 사람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수화를 익혀 ‘봉사’한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 농인이 회사에 들어갔다고 치자. 텔레비전 전화가 있다고 다양한 연락 사무를 할 수 있을까? 텔레비전 전화로 거래처에 전화를 걸어도 상대방이 수화를 못하는 사람이라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120, 131쪽] 수화로 얘기한다고는 하지만 농인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이질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주류 세계의 한 사람이다. 고양이는 그런 존재와 함께 살기로 선택한 거다. 어떤 의미에서는 훌륭한 사람이다. 칭찬해 주고 싶다 … 그렇게 남의 신경을 거슬리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화를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미흡하나마 언어로서 수화를 배우고 수화 통역 업무에 관계하는 사람들은 그런 무책임한 발언을 하지 않는다.

[143, 146, 178쪽] 그렇게 수화를 우습게 여기는 세계로 꼭 들어가야만 하는 걸까? 대학이란 세계는 그토록 청인만을 위한 세계란 말인가? … 매일같이 내일은 통역자가 있을까 걱정하면서 힘든 나날을 보냈다. 농인 한 사람이 수강권 보장 문제로 괴로워하다 병들어 죽어도 누구 하나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이 사회의 현실이다 … 대학의 담당 부서 말은 “수화 통역은 비용이 들어서 붙여 줄 수 없다”는 거였다. 영어-일어 통역은 있는데 어째서 수화 통역은 인정을 안 하는가. 일반 공개강좌인데 만약에 농인이 신청을 하면 어떻게 할 건가.

[156쪽] 연구자들은 참으로 난해한 말을 좋아한다. 좀더 알기 쉬운 말로 쓸 수는 없는 걸까.

[248쪽] 아무 지원도 없이 음성으로 하는 대화나 정보 전달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농인에게 고통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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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교실 혁명 핀란드 교육 시리즈 1
후쿠타 세이지 지음, 박재원.윤지은 옮김 / 비아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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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핀란드 교실혁명’을 꿈꾸려 한다면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0] 후쿠타 세이지, 《핀란드 교실혁명》



 엊저녁 서울 하계동으로 마실을 갔습니다. 제 둘레 가까운 분 아버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인천부터 가자면 멀고, 아기는 집에서 쉬어야 하니 혼자서 길을 떠납니다. 용산까지는 빠른전철을 타고, 용산에서 지하철 1호선으로 갈아탑니다. 그런데 청량리까지만 가는 전철이 석 대 잇달아 들어옵니다. 청량리를 지나가야 하는 사람들은 고달프게 기다립니다. 청량리까지만 가는 전철이 왜 이리 잦은지 모를 노릇이지만, 서울 위쪽에서 달리는 전철 가운데에는 구로까지만 가는 전철도 잦습니다. 그래서 서울 바깥에서 사는 사람들이나, 서울에서도 어느 만큼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은 지루하거나 고달프게 기다려야 합니다.

 먼길 마실이라 숨을 트고 싶어 외대앞역에서 내려 조금 걷습니다. 외대 앞문에서 석계역 쪽으로 가는 길가 언덕마루에 자리한 헌책방 〈신고서점〉에 들러 봅니다. 퍽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이 둘레에도 재개발 때문에 여러 가지 말썽이 많다고 합니다. 어디를 가나 온통 재개발뿐인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요즘 서울로 다니는 일터로 들어오는 신문은 꾸준하게 부동산 정보를 다루는데, 엊그제에는 “뉴타운, 재개발, 재건축 3색 메뉴, 입맛 따라 골라 드세요” 같은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요즈음 아파트는 전국 어디에나 수도 없이 새로 허물고 새로 짓느라 법석입니다. 지구자원은 끝없이 쏟아지지 않는데 아파트 짓기는 용하게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치닫습니다. 더구나 ‘입맛대로 골라’ 먹으라는 아파트를 입맛대로 골라서 먹을 만큼 돈이 넉넉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렇겠지만, 아마도 오늘날 우리 삶터에는 돈이 넉넉하다 못해 넘치는 사람도 많고 돈이 모자라다 못해 배고파 죽겠다는 사람도 많지 않느냐 싶습니다. 골고루 나누고 고르게 즐기며 고루 어깨동무하는 삶터가 아닙니다.

 헌책방은 오랜만에 들를수록 돌아볼 책이 많습니다. 넘겨볼 책이 많고 장만하고픈 책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머니는 가볍습니다. 가벼운 주머니이지만 다문 책 하나라도 더 챙기고프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멈칫멈칫합니다. 그러다가 ‘이코 나라하라(奈良原一高)’라는 일본 사진쟁이 작품 《人間の土地》라는 책이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남다른 사진책 이름이라 생각하며 죽 넘기는데 사진이 꽤 괜찮습니다. 책 뒤에 찍힌 책값을 들여다봅니다. 5만 원입니다. 허걱. 꽤나 비싼걸?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책을 새책으로 들여와서 파는 책방에서라면 얼마쯤이었을까 하고. 얼추 8∼10만 원 가까이 하지 않으랴 싶고, 그런 값을 따진다면 몇 만 원 눅게 장만할 수 있는 셈 아닌가 싶습니다. 얌전하게 도로 꽂아 놓았다가 다시 꺼냅니다. 사진을 부지런히 다시 넘깁니다. 못 사더라도 사진만큼은 다 보자고 다짐합니다. 사진을 두 번째 다 넘겨봅니다. 다시 꽂습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뽑아듭니다. 오늘 장례식장에서 낼 부조돈을 반 덜어내자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오늘 상주로 선 분한테 선물로 드리면 어떠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고 아버지이든 어머니이든 흙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오래도록 모신 어버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허전해지는 마음은 아프고 슬프고 가라앉습니다. 어줍잖으나마 이 사진책 하나로 상주 되는 분이 마음을 달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혼자서 꿈을 꿉니다.


.. 핀란드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한다. 왜일까? 공부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핀란드에서는 아이들에게 배움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든 스스로 공부하겠다는 의사만 있다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교재가 치밀하게 개발되어 있다 … “자신을 위해 공부하는 건 당연하죠.” 모든 학생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가 공부를 하든 말든 선생님한테는 남의 일인 걸요.”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므로 어떻게 살지를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교육을 받는 듯했다 ” … (일본에서) 게으르다고 비난받는 젊은이들을 무조건 비난해야 할지 아니면 그들 스스로 공부하도록 키워내지 못한 사회를 비난해야 할지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  (38∼39쪽)


 장례를 치르는 곳에서 밤을 샙니다. 상주를 서는 분이 생태환경책을 펴내는 출판사 사장인 까닭에 환경운동을 하는 분들이 제법 모이고, 홍성 풀무학교 식구들도 찾아옵니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모두들 생태와 환경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장례집에서 쓰는 ‘한 번 쓰고 버리는 플라스틱 그릇과 나무젓가락’이 마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병원이나 업체에서는 이런 물건만 쓰니까요. 참말, 환경운동 모임에서 ‘장례 치르는 일’을 다루는 회사를 하나 차려야 할 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손님들 발길이 끊긴 깊은 밤까지 남은 네 사람은 저마다 방석을 깔개 삼아 한동안 눈을 붙이기로 합니다. 몇 시간이나마 몸을 쉽니다. 아침에 부시시 일어나 물 한 잔 마시고 전철역으로 찾아갑니다. 전철역까지 걸어가는 길에 자전거 타고 오가는 사람을 꽤 여럿 스칩니다. 이 동네에서는 자전거 출퇴근이나 통학을 꽤 하는군요. 그렇지만 자가용이 훨씬 더 많습니다. 기름값이 비싸다느니 무어라느니 하면서도 자가용을 버리거나 떠나보내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으레 ‘자가용 더 몰고 더 바지런히 일하면서 기름값 더 벌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더 일하고 더 돈을 벌어 더 기름값을 댈 수 있다 한다면, 그만큼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거나 아끼는 데에 들일 짬은 줄어들지 않을까요? 우리 스스로뿐 아니라 우리 식구를 살피거나 보듬을 겨를 또한 줄어들며, 우리가 발디딘 이 터전을 보살피거나 지키는 데에는 힘을 못 쏟거나 덜 쏟지 않을까요?


