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동네
유동훈 글.사진 / 낮은산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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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골목’을 사진으로 찍을 때
 [찾아 읽는 사진책 12] 유동훈, 《어떤 동네》(낮은산,2010)


 인천 동구 만석동에는 ‘기차길 옆 공부방’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아이들하고 어우러지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유동훈 님이 사진으로 동네 이야기를 담은 책 《어떤 동네》를 내놓았습니다. 유동훈 님은 인천 동구 만석동 가난한 아이들 삶을 바라보면서 “어떤 아이는 노동자로 성장해 조선소에서 계약직 노동자로 용접을 한다. 또 어떤 친구는 특수교사의 꿈을 꾸고, 어떤 친구는 가게의 점원으로 일을 하며 성실히 자신의 장래를 설계한다(24쪽).”고 이야기합니다. “이곳(만석동)은 볼품없고 가난한 동네. 빼앗기고 힘없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더욱 약하고 여리다(20쪽).”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아이와 어른이 있으니 가난한 동네라 할 만하고, 이 아이들은 계약직 노동자도 되고 대학생도 되며 군인도 됩니다. 그런데 이곳 아이들과 어른들은 다른 동네하고 견주면 돈이 좀 적고 집이 좀 비좁다뿐, 한 사람이 살아가며 누릴 모든 것이 없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한테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기에 ‘기차길 옆 공부방’이 태어날 수 있지, 사랑 한 줌 없는 데에 공부방이든 예배당이든 절집이든 구멍가게이든 태어나지 않습니다.

 가난하기에 도와주어야 하거나, 도와주어야 하기에 여는 공부방이 아닙니다.

 가난하다면, 돈이 적어 가난한 사람이 있다 할 테고, 마음이 텅 비어 가난한 사람이 있다 할 테지요.

 흔히들 ‘공부방’이라 하면 가난하다고 일컫는, 아니, 돈없고 힘없으며 이름없는 사람들 동네라 하는 곳 아이들을 도우려는 마음으로 엽니다. 아무래도 돈이고 힘이고 힘이고 없으니까 우리 사회 따순 손길이 적게 뻗친다 할 만하고, 의료 혜택이나 교육 혜택을 덜 받는데다가, 아이들 어버이는 돈벌러 집을 오래 비울 테니 아이들이 심심하거나 걱정스럽다 할 만합니다. 그러면, 돈 잘 버는 동네 아이들은 어버이하고 오래오래 따숩게 보내려나요. 서울 강아랫마을 아이들은 제 어버이랑 얼마나 오랜 나날 오랜 동안을 보내려나요. 이 마을 아이들은 제 또래나 손위나 손아래 동무하고 얼마나 어울리려나요.

 어버이 되는 어른들은 아이를 낳았으니 아이하고 더 오래도록 어울리면서 아이들 가르치는 몫을 도맡아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어버이 되는 어른들이 바깥에서 돈을 더 벌어들여야 아이들을 한결 잘 키울 수 있다거나, 아이들을 여러 학원이나 학교에 넣는다고 아이들이 더욱 씩씩하고 슬기롭게 자란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땅바닥에 손가락이나 돌멩이로 죽죽 금이나 동그라미를 그리며 하루를 보낸다 해서 심심하기만 하거나 딱해 보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학교를 열어 꾸리는 삶도 좋으나, 학교 없이 꾸리는 삶 또한 좋습니다. 지내는 사람 스스로 어떠한 삶인가에 따라 즐거운지 안 즐거운지가 갈립니다. 살아가는 사람 스스로 어떠한 넋인가에 따라 아름다운지 안 아름다운지가 나뉩니다. 공부방은 틀림없이 좋은 쉼터일 테고, 뒷간 없는 비좁은 집 자그마한 방 또한 훌륭한 쉼터입니다. 예배당은 어김없이 너그러운 만남터일 테며, 햇볕 반 토막 곱다시 깃드는 비좁은 골목 한켠 또한 재미난 만남터입니다.

 가난함이든 가멸참이든 죄악도 아니요 빛줄기도 아닙니다. 가난한 삶이 구지레할 수 없고, 가멸찬 삶이 지저분할 수 없습니다. 골목집을 어둡거나 사라져 가는 모습으로 깎아내릴 까닭 없고, 아파트를 밝거나 새로운 모습으로 추켜세울 까닭 없습니다. 골목집을 살가웁거나 더 따스한 추억으로 돌아볼 까닭 없고, 아파트를 차디차거나 무시무시한 돈벌레로 내리깎을 까닭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맞아들이면서 오붓하게 손을 잡을 때에 즐겁습니다. 마을솥을 걸어도 좋으나, 전기밥솥을 써도 좋습니다. 너른터에서 줄넘기를 해도 좋고, 좁은터에서 공기놀이를 해도 좋습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담아도 좋지만,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저 입으로만 읊으며 그날그날 잊고 다시 떠들고 또 잊으며 새삼 주워섬겨도 좋습니다.

 《어떤 동네》를 내놓은 유동훈 님은 말합니다. “미술가들이 가난한 동네의 벽과 집을 꾸민다며 그림 작업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생활과 예술을 결합한다는 의도에 수긍 가는 면도 없지 않지만 골목을 지나다 보게 되는 숨겨진 동네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면 이벤트로 진행되는 전문 예술가들의 그 작업이 동네를 아름답게 꾸민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109쪽).”고.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미술가이든 예술가이든 제아무리 좋다는 뜻을 내세운달지라도 골목동네 살림집 벽에 그림을 죽죽 그리는 일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으며, 조금도 훌륭하지 않고, 터럭만큼도 멋스럽지 않습니다. 그림쟁이들이 할 일은 살림집 벽에 섣불리 페인트를 발라대는 일이 아닙니다. 그림쟁이들은 동네를 건성건성 구경하듯 지나친다면, ‘구경꾼으로 지나친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눈길이 아니기 때문에, 구경꾼 눈길로 지나치는 동안 바라보며 느낀 ‘좋은 삶’을 당신들 붓끝으로 좋게 담아서 즐기면 됩니다. 예술쟁이들은 동네에 뿌리내릴 방 하나 얻어 지낸다면, ‘한동네에서 함께 살아간다’고 해서 꼭 좋은 이웃이 되지는 않기 때문에, 한 동네 사람으로 살아내는 동안 마주하며 느낀 ‘좋은 삶’을 당신들 몸짓으로 좋게 실어서 즐기면 됩니다.

