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
리 홀 원작,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박선영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름답게 가꿀 내 고마운 삶
 [푸른책과 함께 살기 64] 멜빈 버지스, 《빌리 엘리어트》



- 책이름 : 빌리 엘리어트
- 글 : 멜빈 버지스
- 옮긴이 : 정해영
- 펴낸곳 : 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07.2.9.)


 

 (1) 아이와 함께 살기


 아이가 “아빠, 쉬 마려.” 하고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깹니다. 누운 아이를 일으켜세웁니다. 다리를 왼손으로 모으고 오른손으로는 엉덩이 아래에 팔을 넣어 아이를 안아 올립니다. 기저귀를 풀고 바지를 내려, 잠자는 방 옆에 놓은 변기에 앉힙니다. 어두운 방에서 쉬를 하는 아이는 아빠를 안습니다. 쉬를 다 눈 다음 기저귀천으로 밑을 닦습니다. 다시 안아서 잠자리에 누이고, 기저귀를 다시금 채웁니다. 간밤에 오줌기저귀를 한 장도 갈지 않습니다. 요사이는 며칠에 한 번쯤 오줌기저귀 없는 밤을 맞이합니다. 그렇지만, 오줌기저귀를 갈지 않는 만큼 새벽에 꼬박꼬박 오줌 누이기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오줌 누이기를 안 하더라도 기저귀 갈기는 해야 합니다. 기저귀에 오줌을 누어 기저귀를 갈든, 부시시 일어나 오줌을 누이든 어버이로서는 똑같은 일입니다. 아이가 오줌을 꼬박꼬박 가릴 수 있다면, 기저귀 빨래 하나는 훨씬 주는 만큼 집일이 한 가지 주는 셈입니다. 석 돌째 될 올해에 밤오줌을 뗄 수 있을까 꿈을 꿉니다. 오늘과 이듬날과 또 이듬날, 잇달아 밤오줌을 가린다면 비로소 기저귀를 뗄 수 있겠지요. 이렇게 여러 날을 보낸 다음 기저귀천을 두 장 이부자리에 깔아 놓고 보내면서 오줌을 누지 않고 아버지를 불러 오줌을 누자고 한다면, 이제 아버지도 빨래일을 조금 덜 만하겠지요.


.. 어쨌든 저 소녀들은 분명 다르다. 만일 저 애들이 다른 곳에서 저런 꼴로 돌아다닌다면, 당연히 엄마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테고 다들 어린 창부라고 손가락질해댈 것이다. 하지만 이건 발레고, 따라서 걔들이 엉덩이를 살짝 내보인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애들을 바라볼 때마다 어쩐지 내가 무례하고 추잡한 늙은이가 된 기분이다 … 그리고 참 쉬워 보였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저 정도는 할 수 있지 싶었다. 그래서 문득 저애들이 이토록 뻔한 일에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  (43, 44쪽)


 오뉴월에 둘째가 태어나기에, 첫째가 이에 앞서 밤오줌까지 떼어, 첫째 기저귀 빨래가 없기를 애타게 비손합니다. 두 아이 기저귀 빨래를 하자면 기저귀 빨기 하나만으로도 눈코를 못 뜨지 않겠느냐 걱정합니다.

 그러나, 애 한둘 두엇 서넛 너덧 ……을 키우던 지난날 어머님들을 돌아보면, 애 둘이야 아무것 아니라 할 만합니다. 걱정하기에 앞서 받아들일 삶이고, 걱정하기보다 즐거이 여길 삶입니다.

 오줌을 쌌으니 갈아 주고 빨래를 합니다. 배가 고플 때에 밥을 차려 줍니다. 아침저녁으로 씻기고 옷을 틈틈이 갈아 입힙니다. 심심하지 않게 함께 놀며, 꾸준히 책을 함께 읽어 주며, 이것저것 자잘한 집일을 시키거나 심부름을 시킵니다. 아버지 곁에서도 놀고 어머니 곁에서도 놉니다. 함께 마실을 하거나 자전거를 탑니다.

 크게 근심하지 않아도 다섯 살이 되고 열 살이 되면 밤오줌 걱정이란 없겠지요. 때때로 이불에 쉬를 할 때가 있을 텐데, 이렇게 쉬를 하면 빨면 됩니다. 모든 삶에는 뜻이 있고, 모든 일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손이 많이 가야 한다고 벅차기만 하거나 고단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손이 많이 가는 만큼 더 마음을 쏟기 마련이요, 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입으로 옲는 사랑이 아닌 몸으로 껴안는 사랑입니다. 겉핥는 사랑이 아닌 속으로 부둥켜안을 사랑이에요.


.. “근데, 완전 얼간이가 된 기분이야.” “어차피 넌 얼간인데, 그렇다고 뭐가 달라져.” 마이클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빌리, 솔직히 네가 멋져 보여. 난 네가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그건 참 뭐랄까 …….” “뭔데?” “거칠진 않지만 …… 남자다워 보여.” “남자답다고? 별 희한한 말을 다 듣네. 어쩼거나 그건 여자 애들이 하는 거잖아.” ..  (57∼58쪽)


 어제 아침, 멸치볶음을 하면서 멸치를 헹구지 않고 그냥 했더니 몹시 짭니다. 멸치 헹구기를 하자면 얼마나 품이나 겨를을 써야 한다고 이 일을 건너뛰어, 반찬 먹는 식구들 입맛을 버리도록 했는지, 참 딱합니다. 겨울날 찬물로 헹구기를 하면 손이 얼어붙습니다만, 푸성귀를 헹굴 때에도 똑같이 손이 얼어붙으니, 그냥 언손으로 한 번 더 헹구면 됩니다.

 오늘 아침에는 무슨 반찬을 새로 할까 아직 생각해 놓지 못했습니다. 엊저녁부터 곰곰이 생각했으나 아직 마땅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음, 식빵과 달걀과 치즈와 봄동이 있으니, 달걀을 부치고 치즈와 봄동을 속으로 삼아 빵 두 쪽을 위아래로 싸 볼까?

 늘 같은 밥에 같은 국만 끓이는데, 아침을 먹인 다음 빨래하고 물 길으러 다녀온 다음에, 저녁을 마련할 때에는 밀가루반죽을 해서 수제비이든 칼제비이든 끓여 볼까?

 혼자 밥 차리고 치우기 힘들다면,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한테 아주 작은 한두 가지 잔일이라도 맡기면서 차츰차츰 집일에 익숙하도록 이끌어야겠지요. 아이가 훨씬 어릴 적에는 그저 아버지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며 따라하는 놀이였으면, 이제부터는 놀이를 넘어 일로 접어드는 섬돌을 밟는다 할 테니까, 아이 스스로 ‘아버지를 도왔다’고 느끼도록 할 만큼 일을 시켜야겠구나 싶습니다.

 설거지를 마친 그릇을 모시 천으로 닦는 일을 아이한테 맡겼더니 빙글빙글 웃으면서 아주 신나게 해 줍니다. 책을 나른다든지 무어를 나를 때에도 꼭 옆에 붙어서 저도 같이 나르겠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혼자 후다닥 옮기면 금세 끝이지만, 이렇게 혼자 해 버리면 아이로서는 심심합니다. 아버지로서는 더디 걸리며 손이 많이 가면 더 고단할 수 있지만, 일을 더 천천히, 한결 느긋하게 하면서, 아이가 차분히 ‘일 거들기’에 빠져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즐거울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아버지는 이렇게 일을 거드는 아이 모습을 스스럼없이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멋없이 ‘v 그리기’를 하는 사진만 찍어대는 삶이 아니라, 참으로 함께 어우러지며 부대끼는 삶을 사진으로 고맙게 담을 수 있습니다.

 혼자서 다 하면 한식구끼리도 말을 섞을 일이 줄고, 다 같이 하자면 식구들끼리 말을 섞을 일이 잦습니다.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울 살림살이란 어디 먼 데에 있지 않습니다. 즐거우면서 신나는 집안일이 되도록 애쓰면서 도란도란 오붓하게 살아가면 넉넉합니다.


.. 나는 정말로 무서웠다. 학교 건물 앞에 서자마자, 나는 ‘아차! 실수했구나’ 싶었다. 아무도 학교가 그런 곳이라고는 말해 주지 않았다. 나는 그저 춤추는 것만 생각했었다. 그제애 왜 토니 형이 그처럼 화를 냈는지 알 것 같았다. 춤추는 게 다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상류층의 세계였다. 그건 높은 사람들의 세계였고, 누구도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들의 세계였다. 그런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상류층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리고 상류층이 될 생각도 없었다 … (230쪽)


 아이와 함께 살아가기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삶이 아닌, 아이와 어깨동무하는 삶입니다. ‘양육 의무’나 ‘부양 의무’ 따위가 아니라, 아이를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나날입니다. 구태여 아이 머리속에 이것저것 쑤셔넣는 지식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시나브로 받아들일 삶이 되도록 하는 하루하루입니다.


 (2) 시골에서 함께 살기


 지난해 12월 첫머리부터 멧골자락 우리 집 물이 얼었습니다. 달포가 지나도록 날씨는 꽁꽁 얼어붙어 물이 녹지 않습니다. 멧골집으로 들어온 첫 해부터 이만저만 고단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모기장이 없어 여름날 애먹고, 겨울에는 집안을 따뜻하게 하는 데에 어찌저찌 마음을 쏟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은 거의 생각조차 않고 살아왔지만, 혼자 꾸리는 삶이 아니라 여럿이 한식구가 되어 함께 꾸리는 삶이니, 이제부터 제대로 생각하고 살피며 곱씹어야 합니다.

