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곳에서 - 에드워드 김 포토 에세이
에드워드 김 지음 / 바람구두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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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참’도 ‘거짓’도 숨기지 못한다
 [잠깐 읽기 30] 에드워드 김(김희중), 《그때 그곳에서》



- 책이름 : 그때 그곳에서
- 글ㆍ사진 : 에드워드 김(김희중)
- 펴낸곳 : 바람구두 (2006.1.16.)
- 책값 : 19800원



 (1) ‘전두환 만세!’를 부끄럽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1987년 1월 26일에 나온 《전통의 뿌리, 경상북도》(HEK홍보기획공사)라는 사진책이 있습니다. 이 사진책은 오로지 ‘경상북도는 한국 전통을 잇는 밑뿌리 같은 곳으로, 아름답고 깨끗하고 밝은 앞날이 있는 곳’임을 보여줍니다. 사진책 차례를 살피면 ‘전통의 고장, 호국의 터전, 신라 문화 꽃피운 경주, 부처님의 미소, 신비의 섬 울릉도, 맑고 푸른 동해, 내 고장의 특산물, 마음의 고향, 역사 속의 인물, 조상의 얼 지키는 하회마을, 마음이 닿는 곳, 미래를 여는 산업, 특색있는 9시ㆍ24군’, 이렇게 짜여 있습니다.

 이 사진책을 펴낸 ‘에드워드 김(김희중)’ 님 요즈음 해적이를 살피면, 다음처럼 적혀 있습니다.


.. 경기고 재학중 두 번의 사진 개인전을 열었으며, 연세대 재학중 미국으로 유학, 텍사스 주립 대학 신문학과와 미주리대학 신문방송대학원을 졸업하고 내셔날지오그라픽에 입사하였다. 1971년 미국기자단 최우수 사진편집인상과 1974년 미국 해외기자단 최우수 취재상, 1979년 백악관 출입 기자단 사진 취재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80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편집장 겸 기획위원으로 승진한 이후 미국 출판협회 최우수 편집상과 미국 디자인협회 편집기획상을 수상하였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시사주간지 〈타임〉의 서울특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중앙일보〉 사진자문위원과 월간 〈지오〉 편집장을 역임하였다. 1994년 대한민국 국민훈장을 수상하였으며, 1999년 이명동 사진상을 수상하였다. HEK 홍보기획공사 대표, 이화여대 교육공학과 초빙교수를 거쳐, 2006년 현재 상명대 석좌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Korea : Beyond the Hills》, 《Decade of Success》, 《The Family of Dolls》, 《The Korean Smile》, 《Taekwondo : The Spirit of Korea》, 《THIS EHWA》,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 《그때 그곳에서》 등이 있다 ..


 맨몸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사진으로 뜻을 이루어 〈내셔널지오그래픽〉 편집장까지 맡았으니, 대단히 뛰어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더욱이 이 잡지사를 그만둔 뒤로도 한국에서 〈타임〉 서울특파원에다가 〈지오〉 편집장까지 맡았습니다. 사진을 찍는 손매와 사진을 다루는 손길과 사진을 보는 눈매가 무척 남다르지 않고서야 이와 같은 자리를 맡을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대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사진을 가르치는 자리에 앉을 만한 눈높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한테는 몇 가지 궁금한 대목이 있습니다. 1987년까지는 어디에서나 밝혀져 있던 ‘에드워드 김 발자취’ 몇 줄이 그 뒤로는 감쪽같이 사라진 일이 첫째입니다. 사진이야기 《그때 그곳에서》에는 에드워드 김 님이 찍었던 ‘박정희-전두환 새마을운동’ 사진 몇 장이 깃들면서 몇 마디 이야기가 다음처럼 덧붙습니다.


.. 경제발전을 위하여 온 국민이 하나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땀흘려 일하던 1970년대. 중세 무사를 방불케 하는 복장을 하고 쇳물이 튀는 용광로 옆에서 일하는 노무자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을 때 할머니 두 분이 새마을 깃발을 들고 밭으로 나가는 모습. 온 가족이 동원되어 힘들게 쟁기를 끌어 농사짓는 모습. 일하는 가족 옆 흙바닥에서 잠이 든 아이. 자칫 부정적으로 보여질 수도 있는 후진국스러운 장면들이지만, ‘하면 된다’는 구호와 ‘잘 살아 보세’라는 새마을운동 노래를 흥얼거리며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고 땀흘려 열심히 씨를 뿌렸기에, 오늘과 같은 발전이 가능했으리라 여겨집니다 ..  (108∼110쪽)


 에드워드 김 님 해적이에 나오지 않는 세 가지 책을 책꽂이에서 들추어 봅니다. 모두 헌책방 책시렁에서 찾아내어 간직한 책입니다. 이 가운데 《전통의 뿌리, 경상북도》 뒷장을 봅니다. “그의 저서로는 한국인의 정서와 생활상을 담은 《한국:언덕을 넘어서》가 1980년 일본 고단샤에 의해 발행되었고, 형문출판사에서 발행한 《민주복지의 길》과 《인형의 가족》이 있다. 전두환 대통령 《미국 순방》(1985년) 및 《유럽 순방》(1986년) 등은 직접 수행 취재하여 편집한 사진집이며, 제5공화국의 치적 5년을 기록한 사진집 《국민이 함께》와 86아시안게임을 기록한 《영원한 전진》 등의 사진집이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1987년 책에는 밝혀져 있는’ 에드워드 김 님 사진책 가운데 제가 갖고 있는 책은 《민주복지의 길》과 《유럽 순방》입니다. 《미국 순방》과 《국민이 함께》와 《영원한 전진》과 《인형의 가족》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만, 언젠가는 제 손에 들어올 날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진책들은 나라돈으로 찍어 전국 구석구석에 퍼뜨린 ‘전두환 찬양 사진책’이기 때문입니다.
 





.. 빨간 수건을 목에 두르고 북을 치는 중학생들이 경직된 표정으로 교정에서 교련훈련을 받고 있다. 1973년 북한의 경제수준이 남한과 거의 비슷했던 시절, 북한은 주체사상과 천리마운동으로 자신감 넘치는 정책을 펼쳤다. 혁명박물관. 김일성 수령의 업적을 기리는 95개의 대형 전시실 그곳에 우뚝 서 있는 18미터나 되는 동상. 박물관 광장에서 금색의 김일성 조각을 청소하는 일꾼들. 그리고 북한의 산업화와 자급자족 경제를 상징하는 제철소의 역군들. 불가리아 대통령 환영 인파로 동원된 만여 명에 이르는 학생과 시민들. 천리마운동을 상징하는 천리마동상과 넓은 도로 건너편 모란봉 위의 극장과 저 멀리 대형 텔레비전 전송탑이 평양의 하늘을 장식하고 있다 … 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느 집에서 한 소년이 벌거벗은 채 뛰어나왔고 이어 누나뻘 되는 소녀도 뛰쳐나와 달아나는 아이를 냅다 뒤쫓았다. 그 어린아이들이 석양 속에서 뛰어다니며 웃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 하자, 안내원은 어색하게 내 앞을 막아섰다. 죄송하다며, 그러한 장면을 찍는다면 북한의 어린이들이 헐벗어서 옷을 입지 못한 채 길거리를 배회하는 것처럼 선전용으로 사용될 수 있다며 나의 촬영을 제지한 것 ..  (70∼74, 98쪽)


 에드워드 김 님은 1974년에 북녘을 찾아가서 취재합니다. 이듬해 1975년에는 남녘을 찾아가서 취재합니다. 이 취재는 모두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렸고, 1974∼1975년 사이에 나온 《내셔널지오그래픽》은 다른 여느 해 잡지와 견주어 웬만해서는 헌책방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까닭은 알 수 없으나 누군가 쓴 힘에 따라서 솎아내어졌기 때문입니다. 1974년 8월치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딱 한 번 헌책방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에드워드 김 님이 북녘을 취재한 자리는 면도칼로 아주 잘 잘려져 나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1975년 9월치 남녘 취재 기사는 잘리지 않았더군요.

 곰곰이 돌아보면, 2009년 오늘날에도 ‘북녘사람들 여느 모습’을 담은 사진은 남녘땅에서 구경할 수 없습니다. 남녘 사진기자뿐 아니라 나라밖 어느 사진기자도 북녘사람 여느 삶자리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 못합니다. 또한, 남녘뿐 아니라 나라밖 웬만한 사진작가와 사진기자는 북녘을 사진으로 담으려 할 때에 ‘북한, 너네는 이런 놈들이야!’ 하는 틀에 갇혀서 뻔한 모습으로 ‘깎아내리는’ 사진을 보여주기 일쑤입니다.

 1974년에 에드워드 김 님이 북녘을 찾아갔을 때 수행원이 ‘어색하게 말린’ 까닭이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때나 이제나 달라지지 않은 ‘우리 눈길’ 때문입니다. 남녘이든 북녘이든 가난한 사람이 틀림없이 있고, 잘사는 사람 또한 틀림없이 있습니다. 사기꾼이 틀림없이 있고 착한 사람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사진기 눈은 어디로만 쏠려 있는가요?

 오래된 동네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는 우리들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담아내고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요? 서울 강남을 찍을 때, 우리 나라 청소년을 찍을 때, 이명박 대통령을 찍을 때, 전투경찰을 찍을 때, 공무원을 찍을 때, 운동선수를 찍을 때, 노숙자를 찍을 때, 연예인을 찍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찍을 때, 식구들을 찍을 때, 우리 눈길은 어떻게 맞추어져 있는가요?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사람과 삶터로 다가가면서 사진기를 들고 있을까요?
 





 (2) ‘어제’는 있되 ‘오늘’과 ‘내일’ 모두 없는 사진이면?


