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방 : 승무 - 춤과 그 사람
정범태 사진, 구히서 글 / 열화당 / 199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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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바로 오늘 바로 여기에 있다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20] 정범태, 《춤과 그 사람, 이매방 : 승무》(열화당,1992)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와 함께 지냅니다. 오늘날 여느 아버지는 어느 일터 하나를 붙잡아 새벽바람으로 일 나갔다가는 밤 늦게 돌아오곤 하지만, 저는 아이를 처음 배어 낳을 때부터 집에서 일하고 집에서 살림하며 집에서 아이를 돌보았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와 함께 지내다 보면, 아이한테서 느낄 좋으며 살가운 모습부터 궂으며 미운 모습까지 샅샅이 마주합니다. 주말에만 살짝 보는 아이가 아니라 날마다 보는 아이일 때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 온 모습을 사진으로 담기 일쑤입니다. 제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 삶을 그림으로 그리느라 몹시 바쁠 뿐 아니라 팔이 빠질 만큼 힘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나 이제나 우리 삶터는 그닥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남자 권리와 여자 권리를 헤아린다는 이들치고 아이를 낳아 돌볼 때에 서로서로 어버이로서 어떻게 해야 즐거우며 좋은가를 살피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아이를 낳기 앞서도 남자 쪽 어버이인 아버지들은 집살림이나 사람살림을 마음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여자 쪽 어버이인 어머니라 해서 어머니가 되는 길을 제대로 마음쓴다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아이를 배었으니 술담배를 줄이고 달 맞추어 병원에서 환한 불빛을 쬐며 회음부를 자르고 진통제를 맞추어 쑤욱 하고 아기를 잡아당겨서는 예방주사를 발바닥에 찰싹 꽂는다고 애낳이가 되지 않아요. 내 아이가 아닌 내가 어떻게 태어났으며, 내가 어떻게 태어나야 좋을는지를 생각한다면, 또 내 아이가 아닌 내가 어린 나날 어떻게 자라면 좋을까를 돌아보면서 내 아이를 마주할 수 있어야 참다이 애낳이를 한달 수 있습니다. 남녀평등이란 육아휴직이나 가사노동분담이 아니라 삶을 함께하는 길입니다.

 이제부터 제 사랑스러운 짝꿍보다 훨씬 오래 늘 곁에서 돌봐야 할 사람은 아이인 만큼, 아이하고 살아가려 한다면 내 삶을 크게 바꾸거나 아주 바꾸거나 새로 바꾸지 않고서는 아이를 맞이할 수 없어요.

 아이는 하루하루 새로운 모습입니다. 아니, 하루 사이에도 1분마다 1초마다 새로운 모습입니다. 아이는 끝없이 자라며, 끝없이 자라기 때문에 아이요, 우리 어른들처럼 키가 더 안 큰다든지 뼈가 더 굵어지지 않는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숨을 한 번 들이쉴 때마다 자랍니다.

 집에서 아이와 살아가며 아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다 보면, 고작 하루치 아이 모습이라 하지만 백 장을 거뜬히 넘곤 합니다. 《윤미네 집》이라는 살가운 사진책이 한 권 있습니다만, 누구나 제 아이를 사랑하며 살아간다면 꼭 하루 동안 제 아이 모습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찍어서 사진책 하나 빚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내 아이 이야기 하루치로 사진책 하나 빚을 만하며, 이름있는 사진쟁이이건 이름없는 사진쟁이이건 이러한 ‘내 아이 삶자락 이야기’ 사진책은 둘레 사람 누구한테나 아름다우며 빛고운 넋을 나누어 줍니다.

 사진기자 정범태 님은 사진기자로서 여러 가지 사진책을 내놓았습니다. 이 가운데 “춤과 그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열 권짜리 사진책은 한겨레 옛춤을 오늘날에도 멋들어지게 추는 열 사람 이야기를 열 가지 이야기로 묶습니다. ‘한국 전통춤’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냥 한 권짜리 사진책으로 내놓아도 될 법하다 여길 수 있으나, 정범태 님은 굳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따로 나누어 낱권책으로 일굽니다. 한영숙 님은 살풀이요, 하보경 님은 밀양 북춤이요, 김숙자 님은 도살풀이요, 안채봉 님은 소고춤이요, 하면서 “춤과 그 사람” 열 권마다 춤쟁이 이름과 춤사위 이름을 하나하나 들면서 사진이야기로 선보입니다.

 정범태 님은 사진책 머리말에 “사십여 년 동안 ‘이 소중함들을 어떻게 간직할 것인가’라는 나 자신에게 던진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사진책을 묶었다고 밝힙니다. 이 소담스럽거나 대수롭거나 놀랍거나 아름답거나 거룩하거나 살뜰한 춤사위를 홀로 알기에는 아쉬울 분더러 홀로 필름에만 얹혀 놓기에는 안타까웠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누고 싶기에, 보이고 싶기에, 또 함께 즐기거나 누리고 싶기에,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말하면서 사진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몸소 느끼고 싶기에 “춤과 그 사람” 열 권이 태어날 수 있었구나 생각합니다.

 다만, 정범태 님 스스로 밝히듯 “그러나 나는 그들의 춤 그릇과 움직임만을 이곳에 풀어 놓을 뿐 그들의 길고도 깊은 한의 이야기로 묶인 정신세계는 내가 가지고 있는 카메라로는 담아낼 수가 없었음을 고백해야겠다”는 말처럼, 춤쟁이 넋과 얼은 이 사진책에 담지 않습니다. 한편, “현대화에 발맞추어 변질되어 가는 우리 춤들 중에서 원형에 가장 가까운 몸짓들을 이 책에 담았다는 자부심은 있다”는 말처럼 한겨레 옛춤을 있는 그대로 잘 담습니다.

 사진책 《춤과 그 사람, 이매방 : 승무》이건 《춤과 그 사람, 김덕명 : 양산 사찰학춤》이건 《춤과 그 사람, 강선영 : 태평무》이건, 이와 같은 춤사위가 어떠한 가락에 따라 어떠한 멋과 몸짓으로 이루어지는가를 살뜰히 보여주는 정범태 님 사진책입니다. 이와 함께 이러한 춤사위마다 어떠한 넋과 얼이 깃들었는가는 짚지 못하는 정범태 님 사진책이에요.