.. 핀란드식 교육제도의 특징을 정리하면 밑바닥을 끌어올리되 위쪽은 제한 없이 개방하는 것이다. 핀란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핀란드의 학교는 잘못하는 아이들을 끌어가긴 하지만 잘하는 아이들은 그냥 둡니다. 왜냐하면 잘하니까요.”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자율적으로 배우도록 키우면 아이들은 교사나 어른을 뛰어넘어 뻗어나간다 … 핀란드에서 교과서란 지식을 집대성한 단 하나의 교재가 아니라 하나의 질 좋은 자료로 취급받는다. 따라서 교과서는 공권력에 의한 검정 없이 자유롭게 채택된다. 또 교과서를 사용하여 배우는 일은 있어도 하나부터 열까지 교과서를 외우게 하는 일은 없다. 교사도 교과서를 획일적으로 주입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방면의 지식이 없다고 해서 결함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지식은 불충분하다. 그러니까 계속 배우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해하고 배우는 것이다. 즐겁게 배우면 지식은 정착된다 ..  (54, 71, 112쪽)


 어제에 이어 오늘도 책 하나를 붙잡습니다. 《핀란드 교실혁명》이라는 조금 도톰한 책입니다. 얼핏 보기에 부피가 있는 듯하지만 282쪽짜리 책이고, 글자가 크며 빈자리 많고 줄사이가 넓어서 속알맹이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일본사람이 쓴 이 책을 우리 말로 옮기면서 덜어낸 알맹이가 많은데다가, 일본사람이 쓴 줄거리에 한국사람이 달아 놓은 보탬말이 거의 같은 이야기라서 금세 읽어치울 수 있습니다. ‘좀더 가볍고 작고 단출하게 엮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책이라 하더라도 좀더 값싸면서 야무지게 꾸밀 수 있지 않았나 싶어 아쉽습니다. 1만 5천 원짜리 282쪽짜리 책이 아니라 1만 원짜리 220쪽짜리 책으로 꾸밀 수 있었고, 손바닥으로 쥘 만한 작은 판으로 엮어 종이를 한결 아끼면서 8천 원짜리 책으로도 여밀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책이름이 말하듯이 《핀란드 교실혁명》이라 한다면, 이러한 이야기를 담아서 나누려는 우리들부터 ‘책 만들기 혁명’을 살필 수 있어야 한결 알맞거나 슬기롭거나 반가웠을 테니까요.

 한편, 한국사람이 보탬말을 붙인 대목은 적잖이 거추장스럽습니다. 굳이 보탬말을 붙이지 않아도 일본사람이 처음 적은 글만으로 ‘핀란드는 이렇게 가르치고 배운다’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으며, 이렇게 알아듣는 동안 ‘한국은 핀란드와 달리 어느 대목에서 모자라거나 안타깝거나 못났거나 슬프다’는 이야기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탬말을 달아 놓을 자리에 ‘핀란드 교육 이야기와 학교제도’를 좀더 실어 놓았다면 이 책이 더욱 알차고 아름다웠겠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힘든 노릇일까요? 우리한테는? 제도권 입시지옥을 스스로 뜯어고칠 줄 모르는 우리들은 조금 더 낮은 자리를 헤아리면서 마음밥 하나 튼튼하게 나누는 일을 하기가 더없이 어려울까요? 우리로서는?


.. 평가는 모두 힘을 합쳐 교육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지 서열을 매겨 학부모가 학교를 고르게 하려는 의도로 실시하는 것이 아니다 … 지식을 주입하는 수업이 아니라 생각하는 수업이 진행되는 것이 분명했다 … 교사는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말을 거는 것이다 … “일본이라면 one부터 ten까지를 한 단원으로 묶고, white, red 등 10가지 색을 한 단원으로 묶어서 단원별로 단어를 외우게 했을 거예요. 그리고 시험을 계속 치르겠죠. 그런데 여기는 어떤가요?” “학급의 목표는 정해져 있지만 개인의 진도는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배우는 데도 두세 배의 시간이 걸리는 아이가 있으니까 그 자리에서 반복시켜서 억지로 외우게 하지 않습니다. 긴 안목으로 보면 모든 아이가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목표를 부과할 수 없습니다.” ..  (83, 103, 107, 110쪽)


 똑같은 옷과 똑같은 연속극과 똑같은 스포츠와 똑같은 회사일과 똑같은 사랑놀이뿐 아니라, 똑같은 학교와 똑같은 아파트와 똑같은 도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우리들은 《핀란드 교실혁명》 같은 책을 읽으면서 어느 만큼 달라지거나 새로워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그저 지식조각으로 읽는 책이 될까요, 아니면 우리 삶과 교육과 문화와 마을을 뜯어고치거나 바로잡자고 하는 길잡이로 삼는 책이 될까요. 그예 심심풀이땅콩처럼 한 번 읽고 치워 버리는 책이 될까요, 아니면 우리 넋과 얼을 추스르고 가다듬으면서 나부터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도록 이끄는 책이 될까요.


.. 양호교실 보조교사가 말했다. “경계를 만들기 때문에 차별이 생깁니다. 아이들의 시각으로 보면 아이들 각자가 독자적으로 성장하는 것뿐인데 말이죠. 뒤떨어졌다든지 특수하다든지 하는 구별은 하지 않아요.” … “아이들은 제각각이라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르죠. 핀란드에서는 아무 말 없는 아이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떠드는 아이는 답을 찾아낸 것이라고 여깁니다. 쉽게 생각해서 먼저 답을 찾아내는 아이도 있고 복잡하게 생각해서 시간이 걸리는 아이도 있겠죠. 그러니까 수업을 할 때도 기다리는 시간이 깁니다. 대개 기다리다 보면 어떤 학생이든 꽤 좋은 답을 만들어냅니다. 반응이 느린 아이가 할 수 없는 건 아니죠. 그러니까 수업 중에는 학생에게 멋대로 떠들지 못하게 하고, 답을 알면 손을 들게 합니다 … 잘하는 아이에게만 맞추면 수업은 빨리 진행될지 모르지만, 못하는 아이가 의욕을 잃어버리죠. 아! 일본은 한 반이 40명이라고요? 20명이면 기다릴 수 있지만 40명은 기다리기 힘들겠네요. 음, 20명 이상은 무리예요.” ..  (159, 212∼213쪽)


 종각역에서 내려 광화문 신문로 쪽으로 걷습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똑같이 숱한 양복쟁이들 숲을 헤치면서 걸어갑니다. 숱한 양복쟁이들은 저마다 몸담은 건물로 들어가고, 저 또한 숱한 건물들 가운데 한 곳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제 일터가 있는 5층까지 걸어서 올라갑니다. 5층밖에 안 되는 건물이지만, 3층이나 4층을 다닐 때 계단을 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마 10층짜리 건물이라면 3층과 4층뿐 아니라 8층과 9층도 으레 승강기를 타겠지요. 10층까지 계단을 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20층 아파트에서 18층까지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지난주에 고향동무들과 만나 술 한잔을 걸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난 걸어갈게. 잘들 들어가라.” 하고 인사했더니 모두들 손사래를 쳤습니다. “야, 너네 집이 어딘데 걸어가?” “걸어가도 한 시간 조금 더 걸릴 뿐인데, 뭐.” “어떻게 그런 거리를 걸어다니냐?” “옛날엔 다 걸어다녔잖아. 난 지금도 그 길을 그냥 걸을 뿐이야.”

 고향동무들 가운데 자가용 안 모는 사람은 저 혼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고향동무가 아닌 책마을 선후배 가운데 자가용 없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몇 안 됩니다. 어제 장례집에 자가용 몰고 온 분이 있기에, “집도 바로 옆이라면서 이런 자리에는 택시를 타고 오시지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우리가 택시만 타고 돌아다녀도 자가용 몰 때보다 훨씬 적은 돈이 들 터이며 차댈 걱정 하지 않아도 됩니다. 보험값이니 뭐니 근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만큼 지구와 우리 삶터를 더욱 사랑하는 길이 됩니다. 일이 있으면 빌리면(렌트카) 되고요.