 이름을 남기려는 삶이 아닌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내 이름이 남을 만한 일을 한다면 미술도 예술도 사진도 창작도 교육도 사회운동도 봉사활동도 아닙니다. 손이 시려 죽을 판인데도 그물을 꿰매고 굴을 까는 삶을 꾸리며 하루하루 밥벌이를 해 온 이들을 가만히 보자면, 참 고단하거나 괴롭거나 슬퍼 보일 만합니다. 매캐한 공장 연기를 잔뜩 들이마시면서 공동뒷간에서 한참 줄을 서야 하는 삶이란 더없이 팍팍하거나 메마르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삶을 왜 ‘가난’이라는 굴레로 옥죄며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잘 모르겠습니다. 제 어린 나날 살림살이가 제 동무보다 나았는지 모자랐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 어버이 살림살이는 이웃보다 나았다면 나았고, 모자랐다면 모자랐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저런 느낌을 하나도 모릅니다. 살림살이가 나았더라도 어릴 적부터 아버지하고 말을 섞은 일은 거의 없습니다. 살림살이가 나았달지라도 어머니는 하루 내내 집안일뿐 아니라 할아버지 병수발에다가 부업에 바빴습니다. 제 동무들 집에 놀러가 보면, 동무들 어머님은 우리 어머니처럼 언제나 부업을 하셨고, 집안일이든 집안 어르신 병수발이든 바쁘셨습니다. 누구네 아버지가 한 달 일삯을 몇 만 원 더 번다고 더 잘난 살림이 아니지만, 누구네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 혼자 일해서 한 달 살림돈이 몇 만 원 더 적다고 더 못난 살림이 아닙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이웃한테서 얻습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이웃한테 나눕니다. 곗돈이라는 이름으로 돈이 돌기도 하지만, 무슨 성금이다 무슨 회비(육성회비 따위)다 하며 돈을 갖다 바쳐야 할 때면 으레 집집마다 돈 빌러 다니느라 바빴습니다. 한 집에서 빌린 돈이 또 다른 집으로 빌려지는 일이 잦고, 반찬통이나 접시에 고작 김치나 지짐이 몇 점 담았을 뿐인데 여러 집을 쉬 돌 뿐 아니라, 아이들 옷은 푸름이 나이가 되어도 온갖 집을 거치곤 합니다. 어느 집 어린이이든 두어 집이건 서너 집을 거친 옷을 입기 마련입니다. ‘내 옷’이 아니라 ‘함께 입는 옷’입니다. 딱히 어느 단체나 시설이나 동회나 관청에서 도와주러 온 일이 없으나, 애써 도와주라 바란 적이 없습니다. 쪼물딱쪼물딱 쪼그랑뱅이 사람들끼리 쪼물쪼물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림쟁이라 하든 예술쟁이라 하든, 벽그림 그리기가 내키지 않는 까닭은 이런 데에서 비롯합니다. 뭣보다 삶이 없는 한편, 하나도 안 예쁘거든요. 그나마 예쁘게라도 그리면 낫지요. 예쁘게 그릴 줄 모르면서 페인트 찍찍 발라 봤자 한두 해쯤 되면 빛이 바래고 너덜너덜해지며 더 볼썽사납습니다.

 사진책 《어떤 동네》를 생각해 봅니다. 책겉을 아로새기는 사진부터 내 마음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왜 아이들을 벽에 세워 놓고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저냥 수수하거나 투박하게 살아가거나 해바라기를 하거나 꾸벅꾸벅 졸거나 하는 모습을 조용히 사진으로 담아도 넉넉할 텐데요.

 이 사진책 《어떤 동네》란 ‘기차길 옆 공부방’ 아이들을 담은 사진책인지요? 사진을 찍은 유동훈 님은 당신 소개글에든 책 몸글에든, 이 사진책에 실린 아이들이 ‘공부방 아이들’인지 아닌지를 또렷하게 밝히지 않으나, 거의 모든 아이들은 공부방 아이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해맑게 웃는다든지 수수한 낯빛으로 가만히 담벼락에 기댄다든지 하는 사진들을 보면, 아이들이 공부방에서 배우거나 놀거나 살아내는 모습을 소담스럽거나 조촐하거나 꾸밈없이 담아내지 못했습니다(유동훈 님은 공부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분입니다). ‘가난한 동네 아이들이지만 활짝 웃는다’는 느낌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들이 뒤로 하는 모습을, 아이들 뒷자리 살림집이 골목동네가 아닌 아파트라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사진책이 되려나요. 이 아이들 얼굴빛하고 살림집과 골목과 동네는 이 사진책에서 얼마나 살갑거나 알뜰히 어우러지려나요.

 가난한 동네 공부방 아이들을 담은 사진을 그러모았다고 해서 일부러 ‘뒷모습이 될 동네 삶자리’가 꾀죄죄해 보이거나 어두워 보여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밝게 살아간다는 뜻으로 아이들이 활짝 웃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까닭 또한 없습니다.

 《어떤 동네》라는 사진책을 처음부터 ‘공부방 아이들을 담은 사진책’이라고 또렷이 밝히면서 ‘공부방 아이들과 보낸 나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또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뻔한데다가 틀에 박히게 찍는) 맑게 웃는 얼굴을 담는 사진에 그치지 말고, 맑게 웃는 얼굴이 살아가는 동네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줄 수 있는 사진으로 거듭나야 비로소 공부방이든 만석동이든 골목동네이든 가난한 동네이든, 더 낫거나 덜 떨어지거나 한 삶이 아니라, 서로 사랑스러우며 살가운 이웃을 보듬을 이야기가 피어나는 삶터로구나 하고 느끼도록 나아가는 사진으로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어떤 동네는 수수한 동네이고, 어떤 동네는 흔한 동네이며, 어떤 동네는 여느 동네입니다. 가난하다고 나쁜 삶이 아니요, 가난하다고 즐겁지 않은 삶이 아닙니다. 아픈 사람이기에 늘 괴롭거나 고단한 나날이 아닙니다. 안 아픈 사람들은 언제나 즐겁거나 신나는 나날이 아닙니다.

 제가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도화1동 624번지이고, 주안1동과 주안2동을 거쳐 신흥동3가에서 살았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제 동무나 다른 살붙이들이 용현1·2·3동이나 숭의1·2·3·4동이나 선화동이나 신흥동1가·2가·3가, 율목동, 도원동, 송월동3가, 만석동에 살았거나 살기에 이처럼 말하지는 않습니다.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아 이웃한 어른들이 창영동, 금곡동, 송림1·2·3동, 송현1·2동, 내동, 경동, 화평동, 화수1동에 산다고 이처럼 말할 까닭은 없습니다. 다만, 가난하면 가난하다뿐입니다. 집이 좀 낡았으면 낡았다뿐입니다. 가난한 이웃들한테서 사랑을 느끼면 사랑을 느끼는 대로 반가우며 즐겁습니다. 집이 좀 낡았으면 낡은 대로 살 만하며 재미나고 구수한 보금자리입니다.

 ‘콘트라스트를 강렬하게’ 한다든지 ‘흑백으로 찍는다’든지 ‘밤에 작은 등불에 기댄 모습을 담는다’든지 ‘입자를 거칠게 한다’든지 해야 골목동네 모습이 아니요, 가난한 골목동네 삶자락이 아닙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라는 동화책이 나왔을 적에 ‘가난한 동네 사람들 삶이라 해서 늘 꾀죄죄하거나 못날 까닭이 없는데, 그예 이렇게 못박아 버린다는 느낌’ 때문에 적잖이 못마땅했지만, 책장을 넘길 때에는 두근두근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람을 바라볼 때에 가난이라는 굴레가 아닌 삶이라는 아름다움을 바라본다’면 《괭이부리말 아이들》이건 다른 이야기책이건 사뭇 다른 틀로 거듭날 텐데, 이렇게 되기는 참 힘든 듯합니다. 그래도 내 동무가 살아가고 내 동무와 즐겁게 돌아다니며 노는 동네 이야기가 어린이책 무대로 나타난 대목은 반가웠습니다. 만석동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내 동무와 동무네 누나와 동무네 어머님과 동무네 아버님 삶을 어디에서 엿볼 수 있을까 하면서 조마조마했습니다. 동화책을 다 읽고 나서 갑갑하며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지만, 만석동 동무한테 책을 한 질(1·2권) 사다 주었습니다. 동무네 식구들이 돌려가며 읽었다지만, 읽었다뿐, 책이야기는 나누지 않았습니다. 아니, 책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나눌 만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글감(소재)’은 그리 크게 돌아볼 대목이 아닙니다. ‘글감’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이야기가 무엇인가를 크게 돌아볼 노릇입니다. ‘사진감’ 또한 그다지 크게 돌아볼 만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찍든 매한가지입니다. 인천 만석동을 찍든 서울 상계동을 찍든 똑같습니다. 가난한 동네 아이들을 찍든 부잣집 아이들을 찍든 다를 바 없습니다.