.. 농촌의 식생활도 많이 달라져 새참 때 읍내에 전화해 자장면을 시켜 먹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고, 빵과 우유를 들며, 막걸리보다 맥주를 마시는 것이 보편화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농촌의 깊은 시름이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말을 덧붙입니다. 우리 농촌도 세계무역기구 농산물 개방정책의 장벽을 넘어 어서 빨리 살기 좋은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  (152쪽)


 에드워드 김 님이 바라보는 눈길이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에드워드 김 님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바라보는 한국땅은 ‘박정희-전두환 두 대통령이 일으킨 새마을운동’이 있었기에 모두 잘살고 넉넉하게 되었다고 느끼는데, 이러한 눈길은 이분 삶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입니다. 좋은 장비와 좋은 손길과 좋은 눈길에 따라, ‘아름다워진 한국’을 담아내려는 에드워드 김 님한테는 박정희 씨나 전두환 씨는 ‘독재자’가 아닌 ‘훌륭한 치적을 남긴 거룩한 분’이 맞습니다.

 그런데 왜, 에드워드 김 사진이야기 《그때 그곳에서》를 비롯해, 요즈음 나온 책에서는 당신이 우러르던 사람들을 담아낸 사진책 이야기가 쏙 빠져야 했을까요. 빼야 할 까닭이 있었을까요.

 대통령으로 뽑힌 이명박 씨를 지지한 사람 눈에는 이명박 씨가 ‘한국을 먹여살리는 훌륭한 분’으로 비추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눈길이 글렀든 어긋났든 엉터리라 하든, 지금 이 자리에서는 이 눈길 테두리에서 헤어나지 않습니다. 수렁에서 벗어나 참눈과 참마음과 참생각을 가꾸어 준다면 더없이 반가울 터이나, 수렁에서 허우적거린다 하여도, 세상을 보는 얕은 눈은 그 눈길대로 두면서도 당신이 걷는 길을 옳게 다스릴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이명박 씨를 대통령으로 찍지 않았어도 그릇되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명박 씨를 안 찍으나 마나입니다. 이명박 씨를 대통령으로 찍었다 하여도 올바르게 삶을 꾸리는 사람은 이명박 씨를 안 찍은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투표 하나로도 세상을 바꾸지만, 세상을 참되게 바꾸는 밑힘은 투표 아닌 ‘자그마한 우리들 살아가는 매무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 얼마 전 강의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우리들이 추구하는 행복에 대해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론은 진정한 행복은 공짜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에서, 미소에서, 말 한 마디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낍니다. 맑고 투명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한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면서도 새봄이면 푸른 싹이 돋아날 것임을 깨닫는 순간, 맘속으로 번지는 희망과 행복이 우리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그 마음의 온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결국 그 온기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지요 ..  (60∼61쪽)
 





 사진은 아무것도 숨기지 못합니다. 거짓된 사람들이 아무리 힘을 들이고 돈을 퍼붓고 이름을 들이밀어도, 사진은 ‘참’을 숨기지 못합니다. 참된 사람 스스로 힘을 들이지 않더라도 돈을 들이지 않더라도 이름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사진은‘거짓’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참이든 거짓이든 언제나 있는 그대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참과 거짓을 못 알아채는 사람이 어김없이 있으나, 알아채는 사람이 없더라도 언제나 우리 곁에 낱낱이 밝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에드워드 김 님은 스스로 당신 발자취를 부끄러워하거나 감출 까닭이 없다고. 부끄럽다면 부끄럽다고 떳떳이 밝히면서 뉘우칠 노릇이라고. 부끄럽지 않다면 부끄럽지 않다고 당차게 밝히면서 내세울 노릇이라고.

 ‘전두환 수행비서’와 다를 바 없이 함께 다니면서 ‘전두환 만세’를 불렀다 하여 ‘저런 죽일 놈!’이라고만은 느끼지 않습니다. 당신한테는 그와 같이 살았던 지난날이 ‘나라 살리기’였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 지난날에만 만세를 부르고 이제는 만세를 부르지 않는다면, 그때 일은 꽁꽁 싸매 놓고 있다면, 궁금함만 몽실몽실 커집니다. 오늘은 어제와 어떻게 다르며, 다가오는 내일은 또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제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내지 않고서는 참다이 사람을 사귈 수 없을 뿐더러, 사진쟁이는 ‘스스로 찍으려는 사람이나 삶터를 고스란히 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모두를 바쳐야 나한테 스며드는 ‘사진에 담기는 사람’이요 ‘사진에 들어오는 삶터’입니다. 모자람도 바치고 넉넉함도 바쳐야 하는 사진입니다. 어설픔도 바치고 솜씨있음도 바쳐야 하는 사진입니다.

 그래도 에드워드 김 님으로서는 그동안 해온 일거리만으로도 얼마든지 앞으로 튼튼하게 대학교수 자리를 지키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수 에드워드 김’은 될지언정 ‘사진쟁이 에드워드 김’은 될 수 없습니다. 에드워드 김 님 스스로 ‘새롭게 펼치는 사진길’을 헤아리지 않으신다면야 어찌할 길 없습니다. 그저 《그때 그곳에서》 같은 ‘예전에 찍은 사진을 몇 가지 추슬러서 추억 팔기’ 책을 쓰신다고 할 때에는 어찌할 노릇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사진’으로 밥벌이를 하지만, 정작 오늘날에는 ‘사진기를 안 들고’ 있는 채로 살아가겠다고 한다면 어찌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안쓰럽습니다. 그 기나긴 사진길 마무리를 이렇게밖에 못하나 싶어서. 그 고단하고 벅찼던 기나긴 사진길 끝을 이렇게밖에 못 맺는가 싶어서.

 새로운 글을 써내지 못하면 글작가가 아니요,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지 못하면 그림작가가 아니며, 새로운 만화를 그려내지 못하면 만화작가가 아닙니다. 새로운 사진을 찍어내지 못하면 사진작가가 아닙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은 역사뿐 아니라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이웃 앞에서 언제나 벌거벗고 있어야 합니다. (4342.4.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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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아이들 -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의 고향이다, 함성호 사진집
함성호 지음 / 눈빛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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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골에서 사라진 아이, 도시에서는 안 사라졌을까
 [잠깐 읽기 29] 함성호 사진책, 《산골 아이들》


- 책이름 : 산골 아이들
- 사진ㆍ글 : 함성호
- 펴낸곳 : 눈빛 (2007.5.5.)
- 책값 : 15000원



 (1) 어제 우리 땅 아이들 삶자락 담은 사진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의 고향이다”라는 작은 말이 붙어 있는 사진책 《산골 아이들》은 1993년에 처음 나왔습니다. 그러나 오래오래 목숨을 잇지 못하고 조용히 새책방 책시렁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헌책방에도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열 해를 훌쩍 넘긴 2007년에 새 모습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나라안에서 나오는 여느 사진책과 마찬가지로 《산골 아이들》 또한 제대로 사랑을 못 받고 조용히 사라졌습니다만, 꾸준히 찾는 ‘사진 사랑이’ 힘과 출판사 뜻이 모여 새 옷을 입었는데, 새 옷을 입은 사진책 《산골 아이들》은 앞으로 얼마나 목숨줄을 이을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첫 쇄 찍기로 그칠는지, 한 번쯤 거듭 찍으며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는지.


.. 그랬다. 사진 속 아이들에게 우리들 세대들에게도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았고, 모두가 이웃’이었다. 봄꽃이 산야를 물들이고 보리가 아이들 키만큼 자라면, 가슴 설레게 하는 그 무엇 때문에 산과 들을 헤집고 다녔던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어른들에겐 고향의 따뜻함을, 아이들에겐 알지 못했던 어른들의 또 다른 어린 시절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  (찍은이 맺음말/156쪽)


 저는 처음 나왔을 때에는 장만하지 못했습니다. 헌책방 나들이를 하며 바지런히 훑어보는데, 다른 사진책은 하나하나 만나게 되어도 《산골 아이들》만은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출판사에 연락을 해도 창고에 반품으로 들어온 헌책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만남줄이 닿지 못하는가 하는 아쉬움과, 언제쯤 다시 빛을 볼까 하는 기다림으로 지칠 무렵 드디어 새로운 판을 만나게 되었고, 기쁜 마음으로 새로운 판을 장만하여 우리 집 책꽂이에 고이 모셔 놓은 지도 어느새 이태.

 그동안 사진책 《산골 아이들》은 새로운 ‘사진 사랑이’를 꾸준히 만나게 되었을는지 궁금합니다. 이 사진책에 담긴 열매를 받아먹는 사람이 조금이나마 늘었을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쟁이 함성호 님이 산골마을 아이들 삶을 좇으면서 사진으로 하나하나 담아 놓은 땀방울을 느낀 분이 생겨났을는지 궁금합니다.


.. 야구놀이. 인원도 모자라고 규칙도 엉성하지만 우린 실랑이가 없습니다 ..  (41쪽) 






 때때로 사진을 들추면서, 도서관 나들이를 오신 분한테 넌지시 구경시켜 드리면서, ‘산골 아이들’이란 한 해가 다르게 자취를 감추는 우리 모습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그러나, 산골 아이들만 우리 둘레에서 자취를 감춘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도 ‘도시 아이들’ 또한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산골 아이와 함께 ‘논두렁 아이들’과 ‘밭두렁 아이들’과 ‘바닷가 아이들’이 자취를 감추고, 도시에서는 ‘골목길 아이들’이 자취를 감춥니다. 이러는 동안 ‘아파트 아이들’이 새로 생겨나는데,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틈틈이 잠깐잠깐 인라인이나 자전거를 끄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여도, 아파트마자 하나쯤은 마련된 모래밭 놀이터에서 만나는 일마저 마땅하지 않습니다.

 골목마실을 하면서 자전거 놀이를 하는 아이를 곧잘 스치곤 하지만, 맨손으로 맨땅에서 동무들과 어울려 노는 아이를 마주치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가끔가끔 스쳐 지나가게 되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사진 한 장 찍어 볼까?’ 하고 생각하지만, 사진기는 어깨에 둘러멘 그대로 가만히 더 바라보다가 지나갑니다.

