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꽃
조현예 지음, 박태희 사진 / 안목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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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느낌이 사랑일 때에 바야흐로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28] 조현애·박태희, 《사막의 꽃》(안목,2011)


 나는 1998년에 사진찍기를 처음 배웠습니다. 사진읽기 또한 이때에 처음 배웠습니다. 신문배달을 하며 먹고살던 나는 신문기자가 되는 길이 아니면 그저 신문배달만 하면서 먹고살겠다고 꿈을 꾸었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면 신문배달만큼 ‘쓰레기 안 만들면서 조용하고 착하게 땀흘려 일해서 살림을 꾸리는’ 좋은 일도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이런 제도권학교에서 시달리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느꼈지만 막상 고등학교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 둘레에 아무도 고등학교를 그만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 주며 힘을 북돋아 준 동무 또한 없었습니다.

 어영부영 고등학교를 마치고 1994년에 대학교라는 데에 들어갔으나, 대학교 또한 고등학교와 다를 구석 없이 제도권학교였고, 대학생 선배라는 사람은 그닥 대단하지 않을 뿐더러, 대학 교수라 해서 지식이나 지성이나 슬기나 아름다움을 건사하지 못하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래도 한 학기는 버티자고 다짐했지만, 한 학기를 버티면서도 대학교는 지나치게 비싼 돈을 받으며 참배움을 나누지 못한다고 깨달아 몹시 갑갑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둘째 학기에는 강의는 거의 안 듣고 도서관과 학교 앞 새책방과 서울 시내 여러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배움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대학교 강의실 울타리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1995년 가을에 스스로 영장을 받아 군대에 들어갑니다. 1997년 겨울에 군대에서 용케 살아남아 사회로 돌아옵니다. 군대 가기 앞서 하던 신문배달을 잇습니다. 이제 대학교에는 자퇴서를 내고 싶지만 어머니가 한 해를 더 다녀 보고 네 마음대로 하라 말씀하셔서 한 해를 더 다니기로 하면서, ‘고졸자도 신문기자로 받아 준다면 신문기자가 되고 싶다’고 꾸는 꿈에 따라 신문방송학과 수업을 듣기로 하고, 이때에 보도사진 강의를 듣습니다. 이무렵 한국외대와 중앙대에서 강사로 뛰던 허현주 님이 보도사진 강의를 했고, 허현주 님은 ‘사진찍기’와 함께 ‘사진읽기’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한편 ‘사진글쓰기’를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찍기와 읽기와 쓰기, 여기에 듣기 한 가지까지 더했습니다.

 어버이한테서 고운 목숨 받고 태어난 아이가 듣기와 말하기와 읽기와 쓰기로 말과 글을 익히듯, 허현주 님 보도사진 강의는 네 가지를 고루 받아들이면서 ‘기계 같은 사진기자’가 아니라 ‘사람내음이 나는 사진쟁이’가 되도록 길동무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요, 이무렵 보도사진 강의를 듣는 사람 가운데 나만 혼자 사진기가 없어 쩔쩔매다가 1회용 사진기를 쓰다가, 또 망가진 싸구려 사진기 하나를 3만 원 주고 고쳐서 쓰다가, 나중에는 후배한테서 낡은 사진기 하나를 얻어 5만 원을 들여 고쳐서 쓰는 동안 ‘사진기는 목걸이로구나’ 하고 배웁니다. 또, 사진을 찍는 사람은 다른 사람 눈에는 ‘사진이 보이’겠지만, 이렇게 보이는 사진에 사진쟁이가 담을 이야기란 곧 ‘내 사랑과 믿음’이요, 이리하여 내 사진을 보는 사람은 사진이 아닌 ‘내 사랑과 믿음이 깃든 이야기’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사진책 《사막의 꽃》(안목,2011)을 펼칩니다. 글 하나와 사진 하나가 예쁘게 어우러진 사진책입니다. 참 오랜만에 예쁜 사진책을 만났습니다. 아니, 참 오랜만에 ‘나라안 예쁜 사진책’을 만났습니다. 나라밖 예쁜 사진책은 수두룩하게 흔히 보지만, 나라안 예쁜 사진책은 더없이 드뭅니다.

 나라안 사진책들은 하나같이 조금 더 잘 팔리거나 한결 돋보이거나 더욱 이름값 높이려는 예술이나 작품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책 《사막의 꽃》은 작품집이 아니요, 예술품이 아닙니다. 그저 사진책 하나입니다.

 조현애 님은 “나는 새벽 길을 좋아했다 / 자전거타기를 더 좋아했다 / 네게 가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12쪽).” 같은 글을 적바림했고, 박태희 님은 새벽 길을 좋아하고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며 너한테 가는 길을 좋아하는 느낌을 당신 사랑과 믿음을 사뿐히 실어서 사진 하나로 보여줍니다.

 조현애 님은 다시 “나에게 네가 없다면 삶이 없다(26쪽).” 같은 글을 적바림하고, 박태희 님은 나한테 네가 없으면 내 삶이 어떠한가 하는 이야기를 당신 사랑과 믿음에 따라 사진 하나로 드러냅니다.

 조현애 님은 거듭 “뉴욕은 내 꿈을 대변하였으나 / 어느새 내 꿈을 잡아먹은 도시가 되어 버렸네 /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추위와 / 택시 드라이버, 트레비스의 고독을 기억하는 동안 / 가난한 예술 혼이 내 꿈을 지켜주었지만 / 지하철을 버리고 택시를 타고 차를 몰고 /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순간부터 / 꿈은 조금씩 내 곁을 떠나 버렸네(125쪽).” 같은 글을 울먹이며 적바림하고, 박태희 님은 사랑길과 믿음길 결을 찬찬히 어루만지면서 사진 하나를 넌지시 내밉니다.