 사진기자 정범태 님이 머리말에서 밝히는 말마디를 그저 ‘고개숙이기’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고 느낍니다. 정범태 님은 정범태 님으로서 할 수 있는 온힘과 온땀을 들여 이 사진책 열 권을 이룹니다. 나머지 몫, 그러니까 오늘날까지 이들 춤쟁이가 춤사위를 꾸준히 잇는 길과 결을 고이 살펴, 이들 춤쟁이 넋과 얼을 사진으로 알뜰히 담아 ‘한겨레 춤사위를 즐기는 사람들은 어떠한 넋으로 어떠한 사랑을 어떠한 얼에 따라 어떠한 몸짓으로 펼치는가’를 보여줄 만한 새로운 사진을 선보여 준다면, 남보다 먼저 한겨레 춤쟁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은 사람으로서 고마우며 기쁘겠다는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춤과 그 사람, 이매방 : 승무》를 비롯한 춤사위 사진책 열 권은 이 나라에서 사진길을 걷는 젊은이한테 물려주는 선물이자 빛이자 열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찾아나서면서 밝히거나 나눌 이야기가 참으로 많은데, 이 가운데 춤 하나만 꼽아도 춤꾼마다 사뭇 다르며 서로 놀랍도록 아리따운 모습이 넘치니, 이러한 춤길에서 사진길을 길어올릴 수 있다고 물려주는 선물입니다. 누군가는 이매방 님 발자취 하나만 좇을 수 있고, 누군가는 강선영 님 발자국 하나만 살필 수 있겠지요. 한 사람 발자취만 좇더라도 사진책으로 열 권 스무 권이 태어날 만합니다. 춤꾼 한 사람이 마흔 해 예순 해를 춤사위에 넋을 실어 춤을 빚는다면, 사진꾼 한 사람은 마흔 해 예순 해를 사진사위에 넋을 실어 사진을 빚을 수 있습니다. 춤쟁이 한 사람이 하루 한 자리에서 펼치는 춤놀이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사진쟁이 한 사람은 하루 한 자리에서 느끼는 춤놀이 이야기를 한 자리에서 필름 열 통이든 스무 통이든 쓰면서 사진놀이 한 자락 일굴 수 있습니다. 또한, 젊은 사진쟁이 누군가는 ‘까망하양 빛깔로 담는 춤 사진’을 넘어 ‘무지개 빛깔로 싣는 춤 사진’을 꽃피울 수 있어요.

 책상맡으로 스미는 햇볕 흐름을 좇으면서도 사진책을 하나 마련할 수 있습니다. 시골집 우리 텃밭에 비치는 햇살을 새벽부터 밤까지 돌아보며 사진책 하나 엮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늘 우리 둘레에 있습니다. 삶은 바로 내 손으로 일굽니다. 사진기를 쥔 내 손은 내가 이름난 쟁이가 아니더라도 빛납니다. 사진기 단추를 어루만지는 내 손가락은 내가 손꼽히는 꾼이 아니어도 예쁩니다. 사진은 바로 오늘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4344.3.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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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 - 우리 시대 가장 뜨겁게 활동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삶과 사진 이야기
송수정 글, 강재훈 외 사진 / 포토넷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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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내 삶길에 즐거운 내 사진길
 [찾아 읽는 사진책 22] 송수정,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포토넷,2009)


 “그들의 인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진을 얘기할 수 없(머리말)”다고 깨달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진책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포토넷,2009)를 읽습니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1권과 2권이 일곱 사람씩 나누어 보여주는 대목만 다르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가볍고 작게 둘로 나누었다 여길 수 있고, 열네 사람을 두 갈래로 바라보며 열네 가지 다 다른 목소리와 숨결을 느낄 만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사진을 한다는 열네 사람을 만난 송수정 님은 사진길을 걷는 사람들마다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리려 하는가 궁금해 합니다. 송수정 님 스스로 궁금한 이야기를 물으며, 송수정 님 사진길을 북돋우고 싶어 합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송수정 님이 북돋우는 사진길을 따라 걸으면서 도움이 되는 길잡이말을 들을 수 있기도 할 테고, 나로서는 다른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할 테지요.

 어느 쪽이든 즐겁고,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어느 한 갈래 길만 사진길일 수 없으니까요. 어느 한 가지 길만 걸어야 비로소 사진길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세바스티앙 살가도, 조셉 쿠델카,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을 분석하며 ‘에이, 나는 왜 그들처럼 안 될까’ 고민했던 흔적이 그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성남훈/2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진책 《유민의 땅》을 보면서 아쉽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구나 싶어 거듭 고개를 끄덕입니다.

 마땅한 소리인데, 성남훈은 성남훈이지 성남훈이 살가도가 될 수 없을 뿐더러 살가도처럼 되어서도 안 됩니다. 성남훈은 성남훈으로 살아야지 쿠델카처럼 살 수 없을 뿐더러 쿠델카처럼 살아서도 안 됩니다. 성남훈은 성남훈 값을 해야지, 브레송 같은 이름값을 얻거나 브레송처럼 돈을 벌기를 바라도 되겠습니까.

 저는 제 사진을 찍으며 제 사진길을 걷고, 성남훈 님은 성남훈 님 사진을 찍으며 성남훈 님 사진길을 걸으면 즐겁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자 길을 걸을 노릇이요, 교사는 교사 길을 걸을 노릇이며, 공무원은 공무원 길을 걸을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하고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내 몸 안으로 들어온 방법론입니다. 어떤 대상이가 상황 앞에서 스스로가 용인하지 않는 촬영 방법으로는 도저히 찍을 수가 없습니다(서헌강/3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입니다. 내가 서헌강 님 사진을 보면서 그닥 내키지 않던 까닭을 어렴풋하게 짚습니다. 그러나 내가 서헌강 님 사진을 내켜 하지 않는대서 서헌강 님이 사진을 못 찍는다거나 잘못 찍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최종규 사진을 좋아할 테지만 누군가는 최종규 사진을 안 좋아합니다. 누군가는 최종규 사진이 괜찮다 할 테지만, 누군가는 풋내기 티 풀풀 난다며 손가락질하겠지요.

 서헌강 님은 서헌강 님 삶을 일구며 서헌강 님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서헌강 님한테 안승일이나 김기찬이 되라 할 수 없습니다. 서헌강 님이 강원도 깊은 멧골자락 멧골집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안승일 님처럼 찍어야 할 까닭이 없고, 서헌강 님이 서울 골목길을 찍을 때에 김기찬 님처럼 찍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서헌강 님은 서헌강 님이 살아온 결에 따라 당신 사진감을 찾아 당신 사진이야기를 길어올릴 당신 사진길을 걸어야 가장 아름다우면서 좋아요. 사진을 읽는 내가 다 다른 사진쟁이 다 다른 사진길을 느끼며 다 다른 맛과 멋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진 찍는 이와 사진 즐기는 이가 나란히 아름다울 노릇입니다.

 “맨 마지막으로 체에 걸러진 흙이 제일 고운 것처럼 나는 그냥 오랫동안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러면 이 주제로 잠깐씩 거쳐 간 작업들과 자연스럽게 차이점이 생기겠지요(류은규/6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고개가 쭈뼛쭈뼛합니다. 어딘가 아리송합니다. 흙을 체로 거를 때에 맨 나중에 나오는 흙이 가장 곱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고운 흙은 맨 먼저 떨어집니다. 맨 나중에 떨어지며 걸러지는 흙은 가장 굳거나 단단하게 뭉쳤던 녀석입니다. 가장 굳거나 단단하게 뭉쳤던 녀석이 ‘곱게 걸러지기’까지 더디 걸리고 오래 걸립니다. 그러니까, 사진길에서는 ‘가장 곱게 걸러내어 사진으로 담기 힘든 사진이야기’일수록 오래 걸릴 뿐입니다. 오래도록 더 많은 품과 더 많은 사랑과 더 많은 손길을 들여 이룰 사진열매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금세 빛과 꿈과 뜻을 이루어 살가이 나눌 사진열매가 있어요.