 어쩌는 수 없는 어줍잖은 생각입니다만, 우리 스스로 운전면허증을 가위로 싹뚝 잘라서 버리는 매무새까지 가 닿지 않는다면 《핀란드 교실혁명》이 수십만 권이 팔리더라도 우리 교육 얼거리는 늘 제자리걸음이거나 뒷걸음에 그치리라 봅니다. 저마다 형편 때문에 자가용을 장만하더라도, 타야 할 때만 타고 되도록 멀리하는 매무새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핀란드 교실혁명》을 가슴찡하게 읽고 새기고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머리와 손발이 따로 놀고 말리라 봅니다.

 삶을 바꾸어 주는 책이 있기도 하지만, 삶을 바꾸어 주는 책을 바라기 앞서 내 삶을 바꾸는 가운데 만나는 책입니다. 내 삶을 바꾸어야 책이 책 그대로 보이며, 내 삶을 바꾸는 동안 책에 담긴 알맹이가 꾸밈없이 내 마음밭에 속속들이 스며듭니다. (4342.10.26.달.ㅎㄲㅅㄱ)


 ┌ 《핀란드 교실혁명》(비아북,2009)
 ├ 글 : 후쿠타 세이지 / 옮긴이 : 박재원, 윤지은
 └ 책값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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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나무의 노래
아와 나오코 지음, 김난주 옮김, 정지현 그림 / 달리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23 ― 아침이슬과 저녁햇살 잊은 우리 삶이라면
 : 아와 나오코, 《바람과 나무의 노래》



- 책이름 : 바람과 나무의 노래
- 글 : 아와 나오코
- 그림 : 정지현
- 옮긴이 : 김난주
- 펴낸곳 : 달리 (2009.8.10.)
- 책값 : 9500원


 (1) 아침이슬과 저녁햇살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엊저녁, 인천 부개역 앞에 자리한 헌책방 〈책사랑방〉 나들이를 할까 생각하면서 전화를 겁니다. 헌책방 〈책사랑방〉 아저씨는 책을 사러 밖에 나갈 때에는 가게를 비우기 때문입니다. 또르르르 또르르르 …… 퍽 길게 울리는 동안 받지 않습니다. 안 계신가 하고 끊으려 할 무렵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조금 낯선 목소리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인사를 여쭙는데, 생각대로 낯선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아, 최종규 씨세요? 예전 오○○ 사장님한테서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시를 쓰는 고규태라고 합니다. 열흘 전에 갑자기 책방을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열흘’이라는 말마디에 움찔 놀랍니다. 꼭 열흘 앞서는 한글날이었고, 한글날 앞뒤로 해서 〈책사랑방〉에 꼭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한글학회에 일을 나오느라 짬을 도무지 못 내고 있던 터에 여러 달째 찾아뵙지 못해 궁금하기도 하고 책도 보고 싶었거든요. 조금 더 바지런을 떨었다면 예전 아저씨가 있을 때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제가 미적미적 바쁘다는 핑계로 어수선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헌책방 〈책사랑방〉을 새로 이어받은 분을 만날 수도 있겠지요. 책과 책방과 헌책방을 좋아하는 일하고 헌책방 일꾼이 되어 책살림을 꾸리는 일은 아주 다르기 때문에, 전화로 이날 저녁에 만나자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부랴부랴 전철을 탑니다. 오늘 따라 인천으로 돌아가는 전철이 퍽 늦습니다. 전철을 타니 기사가 안내방송을 합니다. “제 시간보다 많이 늦어지게 되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지금 더 늦어지고 있습니다. 객차가 혼잡하오니 다음 열차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퇴근시간에 십 분이 훨씬 넘도록 늦어 버린 전철을 보내고 다음 전철을 타려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빠른전철을 용산부터 탔으니 제법 널널하긴 했지만 영등포역에 다다르자니 어느새 미어터지고, 신도림역과 구로역에서는 장난이 아닙니다. ‘히유, 오늘도 이렇게 악다구니로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서로 악다구니가 되어 미워하고 밀치고 하면서 짧지 않은 동안을 오징어떡이 된 채로 견디어야 하는가?’ 송내역에서 내려 느린전철로 갈아탈 때까지도 북새통은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이런 북새통에서 손에 책을 쥐고 있는 사람은 제 둘레에 저 빼고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들 귀를 틀어막고 손전화로 텔레비전 보기에 바쁩니다. 아가씨들은 연속극이나 김연아를 보고, 아저씨들은 한국시리즈 야구경기를 봅니다. 손전화로 화투를 치거나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이 드문드문 보입니다. 밀리거나 밀치거나 밟히거나 밟거나 서로 아랑곳하지 않고 두 눈을 손전화에만 박아 놓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지옥철에서는 책읽기로는 마음을 넉넉하거나 너그러이 다스릴 수 없을는지 몰라. 이런 지옥철에서 날마다 시달리는 채 젊음과 늙음을 다 보내야 하는 요즈음 도시사람한테는 유행노래와 연속극과 영화와 운동경기 아니고서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는지 몰라.’

 찡긴 몸을 송내역에서 가까스로 빼내고 한숨을 돌리면서 북새통 지옥철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길을 고쳐야겠다고 느낍니다. 모두들 더없이 불쌍한 사람이 아니겠느냐고 느낍니다. 다른 사람뿐 아니라 저 또한 불쌍한 님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는 사이가 아니라 매섭게 눈알을 부라리면서 빈자리를 날름날름 노리는 남남이 아닌가 싶습니다. 훌륭하거나 거룩한 책으로 마음을 알뜰하게 채워 놓는다 할지라도, 이 지옥철을 타면서 사랑과 평화와 믿음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일이란 하느님이나 부처님한테나 바랄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울에서 막 전철을 탈 때에는 거의 기울던 해님이 송내역에서 느린전철로 갈아타고 부개역에서 내릴 때에는 어두움으로 바뀝니다. 시간을 살피니, 이즈음은 땅거미가 찬찬히 내리며 도시 골목길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 저녁밥상을 마주하거나 숨바꼭질 마무리를 짓는 무렵이구나 싶습니다. 제 어릴 적을 돌아본다면, 얼른 저녁밥상 물리고 잽싸게 다시 밖으로 뛰쳐나와서 깊어가는 밤까지 숨바꼭질을 이어가는 저녁나절 첫무렵이구나 싶습니다. 때로는 학교 끝나고 오락실에 처박혀 있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아차차, 이렇게 늦게까지 오락실에 처박혀 있으면 집에서 들통이 나는데.’ 하면서 근심걱정에 가득 쌓인 채 두려움에 덜덜 떨며 집으로 돌아가던 무렵이었고요.

 헌책방 살림을 이어받은 시인 아저씨는 “최종규 씨는 모든 책은 헌책이라고 말하셨는데, 저는 헌책을 읽으면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을 들려줍니다. “세상에 나오는 책들이 갈수록 지혜는 적어지고 모든 분야에서 처세와 성공에만 초점을 맞춰 놓고 있”다는 생각을 덧붙입니다. “인문학 책에까지도 그래요.” 하고 한 번 더 덧붙입니다. 당신은 이 헌책방이 문닫지 않게 하고 이어받은 일이 참으로 기쁘다면서, “헌책방이란 영원히 다다르지 못할 듯하던 책을 만나는 곳”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시인 아저씨 말이 아니어도, 제 생각은 시인 아저씨와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책이 헌책이기에 어떠한 책을 읽든 우리들은 책을 가까이하며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아니, 참다운 사람이 됩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새사람이 되었음을 느끼지 못하거나, 새사람이 되었어도 새마음으로 새일을 새롭게 붙잡는 매무새를 간수하지 못할 뿐입니다.