 조현애 님은 새삼 “나도 널 초대해서 좋은 시간 갖고 싶다 / ‘네 목소린 참 정겹다’ 말해 주고 싶다(138쪽).” 같은 글을 적바림했으며, 박태희 님은 당신한테 사랑스러운 님을 부르는 손짓과 목소리라 할 만한 사진을 하나 살그머니 내놓습니다.

 사진은 내 느낌입니다. 글은 내 느낌입니다. 그림은 내 느낌입니다. 노래와 춤과 연극과 영화 또한 내 느낌입니다. 밥하기와 빨래하기와 청소하기와 아이돌보기 모두 내 느낌이에요. 논일과 밭일과 바닷일도 하나같이 내 느낌이에요.

 나는 둘레 아이들한테고 어른들한테고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를 요사이에 꽤 자주 합니다. 어린 날 〈플란다스의 개〉라는 만화영화를 보았을 때에는 느끼거나 알아채지 못한 이야기를 서른일곱 나이에 바야흐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열 살 안팎 어린이였던 내 지난날을 더듬으면, ‘네로가 그림을 좋아한’ 줄을 잘 떠올리지 못했어요. 아니, 생각조차 안 했습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와 프랑스가 맞닿은 곳에서 살아가는 예쁘장한 네로와 아로아와 파트라슈 이야기쯤으로만 떠올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들여다보니, 또 위다 님이 쓴 원작소설 《플랜더스의 개》(비룡소,2004)를 읽으니, 이 얘기에서 네로가 그림을 얼마나 아끼거나 좋아하느냐는 대단히 큰 자리를 차지하더군요. 가난하고 학교 문턱은 밟은 적이 없으며 한겨울에도 양말과 장갑 없이 우유 나르기를 거든 네로는 ‘아로아를 그린 그림을 돈을 받고 팔지 못’해요. 네로는 스스로 그린 그림 가운데 어느 그림도 돈을 받고 누구한테 준 적이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립니다. 아무런 그림 기법을 모르지만 네로가 품은 사랑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어떠한 그림쟁이도 모르나, 오직 하나, 루벤스라는 사람이 어떠한 믿음으로 그림을 그려서 나누었는가를 되새기면서 네로는 네로라는 아이 가슴에서 피어나는 믿음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네로가 본 그림은 루벤스 님이 그림 그린 한 점뿐이었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다가 죽기 앞서 루벤스 님 다른 그림 두 점을 더 보았습니다.

 사진책 《사막의 꽃》을 펼치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책이 사진책이 되자면 이와 같이 내 느낌, 곧 글을 쓰든 사진을 찍든, 내 느낌이 사랑이며 믿음일 때에 사진책이 됩니다.

 글로 빚는 문학책이든 인문책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을 더 많이 담거나 정보를 한껏 싣는다 해서 문학책이나 인문책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을 담아야 문학책이고, 믿음이 감돌아야 인문책입니다.

 어린이문학가 이원수 님을 놓고, 요즈음 이분이 ‘친일작가’이니 아니니 하고 떠들썩합니다. ‘생계형 친일’이니 ‘친일이면 다 똑같은 친일’이니 하고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하나 궁금합니다. 이원수 님을 놓고 친일이요 아니요 하고 읊는 이들 가운데 이원수 님 발자취를 찬찬히 더듬어 보았다든지, 이원수 님이 일제강점기부터 1981년에 구강암으로 숨을 거두기까지 어떠한 글을 써서 어린이한테 읽히려 했는지를 곰곰이 헤아려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1980년 전라도 광주 일을 병자리에서 먼 소식으로 들으면서 이제 더는 글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어 꼼짝도 못하면서 광주 이야기를 동화로 써서 아이들한테 들려주고 싶은데 못할 수밖에 없으니 너무 안타깝다 읊조린 말마디를 곱씹으면서, 1981년 전두환 독재정권 사슬을 슬프게 바라보며 숨을 거둔 마지막길을 톺아보는 사람은 있기나 있을까요.

 나는 서정주 님 시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서정주 님이 전두환이나 박정희를 기리는 시를 썼대서 서정주 님을 그닥 안 좋아하지 않습니다. 서정주 님 시를 읽을 때에 내 가슴이 울렁이는 사랑이나 믿음이 딱히 없기 때문에 그닥 안 좋아합니다. 잘 썼다는 글이라든지 토박이말을 잘 살렸다는 글이라든지 이름값 높다는 사람 글이라든지 하나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어수룩하게 쓰면 어떻습니까. 글에 사랑이 있어야 글이지요. 이름값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글에 믿음이 깃들어야 글이지요.

 사진작가로 이름이 드높아야 훌륭한 사진이지 않습니다. 사진마다 알알이 깃든 사랑이 있을 때에 바야흐로 사진이라고 일컫습니다. 사진 흐름을 뒤흔들거나 사진 역사를 새로 쓰도록 했다는 사진이래서 나한테까지 아름답다 싶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내 눈물샘을 터뜨리면서 아름답거나, 내 웃음보를 터뜨리면서 아리따울 때에, 나는 비로소 이 하나를 사진이로구나 하고 이야기합니다.

 어린이문학으로 한삶을 바친 이원수 님은 틀림없이 ‘친일시’를 썼으나 ‘친일작가’가 아닌 ‘어린이문학가’입니다. 한때 저지른 당신 잘못을 온삶을 바친 ‘어린이문학 한길 걷기’로 뉘우쳤어요. 왜냐하면, 이원수 님 동시나 동화나 수필이나 번역동화를 읽다 보면, 이분이 얼마나 사랑과 믿음을 당신 글에 녹여냈는지 느낄 수 있거든요.