 집 바깥에 바람막이 노릇을 할 문을 새로 한 겹 대든 무어를 하든 어찌 되든 돈이 들겠지요. 돈은 돈대로 들 터이나, 돈에 앞서 어떻게 뚝딱뚝딱 해야 하느냐 하는 일손이 듭니다. 나 스스로 일손을 들여야 하고, 둘째를 낳기 앞서 이 일을 마쳐야 합니다. 날이 풀려 따스해질 삼월이나 사월에 집고치기를 해야 합니다. 어느새 일월이 저무는 만큼 곧장 이월이요, 삼월과 사월도 눈앞입니다.


.. 할머니도 나랑 같이 음악을 듣는 걸 좋아한다. 아빠는 요즘 노래가 다 쓰레기 같다고 하지만, 할머니는 그런 걸 신경 쓰기엔 너무 늙었다 … 뭐, 식구들 앞에서 주책을 부릴 수 없다면 어디서 부린단 말인가? 할머니가 원하면 온종일 음악을 듣고 춤추게 내버려 둬야 한다 … 할머니가 왜 거기에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실, 할머니가 무엇을 하든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직접 물어 봐도 할머니는 그저 멀뚱멀뚱 쳐다만 본다. 어쩌면 어릴 적에 뛰놀던 곳일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이 동네에서 평생을 살았으니까. 80년 동안. 오, 세상에! 80년이라니. (14, 17∼18쪽)


 지난 하루와 이틀과 사흘 들을 곰곰이 돌아보니, 집에 물이 언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어찌저찌 살기는 잘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집에서 물을 못 쓰니 집에서 씻고 치우고 하기란 퍽 힘듭니다. 개수구를 씻거나 뚫기도 벅찰 뿐더러, 무엇 하나 수월히 넘길 만한 일이 없습니다.

 시골살이를 할 사람들이 시골살이를 찬찬히 보듬지 못한 탓인데, 아이 어머니가 몸을 건사하기 힘들어 이런 일을 같이 헤아리지 못한다면, 아이 아버지가 한결 슬기롭고 차분히 이 일을 건사해야 합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보낼 집부터 느긋해야 이 일을 하든 저 놀이를 하든 제대로 합니다. 집에서 물을 못 쓰니, 물을 긷거나 빨래를 하러 멧길을 걸어 웃집까지 다녀옵니다. 날마다 이렇게 오가는 길에 아이는 즐겁게 따라나섭니다. 아이로서는 아버지가 날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이 일이라기보다 저랑 같이 겨울날 찬바람 쐬면서 즐기는 마실일는지 모릅니다. 여러모로 고단한 겨울날이지만, 달리 보면 내가 여태껏 얼마나 어리석게 살았는가를 뼛속 깊이 아로새기면서, 아이하고 더 오래 제대로 깊이 사귀면서 집식구 몸앓이랑 마음앓이를 옳게 짚으라는 뜻입니다.


.. “나도 기회만 있었으면 무용수가 될 수 있었어.” “장모님은 가만 좀 계세요!” 아빠가 뒤로 돌아서 할머니에게 고함쳤다. 젠장! 할머니에게 그렇게 소리치다니. 나는 펄쩍 뛰어올라서 아빠 얼굴에 대고 소리쳤다. “아빠, 미워! 아빤 나쁜 놈이야!” … 나쁜 놈! 발레는 내가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건데, 그걸 못하게 하다니. 나쁜 놈! 나쁜 놈! 나쁜 놈! ..  (92∼93쪽)


 밥을 하니까 살림꾼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빨래를 하기에 살림꾼이라 할 만합니다. 아이를 돌보는 만큼 살림꾼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그러나 밥만 한대서 살림꾼이 되지 않아요. 밥만 하는 사람은 밥쟁이입니다. 빨래만 한다면 빨래쟁이입니다. 아이돌보기란 어떠한 삶일까요. 어떻게 하는 일이 아이돌보기이고, 돌봄을 받는 아이는 어떠할 때에 즐겁게 받아들이려나요.

 시골집에서 밥쟁이로 남을 내 삶인지 살림꾼으로 거듭날 내 삶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멧골자락에서 빨래쟁이로 한삶을 보내려 하는지 살림꾼으로 한삶을 누리려 하는지 헤아려야 합니다. 아이하고 어머니 아버지에다가 둘째 아이가 어엿하게 시골사람으로 시골마을을 아낄 삶으로 나아갈는지, 어영부영 바빠맞은 하루를 보내느라 눈코 못 뜨며 보내는 삶으로 허둥댈는지 알뜰살뜰 돌아보아야 합니다.


 (3) 춤과 삶과 일


 문학책 《빌리 엘리어트》를 읽습니다. 영화를 소설로 옮긴 작품인 《빌리 엘리어트》입니다. 이 작품을 영화로 본 사람이 많을 테고, 앞으로 이 영화를 볼 사람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래도록 사랑받을 작품이요, 길이길이 이야기될 작품입니다.

 문학책 《빌리 엘리어트》는 청소년문학으로 여길 수 있고, 그냥 문학으로 여겨도 됩니다. 어찌 되었든 문학책입니다.

 영화로 볼 때면 한두 시간 가만히 지켜보면서 가슴이 젖어들 만하고, 책으로 읽을 때면 같은 대목을 되읽고 곱읽으며 새삼스레 가슴이 뭉클할 만합니다. 영화읽기를 할 때에는 낯빛과 몸짓과 삶터 하나하나를 아주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가슴이 젖어듭니다. 책읽기를 할 때에는 온삶을 머리로 그리는 가운데 내가 꾸리는 내 삶은 어떠한가를 나란히 맞대 놓으면서 내 길을 걷는 좋은 꿈을 꿉니다.


.. 내 말은, 대체 탄광 동네에서 발레 따윌 해서 뭘 하겠냐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에도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도대체 어떤 탄광 말인가? … 하지만 난 광부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설사 광부가 된다 해도, 그게 뭐 어떻다는 건가? 어째서 우리는 발레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 단지 전에 해 본 사람이 없는 거다. 그뿐이다. 따라서 일단 내가 하고 나면, 그건 우리가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도 우리 중에 한 사람이니까. 남자들이 모두 아빠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단지 춤춘다는 이유로,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  (51, 91쪽)


 ‘빌리 엘리어트’는 춤꾼이 아닙니다. 그저 춤을 좋아하는 아이입니다. 춤을 출 때에 어쩐지 새 기운이 샘솟으면서 아름다운 땀방울을 흘리는 아이입니다.

 빌리 엘리어트는 ‘전문 춤꾼’이 될 수 있습니다. 빌리 엘리어트는 전문 춤꾼이 안 되고 ‘광부’가 될 수 있습니다. ‘광부로 일하면서 춤을 즐기는 사람’이 될 수 있겠지요. 탄광마을에서 춤을 선보이면서 이웃 ‘탄 캐는 일꾼’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 될 만하고, 다 함께 춤추기를 즐기면서 ‘춤추는 탄광사람들’ 무대를 마련할 수 있어요.

 어느 길로 가든 빌리한테는 빌리 삶입니다. 춤을 추어도 좋고 안 추어도 되는 빌리 삶입니다. 다만, 빌리는 퍽 어린 날, 빌리가 걸어갈 길에서 ‘춤이란 무엇인가’를 깨닫습니다. 억지로 하는 춤이 아닌, 돈을 바라보는 춤이 아닌, 이름을 드날리려는 춤이 아닌, 몸이 스스로 움직이는 춤입니다. 몸과 춤이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 아빠는 아빠대로 내가 춤추기 때문에 계집애 같다고 생각했고,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내가 당당하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계집애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  (88쪽)


 계집애가 추는 춤을 춘다고 계집애 같다 할 수 없습니다. 계집애가 추는 춤을 추기에 더없이 사내애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사내애가 하는 일을 하기에 훨씬 계집애 같다 할 만합니다. 어떠한 일이든 ‘사내가 할 일’과 ‘계집이 할 일’이 따로 나뉘어지지 않거든요. 아기씨를 내놓는 일이란 사내만 할 수 있고, 아기씨를 받아 아기를 낳는 일이란 계집만 할 수 있습니다. 아기한테 젖 물리기도 계집만 하겠지요. 그러나, 이 일을 뺀 모든 일은 사내와 계집이 따로 없습니다. ‘사람’으로서 할 일입니다.

 빌리가 깨달은 춤추기란 ‘계집애만 추는 춤’이 아니라, ‘춤추며 흘리는 땀방울을 사랑하는 사람이 추는 춤’입니다.


..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엄마가 있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거다. 엄마는 아빠와 형이 그렇게 싸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다 ..  (134쪽)


 어느 누구라도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구라도 아름답게 살도록 목숨을 선물받았다고 느낍니다. 어느 누구라도 아름다운 삶을 아름다운 꿈으로 빛내야 한다고 여깁니다.

 돈을 많이 벌 때에 아름답지 않습니다. 크고 멋진 집에다가 빠르며 예쁘장한 자동차를 갖추어야 아름답지 않습니다. 얼굴을 뜯어고쳐야 아름답지 않습니다. 노래를 잘한다거나 머리가 똑똑해야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아름답습니다. 엉겅퀴는 엉겅퀴라서 아름답습니다. 우리 집 앞에 우뚝 선 두릅나무는 두릅나무라서 아름답습니다. 콩새와 박새는 콩새와 박새라서 아름답습니다. 개구리는 개구리이기 때문에 아름다워요.

 저마다 제 길을 씩씩하게 걸어갈 노릇입니다. 저마다 제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일입니다. 저마데 제 길을 튼튼하게 걸어가면서 따스함과 넉넉함을 사랑할 삶입니다.

