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바라본 기자 - 전민조 포토 에세이
전민조 지음 / 대가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사진이 사진으로 되는 길을 찾기
 [찾아 읽는 사진책 39] 전민조, 《기자가 바라본 기자》(대가,2008)


 사진기를 손에 쥐고 사진을 찍지만, 막상 사진길을 걷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연필이나 자판을 손에 쥐고 글을 쓰지만, 정작 글길을 걷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 또한 무척 많아요.

 사진길이란 돈을 버는 길, 곧 돈길이 아닙니다. 글길이란 돈을 벌어들이는 길, 그러니까 돈길이 아니에요.

 어쩌면 누구나 다 알 만한 이야기라 할 테지만, 가만히 보면 누구도 모르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란, 다른 한 사람한테 있는 돈을 보는 길이 아니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돈이 있느냐 없느냐는 대수롭지 않아요. 내가 사랑할 만한 사람인지, 내 사랑을 듬뿍 쏟거나 바치거나 나눌 사람인지, 나와 함께 사랑꽃을 피우려는 사람인지를 바라볼 뿐입니다. 어느 한 사람을 만나서 함께 살아간다 할 때에는, 이이가 돈을 잘 벌든 못 벌든 그닥 대수롭지 않아요. 돈을 잘 벌면 잘 버는 대로 알뜰히 갈무리해서 내 둘레 이웃이나 동무나 살붙이하고 예쁘게 쓰면 됩니다. 돈을 못 벌면 못 버는 대로 허리띠를 졸라매거나 나 스스로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살림돈을 벌면 돼요. 사랑길이란 사랑을 보며 사랑을 믿는 길이에요.

 사진길이란 사진을 바라보며 사진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사진을 찍어 돈을 번다거나 사진으로 예술작품을 만든다거나 사진으로 이름을 날리는 길이 아닙니다. 사진 강의를 한다든지, 사진학과 교수가 된다든지, 사진학 논문을 쓰는 길이 사진길이 될 수 없습니다. 사진기자가 되거나 사진작가가 되는 길 또한 사진길이지 않아요. 사진은 오직 사진과 내 삶을 하나로 그러모으면서 나와 이웃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기자가 아니어도 찍는 사진이고 작가가 아니라도 찍는 사진이니까요.

 요리사가 아니어도 누구나 밥을 합니다. 요리사가 아니라지만 사랑스러운 손길로 사랑스러운 밥을 차려서 사랑스러운 살붙이하고 먹습니다.

 교사자격증이 있어야 내 아이를 잘 가르치거나 키우지 않습니다. 한국어능력시험 몇 급 자격증이 있어야 내 아이가 한국에서 살아가며 이웃 한국사람과 주고받을 한국말을 알뜰살뜰 가르치거나 물려주지 않아요. 나 스스로 내 삶을 얼마나 사랑하며, 어떻게 아끼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 삶을 사랑하듯이 내 말을 사랑하고, 내 말을 사랑하는 만큼 내 삶을 사랑해요.

 사진기자로서 이웃 사진기자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은 전민조 님은 신문사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기자가 바라본 기자》(대가,2008)라는 사진책을 내놓습니다. 전민조 님이 몸담은 신문사에서 마주한 숱한 기자들 모습과 삶과 이야기를 사진 하나에 글 하나를 엮어 사진책으로 내놓습니다.

 이 가운데 “최일남 기자는 전두환 정권 때 특별한 이유 없이 해직된 기자였다 … 필자는 슬쩍 그의 인터뷰 노트를 보았다. 질문할 사항이 대학노트 한 권에 꽉 차 있었다. 그는 인터뷰를 할 때마다 기사 한 줄 한 줄에 목숨을 걸 듯 피로 글을 쓰는 것 같았다. 저렇게 지독하게 인터뷰 자료를 준비해서 글을 쓰는데 사진도 셔터만 눌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196쪽).” 하는 이야기를 곰곰이 되씹습니다. 사진기자였던 전민조 님은 이웃 기자를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살가웁거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기자한테서는 살가웁거나 아름다운 모습을 배웁니다. 어딘가 아쉽거나 어수룩한 기자한테서는 나 스스로 얼마나 아쉽거나 어수룩한가를 뒤돌아보며 배웁니다. 수없이 취재를 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내 삶과 사진이 어느 만큼 내 삶과 사진을 빛낼 만큼 튼튼한가를 되짚습니다.

 사랑이 좋으니 사랑을 합니다. 내 살붙이가 좋으니 내 살붙이가 먹을 밥을 차리고 입을 옷을 빨아서 개며 함께 지내는 집을 건사합니다. 사진이 좋으니 사진기를 손에 쥐어 사진을 찍습니다. 더 낫다는 솜씨를 자랑하는 사진기를 장만해서 찍을 수 있고, 내 주머니에 걸맞게 값싼 사진기를 마련해서 찍을 수 있습니다. 값싼 사진기라서 사진이 더 돋보이지 않고, 값비싼 사진기라서 사진이 더 모자라지 않습니다. 필름이라서 더 훌륭하거나 디지털이라서 더 못나지 않습니다. ㄱ신문 기자이니까 보도사진이 더 알차지 않고, ㄴ잡지 기자이니까 패션사진이 더 예쁘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쥐는 사람 매무새에 따라 달라지는 사진입니다.