 사진책 《사막의 꽃》을 거듭 되읽으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자가용 모는 사람을 되게 싫어합니다. 자가용하고 헤어지지 못하는 사람을 아주 미워합니다. 그러나, 차를 타야 할 때에는 차를 몰아야 하고, 저 또한 때때로 차를 얻어 타요. 자가용을 모느냐 안 모느냐는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어떤 마음이고 어떤 삶이냐가 대수롭습니다. 조현애 님처럼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순간부터 / 꿈은 조금씩 내 곁을 떠나 버렸네” 하고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이 목소리를 사진 하나로 예쁘게 담아서 울먹이는 이야기를 마주하고 싶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자가용을 버려야 이라크 파병을 막을 수 있다”고 피울음 나는 목소리로 외쳤는데, 자가용을 버리지 못해 이라크 파병을 막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을 곱게 어루만지는 글을 당신이 숨을 거두는 마지막날까지 예쁘게 적바림해 주었습니다. 예쁜 삶으로 예쁜 글을 쓰고, 예쁜 사랑으로 예쁜 사진을 빚습니다. (4344.4.15.쇠.ㅎㄲㅅㄱ)


― 사막의 꽃 (조현애 글,박태희 사진,안목 펴냄,2011.2.8./3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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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Frank's 'The Americans' : The Art of Documentary Photography (Paperback)
Jonathan Day / Intellect L & D E F A E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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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하지 않은 사진, 엉성하지 않은 삶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4]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les Americanis》(Delpire,2007)



 커다란 새가 하늘을 날아갑니다. 시골집 창문으로 새를 올려다봅니다. 먹이를 찾아 날아다니는 새는 거룩하지도 않으나 엉성하지도 않습니다. 봄날을 맞이해 왜가리며 해오라기며 곧잘 만납니다. 이 새들은 봄을 맞이해 깨어난 개구리를 즐겁게 잡아먹습니다. 멧기슭에 보금자리를 튼 멧새 또한 개구리랑 개구리알까지 즐겁게 잡아먹습니다. 개구리는 엉성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습니다.

 사진책 《les Americanis》(Delpire,2007)를 읽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읽습니다. 다 읽고 나서 또 천천히 천천히 읽습니다. 책상맡에 다섯 달쯤 꽂아 놓고는 틈틈이 천천히 천천히 읽습니다.

 나는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이든 유섭 카쉬이든 요제프 쿠델카이든, 이런 사람들 사진을 사진잔치에서 구경해 보지 않습니다. 아니, 사진잔치에서 로버트 카파이든 안젤 아담스이든 만나지 못합니다. 다만 한 번, 세바스티앙 살가도 사진은 사진잔치에서 만났습니다. 도무지 사진책으로 만나기 힘들다고 느끼던 어느 날, 마침 서울에서 살던 때에 살가도 사진잔치가 가까운 곳에서 열렸거든요.

 살가도 사진잔치를 보고 나서 십만 원을 웃도는 살가도 사진책을 두 권 장만했습니다. 하나를 먼저 사고 두 달 뒤에 살림돈을 추슬러 새로 하나 샀습니다. 로버트 카파도 안젤 아담스도 요제프 쿠델카도 유섭 카쉬도 푼푼이 살림돈을 그러모아 사진책을 장만해서 천천히 천천히 읽었습니다.

 썩 좋다 하기 어려운 사진장비를 쓰는 내 삶을 헤아립니다. 내가 사진책을 장만하는 데에 돈을 들이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이 ‘마크 투’이니 ‘파노라마’이니 ‘핫셀’이니 ‘롤라이’이니 ‘라이카’이니 번쩍거리며 들고 다닐 때에 군침을 흘릴 까닭이 없습니다. 그동안 사진책에 들인 돈이라면 이 모든 사진장비를 두루 꿰차고도 남을 테니까요.

 나라밖 사진책 열 권이면 백만 원이 거뜬히 나옵니다. 나라밖 사진책 백 권이면 천만 원이 가벼이 나옵니다. 새책도 비싸고 헌책도 비쌉니다. 몇 천 권에 이르는 사진책을 이래저래 장만하면서 내 주머니는 어느 하루라도 넉넉한 적이 없습니다. 내 사진감을 필름으로 찍는 동안 필름값 떨어지는 소리를 안 들은 날이 없습니다. 찍고 싶은 만큼 실컷 사진을 찍은 때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필름사진을 찍을 때마다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필름사진을 찍기 때문에 스스로 가리거나 추리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디지털사진을 찍을 적마다 가슴이 아립니다. 그렇지만 가슴이 아린 채 디지털사진을 찍으니까 ‘요 작은 녀석으로 내가 담을 수 있는 사진’을 아낌없이 담습니다.

 사진책 《les Americanis》를 찬찬히 넘깁니다. 로버트 프랭크 님이 담은 《미국사람들》에는 미국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진책에 실린 사람이 영국사람이거나 일본사람이거나 한국사람일 까닭이 없습니다. 모두들 미국사람입니다.

 《미국사람들》에 나오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사람들》에 나오는 사람들은 잘난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사람들》에 나오는 사람은 숨겨지거나 감춰진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사람들》에 나오는 사람은 꾀죄죄하거나 못난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사람들》에 나오는 사람은 뒷골목 사람이 아니요, 앞골목 사람 또한 아닙니다. 그저 미국사람을 담은 《미국사람들》입니다.

 미국사람이라 해서 더 대단하거나 어리숙하지 않습니다. 그냥 미국에서 살아가니 그 모양과 결대로 미국사람입니다. 티벳사람이라 해서 더 대단하거나 어설프지 않습니다. 그저 티벳에서 살아가니 이 모습과 무늬대로 티벳사람이에요. 네팔에 간대서 인도에 간대서 버마에 간대서 파키스탄에 간대서 이란에 간대서 몽골에 간대서 …… 무슨 사진을 무슨 사람을 무슨 삶을 무슨 사랑을 얻거나 마주할는지요.

