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의 영감 - 포토그래퍼 조선희 사진 에세이
조선희 지음 / 민음인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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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07



마흔 넘긴 나이에 쓴 ‘사진 자서전’

― 조선희의 영감

 조선희 글·사진

 민음인 펴냄, 2013.12.12.



  패션사진을 찍는 사진가 조선희 님은 2004년에 《왜관 촌년 조선희, 카메라와 질기게 사랑하기》를 내놓은 뒤, 2008년에 《네 멋대로 찍어라》를 내놓았고, 2010년에 《조선희의 힐링 포토》를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2013년에 《조선희의 영감》을 내놓습니다. 열 해에 걸쳐 네 권째 사진책을 내놓는데, 이 사진책들은 모두 자서전이라고 할 만합니다. 사진 한길을 걸어가는 발자국을 책마다 담고, 앞으로도 이 한길을 더 씩씩하게 내딛으려는 뜻을 책마다 싣습니다.



보라색도 그냥 한 가지 보라색만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왜 우린 그 수많은 보라색을 하나로 부르게 된 걸까? (16쪽)



  보라빛은 한 가지만 있지 않습니다. 제비꽃으로 읽는 보라빛하고 등꽃으로 읽는 보라빛은 다릅니다. 새벽에 보는 보라빛하고, 저녁에 해가 지면서 보는 보라빛은 다릅니다. 같은 제비꽃이어도 해가 잘 드는 자리하고 그늘이 지는 자리에 피는 보라빛은 다릅니다.


  보라빛뿐 아니라 노랑이나 빨강도 모두 다릅니다. 하양이나 검정도 언제나 다릅니다. 똑같은 빛깔은 없고, 한 가지 빛깔은 없습니다. 자리에 따라 달라지는 빛깔이요, 우리가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서 새롭게 마주하는 빛깔입니다.


  흑백사진을 찍더라도 까망이나 하양이 모두 똑같은 까망이나 하양이지 않습니다. 때와 곳에 따라 모두 다른 까망이나 하양이요, 흐름하고 숨결에 따라 언제나 새로운 까망이거나 하양입니다.




나를 뒤흔들어 놓은 것은 1960년대 이후,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거의 1980년대를 전후한, 그러니까 그의 나이 예순 무렵에 작업되었다는 사실이다. (42쪽)



  모든 사진은 저마다 뜻이 있습니다. 젊은 사진가 한 사람이 빚은 사진도 뜻이 있고, 늙은 사진가 한 사람이 빚은 사진도 뜻이 있습니다. 마흔 해쯤 사진 한길을 걸었기에 더욱 그윽한 사진을 선보이지 않습니다. 일흔 살 나이에 처음으로 사진기를 쥐거나 일복 살 나이에 처음으로 사진기를 쥐든, 어설프거나 얕은 사진을 선보이지 않습니다.


  삶을 깊이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이가 빚는 사진은 늘 깊으면서 멋스럽습니다. 삶을 깊이 바라볼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이가 빚는 사진에서는 깊이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 찍는 사진에는 사랑이 깃듭니다. 꿈을 꾸는 사람이 찍는 사진에는 꿈이 감돕니다.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이 찍는 사진에는 사랑노래가 흐릅니다. 꿈을 노래하는 사람이 찍는 사진에는 꿈노래가 넘실거립니다.




맨 처음, 시각 장애우들이 사진을 찍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쇼크에 빠졌다. 어떻게? 무엇을? 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본다’에서 출발하지 않던가? (62쪽)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기에 눈을 댑니다. 그런데, 사진에 찍히는 모습은 ‘눈에 보이는 모습’만은 아닙니다. 사람들 가슴을 적시는 사진은 ‘눈에 보이는 모습’만 찍은 사진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을 마음으로 다가서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이 눈에 보이는 모습만 찍는 일이라고 한다면, 기계한테 맡기면 됩니다. ‘사진찍기’가 눈에 안 보이는 모습까지 담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람이 아닌 로봇이 찍어도 됩니다.


  사진은 언제나 마음을 찍습니다. 마음을 찍되, ‘눈에 보이도록 나타내려’고 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사진은 언제나 사랑을 찍어요.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 숨결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사랑을 찍은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은 빙그레 웃음이 납니다. 사랑을 찍은 사진을 마주하는 사람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납니다.




어떤 여행이든 모든 여행은 축복이다 … 내가 아무 목적 없이 사진을 찍어 본 것이 언제였더라? 사소한 것들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내 삶의 주변 것들에 관심을 가져 본 것이 … 서점에 가는 것은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 (110, 136, 146쪽)



  곰곰이 돌아보면, 모든 사진은 선물입니다. 어떤 사진을 어떤 사진기로 찍든지 모든 사진은 선물입니다. 값싼 사진기로 찍기에 어설픈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값비싼 사진기로 찍기에 멋진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마음을 찍어서 사람들 가슴을 촉촉히 적시거나 울리거나 움직일 때에 비로소 사진이 되듯이, 어떤 사진기로 어떤 모습을 찍든, 내 삶에 드리우는 선물이 되도록 찍을 때에 즐거우면서 아름답습니다.


  책방마실은 왜 여행이 될까요? 내 삶을 북돋울 만한 아름답고 즐거운 책을 찾아나서는 길이니 여행입니다. 책방마실처럼, 사진찍기는 사진마실이요 삶마실이며 사랑마실입니다.




우리는 단지 아름답고 예쁘기만 한, 별다른 느낌 없는, 그저 그런 그림을 원치 않는다 …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살아온 나의 시간들을 찍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시간들이 쌓여 내 속 깊숙이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만들고, 그것들이 세상을 향해 소리치게 만든 것이다. (30, 277쪽)



  조선희 님은 앞으로 쉰 언저리에 다시 ‘사진 자서전’을 쓸까요? 쉰을 지나고 예순 살을 넘은 뒤에도 ‘사진 자서전’을 선보일 수 있을까요? 사진가 조선희 님 스스로 쉰 살을 밟고 예순 살을 디디며 일흔 살을 지나갈 무렵, ‘사진으로 쓰는 자서전’은 어떻게 달라질 만할까요?