 아픈 사람은 ‘가난하다는 동네’ 만석동에서도 아프지만 ‘새로 지은 큰 아파트들 가득하다는 동네’ 연수동에서도 아픕니다. 슬픈 아이들은 만석동하고 이웃한 북성동이나 화수동에서도 슬프지만, 연수동하고 맞닿은 선학동이나 관교동에서도 슬프겠지요. 아픔을 다루거나 슬픔을 다룬다고 해서 더 빛날 문학이 아닙니다. 가난을 담는다 해서 다큐사진이 되거나 ‘사진이 되지’ 않아요.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이 가난한 사람들이나 아픈 사람들을 담은 사진을 내놓았지만, 막상 당신 사진을 읽을 때에 ‘아, 가난한 사람이구나!’라든지 ‘아, 아픈 사람이구나!’라고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그냥 ‘아, 사람이구나!’라고만 느낍니다. 사람이구나 하고 느끼면서, 이 사람들마다 다 달리 꾸리는 삶과 이야기를 느낍니다.

 사진책 《어떤 동네》는 나라안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이름이 높다는 인천 동구 만석동 한켠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내어 보여준다는 대목에서는 놀랍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렇지만, 놀랍다고 여길 만한 대목 하나로 내보이는 사진책이라면 쓸쓸합니다. 사랑을 나누고 믿음을 나누는 사진책으로 거듭난다면 더 반가울 텐데요. 사랑을 얻고 믿음을 보낼 사진책으로 태어난다면 참말 기쁠 텐데요.

 사진을 찍은 분은 인천 만석동에서 좋은 넋과 마음으로 좋은 공부방을 아기자기하게 꾸리는 줄 압니다. 그러면, 이곳에서 담는 사진 또한 ‘좋은 넋과 마음으로 담는 좋은 사진’이기만 하면 됩니다. 굳이 ‘가난한 동네를 더 가난하게’ 보이도록 한다든지, ‘가난한 동네니까 더 눈여겨보거나 사랑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도록 사진을 찍을 일이 아닙니다.

 가난하건 가난하지 않건 모두 사랑스러운 이웃입니다. 내 집이 있건 삯집에서 얹혀 지내건 따스한 동무입니다.

 가난하다는 동네 골목 한켠 시멘트 틈을 뚫고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흙 한 줌 없는 시멘트 골목바닥인데, 골목이웃이 꽃그릇 조촐히 마련해서 꽃밭과 텃밭을 일굽니다.

 구멍가게 작은 평상에서든, 볕바른 골목 한켠 돗자리에서든, 할매와 할배가 모여 이야기꽃을 나누는 모습이란 굳이 사진으로 담지 않아도 어여쁩니다. 굳이 사진으로 담아서 보여줄 모습이란 나부터 아름답게 살아가는 하루요, 나와 내 이웃이 아름다이 웃는 얼굴이요, 나 스스로 디딘(동네 살림꾼으로든 지나치는 구경꾼으로든) 이 마을 이 터전에서 아름다이 피어나는 풀과 꽃과 나무입니다. (4343.12.18.흙.ㅎㄲㅅㄱ)


― 어떤 동네 (유동훈 사진·글,낮은산 펴냄,2010.11.30./13000원)
 

 

 

......  

(만석동 사진을 몇 장 붙여 본다. 책에는 이런 사진이 안 실린다. 내가 찍은 사진들이다. 만석동 동무를 만나러 오가던 길에 담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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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0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0-12-21 11:17   좋아요 0 | URL
아... 저는 맞춤법이랑 띄어쓰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
우리가 살아가는 결에 맞추어 알맞게 새말을 잘 지어서 쓰면 되리라 생각하거든요.

jooferry 님 말마따나, 저는 이분이 예전부터 하던 활동과 성과를 익히 알고 있지만,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예전과 다를 바 없는 '가난한 동네를 돕는 이름'을 너무 앞세운 나머지, 동네사람 수수한 아름다움하고 자꾸 멀어지기만 했어요.

참 슬프답니다. 그래서 일부러, 제가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동무를 만나러 오가던 길에 찍은 사진을 주루룩 걸쳐 놓았답니다.... ㅠ.ㅜ

댓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산골분교운동회 - 강재훈의 두 번째 분교 이야기
강재훈 지음 / 가각본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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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날 큰잔치 사진이 너무 어둡다
 [찾아 읽는 사진책 11] 강재훈, 《산골분교운동회》(가각본,2006)



 ‘좋은 책’을 읽는다고 ‘좋은 사람’이 되지는 않아요. 좋은 책 ‘읽기’만으로는 좋은 사람 ‘되기’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좋은 삶으로 일굴 때에 하루하루 천천히 좋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좋은 사진책을 많이 읽는다고 ‘좋은 사진 읽는 눈’을 기를 수 있지 않으며, 좋은 사진책을 많이 보았기에 ‘좋은 사진 찍는 손’을 다스릴 수 있지 않습니다. 좋은 사진책을 가까이하는 삶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좋은 사진책 ‘읽기’에 머물지 않아야 비로소 좋은 사진 ‘찍기’와 ‘헤아리기’로 이어집니다. 좋은 사진책을 읽으며 받아들인 사랑을 내 가슴 활짝 열어젖히면서 넉넉히 담으며 곰삭이는 가운데 차근차근 두루 나눌 때에 바야흐로 좋은 사진 ‘찍기’란 무엇이며 좋은 사진 ‘헤아리기’란 어떠한가를 깨달아요. 좋은 책 좋은 삶 좋은 사진이에요. 좋은 책에서 곧바로 좋은 사진으로 이어지지 않는답니다.

 사진책 《산골분교운동회》를 읽습니다. 《분교, 들꽃 피는 학교》(학고재,1998)에 이어 여덟 해 만에 선보이는 사랑스러운 사진책이라 할 만한 《산골분교운동회》를 읽습니다. 사진책은 2006년에 진작 나왔으나 지난 네 해 동안 이 사진책을 따로 찾아 읽지 않다가, 네 해 만에 비로소 장만하여 한 장 두 장 넘깁니다. 첫 사진책 《분교, 들꽃 피는 학교》가 태어났을 때에는 떨리는 손길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곧장 사진잔치 자리로 달음박질해서 포스터랑 책이랑 기쁘게 장만했습니다만, 여덟 해 만에 둘째로 태어난 《산골분교운동회》에는 선뜻 눈길하고 손길이 가 닿지 못했습니다. 첫째 사진책에는 “들꽃 피는 학교”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둘째 사진책에는 딱히 다른 이름이 안 붙고 “강재훈의 두 번째 분교 이야기”라는 이름이 붙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들꽃 피는 학교” 사진책은 겉그림부터 마음을 부드러이 사로잡았습니다만, “강재훈의 두 번째 분교 이야기” 사진책은 겉그림부터 썩 달갑지 않았습니다. 강재훈 님이 힘들게 다리품을 들이며 찾아다닌 산골 분교나 시골 분교 운동회 자리는 언제나 ‘맑고 따뜻하며 보드라운 햇살과 바람과 하늘과 구름과 흙’을 바탕으로 햇살사람과 바람사람과 하늘사람과 구름사람과 흙사람이 어우러졌는데, 막상 이 사람들 삶내를 꾸밈없이 펼쳐 보이는 데에서는 그만 어긋났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 이 맑은 날 큰잔치 사진이 왜 이렇게도 어둡게 나와야 했을까요. 《분교, 들꽃 피는 학교》는 흑백사진이면서 빛그림이 곱게 살았는데, 《산골분교운동회》는 왜 굳이 흑백사진으로 이야기를 엮으려 했을까요. 흑백사진으로도 얼마든지 다큐사진을 할 만할 뿐 아니라, 즐겁고 신나는 분교 운동회 삶자락을 담을 수 있습니다. 흑백사진이기에 더 차분하면서 애틋한 느낌을 살포시 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흑백사진이면서 밝은 자리와 그늘진 자리를 섣불리 가르면 안 좋아요. 하나도 어둡지 않은 ‘산골분교운동회’인데, 너무 어두운 사진이 되고 말았어요. 아이들이나 어른들 숫자가 많건 적건, 운동회 잔치날 모두 살가이 얼크러지면서 하하호호 낄낄깔깔 히히흐흐 웃고 자지러지는데, 이 웃음을 웃음 그대로 담아내지 못했구나 싶어요.

