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린네 20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608



동무를 사귀려면 마음을 상냥하게 열면 돼

― 경계의 린네 20

 타카하시 루미코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6.1.25. 4500원



  타카하시 루미코 님 만화책 《경계의 린네》(학산문화사,2016) 스무째 권을 즐겁게 읽습니다. 어느덧 스무째 권에 이른 《경계의 린네》를 읽으니, 이 만화책 주인공인 ‘로쿠도 린네’하고 ‘마미야 사쿠라’ 사이에 허물이 하나 사라지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로쿠도와 마미야, 또는 린네와 사쿠라는 오랫동안 ‘마음이 맞는 사이’로 가까이 지냈지만 둘은 ‘이 마음’이 무엇인지를 뚜렷이 드러내지 않는다거나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제 스무째 권에 이르러 두 사람은 ‘봄소풍 같은 모임’에 함께 가는데, 마미야 사쿠라는 언제나처럼 로쿠도 린네하고 함께 먹을 도시락을 챙깁니다. 로쿠도 린네는 너무 가난한 살림이라 도시락은 엄두도 내지 못하기에, 늘 살가이 챙기고 마음을 써 주는 동무가 반가우면서 고맙습니다. 도시락도 도시락이지만, ‘마음을 쓰는 동무’가 반가우면서 고마워요. 무엇보다도 마미야 사쿠라라는 동무는 ‘맨눈’으로도 ‘떠도는 넋’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떠도는 넋’을 맨눈으로 보면서도 놀라지 않아요.



몇 년에 한 번 사신 청년단과 흑묘들은 윤회의 바퀴 청소에 동원된다. “어쩐지 무섭네요.” “그래, 이 작업은, 위험한 데다 일당도 없어.” (7쪽)


“로쿠도 린네 이놈!” “말도 없이 혼자만 한몫 챙기게 둘 수야 없지!” “흥, 교화하게 결계 테이프 같은 거나 붙여놓고!” “윽, 어떻게 돌파했지?” “2천 엔짜리 결계 해제약을 사용했지!” “아니, 그렇게 비싼 물건을?” (147∼148쪽)



  맨눈으로 떠도는 넋을 볼 줄 아는 마미야 사쿠라는 늘 로쿠도 린네 곁에 있어 주면서 여러모로 일을 거듭니다. ‘여느 사람’인 마미야 사쿠라는 ‘사신’ 노릇을 하는 로쿠도 린네하고는 다른 세계(차원)에서 살지만, 그래서 ‘사신이 낫을 휘둘러서 떠도는 넋을 성불해 주고 저승으로 보내는 일’을 할 수는 없지만, 따사로운 마음결로 둘레를 맑고 밝게 어루만지는 일을 할 수 있어요.


  곰곰이 돌아보면 바로 이 마음이 가장 너르면서 큰 마음이지 싶습니다. 이런 솜씨가 있거나 저런 재주가 있는 몸짓도 훌륭하다고 할 텐데, ‘훌륭한 솜씨나 재주’는 없더라도 동무나 이웃을 따사로운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는 마음은 그지없이 아름답다고 느껴요. 다시 말해서, 만화책 《경계의 린네》는 ‘두 가지 세계(차원)’에서 다른 삶을 타고나며 사는 두 사람이 ‘두 가지 실타래’를 엮는 줄거리를 들려준다고 할 만합니다.


  먼저 ‘린네’라는 아이는 ‘저승 세계(차원)’에서 태어나서 자라면서 ‘이승 세계(차원)’에서 목숨을 내려놓은 사람들이 ‘떠도는 넋’이 되지 않고 곱게 저승으로 들어와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이끄는 일을 합니다. ‘사쿠라’라는 아이는 ‘이승 세계’에서 태어나서 자라면서 ‘저승 세계’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승 세계 사람들한테는 없는 ‘따스한 마음’을 늘 보여주면서 가르치거나 나누는 노릇을 한다고 할 만해요.



“서, 성가시지 않아?” “괜찮아. 있는 힘껏 여자친구 연기를 할 테니까.” (46쪽)


“마미야 사쿠라는, 천사처럼 상냥해.” ‘그렇구나. 거짓말이라도 기쁘네.’ “그 여자가 그렇게 상냥해?” “그럼. 먹을 것도 잘 주고, 가끔 돈도 꿔 주거든.” (70∼71쪽)



  상냥한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어버이가 아이를 낳아서 돌보는 마음도 ‘상냥함’이리라 느낍니다. 아이가 어버이를 믿고 따르면서 날마다 새롭게 기쁨을 배우는 몸짓도 늘 ‘상냥함’이리라 느껴요. 마음이 맞는 두 동무가 서로 어깨를 겯고 노래하는 삶도 ‘상냥함’이 바탕이 될 테지요. 이웃이 서로 사촌처럼 지낸다고 하는 옛말처럼, 두 이웃이 오붓하게 어울리는 살림살이도 언제나 ‘상냥함’이 흐르는 모습이겠지요.