 사진 한 장에 박아 놓고 오늘 이 자리 골목길 아이들 놀이를 두루두루 나누거나 남길 수도 있겠지만, 제 눈과 마음과 가슴에 아이들 매무새를 새겨 놓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설피 아이들 앞에서 사진기를 들이대면서 아이들이 노는 데에 헤살을 놓고 싶지도 않습니다. 옆동네 아이들이니 같은 동네 이웃으로 여기면서 사진을 찍어도 괜찮다고 여겨도 되지만, 아직 이 아이들과 저는 서로 이름을 모릅니다. 저는 아이들이 어느 동 어느 집에서 사는지 어렴풋이 알기는 해도 또렷이는 모를 뿐더러, 아이들은 제가 어느 동 어느 집에서 사는지 아직 모르기도 하고, 낯선 사람입니다. 잽싸게 사진기를 들어 후딱 찍어서 멋진 사진 하나 얻어낼 수 있는 한편, 아이들한테 말을 걸고 나서 웃는 모습을 브이 그려 가며 찍을 수 있기는 한데, 이렇게 해서까지 구태여 ‘골목길 아이들’을 담아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아니, 이렇게까지 할 까닭은 없어요.

 먼저, 사진을 찍는 저 스스로 흐뭇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애써 ‘잘 찍은’ 사진이 나올 수 있어도, 그저 잘 찍은 사진일 뿐, 제 삶과 아이들 삶이 묻어난 사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 의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청소를 합니다. 오늘 학교 공부가 모두 끝났습니다 ..  (50쪽)


 사진책 《산골 아이들》을 들여다보면, 사진쟁이 함성호 님은 사진으로 아이들한테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서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 한 걸음은 섣불리 ‘아이들을 사진감으로 담아내려는 몸짓’이 아님을 느낍니다. 다음 두 걸음은 빨리빨리 ‘곧 사라질 모습을 사진으로 적바림하려는 손놀림’이 아님을 느낍니다.

 그저 그곳에 있어서 좋은 아이들이었기에 차분히 기다린 끝에 사진기를 들었다고 느낍니다. 당신 스스로 ‘산골 아이들’과 같은 어린 날을 보낸 기쁨과 웃음이 있었기에, 이 기쁨과 웃음을 고스란히 ‘어른이 된 함성호가 내 어릴 때와 마찬가지인 아이’를 ‘거울로 내 모습 들여다보듯’ 담았다고 느낍니다.

 사진마다 군더더기가 없고, 억지스러움이 없습니다. 물렁물렁 비계가 없고, 어설픈 끼워맞춤이 없습니다. 바라보는 그대로 좋고, 덮었다가 나중에 또 들추는 재미가 있습니다.


.. 감자꽃이 피면 아이들도 감자꽃이 됩니다 ..  (77쪽)


 함성호 님은 사진마다 한 마디씩 이야기를 붙입니다. 사진과 함께 사진말 한 마디로, 당신 스스로 ‘당신 눈에 들어와 당신 사진에서 싱그러이 살아나는’ 아이들을 얼마나 애틋하게 여기며 좋아하는지를 느끼게 합니다. 사진 하나로도 좋고, 사진말 한 마디로 한결 즐겁기도 한 사진놀이를 펼칩니다. 아이들은 산골마을에서 동무들과 어울려 놀고, 함성호 님은 아이들 곁에서 사진기를 들면서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사진놀이를 즐깁니다.
 





 (2) 오늘 이 땅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그렇지만, 사진책 《산골 아이들》은 몇 대목에서 아쉽다고 느껴집니다. 다시 살아나 주어 몹시 반갑고, 다시 살아나 준 일만으로도 반갑습니다만, 어딘가 살짝 빠져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처음 《산골 아이들》을 인천 인현동 〈대한서림〉에서 사들며 두근거리던 마음이, 겉싸개 비닐을 뜯어 한 장 두 장 넘기는 사이 가늘게 한숨으로 바뀌었고, 이태에 걸쳐 제 책꽂이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어딘가 빠져 있다는 느낌은 들지만 종잡을 수는 없었고. 어쩌면, 너무 크게 바랐다거나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고. 그러면 기다릴까? 책꽂이에 고이 꽂아 두고 날마다 바라보면서 이 사진책에서 어딘가 아쉽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스며들 때까지 기다릴까?


.. 가을걷이에 엄마의 손길이 바쁩니다. 서툰 낫질로 일손을 돕습니다. 가을해는 짧기만 합니다 ..  (125쪽)


 틈틈이 다시 들추던 때와 사진벗한테 이 책을 보여줄 때 얼핏설핏, 사진쟁이 함성호 님이 붙인 사진말 가운데 어울리지 않다 싶은 글월이 꽤 보였습니다. 더욱이, 산골 아이가 ‘서툰 낫질’이라고 적은 대목은 얄딱구리하다고까지 느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일 하는 어버이가 키우는 아이가 낫질이 서툴다고? 그럴 수 있나? 때로는 한두 아이가 서툴 수 있을는지 몰라도, 산골 아이가 낫질이 서툴다고? 낫질 서툰 산골 아이라면 그 자리에서 엄마나 아빠한테 꿀밤을 맞든 욕바가지를 먹든 하면서 눈물이 글썽이는 가운데 서툰 낫질이 익숙한 낫질이 되도록 꾸지람을 먹지 않았을는지?

 사진쟁이 함성호 님은 아이들 사진을 찍는 동안 스스로 시인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사진마다 한두 마디씩 짤막하게 시를 쓰면서 당신 사진을 즐거워 하고 기꺼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너무 혼자서만 즐거워 하고 기꺼워 한 나머지 ‘사진을 찍으며 어린이 눈높이로 맞추던’ 눈길이 ‘글을 붙이며 어른 생각으로 올라가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내려다보는 눈길로, 마냥 귀엽게만 보는 눈매로, 그저 하늘나라 사람으로 구경하는 눈썰미로.


.. 하루 한두 번 오는 마을버스. 아무리 기다려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타 보는 마을버스입니다 ..  (139쪽)
 





 우리 삶은 줄타기와 같다고 이야기하는 분을 곧잘 만납니다. 웃음과 눈물은 종이 한 장 사이만큼만 벌어져 있다거나, 뒤집으면 서로 똑같다고도 합니다.

 잘 찍은 사진과 잘 못 찍은 사진도 이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사진과 가슴에 다가오지 못하는 사진도 이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함성호 님 사진책 《산골 아이들》은 ‘눈물겹도록 반갑고 가슴 저리는 사진’으로 이루어진 가운데 ‘철없는 겉멋에 휩싸인 사진’이 곳곳에 끼어들지 않았느냐고 느낍니다.

 2007년에 새판이 나오게 되면서, 2000년대에 산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발자취를 한두 장이라도 함께 담지 못한 아쉬움도 이런 데에서 비롯하지 않느냐고 느낍니다. 산골마을 작은 학교가 사라졌다면 사라진 자취라도, 아직까지 꿋꿋하게 남은 작은 학교가 있다면 꿋꿋하게 살아남은 자취를 다문 한 장으로라도 담아내어 같이 나누었어야 하지 않느냐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산골 아이들》은 완성품이 아닙니다. 기성품도 아닙니다. 사진에는 ‘완성품’이란 없고 ‘기성품’ 또한 있지 않습니다. 차근차근 밟아 나가면서 언제나 새롭게 닦아나가는 사진만이 있습니다. 자꾸자꾸 뒷걸음을 치면서 ‘옛날 모습 담은 아련한 사진’으로 이름값 팔아먹는 수많은 어르신이 주름잡는 한국 사진밭이라고는 하나, 《산골 아이들》과 같은 사진책은 ‘지난 세월에는 산골마을 아이요, 오늘 삶터에는 도시에서 사뭇 다르게 있는 아이요’ 하는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새 길을 잇는 사진밭을 일구는 좋은 거름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4342.4.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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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4-13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산골에서 사라진 아이들은 도시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노란 학원버스 안에 모두 팔려가는 누런 병아리처럼 앉아 있더군요.

숲노래 2009-04-14 14:49   좋아요 0 | URL
그렇겠지요.
아이들이 송두리째 사라져요...
 
젊음, 나눔, 길 위의 시간 - KOICA와 함께한 730일
강제욱 외 지음 / 포토넷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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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읽고 나서 별 둘밖에 붙이지 못해 미안하지만, 책을 읽으며 들었던 느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밖에 없는 성격이라, 이렇게 아쉬우나마 느낌글을 적으면서, 다음에는 조금씩 나아질 수 있기를 꿈꾸어 봅니다............... 



 자원봉사는 ‘조용히’ 우리 삶터에서 해야지요
 [잠깐 읽기 27] 강제욱,이명재,이화진,박임자 《젊음, 나눔, 길 위의 시간》



- 책이름 : 젊음, 나눔, 길 위의 시간 - KOICA와 함께한 730일
- 글사진 : 강제욱, 이명재, 이화진, 박임자
- 펴낸곳 : PHOTONET (2008.12.29.)
- 책값 : 12900원



 (1) 자원봉사란?


 ‘KOICA’라는 곳이 있습니다. 저는 《젊음, 나눔, 길 위의 시간》이라는 사진이야기책을 보면서 이런 모임이 있음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알파벳으로만 적으니, 이곳이 한국에 있는 모임인지 나라밖에 있는 모임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젊음, 나눔, 길 위의 시간》을 죽 읽다 보면, 끄트머리에 이 모임을 찬찬히 알려주는 사진과 글이 실리는데, ‘KOICA’란 ‘한국국제협력단’을 줄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무상원조를 시행하는 정부출연기관으로서 해외봉사단 파견사업을 포함한 다양한 원조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바야흐로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났다는 뜻에서 이와 같은 모임이 꾸려졌는가 싶습니다. 그리고 나라안에는 아직 찢어지게 못사는 사람이 많은 한편, 터지게 잘사는 사람 또한 많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나라안이 되든 나라밖이 되든 ‘넘치는 자원’과 ‘넘실대는 사람’을 나누어야 하기도 합니다. 일 나누기가 되든 자원봉사가 되든 공동체가 되든, 나 아닌 다른 사람은 어찌 사는가를 들여다보면서, 내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보기도 해야 합니다.