 사진은 틀림없이 ‘기록’을 하는 예술이자 문화이지만, ‘기록만 하는’ 보도매체는 아니에요. 강재훈 님으로서는 당신이 몸담은 신문사에서 기자살이를 하느라 겨를을 내기 빠듯해 더 많은 곳을 더 바지런히 못 다니는 바람에 아쉽다고 느낄 만하지만, 산골분교운동회란 100군데 학교 100군데 운동회 자리 모습을 골고루 담아야 사진책 하나로 마무리되지 않아요.

 강재훈 님, 아시지요? 누구보다 강재훈 님 스스로 잘 아시지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기린초등학교 진동분교장 한 곳 운동회 잔치날 사진을 꼭 한 해치만 찍었어도 얼마든지 사진책 하나가 태어나요.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초등학교 명지분교장 한 곳 운동회 놀이터 사진을 꼭 하루치만 담았어도 너끈히 사진책 여러 권 태어나요.

 두어 군데 산골분교 운동회를 해마다 꾸준히 찾아가면서, 해마다 새삼스러운 삶자락과 놀이자락과 이야기자락을 길어올리면 흐뭇해요.

 《산골분교운동회》는 모두 179쪽이더군요. 강재훈 님이 더 잘 알리라 생각하는데, 이 사진이야기는 꼭 100쪽으로도 살가이 엮을 만합니다. 이 사진이야기는 500쪽이나 1000쪽으로 시원스레 여밀 만합니다. 50쪽짜리 조그마한 사진책을 네 권이나 다섯 권으로 나눌 수 있어요. 산골분교 한 곳마다 따로따로 한 권씩 내놓아도 참 좋습니다. 아니, 강재훈 님으로서는 당신이 찾아다닌 산골분교 사진이야기를 저마다 다른 빛깔과 무늬와 목소리와 살결로 아리땁게 내놓으려는 매무새여야 한다고 느껴요. 이러한 매무새를 바탕으로 《산골분교운동회》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느껴요.

 흑백은 흑백대로 아름다운 사진이지만, 빛깔은 빛깔대로 어여쁜 사진이에요. 흑백은 흑백대로 차분히 이야기를 펼치는데, 빛깔 또한 빛깔대로 고즈넉히 이야기를 나누어요. 흑백이냐 빛깔이냐에 앞서 ‘삶’과 ‘사랑’과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 품과 품앗이와 품새를 따뜻하게 어루만지고픈 넋을 예쁘게 보여주는 《분교, 들꽃 피는 학교》를 내놓은 강재훈 님이었기에, 둘째 이야기는 “작은 운동회, 맑은 하늘 업은 학교”로 선보였어야 한결 사랑스러웠으리라 느낍니다. 운동장을 힘차게 달리는 아이들 사진으로도 운동회 모습이지만, 이번 사진책에서는 놓친 대목이 퍽 많을 뿐더러, 운동회라 할 때에, 또 산골분교 운동회라 할 때에, 어떠한 운동회이고 어떠한 빛깔이며 어떠한 숨결인 가운데 어떠한 어깨동무인가 하는 대목에서 무척 흐릿흐릿합니다.

 사진은 서둘러 찍을 수 없는 문화임을 다시금 헤아려 주셔요. 사진은 섣불리 담을 수 없는 예술임을 새삼스레 깨달아 주셔요. 사진은 나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하고 막걸리잔을 부딪히든 손을 맞잡든 부둥켜안든 말없는 웃음꽃 주고받든 하는 삶임을 천천히 곱씹어 주셔요.

 한 해에 한 번 얼굴 마주하더라도 반가운 이웃이라면, 한 해에 한 번 마주하며 담은 필름 한두 통으로 사진이야기 엮어 주셔요. 열 해에 한 번 가까스로 마주하더라며 고마운 벗님이라면, 열 해에 한 번 마주하며 얻은 필름 몇 통으로 사진이야기 갈무리해 주셔요.

 바쁘게 다니지는 말아 주셔요. 힘들게 찾아다니지는 말아 주셔요. 좋은 이웃을 만나러 기쁘게 마실하면서 사진으로 만나 주셔요. 따스한 동무랑 살가운 아이들하고 웃고 떠들려는 착한 마음밭을 건사하면서 사진으로 징검돌을 놓아 주셔요.

 강재훈 님 셋째 사진이야기는 산골 분교나 시골 분교에서 싱그러운 눈물과 해맑은 웃음을 골고루 부둥켜안는 빛살 고운 삶이야기가 되도록 곁을 내주셔요. 산골 분교나 시골 분교 어른과 아이는 강재훈 님한테 넉넉히 곁을 내주었는데, 강재훈 님은 외려 곁을 잃어버린 《산골분교운동회》가 되고 말았어요. 슬픕니다.


.. 신문사의 기자생활을 하면서 산골 분교 운동회를 찾아다니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주어진 시간의 부자유, 그 이유로 사진 작업이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와 강원도에 국한된 것이 좀 안타까운 부분이다. 하지만 무작정 시간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일. 올해 못 가면 다음해 가면 된다는 각오로 시간과 기회가 닿을 때마다 산골 분교로 달려갔다. 가는 길이 멀면 밤새 달려 새벽에 도착했고 돌아오는 길이 멀면 아예 새벽길을 달려 서울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한 번 인연을 맺은 분교들을 몇 해 거듭해 찾아가니 자연히 아이들은 물론 지역 주민들과도 친해졌다. 사진을 찍다 말고 손님 찾아 달리기에 호명되어 아이들과 함께 뛰기도 하고, 부모가 오지 못한 아이가 있을 때는 대신 그 아이의 부모가 되어 발 묶고 달리기도 해야 했다. 내가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먼저 나를 포함시킨 채 운동회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산골 분교 운동회는 그렇게 한 사람이라도 더 함께 하기를 말없이 원하고 있었으며, 부르지 않았어도 찾아온 사람에게는 이웃처럼 반갑게 곁을 내주었다 ..  (107쪽)


 이런 이야기는 더 읽고 싶지 않습니다. 따로 이처럼 글로 적어 놓지 않았어도, 사진만 읽으면서도 너무 슬펐습니다. 너무 바쁘게 일하며 다니시는 나머지 무엇을 사랑하고 아끼며 보살폈는지, 또 누구한테서 사랑을 받고 아낌을 받으며 보살핌을 받았는지를 잊어버리셨네요. (4343.12.10.쇠.ㅎㄲㅅㄱ)


― 산골분교운동회 (강재훈 사진,가각본 펴냄,2006.5.25./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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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건축 4 - 칠궁
임응식 지음 / 광장 / 1977년 10월
평점 :
품절


 예전에 올렸던 글을 '리뷰'로 옮겨 새로 올린다 ㅠ.ㅜ 이 책은 절판된 지 오래되어 없는 줄 알고, 처음부터 '판 끊어져 검색 안 되는 책' 자리인 페이퍼쓰기를 했는데... 임응식 님 책을 검색해 보다가, 덜컥 뜨는 모습을 보거는 허거덕 @.@ 아웅... 힘들어라... 그러나 고마운 일이다. 다시 살 수는 없어도 이렇게 '책 검색'이 되는데다가 표지라도 뜨니까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예술이기 앞서 삶인 사진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9] 임응식, 《韓國의 古建築 ④ 七宮》(광장,1977)