  내가 어버이 노릇을 하자면 나는 스스로 상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맑고 밝게 자라려면 어버이인 나는 아이들한테 상냥함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동무를 사귀려 한다면 스스로 기쁘게 마음을 열면서 상냥하게 말을 걸고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웃하고 함께 일을 하거나 두레를 이루자면 늘 상냥한 마음결로 일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구나. 로쿠도는 결국, 나보다 부적을 택한 거야. 뭘까? 이, 언짢은 기분은.’ (109쪽)


“이제 따라오지 마. 그 도시락도 어차피 줄 생각이었으니까.” “그 말은 못 듣겠어!” “필요없다고?” “필요해! 같이 먹고 싶어!” (126∼127쪽)



  만화책 《경계의 린네》 스무째 권에서 로쿠도 린네는 마미야 사쿠라가 싸서 준 도시락 가방을 함께 풀어서 함께 먹자고 말합니다. 드디어 두 사람은 돗자리를 펴고 함께 앉습니다. 이때에 두 사람 둘레에 다른 동무랑 이웃이 찾아와서 함께 둘러앉아요. 마미야 사쿠라는 도시락을 쌀 적에 언제나 ‘두 사람 몫’이 아니라 ‘여러 사람 몫’을 싸지요. 마치 로쿠도 린네 둘레에 있는 다른 동무도 함께 배고픔을 달래면서 이야기꽃을 피울 줄 안다는 듯이.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을 쓸 줄 아는 몸짓이 바로 ‘상냥함’이라 할 만하구나 싶습니다. 이 상냥함은 ‘솜씨 좋은 저승 세계 사신’한테도 없는 마음이요, 이 상냥함은 ‘돈이 많거나 얼굴이 잘생겼다고 하는 이승 세계 사람들’한테도 없는 마음이에요. 상냥한 숨결, 따스한 마음, 너른 생각, 기쁜 사랑,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만화책이 《경계의 린네》라고 하겠네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4349.2.8.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당포 시노부의 보석상자 1
니노미야 토모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605



이 돌에 흐르는 숨결을 읽을 수 있을까

― 전당포 시노부의 보석 1

 니노미야 토모코 글·그림

 이지혜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6.2.15. 5000원



  낮에 읍내마실을 나가는 길인데, 두 아이가 마을 어귀 풀밭 한쪽에 있는 흙더미를 보았습니다. 이 흙더미는 아이들이 군내버스를 기다리면서 으레 밟거나 토닥이는 놀잇감이 되어 줍니다. 왜 그곳에 이런 흙더미가 있는지 알 길은 없으나, 아이들은 재미나게 이 흙더미를 매만집니다. 여름뿐 아니라 겨울에도 두 손이 시린 줄 모르면서 맨손으로 흙집을 짓고 흙떡이나 흙만두까지 빚습니다.


  “아버지 봐요, 흙만두예요. 예쁘지요?” 하면서 손에 흙을 가득 쥐고서 내밉니다. 손도 낯도 다 씻고 나왔지만, 이렇게 흙만 보면 만지면서 놀고픈 아이들은 어느새 흙손이랑 흙투성이가 됩니다. 마침 군내버스가 저 앞에서 달려오기에 “자, 얼른 흙 털고 버스 타자.” 하고 말합니다.



“자, 이걸 보렴. 이게 네가 지켜야 할 돌이란다. 우리 일족을 번영하게 해 준 풍요의 돌이지. 날개를 펼치고 붉은 하늘을 나는 새.” (3쪽)


“그딴 거 관두고 더 비싼 코너를 봐! 다이아 같은 것도 잔뜩 있잖아. 기껏 ‘듀가리’에 왔건만!” “그치만 난 빨갛고 귀여운 반지를 갖고 싶었는걸.” (16쪽)



  만화책 《전당포 시노부의 보석》(대원씨아이,2016) 첫재 권을 읽습니다. 《노다메 칸타빌레》를 빚은 니노미야 토모코 님이 새롭게 그리는 만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화책 이름에 나오듯이 ‘보석’을 다루고 ‘전당포’ 이야기가 흐릅니다. 보석은 여러 가지 돌 가운데 더 아름답거나 사랑스레 마주하는 돌입니다. “보배로운 돌”을 가리키는 ‘보석’이니까요.


  그런데 보배로운 돌이든 수수한 돌이든, 아이들 손에 쥐어 주면 모두 똑같은 ‘돌’입니다. 붉게 빛나는 보석이라면 아이들로서는 ‘붉은 돌’이에요. 파랗게 빛나는 보석이라면 아이들한테는 ‘파란 돌’이지요.