 “목숨을 걸 듯 피로 글을 쓰는” 취재기자는 목숨을 걸 듯 피로 글을 쓰는 느낌과 빛이 서립니다. 그때그때 마감에 쫓기어 턱걸이로 글을 채우는 취재기자는 마감에 쫓기어 턱걸이로 글을 채운 느낌과 결이 깃듭니다.

 요즈음 수없이 떠도는 ‘서평단’ 사람들처럼 ‘주례사 서평을 쓰는 사람’은 주례사 서평 느낌과 무늬가 감도는 글을 쓸 뿐입니다. 학자가 되고자 글을 쓰는 사람은 학자 티가 물씬 나는 글을 쓰겠지요. 대중성을 바란다는 글쟁이나 지식인은 요즈막 이 나라 사람들 흐름 그대로 영어를 곧잘 섞으며 지식 자랑이 살며시 묻어나는 글을 쓸 테고요.

 사진기자이기 때문에 로모사진기를 안 써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기자이면서 파노라마사진기를 쓸 수 있습니다. 집에서 내 아이를 사진으로 담으니 똑딱이로 쓸 수 있고, 손전화로 써도 즐겁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삶과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는 내 삶을 아름답게 빛내고 싶어서 내가 사랑하는 살붙이하고 날마다 살을 부빕니다. 내 보금자리가 십 억 부동산 아파트이건 오천만 원 전세 아파트이건 대수롭지 않아요. 달삯 삼십오만 원을 치르는 골목집 2층 벽돌집이건 한 해에 오십만 원을 내며 살아가는 시골마을 외딴집이건 대단하지 않습니다. 내 사랑이 깃들고 내 사랑을 나누는 고운 짝꿍하고 어깨동무하면 즐겁습니다.

 사진이 사진으로 되는 길은 사진으로 한몸이 되는 사랑길입니다. 사진으로 담을 이야깃거리를 멀디먼 나라밖이나 두메자락에서 찾아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찍을 이야깃거리는 커다란 도시 밤하늘을 빛내는 불빛에 있지 않고, 깊디깊은 숲속 높직한 늙은나무에 있지 않아요.

 모두 사진이 됩니다. 내 삶을 함께하는 내 사랑이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사랑입니다. 사랑을 함께하는 사진인 줄 생각하며 느끼고 싱긋 웃을 수 있을 때에, 또 사랑을 나누는 삶이라고 헤아리고 느끼는 한편 가슴 에며 울 수 있을 때에, 바야흐로 사진 하나 씩씩하게 뜀박질을 하면서 태어납니다. (4344.7.3.해.ㅎㄲㅅㄱ)


― 기자가 바라본 기자 (전민조 사진·글,대가 펴냄,2008.8.25./2만 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aul Strand (Hardcover)
Mark Haworth-Booth / Aperture / 1997년 9월
평점 :
품절




 사진은 홀로 거룩할 수 없습니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7] 폴 스트랜드(Paul Strand), 《Paul Strand》(Aperture,1987)



 먹고 싶지 않은 밥을 먹으면서 맛을 살피거나 가누어야 하는 요리비평가라면 무척 따분하면서 괴로우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밥먹기나 맛보기를 즐기지 않으면서 요리비평으로 돈벌이를 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만, 오직 돈벌이로 요리비평을 하는 일이란 참 고단하겠지요.

 키우고 싶지 않던 아이를 낳았다는 어버이라면 어떤 마음일까 궁금합니다. 혼인을 해서 제금을 나면 두 어른이 집일과 집살림을 도맡아야 하는데, 제금을 나기 앞서까지 집에서 일이나 살림을 몸소 안 할 뿐더러 배우지 못하는 남자 어른은 집식구가 집일과 집살림을 나누어 맡으라 이야기할 때에 어떤 마음일는지 궁금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 가운데 스스로 쓰고 싶지 않으나 돈을 벌어야 하거나 이름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오늘날 적잖은 신문기자는 글쓰기를 좋아해서 기자가 되지는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나 만화를 그리는 사람 가운데 그림이나 만화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림쟁이나 만화쟁이가 된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가운데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찍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사진쟁이 한길을 걷겠다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진찍기를 돈벌이로 삼으면서 틈틈이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책 《Paul Strand》(Aperture,1987)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쟁이 폴 스트랜드 님은 1890년에 태어나 1976년에 숨을 거둡니다. 1987년에 나온 《Paul Strand》는 폴 스트랜드 님 사진삶을 기려 96쪽으로 간추린 작은 책입니다. 이 한 권으로 여든여섯 해에 걸친 폴 스트랜드 님 삶을 모두 그러모은다든지 낱낱이 보여준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이 조그마한 사진책으로 폴 스트랜드 님이 ‘얼마나 거룩한 사진쟁이인가?’라든지 ‘새로운 사진밭을 어떻게 일구었는가?’를 밝힐 수 없습니다. 그저 ‘폴 스트랜드 님이 좋아하며 즐긴 사진’ 가운데 ‘폴 스트랜드 님이 죽고 난 다음, 뒷사람 눈으로 바라볼 때에 더욱 좋아하며 즐기는 사진’이 무엇인가를 몇 가지 들출 뿐입니다.