 사진찍기를 처음 배우려 하는 분들한테나, 사진찍기를 제법 해 왔으나 ‘식구들 사진 아니고는 찍어 보지 못했다’고 하는 분들한테나 으레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진기는 다 똑같은 사진기이니, 더 값나가는 값진 사진기를 굳이 장만하려고 하지 마시라고. 덧붙여, 더 값나가는 사진기 한 대 장만할 돈만큼 사진책을 먼저 장만하여 죽 들여다본 다음에 사진기를 새로 사도 늦지 않다고. 이리하여, 하루아침에 사진책을 한꺼번에 장만하지 말고 틈틈이 책방마실을 다리품 팔며 하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책으로만 한두 권씩 장만하며 사진기 값만큼 썼다 싶을 때에 비로소 사진기를 장만한다면 굳이 사진강의나 사진교실을 다니지 않아도 스스로 마음에 들 뿐 아니라 스스로 바라는 사진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우리 나라는 사진책이 아주 안 팔립니다. 책마을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책이 안 팔린다’면서 우는 소리를 내지만, 사진책을 만들어 온 책마을 일꾼은 예나 이제나 ‘책 팔기 힘들어’ 골골거리면서도 사진책 하나를 힘써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안 팔리는 책을 꼽자면 사진책과 함께 환경책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올바르고 아름다이 일구자는 뜻을 담은 환경책은 아주 뜻밖에 아주 안 팔립니다. 이름난 출판사에서 광고돈 제법 들여 알리지 않고서야 거의 안 팔립니다. 이는 사진책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름난 출판사에서 광고돈 들여 널리 알리면 곧잘 팔립니다.

 문학책이 문학쟁이 한 사람이 일군 문학이라는 열매 하나를 담은 책이라면 사진책은 사진쟁이 한 사람이 일군 사진이라는 열매 하나를 담은 책입니다. 그런데, 문학책을 즐거이 사 읽으며 문학맛을 보려는 사람은 있되, 사진책을 기쁘게 사 넘기며 사진맛을 보려는 사람은 좀처럼 드뭅니다. 이러는 가운데 몇 가지 사진책은 아주 불티나게 팔립니다. 잘 안 팔릴 뿐 아니라 거의 안 팔린다는 사진책이라 하지만, ‘사진 더 잘 찍는 솜씨를 말하는 책’이라든지 ‘사랑받는 연예인 화보를 담은 책’이라든지 ‘곱상한 사진으로 멋을 부리는 포토에세이’라든지 ‘대학교 사진학과에서 교재로 쓰는 책’만큼은 제법 팔립니다.

 사진책을 즐겨 장만하는 저부터 늘 느끼지만, 사진책은 값이 좀 세긴 셉니다. 흔한 말로 휘리릭 넘기면 다 보는 사진책인데 책값이 꽤 비싸다 할 만합니다. 굳이 양장에 책 껍데기에 날개에 뭔가를 덕지덕지 달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돈을 더 들여 더 빛나게 엮으려는 사진책이 퍽 많습니다. 글책은 그예 글책이고 사진책은 그예 사진책이기에, 글책이 글로 책을 받아들이고 글로 삶을 읽도록 돕는다면, 사진책은 사진으로 책을 맞아들이며 사진으로 삶을 헤아리도록 도울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겉을 어느 만큼 꾸밀 수 있습니다만, 애써 더 겉꾸밈에 마음쓸 까닭이 없는 책들입니다. 이런 테두리에서 사진책 엮는 분들은 생각을 좀 고쳐야 합니다. ‘어차피 만드는 데에 비싼 돈이 치이니 몇 가지 더 꾸민다’고 하는 생각이 아니라, ‘사진 품질을 살리면서 좀더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장만할 수 있는 눅은 값’을 맞추는 데에 생각을 모두어야지 싶어요.

 1970년대 끝무렵에 ‘도서출판 광장’에서 펴낸 “韓國의 古建築”이라는 사진책들을 보면 이런 생각을 자꾸자꾸 할밖에 없습니다. 광장이라는 출판사는 건축책을 내는 곳인데, 이곳에서는 건축을 사진으로 말하는 사진책을 꽤 큰 판짜임으로 여럿 내놓았습니다. 광장 출판사에서는 모두 50권쯤은 내놓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는데 모두 몇 권까지 내놓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韓國의 古建築”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책 가운데 제가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찾아본 책들 가운데 다섯 권은 임응식 님 사진으로 나왔고(비원, 경복궁, 종묘, 칠궁, 소쇄원), 한 권은 강운구 님 사진으로 나왔습니다(내설악 너와집). 주명덕 님 사진으로 《수원성》이 나왔다고 하지만 이 책은 아직 못 보았습니다. 《제주 민가》를 담으려 했다는 사진책을 세 권 내려 했다는데 누구 사진으로 내려 했고, 나오기는 했는지조차 알 길은 까마득합니다.

 곰곰이 생각한다면, “韓國의 古建築”이라는 이름을 붙여 내놓는 사진책은 1970년대 끝무렵뿐 아니라 2010년대 첫무렵에 내놓는다 할지라도 널리 사랑받기에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옛집”이든 “우리 나라 오늘날 집”이든, 여느 사람들은 당신 살림집을 알뜰히 눈여겨보면서 우리 삶터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사람은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이 오순도순 모여 있는 한국 삶터 골목길을 스스럼없이 바라보거나 껴안거나 살피지 못합니다. 나라밖 일본이든 중국이든 티벳이든 인도이든 프랑스이든 미국이든 독일이든 스페인이든 하는 곳으로 비행기를 타고 나가서 그 나라들 골목길을 눈여겨보거나 헤아리거나 바라보거나 살필 뿐입니다. 제주섬 올레길을 찾는 사람이 무척 많다고 합니다만, 관광길인 올레길은 찾아다닐지라도 스스로 ‘관광길이 아닌 여느 사람 살림집하고 맞닿은 골목과 고샅’을 즐겁게 찾아다니며 마을사람 눈높이와 삶결대로 거닐면서 ‘내 이웃 삶을 받아들이려는 몸짓’을 보여주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더욱이, 관광여행으로 많이 찾는 제주섬이 아닌 여느 우리 동네라 할 때에, 우리 동네 골목길 구석구석 골골샅샅 누비며 내 이웃집은 어디요 내 동무가 사는 집은 어디이고 내 단골집은 어디메인가 하고 곱씹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터조차 모르는 가운데 멀리멀리 비행기 타고 다닙니다. 우리는 우리 삶터 이웃집을 잘 알려 하지 않으면서 진보와 평화와 평등과 통일과 자유와 민주를 외치고 있습니다.

 임응식 님이 “韓國의 古建築”이라는 이름을 붙여 내놓은 사진책 《비원》과 《경복궁》과 《종묘》와 《칠궁》과 《소쇄원》을 하나하나 넘겨 보노라면, 임응식 님은 이무렵 쉰 해 남짓 이어온 당신 사진삶을 한결 가다듬고 추스르면서 당신으로서는 거의 마지막 불꽃이라 할 만한 사진길을 새롭게 걸었구나 하고 느낍니다. 우리 나라 사진누리를 맨 처음으로 다스리거나 갈고닦았다고 할 분 가운데 하나로서, 당신 뒷사람한테 보이거나 남기거나 물려주고픈 이야기와 넋을 사진마다 알알이 아로새겼구나 하고 느낍니다.