.. 내 기억 속의 파라과이는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답거나 원시의 생명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러나 서울처럼 삭막한 도시의 풍경과도 거리가 먼, 믿기지 않을 만큼 맑고 파란 하늘이 끝없이 펼쳐지던 곳이었다. 안데스 지역의 고산 지대도 아니고 그렇게 매력적인 하늘을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파란 하늘을 보며서 때레레를 마시고 있노라면 마음까지 시원해졌다. 그곳이 망고나무 그늘 밑이라면 더욱! 파라과이는 어느 도시이건 그 안에 자연이 살아 있다 ..  (14쪽 / 강제욱)


 생각해 보니, 저도 꽤 자주 자원봉사를 합니다. 언제나 자원봉사라는 이름은 안 걸치지만, 몸을 바쳐서 일을 거들거나 함께하고 있으니 자원봉사가 맞습니다. 그런데 저한테 도움을 바라는 분이나 저 스스로나 서로가 자원봉사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로 돈을 챙겨 주는 이가 없으나, 딱히 돈을 받을 마음 또한 없습니다. 한 동네에 살기에 거드는 일이 아니라, 함께 그 자리에 있어 좋기에 일을 거들게 됩니다.

 동네 밥집 김치 담그기를 거드는 일은 알게 모르게 자원봉사입니다. 동네 밥집 할머니가 반찬을 한두 가지 더 챙겨 주는 일도 이래저래 자원봉사입니다. 성당에서 세례받는 분들 사진을 슬쩍 찍어 주는 일도 자원봉사입니다.  성당 다니는 이웃사람들이 술이나 밥을 가끔 사주는 일도 자원봉사입니다. 헌책방 사진을 찍어 선물로 드리는 일도 자원봉사입니다. 헌책방 아저씨가 때때로 500원이나 1000원을 에누리해 주는 일도 자원봉사입니다. 구멍가게 할배한테 빈병을 모아 드리는 일도 자원봉사입니다. 구멍가게 할매가 우리 옆지기 신으라고 떠 준 덧양말 한 켤레도 자원봉사입니다. 늘 자원봉사에 둘러싸인 삶입니다.


.. 가끔씩 아이들은 나를 ‘독재자’라고 불렀다. 당시에는 아이들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해서 ‘수업하지 말아요’, ‘TV 봐요’, ‘숙제 좀 적게 내 주세요’ 등등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거의 들어주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녀석들과 좀더 친밀하게 지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학생들의 생일에는 독재자인 나도 악동 제자들과 어울렸다 … KOICA 봉사단원으로 파견되어 한국어를 가르치면서도 처음에는 참 힘들었다. 학생들이 뭘 원하는지,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시간 안배도 안 되는 데다 머리속의 내용은 충분히 전달되지 않고, 아이들의 질문에 “다음 시간에 알려 줄게요” 하는 날도 많았다. 집에 돌아오면 ‘아차!’ 잘못 가르친 것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래도 처음 가르쳤던 아이들과, 고심하며 준비했던 수업 내용 자료 등은 여전히 내게 특별한 의미로 남아 있다 ..  (96∼97, 140쪽/이명재)


 아기를 돌보는 일도 자원봉사였을까요? 아픈 옆지기를 돌보며 집살림을 도맡아 꾸리는 일도 자원봉사였을까요? 제 몸을 아끼고 싶어서 손빨래를 하고 손걸레로 집안을 훔치는 일도 자원봉사였을까요?

 국어사전에 나온 뜻풀이를 보자면, “어떤 일을 대가 없이 스스로 하는 일”이 자원봉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집에서 집식구를 보듬는 일도 자원봉사라면 자원봉사가 아니랴 싶습니다.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니까요. 아무 갚음을 꿈꾸지 않는 나눔이니까요. 그리고 이런 사랑과 나눔 그대로 내 동무한테 똑같이 하고, 내 이웃하고 똑같이 어깨동무를 하니까요. 옆지기 부모님 댁에 가서 설거지를 해도 자원봉사이고, 중학생이 된 처남한테 책을 선물해 주거나 쓸돈 몇 푼 넌지시 책에 끼워 주어도 자원봉사가 아니랴 싶습니다. 길을 가다가 자전거가 고장나 옴쭉달싹 못하는 사람을 보고는 자전거를 손질해 주거나 구멍난 바퀴를 때워 주는 일도 자원봉사이리라 믿습니다. 길에서 동냥하는 분한테 천 원이나 이천 원 내밀어 주고, 길장사를 하는 분들 물건을 때때로 사는 일도 자원봉사가 되리라 믿습니다.

 나한테 돌아오는 사랑과 옆지기한테 돌아가는 사랑이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아기한테 나누어지는 사랑과 동무네 아기한테 옮아가는 사랑이 어긋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한 흐름이요, 한 동아리요, 한 모둠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풀포기와 나무 한 그루 모두 사랑합니다. 부모님을 믿는다면 파란하늘도 믿고 푸른 들판도 믿고 누렇게 익는 나락논도 믿습니다. 책이면 똑같은 책이지 헌책과 새책이 없듯, 사람이면 똑같은 사람이지 요 사람 조 사람 나눌 금이란 없습니다. 나라안 사람이든 나라밖 사람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우리 말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이주노동자를 만나든 살결 하얀 서양사람을 만나든, 저는 늘 똑같이 웃으며 한국말로 묻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도움을 주든 받든 합니다.


.. 현지에 혼자 뚝 떨어진 내게 가장 큰 어려움으로 다가온 것은 서툴기만 한 언어나 과중한 업무, 외로움과 향수병이 아니었다. 다름아닌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느냐 하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외로움이 전혀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너무 외로웠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라도 먹고 살아남아야 하는 문제 앞에서 외로움은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물론 내가 살게 될 집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곳의 직원들과 준비한 식료품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로는 도저히 이해 못할 식료품을 보고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과 구입한 것은 쌀과 설탕 한 포대, 식용유 한 통 정도였다. 아침에 밥숟가락으로 설탕을 집어넣은 차를 마시고, 밥을 할 때 식용유를 부어 고소하게 만드는 그들의 음식 문화를 알게 되었을 때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지만, 불행히도 나는 도저히 그렇게 먹고살 수 없었다 ..  (159∼160쪽/이화진)


 무슨 시설에 가야만 자원봉사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어느 모임에 들어가 머나먼 어느 땅을 밟고 내 힘을 나누어야 자원봉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도에 가야만 데레사 수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티벳에 가야만 달라이 라마를 만나겠습니까.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목소리를 꼭 들어야 깨달음을 얻겠습니까. 백담사에서 백팔 번 절을 해야 몰록깨침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큰 아파트에 살아야 두 다리를 쭉 뻗겠으며, 우리가 빠른 차를 타야 서울에서 부산까지 즐겁게 달릴 수 있겠으며, 우리 주머니에 맞돈 백만 원쯤 들어 있어야 술 한잔 신나게 마실 수 있겠습니까. 두어 평 방 한 칸으로도 넉넉하고, 두 다리로 걸어도 즐거우며, 만 원짜리 한 장으로도 신납니다.


 (2) 무얼 말하거나 보여주겠다고 하는 젊은 넋이지?


 ‘자원봉사를 하는 기쁨’을 사진과 글로 보여주는 《젊음, 나눔, 길 위의 시간》을 읽어냅니다. 책을 처음 받아쥘 때부터 읽기를 마치고 덮을 때까지 속이 무척 답답합니다. 틀림없이 이 책에 사진과 글을 담은 젊은 네 넋은 나라밖에서 아름다움과 기쁨과 보람을 듬뿍 받아안았을 텐데, 그 아름다움이 무엇이고 기쁨이 어떠하며 보람이 어떻게 당신들 마음에 새겨졌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까마득합니다.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 사진인지 또렷하지 않습니다. 관광사진이나 홍보사진은 아닐 텐데, 또 풍경사진이나 예술사진도 아닐 텐데, 그리고 인물사진이나 다큐사진도 아닐 텐데, 무엇을 하자면서, 아니 우리한테 무엇을 ‘나누어’ 주고 싶어서 찍은 사진이고 보여주는 사진인지 딱히 느낌이 잡히지 않습니다. 살갗으로 와닿지 않습니다. 살갗에 겉스치고 바스라지니 가슴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제 가슴 어느 한켠이라도 뭉클뭉클 건드려 주면 고마울 텐데, 첫 쪽부터 마지막 쪽까지 ‘뭐야? 벌써 끝이야? 할 말이 이게 다야?’ 하는 마음을 어찌할 바 모르겠습니다. 책을 쥐어든 제가 외려 뻘쭘해지고 맙니다.


.. “그럼, 어떻게 해야 해? 그냥 이렇게 놀다가 한국으로 돌아갈까!” 나는 결국 답답해서 짜증을 부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내가 조금 진정되자 말림은 차분하게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화진!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마. 네가 지금 잊고 있는 게 하나 있어. 너는 2년 후 다시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잖아. 무엇을 많이 주고 간 화진으로 기억되는 것도 좋지만, 난 말이야, 좋은 친구 화진으로 남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 사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가는 나라에는 그들만의 시스템이 있다는 걸 잊곤 한다. 어떤 때는 그러한 시스템이 말도 안 되고 답답해 보이지만 그것은 그 지역만의 자연환경과 역사, 사회적 환경, 국민성 등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요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잣대로 판단하고 그곳의 시스템은 낙후되었으니 무조건 바꾸고 새롭게 만들려다 뜻대로 안 되면 결국 현지인과 다투고 제 분을 못 이겨 힘들어하게 된다 ..  (177∼179쪽/이화진)


 나라밖으로 자원봉사를 나갔던 젊은 넋들이 ‘실패를 했다’는 이야기도 아니요, ‘뜻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어떤 자원봉사를 했는지’도 찬찬히 나오지 않는 가운데, ‘얼마 동안 지내고 무엇을 가르치거나 거들었으며’, ‘어떤 지역사람과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를 엿볼 수 없습니다. 파라과이든 우크라이나든 탄자니아든 중국이든, 사진이나 글에서 이와 같은 나라를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종잡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코이카 해외협력단 보고서’라도 되느냐 하면, 이 또한 아닙니다. ‘코이카 해외협력단 홍보글’이라도 되느냐 하면, 이마저 아닙니다.