 1915년에 찍었기에 ‘첫무렵 사진밭을 일군’ 작품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1953년에 찍었으니 ‘2053년에 누군가 찍을 사진’과 견주어 더 나은 작품이라 여길 수 없습니다. 폴 스트랜드 님은 1890년에 태어나 1976년에 숨을 거두었으니, 1915년에도 사진을 찍고 1953년에도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폴 스트랜드 님이 몸과 마음에 기운이 감돌며 한창 신나게 온누리 곳곳을 씩씩하게 밟으면서 마주한 사람과 삶과 사랑을 사진이라는 이야기로 갈무리했을 뿐입니다.

 어린이를 바라보면 보드랍고 탱탱한 살결이 아름답습니다. 늙은이를 바라보면 깊이 패거나 퀭한 주름살과 눈자위가 아름답습니다. 가느다란 풀잎에 살짝 생채기가 나는 버섯이 아름답습니다. 풀잎에 곧게 나는 무늬가 아름답습니다. 사람들 살림살이를 만들건 전쟁무기를 만들건, 무언가를 만드는 공장 기계가 아름답습니다.

 파란하늘 하얀구름이 아름답습니다. 돌길을 아이를 안고 맨발로 걷는 아주머니가 아름답습니다. 장님이라는 이름패를 목에 건 할머니 목 언저리에 붙인 인증딱지가 아름답습니다. 내리쬐는 햇살이 건물에 살짝살짝 가리며 새삼스레 이루어지는 그림자와 빛무늬가 아름답습니다. 울타리가 아름답고 살림집 창문과 문턱이 아름답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곳이 아름답습니다. 내가 뿌리내려 살아가는 보금자리가 아름답습니다.

 사진에는 무슨무슨 주의나 주장이란 부질없습니다. 패션에는 유행이 있어 열 해나 스무 해를 사이에 두고 돌고 돈다는데, 사진에도 이런 물결이 있어 돌고 돌는지 모르지만, 무슨무슨 주의나 주장에 따라 찍는 사진이란 참 덧없습니다. 내 삶이나 사랑이나 사람 이야기가 아닌 주의나 주장을 사진에 담으면 재미없습니다. 몸을 돌보려고 입는 옷이고, 몸을 살찌우려고 먹는 밥이며, 몸을 쉬려고 보살피는 집입니다.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집을 건사하는 사람들이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꿈과 땀으로 삶을 일굽니다. 다 다른 사진쟁이가 다 다른 사진기를 손에 쥐고는, 다 다른 삶을 어떠한 꿈과 땀으로 일구는지를 찬찬히 살피면서 천천히 담습니다.

 홀로 거룩할 수 없는 사진입니다. 거룩하게 살아가는 이웃과 함께 거룩한 사진입니다. 홀로 아름다울 수 없는 사진입니다. 아름다이 지내는 이웃과 어깨동무하며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맑은 눈으로 맑게 바라보는 사람이 맑은 사진을 얻을는지 모릅니다. 밝은 눈썰미로 밝게 알아채는 사람이 밝은 사진을 이룰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맑게 바라보든 흐리멍텅하게 바라보든, 내가 바라보는 곳에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자연이든 늘 그대로 있습니다. 밝게 알아채든 알아보든 알아내든, 내가 알아채거나 알아보거나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사람이나 사물이나 자연은 언제나 고스란히 있습니다.

 사진으로 찍어 놓았기에 더 거룩하거나 뜻있거나 값있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찍어 놓지 못했기에 아쉽거나 안타깝거나 슬프지 않습니다.

 가슴으로 느낄 사진이라면 가슴으로 찍으면 됩니다. 가슴으로 찍은 사진을 가슴으로 느끼면 넉넉합니다. 역사에 적바림하려고 찍는 사진이란 없습니다. 사진을 역사에 적바림하려 하지 말고, 내 마음에 찬찬히 아로새기면서 좋아하면 기쁩니다. 새로운 흐름이나 물결을 만들려고 찍는 사진이란 없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내 삶이라고 느끼면서 날마다 새롭게 바라보면 좋은 사진입니다. 새로운 바람이 되거나 새로운 주의나 주장이 되는 사진이란 없어요. 한 번 보고 휙 덮는 사진이 아닌, 우리 집 가장 시원한 벽 한켠에 예쁘게 붙여 언제까지나 바라볼 사진이 있습니다.

 어느 사진이든,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내가 좋아하면서 즐기는 어여쁜 삶을 사랑스레 담을 뿐입니다. 2500년대나 3000년대를 살아갈 뒷사람이 보기에는, 1900년대를 가로지르는 폴 스트랜드 님 사진이든 2000년대를 아우를 오늘 우리들 사진이든 똑같습니다. (4344.6.27.달.ㅎㄲㅅㄱ)
 

 

(최종규 . 사진책 읽는 즐거움 . 20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나's 서울놀이 - 배두나의 일상, 그리고 서울여행
배두나 글.사진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서울이 예쁘면 ‘예쁜 사진’을 보여주셔요
 [찾아 읽는 사진책 34] 배두나, 《두나's 서울놀이》(중앙북스,2008)



 140쪽이 되어서야 비로소 ‘예쁘게 찍어서 보여주려’ 했다는 서울 모습이 나오는 《두나's 서울놀이》(중앙북스,2008)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배두나 님은 “해외여행 후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볼 때면 느끼던, 그 설렘과 반가움, 되돌아와 쉴 수 있는 내 공간의 따뜻함과 편안함을, 사진에 남겨 두고 싶었다(17쪽).”고 이야기하며, “서울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나의 집이 있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가 있고, 행복한 추억이 가득한 곳(50쪽)”이기 때문에 “서울을 실제보다 더 예쁘게 보이도록 찍으려고 욕심을 부렸다(50쪽).”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배두나 님이 찍은 《두나's 서울놀이》에 나오는 서울은 참말 ‘예쁜 서울’이라 할 만할까요. 참으로 예쁘게 찍어 사랑스러운 서울이라 할 만한가요.