“내가 뭘 방해했다고 그래. 장사 방해한 게 오히려 누군데! 보석한테 ‘좋은 기운이 있는 아이’ 같은 괴상한 소리나 하고. 여긴 점집이 아니라고. 가게 평판 떨어뜨리는 짓은 그만둬.” (33쪽)


“왜 ‘합성’이야? 그게 어디가.” “어? 왜긴. 이 아이한테는 뭐랄까, 지구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달까.” “악, 악. 그딴 소리 그만둬.” (35쪽)



  우리 집 아이들은 돌 아닌 ‘시멘트 조각’까지 갖고 놉니다. 뭐, 늘 온 마을 흙을 다 들쑤시면서 노니까, 돌뿐 아니라 시멘트 조각까지 주워서 놀 만합니다. 시멘트 조각을 주워서 ‘돌’로 여길 적에는 넌지시 불러서 “걔는 돌이 아니란다. 걔는 시멘트라고 하는 아이야. 걔는 버리고 다른 돌을 주워서 놀자.” 하고 얘기해요.


  아이들은 돌하고 시멘트 조각이 어떻게 다른지 아직 잘 모르는 눈치입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어릴 적에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가를 제대로 몰랐어요. 어른들이 자주 이야기를 해도 늘 못 알아들었어요. 다만 손과 몸으로 하나를 느꼈습니다. 돌은 아무리 오랫동안 손에 쥐면서 놀아도 손이 안 아파요. 이와 달리 시멘트 조각을 오랫동안 손에 쥐면서 놀면 손이 아픕니다.


  요새는 시골도 마을길을 온통 시멘트로 덮고, 마당까지 시멘트로 덮으며, 도랑이나 논둑까지 시멘트로 덮어요. 흙길이나 흙마당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골입니다. 자전거를 타다가 논둑에서 넘어지면 무릎이나 팔꿈치가 크게 까지지요. 아이들도 여름에 민소매나 반바지를 입고 놀다가 마을길에서 넘어지면 바로 피가 철철 흘러요.



‘부인의 반지. 부인은 행복하구나. 그러니까 그 돌도 기분 좋은 듯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거야.’ (80∼81쪽)


‘그렇게 이상한 기운에 휩싸인 브로치였는데, 그 사람이 만진 순간 그게 사라졌어. 그 사람은 뭔가를 정화하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건가?’ (161쪽)



  우리는 우리 곁에 있는 돌마다 흐르는 숨결을 읽을 수 있을까요? 돌멩이 하나가 얼마나 오랜 나날을 이 마을에서 살아왔는가를 읽을 수 있을까요? 돌멩이 하나가 이 지구라는 별에서 얼마나 수많은 비와 바람과 해와 흙하고 동무가 되면서 살았는가를 읽을 수 있을까요?


  요즈음 사회나 문화로 본다면, 길바닥이 흙길일 적보다 시멘트나 아스팔트일 적에 자동차가 다니기 좋겠지요. 그런데, 길바닥이 시멘트나 아스팔트이면,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매우 나빠요. 어른들한테는 자동차가 다니기 좋은 길이 되지만, 아이들한테는 뛰어다니거나 달리기를 하기에 매우 나쁩니다.


  흙바닥이라면 아이들은 돌을 주워서 흙바닥에 금을 그으면서 온갖 놀이를 하지요. 시멘트나 아스팔트 바닥에서는 아이들이 새로운 놀이를 하기 어려워요. 더욱이 시멘트나 아스팔트 바닥은 어른들도 일을 하다가 쉬면서 주저앉기에 썩 안 좋습니다. 흙바닥이라면 냉큼 앉을 만하지만, 시멘트나 아스팔트 바닥은 뭔가를 안 깔면 앉기에 나빠요.


  무엇보다도 시멘트 조각은 앞으로 백 해나 이백 해가 흐르는 동안 ‘빛나는 돌’이 되지도 않아요. 시멘트 조각은 한 해 두 해 백 해 천 해 흐르는 동안 그예 ‘쓰레기’가 될 뿐입니다. 값싼 건축재료라 하는 시멘트는 겉보기로는 ‘돌’처럼 딱딱한 듯하지만 이내 물러지고, 이내 바스라지며, 이내 쓰레기더미가 되고 말아요. 이와 달리 돌은 기나긴 해를 사람들하고 함께 살면서 이야기를 품지요. 보석도 여느 돌처럼 오랜 나날을 사람들 곁에 있으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요.