 빌리는 빌리 삶을 뚜벅뚜벅 걸으면서 춤 하나를 붙잡을 뿐입니다. 빌리는 빌리 삶을 열면서 춤하고 사귈 뿐입니다. 빌리는 빌리 삶을 사랑하면서 춤하고 하나가 될 뿐입니다. 춤을 추면서도 밥을 먹어야 하고, 춤을 춘 다음에도 옷을 입어야 하며, 춤을 추기 앞서도 잠을 자야 합니다. 살림꾼이면서 한 아이요 바야흐로 어른으로 자라나며 오늘은 멋스러운 춤을 선보이는 빌리입니다. (4344.1.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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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인권 수첩 - 개인의 자유와 지구 공동체를 함께 생각하는 인권 교과서 세상이 보이는 지식 3
크리스티네 슐츠-라이스.공현 지음, 안미라 옮김 / 양철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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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권과 인권을 여는 작은 문
 [책읽기 삶읽기 36] 크리스티네 슐츠-라이스·공현, 《청소년 인권 수첩》



 청소년한테는 사람으로서 권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담은 《청소년 인권 수첩》을 읽다.

 더없이 마땅한 소리이기 때문에 굳이 ‘청소년 인권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지없이 마땅한 인권을 인권다이 다루지 않으며 섬기지 않는 우리 나라이기 때문에, 이 같은 책이 나올밖에 없고 읽힐밖에 없으며 읽을밖에 없다.

 《청소년 인권 수첩》이라는 책이 우리한테 들려줄 이야기는 오로지 하나이다. 책 첫 대목에 나온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자유와 권리는 은수, 현수, 정아, 윤기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자유이자 권리이다(12쪽).” 두 줄이야말로 이 책이 다루는 고갱이이다. 누구나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꾸려야 한다.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배워야 한다.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펼치면서, 저마다 좋아하는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 스스로 그리 옳거나 바르게 살아가는 매무새를 익히지 못한 만큼, 이런 말을 하면서 꼬리말을 달아야 한다. 내 권리를 아주 마땅히 누리는 만큼, 내 이웃은 내 이웃으로서 권리를 아주 마땅히 누려야 한다. 나 혼자만 누린다는 권리가 아니라, 누구나 저마다 다 다른 권리를 마음껏 누려야 한다.

 그러니까, 남을 해코지하는 일은 권리가 아니다. 남을 따돌리는 짓 또한 권리가 아니다. 남을 해코지하거나 따돌리거나 괴롭히거나 등치거나 속이는 짓은 모두 ‘폭력’이다.


.. 우리가 어떤 물건이든 최대한 싼 가격에 사려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은 말도 안 되게 적은 임금을 받으며 인권이 짓밟히는 환경에서 일을 한다 …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쉽사리 폭력의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그 책임은 여성들에게 돌려지곤 한다 … 사람들의 생각이 다른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그 생각 대문에 때때로 처벌을 받기도 한다면 그 사회는 참 ‘무서운’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국가는 국민들을 좀더 쉽게 다루기 위해 우리가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  (72, 177, 153쪽)


 ‘권리’와 맞선 낱말은 ‘폭력’이다. 권리와 폭력이란 종이 앞뒤와 같달 수 있다. 권리라 여기지만 막상 폭력이 될 수 있고, 폭력에 기울던 슬픈 사람이라지만 언제라도 권리로 돌아올 수 있다.

 물건 하나를 더 값싸게 사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폭력이 될 수 있는 줄 잊는 사람들이다. 더 값싼 물건을 찾는 일이란 권리이다. 그러나, 내가 더 값싸게 사들이고 싶어서 ‘권리 아닌 폭력을 휘두르며 값싸게 파는 장사꾼’한테 홀리거나 이끌린다면 나 또한 폭력을 저지르는 셈이다.

 쌀 한 말을 사다 먹을 때에도 ‘더 값싼 쌀’을 바라는 나머지, 농사짓는 이들 스스로 화학농을 짓고야 만다. 땅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곡식을 사랑하고 사람을 살찌우는 거름을 내는 유기농을 하도록 이끌자면 ‘더 값싼 쌀’이 아니라 ‘제값 치르는 쌀’을 사서 먹어야 한다.

 책 한 권을 산다 할 때에는, 출판사부터 ‘인터넷책방에서 깎아서 팔고 적립금 쌓을 돈까지 헤아리는 책값 부풀리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책을 사 읽는 사람은, 출판사가 책값 부풀리기를 안 하리라 믿으면서 제값을 치르며 사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출판사-책방-독자, 여기에 출판사와 책방을 잇거나 책방과 독자를 잇는 배달 일꾼과 창고 일꾼들이 저마다 제몫을 찾을 수 있도록 생각을 해야 한다.

 이런 데에 마음을 쓰지 못한다면, 다른 데에도 마음을 쏟지 못한다. 날마다 밥을 받아먹으면서, 날마다 먹는 내 밥을 누가 어떻게 차리는지 생각이나 하는가. 여남평등이니 남녀평등이니 떠들어도, 오늘날에도 집에서 밥 차리는 몫은 ‘어머니’나 ‘밥어미’와 같은 여자들한테 주어진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아들내미 스스로 밥을 차리는 일이란 아주 드물다. 서로 함께 차리는 일은 더욱 드물다. 알고 보면, 내 살림집부터 ‘내 권리’뿐 아니라 ‘어머니 권리’와 ‘할머니 권리’가 서로 고른 자리에서 넉넉하도록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니, 다른 데에서도 참다운 권리란 무엇인지를 못 보거나 모른달 수 있다.


.. 학생회가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통로는 거의 없다. 학생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일 년마다 학생회장과 반장을 뽑는 일뿐이다 … 성적으로 서열화하는 교육은 평등과 인격에 대한 존중을 가르치기보다는 차별과 배제를 가르친다. 학교에서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 자연에 대한 사랑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  (195∼196, 206쪽)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청소년 인권 수첩》을 읽지 않아도, 청소년이면 누구나 청소년이 얼마나 권리를 못 누리는지를 살갗으로 받아들인다. 학교라는 곳에서 청소년이 누리는 권리란 없다. 청소년은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의무만 있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기’라는 의무만 짊어지는 청소년이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지 못하겠다면, 직업훈련원이나 상고나 공고 나와서 하루빨리 회사원이나 노동자가 되어 돈벌이를 해야 하’는 의무를 짊어질 청소년이다.

 《청소년 인권 수첩》은 매우 마땅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리하여, 자칫 따분하다든지 알맞지 않다든지 하는 샛길로 흐를 수 있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은 우리가 꼭 배워야 하는 것들이다(25쪽).” 같은 대목이나, “지식은 힘이고 인간은 누구나 지식을 습득해 ‘힘을 축적’할 권리가 있다(61쪽).” 같은 대목은 옳지 않다. 이 책을 쓴 사람은 한국사람이 아니라 독일사람이다. 독일이라면 학교라는 곳이 한국처럼 ‘입시지옥제조기’는 아닐 테니까,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은 우리가 꼭 배워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한국땅에서 학교는 대학입시에 쓸모있는 시험문제만 골라서 가르치고야 만다. 사람이 사람다이 아름답게 살도록 돕는 슬기를 일깨우거나 나누지 않는다. 교사들 스스로 교과서나 문제집을 내던지면서 ‘푸름이 삶과 넋을 푸르고 또 푸르게 보살피도록 온힘을 쏟는 일’이란 몹시 드문 일이 되고 말았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영어는 ‘더 아름다운 삶을 더 너른 지구별에서 누리거나 마주하도록’ 돕고자 가르치는 학과목이 아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영어란 ‘세계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세일즈맨이 되어야 하니까’ 가르친다. 영어를 가르치면서 ‘영어로 된 좋은 영화나 문학이나 연극이나 노래’를 알뜰히 즐기거나 누리도록 이끌지 못한다. 더구나 한글로 된 영어사전은 영어사전답게 나온 적이 없다. 영어사전 말풀이는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엉터리로 쓰도록 내몬다. ‘my = 내’가 아니라 ‘my = 나의’로 풀이할 뿐 아니라, 바르면서 알맞고 고운 우리 말을 살피지 못하는 영어사전이다. 이런 영어를 배우는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얼마나 제대로 즐길 수 있을까. 한국땅 한국 학교는 한국 아이들한테 한국말부터 옳게 가르치지 않는다. 한국말부터 옳게 가르치지 못하는데, 한국 아이들은 무슨 지식을 배우고 무슨 삶을 읽을 수 있는가.


.. 우리가 부모님 차를 타고 다니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면 기름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어서 집안 살림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자전거를 이용하면 날마다 공기 중으로 배출하는 유해 물질의 양과 석유 사용량이 엄청 줄어든다는 것이다 ..  (240쪽)


 독일책만 고스란히 옮겼다면 《청소년 인권 수첩》은 퍽 부질없는 뜬구름 이야기로 흘렀으리라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랑 훌륭한 가르침을 담았을지라도, 우리 터전을 살뜰히 굽어살피지 못한다면 안타깝다. 《청소년 인권 수첩》은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는 분이 한국땅 푸름이들 삶을 돌아보는 글을 곳곳에 많이 넣었고, 푸름이 스스로 풀고 맺을 즐거운 삶 이야기를 가만히 들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즐거운 삶’이 참말로 즐거운 삶이 되도록 조금 더 마음을 쏟아 이야기 한 자락 들려주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부모님 자동차를 안 타고 내 자전거를 탈 때에는 공기를 더 깨끗하게 하도록 돕기도 하겠지만,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기쁨과 보람과 아름다움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동안에는, 자동차를 탈 때에는 ‘그저 지나치던’ 마을과 골목과 터전을 더 느리게 바라볼 수 있고, 자전거조차 타지 않으면서 두 다리로 걷는다면 더 천천히 내 삶터를 껴안을 수 있다.

 다만, 자전거도 싱싱 달린다든지 걷기를 하면서도 잰걸음만 걷는다든지 하면 자동차 탈 때랑 똑같다. 곧, 두 다리로 걷든 자전거를 타든 자동차를 타든, 내 삶을 나 스스로 어떻게 가다듬을 수 있느냐이다. 푸름이뿐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인데, 내 삶을 나 스스로 얼마나 사랑하거나 아낄 수 있느냐에 따라 우리네 인권은 오늘부터 새삼스럽게 다시 태어난다. 내 삶을 나 스스로 사랑하지 못할 때에는 내 이웃이나 동무 삶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좋은 삶을 꾸려야 한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삶이 아니라,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길을 찾으며 내가 아주 즐거울 길을 여는 삶이어야 한다.