 《두나's 서울놀이》라는 책에는 ‘예쁜 서울’이 한 가지도 나오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두나's 서울놀이》라는 책에는 ‘배두나 단골가게’가 나올 뿐입니다. 책이름 그대로 ‘배두나가 서울에서 노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 ‘예쁜 서울을 보여줄 만한 이야기’는 없는 책이에요.

 곧, ‘배두나 님 스스로 좋아하는’ 서울이기에 마냥 ‘스스로 예쁘게 바라보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글을 곁들여 묶은 《두나's 서울놀이》예요.

 이리하여, 배두나 님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는 지하철을 타고 보니, 서울이 다시 보였다(212쪽).”는 말마디마따나, 배두나 님은 ‘여느 사람이 여느 삶을 여느 사람하고 사귀면서 보내는 서울(과 한국이라는 터)에서 퍽 멀리 떨어진’ 채 살아갑니다. 늘 자가용을 타야 할 테니까요. ‘여느 사람’한테 붙잡혀 사인공세에 시달린다든지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는 일에 시달리기 싫거나 힘드니까요.

 지하철이든 시내버스이든 ‘추억을 떠올리려’고 타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일터를 다니든 배움터를 오가든, ‘여느 삶(일상)’으로 타는 지하철이면서 시내버스이고, 이 지하철과 시내버스에서 아침저녁으로 오징어떡이 되도록 시달립니다. 도무지 추억으로 여길 수 없는 메마른 삶이고, 차마 추억을 떠올리기 벅찬 힘겨운 나날이에요. 배두나 님과 여느 사람은 퍽 일찍부터 ‘시달리는 삶’이 다릅니다. 시달리는 삶이 다르니 바라보는 삶이나 누리거나 즐기는 삶이 다릅니다. 누리거나 즐기는 삶이 다를 때에는 생각하는 삶이나 사랑하는 삶 또한 다를밖에 없어요.

 사진기를 쥔 사람이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하더라도, 똑같은 사진이 나올 수 없습니다. 배두나 님은 배두나 님대로 재미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 되고,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대로 재미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 돼요. 그러니까, 《두나's 서울놀이》는 처음부터 굳이 ‘서울을 더 예쁘게 찍어서 내보일’ 까닭이 없습니다. 그저 배두나 님 스스로 좋아하는 삶결대로 서울을 바라보면서 하나씩 담으면 됩니다. 나중에 이 책을 장만해서 사진을 들여다볼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보거나 말거나 아랑곳할 일이 없습니다. 좋게 봐주면 좋게 봐주니 고맙게 여기면 되고, 나쁘게 봐주면 나쁘게 바라보는 대로 나한테 모자라거나 아쉬운 대목을 고맙게 엿들을 수 있다고 여기면 됩니다.

 《두나's 서울놀이》라는 책은, 그예 배두나 님을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예쁘게 다가설 수 있으면 됩니다. 배두나 님을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누군가는 집안일이 힘들지 않으냐며 도우미 아줌마를 써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하기도 한다. 하지만 난 누군가 나의 살림을 보는 것이 싫다. 그것도 우리 엄마 닮았다. 그리고 집안 청소는, 운동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나에겐 아주 유익한 아침 운동이다. 사방이 막혀서 답답한 피트니스 센터에서 러닝머신 위를 하염없이 달리는 것보다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적어도 나에겐 더 재미있고 보람 있다(31쪽).”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서로서로 삶을 한껏 사랑하면서 즐기는 길을 찾자고 말머리를 열면 됩니다.

 왜냐하면, 더 예쁜 삶터란 없거든요. 도쿄가 서울보다 더 예쁘지 않고, 런던이 도쿄보다 더 예쁘지 않으며, 파리가 도쿄보다 더 예쁘지 않습니다. 또한, 서울이 파리보다 더 예쁘지 않아요.

 도쿄는 도쿄대로 예쁘고, 서울은 서울대로 예쁘며, 런던은 런던대로 예쁜 한편, 파리는 파리대로 예쁩니다.

 춘천은 춘천대로 예쁠 테지요. 부여는 부여대로 예쁠 테고, 진주는 진주대로 예쁩니다. 더 하거나 덜 하지 않습니다. 보금자리로 여겨 따순 마음으로 어깨동무하려는 사람들 몸짓대로 예쁩니다.

 배두나 님은 처음부터 ‘배두나는 예쁜 삶과 예쁜 놀이와 예쁜 사람을 좋아해요’ 하고 한 마디를 읊으면서 나아가면 됩니다. ‘배두나 님 추억이 어린 곳은 배두나 님 눈썰미로는 하염없이 예쁠는지 모르나, 다른 여느 사람한테는 심심하거나 밋밋할 수 있다’고 느껴야 합니다. 나로서는 예뻐 보이는 모습을 남한테까지 예쁘게 여기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머리글에서든 몸글에서든 오붓한 삶과 호젓한 꿈을 사랑스레 즐기면서 머잖아 ‘뉴욕놀이’를 선물해 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러거나 저러거나 그저 ‘배두나대로 논 나날’을 보여주면 좋겠어요.