  ‘아름답다’와 ‘예쁘다’는 다릅니다. 똑같은 보라빛이 없듯이, 똑같은 낱말이란 없습니다. ‘아름답다’는, 보거나 듣거나 느끼기에 좋을 뿐 아니라, 보거나 듣거나 느끼면서 즐겁다는 마음이 함께 일어나는 느낌을 밝히는 낱말입니다. ‘예쁘다’는, 좋다는 느낌이 아닌, 하는 짓이나 모양이 마음에 드는 느낌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아름다운 사진하고 예쁜 사진은 다릅니다. 딱히 아무 느낌이 들지 않는 사진이라면 ‘그럴듯한’ 사진이거나 ‘그럴듯해 보이는’ 사진입니다. 그럴듯한 사진은 아름답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저마다 고운 나이를 먹으면서 고운 한길을 걸어가면, 언제 어디에서나 고운 사진을 찍으리라 생각합니다. 열 살 어린이도, 서른 살 젊은이도, 예순 살 어르신도, 또 일흔 살이나 여든 살을 넘긴 분들도, 저마다 이녁 삶을 곱게 사랑하면서 고운 숨결 넘치는 사진을 밝힐 수 있기를 빕니다. 4348.6.18.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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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제스처, 그리고 색
제이 마이젤 지음, 박윤혜 옮김 / 시그마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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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94



잘 찍을 사진이 아닌, 즐거운 사진으로 가자

― 빛, 제스처, 그리고 색

 제이 마이젤 글·사진

 박윤혜 옮김

 시그마북스 펴냄, 2015.3.2.



  사진은 잘 찍을 수 있고, 못 찍을 수 있습니다.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 있고, 사진을 못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이뿐입니다. 딱히 더 없습니다. 사진을 잘 찍을 수 있기에 훌륭하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진을 못 찍기에 안 훌륭하거나 안 아름답지 않습니다.


  노래는 잘 부를 수 있고, 못 부를 수 있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있고,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이뿐이에요. 딱히 더 있을 일이 없습니다. 노래를 잘 부를 수 있기에 멋지거나 대단하지 않습니다. 노래를 못 부르기에 안 멋지거나 안 대단하지 않습니다.




.. 당신이 무엇을 찍느냐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 당신에게 즐거움을 주느냐”다 … 사진 찍는 일 자체가 즐겁고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사진이 완벽하지 않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그것을 찍어야 한다 … 누군가 내게 묻는다. “조명을 어떻게 한 거죠?” 나는 그렇게 대단하지 못하다. 빛이 한 일일 뿐 … 빛과 공기가 최대한 나를 흥분시키는 그런 시간대를 고른다. 그게 바로 좋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  (20, 24, 32, 36쪽)



  제이 마이젤 님이 빚은 사진책 《빛, 제스처, 그리고 색》(시그마북스,2015)을 읽습니다. 제이 마이젤 님은 미국에서 사진을 오랫동안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 책에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사진을 가르친 분이 느낀 이야기가 흐릅니다. 미국에서는 《Light, Gesture & Color》라는 이름으로 2014년에 나왔다고 해요. 그러니까, ‘빛(Light)하고 몸짓(Gesture)하고 빛깔(Color)’, 이렇게 세 가지를 들려주는 사진책입니다.


  한국말로 옮길 적에 ‘빛’하고 ‘색’으로 옮겼습니다만, ‘색’은 ‘빛 色’이라는 한자입니다. 그러니, ‘color’를 ‘색’으로만 옮기면 아무래도 걸맞지 않아요. 그리고, ‘light’도 더 헤아려 볼 노릇입니다. ‘빛’으로 적어도 나쁘지는 않으나, 사진을 말할 적에 쓰는 ‘light’하고 ‘color’라고 한다면, ‘빛살’하고 ‘빛깔’처럼 제대로 나누어서 써야지 싶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빛(light)’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해가 베푸는 햇빛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전기를 빌어서 터뜨리는 불빛(전등 불빛)입니다. 햇빛과 불빛은 모두 ‘줄기처럼 흐르는 빛’입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빛줄기’입니다. 해가 뜨거나 전깃불을 켜야 비로소 사물하고 사람을 알아봐요. 빛줄기(빛이나 빛살)가 있어야 비로소 사진을 찍습니다.


  ‘빛깔(color)’은 까망하양(흑백)과 무지개(칼라)를 가르는 빛깔입니다. 까망하양도 빛깔이요, 무지개도 빛깔입니다. 그래서, 까망하양으로 찍든 무지개로 찍든, 이 빛깔을 찬찬히 살피면서 헤아릴 때에 비로소 사진이 사진다울 수 있도록 다스릴 만합니다.




.. 카메라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그저 그게 얼마나 멋있었는지 말로 묘사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다 … 나는 보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걸어 오는 사진, 또는 질문을 하고 싶게 만드는 사진을 좋아한다 … 당신이 20대이든 80대이든 쓸 수 있는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 한정된 에너지를 무거운 장비들을 나르는 데 전부 쓸 것인가, 아니면 사진을 찍는 데 쓸 것인가 … 자, 눈을 뜨자. 순수 자연 풍경은 잊고 네 눈앞에 있는 모습을 찍자 ..  (38, 54, 56, 66쪽)



  오늘날 적잖은 사람들은 ‘잘 찍는 사진’하고 ‘못 찍는 사진’ 사이에서 헤매거나 떠돕니다. 수많은 사진강의나 사진강좌는 ‘사진 잘 찍는 솜씨’를 다룹니다. 한국에서 나오는 꽤 많은 사진책도 ‘사진 잘 찍도록 이끄는 길’을 들려주기 일쑤입니다.


  가만히 보면, 주식투자 잘 하는 길이라든지, 아이를 잘 가르치는 길이라든지, 처세나 경영을 잘 하는 길을 다루는 책이 대단히 많이 나옵니다. 이런 책도 저런 책도 모두 ‘잘 하는 길’을 보여주거나 알려주려고 해요. 그러니, 사진책에서도 ‘사진 잘 찍는 길’을 다루는 책이 많이 나온다고 할 만해요.


  그러나, 사람들 가슴을 울리는 사진은 ‘잘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가슴을 울리는 사진은 ‘가슴을 울리는 사진’입니다. 초점이 어긋나거나 흔들리거나 빛이 덜 맞더라도,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가 흐를 적에, 이 사진을 보면서 가슴이 찡 하고 울립니다. 잘 찍은 사진을 보면 어떠한 느낌일까요? ‘아, 이 사진 잘 찍었네!’ 하고 놀라겠지요.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생일잔치에서 노래를 불러 주기에 가슴이 찡하지 않습니다. 서툴거나 어설픈 목소리라 하더라도, 사랑을 그득 담아서 살가이 부르는 노래를 들을 적에 가슴이 찡합니다. 할머니하고 할아버지가 ‘아기 배냇짓’에도 눈물을 흘리는 까닭이란, 대여섯 살 아이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수많은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눈물을 적시는 까닭이란, ‘노래를 잘 부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진을 잘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진에 ‘온마음을 사랑으로 실어’서 찍을 수 있으면 됩니다. 사진 한 장을 찍으면서 내 온마음을 싣되, 초점이나 빛살을 잘 맞추고 군더더기까지 없다면 훌륭하겠지요. 다만, 아무리 빼어난 솜씨를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이야기’를 담지 못한다면, 이때에는 ‘보기 좋은 모습’일 뿐, ‘사진’이 되지 못합니다.