 삶 없이 지식만 있으면 무엇 하겠는가. 삶은 없이 ‘인권 지식’만 차곡차곡 쟁여 놓는들 우리 터전이 얼마나 나아지겠는가. 내가 디딘 삶터를 제대로 깨우쳐 내가 꾸리는 오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청소년 인권’과 ‘사람 인권’을 바로보는 문을 열 수 있다. (4344.1.25.불.ㅎㄲㅅㄱ)


― 청소년 인권 수첩 (크리스티네 슐츠-라이스·공현 글,안미라 옮김,양철북 펴냄,2010.12.21./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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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바늘꽃 카르페디엠 15
질 페이턴 월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능금나무는 전쟁을 모릅니다
 [책읽기 삶읽기 32] 질 페이턴 월시, 《분홍바늘꽃》


 20세기 첫무렵 유럽에서는 커다란 싸움판이 두 차례 벌어졌습니다. 흔히들 ‘세계대전’이라 하지만, 가만히 따지면 ‘유럽 싸움’입니다. 유럽사람들이 저희 나라나 겨레를 한껏 살찌우려는 마음으로 이웃 나라나 겨레로 총칼을 들고 밀어붙이면서 벌어진 싸움판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판을 벌인 나라나 겨레를 들여다볼 때에, 싸움을 일으킨 나라에서 밑바닥 자리에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농사꾼이라든지 노동자들은 어떤 삶이었을까 궁금합니다. 밑바닥 자리에 있는 사람들 또한 이웃 나라나 겨레로 총칼을 들고 쳐들어가서 죽이고 죽으며 돈과 보배를 빼앗는 가운데 내 밥그릇을 채우는 일을 기쁘게 맞아들였으려나요.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바보처럼 따르거나 얼간이처럼 못난 짓을 하고 말았으려나요.

 유럽에서 펼쳐진 두 번째 큰 싸움판을 무대로 쓴 청소년소설 《분홍바늘꽃》을 읽습니다. 이 청소년소설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싸움을 일으킨 독일 권력자는 크나크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싸움을 일으킨 독일 권력자 뒤에는 세계 경제와 무기시장을 주름잡던 거대재벌이 있었고, 이 거대재벌은 미국에 있는 록펠러와 모건이었다고 합니다. 총칼과 같은 무기란 거대재벌이 돈을 벌어들이는 ‘공장 상품’이고, 더 큰 탱크와 더 빠른 비행기와 더 무서운 항공모함은 더 어마어마하게 큰 돈을 벌어들이는 ‘공장 인기상품’입니다.

 으레 독일하고 이탈리아만 못된 짓을 저질렀다고들 역사책에 적힙니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영국이든 프랑스이든 네덜란드이든 에스파냐이든 …… 아프리카며 아시아며 중남미며 닥치는 대로 쳐들어가서 식민지를 삼았습니다. 이들 ‘힘있고 돈있으며 이름있는’ 유럽 나라들은 제 나라와 겨레 밥그릇을 더 크게 불리려고 총칼을 앞세우며 싸움박질을 했습니다. 어쩌면, 유럽에서 벌어진 큰 싸움이란 권력자끼리 맞붙은 ‘식민지 넓히기 싸움’이라 해야 알맞을는지 모릅니다. 이 나라 밑바닥 사람이든 저 나라 밑바닥 사람이든 그저 고달파야 하고 싸움터에 병사로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어야 했던 슬픈 굴레인지 모릅니다.


.. 나는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른들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전보다 뉴스에 더 많이 귀를 기울였다. 나는 비행기를 보는 것이 좋았다 ..  (17쪽)


 학교에서 가르치는 한국사나 세계사는 거의 모두 ‘싸움박질을 해서 땅넓이를 얼마나 넓혔고, 정치권력자는 언제 어떻게 물갈이가 되었는가’ 하는 데에 머무릅니다. 지난날 사회와 문화를 다루는 대목 또한 ‘한 나라나 겨레를 이루는 수수한 사람들 삶’이 아닌 ‘권력자가 누리던 삶’을 다룰 뿐입니다.

 우리네 전통문화를 들여다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궁중음식과 궁중옷을 전통문화로 다룹니다. 궁중에서 임금님과 신하들이 누리던 노래를 전통음악으로 여깁니다. 따지고 보면, 역사책을 쓰는 사람은 나라에서 돈과 지위를 받아 나라일을 적바림하는 사람이지, 여느 사람들 사이에서 살면서 여느 사람들 삶과 발자취를 살피거나 적바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인데, 대학교수가 되어 역사를 파고들면서 역사를 쓰지, 골목동네나 시골 농삿집 사이에서 함께 밑바닥 삶을 꾸리는 가운데 역사를 파헤치거나 파고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재 너머 사래 긴 밭 언제 갈려 하느냐” 하고 노래하는 시는 있어도, 몸소 밭갈이 논갈이 씨뿌리기 김매기 가을걷이를 하는 가운데 ‘지식인 스스로 생활인이 되어 땀흘리는 삶을 노래하는 시’는 한 꼭지조차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흐름은 그리 바뀌지 않습니다. 집안에서 살림하고 아이 키우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하는 나날을 노래하는 대중가요나 문학이나 영화는 얼마나 될는지요. 비정규직이든 대형마트 점원이든 중·고등학교 수험생 자리에서든 내 삶을 노래하는 대중가요나 문학이나 영화는 있기나 한지요.


.. 갑자기 짜릿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흐르며 몸이 떨렸다. 자유였다. 아무도 나를 돌봐 주지 않을 것이다. 나를 걱정해 주거나, 뭔가를 시키거나, 제때에 먹으라고 하거나, 이를 잡으려 하거나, 다친다고 막아 주지도 않을 것이다. 어른들은 모두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모두들 전쟁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  (44쪽)


 청소년문학 《분홍바늘꽃》은 영국 런던이라는 도시에서 힘겨이 살아남은 아이들이 주인공입니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싸움을 일으켜 놓고는 아이들이 걱정스럽다며 ‘도시에서 내보내 시골로 옮기는’ 일을 합니다. 그렇다고 시골에 살붙이나 피붙이가 있지 않은 아이들도 많을 뿐더러, 시골로 옮기기만 한다고 아이들이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다. 어른들부터 그저 도시에서만 살고파 하면서 아이들만 달랑 시골로 보내서 무엇이 나아지겠습니까. 어른들 스스로 도시에서 득시글거리는 삶을 그치며 시골에서 손수 땅을 일구어 조용히 꾸리는 삶이라 한다면, 아이들 또한 즐거이 시골로 갈 만합니다. 어른들은 도시에서 돈을 벌거나 싸움터로 나아가 이웃 나라 사람들을 죽이는 수렁에서 허덕이는데, 아이들이 시골로 가고파 할까 모르겠습니다.

 책을 덮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영국이든 독일이든 프랑스이든 이탈리아이든 …… 이들 나라 사람들이 더 큰 도시를 키우지 않고, 스스로 수수하게 농사지으며 제 살림을 조그맣게 꾸리는 즐거움을 누린다면 싸움이 일어났을까 하고.

 싸움판 이야기는 떠올리기 싫어 책상맡 시집을 하나 꺼냅니다. 갑갑할 때마다 늘 펼치는 신동엽 님 시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입니다. 책장을 죽 넘겨 〈산문시 1〉를 읽습니다. “스킨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대통령이 청와대 같은 데에서 갖가지 서류에 둘러싸인 채 일하지 않는다면, 대통령이 짐자전거에 막걸리병을 싣고는 슬슬 골목길을 달리고 고샅길을 달리며 시인 아저씨네에 놀러간다면, 온누리 어디에서고 싸움이 터질 까닭이 없습니다. 너 죽고 나 살자는 끔찍한 싸움이란 벌어지지 않습니다. 총칼을 든 싸움이든 돈뭉치로 벌이는 싸움이든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제대국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고, 국민소득이 이만 달러이든 이십만 달러이든 되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국민소득이 이백 달러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아름다우며 즐겁게 살아가는 길이 있어요. 국민소득이 아예 0원이랄지라도 서로서로 예쁘게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 길이 구멍투성이라서 버스가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사람들은 건물 더미 사이로 좁은 길을 힙겹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가게 진열장들에는 유리창 대신 널빤지가 대어진 채 ‘정상 영업’이라는 글씨가 페인트로 조잡하게 쓰여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붉은 버스 차장 아주머니가 우리한테 몸을 기울이고 창밖을 보더니 말했다. “맙소사. 똑같이 갚아 줘야 돼!” 줄리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 편도 저렇게 (이웃나라를 폭탄으로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짓을) 할까?” 나는 몸소리를 치며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  (66∼67쪽)


 유럽에서 크나큰 싸움이 벌어지던 때, 모든 나라가 무기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몇몇 나라는 그냥 흰 깃발을 들었다고 합니다. 괜한 싸움으로 제 나라 여느 사람들이 다치거나 여느 사람들 살림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흰 깃발을 펄럭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밑자락에서는 조용히 싸우는 사람이 있었다지만, 평화를 지키거나 사랑하는 길은 총칼에 있지 않음을 몸소 보여줍니다.

 한국땅에서 더 나은 교육을 꿈꾸거나 바라는 사람들이 미국으로든 독일으로든 프랑스로든 영국으로든 많이들 배우러 떠납니다. 사진을 하든 그림을 하든 문학을 하든 다들 이렇게 나라밖, 아니 유럽에서 이름난 나라들로 떠나곤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이름난 나라들보다 이름이 적게 나거나 덜 나거나 안 난 나라로 가곤 합니다. 이를테면 스웨덴이나 덴마크나 핀란드로 배우러들 갑니다. 이러면서 ‘핀란드 교육혁명’이라든지 ‘스웨덴 교육혁명’을 읊습니다. 이들 핀란드이든 스웨덴이든 덴마크이든 교육을 혁명하지 않았는데, 우리 사회하고는 아주 크게 다르니까 마치 혁명이라도 되는 듯 여깁니다.