 《두나's 서울놀이》는 ‘배두나대로 논 나날’에도 미치지 못하고, ‘서울을 예쁘게 누리거나 즐긴 삶’에도 미치지 못하는 어설픈 이야기로 두루뭉술합니다.

 서울이 예쁘면 참말 ‘예쁜 사진’을 보여줄 노릇입니다. 서울이 예쁘면 이 예쁜 서울 구석구석을 ‘마실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내는 사람’으로 보여줄 일입니다. 구경하는 사진은 언제나 재미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습니다. 런던으로 찾아가든 도쿄로 찾아가든, ‘한두 번 찾아간’ 사람이 ‘오래오래 산’ 사람보다 덜 보거나 못 보지 않아요. 거꾸로, 서울에서 태어나 오래오래 살았대서 서울을 더 잘 바라보거나 즐기지 않습니다. (4344.6.23.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tta Kim : ON-AIR - 뉴욕의 신화가 된 아티스트 김아타의 포토로그
김아타 지음 / 예담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포토 아트’는 사진이 아닌 예술입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38] 김아타, 《ON-AIR》(예담,2007)



 김아타 님은 사진쟁이가 아닙니다. 사진기를 빌어 예술을 하는 사람입니다. 김아타 님 사진은 사진삶으로 다룰 수 없습니다. 예술삶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적잖은 이들은 김아타 님을 사진쟁이 테두리에서 바라봅니다.

 옳지 않습니다. 사진은 사진이고 예술은 예술입니다.

 붓을 들어 글을 썼대서 모두 글이라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붓과 종이를 써서 ‘서예’를 합니다. 말 그대로 예술입니다. 붓과 종이를 빌어 글로 나타내는 예술이 한자말 이름으로 ‘서예’입니다. 김아타 님이 내놓은 숱한 작품은 사진기와 인화지를 빌어 보여주지만, 사진이 아닌 예술입니다.

 “현전하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원초적인 성과 폭력과 전쟁과 이데올로기를 끌어내어 내 사적인 박물관 유리 박스에 정착시킴으로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기존의 박물관이 ‘죽어 있는 것을 영원히 살게 하는 곳’이라면, 나의 박물관은 ‘살아 있는 것을 영원히 살게 하는 곳’이다(195쪽).”라 하는 말마따나, 김아타 님은 ‘김아타 박물관’을 만드는 예술쟁이입니다.

 예술쟁이가 사진기를 든대서 나무랄 까닭이 없습니다. 그림쟁이가 사진 기법을 시늉한대서 탓할 일이 없습니다. 만화쟁이가 사진을 신나게 찍어 뒷그림으로 옮긴다 해서 잘못이라 말할 일이 없습니다. 그림쟁이는 그림에 사진을 쓰고, 만화쟁이는 만화에 사진을 쓰며, 예술쟁이는 예술에 사진을 씁니다.

 다만, 그림쟁이는 사진 아닌 그림을 합니다. 만화쟁이는 사진 아닌 만화를 합니다. 예술쟁이는 사진 아닌 예술을 해요.

 《ON-AIR》(예담,2007)라고 하는 책 겉에도 ‘뉴욕의 신화가 된 아티스트 김아타의 포토로그’라 적습니다. 김아타 님은 영어로 ‘아티스트’입니다. 영어로 ‘포토그래퍼’가 아니에요. 아티스트예요. 한국말로 하자면 ‘예술쟁이’입니다. ‘사진쟁이’도 ‘사진작가’도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오늘날 한국땅에서 ‘사진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서 사진쟁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에서도 예술을 가르치거나 배우면서 사진을 가르치거나 배운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사진을 배우는 대학생 가운데에는 사진이 아닌 예술을 펼치려 하면서 사진을 배우는 듯 잘못 아는 이가 꽤 많습니다.

 김아타 님은 “1980년대 말, 나는 이름 모를 잡초들과 작은 돌들, 흐르는 시냇물과 바람 소리 그리고 태양의 자양분을 대화의 파트너로 삼아 ‘사물과의 대화’를 하면서 나의 실존을 확인해 가는 트레이닝을 하였다. 많은 시간을 하잘것없는 사물들과 대화하면서 사물을 관조하는 방법과, 사물과 하나가 되어 사물이나 혹은 타자에 몰입하는 방법을 익혔다(19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굳이 사물을 말없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누구나 생각을 얻거나 생각날개를 펴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살아가는 터전에서 스스로 살 길을 찾아 제 생각길을 걷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김아타 님 ‘생각찾기’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몇 대목이 보입니다. 풀과 돌과 물과 바람과 햇볕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사물’인지 궁금합니다. 참말로 풀과 돌과 물과 바람과 햇볕이 하잘것없다고 여기는지 궁금합니다. 사람이 없어도 지구별은 한결같을 뿐 아니라, 사람이 없으면 지구별은 걱정없습니다. 풀이 없거나 돌이 없거나 물이 없거나 바람이 없거나 햇볕이 없으면 지구별은 몹시 끔찍해집니다. 김아타 님이 사물을 말없이 바라보는 솜씨를 익혔다고 한다면, ‘풀과 돌과 물과 바람과 햇볕을 하잘것없이 바라보는 매무새나 눈길’이 아니라 ‘내 몸뚱이란 풀과 돌과 물과 바람과 햇볕하고 견주어 얼마나 하잘것없는가 하고 깨닫는 매무새나 눈길’이어야 알맞지 않았으랴 궁금합니다.