..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라. 높게, 낮게, 빛을 잔뜩 받으면서, 또는 빛에 반해서 … 반드시 햇빛이 있어야 한다고는 여기지 말라. 그건 단지 당신이 쓸 수 있는 수많은 빛 중 하나일 뿐이다 … 자신을 다른 이와 비교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 당신이 비교해야 할 대상은 오직 당신 자신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이 놓친 것을 보지 못하고 심지어 잘 보지도 않는다 … 사진에 담은 모든 것에 제스처가 있다 ..  (84, 88, 92, 102쪽)



  사진책 《빛, 제스처, 그리고 색》은 ‘사진을 처음 찍으려는 사람’이나 ‘사진을 오래 찍은 사람’ 모두한테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합니다. 사진을 잘 찍으려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합니다. 사진을 즐겁게 찍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진 한 장에 사랑을 담아서 찍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꼭 사진을 찍어야 하지는 않으니, 어깨에 힘을 빼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이 잘 찍었다는 사진을 자꾸 쳐다보면서 주눅들지 말고, 다른 사람 사진하고 내 사진을 견줄 생각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빛, 제스처, 그리고 색》에서 다루는 ‘제스처’를 생각해 봅니다. 영어사전에서 이 낱말을 찾아보면 “몸짓, 제스처”로 풀이합니다. 그러니까, 한국말은 “몸짓”이라는 소리입니다.


  제이 마이젤 님은 왜 이녁 사진책에서 ‘몸짓’을 살피라고 이야기할까요? 사진에 담는 이야기는 늘 ‘몸짓’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움직이고 저렇게 흐르는 삶은 언제나 몸짓으로 드러납니다.


  몸짓은 손짓이기도 하고 발짓이기도 합니다. 마음짓이기도 하며 사랑짓이기도 합니다. 꿈짓이나 생각짓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구름이 흐르는 모습도 몸짓이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모습도 몸짓입니다. 꽃송이가 터지는 흐름도 몸짓이며, 가랑잎이 떨어지고 나비가 나는 모든 모습은 언제나 몸짓이에요. 몸짓을 읽을 적에 삶짓을 읽습니다. 삶짓을 읽으니, 삶짓을 따사로이 가꾸는 사랑짓을 알고, 사랑짓을 알면서 말짓이랑 웃음짓이랑 춤짓 모두 되새길 수 있습니다.




.. 문제는 반드시 해결책을 제시하기 마련이다 … “당신에게 선택지가 있습니다. 오늘 작업을 할 때 행복한 사진작가와 하고 싶은가요, 아니면 성질난 사진작가와 하고 싶은가요?” … 사진을 찍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역사를 기록하기 위함이다 … 당신은 언제든지 사진 찍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내게 감동을 준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 재미있으면 찍으면 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면 또 그냥 찍으면 된다 ..  (136, 150, 152, 158, 204, 212쪽)



  무엇을 왜 찍으려 하는지 스스로 묻습니다. 무엇을 찍을 적에 즐거우며, 이 사진 한 장을 얻어서 내 삶에 어떤 이야기가 사랑스레 흐를 만한지 스스로 묻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나는 사진을 찍고 싶으니 사진을 찍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싶으니 노래를 부릅니다. 사진을 좀 못 찍는다 싶어도, 사진을 찍으면서 즐거우니 사진을 찍습니다. 내 노랫가락이 돼지 멱을 딸 만한 소리라 하더라도, 노래를 부르면서 즐거우니까 노래를 부릅니다.


  글씨가 서툴어도 손글씨로 편지를 씁니다. 글을 좀 못 써도 신나게 글을 씁니다. 호미질이 서툴어도 꽃밭과 텃밭을 일굽니다. 자전거를 잘 못 달리더라도 두 아이를 태우고 자전거를 타고 나들이를 다닙니다.


  즐거운 삶이기에 즐거운 사진이 됩니다. 기쁜 사랑이기에 기쁜 사진이 됩니다. 웃는 삶이기에 웃음이 묻어나는 사진이 됩니다. 노래하는 사랑이기에 노래하는 사진으로 거듭납니다. 우리 다 같이 아름답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아름다운 삶을 가꾸고, 아름다운 사진을 나눌 수 있기를 빕니다. 4348.6.1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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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5.6 - Vol.19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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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08



사진을 함께 짓는 즐거운 숨결

― 사진잡지 《포토닷》 19호

 포토닷 펴냄, 2015.6.1.

 정기구독 문의 : 02-718-1133



  사진잡지 《포토닷》 19호(2015.6.)를 읽습니다. 《포토닷》 19호는 사진가 박진영 님이 일본 후쿠시마에서 찍은 ‘산요 선풍기’를 겉그림으로 보여줍니다. 지난 2011년에 일본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가 터지는 일이 벌어졌고, 후쿠시마라는 시골마을은 가뭇없이 사라졌습니다. 땅도 사람도 마을도 숲도 짐승도 벌레도 새도 사라졌습니다. 이동안 일본 사회는 좀 달라졌을까 모르겠는데, 한국 사회는 그리 달라진 모습이 없지 싶습니다. 한국에서 핵발전소를 걷어내자고 하는 목소리가 정부 정책으로 나타나는 일은 없고, 도시는 자꾸 커지기만 하면서, 전기를 큰 발전소에서 만드는 얼거리는 그대로 이어집니다.


  일본 후쿠시마에서 사진을 찍은 분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일본 후쿠시마에서 찍은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마음이 될까요? 사진은 무엇을 찍어서 보여주고, 사진을 읽는 사람은 사진에서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려서 나눌까요?