 “韓國의 古建築”이 나올 무렵은 한국 사진쟁이도 “우리 나라 옛집과 옛궁”을 어떤 흐름과 줄기를 좇으며 어떤 이야기를 담도록 사진을 해야 하는가를 곧잘 살피던 때인 한편, 일본 사진쟁이 또한 “일본 이웃에 있는 아름다운 옛집과 옛궁이 살아숨쉬는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밝히고자 바지런히 찾아와서 알뜰살뜰 사진을 찍던 때입니다. 한 자리에 놓고 견주기에는 마땅하지 않으나, 1981년에 ‘村井修’라는 일본사람 사진으로 《李朝の建築》(求龍堂)이라는 두툼한 사진책이 나왔습니다. 이 책에 실린 사진을 보면, 일본 사진쟁이는 ‘조선 무렵 옛 궁궐과 기와집’ 사진을 빛깔사진과 흑백사진 두 가지로 나누어 담았습니다. 빛깔사진으로 해야 할 자리와 때에는 빛깔사진으로 담고, 흑백사진으로 해야 할 곳과 때에는 흑백사진으로 담습니다. 놀랍도록 또렷하면서 밝고 아리땁게 ‘조선 무렵 옛 궁궐과 기와집’을 사진으로 보여주는 고운 사진책인 《李朝の建築》입니다. 이 일본 사진책하고 임응식 님 《비원》과 《경복궁》과 《종묘》와 《칠궁》과 《소쇄원》을 나란히 놓고 생각한다면, 임응식 님 사진은 어느 모로 답답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빛을 좀더 맑고 밝게 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임응식 님은 굳이 흑백사진으로만 “조선 무렵 옛 궁궐과 기와집”을 담습니다. 어느 사진은 선명도가 깨지고 어느 사진은 살짝 흔들리고 어느 사진은 빛이 잘 맞지 않아 아쉽지만, 이 땅에서 이만 한 집을 이루어 살아가던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즐기며 무엇을 아끼려 했는가 하는 생각을 사진마다 골고루 담아 놓습니다. 사진길을 오랫동안 걸어온 ‘임응식이라는 손꼽히는 사진쟁이’ 이름이나 얼룩을 느낄 수 없는 사진을 선보이는 “韓國의 古建築”입니다. 임응식이라는 사진쟁이가 내놓은 작품을 보라는 “韓國의 古建築”이 아니라, 이 나라 옛 궁궐과 기와집을 처음 지은 일꾼들 땀냄새하고 이 궁궐과 기와집에서 하느작거리며 노닐던 사람들 삶결을 읽으라 하는 이야기가 서린 “韓國의 古建築”입니다. 그래서, 사진 작품으로 치자면, 또 이 나라 옛 궁궐과 기와집 매무새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진으로 보자면, 일본 사진쟁이가 이룬 《李朝の建築》이라는 책이 더할 나위 없이 멋있습니다. 이와 달리, 사진하는 넋과 사진기를 쥔 손길에다가 사진으로 이루어 사진으로 나누려는 눈물과 땀내로 돌아보자면, 여러모로 어수룩한 구석이 남아 있으면서 “이 나라 옛 궁궐과 기와집”을 읽는 새로우며 남다른 생각과 밑눈을 베풀어 준 “韓國의 古建築” 다섯 권이 그지없이 고맙습니다. 저는 이 다섯 권 가운데 4번 《七宮》 사진책을 몹시 아낍니다.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저 좋아 웃습니다. 기와집이란 풀집과 달리 권력과 이름과 학문과 돈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집인데, 이러한 기와집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고 ‘사람 기운이 똑같이 어려 있’음을 사진으로 아기자기하게 엮어 냅니다.

 1979년에 나온 《현대한국사진작가선 : 임응식》(시각)이라는 사진책을 펼치면 이경성 님이 임응식 님 사진을 읽어낸 글이 한 꼭지 실려 있는데, 마지막을 다음처럼 맺습니다. “사실 그(임응식)의 말대로 오늘의 평면 예술에는 사진술을 이용한 많은 회화와 판화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비록 사진술을 썼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궁극의 목적이 회화이므로 사진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진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사진작가 임응식은 ‘사진은 기록성과 진실성을 담은 평면예술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4343.8.6.쇠.ㅎㄲㅅㄱ)


― 韓國의 古建築 ④ 七宮 (임응식,광장,1977/판 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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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토의 민들레
윤주영 / 호영출판사 / 1993년 3월
평점 :
절판



 촉촉한 가슴에서 저절로 샘솟는 고운 사진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3] 윤주영, 《동토의 민들레》(호영,1993)


 잘 찍는 사진, 또는 잘 찍은 사진하고는 동떨어졌을 뿐더러, 훌륭한 사진이나 놀라운 사진이나 대단한 사진이나 좋은 사진하고도 멀거니 떨어진 윤주영 님 사진을 읽습니다. 1928년에 태어나 여태껏 사진기를 힘차게 쥐는 당신은 1928년에 태어나 이제껏 사진기를 당차게 쥐는 최민식 님하고 동갑내기입니다. 윤주영 님은 당신이 예순다섯이던 1993년에 내놓은 사진책 《동토의 민들레》에서 “사실 내가 2∼3년만 일찍 태어나 국민학교만 마치고 집에서 농사일이나 거들고 있었다면 나도 영락없이 이곳에 끌려와 그들이 살아온 세월처럼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을지도 모를 일(126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윤주영 님이 러시아에서 쭈그렁 할아버지로 지내는 가운데 최민식 님이 러시아로 사진 취재를 떠나 만나는 사이가 되었을 수 있어요. 그러나저러나, 얼어붙은 땅 러시아 사할린에서 겪는 한겨레붙이 아픔과 슬픔이란 ‘강제이주’ 하나뿐 아니라 ‘강제이주에 재이주에 재재이주’까지 덧달립니다. 이루 말로 담아내기 힘들고, 이루 사진으로 실어내기 벅찬 눈물입니다.

 그러나 이 얼어붙었다는 땅에서도 한겨레붙이는 서로 믿고 기대어 사랑을 나눕니다. 다 함께 손잡고 어깨동무하며 따순 품을 나눕니다. 끔찍한 나날을 겪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가운데에는 ‘러시아 녀석하고 내 손주가 시집장가 가는 꼴을 못 본다’고 외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한겨레붙이하고 똑같이 한겨레붙이라 할 만한 남녘땅 한겨레붙이는 러시아에서 살아가는 러시아사람하고 맞대 놓을 때에 얼마나 한겨레붙이답다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재일조선인 소설쟁이 유미리 님은 한국에서 온 유학생 아무개가 다니는 대학교에 놀러갔을 때 이야기를 당신 수필책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2000)에 적바림합니다. 당신을 “유입니다.” 하고 말했더니 한국사람이냐고 묻기에 한국사람이라 하니까, 한국사람치고 일본말을 참 잘한다고 하기에 일본에서 태어났으니 그렇다 했는데, 한국 유학생은 “그럼 일본사람이잖아요?” 하고 물었고, 유미리 님은 “아니, 그러니까 재일한국인 2세인데요.” 하고 대꾸했는데, 막상 돌아온 말이란 “그게 무슨 소리죠?”였다고 적바림합니다.

 윤주영 님은 다큐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인물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사진이나 상업사진을 찍지도 않습니다. 이른바 프로사진이 아닌 윤주영 님 사진이라 할 텐데, 윤주영 님은 당신이 좋아하는 결대로 다리품을 팔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이런 이름도 어울리지 않고 저런 갈래도 걸맞지 않습니다. 그예 사람들 살아가는 품새를 다루고, 그저 사람들 복닥이는 매무새를 들여다봅니다.

 누구나 사진을 찍는다 할 때에는 ‘저마다 아는 만큼’ 찍는다 여길 수 있습니다만, 저마다 아는 만큼 사진을 찍는 일이란 없습니다. 언제나 ‘저마다 살아가는 만큼’ 사진을 찍습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만큼 사람과 삶터를 바라보고, 저마다 살아가는 만큼 사진기를 장만해서 단추를 눌러 사진 하나 일굽니다.