 헌책방 일꾼이 된 시인 아저씨한테 “길든 짧든 헌책방 일꾼으로 지내며 겪고 본 이야기를 일기로 적어 보셔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소주 한 병을 마신 다음 아슬아슬한 막차가 아직 안 끊길 무렵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목포에서 형한테서 전화가 옵니다. 우리 집 고장난 셈틀을 어찌어찌 고쳐 보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형이 이야기하는 대로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켜고 몇 가지 드라이버 풀그림을 내려받고는 책상셈틀에 옮겨놓고 깝니다. 그렇게 세 가지를 더 깔아 놓으니 비로소 책상셈틀이 예전 모습대로 돌아옵니다. 형한테 고맙다고 말하고는 이제 책상셈틀을 끕니다. 요 며칠 동안 사들인 책을 조금 넘기다가는 스르르 곯아떨어집니다.

 그러고 이튿날 새벽 여섯 시 이 분에 일어나, 여느 날과 같이 아침을 맞이합니다. 아침에 글을 좀 쓸까 하다가 그만두고, 어젯밤 못 다 읽은 책을 마저 펼칩니다. 아침 일곱 시 이십일 분에 집을 나섭니다. 어제 아침과 똑같은 지옥철에 부대낍니다. 오늘은 옆과 뒤에서 그지없이 못난 아저씨들이 팔꿈치로 밀고 신문으로 쑤시고 그럽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뒤를 돌아봅니다. 미어터지는 지옥철에서 억척스레 신문을 쫙 펼치고 읽으려는 아저씨를 노려봅니다. “야, 뭘 째려보는데?” 외려 큰소리입니다. 피식 웃어 주고 고개를 돌립니다. 이게 나이값인가 하는 생각, 이런 나이값으로 당신 집식구한테도 그런 모습밖에 못 보여주느냐는 생각, 참말 안쓰럽고 딱한 삶을 붙잡고 있는 아저씨라는 생각, 이런 사람하고는 말대꾸를 할 값어치가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사람을 윽박지른다든지 꿀밤 한 대 먹일 값어치조차 하나 없다는 생각입니다.

 못났구려 사람들 생각은 잊자고 다짐합니다. 손에 쥐고 있는 책에 좀더 힘을 줍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보았던 끝물 나팔꽃에 살짝 맺힌 이슬방울을 떠올려 봅니다. 하루하루 쌀쌀해지면서 겨울 들머리에 다가선 하루하루를 살갗으로 차근차근 느끼면서 내 마음자리는 이토록 씁쓸하고 못난쟁이로 고꾸라지지 않도록 힘쓰고 애쓰자고 다짐합니다. 내일부터는 집에서 새벽 여섯 시에 나와야겠습니다. 








 (2) 《바람과 나무의 노래》를 읽을 수 있는 가슴


 1943년에 태어나 1993년에 세상을 떠난 아와 아야코라고 하는 일본사람 어린이책 《바람과 나무의 노래》를 읽습니다. 이 작품은 1973년에 펴냈다고 합니다. 우리 말로 옮겨진 적이 예전에도 있었나 궁금한데, 옮겨진 적이 있든 없든 자그마치 서른 해를 훌쩍 넘은 옛날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이 작품에 담긴 이야기는 나라안팎에서 제법 사랑받는구나 하는 느낌입니다.

 문득, 제 고향 인천에서 수채그림을 늘그막까지도 즐기며 동화를 쓰는 할머니가 떠오릅니다. 수채그림 할머니가 쓴 동화를 읽을 때에도 이 작품 《바람과 나무의 노래》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이 작품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수채그림 할머니가 당신 작품을 책으로 내고 싶어 출판사를 알음알이하니, 출판사마다 하는 말이 “할머니 동화는 참 좋기는 한데, 너무 옛날 옛적 이야기라서 내기가 어려워요.” 하는 대꾸만 돌아왔다고 합니다.

 수채그림 할머니가 사는 동네에서 고개 하나 넘는 곳에 있는 골목동네에는 시와 동화를 쓰는 나이 지긋한 가시버시가 있습니다. 두 분은 예순일곱 나이임에도 시쓰기와 동화쓰기를 꾸준히 이어가는데, 예순일곱 할머니가 쓴 동화 또한 퍽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당신들 오랜 삶과 생각과 땀과 슬기와 사랑이 담긴 동화는 나라안에서 제대로 빛을 못 봅니다. 당신들이 한국사람이 아닌 일본사람이었거나 미국사람이었거나 유럽사람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비슷한 작품이라면 나라안 작가들 땀방울보다 나라밖 작가들 땀방울을 추켜세우는 우리 나라이니까요. 나라안 창작 작가들은 작품모음을 펴내기 힘들고, 나라밖 창작 작가들은 한국땅에서 큰 어려움없이 작품모음을 쏟아낼 수 있으니까요.

 우리 나라에 훌륭한 작가가 많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나라밖 작가는 안 훌륭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 뜻있고 생각있고 사랑있는 작가들 작품은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우리 삶터라는 소리입니다. 나라밖 좋은 작품이 꾸준하게 옮겨지는 일은 반갑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터전과 넋에 걸맞는 작품을 일구려는 손품이 몹시 모자라다는 소리입니다.

 다만, 《바람과 나무의 노래》를 쓴 아와 아야코 님 작품은 참 좋습니다. 따순 바람결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고, 향긋한 나무결이 살며시 스며 있습니다. 바람이 들려주는 싱그러운 노래와 나무가 들려주는 고요한 노래가 함께 깃들어 있습니다. 동화란, 아니 동화를 떠나 문학이란, 아니 문학을 넘어 글이란 이렇게 엮어내는구나 하고 가슴을 톡 건드립니다.


 (3) 가만히 들여다보기


 지난 8월 28일에 처음 손에 쥐고는 그날 곧장 읽어 버린 《바람과 나무의 노래》입니다. 좀 쉬었다가 다시 읽으려고 했으나 그리 하지 못했습니다. 한달음에 끝까지 달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러면 안 돼’ 하고 생각하면서 책상맡에 한 달 남짓 얌전하게 올려놓았습니다. 아무리 반갑다 하여도 이렇게 읽어치우면 속탈이 날 수 있으니 차근차근 삭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비로소 ‘한달음에 읽어치운 책’을 마음으로 삭일 수 있겠다 싶어 다시 한 번 책장을 넘기며, 그동안 내 마음밭에 한 알 두 알 자리잡은 글월을 새롭게 곱씹어 봅니다. (4342.10.20.불.ㅎㄲㅅㄱ)


[9, 19쪽] 나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어요. 어디서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이런 곳에 오게 되었는지. 게다가 이 산에 이런 꽃밭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곧장 되돌아가!’ 나는 자신에게 명령했어요. 하지만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말이죠 … 참 신기한 일이었어요. 나는 이 산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숨겨진 길이 있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멋진 꽃밭과 친절한 새끼 여우의 가게도 있고 말이죠. 나는 신이 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어요.