  “지금 우리 사진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사진을 생산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풍요로운 적은 없었다. 많이 보고, 계속 찍고, 늘 보여주는 것이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53쪽/최연하).”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사진기도 꾸준하게 새로 나오고, 사진기를 장만해서 사진을 찍는 사람도 꾸준하게 늘어납니다. 이제 사진을 안 쓰는 신문 기사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언제 어디에서나 사진이 아주 넓게 쓰이고 퍼집니다. 그러면, 오늘날 사회에서 사진은 어떤 몫을 맡거나 어떤 구실을 할까요?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길에서 동무가 되거나 길잡이가 될까요? 문화나 예술이라는 자리로만 나아갈까요? 모든 손전화와 태블릿에 사진찍기 기능이 있는데, 집이나 학교나 마을에서는 아이들한테 사진을 어떻게 가르치거나 보여주는가요?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지만, 사진을 찍는 사람 가운데 사진을 찬찬히 배우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우리 둘레에 사진은 어디에나 있지만, 이렇게 많은 사진을 어떻게 읽거나 사진에서 무엇을 읽을 만한지 들려주는 자리가 무척 드뭅니다. 사진이론이나 사진강의는 아직도 서양 이론에 기댈 뿐 아니라, 여느 사람들 삶하고 동떨어진 어려운 말투성이입니다. 한국에서 찍어서 읽는 사진이지만,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 사회를 헤아리면서 사진을 읽지 못하는데다가, 사진을 찍는 전문가는 더 전문스러운 길로 나아가기만 합니다.


  “‘아무 일도 없다’라는 사실이 내 사진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내 사진은 그동안 우리가 포토저널리즘에서 보았던 클리쉐나 어떤 극적인 장면에 의존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 뉴스에 필요한 사진이 갖는 역할에 익숙하고 그것을 이해하지만 내 사진의 역할은 관찰자들이 그 안에 담긴 은유를 스스로 생각하고 읽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65쪽/칼페쉬 라티그라).” 같은 이야기는 어떻게 헤아릴 만할까 궁금합니다. 보도사진이든 예술사진이든 굳이 ‘극적인 장면’이 나와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모전 1위를 거머쥘’ 만한 모습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가장 멋진 사진이나 가장 아름다운 사진을 찍어야 할 까닭도 없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하고,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이 저마다 제 삶을 사랑하는 숨결을 사진 한 장에 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사진이 ‘넘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사진이라기보다 넘치는 사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움은 평등으로 나아가고, 평등은 평화로 이어집니다. 자유와 평등과 평화는 동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유와 평등과 평화는 언제나 사랑을 밑바탕으로 둡니다.


  이와 달리 ‘넘치는’ 사진은 자유가 아닙니다. 맘대로 찍는다고 해서 자유롭게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그저 넘치고 넘칠 뿐인 사진은 자유와 가깝지 않고, 평등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평화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넘치기만 할 뿐이면서 자유와 평등과 평화를 헤아리지 않는 사진은 ‘사랑’을 밑바탕으로 못 둡니다.




  “포토샵의 대중화 이후 사진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이제 사진관에 증명사진을 찍으러 오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익히 알고 있는 상식이 돼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포토샵을 거치지 않은 사진만큼은 진실을 말한다고 믿는다. 덕분에 이런 지점을 노리는 어떤 사진은 조작의 과정을 거치고도 진실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또 어떤 사진은 포토샵을 쓰지 않고도 거짓의 조짐을 드러내기도 한다(69쪽/이기원).” 같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넘치는’ 사진은 참(진실)을 다룬다고 여기기 어렵습니다. 거짓이 마치 참이라도 되는듯이 다루는 사진이 넘치고 다시 넘칩니다.


  사진을 함께 짓는 사람은 서로서로 아끼는 마음이 됩니다. 사진을 함께 짓는 사람은 서로서로 보살피고 보듬으면서 삶을 가꾸려는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프로든 아마추어든 관계없이 사진은 형상을 다루고, 그 안에 의미가 심어져 있다. 카메라라는 도구를 가지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형상화하는 것이 기호작용이고, 이를 알아야 그 사람 마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81쪽/진동선).” 같은 숨결을 헤아릴 때에 비로소 사진을 즐겁게 찍습니다. 사진 한 장에는 언제나 마음을 담습니다. 착한 마음이든 궂은 마음이든, 언제나 마음을 담습니다. 참을 고스란히 보여주든, 참을 비틀거나 감추든, 언제나 마음을 담습니다.


  참을 보여주는 사진은 참된 마음을 보여주고, 참을 비틀거나 감추는 사진은 참답지 못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이른바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산으로 들로 다니며 아름다운 풍경을 기록하는 것도 좋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마을과 그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83쪽/사진아카이브연구소).”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합니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모습을 찍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사진찍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만, 아름답다고 느끼는 모습을 찍되, 내 곁에 늘 따사롭거나 포근하게 흐르는 삶을 사랑스레 찍을 수 있다면, 그지없이 ‘새로운 아름다움’이 되리라 느낍니다. 이리하여, “나에게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예쁘니까 예쁘게 찍는 것이다 …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사람을 찍는다는 것이지, 배경이 아니다. 제일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가 찍은 아이의 사진이다(97, 99쪽/김현성).”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천천히 밑줄을 긋습니다. 예쁘니까 예쁘게 찍습니다. 착하니까 착하게 찍습니다. 고우니까 곱게 찍습니다. 즐거우니까 즐겁게 찍습니다. 웃음은 웃음 그대로 찍고, 눈물은 눈물 그대로 찍습니다. 아이는 아이답게 찍고, 어른은 어른답게 찍습니다.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그저 찍습니다. 그저 수수하게 찍고, 그저 어깨동무를 하면서 찍습니다. 그저 사랑을 속삭이는 손길로 찍고, 그저 마음을 나누려는 뜻으로 찍습니다.


  사진잡지 《포토닷》 19호 끝자락을 읽으니, “2014년에 올라온 모터쇼 모델의 사진은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2015년의 게시판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풍경사진도 매한가지이다. 하지만 가족을 찍은 사진이나, 추억이 담긴 공간, 사건이 기록된 사진은 남은 일생에서 끊임없이 재소환되고 재해석될 여지가 남는다. 이처럼 ‘나의 이야기’가 담긴 사진은 모터쇼의 모델이나 유명 출사지의 풍경보다 훨씬 더 긴 생명력을 부여받는다(117쪽/이기원).”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사진 한 장이 얼마나 ‘긴 생명력’으로 읽히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참말 그렇지요. 모터쇼 모델뿐 아니라 운동선수나 연예인이나 모델 사진도 이와 같을 수 있어요. 이야기는 없이 ‘이쁘장하다는 모습’만 찍는다면, 이런 사진은 어느 한때 반짝일 수 있어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찍으면, 이런 사진은 눈부시게 반짝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두고두고 흐르면서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이야기 있는 사진’이 매우 드물다고 할 만합니다. 집과 학교와 마을에서 ‘이야기 있는 사진’을 찍고 읽으면서 어깨동무하는 길을 말하거나 가르치는 자리가 매우 드물다고 할 만합니다.