“요즘은 보석도 거의 인공적으로 만드는 시대가 됐으니까. 천연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아름다우면 합성이라도 좋다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천연도 커팅으로 연마해야 하니까, 아무튼 노력이 필요하잖아.” (110∼111쪽)



  만화책 《전당포 시노부의 보석》에는 여러 사람이 나옵니다. 어릴 적에 전당포에 ‘매물’처럼 맡겨지면서 ‘전당포 집 아이’로 자란 사내가 있습니다. 전당포 집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보석이라는 돌을 ‘돌에 흐르는 숨결’을 고스란히 읽으면서 ‘타고난 보석감정사’ 노릇을 하는 고등학생 가시내가 있습니다. 아무리 나쁜 기운이 흐르는 돌이라 해도 스스럼없이 두 손으로 만지면서 ‘깨끗하게 해 주는(정화해 주는)’ 보석세공사 사내가 있어요.


  보석은 값진 돌이기에 돈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이 되는 값비싼 돌이기에 목걸이로도 하고 손가락에도 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값지거나 값비싸기에 보석 구실을 하지는 않으리라 느껴요. 마음을 푸근하게 북돋운다든지, 마음을 따사로이 어루만진다든지, 마음을 넉넉하게 쓰다듬어 준다고 느끼기에 저마다 ‘내 빛돌(빛나는 돌)’을 가슴에 품을 만하리라 느껴요.


  돈으로 치자면 ‘돈돌’일 테지만, 삶에 빛줄기가 된다고 여기면서 아끼면 ‘빛돌’이 됩니다. 내 꿈을 아로새기려 하면 ‘꿈돌’이 되고, 사랑하는 두 사람이 뜻을 함께 나루려고 주고받으면 ‘사랑돌’이 되어요. 우리는 어떤 돌을 곁에 둘까요? 우리는 돌 하나에 어떤 마음을 담으면서 곁에 둘까요? 4349.2.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백의 소리 12
라가와 마리모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606



‘전문가가 엉망이라 해’도 난 그저 좋아

― 순백의 소리 12

 라가와 마리모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5.12.25. 4800원



  라가와 마리모 님이 빚은 만화책 《순백의 소리》(학산문화사,2015) 열둘째 권을 읽습니다. 열둘째 권은 겉그림이 살짝 껄끄러워서 큰아이한테 아예 안 보여줍니다. 나중에 훨씬 나이가 들어야 비로소 겉그림을 보도록 하겠지요. 속을 살피면 이런 겉그림하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없습니다만, 굳이 이런 겉그림을 넣어야 했나 싶어요. 왜냐하면 이 만화에서 다루려고 하는 이야기하고 너무 동떨어지니까요.



“니 마지막은 어딘데? 명성을 얻고 실컷 돈이라도 버는 기가?” “아니. 나는, 할배맨치로, 평생 연주할 수 있는 ‘즉흥곡’을 만들고 싶다.” (34∼35쪽)


“글쎄.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는 거죠.” (48쪽)



  《순백의 소리》 열둘째 권에서는 ‘악기를 켜는 사람’이 늘 되새겨야 할 대목을 몇 가지 들려줍니다. 첫째도 둘째도 막째도 언제나 ‘스스로 깎아내리지 않기’입니다.


  이는 다른 자리에서도 늘 같아요. 글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사진을 찍건, 밥을 짓건, 청소를 하건, 아이를 돌보건, 교사로 일하건, 대통령이나 군수로 일하건, 어느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건 늘 매한가지예요. 내가 나를 깎아내리면 모든 것은 끝입니다. 스스로 깎아내리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하지요.


  처음부터 아이를 잘 돌보는 어버이란 없어요. 스스로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일 때에 비로소 슬기롭고 사랑스러운 어버이가 되어 아이를 따사로이 보살필 수 있어요. 스스로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일 때에 ‘악기 켜기가 서툴’어도 사랑스러운 노랫가락을 들려줄 수 있어요.



“네가 무슨 노력을 했는데? 교실 차려서 지도자가 되든가, 지역 행사에서 연주를 하든가, 길거리 공연을 하든가, 음악사무소에 음원을 보내든가! 자비로 CD를 만들어서 팔아 보기라도 했어? 인터넷에 동영상을 올려 보기나 했냐고!” (128쪽)


‘나는, 밑바닥이다. 처음부터 재능이 있었다면, 어떤 풍경이 보일까?’ (181쪽)



  아주 수수하다 싶은 소리만 켤 수 있다는 어느 연주자는 한동안 밑바닥에 가라앉아 지내면서 ‘처음부터 재능이 있다’면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고 밝힙니다. 네, 궁금할 테지요. 재주나 솜씨가 있는 사람은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재주꾼이나 솜씨쟁이는 아주 대단하거나 매우 아름답거나 무척 사랑스러운 모습을 볼까요? 수수한 사람하고 아주 다른 모습을 볼까요?