[25쪽] 산초나무는 가난한 농가의 밭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이 나무, 거치적거리니까 베어 버릴까 싶어.” 농부가 말했어요. “그래요, 여보. 이 나무가 없으면 채소를 좀더 심을 수 있잖아요.” 농부의 아내가 대답했어요. “하지만 엄마, 이 나무를 잘라 버리면 산초나물은 못 먹잖아요.” 그렇게 말한 것은 이 집의 딸 스즈나였어요. “하긴 그렇구나.” 엄마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산초나물은 정말 맛있지.” 그래요. 산초의 새 잎은 봄의 음식에 향긋한 냄새를 더해 주지요. 하지만 스즈나는 산초나물이 먹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어요. 산초나무를 베어 버리면 산초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36쪽] “스즈나가 시집을 간대.” “이웃마을에 사는 부자에게 간다던데.” “광이 스무 개나 있는 집이래.” “듣자 하니, 대단한 집안이라더군.” “그럴 만도 하지. 스즈나는 미인이잖아.” 산타로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그저 먼 산만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스즈나는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니까, 부자가 되겠네.’ 그런데 산타로네 집은 나날이 기울어 갔습니다. 엄마가 몸이 허약해져 산타로가 가게를 운영하게 된 후로는 모든 일이 순조롭지 못했던 것이죠. 손님은 근처에 새로 생긴 가게에 빼앗기고, 지붕은 태풍에 날려가고. 그런데다 산타로는 장사 수완이 하나도 없었지요. 경단에 쓸 팥조차 살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산타로네 찻집의 명물 경단은 끝내 모습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51, 53쪽] 감자와 우유가 아주 맛있는 북쪽 지방 어느 마을의 이야기입니다. 이 마을 어귀에 의자를 만드는 젊은이가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지요. 이 젊은이가 만드는 의자는 모두 튼튼하고 앉으면 편안한 느낌이 절로 들었죠. 어느 날, 이 젊은이가 귀여운 흔들의자를 만들었습니다. “어머나, 정말 멋진 흔들의자네. 누가 주문한 거야?” 아내가 감자 스튜를 만들면서 그렇게 물었지요. “주문은 무슨, 우리가 쓸 거야.” “우리가 쓸 거라고! 하지만 누가 앉는데?” “우리 아이가 앉을 거야.” … 젊은이는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빨간색을 칠해도 그 아이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자 슬퍼서 어쩔 줄을 몰랐죠. 어제 아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아이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리고 물과 하늘도 그 색을 볼 수 없다고.”

[119쪽] “에이, 겨우 이거뿐이에요?” 설탕은 네모난 종이봉투 속에 겨우 한 숟가락 정도밖에 들어 있지 않았어요. “그래, 이렇게 맛있는 게 집집마다 다 있는 건 아니야. 엄마는 옛날에 먹어 본 적이 있으니까, 이건 네가 다 먹으렴.”

[131∼132쪽] 아기 빗방울은 아주머니의 바지자락에 매달려 떼를 썼어요. “여름 동안 비를 뿌려 주면 설탕을 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네, 그랬잖아요?” “이런 멍청이. 비에게 보답을 하면, 해님에게도 바람에게도 보답을 해야 되잖아.” 아주머니는 아기 빗방울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습니다. “우리 집에는 아이들이 많아서 개미들이 핥을 설탕도 없다.” 아주머니는 그런 말을 뱉고는 저쪽으로 가 버렸습니다. 밭 저 너머에 있는 설탕공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고 있습니다. 그때야 아기 빗방울은 엄마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 ‘엄마는 이제 없어.’ 그제야 아기 빗방울은 그 사실을 똑똑하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였습니다. 응석받이 아기 빗방울이 응석을 떨쳐 버리고 분노를 알게 된 것이. “어서 어른이 되고 싶어.” 아기 빗방울은 혼자 중얼거렸어요. 훌륭한 어른이 되면 이 마을에 큰비를 내려 주리라고 생각했어요. “집이고 밭이고 다 떠내려 가게 할 거야.” 그런 말을 내뱉은 아기 빗방울은 엄마의 은 물뿌리개를 껴안고 숲으로 돌아갔습니다.

[171쪽] “뭐가 그리 답답하다는 것인가?” 거북은 목을 다시 움츠리면서 물었어요. 어부 료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쉴 틈도 없다더니, 내가 그 꼴이라 하는 말입니다.” “쉴 틈이 없다! 그거 바람직한 일 아닌가.” “하루하루가 바빠서 그물을 손질할 틈도 없는데 바람직은 무슨 바람직이랍니까. 그물에 조그만 구멍이 뚫린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이 모양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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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책을 읽는다 - 심리학자가 읽어 주는 판타지 문학
가와이 하야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비룡소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12 ― 생각씨앗 자라는 판타지 문학이란 무엇인가
 : 가와이 하야오, 《판타지 책을 읽는다》



- 책이름 : 판타지 책을 읽는다
- 글 : 가와이 하야오
- 옮긴이 : 햇살과나무꾼
- 펴낸곳 : 비룡소 (2006.5.4.)
- 책값 : 13000원



 (1) 사람들이 생각하는 힘이란


 자전거를 함께 타는 벗이자 인터넷신문 기자인 ㄱ아저씨가 제 책을 소개하는 글을 하나 써 주었습니다. 바쁜 가운데 이런 글을 써 주니 고맙다고 느끼고 있는데, 오늘 낮 ㄱ방송국(라디오)에서 전화가 옵니다. 저녁에 전화로 ‘생방송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방송작가는 “아직 선생님 책은 읽지 않았는데요……” 하고 말합니다. 아마 오늘이나 어제 인터넷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오늘 저녁에 모실 손님이 없어 애먹고 있었는데 마침 잘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책 하나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정작 그 책을 읽지 않고도 어떻게 ‘생방송 전화 인터뷰’를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날 대한민국 지식 사회 ‘상상력’은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는 힘이 있지 않을까 하고 느낍니다.


.. 병 때문에 오랫동안 쉬어야 할 때, 환자는 자신이 손해를 많이 본다고 생각한다 … 안타깝게도 병을 앓는 봉인들은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 병은 마리안느의 성장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병은 인간의 눈을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 타인의 눈을 의식할 때 우리의 정체성은 ‘나의’ 것에서 ‘모두’의 것이 되고 복제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 죽은 자의 눈앞에서라면 우리는 잔걱정을 하거나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훨씬 깊은 곳에서, 또는 훨씬 높은 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 어머니를 잃는 것은 어린이의 성장에 큰 타격을 주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성장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평범한 사람은 지닐 수 없는 능력이 발달하는 것이리라 ..  (33, 35, 138∼139, 283쪽)


 어제 경기도 파주로 자전거 수업을 다녀왔습니다. 지난 5월부터 다음 7월까지 모두 아홉 차례 하는 ‘야외 실습 교육’으로 하는 특별강좌를 맡았고, 저는 이 자전거 수업을 할 때면(한 시 반부터 세 시 반까지 합니다), 집부터 자전거를 타고 파주로 갑니다. 그러나 새벽 두어 시부터 깨어나 하루치 글을 미리 쓰고 아기 죽과 어른 두 사람 먹을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뭐를 하고 챙기다 보면 금세 열 시가 가까워지는 바람에, 구로까지는 전철을 타고 자전거로 달린다든지, 그냥 대화역까지 전철을 타고 간 다음 자전거를 타고 파주로 들어가든지 합니다. 어제는 구로부터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자전거도 찻길에서는 똑같은 ‘차’입니다. 법으로는 그렇습니다. 자전거 또한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끝쪽 찻길 하나를 차지하며 달릴 ‘권리’가 있습니다. 법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찻길 하나는커녕 갓길 이십 센티미터나 내어주고자 마음을 쓰는 자동차는 그리 안 많습니다. 버스는 더욱 짓궂습니다.

 생각해 보면, 자전거를 지켜 주는 법을 자동차 모는 사람이 안 지킨다 하여 어느 누가 붙잡거나 딱지 붙이거나 벌금 매기는 일이란 없습니다. 민증에 빨간줄 그어지는 일 또한 없습니다. 너무 짓궂은 짓을 하느라 자전거 탄 사람이 삿대질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렇게 삿대질을 해 본들 미안해 하는 얼굴빛을 하는 자동차꾼은 아직 없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멀리 에돌아 다닙니다. 예전에는 ‘저 사람한테도 동무와 식구와 이웃이 있을 텐데, 자전거를 탄 사람이 동무나 식구나 이웃이었어도 이렇게 몰았을까?’ 하고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찼는데, 아무래도 이런저런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볼 만한 값어치 하나 없는 분들이 아니랴 싶습니다.


.. 소중한 것은 자기 힘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 요나탄의 용기는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는 힘 속에서 나온다. 요나탄은 인간의 운명을 존중하는 한 아무리 악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연장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 ‘쓸쓸함’이라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히 따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필요한 것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  (38, 101, 148쪽)


 대안학교 아이들하고 자전거 수업을 하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어 보았습니다. “친구들 가운데 집에 자가용 없는 사람 있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친구들 가운데 집에 자가용 두 대 있는 사람은?” 하니까 거의 모두 손을 듭니다. 친구들 아버지와 어머니가 따로따로 차를 몰아야 하기 때문이라는데, 아이들을 집부터 대안학교까지 데려다 주자면 차에 태워야 할 터이나, 집부터 당신 일터까지도 언제나 자가용을 몬다는 이야기로구나 싶습니다. 친구들이 하는 말도 그렇습니다.