 이들 나라는 전쟁이 아닌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무기 아닌 논밭연장을 만듭니다. 지식이 아닌 사랑을 가르치고, 정보가 아닌 믿음을 일깨웁니다.

 저마다 사이좋게 어우러지며 살아갈 사람임을 몸소 드러낼 뿐이니, 혁명이라는 이름은 걸맞지 않습니다. 누구나 오순도순 얼크러지며 기쁘게 웃을 사람임을 스스로 보여줄 뿐이기에, 대단한 교육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시험을 치를 까닭이 없습니다. 학교는 말 그대로 배움터여야 합니다. 학교에서 교사 일을 맡은 이는 아이들이 참답고 착하며 고운 사람으로 크도록 돕는 한편, 교사 스스로 참답고 착하며 고운 어른으로 당신 넋을 지키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전쟁 반대”나 “평화 사랑”이라는 목소리를 낼 우리들이 아닙니다. 내 삶을 사랑하며 아끼는 길을 조용히 씩씩하게 걸어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내 고향마을을 아끼고, 내 보금자리인 살림집을 사랑할 우리들입니다. 성경책에는 내 한쪽 뺨을 때렸으면 내 다른 쪽 뺨도 때리라 이야기합니다. 우리 옛말에는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 했습니다. 삶은 사랑이고, 사랑은 삶입니다. 전쟁은 미움이고 미움은 전쟁인데, 전쟁이든 미움이든 삶하고는 너무 동떨어집니다.


.. 우리 집 양쪽 옆집과 건너편 집 두 채가 무너졌는데, 창문 유리가 길 끝까지 날아갔다. 우리 집이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만 남았다. 하지만 사과나무는 거의 뿌리까지 둘로 가라지기는 했어도 이듬해 봄에 새싹이 돋아났고 그 뒤로 꿋꿋이 살아남았다 … 바보같이 들리겠지만, 아무리 히틀러의 폭격기가 하늘을 가득 메워도 나뭇잎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해 보였다. 물론 당연히 그래야 하고, 또 그렇게 되었지만 말이다 ..  (63, 76쪽)


 능금나무는 싸움이든 전쟁이든 모릅니다. 분홍바늘꽃 같은 조그마한 들꽃 또한 싸움이든 전쟁이든 모릅니다. 호박꽃이 싸움을 알까요. 오얏나무가 전쟁을 알려나요.

 전쟁무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상추 한 잎보다 잘날 구석이 없습니다. 총칼을 움켜쥐며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히는 권력자는 시금치 한 포기보다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나와 동무를 사랑할 길을 찾을 사람입니다. 내 터와 이웃마을을 고루 아끼는 길을 찾을 사람입니다. 《분홍바늘꽃》에 나오는 아이들은 바보스럽고 우악스러운 어른들 굴레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처음 제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선물받던 때 느낌 그대로, 사랑과 믿음으로 이 땅에서 튼튼하고 당차게 살아내고픈 꿈을 건사합니다.

 어른들은 힘이 좀 여리면 좋겠습니다. 어른들은 돈이 좀 적으면 좋겠습니다. 어른들은 이름이 좀 없으면 좋겠습니다. 수수하고 투박하면서 고즈넉한 삶을 얼싸안는 참사람으로 아이들과 웃고 떠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3.12.23.나무.ㅎㄲㅅㄱ)


― 분홍바늘꽃 (질 페이턴 월시 글,햇살과나무꾼 옮김,양철북 펴냄,2007.12.5./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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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
사기사와 메구무 / 자유포럼 / 1999년 1월
평점 :
절판




 예쁜 삶, 예쁜 집, 예쁜 이야기
 : 사기사와 메구무,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자유포럼,1999)


- 책이름 :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
- 글 : 사기사와 메구무
- 옮긴이 : 김석희 옮김
- 펴낸곳 : 자유포럼 (1999.1.10.)


 (1) 예쁜 삶


 나날이 군대가 좋아진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나 이제나 어디에서 군대살이를 하든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틀림없이 시설이나 장비는 한결 나아질 뿐더러, 뻬치카는 사라지고 최전방부대 가운데 아주 끔찍하게 춥고 오래된 막사는 헐거나 문닫으며 덜 춥고 새로 지은 막사로 옮깁니다. 그렇지만 예나 이제나 어디에서 군대살이를 하든 고달프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삶터는 나날이 민주와 자유가 널리 퍼지거나 뿌리내린다고 합니다. 군대라는 곳도 지난날을 돌이킨다면 오늘날 군대는 참말 민주와 자유가 넘실거린다 할 만합니다. 아마 앞으로는 한결 민주와 자유가 춤출 테지요. 그러면 이곳 군대에 평화나 사랑이나 통일이란 얼마나 깃들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요.

 200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은 201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을 바라보며 ‘세상 좋아졌다’고 말합니다. 199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은 200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을 마주하며 ‘좋은 세상 산다’고 말합니다. 198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은 199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과 부대낄 때에 ‘꿈 같은 곳이네’ 하고 말합니다. 197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은 198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하고 말을 섞으며 ‘놀고먹었다’고 여깁니다. 196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은 197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을 보며 ‘수월히 다녔다’고 봅니다. 1950년대에 군대를 마친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1940년대 일제강점기에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때에 이르러 군대라는 데가 얼마나 무시무시하며 괴로웁고 슬픈 곳임을 이야기합니다.

 더 돌이켜 조선이나 고려나 고구려나 가야 때에 군대로 끌려가야 했을 여느 농사꾼들 삶을 살필 수 있다면 새삼스러우리라 봅니다. 싸움터에서 누군가를 죽이거나 죽어야 하던 이들은 장군이나 대장이 아닙니다. 언제나 맨 밑바닥 병사입니다. 옛날 싸움은 대장이 한 사람씩 나와서 칼을 부딪히며 싸우며 판가름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싸우나 저렇게 싸우나 맨 밑바닥 병사들은 수백 수천 수만이 죽어 나가야 했습니다. 맨 밑바닥 병사인 여느 농사꾼들은 고향마을에서 농사를 짓다가 끌려와서는 몇 해고 죽도록 돌과 흙을 날라 성을 쌓습니다. 살아서 돌아갈는지 죽어서 소식조차 못 남길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 그 경찰관은 도시유키가 언뜻 상상했던 만큼 노골적으로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투가 도시유키의 면허증을 보고 나서 갑자기 딱딱하게 바뀐 것을 도시유키는 놓치지 않았다. ‘성명 : 朴俊成, 국적 : 한국’. 도시유키의 면허증에는 이렇게 기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 물론 성장하면서 처음으로 지문날인을 경험하고, 운전면허를 취득할 때의 불편함을 알게 되자, 그 느낌은 어린 시절에 비해 조금 달라졌다. 좀더 현실적인 문제, 예를 들면 투표권이 없는 것과 취직 차별, 주거 차별 같은 불합리한 대우에 대해서는 화가 나기도 했다 ..  (26, 110쪽)


 우리 집 첫째가 딸아이로 태어나도록 마음속으로 빌고 입으로 노래했습니다. 아이가 사내라면 앞으로 군대에 끌려가야 할 텐데 어떡하나 하고 걱정했습니다. 2011년 봄에 태어날 둘째 또한 딸아이로 태어나기를 빌고 바랍니다. 우리 집 아이가 군대로 끌려가서 ‘사람으로서 사람을 죽이는 짓’을 배우거나 이러한 짓에 길드는 일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찌감치 제도권 학교를 그만두어 ‘학력이 안 되기에’ 군대에 안 갈 수 있던 후배가 굳이 검정고시를 치고 애써 대학 시험을 보려 하면서 군대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혀를 찼습니다. 꿈을 이루는 길은 대학교에 없으며, 삶을 빛내는 길은 검정고시 자격증에 있지 않은데, 이런 데에 매이는 모습이 슬펐습니다. 공익근무를 하든 현역으로 가든 전투경찰이 되든, 계급으로 나누고 신분이 도사리며 명령과 지시에 따라 갖은 욕설과 얼차려와 주먹다짐이 있는 곳이란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더욱이 착한 넋과 참다운 얼과 고운 꿈하고는 동떨어집니다.

 무기를 든 손은 평화를 지킬 수 없고, ‘사람 죽이는 훈련’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돌볼 수 없습니다. 군대는 평화를 지키지 않습니다. 군대는 평화를 억누릅니다. 군대는 더 커지려 하고 더 많은 시설과 장비를 갖추려 합니다. 군대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 나라는 사회와 문화와 교육과 복지에 쓸 돈이 사라집니다. 더군다나 여느 나라살림을 북돋울 데에 쓸 돈조차 모자라고 말아 세금은 더 무거워지고 물건값은 한층 치솟습니다. 이웃나라가 갖가지 무기로 으르렁거리는데 우리들이 무기를 안 들 수 있느냐 하지만, 이웃나라 또한 우리하고 똑같은 생각으로 무기를 갖춥니다. 서로서로 서로를 바라보며 무기를 더 갖춥니다. 서로서로 평화를 생각한다는 말로 무기를 더 갖춥니다.


.. 도시유키도 중학생이 된 뒤로는 여자애와 만날 약속이 있는 날은 미리 어머니한테 말해서 마늘을 뺀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긴 적은 없었고, 어머니에게 그렇게 부탁할 때마다 도시유키가 가슴 아파한 적도 없었다 ..  (39쪽)


 평화를 지키려 한다면 참말로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삶을 일구어야 합니다. 평화를 사랑한다면 참으로 평화를 사랑할 만한 길을 걸어야 합니다.