 모든 사진이야기가 모두 오래오래 삭여야 잘 태어나지 않습니다. 한두 해만 사진을 찍든 한두 달만 사진을 찍든 하루이틀만 사진을 찍든 한두 시간만 사진을 찍든 일이 분만 사진을 찍든 다르지 않습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달리 마주하며 보낸 삶에 걸맞게 사진이 태어납니다.

 수박은 수박만 해야 수박답습니다. 그런데 수박 가운데 참외 크기만 할지라도 수박맛을 다하는 수박이 있습니다. 살구는 살구만 해야 살구답습니다. 살구가 박만 해서 나뭇가지가 꺾이거나 나무줄기조차 휘어진다면 살구랄 수 없어요.

 곡식에는 수수가 있고 기장이 있으며 보리와 벼와 율무와 조가 있습니다. 다 다른 곡식은 다 다른 대로 값을 하며 보람이 있고 사랑스럽습니다. 오래도록 곰삭일 사진이면 오래도록 곰삭이는 대로 아름답고, 짧게 스치듯 이루는 사진이면 짧게 스치듯 이루는 사진으로서 아름답습니다.

 “비록 사진 속 아이들이 개미처럼 작아 보여도, 그 아이들이 다 말해 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광각렌즈를 써서 힘있게 표현한 사진에 너무 길들어 있다 싶기도 하고(강재훈/84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싱긋 웃습니다. 사람들은 광각렌즈에도 길들고 표준렌즈에도 길들며 줌렌즈나 망원렌즈에도 길듭니다. 그저 사진을 찍어 사진을 즐기면 넉넉한데, 사진이 아닌 다른 대목에 자꾸 얽매이거나 걸려 넘어집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찍기로 즐거우면 될 텐데, 자꾸만 다른 곁길로 샙니다.

 돈이 있어서 더 낫다 하는 사진장비를 쓴다면 나로서는 더 나은 사진을 낳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더 나은 사진을 얻은 내 삶 또한 더 낫다 할 수 있나요. 한 달에 2백만 원이 아닌 2천만 원을 벌어야 더 낫다는 삶을 꾸리겠습니까. 다달이 2천만 원을 훌쩍 넘어서는 2억 원을 번다면 아주 훌륭하다는 삶을 일구려나요. 아니, 한 달에 고작 2십만 원을 벌거나 2만 원을 번다면 아주 못난 삶으로 나뒹굴는지 궁금합니다.

 때에 따라 렌즈를 고르고, 쓰임새에 따라 사진기를 갖추며, 주머니라든지 내 몸에 맞추어 사진을 합니다. 안젤 아담스가 높은 산봉우리를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올라가서 사진을 찍었대서 똑같이 해야 하지 않습니다. 가벼운 똑딱이를 주머니에 넣고 산에 올라 사진을 찍어도 됩니다. 안젤 아담스는 안젤 아담스대로 살며 안젤 아담스 사진을 찍고,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즐기며 내 사진 또한 즐깁니다.

 “나한테는 이야기가 우선이고, 잘 찍는 건 두 번째 고민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 찍을까는 사실 헛고민이에요. 걸어다니면서 생활 현장에서 사람과 직접 부딪히며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게 제일 좋은 사진입니다. 나는 서양 사진을 약탈적 사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요. 주류가 다 그랬으니까.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육신이 힘들어야 좋은 사진이 나오는 법이지요(노익상/10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밑줄을 긋습니다. 참말, 걸어다니지 않고서야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취재할 곳에 자가용을 몰아 씽하니 달려가면 더 빨리 더 금방 사진을 얻겠지요. 그러나 취재할 곳에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시골버스를 타고 갈 때에는, 내가 취재할 곳이 어떠하며 내가 취재할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어느 동네 어떤 터전에서 살아가는가를 몸으로 받아들입니다. 바쁘면 자가용을 몰 노릇이요, 바쁘지 않으면 걸을 노릇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대서 자동차에 탄 채로 사진기 단추만 우악스레 누를 수 없어요. 사진을 찍으려면 자동차를 멈추고 차에서 내려 뚜벅뚜벅 몇 걸음 옮긴 다음 몇 초 동안이라도 가만히 멈추어 선 채로 사진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에는 이야기를 담지, 솜씨를 담지 않습니다. 솜씨를 보여주자면 인공지능 컴퓨터한테 맡기면 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막째도 오로지 ‘사진에 담을 이야기 하나’입니다. 흔들리면 어떻고 빛이 어긋나면 어떻습니까. 이야기가 있대서 사진인걸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잘못해서 그림 한쪽이 다치면 어떻습니까. 나중에 손질해도 되고, 그저 그런 대로 잘 어울립니다. 찌개를 끓이는 데에 양념을 0.1그램 더 넣으면 맛이 확 바뀌기도 한다지만, 확 바뀌면 확 바뀌는 대로 좋고, 못 느끼면 못 느끼는 대로 좋습니다. 찌개를 끓일 때에 양념이나 건더기를 그램으로 하나하나 따질 수 없습니다. 밥을 할 때에 쌀알을 낱낱이 세며 쌀을 씻거나 밥그릇에 퍼담을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 목소리를 듣다 보면, 사람마다 생각과 삶이 이다지도 다르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들 여러 사람 목소리 가운데 내 삶에 이바지한다 싶은 대목은 곱게 받아들이고, 아직 나로서는 지나친 목소리이구나 싶으면 다음에 다시 새기며, 어딘가 섣부르거나 올바르지 않다고 느끼는 목소리라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카메라를 여러 대 들고 여기 찍고 저기 찍고 하는 작가들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장면은 참 좋은데 에너지가 없어요. 예전에 컬라와 흑백을 동시에 작업해 본 적 있는데, 그건 양쪽 작업을 다 버리는 일이에요. 한 가지에만 몰입해도 제대로 나오기 힘들어요(이갑철/128쪽).” 같은 대목을 읽으면서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사진기 하나를 들고도 여기 찍고 저기 찍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수많은 렌즈를 갈아끼우든 렌즈 하나로 찍든, 참말 여기저기 마구 찍어대는 사람이 꽤 많아요. 그런데, 참말 마구 찍어대는 듯 보이지만 놀랍도록 사랑스러운 작품을 빚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장 두 장 꼼꼼히 골라서 사진기 단추를 아주 적게 누르며 훌륭한 사진을 엮는 분이 있으나, 아끼며 사진을 찍는다 하나 정작 뭘 찍는지 알 노릇이 없는 사람 또한 있어요.

 사진기를 여러 대 들든 한 대만 들든 대수로울 수 없습니다. 어떤 장비를 쓰건 다를 턱이 없습니다. 중형사진기나 대형사진기를 써야 비로소 사진이 되지 않듯, 까망하양을 하건, 무지개빛을 하건, 조금도 다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다큐사진을 한다는 분들은 으레 까망하양에만 기울어집니다. 무지개빛 사람들을 ‘무지개빛처럼 다 다른 모습과 삶이 어떠한가를 고스란히 읽’으며 ‘무지개빛으로 고우면서 다 다른 멋을 나누어 주’듯이 사진으로 담는 분이 아주 드뭅니다.