  “사진이 있기에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진이 없어도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진을 곁에 놓고 이야기꽃을 피우니 삶을 즐겁게 밝힐 수 있습니다. 사진을 곁에 놓지 않더라도 마음자리에 이야기꽃을 그림으로 넉넉하게 그려서 담으면 삶을 기쁘게 북돋울 수 있습니다 … ‘전업주부’로 일하는 수많은 어머니는 사진을 모르거나 사진기를 쥘 겨를이 없지만, 마음에는 언제나 사랑과 웃음과 꿈과 노래와 이야기가 흐릅니다. 아이랑 오순도순 놀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동안 사진 한 장을 함께 찍기에 더욱 즐겁습니다. 곁님이랑 도란도란 말을 섞고 살림을 보듬는 동안 사진 한 장을 살짝 찍기에 더욱 기쁩니다(127쪽/최종규).”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두 손에 사진기를 쥐어도 사진을 찍고, 두 손에 사진기를 안 쥐어도 사진을 찍습니다. 필름이나 디지털파일에 앉힐 때에만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을 때에도 사진입니다. 마음에 따사로이 아로새겨서 언제 어디에서나 흐뭇하게 떠올릴 수 있는 ‘그림’은 ‘마음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서로 아끼는 이야기를 찍은 사진은 필름이나 디지털파일이 아니어도 한결같이 남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노래를 찍은 사진은 대형사진기나 중형사진기가 아닌 작은 디지털사진기로 찍어도 깊으면서 너른 맛과 멋을 베풉니다.


  사진은 사진기로 찍지 않습니다. 사진은 삶으로 찍습니다. 사진은 경력이나 졸업장으로 찍지 않습니다. 사진은 사랑으로 찍습니다. 사진은 이론이나 학식으로 읽지 않습니다. 사진은 이야기로 읽습니다. 사진은 유명작가나 비평가 눈길에 따라 읽지 않습니다.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라도 따스한 마음으로 노래하듯이 읽습니다. 4348.6.5.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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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염소
오인숙 지음 / 효형출판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사진잡지 <포토닷> 2015년 6월호와 <오마이뉴스>에 함께 올리는 글입니다.


..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95



한손을 거들어 살림하면서 사진이랑

― 서울 염소, 사진으로 쓴 남편 이야기

 오인숙 사진·글

 효형출판 펴냄, 2015.5.1.



  집안일을 모두 하고, 집살림을 도맡으면서, 사진까지 신나게 찍는 사진가는 얼마나 있을까요?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살림꾼’이자 ‘사진가’인 사람은 대단히 드물리라 생각합니다. 평등이나 가사분업이라는 말을 헤아리더라도,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가시내가 집안일과 집살림을 맡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가시내가 집안일을 맡지 않으면 사내가 집안일을 맡아야 할 텐데, 씩씩하고 즐겁게 집안일을 맡으면서 아이를 돌보는 사내는 매우 드뭅니다. 한집에서 가시내와 사내가 모두 바깥일을 하거나 사진을 찍는다면, 아마 이 집에는 ‘집일을 돕는 일꾼’을 따로 두겠지요.



.. 동그란 밥상에 일곱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밥 먹던 시절이 있었다. 첫째는 씩씩하게 수저질을 하고, 쌍둥이 녀석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착 달라붙어 참새처럼 반찬을 받아먹고, 웃음꽃을 피워 가며 서로를 바라보던 시간. 그때 우리는 행복했을까 … 학교에서 급식을 시행하면서 정다운 점심시간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교사들도 급식을 이용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점심시간 외출마저 금지되었다 ..  (10, 14쪽)




  《윤미네 집》이라는 멋진 사진책이 있습니다. 이 사진책을 선보인 전몽각 님은 이녁 딸아이를 더없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면서 사진을 일구었습니다. 그런데, 전몽각 님은 집안일을 하거나 아이를 보살피면서 키우는 몫은 맡지 않았습니다. 딸아이가 자라는 긴 나날 가운데 아주 조그마한 토막을 바라보면서 ‘작은 토막 같은 나날’에서 ‘구슬처럼 빛나는 삶자락’을 잡아채어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사진책 《윤미네 집》을 읽을 적에는 두 가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 전몽각 님이 바깥일이 대단히 바빠서 여느 날에는 아이들이 잠든 모습만 겨우 보았고, 주말에 겨우 짬을 살짝 내어 몇 장을 찍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토막토막 짧은 틈을 헤아리면서도 ‘구슬처럼 빛나는 삶자락’을 사진으로 여미었습니다. 바깥일에 바빴던 전몽각 님한테는 집에서 살짝살짝 바라보는 아이들 모습이 언제나 구슬처럼 빛납니다. 다음으로, 전몽각 님은 이녁 딸아이한테서 ‘보배처럼 사랑스러운 삶결’을 모두 바라보거나 느끼지 못했습니다. 전몽각 님이 아닌 전몽각 님 곁님인 ‘아이 어머니’가 이녁 딸아이를 사진으로 찍었으면, 사진책 《윤미네 집》하고 사뭇 다른 이야기가 흐르는 사진과 책이 태어났으리라 느낍니다.


  곰곰이 돌아보자면, ‘전업주부 사진가’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전업주부 작가(글 쓰는 사람)’는 제법 있으나, 이런 분도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전업주부 화가’라든지 ‘전업주부 예술가’는 몇 사람이나 될까요?




  집안일과 집살림을 도맡는다면,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리기만 해도 몹시 바쁩니다. 밥차림은 밥짓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먹을거리를 손수 지어서 거두든, 저잣거리에 마실을 가서 장만하든, 이래저래 품과 겨를이 많이 듭니다. 밥을 차리려면 먹을거리를 손질해야 하고, 밥을 다 먹은 뒤에는 치워야 하지요. 한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입는 옷을 빨래하고 건사해야 하며, 집 안팎을 늘 치우고 갈무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업주부 사진가’가 되기란 가시내한테나 사내한테나 몹시 어렵습니다. 그리고, ‘전업주부 사진가’가 된다면 이제껏 ‘전업 사진가’가 바라보는 눈길에서 크게 벗어나거나 새로운 눈길이 되어 삶을 읽는 사진을 선보일 수 있습니다.