  거꾸로 생각해서, ‘재주꾼이나 솜씨쟁이는 수수한 사람이 바라보는 모습’이 무엇인지 몰라요. 재주꾼이나 솜씨쟁이는 ‘수수한 사람이 바라보는 곳’이 어디인가를 도무지 못 짚습니다.


  이리하여, 둘(재주꾼하고 수수한 사람) 사이에서는 만날 만한 자리가 없다 할 만해요. 그리고, 둘 사이에서는 만날 만한 자리가 재미나게 있어요. 둘이 바라보는 모습은 아주 다르지만, 둘이 바라보는 곳은 늘 같아요. 무엇인가 하면, ‘삶’을 바라봅니다. 네가 바라보는 삶이랑 내가 바라보는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만, ‘삶’이라는 대목에서는 언제나 같아요.



“정말, 지금 엉망이라서 듣기 싫을 기라.” “전문가가 엉망이라고 해 봐야, 어차피 난 몰라. 도쿄에 살 때 강 둔치에서 연주하던 생각이 나네. 난, 세츠의 소리가 참 좋아.” (141쪽)


“츠가루샤미센의 역사를 아는 것도, 반주를 하는 것도, 명인의 수를 듣고 아는 것도, ‘뿌리로 돌아가는’ 것, 자기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그기 아입니꺼?” (174쪽)



  전문 연주가인 사람이 ‘지금 엉망’이라고 말한들, 수수한 청취자나 관객인 사람은 ‘늘 좋다’고 여깁니다. 빼어난 솜씨를 보여주면 빼어난 솜씨대로 좋고, 투박한 연주를 보여주면 투박한 연주대로 좋으며, 엉망이라고 하는 연주는 또 이렇게 엉망이라고 하는 연주대로 좋아요.


  나는 김현식이라고 하는 노래꾼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퍽 좋아합니다. 이녁이 맨 처음 새내기 노래꾼으로 나타났을 적에 들려준 달콤하면서 매우 보드라운 목소리도 좋아하지만, 죽음을 코앞에 앞두고 잔뜩 가라앉으면서 무거운 목소리도 좋아합니다. 더 낫거나 덜 나은 목소리가 따로 없어요. 모두 ‘노래하는 목소리’입니다. 악기 연주자로서도 언제나 ‘노래를 들려주는 손길’이지요.


  사랑으로 지은 밥이면 언제라도 맛있듯이, 사랑으로 켜는 노랫가락이라면 언제라도 즐겁습니다. 이 대목을 깨달아서 ‘뿌리로 돌아가기’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저마다 ‘연주가’이고 ‘작가’이며 ‘교사’이자 ‘요리사’이기도 한 줄을 기쁨으로 누릴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4349.2.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오시몬 연구실 2 - 완결
다이스케 테라사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594



보는 눈, 아끼는 눈, 가꾸는 눈

― 나오시몬 연구실 2

 테라사와 다이스케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5.12.25. 4500원



  밤이 깊을수록 별빛이 밝습니다. 밤이 지나고 새벽으로 접어들 즈음이면 차츰 동이 트면서 별빛이 흐려요. 어느덧 저 먼 하늘이 차츰 밝아지면서 해가 올라올 즈음이라면 별빛은 거의 모두 사라집니다. 새로 떠오르는 해님은 햇살을 잔뜩 퍼뜨리면서 온누리에 무지개빛을 새삼스레 일으킵니다. 나는 새벽녘에 이를 무렵이면 마지막 별빛을 마음에 담으려고 곧잘 마당에 내려서서 찬바람을 쐽니다.



“요즘도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유품을 수선하니?” “응. 하지만 아무리 유품을 복원해도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진 않으니까.” (13쪽)


“하지만 고작 손잡이 하나에 그렇게 공을 들이면 남는 게 없어서.” “남는 것 없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라도 그걸 찾아서 수십 년을 드나드는 손님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오래도록 이 가게의 자산이 된다는 걸 알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23∼24쪽)



  테라사와 다이스케 님이 빚은 《나오시몬 연구실》(학산문화사,2015) 둘째 권을 읽습니다. 이 만화책은 두 권으로 마무리짓습니다. 짧게 끝맺는 이야기입니다. 고고학 연구를 하는 주인공은 일본에서 언젠가 꼭 공룡뼈를 찾아내겠다는 다짐으로 일해요. 그런데 공룡뼈를 캐내는 일을 하려면 일꾼이나 심부름꾼을 많이 두어야 하고 오랫동안 땀흘려야 하니까 목돈이 들지요. 만화책에 나오는 주인공은 목돈을 모으려고 ‘오래된 물건을 손질하는 일’을 합니다. 이른바 ‘옛 문화재 되살리기’이지요.