.. 사실, ‘사진찍기’는 우크라이나와 의사소통하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오해를 사진으로 풀기도 하고, 우크라이나 내면의 깊은 이야기들을 사진을 통해 듣기도 했다 ..  (142쪽/이명재)


 300쪽이 조금 못 되는 책을 읽는 내내, 딱 한 군데에서 ‘사진찍기’로 무엇을 하려 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만납니다. 그러나 의사소통을 했다고는 나와도 어떻게 무엇을 의사소통했는지 스스로 털어놓지 못합니다. 작은(?) 책 하나에 모든 이야기를 담아낼 수 없었다고 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담아낼 이야기를 먼저 펼쳐 보인 다음, 살을 하나하나 붙여야 앞뒤가 알맞지 않느냐 싶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직 많이 젊은 나머지 세상구경도 덜 했고 자원봉사도 덜 했기에 속깊거나 마음넓게 헤아린 이야기를 못 보여준다고 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얕거나 좁다면 섣불리 사진과 글을 우리 앞에 내보이지 말아야 할 일이 아니냐 생각해 봅니다.

 무르익지 않은 가운데 구태여 사진과 글을 우리 앞에 내보이려 했다면, 사진으로든 글로든 무언가 ‘이야기’가 있어야 하지 않았느냐 생각합니다. ‘나, 어느 나라에 자원봉사 다녀왔어요!’ 이 한 마디를 하려고 300쪽에 이르는 ‘총천연색 사진이야기책’에 사진과 글을 싣지는 않았을 테지요? 우리 나라가 이제 개발도상국에서 아주 훌훌 털고 일어나 ‘선진국 문턱’에 다다랐음을 뽐내고자 이러한 책을 내놓으려 하지는 않았을 테지요? (4342.3.1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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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호 사람들 - 김보섭 사진집
김보섭 지음 / 눈빛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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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를 부탁해’도 인천‘사람’은 못 담는데
 [잠깐 읽기 26] 김보섭 사진, 《수복호 사람들》



- 책이름 : 수복호 사람들
- 사진 : 김보섭
- 펴낸곳 : 눈빛 (2008.4.9.)
- 책값 : 2만 원
 





 (1)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지난주에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디브이디를 장만했습니다. 단돈 2000원에 나와 있기에 낼름 장만했는데, 셈틀에 넣어 돌리니 화질이 몹시 나쁩니다. 설마, 했는데 이 디브이디는 복제판이었구나 싶고, 그래서 헌책방에서도 5000원이 아닌 2000원에 거저 주듯 팔았구나 싶습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는 2001년에 개봉을 했습니다. 이 영화가 나올 무렵 〈와이키키 브라더스〉도 나왔으며, 두 가지 모두 ‘시중 개봉관’에서는 그리 사랑받지 못하고 일찍 내려졌음에도, 몇몇 신문에서 끊임없이 소개하고 알리면서 차츰 사랑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시민모임에서 소매를 걷으며 영화 알리기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무렵 여러 가지 신문기사를 얼핏설핏 읽으며 〈고양이를 부탁해〉가 얼마나 대단할까 궁금했습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그때 회사사람하고도 보고 술동무하고도 보며 모두 세 번 극장에서 보며 눈가가 젖었기에, 〈고양이를 부탁해〉는 언젠가 디브이디를 얻건 아는 분 집에 놀러갔을 때 텔레비전으로 보건 볼 수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나날이 어느새 여덟 해. 영화가 나온 지 여덟 해 만에 비로소 집에서 옆지기와 아기와 나란히 앉아서 봅니다.

 영화에 나오는 다섯 여학생은 ‘인천에서 가장 좋다는 여상’인 인천여상을 나옵니다. 한 아이는 서울에 있는 회사에 일자리를 얻고, 한 아이는 아버지가 하는 찜질방 일을 돈 한푼 못 받으며 거듭니다. 한 아이는 중구 북성동 판자집에서 할매 할배하고 가난하게 살면서 텍스타일을 익힙니다. 다른 두 아이는 쌍둥이인데 화교학교 앞에서 길장사를 합니다.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살아가는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마친 뒤’ 만날 일이 뜸해지고, 이 가운데 서울에서 일자리 얻어 살림집(자취방)까지 서울로 옮긴 아이는 더더욱 다른 네 아이 사이에 벽이 높아집니다. 인천을 고향으로 두었으나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일자리 얻어 살아가다가 살림집도 서울에서 마련한 제 둘레 선후배 동무들 또한 하나같이 ‘영화에 나오는 이 아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천에서 놀아 보았자 뭐 놀거리가 있느냐’ 여기고, 참말로 놀거리가 없는 인천이기도 하여 전철 타고 멀리 서울로 나들이를 가 보지만, 다시 인천으로 돌아올 전철은 저녁 열 시 반 무렵이면 끊기기 때문에 얼마 놀지 못하고 곧바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인천 중구 북성동 판자집과 골목길과 북성포구 들을 찬찬히 헤아려 봅니다. 이때는 2000년일 텐데, 그 뒤로 꼭 아홉 해가 된 2009년, 얼마나 많은 모습이 남아 있는지 헤아렸을 때, 웬만한 모습은 안 남아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는 한편,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제법 많다는 데에 생각이 미칩니다. 시내버스는 달라졌고, 아이들(고등학교) 옷차림과 머리 모양은 바뀌었으며, 곳곳에 새로 들어선 아파트는 그사이에 갑작스레 늘었습니다. 새 간판을 올린 가게도 많으나 예전 간판이나 처음 간판 그대로 빛바랜 채 고스란히 이어오는 곳도 많습니다.

 두 시간 가까이 흐른 영화를 보고 나서 ‘이게 끝이야?’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옵니다. 디브이디 겉에는, 그러니까 그때 나온 영화 포스터에는 틀림없이 “스무 살, 섹스 말고도 궁금한 건 많다”고 적혀 있는데, 영화에 나오는 네 갈래 모습 아이들한테서 ‘무엇을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가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섹스 이야기’가 안 나왔을 뿐, 그러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에서는 ‘글쎄?’ 하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제 마음이 메말랐기 때문일까요. 제가 영화 보는 눈이 없어서일까요. 그러나, ‘인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과 ‘인천에서 나고 자라다가 서울로 떠난 아이들’ 삶자락은 참 잘 담아냈다고 생각합니다. 떠돌고 맴돌고 하릴없는 모습들, 힘없고 풀죽고 여린 모습들, 고등학생 때까지는 막 기운이 넘치는 듯하다가도 학교를 마친 뒤 갈 곳 모르고 할 일 못 잡으며 쓸쓸해지고 낯빛이 어두워지는 모습들은, 어쩜 이렇게 인천사람 속내를 찬찬히 그려낼 수 있으랴 싶어 놀랍니다(그러나, 임순례 감독이 이 영화를 본 느낌을 적은 글(2001년, 한겨레신문)에서도 나타나듯, 저와 제 또래와 선후배들 학교 때를 돌아보면, 영화에 나온 아이들처럼 그렇게 까르르 우하하 웃으면서 놀았던 일이나 해맑은 듯 보여진 일이 거의 없었고, 늘 무엇엔가 눌려서 어두워야 했고 학교 안과 밖에서 교사와 깡패들한테 벌벌 떨면서 살아야 했던 일들이 줄줄줄 떠오르지만). 그런데, 어쩌면 인천사람 이러한 속내를 잘 담아낸 〈고양이를 부탁해〉라기보다는, ‘풋풋하고 싱그럽던 푸른 빛깔’이 학교를 마치고 저마다 다른 곳에서 고달픈 사회살이를 하면서 칙칙하고 쓸쓸해지는 모습과 느낌을 따오려고 인천이라는 데를 빌어 오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인천 동구 만석동과 화수동, 중구 북성동과 송월동 둘레는 나라안에서 몇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가난한 도심지 동네이면서, 예부터 부두 노동자와 조개와 굴 까는 아주머니들이 어렵사리 판자집 살림을 이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라는 동화책이 나왔을 때, 이 책을 만석동 사는 동무녀석한테 선물해 주면서, 마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던 일을 떠올려 봅니다. 틀림없이 인천 만석동에서 ‘기찻길옆공부방’을 꾸리던 분이 인천 만석동이라는 데를 바탕 삼아서 살뜰히 여미어 낸 동화책이기는 하지만, 외로 치우친 눈길과 마음길 때문에 읽는 내내 거북했어요. 이야기 무대가 인천일 뿐, 인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자락’ 가운데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지, 이 삶자락으로 ‘이 땅 사람들 삶자락’과 어떻게 잇대어 이야기를 펼치려 했는지 갑갑했습니다. 만석동이며 화수동이며 송월동이며 송현동이며 송림동이며 창영동이며 금곡동이며 숭의동이며 관동이며 경동이며 유동이며 내동이며 전동이며 신포동이며 선린동이며 송학동이며 해안동이며 선화동이며 신흥동이며 도원동이며 화평동이며 항동이며 …… 코딱지 만하다고 할 만한 땅덩이가 조각조각 잘게 나뉜 이 오래된 동네 골목길은 ‘가난 = 어두움’만이 아니라 ‘가난하나 밝음’이 있고, ‘가난 = 괴로움’만이 아니라 ‘가난하기에 이웃과 더 나누는 마음’이 있으며, ‘가난 = 짜증 + 벗어나고픔’만이 아니라 ‘가난하면서 더 이웃사랑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 나름대로 이곳을 사랑하고 아끼며 살아가려는 몸부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전에 앞과 뒤와 있다고 하듯, 골목길이라는 데에도 밝음과 어두움이 있습니다. 환함과 쓸쓸함이 있고 웃음과 눈물이 있습니다. 서러움과 흐뭇함이 있고, 반가움과 못마땅함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 테두리와 울타리와 보금자리가 있는 우리 삶터입니다. 인천이든 서울이든 부산이든 대전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애틋하며 사랑스러운 이웃과 터전이 있는 한편, 고개를 돌리고 싶거나 내버리고 싶은 얄궂은 이웃과 터전이 함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화 《괭이부리말 아이들》과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는 인천이라는 데에서, 또 골목길이라는 데에서, 또한 인천 골목길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이 다니는 자그맣고 오래된 동네 학교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고 얻어서 무엇을 우리들하고 나누려고 했을까요. 무엇을 나누게 되었을까요.
 





 (2) 사진책 《수복호 사람들》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사람과 인천땅 사진만 찍는 김보섭 님이 ‘인천 아닌 곳에서 전국을 무대로’ 책을 나누는 출판사에서 처음으로 펴낸 사진책 《수복호 사람들》을 봅니다. 《청관》, 《한의사 강영재》, 《바다 사진관》 같은 사진책을 펴냈으나, 거의 눈길을 못 받았는데, 그래도 어찌어찌 ‘인천 바깥’에서 눈에 뜨이어 이렇게 야무진 사진책 하나를 세상에 내어놓게 되었습니다. 지난 2008년 4월에.