 비둘기를 하늘에 뿌린다고 평화를 꿈꾸는 일이 되지 않습니다. 평화 노래를 짓거나 평화 포스터를 그린다고 평화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내 삶이 오롯이 평화여야 하고, 내 삶터가 옹글게 평화여야 합니다.

 평화는 꿈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내 삶이 평화요, 내 나라가 평화입니다. 윽박지르는 데에는 평화가 없고, 입시지옥이나 입시전쟁 사회에는 평화가 없으며, 돈 때문에 아프거나 우는 사람이 있는 터전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풀포기 하나 마음껏 자라지 못할 뿐더러, 작은 꽃송이나 나무 하나 흙땅에 튼튼하게 설 수 없는 데에는 평화가 자리하지 못합니다. 평화가 자리하지 못하는 삶터에서 아이들이 ‘평화 동화책’이나 ‘평화 그림책’을 읽는다 한들 평화를 배우지 못합니다. 자동차 걱정 없이 골목에서 뛰어놀 뿐 아니라, 까만비닐 나풀대지 않는 논두렁과 밭두렁에서 까불대며 뛰어놀 수 있어야 평화를 배웁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흙땅을 밟지 못하면서 흙땅을 못 밟는 삶을 깨닫지 못하니, 평화를 가르치거나 배우지 못합니다.


.. 여긴 한국이니까 한국말로 하라고, 길거리나 가게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훈계를 들은 경험은 모두 갖고 있었지만, 선진국인 일본에서 일부러 건너와 도대체 뭘 배우려 하느냐는 빈정거림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남학생들 가운데 병역에 대해 싫은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 마사미 같은 재일교포는 절대 덮어놓고 일본을 칭찬할 수가 없다. 재일외국인으로서 겪는 불편함, 불리함, 차별 ……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재일교포는 그런 것들을 갖고 있었다. 세금을 내는데도 선거권은 주어지지 않고, 그런 것을 큰소리로 외치면 일본인들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마사니는 중학교 때 동급생에게 화교로 오인받고 맥이 풀린 적이 있지만, 재일교포에 대한 일본인들의 대응은 ‘차별’이 아니면 ‘무관심’밖에 없다 ..  (162∼163쪽)


 우리 집 아이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예쁜 아이로 자라도록 돕고 싶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부터 평화를 아끼는 어여쁜 아이로 크도록 어버이 몫을 다하고 싶습니다. 자동차 소리와 매연이 넘실대지 않는 조용한 시골에서 흙을 사랑하는 어버이로 살아가는 내 매무새를 내 아이한테 살며시 이어 주고 싶습니다. 아이한테만 시골 아이가 되기를 바랄 수 없어요. 어른부터 시골 어른이 되어야겠지요. 아이한테만 착한 아이가 되라고 말할 수 없어요. 어른부터 착한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예쁜 아이로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예쁜 어른으로 살아야 하고, 마음이 넓은 아이로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마음이 넓은 어른으로 살아야 합니다.


 (2) 예쁜 집


 서울사진축제가 서울 시립미술관 별관에서 열립니다. 서울사진축제를 여는 분들이 저한테서 사진책 300권을 빌려 가며 행사를 꾸리기에, 제 책이 어느 자리에 어떻게 놓였는가 돌아보려고 아이를 데리고 찾아옵니다. 눈나라인 시골집에서 실컷 눈이랑 씨름하며 지내다가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나오니, 서울이나 서울 둘레에는 눈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기는, 시외버스를 타는 면내만 하더라도 눈이 하나도 안 보입니다. 안쪽으로 조금 깊이 들어가는 시골이거나 멧골이어야 비로소 눈 구경을 합니다.

 지난주에 집식구들이랑 인천마실을 며칠 하고 돌아왔을 때에 날이 몹시 추운 나머지 물이 꽁꽁 얼어 녹을 생각을 안 했는데, 어제 날이 꽤 풀렸을 때에 고맙게 녹아 주었습니다. 얼어붙은 물은 녹는데, 멧등성이와 논밭에 쌓인 눈은 고스란히 남고, 곳곳은 얼음투성이입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참 시골스럽고 멧골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겨울이니까요. 겨울이니까 물이 얼다가 녹을 수 있지만, 다른 데는 겨울다운 모습을 고이 보여줍니다.


.. 가족 중에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이고, 그나마도 친척들과 이야기할 때 사용할 뿐이다. 따라서 도시유키에게는 한글이 무슨 기호처럼 보인다. ‘박준성’이라는 본명조차도 한국말로 뭐라고 읽는지 몰랐다. 통명인 아라이 도시유키라는 이름이야말로 자기 이름이라고 도시유키는 20년이 넘도록 믿고 있다 … 통명을 쓰느냐 안 쓰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순자도 도시유키와 별 차이 없이 성장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차별에 분노를 느끼는 일은 있어도, 분노로 직접 이어질 만큼 명확한 차별을 몸소 경험한 적은 없지 않을까 ..  (30, 48쪽)


 시외버스가 서울로 들어서고 강변역에 닿을 무렵, 어마어마하게 많은 자동차와 버스가 뒤섞였습니다. 15분 남짓 한 자리에서 꼼짝을 못합니다. 새삼스럽지는 않으나, 서울로 들어서거나 서울에서 나가거나 서울에서 돌아다닐 때가 가장 힘듭니다. 서울은 너무 많은 사람과 자동차와 건물과 길과 가게와 돈과 물건이 넘치는 바람에 언제나 어디서나 꽁꽁 막히거나 갇히기 일쑤입니다. 보드라운 바람처럼 보드랍게 다니기 어렵습니다. 시원한 바람처럼 시원하게 움직이기 힘듭니다.

 아마 부산도 비슷하겠지요. 인천 같은 데도 옛 도심은 썰렁하지만 새 도심은 복닥복닥 어지럽고 어수선하겠지요.

 전철로 광화문에서 내려 시립미술관 별관이 있다는 경희궁 쪽으로 걸어가는데, 아이하고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도록 자동차 소리가 시끄럽고 가게에서 뿜어대는 소리에 귀가 따가웠습니다. 아이는 이쪽저쪽 쳐다보느라 바쁩니다. 제대로 걷지를 못합니다. 볼 데가 많고 눈을 끄는 곳이 수두룩합니다. 좁은 골목에서도 차는 이리저리 쏜살같이 내달리고, 큰길에서는 자동차가 거님길까지 올라와 버젓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경희궁 앞에 닿으니, 차를 세우면 안 되는 자리에 까맣고 큰 차가 여럿 보입니다. 까맣고 큰 차 앞에는 경찰차가 여럿 섭니다. 둘레에는 까만 옷 차림 아저씨들이 여럿 무리지어 서성입니다. 바로 옆으로 조금만 가면 차 대는 널따란 데가 나오지만, 차 대는 데에 차를 대 놓지 않는군요. 왼편도 오른편도 차 댈 데가 널찍하게 있으나 이런 데에는 ‘무슨무슨 어르신’들 차를 세우지 않는군요. 사람이 걸어서 지나가야 할 한복판을 떡하니 가로막는군요.


.. “거봐. 저도 모르게 우리 말이 나오잖아.” “아니, ‘우리 말’은 또 뭐야?” 도시유키가 어리둥절해 하자, 순자와 수명이 동시에 대답했다. “우리들의 말.” “우리들의 말 …….” … 재미교포 친구들은 대부분, 적어도 마사미가 보기에는 완전히 미국인이 되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수업 시간을 빼면 그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서로를 통명-리처드나 스테파니 같은 영어 이름-으로 부르지만, 거기에는 재일교포 대부분 갖고 있는 감정적인 응어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  (90, 153쪽)


 골목동네 한복판에서 아파트숲인 연수동으로 옮긴 삶터가 달갑지 않아,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서 고향마을인 인천을 등졌습니다. 아파트만 빼곡하게 들어찬 연수동이라는 데는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 느껴 인천을 떠났습니다. 갓 고등학교를 마친 저로서는 뾰족한 재주가 없으니 인천땅 다른 어디에 삯을 얻어 지낼 수 없습니다. 다만, 서울에 있는 대학교 한 곳에 붙어 다니는 무렵이니까, 대학교 앞에 있는 신문사지국에서 일하기로 했습니다. 신문사지국에서는 먹여 주고 재워 주기까지 한다기에 더없이 홀가분하게 고향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부자 신문 돌리는 지국이 아닌 가난뱅이 신문 돌리는 지국인 터라, 우리 지국은 골목동네 안쪽에서도 지하방이었습니다. 신문사지국에 들어간 뒤 처음으로 지하방을 압니다. 인천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살림집이라 하더라도 지하방은 없거든요. 달동네이든 철거촌이든 모두 햇볕 드는 땅에 집을 짓고 해바라기를 하도록 빨래를 내다 널고 햇볕 쬐는 자리에 꽃밭과 텃밭을 일굽니다. 그렇지만 서울이라는 데는 지하방이나 반지하방이 숱하게 많을 뿐 아니라, 햇볕 한 조각 들지 않는 집과 골목이 대단히 많습니다. 가난뱅이 신문을 돌리면서 가난뱅이 골목길을 골골샅샅 누비며 가난뱅이 살림집에 신문을 갖다 주고, 가난뱅이 살림집 사람들한테서 신문값 걷으러 다니며 새롭게 느끼고 배웁니다.

 서울이란 이렇구나.

 서울에는 갖가지 계급이 있고 온갖 신분이 있는데, 다들 용하게 뒤섞인 채 사는구나, 아니 뒤섞인다기보다 계급에 따라 동네와 골목이 갈리어 이렇게들 쪼그라들며 밟히는구나.