 열세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인 이 아이들이 운전면허를 딸 나이는 얼마 안 남았습니다. 열아홉이나 스무 살쯤 되면 으레 운전면허를 따려 할 테며, 운전면허를 딴 다음에는 아버지나 어머니 차를 물려받게 될 테고, 그러면 한 집에 자가용이 석 대가 되겠지요. 웬만큼 있는 분들은 한 집에 자가용 서너 대쯤은 아무렇지 않게 굴리고 있는 오늘날 우리 나라이니까요.

 하루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생각해 봅니다. 우리 나라처럼 한 집에 자가용 두어 대, 또는 서너 대를 굴리는 나라는 몇이나 될까 하고. 기름 한 방울 안 나면서 이렇게 자가용을 많이 몰아대고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가 또 있을까 하고.

 자가용을 굴리면서 기름 걱정을 해 보기나 할는지 궁금합니다. 기름 걱정 없이 돈만 부지런히 벌어대는 사람들이 당신 이웃이 겪는 아픔과 고단함을 어느 만큼 헤아릴 가슴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물건’에 생명은 없지만 영혼은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 않을까? … 토티는 마음의 교류를 통해 아이들과 관계를 맺어 간다. 그에 비해 마치페인은 화려한 겉모습이나 옷이나 아름다움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한다. 물론 둘 다 사람을 매료시키는 요소임에는 분명하다. 마치페인이 아름다워지고 아이들이 소중히 다룰수록 마치페인은 점점 더 놀이를 싫어하고 오히려 박물관의 장식품이 되고 싶어 한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사람도 훌륭해지고 남들로부터 중요한 존재로 대접받기 시작하면, 남들과 접촉하기 싫어하여 일종의 ‘박물관’(때로는 ‘원로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곳)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  (48, 71∼72쪽)


 아기를 낳기 앞서부터 옆지기하고 곧잘 찾아가는 신포시장 야채치킨집에는 할아버지 술손이 많이 찾아듭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느낄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이곳에서 만나는 할아버지 술손이 퍽 살갑다고 느낍니다. 할아버지 술손은 거의 날마다 출근하듯 이곳을 찾아오시는데, 가볍게 꼭 알맞게만 술잔을 기울이고는 집으로 돌아가시고, 옆지기가 아기를 배었을 때에는 피우던 담배를 하나같이 끄고, 정 피우고 싶으면 밖으로 나가 피우시곤 했습니다.

 지난주에는 아직 손님이 들지 않던 때라 우리들은 느긋하게 앉아서 ‘우리 때문에 담배 안 태운다는 걱정을 안 해도 되겠구나’ 생각하며 있는데, 삼십 분이 되지 않아 한 분 두 분 찾아드셨고, 슬슬 찾아드는 손님들은 언제나처럼 “아기가 있는데 담배 태우면 안 되지” 하고 말씀하며 아기 앞에서 그 나이에 재롱을 떨어 줍니다. 저번에는 “괜찮아요. (아기가 여기에 있는) 덕분에 우리도 담배 끊고 있는 거지. 이런 기회에 담배 안 피워도 되니 좋아요.” 하면서 웃으셨는데, 조금 뒤 보니 밖에 나가서 피우시더군요.

 그렇지만, 이렇게 마음써 주는 할아버지가 있는 가운데, ‘동네사람들 으레 찾는 닭집’에 아이들하고 찾아온 손님이 바로 당신들 옆에 있는데에도 뻐끔뻐끔 담배 연기 내뿜는 젊은이나 늙은이가 있으며, 아기를 안거나 업고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바로 곁에서 담배 연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뿜는 양복쟁이들이 있습니다.


.. 부모와 자식, 보수와 혁신 사이에는 항상 대립이 존재한다. 우리는 둘 중 어느 쪽이 옳다고 쉽게 결정 내릴 수 없다. 자칫하면 어느 쪽이 이기느냐로 변질되어 둘 다 파멸하고 만다 … 아버지는 여태껏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아이들의 고통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어쩌면 조금만 늦었어도 바니가 미칠 지경에 이르고, 가족들은 바니를 정신병원으로 보냈을지 모른다 ..  (196, 227쪽)


 보리술을 사러 가끔 동네 ‘마트’에 가곤 합니다. 마트에 간다 한들 보리술 한 병이나 두 병을 살 뿐이고, 천 원짜리 재활용비누를 사야 할 때에나 가는데, 이렇게 사들고 셈을 치를 때 보면, 꼭 끼어드는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있습니다. 길어야 1분이 되지 않는 틈을 기다리지 못하고 새치기를 하는 분들은 혼자일 때도 있으나 아이를 데리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언제 한 번 ‘새치기를 해서 당신이 아끼는 시간이 몇 초인가?’를 속으로 세어 보니 20초쯤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새치기는 동네 마트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버스를 타거나 전철을 탈 때에는 언제나 이루어집니다. 다른 자리에서도 으레 일어납니다. 새치기를 하는 사람이 대학교 교육을 받았는지, 어떤 지식 사회에서 일하는지, 또는 공직 사회에서 일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틀림없습니다. 모두들 ‘한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태어났고 가르침을 받았다는 대목. 그리고 모두 다는 아니지만 웬만한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은 ‘한(또는 둘이나 서넛이나 여럿)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와 아버지’ 자리에 있다는 대목.


 (2) 나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이따가 저녁에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ㄱ방송국 작가가 쪽지 하나를 보내 옵니다. 모두 일곱 가지 물음을 적었는데, “언제부터 자전거만 고집하게 됐나요?” 하는 물음과 “자전거뿐 아니라 일상 생활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말이나 “신발도 고무신을 신으신다구요?” 같은 물음이 껄쩍지근합니다. 같은 물음이라 하여도 “언제부터 자전거를 즐겨타고 있나요?”라든지 “요즈음 사람들처럼 돈벌이에 미친 채 살지는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라든지 “운동신이 아닌 고무신을 신으면 자전거 탈 때에 발이 아프지 않나요?”처럼 물어 보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좀더 깊이 헤아리려는 눈길이요 가슴이었다면 다른 이야기를 물어 보려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아직 자전거를 못 타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자전거를 좋아하게 될까요?”라든지, “남들뿐 아니라 저 스스로도 입으로는 지구자원이 어떠하느니 걱정하는 소리를 하지만, 정작 자가용을 못 버리고 텔레비전 안 버리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든지, “농사짓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구두나 운동화를 안 신고 고무신을 신거나 맨발인데, 우리들은 땅을 잃거나 잊으며 신발이며 옷이며 살림살이며 모두 소비문명으로만 치닫고 있구나 싶은데, 이런 가운데 도시에서 즐겁고 옳게 사는 길이란 있을까요?”라든지 하면서.


.. 이 책을 읽다 보면 인간은 과연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에밀리와 샬럿은 인형의 집을 손질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데 이것은 두 소녀의 의지일까 아니면 인형들의 바람 때문일까? … 쉽게 남을 웃기는 방법을 거부했을 때 자기가 만들어 낸 존재의 개성이 발휘되는 것이다. 앞에서 인형과 작중 인물의 유사성을 이야기했지만, 문학작품 속의 작중 인물도 단순히 독자의 흥미에 얽매이기를 거부했을 때 비로소 개성이 발휘되는 법이다 ..  (63, 112쪽)


 저는 자전거를 즐겨타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자전거를 즐겨타기 앞서 즐겨 걸어다니는 사람입니다. 예닐곱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걷고, 인천에서 서울로 또 서울에서 인천으로 걸은 적이 있으며,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늘 걸어다녀야 합니다. 아기를 안고 다니자면 또 걸어야 합니다.