 풀은 풀 그대로 예술입니다. 김수영 님이 〈풀〉이라는 시를 쓰지 않았어도 풀은 풀삶 그대로 예술이자 자연이며 역사입니다. 사람은 풀포기를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으며 ‘참 멋지구나!’ 하고 말할 테지만, 풀은 풀삶을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나타내지 않아도 스스로 참 멋집니다.

 사진이 사진인 까닭이 있습니다. 사진이 사진이기에 예술이라는 이름이 붙는 까닭이 있습니다. 사진기를 쥔 사진이 눈부신 삶이 되는 까닭이 있습니다.

 김아타 님은 “소호에는 작은 돌들만큼이나 숱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슬픈 사랑 이야기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역사를 길이라 부르는 것은 연결되어 있음이기도 하다(149쪽).” 하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네, 맞습니다. 작은 돌만큼 작은 사람들 이야기는 수없이 많습니다. 다 다른 이야기이고 다 다른 사람이며 다 다른 삶이에요. 예술을 이루는 숱한 갈래는 저마다 다 달리 아름답습니다. 꼭 예술이라는 이름표가 붙지 않아도 아름답습니다. 예술이 되어야 아름답지 않으며, 예술로 나아가야 아름답지 않을 뿐더러, 예술을 이루지 않더라도 아름답습니다.

 김아타 님은 인간문화재를 사진으로 담는 일을 하면서 느낀 이야기를 “목포에서 옥 작업을 하던 장주원의 작품을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은 적이 있었다 …… 나는 그 작품을 보며 사람의 집념이란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그는 커 보였다(167쪽).”고 적습니다. 김아타 님 다른 책 《상像》(학고재,2008)은 사진책이라 할 만하겠지요. 그저 사진으로만 보여주니까요. 그러나 이 책 또한 사진책이라 해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으로 찍었대서 모두 사진이 되지 않고, 사진을 그러모았기에 다 사진책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볼 때야 사진으로 이루어진 책이니 사진책입니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어떠하대서 ‘그래, 눈으로 보기에 이렇게 보이니 이렇다고 해야지’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달걀부침도 틀림없이 달걀부침이겠지요. 그런데, 먹을 수 없는 달걀부침도 달걀부침이라 할 수 있나 모르겠습니다. 플라스틱이나 종이로 만든 꽃도 꽃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만, 참말 플라스틱 꽃이나 종이 꽃도 꽃이라 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아타 님 책 《상像》에는 《ON-AIR》에서 밝힌 그대로 ‘참으로 무섭다’고 느낀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이러면서 ‘커 보였다’고 하는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김아타 님 스스로 ‘참으로 무섭다’고 보인 사람들을 김아타 예술로 담아냈거든요. 그러니까, 《상像》이라는 책은 ‘인간문화재를 보여주는 사진책’이 아니요, ‘인간문화재를 다루는 사진책’ 또한 아닙니다. ‘예술로 보여주는 밑감’으로 인간문화재라는 사람을 골랐습니다. 인간문화재라는 사람들 모습 가운데 ‘참으로 무섭다’라는 대목을 스스로 끄집어내어 아주 또렷하게 붙박은 예술품입니다. ‘김아타 유리 박스에 넣은 예술품’입니다.

 예술을 하든 그림을 하든 만화를 하든 모두 아름답습니다. 글을 쓰든 흙을 일구든 기계를 만지든 누구나 아름답습니다. 스스로 탈을 쓰지 않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스스로 제 길을 사랑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동네에서 조그맣게 장사를 하는 구멍가게는 구멍가게이기에 아름답습니다. 구멍가게라서 아름답거나 작은 가게라서 아름답지 않습니다. 구멍가게는 말 그대로 구멍가게로 제 몫을 알뜰히 하니까 아름답습니다.

 사진은 사진길을 씩씩하게 걷는 매무새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사진길을 깊이 사랑하거나 아끼는 눈길과 손길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예술이 예술대로 아름답다면, 사람과 삶과 사랑을 저마다 다른 이야기마당으로 엮어 저마다 다른 꿈을 싣는 눈물과 웃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술을 사진으로 보여주기에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보여주건 동영상으로 보여주건 예술은 예술입니다. 예술을 두 시간짜리 동영상으로 찍는대서 ‘영화’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백남준 님은 ‘비디오 아트’라는 이름을 떳떳하고 올바르게 썼습니다. ‘사진으로 보여주는 예술’은 사진이 아닌 예술입니다. (4344.6.18.흙.ㅎㄲㅅㄱ)


― ON-AIR (김아타 글·사진,예담 펴냄,2007.5.25./17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 - 최민식의 포토에세이
최민식 지음 / 하다(HadA)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젊은이한테 남길 수 있는 사진 선물
 [찾아 읽는 사진책 37] 최민식,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하다,2010)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한테 남길 수 있는 선물은 돈이 아닙니다. 늙은 사람은 젊은 사람보다 ‘먼저’ 살아낸 나날을 뒤돌아보면서 ‘말씀’을 남길 수 있습니다.

 늙은 사람이 남길 수 있는 말씀이란 사랑과 믿음과 나눔입니다. 사랑과 믿음과 나눔은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일굽니다.