 잘 찍어야 할 사진이 아닙니다. 잘못 찍어도 될 사진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대로 찍을 사진입니다. 내가 싫어하지만 돈을 벌어야 하기에 찍을 사진이 아닙니다.

 내가 보는 자리에서 찍으면 되는 사진입니다. 내가 보지 않았으나 내가 본 듯 꾸며서 찍을 사진이 아닙니다.

 잘 나거나 못난 사람이 아닌 나와 내 둘레 사람을 즐거이 찍으면 넉넉한 사진입니다.

 내 사진은 내 삶입니다. 내 사진에 담는 사람은 내 모습이거나 내 둘레 사람들 모습입니다. 내 사진에 깃들이는 사랑은 내가 나 스스로와 내 이웃한테 깃들이는 사랑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대로 꾸릴 삶입니다. 내가 썩 좋아하지 않지만, 돈을 벌어야 하니까 억지로 얄궂은 매무새로 꾸릴 삶이지 않습니다.

 참을 밝힌다든지 거짓을 까밝힌다든지 하는 내 손이 아닙니다. 보이는 그대로가 참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참이 아니며, 보이는 그대로가 거짓일 수 없으며, 보이지 않는 어떤 거짓이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배부르겠지요. 누군가는 배곯겠지요. 누군가는 힘겨이 일할 테지요. 누군가는 하느작거리며 노닥거리겠지요. 힘겨이 일하는 모습을 찍는대서 사회고발이 아닙니다. 노닥거리는 모습을 담는대서 한갓진 놀음놀이나 예술이 아닙니다.

 사진은 그대로 사진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사진이면서 대단한 사진입니다. 엉성하지 않은 삶이면서 어수룩한 삶입니다.

 로버트 프랭크 님은 그예 미국사람을 사진으로 담아 《미국사람들》을 내놓습니다. 로버트 프랭크 님이 살아가는 결대로 마주한 미국사람 이야기가 《미국사람들》에 깃듭니다. 이 책 하나로 미국사람 삶을 마무르지 않습니다. 이 책 하나가 미국사람 모든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패션모델만이 미국사람이지 않고, 권력자나 문화예술인만이 미국사람이지 않습니다. 이름난 운동선수를 찍어야 미국사람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또한, 이름 안 났다는 여느 농사꾼이나 청소부를 찍는대서 새삼스럽거나 훌륭한 미국사람 사진이 되지 않아요. 모두 미국사람이고, 한결같이 사람이며, 똑같이 사랑스러운 목숨입니다. (4344.4.1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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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el Adams (Hardcover)
Lauris Morgan-Griffiths / Quercus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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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남기는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3] 안젤 아담스(Ansel Adams), 《landscapes of the American West》(Quercus,2008)
 Lauris Morgan-Griffiths (엮음)


 자연을 찍은 사진이란 자연을 찍은 사진입니다. 그러나, 자연이 아닌 풍경을 찍은 사진이라면 ‘자연 사진’이 아닌 ‘풍경 사진’입니다. 꽃을 찍으면 ‘꽃 사진’입니다. 꽃에 깃든 자연을 찍을 때에는 ‘자연 사진’이지만, 자연을 헤아리지 않고 꽃만 찍는다면 ‘꽃 사진’에 그칩니다. 나무를 찍거나 하늘을 찍거나 바다를 찍거나 논밭을 찍어도 매한가지입니다. 사진기를 쥔 사람 스스로 나무만 바라본다면 ‘나무 사진’이지 ‘자연 사진’이 될 수 없습니다. 시골 논밭을 찍었대서 ‘자연 사진’이나 ‘시골 사진’이 되지 않아요. 때로는 ‘논밭 사진’조차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으로 찍힌 모습은 논밭일지라도, 사진기를 쥔 사람은 논밭을 논밭 그대로 바라보거나 받아들이면서 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골목길을 찍었기 때문에 언제나 ‘골목 사진’일 수 없어요. 사진감은 골목길이지만, 사진쟁이 마음이 골목길을 골목길 터전 그대로 껴안지 못한다면 ‘골목 사진’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 얼굴을 찍거나 사람 몸을 찍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말해서 ‘얼굴 사진’이나 ‘사람 사진’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사진쟁이 스스로 한 사람을 한 목숨으로서 사랑하면서 찍느냐 아니냐에 따라 ‘사람 사진’인지 아닌지가 갈립니다. 기계처럼 찍어대는 일이야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만, ‘사람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하거나, 나아가 ‘사진’이라 할 만하도록 이루어 내는 일은 누구나 하지 못합니다.

 안젤 아담스 님이 빚은 사진책 《landscapes of the American West》(Quercus,2008)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안젤 아담스 님은 언제나 ‘미국 대자연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고들 일컫습니다. 안젤 아담스 님 사진에서 사진감은 틀림없이 ‘미국 대자연’입니다. 북중미 대자연을 큼지막한 사진기로 한 장씩 천천히 담았습니다. 그렇다면, 안젤 아담스 님이 빚은 사진에 깃든 이야기 또한 ‘미국 대자연’이라 할 만하를 헤아려야 합니다. 사진감이 미국 대자연이래서 사진이야기 또한 미국 대자연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책 《landscapes of the American West》는 여섯 갈래로 나눕니다. 첫재는 하늘이고, 둘째는 물이며, 셋째는 푸나무이고, 넷째는 돌이요, 다섯째는 집입니다. 마지막 여섯째는 삶입니다.

 하늘에서 비롯하여 물로 흐르다가는 푸나무에서 기운을 얻은 다음 돌로 우뚝 서고는 집을 마련합니다. 이리하여 삶입니다.

 안젤 아담스 님은 무슨 사진을 이루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까요. 안젤 아담스 님 사진에는 어떠한 이야기가 깃들면서 우리가 사진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까요.