 이리하여, 윤주영 님 사진하고 견주면 솜씨 빼어나거나 틀이 괜찮거나 생각이 좀 깊거나 한달지라도 윤주영 님 사진만큼 이야기가 넉넉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왜냐하면, 윤주영 님처럼 살아내지 못하면서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을 섣불리 붙인다든지, 윤주영 님처럼 다리품과 손품을 팔지 않으면서 사진쟁이라는 허울을 우쭐거리면서 쓴다든지 한다면, 보잘것없는 사진 작품만 잔뜩 쏟아냅니다. 가만히 보면, 스스로 ‘다큐’라 이름 붙일 때에는 다큐사진이 아니고, 제 입으로 ‘인물’이라 이름 달면 인물사진이 아닙니다. 이때에는 문화이고 예술이고조차 아닌 겉멋이나 겉치레에 머물고 맙니다.

 윤주영 님만큼이라도 다리품을 팔거나 손품을 들이면서 사진길을 걷는다면 이 나라 사진쟁이들은 얼마나 크게 발돋움할까요. 돈이 있고 겨를이 많아 윤주영 님이 이렇게 다리품과 손품을 팔았겠습니까. 나한테 돈이 아주 많거나 겨를이 참말 넉넉하다면 윤주영 님은 저리 가라 하도록 멋진 사진을 내놓을 수 있는가요.

 사진책 《동토의 민들레》를 들여다보면, 윤주영 님이 사할린 한겨레붙이를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한결 살가이 보듬지 못했구나 하고 느낄 만합니다. 윤주영 님 스스로 밝히기도 하는데, “그러나 이 사진집을 통해 사할린 교포들의 삶을 담아낸다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무리한 욕심이었던 듯싶다. 그들이 50년 동안 겪고 살아온 그 엄청난 수난의 세월을 짧은 시간에 담아내는 데는 어차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127쪽/윤주영).”는 말이 아니더라도 몇 차례 사진여행을 떠나 수십 또는 수백 통 필름을 썼달지라도 ‘러시아 사할린땅 한겨레붙이’ 삶을 오롯이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작 한 차례 나들이를 했으면서도 얼마든지 러시아 사할린땅 한겨레붙이 삶을 알뜰살뜰 여밀 수 있어요. 윤주영 님은 아직 이 대목을 깨닫지 못하시는데, ‘미리 촬영 대상을 공부하고 살피거나 알아본다’고 하든 ‘사람들하고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사진을 담는다’고 하든 이야기사진이나 다큐사진 하나 태어나지 않습니다. 어떠한 사진이든, 우리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내 삶을 곰삭이며 내 깜냥과 주제와 그릇에 걸맞게 내 삶을 사진 하나에 실어내려고 할 때에 이야기 한 자락을 사진 하나에 살포시 얹으며 삶꽃 어여삐 일굽니다.

 잘 찍을 까닭이란 없습니다. 깊거나 놀랍거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줄 까닭이란 없습니다. 곧거나 옳은 목소리를 외칠 까닭이란 없습니다. 멋지거나 그윽한 그림을 보여줄 까닭이란 없습니다. 사진은 사진이지 ‘글’도 ‘그림’도 아닙니다. 사진을 글인 듯 여기면서 줄줄줄 꼬리말을 달아 놓는다면 부질없습니다. 사진을 그림처럼 받아들이면서 그럴싸한 모습을 달달달 늘어 놓는다면 덧없습니다.

 더 많은 필름이나 더 좋은 장비나 더 기나긴 겨를로는 사진을 이루지 못합니다. 더 너른 사랑과 더 따순 믿음과 더 깊은 마음으로 사진을 이룹니다. 내 삶부터 따뜻하게 여미어 주셔요. 내 가슴을 촉촉히 적셔 주셔요. 내 눈망울을 맑게 빛내어 주셔요. 사진은 저절로 우러납니다. (4343.12.1.달.ㅎㄲㅅㄱ)


―  (윤주영 사진,호영 펴냄,1993.3.20./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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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로 imagepress 2
이미지프레스 엮음 / 청어람미디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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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과 살아가는 하루
 [찾아 읽는 사진책 10] imagepress, 《사람들 사이로》(청어람미디어,2006)



 다큐멘터리 사진쟁이 모임인 ‘이미지프레스’는 《여행하는 나무》(청어람미디어,2005)를 첫 책으로 삼으며 꾸준하게 사진이야기를 내놓겠다고 했으나, 2006년 12월에 《사람들 사이로》를 내놓고 나서 2010년 11월까지 셋째 사진이야기를 내놓지 못합니다. “많은 독자들이 첫 번째 책을 찾아 주셔서 17개월 만에 2000부가 넘게 판매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더욱 분발해서 매진의 속도를 높여 보겠습니다(9쪽/이상엽).”는 말은 덧없는 꿈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진을 말하거나 사진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 열일곱 달에 걸쳐 2000부가 팔렸다면, 적게 팔렸다 할 만하면서 많이 팔렸다 할 만합니다. 예쁘장하게 엮은 모양새를 헤아린다면 적게 팔렸고, 사진책 장만하는 사람이 그리 안 많음을 헤아리면 무척 많이 팔린 셈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진기 장만하는 사람은 참으로 많습니다. 새로 나오는 제법 비싸다 싶은 사진기조차 꽤 많이 팔립니다. 너무 뻔한 이야기라 할는지 모르겠는데, ‘사진을 알고 즐기’려는 매무새에 앞서 ‘더 값나가는 사진 장비 갖추’려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사진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이 없는 탓이라 하는 목소리가 있으나, 이보다는 우리 삶터 얼거리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이는 사진밭에서만 느낄 아쉬움이 아니라, 글밭이든 그림밭이든 노래밭이든 학문밭이든 사회운동밭이든 매한가지예요. 이 나라 삶터가 온통 돈을 많이 벌든 이름을 크게 떨치든 힘을 대단히 거머쥐든 하는 쪽으로 흐르며 굳어졌거든요, 서로를 사랑하며 살거나 다 함께 착하게 어깨동무를 하거나 콩 한 알 나누는 너그럽고 따스한 넋을 아끼는 흐름이란 거의 찾아보지 못합니다. 언제나 겨루기요 노상 다툼이며 늘 숫자놀음입니다. 사진밭 한 갈래만 착하거나 참되거나 곱게 나아가기를 바랄 수 없어요.

 사진을 이야기하는 책이자 사진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 《사람들 사이로》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열네 가지 이야기를 노순택·이기명·이상엽·이재갑·정은정·Area Park·김홍희·한대수·이규철·박평종·이치열, 이렇게 열한 사람이 들려줍니다. 그런데 열한 사람 이야기를 열한 가지 빛깔로 느낀다거나, 열네 가지 이야기를 열네 빛깔 무지개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람 사이에 있고, 사람 사이에는 늘 사람이 있는데, 굳이 《사람들 사이로》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사진삶을 이야기하려고 했다면 ‘왜 사람이고, 왜 사람 사이이며, 왜 사람 사이 사진인가’ 하는 대목을 건드려야 합니다. 이 대목을 건드리지 않고 이름만 그럴듯하게 “사람들 사이로”라 외친들 사람들 사이에서 사진을 나누는 일이 되지 못합니다. “브 나르도”라 외친다거나 “민중 사이로”라 외친다 해서 참말 여느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지는 않습니다. 여느 사람들 사이로 스며드는 일이란 외침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입니다. 따로 외칠 까닭이 없고 애써 외칠 겨를조차 없습니다. 그저 그대로 조용히 살아가며 그예 고스란히 예쁘게 살아가면 넉넉합니다.