.. 이사하기 며칠 전이었다. 열 살이 되어서도 잠들기 전이면 이야기를 해 달라고 칭얼대는 큰아이에게 곧 떠나게 될 이 집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들려주었다 … 나는 눈을 감고 그(남편)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굵은 목줄로 쇠말뚝에 매인 서울 염소 한 마리, 고개를 떨구고 사무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는다. 햇볕이 그립고 자유롭게 걷고 싶지만 보이지 않는 목줄이 더욱 그를 옥죈다 ..  (18, 41쪽)



  오인숙 님이 빚은 사진책 《서울 염소, 사진으로 쓴 남편 이야기》(효형출판,2015)를 읽습니다. 오인숙 님은 처음에는 교사로 일하던 삶이었고, 나중에 교사살이를 그만둡니다. ‘아주 전업주부’라고는 할 수 없을는지 모르나, ‘집안일과 집살림을 많이 맡는 가시내’입니다. 이렇게 집안일과 집살림을 거느리거나 건사하면서 한손에 사진기를 쥡니다.




  사진책 《서울 염소》에는 오인숙 님이 낳아서 돌본 아이들 모습이 흐르고, 오인숙 님과 함께 사는 곁님 모습이 나란히 나옵니다. 처음에는 오인숙 님하고 함께 사는 곁님 이야기만 책 하나로 엮으려 했다는데, 여러모로 길이 잘 트이지 않아서 이 책은 아이들 이야기와 곁님 이야기를 함께 묶었다고 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곁님 이야기만 담을 적에 ‘서울 염소’라는 이름에 걸맞게 ‘꿈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목이 매인 남편 삶자리’를 더 잘 들려줄 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이야기가 함께 깃들기에, ‘서울 염소’인 남편이 누구하고 어떤 곳에서 어떤 삶을 누리는가 하는 대목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목이 매인 ‘서울 염소’이지만, 회사(일터)에서 일을 마치면 ‘그리운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고, ‘매인 몸’을 따스히 안고 기쁘게 어루만질 아이들이 있어요. ‘서울 염소’가 서울 염소인 채 도시에서 회사일을 하면서 ‘죽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은 바로 이녁(남편)한테 곁님인 오인숙 님과 아이들입니다.




.. 그곳(시골)에 갈 때마다 남편의 병이 깊어지는 듯했다. 먹을 것 손수 농사짓고 살 곳도 스스로 만들어 보겠다 말하는 남편을 보며 복잡한 심경으로 눈빛이 흔들렸다 …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나는 남편에게 단 한 번도 혼자만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 아침마다 빛과 빛 사이로 조용히 산책을 갔다. 이곳에선 자그마한 산새의 노랫소리가 가장 큰 뉴스거리이다..  (108, 142, 157쪽)



  곁에 있는 님인 곁님입니다. 우리는 흔히 ‘남편’이나 ‘아내’라는 말을 씁니다만, ‘남편·아내’라는 낱말을 한국사람이 쓴 지는 얼마 안 됩니다. 예전에는 따로 부름말이 마땅히 없었다고 할 만한데, 오늘날 사회에서는 법률용어나 행정용어로 ‘남편·아내’를 쓰지만, 이런 이름을 한번 되짚어 보아야지 싶습니다. 한집을 이루어 보금자리를 가꾸는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일까요? 사랑으로 살림을 가꾸면서 이야기를 빚는 두 사람은 어떤 짝일까요?


  서로 아끼는 사이일 테고, 서로 헤아리고 보살피는 짝이겠지요. 서로 바라보는 눈길은 ‘하늘에 계신 님’을 마주하는 마음일 테며, 곁에서 따사로이 품고 안으며 돌보는 숨결일 테지요.



.. 쌍둥이 두 딸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사진으로 이해하려고 했듯이 남편에게 드리운 그늘을 이해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그러나 남편은 달랐다. 온갖 표정을 지으며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는 여자아이들과는 달리, 남편은 웃거나 화내거나 무표정한, 딱 세 가지의 얼굴뿐이었다 …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도 나는 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내가 어떤 상황에서 쉽게 화를 내고 좌절하는지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이 평화로우면 그는 나보다 열 배는 평화롭고, 내 얼굴에 그늘이 지면 그의 얼굴에는 열 배나 짙은 그늘이 진다는 것도 ..  (180, 184쪽)



  한손을 거들어 살림하면서 사진이랑 삶이랑 사랑을 가꿉니다. 한손은 집안에 즐거움과 기쁨이 감돌도록 힘을 씁니다. 다른 한손은 집안에 이야기꽃이 피어나도록 도란도란 말을 섞고 사진을 찍습니다.


  한손을 거들어 밥을 짓고 글을 씁니다. 한손은 너와 나 사이에 흐르는 꿈을 짓고, 다른 한손은 너와 내가 저마다 나아갈 사랑스러운 길을 닦습니다.


  사진이 있기에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진이 없어도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진을 곁에 놓고 이야기꽃을 피우니 삶을 즐겁게 밝힐 수 있습니다. 사진을 곁에 놓지 않더라도 마음자리에 이야기꽃을 그림으로 넉넉하게 그려서 담으면 삶을 기쁘게 북돋울 수 있습니다.


  사진으로 찍어서 갈무리한 이야기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웃습니다. 사진으로 찍지 않았어도 마음에 가득가득 아로새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노래합니다. ‘전업주부’로 일하는 수많은 어머니는 사진을 모르거나 사진기를 쥘 겨를이 없지만, 마음에는 언제나 사랑과 웃음과 꿈과 노래와 이야기가 흐릅니다. 아이랑 오순도순 놀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동안 사진 한 장을 함께 찍기에 더욱 즐겁습니다. 곁님이랑 도란도란 말을 섞고 살림을 보듬는 동안 사진 한 장을 살짝 찍기에 더욱 기쁩니다.


  눈물도 사진으로 찍고, 웃음도 사진으로 찍습니다. 슬픔도 사진으로 담고, 기쁨도 사진으로 담습니다. 아주 슬퍼서 차마 사진을 못 찍더라도, 이 기운과 느낌을 언젠가 다른 모습으로 사진으로 찍기 마련입니다. 아주 기뻐서 그만 사진을 못 찍더라도, 이 숨결과 마음을 머잖아 새로운 이야기로 사진에 담아요.