 궁금한 마음에 인터넷책방에 들어가 ‘판매지수’라는 숫자를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웬걸. ‘0’이라는 대목에 그만 입이 벌어집니다. 그래도 그렇지, 나온 지 거의 한 해가 다 되어 가는 책인데, 판매지수가 ‘0’이라니. 아니, 인터넷책방 이곳에서만 판매지수가 0일 뿐, 다른 데에서는, 또 여느 동네책방에서는 사랑받고 있을지 모르는 노릇이겠지요.

 영화 〈고양이가 부탁해〉가 나왔을 때, ‘〈고양이를 부탁해〉 살리기 인천시민모임’이 최원식 교수를 앞장세워 일어나기도 했다는데, 동화책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나왔을 때 ‘느낌표 책’으로 뽑히고 ‘기찻길옆공부방’이 전국으로 널리 알려지기까지 하며 크게 도움을 받았는데, 정작 인천이라는 데에 뿌리를 박고 인천이라는 데에서 밑바닥 삶을 꾸리던 사람들 자취가 담긴 사진책 《수복호 사람들》은 푸대접도 찬밥대접도 아닌 똥대접이라니.

 〈고양이를 부탁해〉를 아꼈다는 사람들 손길이라면,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눈물겹게 읽었다는 눈길이라면, 《수복호 사람들》에 담긴 바닷가마을 낮은자리 사람들 이야기에 조곤조곤 말을 붙이고 쫑긋쫑긋 귀를 세우며 토닥토닥 어루만져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는지. 아니, 이런 생각은 나 혼자만 하는 풋생각일는지.


.. ‘조개 캐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1998년 인천 연수동으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연수동은 갯벌을 흙으로 메워서 그 위에 만든 도시이다. 예전에는 물때에 맞춰 소달구지를 타고 나가 조개를 캐던 갯벌이었으나 삶의 형태가 바뀜에 따라 소 대신 트랙터를 타고 나가 조개를 잡던 곳이다. 인천이 고향인 나는 바닷물이 들어오기 전까지 끈으로 묶은 장화를 신고, 양은 ‘다라이’를 끌고 다니며 열심히 조개를 캐던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느꼈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동구에 있는 만석동과 화수동엘 갔었다. 아직도 기찻길 옆에는 판잣집들이 남아 있고, 오래된 공장과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서민들의 애환이 뒤엉켜 있는 곳, 그곳에는 이북 피난민들이 내려와 굴이나 조개를 캐던 생활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고,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비닐로 벽을 삼은 작은 굴막에 들어앉아 끊임없이 굴을 까는 사람들의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곳은 인천의 과거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곳이었다 ..  (찍은이 말)
 





 찌뿌둥한 하늘이 비를 뿌릴 듯 말 듯한 낮나절, 옆지기 심부름을 받아 생협 나들이를 다녀오는 길에 자전거머리를 북성동으로 돌립니다. 답동에서 인현동으로 넘어가고,인현동에서 전동과 화평동을 스친 다음, 송월동1가로 접어듭니다. 그러면서 만석동과 잇닿은 북성동1가로 들어섭니다. 기차길과 고가도로가 맞닿아 있는데다가, 저 철길과 고가도로 건너편으로는 하늘을 뒤덮은 큰 굴뚝 공장이 가까이 바라다보이는 북성동에서 자전거를 내려, 고가도로로 올라가 보고, 천천히 골목을 거닐어 봅니다. 큰 개가 컹컹 짖어 더 못 들어가는 골목에서는 돌아나오고, 막혀 버린 골목에서도 돌아나옵니다. 굴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허물어져 가는 집을 쳐다보다가, 뒷짐 지고 걷는 할매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이다가, 깃들인 사람 없어 비어 있는 집과 가게 앞에서 괜히 서성이다가, 조용히 사진 몇 장 찍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동일방직 들머리에서 잠깐 멈추어 다시 한 번 골목 안쪽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나옵니다. 우람한 공장과 창고 옆으로 올망졸망 붙어 있는 오래 묵은 집들 옆으로 자전거를 가볍게 스쳐 지납니다. 엊저녁에 본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떠올려 봅니다. 용케 이 동네 삶터를 잡아채어 참으로 살뜰하게 담아냈구나 싶으면서, 이런 삶터를 이런 동네를 이런 골목길 사람들을 무대로 삼은 생각바탕에 무엇이 있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고가도로에 올라서서 높직한 방음벽을 옆으로 하고 걷는 동안, 이 ‘산업도로 구실’ 고가도로를 지나는 컨테이너짐차와 원목짐차와 자동차짐차가 지나갈 때마다 덜덜 떨립니다. 고가도로 한켠에 서서 동네를 사진으로 담으려 하다가도 온몸이 덜덜 떨려서 도무지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저 무거운 짐차가 무시무시하게 달리는 데에도 고가도로가 무너지지 않으니 용합니다. 그러면 이 고가도로 밑에서 살아가는 북성동 사람들과 만석동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한두 해도 아닌 기나긴 세월을 끔찍한 자동차 소음과 매연과 먼지들에다가 공장 소음과 매연과 먼지를 마시면서 굴을 까고 부두노동자로 일하고 중공업 공장과 유리공장과 제철소와 목재소에서 일했는데, 이 사람들 삶은?


.. 조그만 배로 인천 근해(경기도)에 조그마한 섬(무인도)을 다니며 굴(조개)을 채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복호를 타고 다니시는 아주머니들은 대부분 이북에서 가족들과 피난 나온 분들이었고, 종종 전라도와 충청도 등에서 어렵게 사시다가 인천으로 올라오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이 아주머니들은 인천에서 굴을 따고 또 밤을 새워 굴을 까다가 연안부두에 나가 상인에게 팔고, 그 돈으로 쌀과 보리를 사서 생계를 이어오신 분들입니다. 그들이 싸 온 주먹밥은 보리쌀이 전부였고, 밀기울(밀겨)을 버무린 찬밥을 더운물에 말아 먹곤 하였습니다. 물론 당시는 경제가 어려워 온 국민이 어렵게 지내던 시절이었고, 수복호의 선장을 비롯하여 그 선박을 타고 다니는 아주머니들 모두가 어렵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다고 해서 불행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선장과 아주머니들 모두 한식구처럼 지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걱정해 주고 도와주고 슬픈 일에는 서로 위로해 주며 웃음을 잃지 않고 지내 왔습니다 ..  (머리글 / 수복2호 선주 최영식)


 지금 살고 있는 집이 4월이면 계약이 끝나는데, 만석동이나 북성동, 또는 송월동이나 화수동, 또는 화평동이나 송현동으로 옮겨 갈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남들은 살기 싫다고 나오는 동네이지만, 그래도 이 동네에는 아직 보증금 50에 월세 25만 원짜리 방, 보증금 100에 월세 15만 원짜리 방, 보증금 200에 월세 10만 원짜리 방이 있어요. 저는 보증금 100에 월세 10만 원짜리 방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4342.2.2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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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의 인간 -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경험에 대한 기록 존 버거 & 장 모르 도서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차미례 옮김 / 눈빛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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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느낌글은 예전에 한 번 썼지만, 이번에 세 번째로 읽으면서 다시금 틀을 갖추어서 써 보기로 한다... 



 이 책 하나 73 ― 정규직과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는 똑같다
 : 존 버거+장 모르, 《제7의 인간》



- 책이름 : 제7의 인간
- 글 : 존 버거
- 사진 : 장 모르
- 옮긴이 : 차미례
- 펴낸곳 : 눈빛 (2004.11.11.)
- 책값 : 12000원



 (1) 동네와 집과 사람


 제가 동네에서 즐겨찾는 구멍가게 할배는 지난해 가을께 가게에 셈틀 한 대를 들여놓았습니다. 아이들이 예전에 쓰던 낡은 녀석을 물려받으셨는지 새로 장만하셨는지 모르지만, 구멍가게 할배는 한동안 당신 자리 옆에 멀거니 모셔 두기만 하더니, 어느 때부터인가 셈틀에 들어 있는 놀이 가운데 하나인 ‘프리셀’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여느 때에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며 손님을 기다리지만, 요사이는 셈틀놀이에 푹 빠져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 이민노동자들은 노동 인력이 부족한 곳으로 자기의 노동력을 팔러 온다. 그는 어떤 한 가지 종류의 일을 하도록 허락을 받는다. 그에겐 아무런 권리도 주장도 없으며, 그 일자리를 채우는 것밖에는 현실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동안은, 돈도 받고 숙소도 제공된다. 더 이상 그것을 안 할 때에는, 그는 처음에 출발한 곳으로 되돌려 보내진다. 이민을 가는 것은 인간들이 아니라 기계 관리 인부, 청소부, 땅 파는 인부, 시멘트 섞는 인부, 세탁부, 공원 따위이다 ..  (62쪽)