 까망하양이래서 무지개빛을 못 담지 않습니다. 까망하양으로도 얼마든지 하늘에 걸린 무지개라든지 구름이라든지 찍을 수 있습니다. 까망하양으로도 시냇물과 바닷물을 담을 수 있어요. 예전 사람들은 까망하양으로만 사진을 찍어야 했으니, 까망하양으로 모든 무지개빛을 다 다른 짙기와 옅기와 느낌과 결과 무늬를 담아내려고 온힘을 쏟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까망하양이 잘 안 된다 싶으면 무지개빛으로 건너가고, 무지개빛이 좀 어지럽다 싶으면 까망하양으로 오곤 합니다. 그렇지만, 어지러운 사진은 무지개빛일 때이든 까망하양일 때이든 똑같이 어지럽습니다. 아름다운 사진은 무지개빛일 때이든 까망하양일 때이든 한결같이 아름다워요.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문득 느낍니다. 어쩌면, 좀 아니다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말마디를 들었기 때문에 ‘어, 아닌 듯한데?’ 하고 생각하면서, 제가 살아오며 겪거나 받아들인 사진말을 길어올립니다. 사진쟁이한테서 삶이 묻어난 이야기를 살뜰히 받아들여도 좋고, 나 스스로 내 사진길을 깨닫거나 찾으며 이야기를 펼칠 수 있어도 좋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는 교과서가 아닙니다. 다큐사진 열네 사람을 하늘처럼 우러르자는 책 또한 아닙니다. 다 다른 열네 사람 다 다른 사진길을 마주하면서, 다 다른 삶과 다 다른 사랑과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이야기꽃을 사진열매로 어떻게 영그는가를 느끼자는 책이겠지요.

 좋으면 좋은 대로 받아들여 북돋웁니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맞아들여 다스립니다. 사진은 어차피 내가 찍는 내 삶입니다. 사진이란 곧 내가 살아가며 사랑하는 사람과 어깨동무하는 내 길입니다.

 낱말을 바꾸어 ‘사진’ 아닌 ‘책’이든 ‘만화’이든 ‘진보’이든 ‘통일’이든 ‘민주’이든 ‘춤’이든 ‘영화’이든 ‘글쓰기’이든 ‘아이키우기’이든 ‘집안살림’이든 ‘밥벌이’이든 넣어도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을 읽을 수 있으면 삶을 읽을 수 있고, 삶을 읽을 수 있을 때에는 사진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똑바로 사랑스레 참답게 읽습니다. (4344.3.21.달.ㅎㄲㅅㄱ)


―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 (송수정 글,포토넷 기획,포토넷 펴냄,2009.3.1./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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旅ゆけば猫―ニッポンの猫寫眞集 (大型本)
이와고 미츠아키 / 日本出版社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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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고 아끼면서 사진을 찍기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2] 이와고 미츠아키(岩合光昭), 《旅ゆけば猫》(日本出版社,2005)



 사진이 사람들한테 차츰 퍼지면서 누구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제아무리 이름나거나 손꼽히는 사진쟁이라 하더라도 ‘사랑하는 내 짝꿍’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는 사진찍기에 풋내기나 새내기라 하더라도 전문 사진쟁이보다 훨씬 잘 찍는다고.

 사진 풋내기나 사진 새내기일지라도 내 짝꿍을 사진으로 가장 잘 담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전문 사진쟁이가 제아무리 멋진 솜씨를 뽐내더라도 ‘짝꿍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큼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찍히기 어렵습니다. 우리 집 아이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도 다른 사람이 찍을 때하고 내가 찍을 때에는 사뭇 다릅니다. 같은 자리에서 바라보며 사진으로 담더라도 내 아이를 내가 담을 때랑 내 아이를 다른 사람이 담을 때랑 놀랍도록 다릅니다.

 사랑하는 내 짝꿍은 사진기 다루는 솜씨로 담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내 짝꿍이기 때문에 오로지 사랑하는 마음길과 눈길과 손길로 담을 뿐입니다.

 전문 사진쟁이가 ‘돈을 내어 주문한 사진’을 누구보다 잘 찍는 까닭은 달리 있지 않습니다. ‘돈을 내어 주문한 사람 입맛과 눈맛’에 맞추어서 찍으니까, 돈을 치르며 사진을 사는 사람한테 가장 어울리거나 걸맞거나 쓸모있는 사진을 낳습니다. 사진 풋내기나 사진 새내기는 ‘돈을 내어 주문한 사람 입맛과 눈맛’을 아직 모릅니다. 섣불리 내 목소리나 내 눈길을 집어넣습니다.

 상업사진을 하는 사람은 상업사진밭에서 가장 뛰어나거나 훌륭합니다. 그러나, 상업사진밭에서는 상업사진일 뿐이지, 다른 사진밭에서까지 뛰어나거나 훌륭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사진밭에서는 제법 잘 찍는다 할 수 있겠지요. 다큐사진을 하는 사람한테도 다큐사진밭에서 가장 뛰어나거나 훌륭하다 할 테지요. 그러나 다큐사진을 하는 사람이 상업사진밭에서든 다른 사진밭에서든 뛰어나거나 훌륭하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사진밭에서 내 솜씨를 빛낼 뿐입니다. 내 짝꿍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 짝꿍을 사랑하는 데에서 누구보다 돋보이거나 아름답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자리를 넘보거나 건드리지 못해요.

 사진찍기란 손놀림이나 손맛이나 손재주가 아닙니다. 사진찍기는 저마다 살아가는 자리에 걸맞게 제 삶을 맞추어 사랑하는 손길이자 마음길이자 눈길입니다. 상업사진을 한대서 더 나쁠 까닭이 없고 다큐사진을 한대서 더 좋을 일이 없습니다. 상업사진은 상업사진대로 아름답고, 다큐사진은 다큐사진대로 어여쁘며, 내 짝꿍 찍는 사진은 내 짝꿍 찍는 사진대로 아리땁습니다.

 이와고 미츠아키(岩合光昭) 님이 고양이 삶자락을 담은 사진책 《旅ゆけば猫》(日本出版社,2005)를 들여다봅니다. “길을 떠나면 고양이”나 “마실을 가면 고양이”나 “나들이길에는 고양이”라 할 만한 이 사진책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아이와 함께 즐겁습니다. 우리 집 아이는 고양이라든지 개라든지 온갖 짐승이 나오는 그림책이나 사진책을 퍽 좋아합니다. 네 살 난 아이한테 이 책을 내밀었더니 “벼리 책이야.” 하면서 제 어머니나 아버지조차 못 보게 가슴으로 꼭 껴안기까지 합니다. “너, 밥 먹던 손으로 책을 만지면 책이 더러워지지.” 하며 수건을 내밉니다. 아이는 옷에다 손을 슥 문지르다가 수건으로 손가락 사이사이 말끔히 닦습니다. 그러고는 제 곁에 이 사진책을 놓습니다. 이러다가다 다른 놀이를 하며 책은 어느새 잊지만.