 돈이 없으니 자가용을 안 굴리지 않느냐 물으실 분이 있을 텐데,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환경책 내는 출판사를 돕는 데에 쓰거나 조그마한 환경모임 살림에 보태도록 돕는 데에 쓸 테니, 돈이 있어도 자가용을 굴릴 겨를이 없습니다.

 제가 동네에서 만나는 이웃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여느 때에 걷기를 즐기는 분들이 자전거를 즐깁니다. 자전거를 즐기는 분들은 즐겨 걷습니다. 그러나, 자가용을 즐기는 분들은 걷지를 않습니다. 걷지를 않으니 자전거를 안 즐깁니다. 어쩌다가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며 ‘뱃살 뺀다’고 할 뿐인데, 이렇게 ‘운동한’ 다음에는 어김없이 삼겹살에 소주를 걸치거나 튀김닭에 맥주를 걸치시더군요.


.. 나는 스위스 취리히에 갔다가 어린이책 전문서점에 들러 좋은 책이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가게 점원이 당장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표지에 《레욘예타 형제》라고 씌어 있었다. 순간 ‘아니, 이런 책도 있었나?’ 싶었지만, 이내 그것이 《사자왕 형제의 모험》의 원제임을 떠올리고 이 책은 이미 일본에 번역되어 있어서 읽어 보았다고 말했다. 점원은 “그래요? 역시 좋은 책은 어디서나 즐겨 읽히죠.” 하며 아주 기뻐했다 … 머리로 생각한 ‘꾸며 낸 이야기’는 진정한 의미의 판타지가 될 수 없는 것과 대조적으로, 영혼과 관련된 ‘현실 이야기’는 판타지와 한없이 가까운 것이 아닐까 ..  (81, 255쪽)


 우리 살림에 자가용을 굴릴 겨를은 없지만, 굳이 억지를 써서 굴리려고 한다면 굴릴 수야 있습니다. 그런데 자가용을 굴리면 우리한테 무엇이 좋을는지는 아직 하나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사들이는 책을 다리 허리 등짝 팔 안 아프도록 나를 수 있어서? 아기 데리고 먼 나들이를 하기에 힘이 안 들어서?

 우리 식구는 빨래하는 기계를 안 쓰고 손으로 빨래를 합니다만, 기계를 쓸 줄 모르기도 하지만(저 혼자) 쓸 줄 알아도 맡기고 싶지 않아요. 내 땀과 내 품과 내 시간과 내 사랑을 담아서 빨래를 하고 싶습니다. 내 모두를 바친 빨래하기로 말끔하게 빨아 놓은 옷을 우리 식구가 함께 입고 싶습니다.

 팔이 떨어지건 등짝이 떨어지건 허리가 휘건, 내 마음에 담을 책이기 때문에 내 가방이 실밥이 터지도록 장만해서 용을 쓰며 집으로 나릅니다. 요즈음은 아기를 가슴에 안고 가방을 등에 메고 나릅니다. 아기를 안고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찍고 돌아오면 온몸은 땀으로 젖습니다. 그래도, 아빠 가슴에서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칠 때 보람은, 맨몸으로 자전거 타고 휘휘 온 동네를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난 다음 느끼는 보람하고는 견줄 수 없습니다.


.. 이 책의 9장에 따르면 이 중학교 학생들은 ‘누구나 청바지밖에 입지 않았다.’ 게다가 ‘엉덩이에 걸쳐 입는 나팔바지에 닳아서 빛바랜’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또 ‘그해에 남들과 다르다는 말을 듣고 싶으면 원피스를 입고 교회에 가면 된다. 그것도 다림질한 원피스를.’ 획일화된 제복도 없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보장되는 문화 속에서 복제 인간이 만들어진다. 인간은 무서운 존재다 … 중요한 것은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논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치열하게 대결하면서 양쪽이 얼마나 서로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  (133, 146쪽)


 제가 고무신을 처음 신은 때는 2003년 겨울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골사람은 누구나 고무신을 신으니, 저도 고무신을 신은 셈인데, 그무렵은 충주 산골자락에서 이오덕 님 글을 갈무리하면서 지냈습니다. 이오덕 님 글과 책은 산더미 같아서 이 원고뭉치와 책덩이를 갈무리하느라 바쁘니 농사일을 거든 적은 얼마 없지만, 시골에서 일하며 지낼 때에 어느 누구도 저한테 “고무신을 신네?” 하고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운동신이나 가죽신 차림으로 논이나 밭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시골에서 도시로 나와 책방마실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날 때면 모두들 한결같이 “고무신이네? 게다가 깜장고무신? 요새도 깜장고무신을 파나?” 하면서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학교옷을 말끔히 차려입은 중고딩 아이들은 “저 봐, 고무신이야? 깜장고무신!” 하면서 키득거립니다.

 오일장이든 칠일장이든, 시골 저잣거리에서는 모두 고무신을 팝니다. 농사짓는 시골 읍이나 면에 있는 신집에서도 고무신을 팝니다. 도시에서도, 제가 사는 동네에서 가까운 화수시장 신집에서도 고무신을 팝니다.

 값싸고 질긴 고무신이 좋으면 고무신을 신습니다. 조금 비싸도 여러 해 오래 신는 샌들이 좋으면 샌들을 신습니다. 십만 원을 주고 열 해를 신는다는 가죽신이라면 이런 가죽신을 신어도 될 테지요. 다만, 저는 삼천 원(시골에서는)이나 오천 원(도시에서는)을 치르고 한 해에 한 켤레씩 신는 고무신이 돈을 가장 적게 들이는 신발이라고 느끼며, 제 발바닥도 땅을 좀더 가까이 느낄 수 있어서 좋다고 느낍니다.


.. 할머니가 장황하게 늘어놓는 옛길의 장점에 비해 현대의 도로는 얼마나 밋밋하고 멋이 없는가? 현대인은 빨리 목적을 이루려는 일에만 사로잡혀 과정을 음미하는 일을 잊고 있다. 그러나 옛길을 걷는 것은 여간 힘들지 않다 … 할머니가 기억하고 있는 옛집과 가게들은 이미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 마르틴 할머니의 ‘고향’은 황폐해져 있었다. 그러나 파스칼레는 할머니의 마음의 고향에 한 소녀가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 ..  (270∼273쪽)


 《도시에서 생태적으로 사는 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책까지 다로 쓰고 읽고 배워야 할 만큼 ‘자연을 생각하며 자연스레 사는 길’을 잃거나 버렸습니다. 자연을 생각하며 자연스레 사는 길이란, 오늘날 우리들 거의 모두가 잃거나 잊은 일이지만, 조금만 거슬러 생각하면 우리 어버이 또래에, 또 어버이를 낳아 기른 어버이 또래에는 모두 ‘그와 같이’ 살면서 아무도 ‘생태적으로 사는’이라 하지 않았어요. 더 쓰거나 덜 쓰거나가 아닌 알맞게 쓰며 알맞게 나누며 지냈습니다. 나한테 더 있으니 남한테 더 덜어 줍니다. 나한테 더 없으니 남한테 더 얻습니다. 있을 때 나누고 없을 때 받습니다.

 딱히 ‘느림’을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천천히’를 외치지 않아도 됩니다. 따로 ‘적게’를 들먹이거나 ‘가난하게’를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내 마음과 생각과 매무새가 어느 자리에 있는지 돌아보면서 ‘나한테는 돈과 집과 땅과 물건이 얼마나 있으면 될까’를 짚어 나가면 됩니다.