“미안, 아빠.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네.” “그래서, 그렇게 정성들여 만든 이 테이프는, 그 녀석의 보물이었을 거야.” (40쪽)


“아쉽지만 그런 대형 수리업체에는 일 잘하는 장인이나 재료를 쓰지 않고 안 보이는 부분을 대충 때워 비용만 싸게 매기는 곳도 많아.” “처음부터 진짜 장인에게 맡길걸. 내가 몇 푼 아끼겠다고 욕심을 부려서.” (96쪽)



  만화책 주인공은 ‘옛 문화재 되살리기’라는 일감을 맡을 적에 언제나 ‘오래된 살림살이를 손질한다’고 여깁니다. 그냥 옆에 놓고 눈으로만 쳐다보는 값지거나 값비싼 보물이 아닌, 늘 손으로 쓰다듬고 만지고 다루는 살림살이로 여겨서 손질해요.


  ‘손질’하고 ‘되살리기’는 다르지요. 손질을 한다고 할 적에는 ‘다시 쓴다’는 뜻입니다. 되살리기를 한다고 할 적에는 ‘그대로 모신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박물관 같은 데에 모시려고 유물이나 문화재를 건사하겠지요. 그런데, 어떤 살림살이가 유물이나 문화재가 된다고 하더라도, 모든 유물이나 문화재는 맨 처음에는 수수한 살림살이였어요. 임금님이 쓰던 왕관이나 노리개 따위를 뺀, 이를테면 돌칼이나 민무틔흙그릇 같은 유물은 모두 살림살이입니다. 민속박물관에서 건사하는 문화재나 유물도 처음에는 모두 살림살이예요.



“제례용 신여는 많은 사람이 짊어지고 이리저리 흔들면서 온 마을을 돌지. 그래야 신이 기뻐한다며 일부러 거칠게 다루거나 바다에 던져 버리기도 해. 당연히 끼워 맞춘 부분은 헐거워지고, 금구는 녹슬고 칠은 벗겨질밖에! 그걸 다시 쪼이고 금구에 다시 광을 내고 칠을 다시 해 가며 수십 수백 년을 쓰는 게 바로 신여란 말씀!” (106쪽)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어르신들이 그렇게 쉽게 신여를 멜 수 있죠?” 호흡이 딱딱 맞으니까! 축제 신여는 모두의 마음이 한데 모이면 가볍게 들려 올라가거든!” (119쪽)



  수백 해에 걸쳐서 손질을 새롭게 하면서 쓰는 ‘제례용 신여’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을 기울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문화재 살림살이’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아이들이 손으로 만지면서 물려받아서 아낀 뒤, 다시 새로운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한 ‘문화재 살림살이’를 찾아보기 어려워요.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이나 새마을운동이나 경제성장 따위가 흐르면서 그만 사라지거나 짓밟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 스스로도 마을살림이나 집살림을 알뜰히 건사하려는 마음을 잃었다고 할 만해요. 더 빠르거나 더 남다르다고 하는 새 물건을 장만하는 길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할 만해요.


  새 자전거도 좋습니다만, 오래된 자전거를 꾸준히 손질해서 물려줄 만한 살림살이(문화)가 우리한테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자동차를 꾸준히 손질해서 쉰 해나 백 해를 건사할 만할까요? 집 한 채를 꾸준히 손질해서 삼백 해나 오백 해를 건사할 만할까요?



“우리가 만드는 칠기는 사람이 쓰라고 있는 게야. 장식용으로 찬장에 모셔두기나 할 바엔 아예 안 만들고 말지. 나는 지금까지 이 그릇들을 소중히 써 온 사람을 위해, ‘나오시몬’으로 평생을 마칠 셈이다.” (186쪽)


‘할아비는 언제나 자연을 잘 관찰한단다. 보는 눈을 키워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거든.’ (207쪽)



  보는 눈, 아끼는 눈, 가꾸는 눈, 이렇게 세 가지 눈을 돌아봅니다. ‘보는 눈’이 ‘보는 눈’으로만 그치면 문화재를 만듭니다. 지식을 만들지요. 보는 눈이 ‘아끼는 눈’으로 거듭나면 이야기를 짓습니다. 노래가 흐르지요. 아끼는 눈이 새롭게 ‘가꾸는 눈’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사랑을 짓습니다. 사랑스러운 손길로 살림을 지어요.