 고양이 사진으로 가득한 《旅ゆけば猫》를 여러 번 가만히 넘기면서 생각합니다. 이토록 길고양이나 골목고양이나 바다고양이나 시골고양이를 푸근하면서 따사로이 담는 사람은 드물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를 사랑하거나 아끼는 이라면, 누구나 이만큼이든 저만큼이든 그만큼이든 사진으로 담을 수 있겠지요. 고양이를 사랑하거나 아끼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사진이든 저런 사진이든 그런 사진이든 꿈조차 꾸지 않을 뿐더러 생각마저 안 할 테고요.

 이와고 미츠아키 님은 고양이를 사랑하거나 아끼는 넋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달리 남다른 장비를 쓴다거나 남다른 솜씨를 부리지 않습니다. 꼭 고양이 눈높이와 삶높이에 걸맞게 마주하면서 사진놀이를 즐깁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은 고양이를 사진으로 ‘잘 찍지’ 않습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은 모든 고양이를 고양이 그대로 사랑하며 아낍니다. 모든 고양이를 고양이 그대로 사랑하며 아끼는 마음밭으로 고양이를 당신 ‘사진감으로 고릅’니다.

 오래도록 깊고 넓게 사랑하는 길이기에, 이와고 미츠아키 님 눈에 고양이가 들어오면 고양이를 살가우며 푼더분하게 담습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 눈에 여느 일본 살림집이 들어오면 이 여느 일본 살림집을 어여쁘며 빛곱게 담습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 눈에 바닷마을 사람들 모습이 들어오면 이 바닷마을 사람들 모습을 애틋하며 곱게 담습니다.

 사진을 잘 찍는 길이란 없습니다. 사진기를 잘 다루는 법이란 없습니다. 그저 꾸준히 찾고 돌보는 사람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예 내 사진기를 사랑하며 아끼고 돌볼 줄 알면 됩니다.

 내 사랑하는 짝꿍은 내 사랑하는 짝꿍 그대로 사진으로 옮기면 됩니다. 더 예뻐 보이도록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더 멋져 보이도록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찍는다든지 더 귀엽게 느끼도록 찍을 일이란 없어요. 기쁠 때에는 기쁜 빛을 담고, 슬플 때에는 슬픈 빛을 담으며, 괴로울 때에는 괴로운 빛을 담습니다. 고단할 때에는 고단한 빛을 담고, 좋아할 때에는 좋아한 빛을 담으며, 아플 때에는 아픈 빛을 담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옆지기로서 사진을 담습니다. 이와고 미츠아키 님 고양이 사진은 ‘고양이를 잘 찍자’라든지 ‘고양이를 좋아하자’라든지 ‘고양이가 예뻐’라든지 ‘고양이가 으뜸이야’라든지 외치는 사진이 아닙니다. 곁에서 더없이 사랑하면서 아낌없이 어깨동무하는 삶을 나란히 마주하는 이야기를 꽃피우는 사진입니다.

 사랑하면 넉넉합니다. 아끼면 즐겁습니다. 좋아하면 아름답습니다. 믿으면 따사롭습니다. 사진을 찍고픈 분이라면 사진기를 장만하기 앞서, 내 삶을 사랑하고 내 동무를 아끼는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4344.3.1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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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說 古事記 (ふくろうの本) (單行本)
篠山 紀信 / 河出書房新社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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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보여주고픈 사진책은 목록에서 찾을 수 없다. 다만, 시노야마 기신 님 사진 가운데 이와 같은 사진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려주고 싶기에, 이이 문화재 사진책에 이 글을 걸친다.) 



 한국사람이 사진으로 담지 않은 예쁜 한국사람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9] 시노야마 기신(篠山紀信), 《シルクロ-ド (2) 韓國》(集英社,1982)



 일본 사진쟁이 시노야마 기신(篠山紀信) 님은 일본에서 내로라 하는 여자 배우 사진을 꽤 많이 찍었습니다.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여자 배우 사진’으로 널리 알려졌다 할 만한 사진쟁이일 텐데, 시노야마 기신 님이 내놓은 사진책은 ‘여자 배우 사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시노야마 기신 님은 문화유적 사진을 곧잘 찍었으며, ‘비단길’을 돌아본 발자국을 그러모아 두툼한 사진책 《シルクロ-ド》를 여덟 권짜리로 내놓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비롯해서 한국과 중국을 거쳐 파키스탄과 이란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과 터키와 그리스를 지나 이탈리아에서 마무리짓는 《シルクロ-ド》 여덟 권인데, 이 가운데 둘째 권이 한국이고, 여덟 권 가운데 둘째 권 한국 이야기에서 ‘여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일본사람으로서 일본사람을 찍기란 한결 수월할 텐데 외려 일본 이야기 다룬 첫째 권에서조차 일본사람 모습은 얼마 없습니다. 거의 모두 ‘비단길이 일본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느냐’ 하는 문화유적 사진투성이입니다.

 이란에서야 사람 사진 찍기가 힘들밖에 없다지만, 중동이든 중국이든 파키스탄이든 문화유적 사진이 꽤 많이 차지합니다. 뜻밖이라 할 만한 사진책인 《シルクロ-ド》이면서 뜻밖이라 할 만한 엮음새인 《シルクロ-ド》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책보다 한국 이야기 담은 둘째 권에서 ‘여느 한국사람 살아가는 모습’을 낱낱이 보여주다 보니, 1982년에 나온 이 사진책을 돌아보면서 1970년대 끝무렵과 1981년 즈음 한국땅 한국사람 자취를 꽤 알뜰살뜰 느낍니다.

 《シルクロ-ド (2) 韓國》(集英社,1982)을 펼치면, 책 겉그림부터 무지개빛 사진입니다. 비단길 사진책 여덟 권 가운데 흑백사진은 한 장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문화유적을 담을 때에 흑백사진을 쓰는 사람이 드물다고도 할 터이나, 사람 사는 발자국을 담는 ‘한국 사진쟁이 사진’은 으레 흑백입니다. 다큐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 사진쟁이이든 외국 사진쟁이이든 거의 늘 흑백입니다. 시노야마 기신 님 《シルクロ-ド》처럼 무지개빛으로 아리땁게 채우는 일은 찾아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집식구와 《シルクロ-ド》 여덟 권을 함께 들여다보면서 서로 생각합니다. 시노야마 기신 님이 빚은 《シルクロ-ド》이든, 이이가 담은 일본 여자 배우 사진이든, 이이는 ‘예쁘게 느껴 예쁘게 바라본 사람을 예쁘게 읽을 예쁜 사진’으로 태어나도록 하는구나 싶습니다. 이런 느낌은 무지개빛이 아닌 흑백으로 담을 때에도 똑같이 피어나리라 생각합니다. 토몬 켄 님이나 기무라 이헤이 님이 담은 사람사진을 들여다보면, 흑백이지만 하나도 흑백 같지 않다고 느낄 수 있는데, 시노야마 기신 님 사람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고운 무지개빛이면서 이 무지개빛을 흑백으로 바꾼다 한들 무지개빛 느낌이 사라질 수 없구나 싶어요. 게다가, 무지개빛이 아니고서는 이 느낌을 사진쟁이부터 예쁘다 느끼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이러한 무지개빛을 사람들이 바라보지 않는다면 ‘이러한 무지개빛으로 살아가는 사람 스스로 내 삶이 얼마나 무지개빛인가를 모르며’ 지나치기 쉽겠구나 싶습니다.