 예배당에 바지런히 나간다고 믿음이 꼭 깊은 사람이 아니듯, 예배당에 안 나간다고 믿음이 꼭 없는 사람이 아니듯, 사회나 모임에 돈을 많이 바친다고 꼭 나눔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듯, 사회나 모임에 돈 한푼 바치지 못한다고 꼭 나눔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듯, 우리는 우리 길을 알차게 다스리면서 지킬 슬기를 얻으며 스스로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3) 《판타지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읽는 가슴


 심리치료사이기도 하고, 일본 문화청 장관이기도 했던 ‘가와이 하야오’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있습니다. 지난 2007년에 세상을 떠난 이이는 1928년에 태어났으니 여든 해라는 삶을 꾸려 나간 셈인데, 나라안에 이분 책이 꽤나 많이 옮겨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심리학과 철학을 다룬 책이 옮겨졌고, 한 해 두 해 갈수록 심리학책보다는 ‘어린이문학을 말하는 책’이 옮겨졌는데, 지난 2008년 9월에는 《울보 하야오》라는 책을 펴내며 당신이 보낸 어린 나날을 수수하게 들려주면서 따스한 아름다움을 베풀어 줍니다.

 뭐랄까요, ‘심리치료는 이렇게 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까요. 어쩌면, 가와이 하야오 님 이야기를 담은 《판타지 책을 읽는다》며 《그림책의 힘》이며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며 《어린이 책을 읽는다》며 한결같이 심리치료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굳이 심리치료를 한다는 책이라기보다 ‘살아가는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로 꾸미거나 덧보태지 않으면서 나 스스로 내 삶을 돌아보도록 한달까요. 《어린이 책을 읽는다》나 《판타지 책을 읽는다》나 매한가지인데, ‘이런저런 책을 읽어야 좋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습니다. 그저 ‘이런저런 책을 읽다 보니 내 눈이 트였고 내 마음이 열렸으며 내 생각이 깨쳤다’고 털어놓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나라 지식인들은 ‘수준이 낮다’며 건드리지 않는 ‘애들 책이나 읽으’면서 비평을 하는 ‘한갓진 놀음놀이’나 할 뿐이라 여길는지 모르나, 가와이 하야오 님은, 다른 어느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문학보다도 ‘어린이책’에서 빛을 보고 느끼고 껴안습니다. 이 빛을 남김없이 받아먹으며, 냠냠짭짭 즐겁게 받아먹은 다음, 기쁘게 이야기 한 자락을 남깁니다.


.. 이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일이다. 뭔가 ‘유익한 것’, 특히 ‘건강에 유익한 것’이 발견되면 그것이 전체로 퍼져 클론을 제조하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남과 똑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유지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과연 진정하게 유지되는 것일까?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존재인 나 자신이 과연 그런 것에 만족해도 좋을까? … 현대인은 일상생활 속에서 바쁘게 움직일 ‘시간’은 있어도, 영혼에 관심을 보일 ‘여유’는 없다 … 충분한 ‘보호’를 뱓는 존재는 영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법이다 ..  (144, 165, 235쪽)


 어린이책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읽는 책입니다. 어린이책은 ‘어린이만’ 읽는 책이 아니기에, 어린이책을 어린이한테만 읽히는 사람은 아주 잘못된 일을 하는 셈일 뿐 아니라, 당신 스스로 좋은 마음밥을 내팽개치는 셈입니다. 어린이책을 어른이 찬찬히 훑고 살피면서 아이한테 ‘가려서 건네지 않는다’면,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부모나 교사) 크게 잘못하는 셈입니다. 다만,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아이 스스로 읽을 책은 스스로 골라야 하는데, 어버이나 교사 된 사람이 먼저 마음이 뭉클하다고 느낀 책을 보여주면서 건넬 수 있습니다.

 《판타지 책을 읽는다》는 어린이책 가운데 ‘판타지를 다룬 책’이면서 여러모로 손꼽히는 책을 하나하나 파헤치면서, 이 책을 쓴 사람이 얼마나 깊은 마음과 생각을 담았는지 들려줍니다. 이 마음과 생각이 아이들한테 얼마나 아름답고 기쁘게 스며드는 마음과 생각으로 다시 태어나는가를 곰곰이 짚고, 이러한 마음과 생각을 아이들만 받아먹게 하기보다는 우리 어른부터 받아먹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 이 세상에서 쉴 새 없이 일하는 어른들의 눈에는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지만, 사실 어린이나 노인은 그저 존재하고 있는 것,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이 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을 해내는 것이다 … 옛날에는 인간보다 훨씬 더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과학의 힘에 밀려나서 잊혀지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이 아닐까? … 교사나 부모 같은 어른들이 어린이를 시험 점수만으로 평가한다면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보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어린이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려 하지 않고 O와 X의 수만 헤아리는 교사가 있다면, 그는 ‘물감의 하늘색과 진짜 하늘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  (177, 201, 342쪽)


 그러면 ‘판타지 책’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이 판타지라 할 만할까요. 글쓴이 가와이 하야오 님도 책에 밝히지만, 한자말로 해서 ‘상상’이나 ‘공상’이나 ‘환상’이 판타지가 아닙니다. 생각을 넓히고 넓힌다 하여 판타지라 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을 다룬다’고 판타지문학이라 할 수 없다고 못을 박습니다.

 고양이가 하늘을 날든 사람이 하늘을 날든 판타지문학이 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꿈나라를 헤매든 옛날이나 앞날로 날아가서 지낸다고 판타지문학이 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꿈’이든,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곳이 있기 때문에 꾸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바라게 됩니다. 현실이 없는 판타지란 없습니다. 현실을 떠난 판타지란 있을 수 없습니다. 현실 때문에 판타지를 빚어내고, 현실이 있기에 판타지를 문학으로 일구며 나눕니다.

 생각날개라 하면 어울릴까 모르겠고, 생각바다라 하면 어울릴까 모르겠습니다. 생각나무나 생각숲, 생각꽃, 생각하늘, 생각나라, 생각구름, …… 또는 꿈날개, 꿈바다, 꿈나무, 꿈숲, 꿈꽃, 꿈하늘, 꿈나라, 꿈구름, ……을 떠올려 봅니다. 터무니없는 일을 바라는 내 삶이 아니라, 나 스스로 바라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을 여는 내 삶인 판타지를 떠올려 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누구나 내 삶에 환한 등불이 될 판타지 씨앗을 하나쯤은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못 느껴서 그렇고, 우리가 제대로 안 알아채서 그러하며, 우리가 스스로 안 돌보기에 그렇습니다만, 우리 마음과 몸에 깃든 판타지는 튼튼히 자라날 밑땅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들 삶은 몹시 돈에 매이고 이름값에 얽히고 권력에 끄달리기 때문입니다. 판타지란, 그러니까 참된 판타지란 나 스스로 홀가분해지는 삶을 깨닫도록 하는 이슬떨이입니다. 나와 함께 어깨동무를 하며 아름다움을 찾고 느끼고 누리고 나누자고 하는 길동무입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승이 가르쳐 줄 수 없다. 제자 스스로 체험을 통해 터득하는 수밖에 없다 … ‘○○장관’이나 ‘○○부장’ 또는 ‘○○교수’ 등은 물론 모두 가짜 이름이다. 그것들은 머지않아 덧없이 사라진다 … 그러나 오랫동안 가짜 이름이 지나치게 강한 힘을 발휘하는 바람에 진짜 이름으로 보내는 인생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생각해 보면, 결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남녀의 진정한 결합이다. 그 점을 잊고 결혼만 하면 ‘완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말썽이 끊이지 않고, 결국 이혼하게 되는 것이다 ..  (287, 318, 328쪽)


 가와이 하야오 님은 당신이 태어나 살았던 일본에서 슬기롭고 빛나는 판타지 씨앗이 자라나기를 꿈꾸었고, 고운 선물을 하나 남기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와이 하야오 님이 아니더라도 일본에서는 싱그럽고 애틋한 씨앗 하나 남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쉽게도 우리 나라에서는 우리 스스로 우리 이웃과 우리 아이들한테 고운 씨앗 하나 남기려는 분보다는 큰 돈벌이를 남기려는 분이 많은데, 모쪼록 이러한 책 하나라도 곁에 두면서, 참맛을 알아보고 참멋을 갈고닦을 수 있으면 얼마나 기쁘랴 싶습니다. 판타지 문학은 사랑이며 믿음이며 나눔입니다. (4342.6.2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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