 하늘은 하늘 그대로가 아닙니다. 내가 바라보는 하늘, 곧 사람이 올려다보는 하늘입니다. 물은 그저 물이 아닙니다. 내가 마시는 물이요, 내 목숨을 이루며 건사해 주는 물입니다. 푸나무는 그예 푸나무가 아니에요. 내 밥이 되는 풀이요 내 집을 짓도록 몸을 내어주는 나무입니다. 돌은 딱딱하게 굳은 흙이나 모래일 뿐일까요.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디디며 섰을까요. 내가 선 지구별이란 어떤 곳일까요. 더운 곳에서는 더운 곳대로 집을 짓습니다. 추운 곳에서는 추운 곳대로 집을 짓습니다. 저마다 다 다른 터에 걸맞게 집을 짓습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저마다 다 다른 터에서 저마다 다 다른 삶을 일굽니다.

 사람들은 착한 일을 하기도 하지만, 미운 짓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참답게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릇되게 뒹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아름답게 어우러지기도 하지만, 돈이나 이름값이나 권력 때문에 등치거나 짓밟기도 해요.

 우리는 햇볕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구름을 모르면서 살아갈 수 있나요. 하늘에서 비나 눈이 내리지 않아도 우리 목숨을 이을 수 있나요. 가게에서 돈을 치러 먹는샘물 페트병을 사다 먹으면 목이 안 마르나요. 꼭지를 틀어 물을 쓰면 되나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도록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꽁꽁 뒤덮는 도시에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나요. 안젤 아담스 님은 참말 ‘풍경 사진’을 찍은 사람일까요. 안젤 아담스 님은 ‘너른 자연 모습을 사진으로 담은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붙일 만한 사진쟁이로 그칠 수 있나요.

 한국땅에서 설악산을 찍거나 제주섬을 찍는 사람들은 왜 찍는가 궁금합니다. 풍경을 찍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은 얼마나 좋은 풍경일는지 궁금합니다. 왜 내가 살아가는 보금자리나 마을은 어여쁜 풍경으로 담지 않고, 굳이 자가용을 몰아 멀리멀리 나들이를 가거나 비행기를 타고 바깥으로 나다니며 사진을 찍나요.

 가난한 사람은 티벳이나 인도에만 있나요. 내 살림집 옆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나요. 한국에는 골목길이 없나요. 한국에는 높은 산이나 시원한 골짜기가 없을까요. 한국에서는 어떤 햇볕을 쬘 수 있는가요. 이 나라에서는 어떤 바닷물을 마시고 어떤 갯벌에서 어떤 조개를 캐서 먹으려나요.

 모든 사진은 사람을 남깁니다. 사람 모습이 드러나도록 찍으며 사람을 남기는 사진이 되기도 하지만, 사람 그림자란 얼씬도 하지 않지만 사람을 남기는 사진이 되기도 합니다.

 모든 사진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고마운 목숨 하나 얻으며 살아가며 복닥이는 이야기를 담는 사진입니다.

 모든 사진은 사람이 빚습니다. 착한 사람이든 미운 사람이든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똑똑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엉망진창 사람이든, 누구나 제 깜냥껏 살아가는 대로 사진 하나 빚습니다.

 겉치레로 사진을 하는 사람도 사진을 남기고, 속마음으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도 사진을 남깁니다. 돈벌이로 사진일을 붙잡는 사람도 사진을 남기며, 집에서 내 아이 사랑하며 돌보는 사람도 사진을 남깁니다.

 누군가는 그럴싸한 사진책을 몇 권 내놓거나 그럴듯한 대학교수 이름표를 앞에 내밀면서 사진을 한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아마추어나 풋내기라는 이름을 언제까지나 꼬리표로 붙이면서 사진책은커녕 아무런 사진비평을 듣지 못하면서 홀로 좋아하는 사진을 혼자서 누리며 스러집니다.

 안젤 아담스 님 사진은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안젤 아담스 님 사진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안젤 아담스 님 사진은 그리 거룩하지 않습니다. 안젤 아담스 님 사진은 그리 어수룩하지 않습니다.

 삶이 대단할 때에 사진 또한 대단한데, 대단한 삶이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내 어머니나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여기기에, 내 어머니나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찍은 사진이 참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삶이 거룩할 때에 사진 또한 거룩한데, 거룩한 삶이란 어떠한지 알쏭달쏭합니다. 저로서는 제 살림을 제 손으로 일구며 꾸리는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느끼기에, 여느 농사꾼이나 고기잡이들이 사진을 찍는다 할 때에, 이들 사진이 참 거룩하다고 느낍니다. 아니, 굳이 스스로 사진기를 쥐지 않아도 숱한 사진쟁이들이 농사꾼이나 고기잡이 삶을 사진으로 담아 주니까, 이 사진으로 들여다보기만 해도 참 거룩하다고 느낍니다.

 사람을 남기는 사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발자국을 남기는 사진입니다. 안젤 아담스 님은 당신이 바라보며 사랑하는 삶을 당신 사진에 차곡차곡 아로새깁니다. 자연이나 대자연이 아닌 ‘미국 서쪽 땅’에서 ‘미국 서쪽 땅 사람들’하고 어울리며 지내던 이야기를 사진으로 차근차근 담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삶을 당신이 아끼는 사진으로 옮깁니다. 당신이 고맙게 여기는 사람들 삶을 당신이 고맙게 여겨 마지 않는 사진으로 그립니다. (4344.4.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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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찾아 떠나다 - 사진기자가 유럽에서 풀어가는 사진 이야기
채승우 지음 / 예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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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는 어떤 사진과 삶이 있을까
 [찾아 읽는 사진책 26] 채승우, 《사진을 찾아 떠나다》(예담,2010)



 사진작가나 사진기자로 일하는 분들이 으레 사진책을 내놓습니다. 그저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사진 이야기를 글이나 사진으로 엮어 사진책으로 묶는 일이란 아주 드뭅니다. 주머니에 돈이 있다면 혼자서라도 사진책을 내놓겠지요. 주머니에 돈이 없이 사진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사진찍기를 할 때부터 무척 고단합니다.