 “본래 우리 인간의 신체는 태양, 산과 강, 초목, 대지로 이루어진 자연 속에서 생활하도록 만들어졌다(90쪽).”고 이야기하는 사진수필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하다,2010)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두 아이와 아픈 옆지기를 보살피며 살아가는 아버지로서 생각합니다. 저녁나절 잠자리에 들기 앞서, 오늘도 겨우 하루를 보냈구나 하고 돌아보면서 마무리 똥기저귀 빨래와 집식구 옷가지를 빨래를 하고 나서 책을 펼쳐 들고 생각합니다. 이제 갓 석 주를 살아낸 둘째는 똥기저귀를 날마다 마흔 장 남짓 내놓습니다. 네 살 첫째는 하루 내내 저랑 놀아 달라며 뛰고 달리며 노래합니다. 밥하고 빨래하며 치우기만 하더라도 하루는 아주 짧고 깁니다. 등허리를 누일 틈이 없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최민식 님이 남자 아닌 여자로서 ‘사람을 찍는 사진길’을 쉰 해쯤 걸었을 때에는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라는 책에 어떤 이야기를 담았을는지 궁금합니다.

 “지식의 가치란 아는 것의 양이 아니라 올바른 목적을 위해 그것을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느냐에 있다(28쪽).” 같은 말마디는 참으로 옳습니다. 옳기는 옳은데 쉬운 말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올바로 잘 살아갈 수 있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진다’고 이야기해야 여느 살림을 꾸리는 어머니나 할머니도 알아들을 만합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최민식 님 말씀을 그러모은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라는 책은 ‘한국에서 남자 어른’으로 살아낸 발자국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국 남자 어른’으로서 젊은이한테 들려주는 말이지, ‘살림하며 살아온 어른 한 사람’으로서 젊은이한테 들려주는 말이 아닙니다.

 살림하며 살아가는 어른이라면, “꼭 고전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한자는 우리들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고 우리 말과 사유체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반드시 배우고 알아야만 한다. 변화하는 21세기 정보화시대에 적응해 나갈 수 있는 능력과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한자 조기교육과 국·한문혼용을 생활화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한문교육 정책을 하루 빨리 반영하고, 학생들은 독학으로라도 한문을 배워야 마땅하다(44쪽).” 같은 이야기를 펼치지 않습니다. 나라밖 고전을 읽자면 영어나 독일말이나 라틴말을 알아야 할까요? 일본사람은 한자를 몰라도 일본 고전을 알뜰히 읽을 뿐 아니라, 나라밖 옛책(고전) 또한 알뜰히 읽습니다. 왜냐하면, 옛책은 옛말로 되었는데, 옛말을 따로 배워서 읽을 수도 있으나, 뜻있는 옛책이라면 어김없이 오늘날 쉬운 말로 다시 쓰기 마련이거든요. 한자를 함께 쓰자고 틈틈이 외치는 ㅈㅈㄷ 신문조차 신문글을 한자로 적는 일은 아주 드뭅니다. 머릿기사 이름을 뽑을 때에 북녘을 ‘北’으로 적거나 미국을 ‘美’로 적기는 하지만, 신문글에는 ‘북한’이나 ‘미국’이라고만 적습니다. 오늘날 우리 글살림은 오직 한글입니다. 한글을 옳고 바르게 써야 하고, 우리 말삶을 참다이 깨달아야 합니다. 한자는 중국글이나 한국글이 아닐 뿐더러, 한자로 지은 낱말이 많은 까닭은 지난날부터 ‘이 나라 권력자들이 중국글을 빌어 쓰던 낱말이 많았기 때문’이지 ‘이 나라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중국글을 빌어 생각을 주고받았기 때문’이 아니에요. 가난한 사람들 자리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는다고 밝히는 최민식 님이라 한다면, 이처럼 외치는 이야기는 앞뒤가 어긋날 뿐 아니라 올바르지 않습니다.

 영어를 아무 데나 함부로 쓰는 젊은 사진쟁이들한테 한자를 배우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얼마나 씨알이 먹힐는지 모르겠습니다. 젊은 사진쟁이는 영어도 한자도 아닌 한글을 바른 우리 말로 가다듬으면서 즐기거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사람이 알아야 할 말은 한국말이고, 한국사람이 할 사진은 한국사진입니다. 한국사람은 세계말이나 세계사진을 하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빚은 한국사진을 할 때에, 이 한국사진이 세계사진이 되기도 할 뿐입니다. 미국사람이래서 세계사진을 하지 않고 미국사람은 미국사진을 하며, 독일사람은 독일사진을, 스웨덴사람은 스웨덴사진을 합니다.