.. 마포구청 근처에 차를 세웠다. 길바닥이 갈라진 가파른 비탈길에는 자동차 몇 대가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었다. 불법주차라는 개념은 이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차를 몰고 가다가 이미 주차된 차량 때문에 통행이 불가능한 길을 만나면 요란하게 경적을 계속 울려대고, 이윽고 나타난 주차 차량의 운전자와 한바탕 싸움을 하면 된다 … 접객업소라면 당연히 손님에게 상냥해야 할 텐데, 그런 개념도 이 나라(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구나 하고 마사미는 떨떠름했다 … 길거리에서 남과 부딪혀도 “미안합니다” 하는 한 마디를 들을 수 없었다. 거기에도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다 … 마사미가 정말로 쓰고 싶었던 것은 ‘나는 곤혹스럽다’는 거였다. 이 나라 사람들의 수선스럽고 거친 태도, 시끄러움, 뻔뻔스러움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아무리 자신을 타일러도 역시 익숙해질 수가 없다고.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내가 아직 한국말을 잘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왜 이렇게까지 주눅이 들어야 하느냐고. 일본에 있을 때는 한국인임을 부그럽게 여긴 적이 한 번도 없는 내가 내 나라에 와서 이렇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어찌된 일이냐고 ..  (117∼118, 132, 136쪽)


 서울은 사람도 자동차도 건물도 회사도 공공기관도 많습니다. 어떻든 서울에서 비비며 버티면 굶어죽지는 않습니다. 제법 돈을 만질 만합니다.

 서울로 오는 버스길에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무르팍에 누인 채 톨스토이 님 책을 하나 읽었습니다. 톨스토이 님은 당신 문학을 빌어 ‘우리가 아름답거나 즐거이 살아가는 길’은 무엇인가를 넌지시 밝히거나 살며시 묻습니다. 당신 입으로 아름답거나 즐거이 살아가는 길을 밝히기도 하지만, 짐짓 모른 척하면서 우리한테 묻곤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 때에 더없이 아름다우면서 그지없이 즐거운 나날일까 헤아려 봅니다. 나부터 내 삶을 어디에서 어떻게 꾸릴 때에 한껏 신나면서 한결 어여쁠까 곱씹어 봅니다.

 제가 쓰는 책이 잘 팔리거나 제가 찍은 사진이 이름을 얻거나 제가 하는 일이 눈길을 널리 받을 때에 제 삶과 일과 놀이가 보람을 거둔다 할 만할까요. 제 살붙이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겨를을 누리는 보금자리에서 돈도 이름도 힘도 없이 책과 사진과 시골살이를 얼싸안을 때에 보람을 느낀다 할 만한가요.

 4만 원짜리 잠집에서 새벽녘에 일어나 고즈넉히 생각에 잠깁니다. 지난번까지는 3만 원짜리 잠집을 찾으러 서울 시내 골목을 다리 아프게 다녔는데, 3만 원짜리 잠집은 불을 잘 안 넣어 주고 침대방만 있어 아이하고 하룻밤 묵으며 고달팠습니다. 1만 원을 더 치르니 조금 낫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하루 얻어 자는 데에도 참 버겁습니다. 온돌방이라지만 씻는 데가 아주 좁습니다. 땅값이 비싼 서울이니 이만 한 데도 고맙게 여겨야 할 텐데, 잠집을 찾으러 아이를 안고 골목을 거닐다가 밤 열한 시가 가까운 데에도 손수레에 과일을 잔뜩 싣고 찬바람을 이기며 앉은 길장수 아지매를 보며 쓸쓸했습니다. 길장수 아지매는 이렇게 힘겨이 일하면서 얼마나 기쁘며 벅찬 보람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하시려나요. 가방이 무겁고 아이를 안은 몸이라 능금 한 알 사지 못하고 지나쳤습니다.


 (3) 예쁜 이야기


 번역이 썩 고르지 못해 아쉬운 문학책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를 읽습니다. 재일조선인 문학을 한국말로 옮길 때이든 일본사람 문학을 한국말로 옮길 때이든 ‘알맞고 바르며 착한 한국말’을 찬찬히 살피는 번역쟁이는 너무 드뭅니다. 그렇다고 제가 일본말로 된 책을 읽을 수 없는 형편이니 그저 고맙게 읽어야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을 투덜투덜투덜 또 투덜댑니다.


.. “뭐랄까, 그 사람은 재일한국인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다는 느낌이야.” ..  (44쪽)


 문학책에서만 만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딱한 노릇이지만 한국사람은 한국사람이 남녘에만 있는 줄 알기 일쑤입니다. 북녘에도 한국사람이 있고 중국땅과 러시아땅에도 한국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아마 ‘한겨레’라는 낱말조차 제대로 살피지 못하리라 봅니다. ‘재일조선인이 있는 줄은 아예 모르는’ 삶이고, ‘중국조선족이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는’ 삶이며 ‘러시아한인이 있다고는 꿈조차 꾸지 않는’ 삶입니다.

 흔히들, 이 나라 정부가 나라밖 한겨레를 모른다고들 하지만, 이 나라 정부에 앞서 우리 스스로 모릅니다. 더욱이, 이 나라 정부를 비롯해 이 나라 사람 스스로 이 나라에서 외롭고 아프며 고단한 이웃을 모르거나 모른 척합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이웃이나 동무가 어떠한 삶인지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아요. 누구보다 이 땅 남녘나라에서 우리 스스로 물을 노릇입니다.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나요?”


..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아이 엠 코리언’이라고 했더니, 그 애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웃으면서 느닷없이 한국말로 말을 걸어 왔어.” “아아 …….” 재일한국인이 외국에 갔을 때 체험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도시유키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한국말을 못한다고, 서투른 영어로 아무리 설명해도, 그 애는 ‘왜 못해요?’ 하고 자꾸만 묻는 거야.” “으응 …….” “왜 못하냐고 물어도 대답하기 곤란하잖아?” ..  (72쪽)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를 쓴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재일조선인이 아닙니다. 그냥 일본사람입니다. 이름부터 알 수 있듯, 사기사와 메구무 님을 낳은 어버이는 일본사람이었습니다. 사기사와 메구무 님이 소설쓰기를 하며 당신 집식구 뿌리를 하나둘 살펴 올라가다 보니 당신 할머니가 북녘에서 태어났던 사람이었음을 알았답니다. 당신 아버지는 한국사람 피와 일본사람 피가 반이 섞인 몸이고,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한국사람 피가 1/4 섞인 몸인 셈이에요.

 당신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한국사람 티를 낸 적이 없었고, 한국사람이라 말한 적이 없을 뿐더러, 어느 구석에서도 한국사람다운 모습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신 할머니가 당신 아버지한테 ‘네 뿌리는 어디이다’ 하고 안 가르쳐 주었는지, 가르쳐 주었으나 모르는 척하며 지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당신 집안 뿌리를 알고 난 뒤부터 소설쓰기와 삶읽기가 달라집니다. 그동안 거의 생각하지도 않고 살피지도 않던 재일조선인 삶자락을 생각하거나 살핍니다. 애써 한국말을 배우려고 연세대 한국어학당까지 찾아와서 배웁니다. 재일조선인 삶을 들여다보고 부대끼면서 소설을 씁니다. 연세대 한국어학당으로 찾아와 한국말을 배우던 나날을 돌이키며 《개나리도 꽃 사쿠라도 꽃》(자유포럼,1998)이라는 수필책을 하나 내놓기도 합니다. 재일조선인 소설쟁이로서 ‘남녘나라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이 얼마나 한국사람답고, 일본땅에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은 어떠한 한겨레이며 일본땅에서 살아가는 일본사람은 또 얼마나 일본사람다운가’라는 대목을 소설로 깊이있게 파헤칩니다.


.. “너무 심해요.” 겨우 말했다. 말해 버리자 더욱 우스워져서, 더욱 요란하게 웃으면서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역시 이 나라는 심해요.” 처음으로 입밖에 내어 말하고 있었다 ..  (196쪽)


 소설책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는 끝무렵 “아미는 이 나라를 사랑해(217쪽)?”라는 물음과 이 물음에 대꾸하는 주인공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인공은 무어라 이야기했을까요?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2004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서른여섯 나이에 흙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까지 살아 마흔둘 나이였다면 이동안 새로 부대끼거나 복닥이는 삶자락 이야기를 더욱 깊고 넓게 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재일조선인과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이 얼크러지는 아프고 슬프며 고단한 삶을 아리따운 붓끝으로 그렸으리라 생각합니다. 미움과 따돌림을 싫어하고 사랑과 평화를 좋아하는 당신 넋을 실은 살가운 문학이 꽃을 활짝 피웠으리라 봅니다.

 책장을 다시 넘기고, 책을 쓰다듬습니다. 히유 한숨을 쉽니다. 예쁜 이야기를 빚어내는 예쁜 넋은 왜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진 채 스스로 흙사람이 되려고 그렇게 빨리 몸부림쳐야 했을까 궁금합니다. 예쁜 넋을 한결 예쁘게 보듬으면서 예쁜 사랑과 예쁜 평화를 둘레 예쁜 벗하고 나누기 힘들었을까 궁금합니다. 밉살스럽거나 짓궂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지만 예쁘고 해맑게 살아가는 사람 또한 많고, 밉살스럽거나 짓궂게 살아가는 사람조차 마음녘 한자리에는 어김없이 예쁜 꽃이 옹송그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소설책 주인공보다 소설쟁이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이 나라를 몹시 사랑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랑하기에 아플밖에 없고 사랑하기에 슬플밖에 없습니다. 예쁜 나라 예쁜 겨레 예쁜 삶터로 거듭나지 못하고 미운 나라 미운 겨레 미운 삶터로 굴러떨어지며 전쟁사랑 돈사랑 학벌사랑 계급사랑 따위로 나아가기만 하니, 예쁜 넋잎 하나는 아파하고 또 아파하다가 그만 찬바람에 바들바들 떨며 숨을 거둡니다. (4343.12.2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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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펴야 봄이 온다 - 다름이라는 사선을 넘어서, 탈북 청소년의 당당한 자기 길 찾기
셋넷학교 엮음 / 민들레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주먹다짐으로 맞서는 남·북녘이기 때문에
 [책읽기 삶읽기 15] 셋넷학교 엮음, 《꽃이 펴야 봄이 온다》



 《꽃이 펴야 봄이 온다》를 읽는다. 남과 북으로 갈라졌을 뿐더러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로 뿔뿔이 흩어진 채 살아가는 이 한겨레 조그마한 땅에서, 남녘땅으로 들어와 살아가는 북녘땅 푸름이들 삶과 넋과 꿈이 무엇인가를 담은 조그마한 책을 읽는.