 주머니가 가난하대서 사진을 못 찍을 수 없습니다. 주머니가 넉넉하대서 사진을 잘 찍을 수 없습니다. 주머니가 가난하기에 스스로 사진을 익히면서 스스로 내 몸과 살림에 맞게 사진을 받아들입니다. 주머니가 넉넉하기에 이름난 사진학교에도 들어가고 나라밖으로 사진마실을 다녀옵니다. 수많은 사진책을 걱정없이 사서 읽을 만하겠지요.

 주머니가 가난한 사진쟁이나 사진즐김이는 사진책 사는 일을 엄두를 못 냅니다. 그나마 도서관에서 사진책이라도 갖추어 주면 좋으련만, 사진책을 찬찬히 갖추는 도서관이란 없습니다. 사진갤러리 같은 데에 찾아가면 온갖 사진책을 마음껏 돌아볼 수 있나요. 사진갤러리에서는 어떤 사진책을 얼마나 갖추려나요.

 다른 나라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사진은 으레 ‘돈과 이름과 힘이 있는’ 사람들 테두리에서 이루어지곤 합니다. 작게 조용히 즐기는 사진이 문화나 예술이나 삶으로 이루어지기에는 퍽 빠듯합니다.

 1995년에 사진기자가 되어 열 몇 해 만에 여섯 달짜리 ‘휴가 또는 외귝연수’를 누릴 수 있었다는 채승우 님이 내놓은 사진책 《사진을 찾아 떠나다》를 읽습니다. 채승우 님은 당신이 사진기자로 일하던 곳을 신문사 아닌 ‘회사’라고 말합니다. 사진기자를 쓰는 ‘신문사 아닌 회사’에서 사진기자 한 사람을 여섯 달 동안 ‘휴가 또는 외국연수’를 보내 줄 만한 곳이 몇 군데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예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채승우 님은 사진마실을 떠났고, 《사진을 찾아 떠나다》가 태어납니다. 채승우 님은 돈을 마음껏 쓸 수 없었다고 얘기하지만, 유럽으로 가는 편도 비행기삯뿐 아니라 마땅한 사진기나 필름이나 메모리카드 하나 살 만한 주머니가 안 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필름값은 메모리카드값보다 비싸다지만, 메모리카드가 있으려면 저장장치 부피가 넉넉한 셈틀을 갖추어야 합니다. 필름사진이나 디지털사진이나 장비값에 들여야 하는 돈은 매한가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사진을 하자면, 나를 낳아 기른 어버이한테 돈이 많다든지, 내가 용케 돈 많이 받는 일터에 들어가 일할 수 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채승우 님은 “유럽을 여행하며 사진을 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 땅의 분위기와 냄새는 사진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9쪽).” 하고 말합니다. 마땅하고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도 똑같습니다. 내 이웃을 알려면 내 이웃을 찾아가야 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내 이웃을 다룬 책을 찾아서 읽는다든지 방송이나 기사를 읽는다고 내 이웃을 알거나 느낄 수는 없어요. 아니, ‘책에 적힌 모습’은 알겠으나, 막상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생각조차 못하기 일쑤입니다. 유럽을 마실하면서 유럽 냄새와 숨결을 맡을 수 있을 때에, 나로서는 ‘유럽에서 빚는 삶에 걸맞게 사진을 이루는 길’을 느끼거나 배웁니다. 이 나라 곳곳을 차근차근 디디며 이 나라 이웃을 마주한다면, 나로서는 ‘한국에서 일구는 삶에 알맞게 사진을 즐기는 길’을 느끼거나 배웁니다.

 채승우 님은 “축제가 끝날 때쯤, 나 역시 사진이 대중과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동의하게 되었다.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실험이란 적어도 저널리즘 사진에는 무의미할는지 모른다(39쪽).” 하고 말합니다. 이 또한 마땅하며 옳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대중이란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민중이란 또 누구일까요. 나는 대중 가운데 하나일까요, 민중 가운데 하나일까요. 또는, 나는 국민인가요 시민인가요. 나는 여느 사람인가요, 또는 읍민이나 면민인가요, 아니면 군민이거나 시골사람이거나 도시사람인가요.

 실험이란 어떤 일이고, 실험은 왜 할까요. 함께 가는 길이라 할 때에 ‘함께 가는 길을 가는 까닭’이란 무엇이고, 함께 가는 길은 어느 때에 즐거울까요. 마냥 함께 가기만 하면 언제라도 좋을는지요.

 채승우 님은 “사진가들이 사진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 대중에게 보이고 반응을 얻을 공간이 전시장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전시장과 잡지의 지면은 말하기 방법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전시장에서 말하기 위해서는 사진의 모양새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46쪽).” 하고 말합니다. 지난 2010년 사진잡지 《포토넷》이 사진잡지를 더 펴낼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에 사진잡지가 아예 없지 않습니다만, 참말 사진을 이야기하거나 사진을 사랑하거나 사진을 보여주거나 사진을 나누려 하는 사진잡지는 이제 없다고 말하더라도 틀리지 않습니다. 다른 몇 가지 사진잡지를 깎아내리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몇 가지 사진잡지들이 사진잡지다운 모습과 뜻과 넋을 밝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누가 찍고, 사진은 누가 보며, 사진은 누가 즐길까요. 아무개가 찍으면 프로사진가 좋은 작품이고, 저무개가 찍으면 아마추어 풋내기 습작이 될는지요. 사진으로만 바라보아도 참으로 아름답기에 꾸준하게 태어나는 사진책일까요. 사진쟁이 이름이 없이 사진만 훌륭할 때에도 얼마든지 사진책을 엮어서 내놓는 한국 사진밭인가요.