 구멍가게 할배는 지금 동네 골목길 안쪽에 장만해서 살고 있는 집이 1층과 2층을 더해서 100평쯤 된다고 하는데, 이 집을 장만하여 살기까지는 오래도록 땀흘리고 애썼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할배가 들려주는 말도 있지만, 말씀으로 들려주지 않아도 몸으로 느낍니다. 어느 골목집 이웃이 안 그러겠습니까마는, 인천에서도 연수구나 송도새도시와 청라새도시 같은 데, 그리고 웬만한 서울하고 견주면 터무니없이 싼 집값이요 땅값이라고 할 테지만(한 평에 200만 원도 잘 안 쳐 주니), 이렇게 싼 땅에서 마련한 싼집이라고 하여도 돈 10원을 아끼고 갈무리하면서 살아가는 긴 세월 끝에 장만한 집이라 남다르다고 느낍니다. 당신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집이 아닌 당신 손으로 일하여 일군 집이라, 가게며 집이며 둘레 골목길이며 쓰레기나 비닐봉지 하나 떨어지거나 구르는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몇 가지 안 되는 물품을 늘여놓고 있어도 흐트러짐 하나 없고, 가게 유리문이며 간판이며 뿌옇게 먼지가 앉은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면, 할배 구멍가게뿐 아니라 둘레 곳곳에 자리한 다른 구멍가게도 형편이 비슷합니다. 어수선하거나 지저분하게 차린 구멍가게는 한 군데도 없습니다. 고작 보리술 한두 병에 주전부리감 안주 한 점쯤 사러 가는 구멍가게입니다만, 이와 같은 매무새에는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이제 당신들은 나이도 나이이고 살림 걱정이 따로 없으니, 구멍가게에서 셈틀놀이만 하거나 텔레비전 연속극으로 세월을 보내실 수 있을 텐데, 오랫동안 몸에 익은 버릇 그대로 빈병을 모으고, 손수 자전거로 물건을 실어 오며, 당신 집 페인트 바르기나 손질을 누구한테 맡기지 않습니다. 가게 옥상에는 당신들 나름대로 옥상 텃밭을 일구고, 눈이 오면 골목길 눈을 스스럼없이 치우면서 살아갑니다. 모든 일을 그예 즐겁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서울 종로구 평동 안쪽 골목집에서 살 때에, 그 집 임자인 할배는 ‘낡은 집 손질’을 꼭 당신 스스로 했습니다. 나무로 지은 적산가옥이라 뒷간이 없고 쥐가 함께 사는 집이었는데, 일꾼을 사지 않고 당신이 손수 시멘트와 모래와 물을 섞어 공사를 했고, 전기공사니 보일러공사니 꼭 손수 하면서 세입자가 바라는 대로 해 주었습니다. 온도가 많이 떨어진 겨울철에는 새벽같이 나와서 수도가 얼지 않게 틀어 놓으라 부르고, 어쩔 수 없이 수도가 얼면 이를 녹이려고 함께 끙끙댔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지금 달삯 내며 살고 있는 집 임자인 할배는 아무런 집일을 할 줄 모릅니다. 오로지 돈만 아는 분입니다. 늦은밤 아기를 재우고 고단한 다리 쭉 뻗고 잠들면서 도무지 이 집에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며 지난 일을 떠올려 보곤 하는데, 누구나 어릴 적부터 길들고 익숙해 온 대로 늙어서까지 살지 않느냐 싶고, 자기 삶을 가꾸는 손은 자기가 움직이는 손이지, 돈으로 사서 쓰는 손이 아님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리 살림이 확 피면서 우리도 누군가한테 방 한 칸 내주며 달삯을 받을 집임자가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오래도록 세입자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아름다운 집임자가 되자면 어떠어떠해야 하는가를 몸으로 느낍니다.


.. 그들은 제일 힘들고 제일 하기 싫고 보수가 적은 직종, 예를 들어 독일의 플라스틱ㆍ고무ㆍ석면 공장 같은 데서 일한다. 콜로뉴에 있는 포드 공장의 일관 생산 라인에서는 40퍼센트의 노동력이 이민들이며, 프랑스의 르노 자동차의 제작공장에서는 40퍼센트, 고텐부르크의 볼보 공장은 45퍼센트가 이민들이다. 살기 위해서 그는 자기 목숨을 팔 수도 있다 ..  (90쪽)


 자전거를 타면 조금 멀리까지, 두 다리로 걷자면 한 시간쯤 되는 거리까지 골목마실을 합니다. 이때마다 우리 식구는 낯익은 길을 새삼 둘러보기도 하고 낯선 길에 살금살금 첫발을 들이기도 합니다. 이때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르게 꾸리는 집살림을 느끼는데, 흔히 말하는 ‘자동차 들어가지 못하는’ 어둡거나 허름하다 싶은 뒷골목이 ‘자동차 씽씽 내달리거나 우뚝 서 있는’ 제법 넓고 밝으며 번듯번듯 올라선 건물 있는 큰길보다 깨끗하곤 합니다. 잘못된 생각으로 바라보면 뒷골목은 으스스하고 꾀죄죄하다는 느낌이지만, 골목동네에서 살아 보면, ‘사람 사는 동네’가 으스스하고 꾀죄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동네, 해마다 다른 데로 옮겨 살아야 하는 동네, 끝없이 재개발 문제에 부닥쳐야 하는 동네, 뿌리내리며 사는 동네가 아닌 잠깐 머물다가 가거나 구경꾼이 스치고 지나는 동네가 으스스하고 꾀죄죄합니다.


.. 예비노동력의 대부분이 이민노동자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들은 필요할 때에는 ‘수입’을 해 올 수 있고, 일시적으로 남아돌 경우에는 ‘수출(귀국시키는 것)’을 할 수가 있으며, 이민노동자들은 정치적인 권리도 없고 정치적인 영향력도 거의 없기 때문에 아무런 정치적인 충격도 받을 필요가 없다 ..  (147쪽)


 어느 때에는 뒷골목 으슥하다 싶은 곳에서 담배 태우는 아이들을 마주칩니다. 이 아이들이 오죽 담배 태울 데가 없으면 이런 데서 태울까 싶기도 하다가는, 학교 뒷간에서도 태우는데 이런 골목이야 아무것도 아닐 테지 싶고, 왜 이처럼 뒤로 숨어 가면서 태우게 될까 안타깝습니다. 겉멋으로 태우는 아이들이 있지만, 속이 타고 애가 타서 태우는 아이들이 틀림없이 있기에,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속태우거나 애태울 일을 처음부터 일으키지 않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골목마실을 하며 아이들 매무새를 살피면, 아이들은 제 어버이 하는 대로 고스란히 보여주거나 제 이웃 하는 대로 꾸밈없이 드러납니다. 늘 보는 모습대로 배우고, 늘 겪는 대로 익숙해지며, 늘 치르는 대로 버릇이 됩니다. 얼음과자 봉지를 휙휙 버리든,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든, 아이들 어버이나 이웃 어른이 하는 양하고 똑같습니다. 아이들 어버이나 이웃 어른이 당신 집 둘레 삶터를 아름다이 가꾸는 매무새였다면, 아이들 또한 동네에서 아무렇게나 다니지 않고 얄궂은 짓을 함부로 일으키지 않습니다.


.. 고용주들은 프롤레타리아보다도 낮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의식화되면 불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노동자도 너무 오래 체재하지 않도록 외국인 노동력을 끊임없이 ‘로테이션’시킬 계획을 세운다 ..  (154∼155쪽)


 그나저나, 학교옷을 입고 골목 안쪽에서 담배 태우는 아이들은 담배를 어디에서 샀을까요. 이 아이들은 학교옷을 벗으면 더는 골목 안쪽에서 담배를 안 태우고 떳떳하게 큰길을 거닐며 태우게 되는데, 열여덟과 열아홉이라는 숫자 사이에는 무엇이 가로놓여 있을까요. 열여덟이라 하여도 ‘학생’이라는 꼬리표가 떨어진 아이들은 ‘학생’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있는 아이들하고 무엇이 다를까요. 담배를 태우는 아이와 담배를 안 태우는 아이는 어떻게 다를까요. 군대에서 담배를 태우는 사병과 담배를 안 태우는 사병은 어찌 다를까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담배 태우는 일이 좋지 않다면, 아이들과 어울리는 어른들도 학교에서는 담배를 태우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학교 밖에서도 담배를 태우지 말아야 옳습니다. 나아가, 옳지 않은 담배가 우리 손에 쥐어지지 않도록 나라에서는 담배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어른들은 학교에서 버젓이 담배를 태우고, 학교 바깥에서도 거리낌이 없으며, 나라에서는 담배 팔아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입니다.
 





 (2) 저잣거리와 헌책방과 사람


 아기를 안고 저잣거리 마실을 할 때면, 우리가 물건을 한 번도 안 산 집 할매도 아는 척을 하면서 “아이고, 아기가 벌써 그렇게 컸어요? 이뻐라.” 하면서 주름진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면서 들여다보십니다. 우리한테는 살 물건이 없어 그냥 지나치게 되었지만, 늘 그 자리에서 수십 해 세월을 보낸 할매한테는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라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고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 마주치는 가운데 시나브로 이웃처럼 느끼게 되었구나 싶습니다. 저잣거리 끝에 있는 구멍가게 할매와 할배는 손뼉까지 치면서 “어머 얘 좀 봐.” 하면서 좋아하십니다.

 엊저녁, 옆지기가 성가대 연습을 하러 성당에 갔는데, 집에서 홀로 아기를 보다가 아무래도 엄마젖을 자꾸 찾기에 아기를 포대기에 폭 싸서 슬쩍슬쩍 골목마실 조금 하다가는 성당으로 찾아가 엄마젖을 물렸습니다. 성가대 봉사를 하는 분들은 하나같이 아줌마 아저씨 또는 ‘이제 막 할머니 소리를 듣는’ 분들입니다. 당신들은 입으로는 노래를 부르면서 고개는 오른쪽으로 돌리며 아빠한테 안긴 아기를 보고 눈웃음을 치거나 젖을 무는 아기를 뿌듯해 하는 눈빛을 보냅니다.


.. 그들은 자기들의 노동을 제공하러 온다. 그들의 노동력은 기성품이다. 이제부터 그 노동력 덕분에 생산에 이익을 얻게 될 공업화된 국가들은 그 노동력을 생성시키는 비용은 전혀 부담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뿐 아니라 중병에 걸린 이민노동자나 너무 늙어서 일할 수 없게 된 이민노동자를 부양하는 경비 역시 부담하지 않는다. 도시화된 국가의 경제에 관한 한, 이민노동자들은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태어나지도 않으며, 양육되지도 않으며, 나이 먹지도 않으며, 지치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 하나의 기능-일하는 것-을 가질 뿐이다. 그들의 삶의 다른 모든 기능들은 그들의 출신 국가의 책임이다 ..  (64∼65쪽)


 때때로 저한테 ‘무슨 책 있어요?’ 하는 전화가 걸려옵니다. 전화를 거는 분들은 당신이 누구인지 한 번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마치 ‘헌책방 장사를 하는 듯’ 깔아 놓고 말문을 엽니다. 그러나 저는 헌책방 나들이를 즐겨다니면서 헌책방 사진을 찍고 헌책방 이야기를 글로 옮겨 나누는 일을 할 뿐입니다. 지금 하는 일은 동네에서 도서관을 꾸리고요. 오늘도 한참 바쁘게 일하는데 ‘엘피판 있어요?’ 하는 전화가 걸려옵니다. 그래, “저희는 도서관입니다.” 하고 대꾸하니, ‘그러면 엘피판 살 수 있는 데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합니다. 제 전화번호를 아셨다면 ‘사진책 도서관을 하는 사람 일터’로 알게 되었을 텐데, 이런 이름은 들여다보지 않고 오로지 ‘자기가 바라는 물건만을 찾’습니다.