 《シルクロ-ド (2) 韓國》 겉껍데기에는 흰옷을 입고 춤추는 할아버지 사진이 담깁니다. 겉껍데기를 열면 사진책 겉장에는 아기를 나란히 업은 두 계집아이 사진이 담깁니다.

 겉껍데기 사진이 어느 동네 무슨 사진인지를 알아챌 한국사람이나 인천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만, 겉껍데기 춤추는 흰옷 할배 사진은, ‘이제는 헐려 사라진 인천공설운동장(이 운동장은 자그마치 1930년대에 터를 닦은 역사가 매우 깊은 곳입니다만 인천시는 이런 역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새 축구전용구장을 짓는다며, 이 공설운동장하고 옆에 있던 야구장을 함께 허물었습니다. 인천 숭의야구장 또는 도원야구장은 1920년대에 웃터골이라는 데에 처음으로 마련되었다가 이제는 헐린 자리에 1934년부터 옮겨져서 2008년까지 있다가 공설운동장과 함께 이슬처럼 사라졌습니다)에서 민속무용대회를 하는 모습’ 가운데 하나로, 사진에 나온 흰옷 할배는 학춤을 춥니다. 사진 오른쪽 아래를 찬찬히 살펴보면 숭의3동 꼭대기 전도관 건물과 밑으로 죽 이어진 골목집 모습이 보입니다. 아는 사람이 드물 테지만, 황해도 은율탈춤은 인천에서 하고, 무형문화재도 인천에서 지정되었습니다. 전국 민속무용대회를 인천에서 할 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어린 날 공설운동장에서 했던 민속무용대회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인천에서 민속무용대회를 하던 이무렵이든 다른 무렵이든, 한겨레 여느 사람들이 즐기거나 누리던 옛춤을 사진으로 담은 한국 사진쟁이는 얼마쯤 있었을까요.

 이보다 한국땅 여느 사람이 즐기는 문화라든지 한국땅 여느 사람이 살아가는 매무새를 애써 흑백으로 담는 사진이 아니라, 빛깔 고운 결 그대로 무지개빛을 살리는 사진쟁이는 얼마나 될까요.

 한국에서 골목길 사진을 찍는 꽤 많은 분들은 거의 모두 흑백으로만 바라보며 흑백으로만 찍기 일쑤입니다. 삶터와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이 흑백이기 때문에 흑백사진을 찍을밖에 없을 테고, 삶터와 사람을 마주하는 매무새가 흑백인 탓에 흑백사진을 찍기만 해요. 골목길 모습이 흑백사진하고 잘 어울리니까 흑백사진을 찍을 만하지 않습니다. 골목길 삶자락을 ‘흑과 백’이라는 두 갈래로만 쩍 갈라서 바라보니까, 한국땅 숱한 사진쟁이는 골목길 사진을 흑백사진으로만 담기 일쑤이며, 때때로 무지개빛으로 담는다 하더라도 ‘흑과 백’이라는 틀을 스스로 떨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골목동네 사람과 삶터가 얼마나 아리땁게 빛나면서 결이 고운지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시노야마 기신 님은 한국땅 여느 골목길 모습도 제법 사진으로 옮깁니다. 시노야마 기신 님은 한국땅 여느 골목을 다른 사진하고 똑같이 무지개빛으로 바라보며 무지개빛으로 담습니다. 햇볕과 그림자가 알맞게 드리운 어여쁜 모습을 놓치지 않습니다. 아니, 놓칠 까닭이 없으며, 햇볕과 그림자를 기쁘게 받아들여요. 신나게 즐깁니다. 《シルクロ-ド (2) 韓國》은 ‘비단길’이 사진책 줄거리입니다만, 햇볕과 그림자를 예쁘게 맞아들여 기쁘게 즐기는 한국사람하고 나란히 어깨동무하면서 사진쟁이 스스로 기쁘게 즐기는 예쁜 넋을 곱다시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곰곰이 살피면, 이탈리아에서 비롯하여 중동과 아시아 여러 나라와 중국을 거쳐 한국땅을 마지막으로 해서 일본으로 들어온 비단길 문화는 ‘한국에서 예쁘게 꽃피웠구나’ 하고 시노야마 기신 님부터 느끼기 때문에, 시노야마 기신 님 사진책 《シルクロ-ド》 여덟 권 가운데 한국 이야기에서는 사람사진이 아주 많이 나올 뿐 아니라, 꽤 재미나기도 하며, 참 살갑기까지 합니다.

 한국땅에서는 애써 문화유적을 돌아보며 사진으로 담을 까닭이 없는 셈입니다. 중국 문화이건 유럽 문화이건, 또 일본이나 몽골이나 무슨무슨 서양 문화이건, 한국사람은 한국땅에서 저희 나름대로 예쁘게 곰삭이며 신나게 살아가니까, 이렇게 살아가는 예쁜 사람을 예쁜 눈길과 손길을 거쳐 예쁜 사진으로 빚으면 됩니다. 어찌 보면 ‘비단길 사진’ 가운데에 ‘옷감집 사진’을 넣는 모습이라든지 ‘자개장 문을 열고 이불과 베개 놓인’ 모습 찍은 사진이라든지 뜬금없다 할 만합니다. 여느 살림집 여느 책상머리 모습 사진이라든지 시골 논밭 돌보는 사람들이 새참 먹는 모습 사진이라든지 가을날 울긋불긋 물든 나무 밑에서 올망졸망 노는 어린이들 담은 사진 또한 비단길 문화랑 뭐가 이어졌느냐 할 만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여느 사람 수수한 삶이야말로 ‘문화’이자 ‘비단길 문화’입니다. 박물관에 모셔진 궁궐사람 금관이건 양반집 술병이건 똑같이 문화라 할 터이나,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 교과서나 역사책에서 다루지 않는 여느 사람 수수한 삶이 곧바로 문화이자 비단길 문화입니다. 한국땅 사진쟁이조차 제대로 사진으로 담지 않은 한국사람 모습이기에, 《シルクロ-ド》를 내놓은 시노야마 기신 님은 누구보다 이 같은 모습을 더 파고들며 가슴으로 껴안으려 했다고 느껴요.

 사진을 함께 바라보던 옆지기는 문득 “포대기 빛깔이 참으로 곱다”고 말합니다. 문득 이런 말을 뱉으면서 “우리 나라에서 포대기 사진을 칼라로 찍은 사람이 있나요?” 하고 묻습니다.