 뜻있는 옛책이라지만 오늘날 쉬운 말로 다시 옮기지 못하는 책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뜻있는 옛책이라면 쉬운 요즘말로 찬찬히 옮기기 마련입니다. 정약용이든 이규보이든 홍대용이든 허난설헌이든 쉬운 요즘말로 옮겨서 새롭게 다시 읽습니다. 정약용을 한문으로 읽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더 생각한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한글을 쓰는데, ‘훈민정음이 버젓이 있던 조선 끝무렵’ 한국 지식인 가운데 훈민정음으로 쉽고 바르게 글을 써서 펼친 사람은 몹시 드물어요. 삶이 이와 같은데 왜 한자를 배워야 할까 알쏭달쏭합니다. ‘여느 수수하고 투박한 사람’ 삶과 눈높이를 헤아리지 않으면서 ‘권력자 한문’으로 글을 쓴 사람들 책을 굳이 오늘날 사람들이 애써 읽어야 할는지 아리송합니다. 거듭 돌아보자면, ‘21세기 정보화·세계화’라 하니까 ‘한자 섞어쓰기(국한문혼용)’뿐 아니라 ‘영어 함께쓰기(영어병용)’를 하자고 외쳐야 할 테지요. 그런데, 정보와 세계를 다루는 새로운 2000년대인 만큼 너나없이 즐거이 나눌 쉬운 말글을 살피며 북돋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는 길은 사진과 함께 살아가는 길입니다. 사진기 다루는 솜씨만 빼어나대서 사진을 훌륭히 찍지 않습니다. 사진틀이 멋들어진다지만 사진이야기까지 멋들어지지 않으니까요. 내 삶을 일구는 매무새가 아름다울 때라야 내 사진 또한 아름답습니다. 곧, “관찰 결과가 쌓일수록 역사도 쌓여 가고, 그렇게 해서 축적된 역사는 다시 관찰력을 결정한다(166쪽).”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내가 내 삶을 얼마나 참다이 일구느냐에 따라 내가 내 삶과 이웃 삶을 바라보는 눈썰미가 달라집니다. 내 삶을 참다이 일굴 때에는 사진기를 쥐어 바라보는 눈길 또한 참답습니다. 내 삶을 거짓되이 겉치레할 때에는 사진기를 들며 마주하는 눈매 또한 거짓됩니다.

 착한 사람이기에 착한 사진을 얻습니다. 예쁜 사람이기에 예쁜 사진을 얻습니다. 스스로 거룩하게 살아가지 않고서 거룩해 보이려는 사진을 얻으려 한다면, ‘거룩해 보이는’ 사진은 만들겠지만 ‘거룩한 사진’은 태어나지 않아요.

 사진길을 무척 오래 걸었던 최민식 님은 ‘훈계록’보다는 ‘참회록’을 써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는 오직 꾸짖는(훈계) 말만 가득합니다. 스스로 뉘우치는(참회) 이야기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꾸짖는 말마디조차 자꾸 어긋납니다. 곁길로 새거나 벼랑길로 치닫습니다.

 최민식 님은 “내 사진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현실의 생활 형태 속에, 즉 인간 생활 속에 존재한다(259쪽).”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그림쟁이 고흐 님 그림을 다룰 때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은 가난한 삶과 힘든 노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으나 노동하는 사람이 대지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인상주의의 화폭에서 부르주아의 감성적 흔들림이 엿보인다면, 고흐의 화폭에서는 무겁고 거칠지만 든든한 느낌이 전해진다(221쪽).”고 이야기합니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면서 ‘가난하고 힘든 삶’을 그림으로 담은 고흐 님 〈감자 먹는 사람들〉인데, 이 그림이 “가난한 삶과 힘든 노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니요? 최민식 님은 고흐 님을 “부르주아의 감성적 흔들림”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지만, 고흐 님 또한 ‘인상주의 그림쟁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흐의 그림에는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221쪽).”고 적으면서 어떻게 가난한 삶과 힘든 일을 꾸밈없이 그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가난한 삶과 힘든 일을 꾸밈없이 담은 그림이기에, 이 그림에는 가난한 사람과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을 따스한 사랑으로 감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말 여러모로 궁금합니다.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바라볼 수 있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참말 이와 같다고 못박으면서 사진길을 걸어온 나날이 아름답다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고흐 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은 ‘흙일꾼 손’을 보라는 그림입니다. 흙일꾼 손이 얼마나 흙빛을 닮으면서 울퉁불퉁하고 커다란가를 보라는 그림입니다. 시커먼 손이 아닌 흙빛 손입니다. 얼굴도 흙빛입니다. 옷도 집도 신도 밥상도 모두 흙빛입니다. 그런데 감자에서 모락모락 김이 납니다. 웃는 낯도 우는 낯도 아니요, 슬픈 낯도 기쁜 낯도 아닙니다. 그예 하루를 고맙게 돌아보면서 즐거이 끼니를 맞아들이는 낯입니다. 가난하고 힘들다면 가난하고 힘든 그대로 흙일꾼 삶인 〈감자 먹는 사람들〉입니다.

 새벽 네 시 반, 둘째 오줌기저귀를 갈며 생각에 잠깁니다. 사진쟁이 최민식 님이 ‘더 나은 사진’과 ‘더 가난한 사람들 사진’을 한 장 더 찍으려고 바지런히 다리품을 판 일이 나쁠 수 없습니다만, 사진 한 장을 덜 찍더라도 집에서 아이들 오줌기저귀나 똥기저귀를 손수 갈며 손빨래를 하는 나날을 조금 더 보내면서 집식구 밥상을 손수 차리는 삶을 일구었으면, 최민식 님 글과 사진은 훨씬 달라지거나 사뭇 다른 길을 걷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진은 가르침이 아니요 훈계도 아니며 꾸짖음이나 타이름 또한 아닙니다. 사진은 그저 삶이고, 따스한 삶이며, 따스한 손길로 사랑을 나누는 삶입니다. 아무쪼록 최민식 님 ‘사진길 마무리’는 예쁘면서 살가운 빛이 감돌면서 착한 사랑이 가득 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4.6.12.해.ㅎㄲㅅㄱ)


―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 (최민식 글·사진,하다 펴냄,2010.9.17./127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