  함께 사는 사이인 터라 더 가까이 바라보면서, 때로는 가만히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한길을 걷는 사이인 터라 한 걸음 더 내딛으면서 손을 맞잡고, 때로는 어깨동무를 하며, 때로는 저마다 따로 다른 길을 가더라도 마음으로 생각하고 돌아보면서 만납니다. 《서울 염소》에 나오는 ‘서울 염소’는 곧 ‘시골 염소’가 될까요? 아니면, ‘시골 아저씨’가 될까요? 4348.5.1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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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5.5 - Vol.18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206



사진이 보는 곳, 사진을 보는 마음

― 사진잡지 《포토닷》 18호

 포토닷 펴냄, 2015.5.1.



  사진잡지 《포토닷》 18호(2015.5.)를 읽습니다. 《포토닷》 첫머리에 실은 “평화박물관이 운영하는 전시공간 스페이스99에서 예정됐던 이재갑 사진전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전이 참전군인 단체들의 무력시위와 압력행사로 개막식과 환영식 등 행사가 파행을 겪은 일이 발생했다(17쪽).” 같은 이야기를 짤막하게 읽습니다. 왜 참전군인은 무력시위와 압력행사를 벌이면서 사진전시를 못 하게 할 생각이었을까요? 사진 몇 점이 얼마나 대수롭기에 이런 사진을 사람들이 못 보게 할 생각일까요? 이 전시장에 걸린 사진을 사람들이 보아서는 안 될 까닭이 있을까요? ‘한군국 증오비’를 찍은 사진은 참전군인 이름을 깎아내리는 몸짓이라고 여길 만할까요? 왜 베트남에 ‘한국군 증오비’가 섰는가를 차분히 돌아볼 마음은 있을까요?


  베트남 사내는 한국 군인이 쏜 총에 맞아서 죽어야 했습니다. 베트남 가시내는 한국 군인한테 몸을 짓밟힌 뒤 총에 맞아서 죽어야 했습니다. 버젓이 알려진 이 같은 이야기를 고개 숙여 뉘우치는 참전군인이 있고, 이러한 이야기를 꽁꽁 감추는 참전군인이 있습니다.


  일본사람은 배를 타고 한국으로 건너와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짓밟았습니다. 이 짓을 뉘우치는 일본사람이 있고, 이러한 일은 정벌이라고 여기는 일본사람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인데, 한겨레도 지난날 고구려는 중국 쪽으로 군대를 보내어 땅을 넓혔다고 말합니다. 다만, 고구려가 땅을 넓혔다는 말을 할 뿐, 이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짓밟았는가 하는 대목은 역사책에 한 줄로도 안 나옵니다. 그저 ‘정벌’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포토닷》 끝자락에 실은 “정작 천만 명에 육박하는 이들이 생산하는 사진들을 살펴보면, 그것이 그 어마어마한 숫자만큼 다양하지 않다는 건 확실하다. 각종 사진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그곳에 올라오는 대다수의 사진은 주로 ‘피사체의 힘’에 의지하는 그림 같은 풍경과 화보 스타일의 인물사진에 편중돼 있다(112쪽/이기원).”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몇몇 이름난 사진기를 즐겨쓰는 사람들이 모인 인터넷모임이 퍽 많고, 회원도 대단히 많습니다.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립니다. 한국에서 사진을 즐기는 사람은 그야말로 아주 많습니다.


  따로 ‘전문 사진장비’를 쓰지 않더라도 손전화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았고, 요즈음은 스마트폰으로 무척 멋지다 싶은 사진을 찍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터넷 사진모임’ 사진은 《포토닷》에 실은 글에서도 다루듯이 ‘피사체의 힘’이나 ‘그림 같은 풍경’이나 ‘화보 스타일 인물사진’이기 마련입니다. 사진으로 삶을 드러내거나 밝히거나 나누려고 하는 몸짓은 좀처럼 터져나오지 못합니다. 멋져 보이는 사진이 아닌, 삶을 사랑하는 사진으로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합니다.


  ‘멋져 보이는’ 사진이나 ‘그림 같은’ 사진은 겉모습입니다. 겉모습은 겉치레입니다. 겉모습이나 겉치레는 삶이 아니라 껍데기입니다.





  값비싸거나 값진 장비가 사진을 찍어 주지 않습니다. 사진은 바로 ‘내가 스스로’ 마음을 열어서 찍습니다.


  “작업이라는 게 결국 나를 향한 스스로의 질문이고, 이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에, ‘기억’이란 소재는 평생 가져갈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24쪽/이재용).”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사진을 찍든 글을 쓰든, 늘 내가 나한테 묻습니다. 어떤 사진을 찍으려 하는지, 어떤 글을 쓰려 하는지, 늘 내가 나한테 묻습니다. 사진 한 장을 어디에서 누구와 나누려 하는지, 글 한 줄을 어디에서 누구와 나누려 하는지, 이 같은 이야기도 늘 내가 나한테 묻습니다.


  베트남에서 전쟁이 터졌을 적에, ‘돈(달러)을 벌려고 사람 죽이는 짓’을 시킨 대통령이나, ‘돈을 벌 생각으로 사람 죽이는 짓’을 한 사람이나 서로 같습니다. 사람을 죽이라고 시킨 사람만 나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죽인 사람만 나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손을 맞잡고 서서 그들 스스로 저지른 ‘살인’을 뉘우치고 새 삶으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되지 못한다면, 사진을 제대로 찍지도 못하고 제대로 읽지도 못합니다.





  “작가는 남도에 터를 잡기 시작한 8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남도의 풍경을 발견해 간다. 그에게 사진은 표현이 아니라 ‘발견’이다. 오래 전부터 쓰여 왔던 역사와 신화의 원형, 혹은 땅의 주인이 작가의 눈앞에 이미 있었고, 널려 있었다(43쪽/최연하).”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문화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문화회관이라는 건물에 문화가 있지 않습니다. 문화단체에서 문화를 세우지 않습니다. 문화예술인이라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 둘레에서 수수하게 삶을 짓는 사람들이 언제나 스스로 문화를 이룹니다. 네가 짓는 하루가 바로 문화이고, 내가 가꾸는 하루가 새삼스레 문화입니다.


  오늘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사람이 ‘흙’과 풀과 숲이라고 하는 문화를 가꿉니다. 오늘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사람이 ‘살림’과 집과 보금자리라고 하는 문화를 가꿉니다. 오늘 아기한테 젖을 물리거나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는 여느 어버이가 ‘말’과 이야기와 노래라고 하는 문화를 가꿉니다.