 옆지기가 문득 느끼면서 뱉은 말마디와 문득 물은 말마디에 말문이 막힙니다. 털어놓고 말하자면, 저는 이렇게 느끼지 못했고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로서는 골목길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흑백사진으로 빚을 수 없다고 느껴 무지개빛으로 사진을 담기는 하나, 포대기 빛깔을 고이 돌아보거나 느끼려 하지 못했어요. 옆지기 말을 듣고 나서 사진을 가만히 다시 돌아보며 새삼 깨닫습니다. 《シルクロ-ド (2) 韓國》에서는 아기 업은 어린 계집아이 포대기 빛깔뿐 아니라, 여느 저잣거리에서 아기를 업은 아줌마들 포대기 빛깔이 모두 다릅니다. 모두 다를 뿐 아니라 모두 밝고 맑으며 곱습니다. 시노야마 기신 님은 이 빛깔을 하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사람이 사진으로 담지 않은 예쁜 한국사람을 언제 어디에서나 듬뿍 느끼면서 신나게 사진기 단추를 눌렀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1970∼80년대 한국사람이 얼마나 예쁘며 재미나고 즐겁게 알뜰살뜰 살림을 꾸렸는가 하는 이야기는 한국사람 한국사진으로는 알아챌 길이 없습니다. 《シルクロ-ド (2) 韓國》을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을 사랑하거나 좋아한다는 서양사람조차 한국사람 어여쁜 무지개빛까지 알아채거나 알아보지는 못해요. 그래도 한국사람은 ‘서양사람이 바라본 한국 모습 사진’을 썩 좋아하는 듯합니다.

 일제강점기 역사와 임진왜란 역사 때문에 한국사람이 무던히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일본사람 가운데 빛을 빛 그대로 사랑하며 아끼는 사진쟁이가 틈틈이 한국사람 어여쁜 무지개빛을 조용히 예쁘게 사진으로 옮겨서 고즈넉하게 ‘사진 문화유산’을 새삼스레 선물처럼 내밀어 줍니다. (4344.3.1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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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현의 얼굴 - 그의 카메라가 담는 사람, 표정 그리고 마음들
조세현 지음 / 앨리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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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글·그림·사진이 아름다이 태어나는 길
 [찾아 읽는 사진책 25] 조세현, 《조세현의 얼굴》(앨리스,2009)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어느 사진보다 얼굴을 담은 사진을 더 좋아하거나 눈길이 끌릴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애써 얼굴을 담은 사진이 아니더라도 얼굴을 읽을 수 있으며, 사람 모습을 담은 사진이 아닐지라도 사람 모습을 읽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사진쟁이 조세현 님은 《조세현의 얼굴(앨리스,2009)에서 “사진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을 닮습니다(4쪽).” 하는 말로 첫머리를 엽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사진찍기와 사진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읽는 사람 마음에 따라 사진을 받아들입니다. 읽는 사람 삶에 따라 사진을 맞아들입니다. 찍는 사람 마음에 따라 사진을 받아들일 테고, 찍는 사람 삶에 따라 사진을 맞아들이겠지요.

 조세현 님은 “사람의 표정만큼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5쪽).” 하고도 말합니다. 스스로 아름답다 느끼는 삶과 이야기를 스스로 아름답게 사진으로 담거나 글로 옮기거나 그림으로 펼치면 됩니다. 온누리에서 ‘더’ 아름답거나 ‘가장’ 아름답다 할 무언가는 따로 없습니다. 그저, ‘나한테 참으로’ 아름답다 느낄 무언가가 있을 뿐입니다.

 이리하여 나 스스로 참으로 아름답다 느끼는 무언가를 글로 쓰면 글이 아름다이 빛납니다. 나부터 참말 아름답다 느끼는 무언가를 그림으로 그리면 그림이 아름다이 반짝입니다. 내가 무엇보다 아름답다 느끼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사진이 아름다이 태어납니다.

 사진이란 다른 삶이 아닙니다. 사진이란 사진기를 손에 쥔 삶입니다.

 조세현 님 말은 죽 이어집니다. “보통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찍는다. 하지만 사람을 찍는다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과 몸짓만을 촬영하는 것이 아니다. 한때는 나도 그랬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며 ‘내’가 그를 어떻게 보는지, ‘내’가 그를 어떻게 찍고 싶어 하는지에만 관심을 쏟았다. 사진을 찍는 데 있어 가장 우선시했던 것은 바로 ‘나’였다(29쪽).”고. 그런데, 사진책 첫머리에서 했던 말하고는 어긋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대목이 앞에 적은 이야기하고 견주면 참으로 맞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 표정을 아름답다 여기며 사진으로 찍는 일’은 겉훑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조세현 님이 ‘사람 얼굴빛’을 사진으로 찍고 싶다 할 때에는 겉훑기로 드러나는 모습을 겉훑기로 찍고픈 마음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 드러내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 자리에서 느끼며 찍고 싶다’고 말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누구나 겉훑기로 사람을 읽어 겉훑기로 사진을 찍거나 겉훑기로 글을 쓴다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그렇지만 겉훑기로 하는 일이나 겉훑기로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슬플까요. 사람을 사귀든 만나든, 또 사람 모습과 이야기나 얼굴을 사진으로 담든 차근차근 속으로 사귀거나 만나면서 속으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진은 ‘찍히는 사람 자리에 선다’고 해서 한결 아름답거나 더 아름답거나 참 아름답지 않습니다.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이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아름답습니다. 내 쪽도 네 쪽도 아닌 다 같은 쪽이어야 합니다.

 이리하여 “사진 속 인물이 치아를 드러내고 활짝 웃을 필요는 없다.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따뜻함이 묻어나온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런 사진은 찍는 나도 행복하지만 보는 이도 행복하게 만든다(75쪽).”는 말을 다시 하고야 마는 조세현 님입니다. ‘사진을 찍는 나’와 ‘사진을 찍는 네’가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사진을 생각하는 조세현 님 모습을 다시금 봅니다. 이렇게 같이 즐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찍히는 네’ 자리만이 아니라 ‘찍는 내’ 자리를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함께 생각하며 조용히 하나될 때에 바야흐로 서로서로 웃으면서 사진 한 장을 손에 쥡니다.

 사진찍기란 삶찍기이고, 사진읽기란 삶읽기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에 내 사랑하는 삶을 찍고 싶어 땀을 흘리고, 사진을 읽는 사람은 내 사랑하는 삶을 읽고 싶어 마음을 들입니다.

 사진을 읽고 글을 읽다가 문득 궁금합니다. 조세현 님 스스로 사진찍기와 사진읽기가 어떠한가를 모르지 않는 듯한데, 왜 자꾸 엇나가는 이야기를 글이나 사진으로 보여주고 말까 궁금합니다. 조세현 님 스스로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진을 찍는다 한다면, ‘더 아름답게 살아가는 조세현 님 삶’을 글과 사진으로 보여주거나 나누면 될 텐데요. “사진은 결정적인 한 컷을 얻어내기 위한 긴 여정이다. 결정적인 한 컷을 위해 우리는 셔터를 누르고 또 누른다(96쪽).”는 말은 앞에서 조세현 님 스스로 깨달은 사진길하고는 몹시 동떨어집니다. 찍히는 너와 찍는 내가 하나되어 서로 흐뭇한 사진으로 이르는 길하고는 만나지 않습니다.