  먼저 볼 수 있어야 하고, 본 다음에는 아낄 수 있어야 하며, 아끼는 손길에 이어 가꾸는 숨결로 다시 태어나야지 싶습니다. 보고 아끼며 가꾼다고 하겠습니다. 바라보는 데에서 그치면 ‘비평’이나 ‘품평’은 할 테지만, 이래서는 아무것도 짓지 못해요. 맨 먼저 ‘보는 눈’부터 기를 노릇이요, 이 눈길을 키워서 손길과 몸짓을 갈고닦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화책 《나오시몬 연구실》은 이 같은 이야기를 알뜰살뜰 잘 들려줍니다. 4349.2.3.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랙잭 창작비화 2 - 테즈카 오사무의 작업실에서
요시모토 코지 지음, 미야자키 마사루 원작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604



‘만화 하느님’ 곁에 있는 수많은 ‘하느님’

― 블랙잭 창작 비화 2

 미야자키 마사루 글

 요시모토 코지 그림

 김시내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4.25. 1만 원



  만화를 그린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얻은 테즈카 오사무 님 이야기를 그린 《블랙잭 창작 비화》(학산문화사,2014) 둘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테즈카 오사무 님이 숨을 거둔 지 스무 해 남짓 지났는데, 일본에서는 아직도 이녁을 기리거나 그리는 사람이 참으로 많구나 싶습니다. 이렇게 동료와 후배가 그리운 목소리로 되새기면서 빚은 《블랙잭 창작 비화》는 얼마나 따끈따끈한 사랑이 깃들며 태어났는가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여러분, 일에 목숨을 걸어 주세요!” ‘네?’ ‘목숨이요?’ (6쪽)


“롯폰기의 콘소메 수프가 먹고 싶어!” “지금 당장 만화에 대해 잘 아는 중국어 통역을 찾아 줘요!” “멜론!” “카이메이 잉크를 사 와요!” “안경이 없어요!” “햄 없나요?” “케이크가 없으면 못 그려!” “의치가 또 없어!” “슬리퍼가 없으면 그릴 수 없어요!” “초콜릿!!” (19∼20쪽)



  《블랙잭 창작 비화》 둘째 권을 보면, 첫머리부터 좀 그악스럽다 싶은 한 마디로 엽니다. 테즈카 오사무 님은 도움이(어시스턴트)들한테 ‘그림(만화)’을 그릴 적에 목숨을 걸어 달라고 외칩니다. 도움이들은 가뜩이나 밤잠을 미루며 그림을 그리는데 그 말을 듣고 놀랄 뿐입니다. 잠도 못 자는데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런데 테즈카 오사무 님은 이녁 목숨을 걸면서 만화를 그렸어요. 도움이는 며칠쯤 잠을 미루면서 그리고, 또 바탕그림을 그릴 원고가 넘어오기까지 살짝 쉴 겨를이 있지만, 테즈카 오사무 님은 쉴 겨를이 없습니다. 방송에서 만화영화가 나오거나 극장판 만화영화를 다 마무리짓고 다른 이들은 모두 쉬거나 뒤풀이를 가더라도 테즈카 오사무 님은 늘 ‘다음 만화’를 그리고 밑틀(콘티)을 짜야 했어요.


  《블랙잭 창작 비화》 둘째 권에는 ‘목숨을 걸며 만화를 그리다’가 그만 머리가 펑 하고 터지면서 갑작스레 트집이나 핑곗거리를 찾는 테즈카 오사무 님 모습이 잔뜩 나옵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는 이녁 자서전에는 안 나왔지 싶은데, 한겨울 한밤에 수박을 먹고 싶다고 외친다든지, 그림을 잘못 그려서 종이를 덧대야 하기에 본드를 사오라고 시킨다든지, 가까운 편의점 말고 멀리 있는 편의점에서 파는 컵라면을 사 달라든지, 초콜릿이나 케익을 노래한다든지, …… 어느 모로 보면 짓궂은 장난인데, 어느 모로 보면 이 ‘장난을 맞추어’ 주는 동안에는 펜을 손에서 놓으면서 쉴 겨를이 납니다. 이레나 열흘씩 만화가 곁에서 원고 마무리를 지켜보면서 기다리던 출판사 편집자도 이런 심부름을 하면서 한숨을 돌리거나 바람을 쐬기도 하고요.



테즈카 선생님은 작품에 관해서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습니다. 작품을 위해서라면 수고, 아이디어, 인재, 조직, 그리고 돈, 모든 것을 쏟아붓는 거예요! (35쪽)


계속 무리하면서 만화를 그리던, 테즈카 선생님의 안경이니, 이렇게 폭삭 삭았죠. 지금 생각해 보면, 테즈카 선생님은 자신의 몸에, 가장 억지를 부리셨던 게 아닐까요? (44∼45쪽)



  1928년에 태어나 1989년에 숨을 거두었으니, 예순을 갓 넘기고서 저승사람이 된 테즈카 오사무 님입니다. 그렇지만 숨을 거두는 날까지도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고 다음 작품을 떠올렸다고 해요. 다시 말하자면, 그무렵 테즈카 오사무 님 곁에서 도움이로 일하던 이들이 이제 와서 옛날 옛적을 돌아보노라면 ‘스스로 가장 억지를 부리며 만화를 그린’ 테즈카 오사무 님이라고 할 만합니다. 다른 사람은 잠을 자도록 해도 테즈카 오사무 님은 잠을 거의 안 자면서 만화를 그렸으니까요.