 “지금 패션사진은 현대 사진 예술의 중요한 한 갈래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어떤 사진가가 대중에게 인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예술가로 취급받는 것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244쪽).” 하는 말을 가만히 되씹습니다.

 ‘사진은 대중과 함께 가야 한다’고 느낀다는 채승우 님이라 한다면, 이 말은 스스로 어긋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스스로 느낀다 하더라도 스스로 살아가려는 길은 다를 수 있어요. ‘대중한테 사랑받는 사진을 찍는다지만, 이이는 그저 상업사진을 하는 사람일 뿐, 예술사진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하고 말할 만합니다. 또한, 상업사진이래서 굳이 예술사진으로 나아갈 까닭이 없고, 상업사진은 상업사진으로도 훌륭합니다.

 상업사진이란 돈을 버는 사진입니다. 처음부터 ‘돈을 벌겠다’고 해서 찍을 때에 상업사진입니다. 패션사진이란 상업사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 옷차림을 살피는 사진이라 한다면 상업사진이 아닐 터이나, 오늘날 한국에서든 나라밖에서든 이루어지는 모든 패션사진은 돈을 버는 뜻으로 찍는 사진입니다. 옷을 더 많이 팔아 돈을 더 많이 벌려는 회사에서 일감을 맡기는 패션사진이지, 돈하고는 동떨어진 채 예술을 이루려는 패션사진이란 없어요.

 생각해 보면, 돈벌이를 꾀하는 사진을 ‘사진이라 말해야 하는가’부터 따져야지 싶습니다. 예술사진이건 아니건, 사진인가 아닌가부터 따져야지 싶습니다. 상업사진이 ‘장사’로만 그치는지 ‘장사를 하며 즐기는 사진’인지를 따져야지 싶어요.

 책방 일을 하는 사람이나 책을 만드는 책마을 일꾼을 헤아려 봅니다. 책방 일꾼이나 책마을 일꾼이나 책을 팔아야 합니다. 언제나 장사를 합니다. 그러나, 책방 일꾼이 장사만 꾀한다든지 책마을 일꾼이 장사에만 마음을 빼앗긴다면 ‘우리가 즐겁게 마주할 만한 아름다운 책’은 만날 수 없습니다. 돈벌이를 꾀하기에 자꾸자꾸 베스트셀러 목록과 스테디셀러 책시렁을 마련합니다. 돈벌이는 돈벌이대로 해야 먹고살 수 있다는 뜻에서 하는 장사랑,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가멸차고 싶대서 하는 장사는 아주 달라요.

 돈을 버는 일이 나쁠 수 없습니다. 돈만 벌어들이니까 나쁘고, 돈벌이에 빠져 내 삶을 놓치거나 잃으니 나쁩니다. 돈은 벌지만 마음은 갈고닦지 못한다면, 돈을 벌면서 사랑과 믿음을 잃는다면, 이러한 장사꾼 삶이란 ‘상업’이라고만 해야지 ‘상업사진’이라 하면 안 됩니다. 예술사진이라 하기 어렵다 말하기 앞서, 사진이라 말하기부터 어려워요.

 우리는 사진을 이루는 바탕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을 다스리는 밑뿌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다이 살아가는 밑길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사진을 마주해야 합니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들어섰을 때, 저 안쪽에서 선명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잘생긴 청년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들의 화려한 문명과 눈 마주치기가 부끄러워 몰래 한 장 찍었다(343쪽).”는 대목을 읽으며 아차 싶습니다. 그저 즐겁게 바라보며 사진 한 장 슬쩍 찍은 다음, 나중에 국제우편으로 사진을 보내 주면 되잖아요. 부끄러울 까닭이든 달리 무어라 느낄 까닭은 없어요. 스스럼없이 찍은 다음 스스럼없이 ‘너희들 참 예뻐 보여 찍었다. 괜찮지?’ 하고 말을 걸면 됩니다.

 ‘화려(華麗)한 문명’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은 으레 한자말을 써 버릇하니까 말뜻을 제대로 모르기 일쑤인데, ‘화려’란 “환하게 빛나며 곱고 아름답다”를 뜻한다 합니다. “곱고 아름답다”를 함께 적는데, 곱다와 아름답다는 얼마나 어떻게 다를까요. ‘곱다’는 모두 일곱 가지 뜻으로 쓰인다는데, 첫째로 “산뜻하고 아름답다”이며, 둘째로 “빛깔이 밝고 산뜻하여 보기 좋다”입니다. 말뜻을 놓고 살피자면, “환하게 빛나며 아름답다”는 고스란히 ‘곱다’ 뜻하고 같습니다. 그런데 ‘곱다’를 풀이하면서 ‘아름답다’를 말하기 때문에 한자말 ‘화려’를 풀이하는 말마디는 앞뒤가 어긋납니다. 겹말이에요. 그러니까, 한자말 ‘화려’로 가리키려 하는 모습이란 ‘곱다’는 모습이거나 ‘아름답다’는 모습입니다.

 사진기자 채승우 님이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라는 책방에 들러 이곳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 ‘참으로 보기 좋다’고 느꼈을 테지요. 참으로 보기 좋은 ‘아름다운 삶’을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도무지 사진으로 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구나 싶은 모습이었을 테며, 몰래찍기·훔쳐찍기·도둑찍기를 안 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몰래찍기·훔쳐찍기·도둑찍기를 다른 이름으로 나타내자면 ‘스냅 샷’입니다. 누군가는 ‘결정적 순간’이라 할 테지요. 내 마음속으로 사무치도록 파고드는 아름다운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아 사진을 찍습니다. 내 마음에만 담기에 더없이 크며 어여쁘기에 사진으로도 옮깁니다. 나 혼자만 보고 즐기기 아쉬워 여럿한테 보여주려고 사진에 싣습니다.