  베트남전쟁과 얽힌 이야기를 마주하려고 베트남으로 찾아가서 ‘한국군 증오비’를 사진으로 찍은 분이 있다고 합니다. 이분이 ‘한국군 증오비’를 사진으로 찍었든 안 찍었든 베트남에는 어엿하게 ‘한국군 증오비’가 있습니다. ‘한국군 증오비’를 찍은 사진을 한국에서 전시를 할 수 있든 없든(개막식은 제대로 못 치렀다고 하지만, 사진전시는 잘 마쳤다고 합니다), 베트남에는 어엿하게 ‘한국군 증오비’가 쉰 해 가까이 서서 비와 바람과 햇볕을 맞았습니다. 베트남사람 가슴에는 한국군이 뿌린 ‘미움’이라는 씨앗이 자랐습니다.




  “과거 서울의 모습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들이 꼭 설명이 필요할 정도로 난해하거나 어려운 작업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왜?’ 이런 캡션을 달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한미사진미술관 전시를 비롯해 이전 전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촬영 장소와 시기처럼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했더라도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마치 답안지를 펼쳐놓고 문제지를 푸는 것처럼 전시를 보는 것이 과연 ‘감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67쪽/이기원)?”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답답한 일이 곧잘 터지는 한국 사회입니다. 사진 한 장을 한결 너르고 기쁘게 누리는 길이 생각과 달리 잘 안 열리기도 하는 한국 사회입니다.


  “일하면서 여성성을 버려야 하는 슬픈 현실을 자주 직면한다. 나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지, 연애를 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보리’는 코미디언처럼 까부는 행동으로 보호막을 쳤고, 나는 문신을 하고 옆머리를 삭발하면서 까칠하게 벽을 쳤다(101쪽/김태은).” 같은 이야기를 읽고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패션사진을 찍는 ‘여자’ 사진가는 사진가라기보다 ‘여자’ 대접(?)을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진가인데, 왜 사진가 아닌 ‘여자’ 대접을 받아야 했을까 궁금합니다. 어떤 사진가들이 ‘내 이웃’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고 ‘여자’로만 바라보려 했을까요.




  가만히 보면, 지난날 어느 대통령 한 분도 베트남사람을 ‘이웃나라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베트남으로 날아가서 사람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면서 돈을 벌려고 했던 사람들(거의 모두 사내)도 베트남사람을 ‘이웃나라 동무’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소위 예술사진을 생산한다는 작가, 혹은 이러한 사진들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사진의 이러한 본질적 측면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럴싸한 장면들을 그럴싸하게 프린트해 전시장에 걸어 놓고 예술의 작위를 수여한다고 다 같은 예술사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행위들은 어떤 사진도 예술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남용한 것뿐이다. 사진은 우선 사진으로 존재할 뿐이다(111쪽/장정민).”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어떤 사진이든 모두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됩니다. 이 사진만 문화나 예술이 되지 않습니다. 저 사진만 패션이나 빈티지가 되지 않습니다. 그 사진만 다큐나 리얼리즘이 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담은 사진이라면, 어떤 사진이든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되며, 패션이나 다큐도 됩니다. 이야기를 담지 못한 사진이라면, 아무리 이름난 작가가 빚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작품’으로 그칠 뿐, ‘사진’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합니다.


  “사진을 사진답게 찍을 때에 비로소 사진답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모습을 찍으면 그저 ‘그럴듯할’ 뿐입니다. 멋있어 보이게 찍는다면 그저 ‘멋있어 보일’ 뿐이지요. 이렇게 만지작거리거나 저렇게 꾸민다고 해서 사진이 빛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붙이거나 저렇게 자른다고 해서 사진이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사진 한 장에 담을 이야기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비로소 사진이 됩니다. 내가 걷는 길을 나 스스로 제대로 바라보고 느껴서 가슴에 담을 때에 비로소 ‘방랑(떠돌기)’이 되고, 이 방랑길에 사진 한 장 찍어서 이웃과 나누는 삶을 짓습니다(127쪽/최종규).” 같은 이야기처럼, 그럴듯하게 찍는 사진은 그럴듯하게 보일 뿐입니다. 멋들어지게 찍는 사진은 멋들어지게 보일 뿐입니다.


  누군가는 그럴듯하거나 멋들어지게 보이려는 사진을 찍습니다. 이런 사진을 찍는다고 나쁘지 않습니다. 그저 이런 사진을 찍었을 뿐입니다. 이야기를 엮어 사진을 찍는다면, 이야기를 엮어 사진을 찍은 셈입니다. 이런 사진을 찍는다고 좋지 않습니다. 그저, 사진에 이야기를 담았을 뿐입니다.


  멋들어지게 불러도 노래가 될 테고, 멋들어지게 써도 글이 될 테지요. 멋들어지게 지어도 밥이 될 테며, 멋들어지게 빨아도 깨끗한 옷이 되겠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삶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으면 삶을 사진으로 못 찍습니다. 삶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기에 겉모습이나 겉치레에 휘둘립니다. 이른바 ‘멋져 보이는’ 작품이나 ‘그림 같은’ 작품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웃과 함께 나누려고 하는 사진 이야기가 아니라, 이웃한테 자랑하고 싶은 ‘그럴듯한 솜씨자랑’으로 나아가고 맙니다.


  삶을 바라보려고 할 때에는 이웃과 동무가 지내는 하루를 차분하게 바라보면서 한솥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웃을 아끼고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이 될 때에 비로소 서로 마음을 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어야 바야흐로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어야 ‘사진으로 담을 삶’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 참전군인은 지난날 삶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에는 돈(달러)만 바라보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름값(명예)만 바라보고 맙니다. 예나 이제나 삶과 사랑과 사람을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베트남에 조용히 선 ‘한국군 증오비’는 한국사람한테 넌지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국사람이 베트남에 심은 미움을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받아들여서 제대로 삭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일본더러 한국에 고개숙여 뉘우치라고 아무리 외친들 일본 정치권력은 한국에 고개숙여 뉘우치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는 이들은 그저 등을 돌릴 뿐입니다. 베트남 참전군인이 아무리 사진전시장 앞에서 무력시위를 하더라도 ‘역사는 바뀌’지 않습니다. 베트남 참전군인이 군홧발로 짓이긴 발자국은 압력행사를 벌이더라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증오비’가 ‘평화비’로 거듭나려면, 주먹과 총칼을 휘두른 사람이 스스로 주먹도 총칼도 내려놓고 따순 가슴이 되어야 합니다. 사진 한 장은 언제나 따순 가슴인 사람들이 찍고 읽으며 나눕니다. 4348.5.11.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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