 사진은 ‘결정적인 한 장’이 아니라, ‘서른 장이 되든 삼천 장이 되든 서로 함께 좋아하며 웃음이 묻어나는 사진이 되도록 찍는 일’이어야 조세현 님이 《조세현의 얼굴》이라는 책에서 들려주는 글과 보여주는 사진이 제대로 빛나도록 이끄는 말마디가 되리라 느낍니다.

 사진은 ‘이 사진 한 장’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이든 삶이든 ‘어느 하루 한 가지 모습’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고이 이어지는 사람이면서 삶입니다. 고이 어이지는 사람과 삶을 사랑하는 사진입니다.

 조세현 님은 “내가 작업한 사진의 느낌이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 번 촬영한 스타들은 다른 사진 작업에서도 내가 촬영해 주기를 바랐다(130쪽).”는 까닭을 제대로 느껴야 합니다. ‘인기스타가 사진쟁이 조세현을 저절로 찾아오는 일’을 기쁘게 생각하면 안 되고, 왜 ‘사진쟁이 조세현이 사진으로 담은 사람들이 사진쟁이 조세현 사진을 좋아하려 하는가’를 스스로 읽어야 합니다.

 “먼 훗날 자신의 어린 시절이 담긴 사진으로 스스로의 세월을 돌아보며 행복해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189쪽).”고 스스로 적바림한 글을 스스로 되읽으면서 조세현 님 사진길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곱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골목은 중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습니다. 예쁘거나 아름다운 골목은 중국에도 있으며 한국에도 있습니다. 사람내음 물씬 나는 골목은 중국에도 한국에도 골고루 있을 뿐 아니라, 일본이나 프랑스나 버마나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이나 페루나 볼리비아에도 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예쁜 사람 예쁜 삶 예쁜 골목입니다. 다만, ‘작가’와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한국에 있는 예쁜 사람 예쁜 삶 예쁜 골목이 무엇인지를 느끼지 않습니다. 아니, 느끼지 않는다기보다 예쁜 사람 예쁜 삶 예쁜 골목이 어디에 있는지 함께 살아가지 않으니 모를밖에 없습니다.

 예쁜 사람하고 함께 살아가며 저절로 예쁜 사진을 찍는 ‘이름없이 수수한’ 여느 사람들을 작가와 전문가만큼은 모릅니다. 중국이건 티벳이건 네팔이건 쿠바이건 신나게 나들이를 하는 숱한 작가와 전문가들은 막상 인천 숭의3동 191번지이건 숭의4동 7번지이건 걸어 보지 않습니다. 부산 골목이건 음성 골목이건 목포 골목이건 춘천 골목이건 얼마나 걸어 본 작가요 전문가일까요. 강운구 님은 이 나라 시골자락을 골골샅샅 누벼서 안 가 본 곳이 거의 없다 하는데, 한국땅 사진쟁이나 글쟁이나 그림쟁이는 한국땅 가운데 어디를 얼마나 두 다리로 천천히 거닐며 밟아 보았을까요.

 자가용을 몰며 지나간 마을이 아니라 두 다리로 거닐다가 한참을 못박힌 듯이 서서 바라본 마을이 얼마나 될까요.

 자가용을 몰며 지나가는 때에는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자가용에서 내려 두 다리로 걸어야 비로소 마을을 보며, 비로소 마을을 볼 때에 못박힌 듯이 제자리에 우뚝 서서 한참 들여다보아야 바야흐로 사진을 찍어 사진 한 장에 마을사람 사랑을 고이 받아들이는 내 사진이 태어납니다.

 조세현 님은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수업의 모든 과정이 끝날 무렵 학생들에게 그동안 배운 걸 토대로 사진을 찍어 오라는 과제를 준다. 어떤 친구는 풍경을 찍어 오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오브제를 찍어 오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인물을 찍어 오기도 한다. 뭘 찍어 오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사진을 보는 사람이 공감을 하느냐, 못 하느냐이다(166쪽).” 하고 말합니다.

 ‘공감(共感)’이라는 한자말은 “함께 느끼다”를 뜻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과 사진을 읽는 사람이 함께 느낄 수 있느냐를 살핀다는 소리입니다. 이는 곧, 사진을 찍는 사람과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 한마음이 되느냐를 살핀다는 소리요, 찍고 찍히는 사이와 찍고 읽는 사이는 한동아리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일 테지요.

 참말로 무슨 사진을 찍느냐는 아랑곳할 일이 아닙니다. 만듦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참말로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사진인지, 겉껍데기 시늉하는 사진인지를 대수로이 살펴야 합니다. 껍데기 사진인지 알맹이 사진인지를 가누어야 합니다. 사랑이 어린 사진인지 사랑을 꾸민 사진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뭘 느낄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는가요. 눈으로 본다 해서 사진으로 찍을 수 없고, 눈으로 본다 해서 사진을 읽을 수 없습니다. 눈이 아닌 마음을 길어올려 내 삶을 통틀어야 비로소 사진을 찍는 손길을 일으키고, 눈이나 말이나 입이 아니라 가슴과 몸뚱이와 삶으로 마주해야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 삶을 가만히 얼싸안습니다.

 다른 사람 사진을 읽을 때에는 ‘공감할 만하느냐’라든지 ‘함께 느낄 만하느냐’로 따질 수 없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 아이들한테도 이런 잣대를 들이댈 수 없습니다. ‘대학 교수인 내’가 함께 느낄 수 있든 없든 ‘삶이 묻어난 사진을 대학교수인 내가 내 삶을 쏟아서 읽을 수 있느냐’가 훨씬 큰 일입니다. 사진길을 걸어가려는 어린 학생들한테 ‘사진을 보는 내가 함께 느낄 수 있는 사진을 찍으라’고 말할 수 없어요. ‘사진교수인 내가 알아보든 못 알아보든 사진을 찍는 네 삶을 이 사진 한 장이 고이 담아, 네가 사진으로 찍은 이 사람(또는 사물)하고 함께 즐거울 수 있도록 하면 된다’고 말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조세현의 얼굴》이라는 책에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담았으니까요. 조세현 님 스스로 알면서도 모르기도 하는 이러한 사진길이야말로 이 나라에서 사진길을 꿋꿋하거나 씩씩하게 걸어가고파 하는 사람들한테 즐거운 도움말이 될 테니까요.

 글은 사랑이 있을 때에 태어납니다. 사랑이 없이 쓰는 글이란 죽은 글입니다. 그림은 믿음이 서릴 때에 태어납니다. 믿음이 없이 그리는 그림이란 죽은 그림입니다. 사진은 어느 때에 태어날까요. 사진에 무엇이 없으면 사진은 죽은 사진이 되고 말까요. 산 사진과 죽은 사진은 어느 자리에서 갈릴까요.

 한국땅에서 사진길을 걷는 사람은 살아숨쉬는 사진길을 걸어가는지 궁금합니다. 한겨레붙이로 한국땅에서 사진길을 걷는 사람은 숨막히는 사진길을 걸어가지는 않나 궁금합니다. (4344.3.13.해.ㅎㄲㅅㄱ)


― 조세현의 얼굴 (조세현 사진·글,앨리스 펴냄,2009.11.15./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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