 《사람들 사이로》에서 노순택 님은 말합니다. “나는 사진관을 운영하기 전에도 많은 대추리, 도두리의 농민들을 필름에 담아 왔다. 노동의 현장에서 그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투쟁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은 더 많았다. 그들은 그들이 원치 않았던 투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투사들을 필름에 담아 왔다. 그렇지만 황새울 사진관에서 내가 만난 그들은 달랐다.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수줍게 웃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것은 정녕,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었으리라(22쪽/노순택).” 노순택 님은 《사람들 사이로》에서 비로소 당신이 걸어갈 다큐사진 길 한 자락을 얼핏 보았구나 싶은데, 이렇게 얼핏 본 다큐사진 길 한 자락을 조금 더 살가우며 기쁘게 붙잡으며 오늘 하루 사진삶을 즐기는지 어떠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느 사진이든 사진기를 쥔 사람이 바라보는 그대로 찍습니다. 이 결을 읽어 준다면 고맙습니다. 어느 사진이든 사진쟁이가 생각하는 그대로 담습니다. 이 무늬를 예쁘게 살펴 준다면 반갑습니다. 어느 사진이든 ‘사진을 아는’ 사람이 꿈꾸는 대로 이야기를 엮습니다. 이 느낌을 고이 얼싸안아 준다면 넉넉합니다.

 다만, ‘《사람들 사이로》라는 사진책 하나로 엮은’ 이만큼 해도 사진은 퍽 볼 만합니다. 이렇게 해도 사진은 꽤 값어치있습니다. 그러나, 이만큼 하기에 사진은 사람들 사이로 스미지 못합니다. 이렇게 하니까 사진쟁이 삶이 여느 사람 삶하고 동떨어집니다.

 사진쟁이가 ‘사진에 찍히는 사람’이 찍혀서 적바림되고픈 모습을 찍고 싶어 하기란 참 힘들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힘들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사진애 찍히는 사람이든 똑같이 사람입니다. 모두 같은 목숨이요, 다 함께 사랑스러운 벗님이에요.

 아주 흔한 말이지만, 사진쟁이들은 사진기를 쥐기 앞서, 또 다큐사진이란 이름을 걸기 앞서 생각해야 합니다. ‘내 사진에 찍히는 사람이 나를 사진으로 찍는다면 난 어떤 모습으로 이 사람 앞에 마주하거나 바라보며 서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느 마을사람이 사진쟁이를 사진으로 찍겠다고 할 때에, 다큐사진을 하는 분들은 어떤 느낌 어떤 넋 어떤 매무새가 될는지 곱씹어야 합니다.

 사진쟁이 이재갑 님 또한 말합니다. “약 6개월의 시간이 흘렀을 때, 비로소 혼혈인 형님들이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참으로 힘든 시기였다. 일정한 수입이 없던 당시로서는 많은 어려움은 당연했고, 이는 오히려 좋은 작업을 하기 위한 절대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들이었다(83쪽/이재갑).” 그래요, 사진을 찍으며 사람들을 만나는 사람들은 참 즐거운 나날을 보냅니다. 그런데, 사진기를 들었기에 서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지는 않습니다. 붓과 종이를 들든, 연필과 수첩을 들든 서로 즐거이 어울릴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들어도 기쁘게 어깨동무할 수 있어요. 여러 겨레 피가 섞인 사람이든 이주노동자이든 여느 사람이든 다 똑같습니다. 우리들은 눈으로 사람을 보니까 여러 겨레 피가 섞인 사람을 달리 바라보곤 하는데, 앞을 못 보는 사람들한테는 여러 겨레 피가 섞인 사람이란 ‘무엇이 다른 사람’이 될까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한테 영어를 쓰는 사람이나 한국말을 쓰는 사람이나 ‘어떻게 다른 사람’이 되려나요.

 다큐사진을 하는 분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사람 그대로 받아안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도시에서 시내버스를 모는 분들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이, 학문을 파고들어 깊은 뜻을 깨우친다는 분들이 어떤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헤아리면서 서로를 마주보는지 알쏭달쏭합니다. 다큐사진을 왜 자꾸 멀리서만 찾고, 내 삶터에서 내 살붙이하고 못 보듬는지 아리송합니다. 《사람들 사이로》에서는 사진책 《윤미네 집》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오늘 다큐사진을 한다’는 분들 가운데, 또 이미지프레스 모임 분들 가운데 ‘내 삶터가 뿌리내린 동네 사람들 이야기’를 오순도순 아기자기 알콩달콩 살랑살랑 들려주는 분은 아직 없습니다.


.. 나는 여행할 때마다 경치보다는 현지 사람들의 모습을 더욱 중요시한다. 그곳의 환경 속에 사는 그 사람들은 어떠한 것들 때문에 고민하고 기뻐하는지가 궁금하다 ..  (162쪽/한대수)


 사진책 《사람들 사이로》를 읽으며 한대수 님 이야기를 빼고는 그리 가슴에 와닿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다른 분들 사진이나 글은 자꾸 겉돌고 헛돌며 맴돈다고 느낍니다. 여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머무는 사람이 있으면 아픈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듯이 걱정하는 사람이 있고, 기뻐하듯이 슬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사람은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사진이고, 어디에서나 다큐멘터리입니다.

 “대중들의 교육·문화·예술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높아진다고 해도 사진의 촬영과 공표에 있어서 초상권의 문제는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두 번째로, 찍는 자와 찍히는 자 사이에 열린 마음으로 나누는 적극적인 의사소통이 부재했다는 것이다(205쪽/이치열).” 같은 이야기는 참 좋습니다. 여러모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밑앎입니다. 애써 《사람들 사이로》 같은 책에서 한 꼭지로 들어갈 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진기를 쥔 사람은 사진기를 쥐기 앞서 밑앎으로 익힐 이야기입니다. 낱말을 바꾸어 글쟁이나 그림쟁이나 연극쟁이나 영화쟁이나 방송쟁이나 신문쟁이 누구나 깊이 곱씹을 이야기입니다. 더욱이, 《사람들 사이로》는 이런 밑앎이 아닌, 참말 사진쟁이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얼크러지거나 설크러지며 빚어낸 사진삶을 차곡차곡 실어내야 해요. 사진쟁이 둘레 가장 너르며 흔한 이야기를 가장 고우며 밝은 사진삶으로 엮어내야 해요. 누구나 가진 사진기로 누구도 못 담는 사진삶을, 다른 누가 아닌 ‘다큐사진 모임 사진쟁이’부터 참다우며 제대로 깨닫거나 받아들이면서 신나게 나누는 모습을 알뜰살뜰 풀어놓아야 합니다.


..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서도 내가 기억해야 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보낸 소중한 시간을 놓치고 있었구나, 했다 ..  (113쪽/정은정)


 가만히 보면, 《사람들 사이로》는 다큐사진을 하는 이 나라 사진쟁이들 어설픈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울이라 할 만합니다. 다큐사진을 한답시고 설치는 남우세스러운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뉘우침책(고백록)’인지 모릅니다.

 다큐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사진이든 하나같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복닥이는 즐겁고 애틋한 나날’을 담는 손짓 눈짓 몸짓입니다. 그리고 사랑짓 믿음짓 나눔짓이에요.

 단추질에서 그치는 사진이 아니기를 빕니다. 단추질에서 헛도는 다큐사진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단추질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사진모임이 아니기를 꿈꿉니다. 단추질과 볼펜질에 앞서, 사람들하고 사랑스러운 품앗이요, ‘사람들’이란 바로 나부터 함께하는 ‘그 사람들’임을 살갗으로, 뼈마디로 받아들일 나날을 기다립니다. (4343.11.28.해.ㅎㄲㅅㄱ)


― 사람들 사이로 (이미지프레스 엮음,청어람미디어 펴냄,2006.12.22./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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