 《꽃이 펴야 봄이 온다》는 북녘땅에서 살다가 남녘땅에서 살아가는 푸름이들 삶과 넋과 꿈을 담는 가운데, 사이사이 ‘남녘땅 셋넷학교 교사 목소리’를 곁들인다. 교사란 아이들을 이끄는 사람이고, 교사란 아이들보다 먼저 태어나서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아이들보다 한 가지라도 더 잘 알거나 많이 안다면서 이런저런 앎조각을 나누어 줄 사람이겠지.

 지난 2007년에 나온 《금희의 여행》(민들레)이라는 책을 떠올린다. 《금희의 여행》은 함경도 아오지에서 태어나 살다가 7000킬로미터를 거치고 헤치면서 남녘땅에 자리를 잡은 작은 아이 삶을 작은 아이 목소리 결을 고스란히 살린 이야기책이다. 《꽃이 펴야 봄이 온다》 또한 아이들 목소리 결이 잘 살아나 있으나, 남녘땅 교사들 목소리가 섣불리 자꾸 끼어든다. 아이들 글을 읽거나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관람기’와 같은 구경꾼 글을 끼워넣자면 맨끝에 몰아서 적바림을 하거나 아예 덜어야 하지 않았을까. 오늘 이 땅 이 둘레 사람들이 ‘다름을 안다지만 다름이 어떠한 다름인가는 모른다’고 한다면, 이들 푸름이들 목소리를 가만히 귀기울여 들을 노릇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정길·김영심·김하늘·박영명·박정혁·윤나영·최금희·하복란, 이렇게 아이들 이름을 당차게 적바림하고, 이 아이들 스스로 제 이야기를 털어놓도록 곁이나 뒤에서 조용히 거드는 한편, 이 아이들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어떤 꽃이 피어야 어떤 봄이 올까’ 하는 이야기를 길어올리도록 이끌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 처음 버스를 탈 때 잘못 타게 되었는데 ‘푸른마을까지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요?’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우물거리는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한국사람들이 순간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한민족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모든 것이 달라 있었다. 한국 아이들이 입은 옷도 나와 달라 보였고, 그들의 말투 행동도 달랐다. 내 고향 아오지와 전혀 다른 서울에서의 삶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 ‘도대체 왜 강원도에서 왔다고 말한 거야? 함경북도 아오지가 내 고향이라고 말하면 어때서?’ … 차라리 굶더라도 북한에서 친구들과 마음껏 말하고 뛰어놀며, 어디를 가도 내가 아는 사람들이어서 낯설거나 두렵지도 않았으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 나 아오지 여자야. 그래서? 너희 한국사람들은 북한사람 사귀면 감옥에 가냐? 그게 그렇게 창피한 일이야?’ ..  (19∼21쪽)


 아이들은 그냥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한테 꼬리표나 이름표를 붙이려 한다면 ‘탈북 청소년’이 아닌 ‘함경도 아이 아무개’라든지 ‘평안도 아이 아무개’라든지 ‘해주 아이 아무개’처럼 불러야 옳다고 느낀다. 《꽃이 펴야 봄이 온다》라는 책을 살피면, 책날개에 아이들 소개하는 글을 적어 넣을 때에 ‘탈북 청소년’이라 하고 ‘아이들 학력’을 달아 놓았다. 책날개에서 ‘탈북 청소년’이라는 이름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아이들 학력을 굳이 달아야 했을까. 달아야 한다면 아이들 고향마을 이름을 달아야 옳지 않은가. 아이들은 남북녘·일본·중국·러시아라는 울타리를 넘어 서로 같은 한겨레임을 느끼면서 즐거이 어깨동무하기를 바랄 텐데, 이 아이들을 언제까지 이런 눈길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아이들은 탈북 청소년이 아닌 그저 청소년이다. 꼭 대학교를 다녀야 무언가 일할 솜씨가 생기는 아이들이 아니다. 대학교라는 곳이 아닌 삶자리를 찾으며 아름다운 나날을 일굴 아이들이고, 분단과 전쟁이 아닌 평화와 통일을 꿈꿀 아이들이다.

 남녘이든 북녘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러시아이든 전쟁무기 만드는 일을 그쳐야 한다. 남녘이랑 북녘이랑 ‘군대 시설 현대화’는 집어치워야 한다. 남북녘 모두 군량미를 차츰 줄이고 군인 숫자를 나날이 줄여, 바야흐로 군대가 이 땅에서 모조리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한테는 군사훈련이 아닌,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마음을 갈고닦는 올바른 일거리와 놀잇감을 베풀어야 한다. 아이들은 손수 땅을 일구어 내 밥그릇을 햇볕과 바람과 물과 흙 기운을 담아 고맙게 얻는 흐름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부터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살가운 동무와 이웃을 사귀는 즐거움을 맛보아야 한다. 씩씩한 넋, 튼튼한 얼, 착한 마음, 고운 생각으로 푸르디푸른 삶을 보듬어야 한다. 나라에서는 군부대에 쏟아붓던 돈을 사람들 누구나 골고루 아늑하면서 즐거이 살아갈 수 있게끔 써서 문화와 복지와 교육과 의료를 가다듬는 데에 마음을 기울이고, 푸름이들은 서로를 한껏 사랑하고 아끼는 따스한 가슴을 북돋아야 한다.


.. 많은 교회가 북에서 온 우리들에게 도움을 주지만 그 목적이 선교를 위한 것이다. 전도하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중국에서 일 년 동안 하루에 열두 시간씩 무릎 꿇고 성경을 읽은 경험이 있다 … 사람들한테 굳이 이런 공연을 보여주지 않아도 어디 가서든 당당하게 살 수 있는데, 하필 어릴 때 불렀던 노래를 부르게 하는지, 이해가 되면서도 반발심이 생겼어요 … 문제는 남과 북 모두 서로가 다름을 알고 있으나,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  (27, 166, 251∼252쪽)


 연평도에 폭탄이 떨어졌으니 황해도 해주에 폭탄을 돌려주어야 한다면, 황해도 해주에서는 인천이나 서울이나 경기도에 미사일을 되퍼부어야 할 테고, 인천이나 서울이나 경기도에서는 평양이나 평안도에 미사일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야 만다.

 서로서로 얼마나 믿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며 아끼지 못했기에 이렇게 툭탁툭탁 다투어야 하나. 서로서로 얼마나 살피지 못하고 보듬지 못하며 어루만지지 못했기에 이토록 주먹다짐에 윽박지르기에 손찌검으로 마주해야 할까.

 총 한 자루 만드는 돈은 너무 아깝다. 총 한 자루 만든다며 바칠 땀은 몹시 슬프다. 총 한 자루 만드는 일꾼 품이랑 총 한 자루 움켜쥘 사람들 손길이랑 더없이 딱하다. 총이 아닌 쟁기를 쥐어야 하고, 총이 아닌 책을 들어야 하며, 총이 아닌 연필을 들어야 한다.

 어른들부터 꽃다운 삶을 돌보고, 아이들 또한 꽃다운 삶을 가꾸도록 힘써야 한다. 어른들이 앞장서서 손을 맞잡고, 아이들이 나중에 기쁘게 어깨동무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


.. “아무리 내가 좋은 대학을 나와도 한국 아이들을 따라갈 수 없어. 경쟁이 심하고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우리로선 이 땅에서 공부를 해도 힘들어.” … ‘탈북자’라는 이름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북에서 온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에 정착하기 위한 사람이라고 인식하기보다, 살기 힘들어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더 강조하는 것 같다. 또한 이 이름은 북한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름이기도 하다 ..  (31, 243∼244쪽)


 《꽃이 펴야 봄이 온다》를 덮으며 생각한다. 가만히 보면, 이 땅 남녘나라에서는 북녘땅을 고향으로 둔 푸름이들 목소리를 찬찬히 담아낸 책 하나 거의 없지만, 정작 남녘나라에서 예쁘며 착하게 살아가는 푸름이들 목소리를 알뜰히 실어낸 책 하나 거의 없다. 아프고 힘겨이 살아가는 푸름이들 목소리조차 듣기 어렵다. 글쎄, 찾아볼 수 있을까? 다문 몇 권이나마 찾아낼 수 있으려나? 열다섯 푸른 아이 목소리를 어느 책이 실었을까. 열여섯 푸른 아이 삶무늬를 어느 책이 보여줄까. 열일곱 푸른 아이 마음결을 어느 책이 껴안을까.

 서로서로 사랑으로 꽃이 펴야 한다.

 남녘나라 어른들이 남녘나라 아이들을 참다이 사랑하지 않으니, 이런 메마르고 거친 곳에서는 북녘나라 아이들이 찾아왔을 때이건 일본땅이나 중국당 아이들이 찾아들 때이건 곱고 따스한 봄이 찾아오지 못한다. 찬바람 씽씽 부는 이 남녘땅에 무슨 꽃 무슨 봄이 있는가. 매몰찬 이 남녘나라에서 어떤 푸름이가 꽃다운 나이를 누릴 수 있는가. 꽃다운 푸름이를 군대에 집어넣어 살인기계로 바꾸어 내는 남·북녘 모두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수 없는 슬픈 불지옥이다. (4343.11.29.달.ㅎㄲㅅㄱ)


― 꽃이 펴야 봄이 온다 (셋넷학교 엮음,민들레 펴냄,2010.2.27./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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