 그래도 저는 헌책방 장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니 이쯤에서 말을 끝낼 수 있습니다. 헌책방 장사를 하는 분들은 ‘손님 되는 이들이 얼마나 나이가 많고 적은지’ 알 길이 없으나 으레 말을 깝니다. 다소곳하거나 부드러운 말씨로 묻는 사람이 드뭅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그저 책이 좋아 헌책방을 나들이하는 사람은 헌책방 일꾼한테 ‘무슨 책이 있나요?’ 하고 묻지 않습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서 조용히 책을 살펴보다가는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골라서 사고, 마음에 드는 책이 없으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조용히 나갑니다.


.. 이민을 가는 노동자들은 원래 태어난 나라에서 일자리가 없이 실직 상태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나라 그 사회가 그들의 양육에 상당한 액수를 투자했다는 사실을 번경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 지금까지 집계된 바로는, 한 이민노동자들의 양육, 그가 스무 살에 이르기까지 생존을 유지하는 데 그의 조국의 국민경제가 부담하는 액수가 약 2천 파운드에 이른다. 한 명 한 명의 이민이 도착할 때마다, 저개발된 경제권에서 개발된 경제권에 대해 그만한 액수를 희사하는 셈이다. 게다가 공업화된 나라가 차지하는 저축액은 또 훨씬 막대하다. 그곳의 좀더 높은 생활 수준으로 계산해 본다면, 그의 조국에서 열여덟 살짜리 노동자를 ‘생산해 내는’ 비용은 1인당 8천 파운드에서 1만6천 파운드는 된다. 이미 다른 곳에서 생산되어 온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은, 도시화된 국가가 매년 8백억 파운드 이상을 저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계를 가진 자들에게, 인간들이 주어지는 것이다 ..  (72∼73쪽)


 며칠 앞서 동네 헌책방에 들렀을 때입니다. 헌책방 아주머니가 밖에서 누군가한테 큰소리를 치면서 한소리를 합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헌책방 문간에 쌓아 놓고 있던 만화책 꾸러미를 슬그머니 들고 튀려다가 붙잡혔답니다. “야, 너희들 그거 왜 가져?” 하고 아주머니가 큰소리를 치니, “지금은 돈이 없어서 이따가 가지고 오려고요.” 하고 둘러대더라고, 그래서 “너희들이 책을 가지고 싶으면 너희들이 일해서 번 돈으로 사 가지, 그렇게 남의 노동을 가로채도 돼?” 하면서 따끔하게 한 마디를 한 다음 돌려보냈다더군요.

 헌책방 아주머니는 이 아이들을 경찰서로 넘길 수 있었고, 더 따끔하게 나무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따끔한 소리를 들었다 한들, 다른 이 물건을 슬쩍하려던 그 마음이 바로잡힐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 아이들은 어찌하다가 다른 이 물건을 슬쩍해서 제 것으로 삼고프도록 마음이 거칠어지고 무너졌을까 모르겠습니다. 참말 돈이 없었는지, 아니면 헌책방 물건은 아무나 그냥 가져가도 괜찮다고 생각을 했는지.


.. 1973년 초에 네 명의 스페인 출신 노동자들이 노동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면서 반나절 동안 파업을 벌였다. 그들끼리만. 그들은 즉각적으로 해고됐다. 일자리가 없으니 그들은 그 나라에 남아 있을 권리가 없었다. 그들은 강제로 스페인으로 송환되었다. ‘바람직하지 못한 극렬분자’라는 그들의 기록이 틀림없이 스페인 당국에 통지되었을 것이다. 스위스의 노조들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176쪽)


 곧 새로운 학년을 맞이합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언제부터인가 ‘경제 불황 속 헌책방 찾는 시민들’이니 ‘새책 한 권 값으로 두어 권 살 수 있다’느니, ‘파격 할인으로 불황 넘는다’느니 ‘불황 속 이색 호황’이라느니 하는 판에 박은 기사가 드문드문 나옵니다. 이런 기사에서는 한결같이 헌책방 헌책 하나를 ‘싼 물건’으로만 여깁니다. ‘마음밭을 살찌우는 숨어 있는 책’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헌책방이 왜 생겨나게 되었고, 헌책방에는 어떤 사람들이 찾아오고, 헌책방 일꾼은 어떤 책을 캐내어 갖추는지를 곰곰이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여느 때에 헌책방을 찾아가 보지 못한 탓이라고 느낍니다. 여느 때에 헌책방 나들이를 했다면 해마다 판에 박은 기사를 쓰는 일은 없을 테고, 사람들이 헌책방에서 어떤 맛과 멋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못 보는 일은 없을 테지요.

 이와 똑같이, 신문사 기자들이니 방송사 피디들은 여느 때에 도서관 나들이를 못합니다. 안 한다고 해야 할까요. 일에 쫓기고 너무 바쁘다고들 하니까. 이리하여 우리 나라 도서관 형편이 어떠하고 어떤 문제가 있으며 어떻게 손질하며 고쳐나가야 하는가를 다루지 못합니다.

 좀더 살피면, 헌책방과 도서관 이야기뿐 아니라, 우리 세상사람들 이야기를 제대로 다루어내지 못합니다. 우리 삶터 이야기를 깊이있게 되씹어내지 못합니다. 우리 나라와 겨레에 닥친 이야기를 한결 널리 꿰뚫어내지 못합니다. 모두모두 여느 때에 온몸으로 껴안지 않기 때문이며, 여느 자리에서 온마음으로 눈여겨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녀평등 문제라든지, 군대폭력 문제라든지, 막개발 문제라든지, 서민들 일자리 문제라든지, 이주노동자 문제라든지, 국가보안법 문제라든지, 또 다른 어떤 문제라든지, 뻥뻥 크게 터져야만 가까스로 눈길을 보냅니다. 뻥뻥 크게 터지지 않으면 눈길을 두지 못합니다. 뻥뻥 크게 터졌더라도 얼마쯤 시간이 흐르면 또다시 눈길을 거두어들여, 일이 제대로 풀리건 풀리지 않건 아랑곳하지 않고 맙니다.
 





 (3) 《제7의 인간》과 ‘없는 사람’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경험에 대한 기록’이라는 이름이 자그맣게 붙은 사진이야기 《제7의 인간》을 세 번째 읽습니다. 1991년에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소개된 이 책은 2004년에 오랜만에 다시 빛을 보았습니다.

 존 버거가 글을 쓰고 장 모르가 사진을 찍은 《제7의 인간》은 1970년대 첫머리 유럽 이야기이기에, 2009년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서른 해도 훌쩍 넘은 옛날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만, 오늘날 우리 삶터를 돌아보니, 숫자와 나라이름과 사람이름만 고치면 꼭 우리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터키와 스페인과 그리스와 포르투갈과 ‘유럽에서 가난하다고 하는 나라’에서 ‘유럽에서 잘산다고 하는 나라’인 스위스와 프랑스와 독일과 스웨덴 들로 ‘몸팔러 가는’ 이야기가 담긴 《제7의 인간》인데, 2009년 우리 나라에는 몽골이며 티벳이며 중국조선족이며 필리핀이며 우즈베키스탄이며 버마며 네팔이며 스리랑카며 터키며 인도며 …… 수많은 나라에서 ‘몸팔러’ 들어오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통계가 잡히지 않으나 적어도 30만이 넘는 이주노동자가 한국땅에 있다고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한 사람도 빼놓지 않는다. 그는 이 마을을 평생 동안 알고 있었다. 떠나는 순간에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강도는 거의 그의 의지력만큼이나 강력하다. 마을을 떠남으로써, 그는 스스로 그런 느낌을 자초한 것이다. 그에 따라 일어나는 감정의 혼란은 많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가 돌아올 때 그의 삼촌은 살아 계실까? 작별을 고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따르는 일이다. 그가 승리해서 돌아올지 패배해서 돌아올지 누가 알 것인가? 도시가 베풀어 주는 것은 거기서 성공하는 사람들에게지, 실패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건 아니다 ..  (34∼35쪽)


 우리 나라에도 제법 ‘이주노동자’ 인권을 말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정규직’ 인권을 말하는 목소리와 견주면 거의 안 들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규직’ 인권을 말하는 목소리와 대면 하나도 안 들린다고 할 수 있어요.

 모두 똑같은 노동자일 뿐인데, 우리 스스로 ‘정규직-비정규직-이주’ 이렇게 갈라 놓습니다. ‘이주’노동자라 하여도 나라에 따라 가릅니다. 지금은 ‘정규’일는지 몰라도 앞으로 어느 날 ‘비정규직’으로 바뀌거나 자기 스스로 ‘이주’노동자가 되어 나라밖으로 떠나야 할지 모르는 데에도, 서로 어깨동무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살피면, 노동자가 제 대접을 받도록 하지 않는 얄딱구리한 사업주한테 말썽거리가 있습니다만, 노동자가 빼앗긴 권리를 되찾도록 애쓰지 않는 안타까운 나라한테 골칫거리가 있습니다만, 사업주와 정부를 탓하기 앞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껴안지 못합니다. 곁에 있는 이웃이 아파할 때 손을 내밀지 못하고, 살가운 동무가 눈물을 흘릴 때 고개를 돌립니다.


.. 이민노동자들에게 있는 유일한 현실은 오직 일하는 것과 그에 뒤따르는 피로뿐이다 ..  (185쪽)


 책으로만 읽는 《제7의 인간》일 수 있습니다. 책이 아닌 ‘내 이야기’로 받아들일 《제7의 인간》일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입니다. 받아들이는 그릇 나름입니다. 받아들여 움직이려는 우리 몸뚱이 나름입니다. (4342.2.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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