저희가 잠든 사이에도 테즈카 선생님은 주무시지 않고 계속 그리고 계셨어요. 돌이켜 보면, 도우러 간 닷새 간, 결국 한 번도 테즈카 선생님이 주무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171쪽)


그 다음 날이 졸업식이었는데, 아버지가 ‘테즈카 오사무를 만날 일은 흔치 않으니 다녀와!’라는 거야. 졸업식도 흔치 않은데 말이야. 아하핫! (186쪽)



  밤잠을 달게 자면서 만화를 그렸다면, 테즈카 오사무 님은 일흔이나 여든이나 아흔까지 살았을는지 모르지요. 그런데, 어느 모로 보면, 자꾸자꾸 새롭게 그리고 싶은 만화가 떠오르기 때문에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다고도 할 만해요. 한꺼번에 열 가지가 넘는 만화를 이어서 그리는 동안에도 이 작품들에 이어 새로운 작품을 떠올리지요. 마감이 닥치면 열 가지가 넘는 원고를 모두 책상에 올려놓고서 한꺼번에 한 쪽씩 재빠르게 이야기를 채워 넣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도쿄를 떠나서 다른 고장으로 가서 마감에 쫓기며 만화를 그릴 적에 그 고장에서 만화가를 꿈꾸는 고등학생을 불러서 도움이 노릇을 해 달라고 할 적에, 고등학생들 어버이는 ‘졸업식보다 테즈카 오사무를 만나러 가라’고 말할 만하구나 싶습니다. 졸업식에 가지 못하더라도 며칠 동안 밤샘을 하면서 도움이 노릇을 하라고 아이들 어버이가 등을 떠민다고 할까요.


  이런 뒷이야기를 읽으며 곰곰이 돌아봅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대접을 받을 만한 만화가가 있었을까요? 앞으로 한국에서 이만 한 대접을 받을 만한 만화가가 나올 수 있을까요? 졸업식도 입학식도 대수롭지 않으니 ‘그분’을 만나러 가라고 아이 등을 떠밀 어버이는 몇이나 있을까요?



특이한 사람들만 모여 있었지. 아니, 우연히 모인 게 아니고, 모은 거야. 난 테즈카 선생님이 사회에서 동떨어진 젊은이들에게, 있을 곳을 주신 거라고 생각해. (59쪽)


“당신이면 됩니다. 그런 당신이니 좋은 거예요! 제가 할 수 있으니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80쪽)



  만화 하나가 태어나려면 만화가 혼자서는 엄두를 낼 수 없습니다. 만화가 한 사람 곁에 수없이 많은 도움이가 있습니다. 테즈카 오사무 님처럼 한 주에 열 가지가 넘는 연재만화를 그린 만화가한테는 도움이가 스무 사람이나 서른 사람으로도 모자랍니다. 게다가 잡지 연재 만화뿐 아니라 만화영화까지 함께 그렸기 때문에, 한창 일꾼을 많이 둘 적에는 이백 사람이 넘게 도움이 구실을 했다고 해요. 한 사람 머릿속에서 태어나는 만화 이야기를 받치려고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달라붙어서 땀을 흘린 셈입니다.


  그래서, ‘만화 하느님’ 곁에는 수많은 ‘도움이 하느님’이 있었다고 해야지 싶습니다. 수많은 ‘도움이 하느님’이 흘리는 땀방울로 ‘만화 하느님’이 태어날 수 있었다고 해야지 싶어요.


  테즈카 오사무 님은 언제나 “제가 할 수 있으니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도움이를 북돋아 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테즈카 오사무 당신이니까 하지요’ 하는 생각이 으레 떠오른다고 하지만, 참으로 온몸에서 새롭게 기운이 솟는다고 해요. 참말 우리는 저마다 다른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지치지 않고 만화를 그리니, 아니 새롭게 일어서면서 만화를 그리니, 이 만화가 곁에 수많은 사람이 즐겁게 찾아옵니다. 지치지 않고 만화를 그릴 수 있도록 다 함께 밤잠을 미룹니다. 그러고 나서 다 함께 활짝 웃으면서 ‘다 함께 흘린 땀방울로 태어난 만화책과 만화영화’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습니다. 4349.1.31.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