 사진이란 내가 사랑하는 삶입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삶을 사진으로 담으려 하면 아주 따분합니다. 달품을 받는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찍어야 하는 사진이라면 ‘내가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거나 ‘내 가슴이 사무치게 저리는 모습’이 아니더라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찍’어야 합니다. 돈을 받고 찍으니까요.

 이리하여, 웬만한 여느 신문사진은 웬만한 여느 패션사진과 다를 바 없이 예술사진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사진이라 말하기 부끄럽습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 스스로 마음에서 샘솟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 사진기자 채승우 님이 여섯 달 동안 유럽으로 사진마실을 다녀오며 내놓은 책 《사진을 찾아 떠나다》를 들여다보면, 이 책 370쪽에 실린 사진 가운데 초점이 안 맞으면서 흔들린 사진은, 바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몰래 찍은 한 장뿐입니다. 맨 마지막 버스인지 자동차인지 창문으로 바라본 사진은 바람결이 묻는 사진이지 흔들린 사진이 아닙니다. 꼭 요 한 장만 초점 안 맞으면서 흔들린 사진입니다. 그런데, 370쪽에 이르는 채승우 님 사진으로서 ‘유럽마실을 다년 여섯 달 이야기’ 가운데 채승우 님 삶과 이야기와 가슴과 사랑이 묻어난 사진은 꼭 요 한 장뿐입니다.

 다른 사진들은 하나같이 ‘나 여기 갔다 왔어!’ 하는 느낌이 묻어납니다. ‘난 말이야, 이런 데까지 샅샅이 훑으며 돌아보았다구!’ 하는 몸짓이 깃듭니다. 그래요, 유럽을 갔다왔으니 유럽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줄 만하겠지요. 이런 길도 보여주고 저런 사진관이나 전시관도 보여줄 만합니다. 이름난 이런 사람들 모습이라든지, 손꼽히는 저런 작품 모습을 얼마든지 사진으로 내놓을 만합니다.

 여섯 달 동안 떠난 사진마실은 ‘구경하기’로 그칠 수 있습니다. 구경하기로 그친대서 나쁠 일이 없습니다. 여섯 달 동안 유럽사람 사진삶을 훔쳐보아도 괜찮습니다. 여섯 달 동안 하는 일 없이 유럽 맥주를 마시면서 후끈후끈한 밤을 보낸대서 나쁠 까닭이 없어요. 사진이란 굳어진 작품이나 틀에 박힌 예술이 아니니까요. 사진이란 이렇게 태어나 이렇게 살아온 한 사람 발자국이고, 저렇게 태어나 저렇게 부대낀 한 사람 손때입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고흐한테 일본 판화 같은 그림을 그리라 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난 판화쟁이한테 고흐처럼 그림을 그리라 할 수 없어요.

 덴마크사람은 덴마크땅에서 사진을 합니다. 중국사람은 중국땅에서 사진을 합니다. 북녘사람은 북녘에서, 남녘사람은 남녘에서 사진을 합니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은 틀림없이 한국보다 사진 솜씨나 문화나 예술이나 문명이나 기술이나 재주나 제도나 정책이나 교육이나 잡지나 책이나, 어느 모로 보나 한국보다 빼어나거나 뛰어납니다. 한국 사진밭은 나라밖에서 배워야 할 대목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배우거나 저것을 배우거나, 한국에서 사진을 할 사람은 한국사람입니다. 한국말을 하면서 한국사람을 이웃으로 삼는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한국사진을 합니다.

 채승우 님은 무슨 사진을 어디에서 어떻게 하고플까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을 찾아 유럽으로 여섯 달을 떠났다가 돌아왔는데, 막상 한국에서 하고픈 사진이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유럽에서 유럽나라 사진 이야기를 풀어내든, 유럽에서 손꼽히는 사진쟁이 이야기를 묶어내든, 이러한 이야기를 읽을 사람은 한국땅에서 살아갈 한국사람이고 한국 사진쟁이입니다.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이 《사진을 찾아 떠나다》를 읽을 일이나 까닭은 하나도 없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아니, 남한테 읽히기 앞서, 채승우 님 스스로 되읽을 때에 《사진을 찾아 떠나다》라는 책으로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지를 곰곰이 새겨야 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사진을 찾아 떠났습니다. 길을 떠났기에 보금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예전에도 사진을 했고, 오늘도 사진을 합니다. 오늘 하루, 채승우 님은 어디에서 누구하고 즐겁게 나눌 사진을 어떠한 넋과 손길과 마음밭으로 마주하시는가요. (4344.4.3.해.ㅎㄲㅅㄱ)


― 사진을 찾아 떠나다 (채승우 글·사진,예담 펴냄,2010.6.10./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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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일기 어린이를 위한 사진 동화 시리즈
이상교 지음, 황헌만 사진 / 소년한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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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꽃 한해살이를 사진으로 싣는 넋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2 : 황헌만·이상교, 《민들레 일기》(소년한길,2007)



 어느 한 해 4월 20일부터 이듬해 2월 2일까지 민들레꽃 한 송이를 가만히 들여다본 발자취를 담은 사진책 《민들레 일기》(소년한길,2007)는 이 땅 어린이가 이 땅 터전을 고이 돌아보도록 도우려는 작은 책입니다. 이 땅 어린이한테 이 땅 터전을 고이 느끼도록 돕는 이야기책이 퍽 드문 한국인데, 《민들레 일기》는 《민들레의 꿈》과 《내 이름은 민들레》하고 나란히 나오면서 ‘민들레꽃 한 송이로 읽는 자연’을 베풉니다.

 어린이가 보는 사진책을 내놓은 황헌만 님은 《섬서구메뚜기의 모험》(소년한길,2009)이라든지 《날아라, 재두루미》(소년한길,2010)라든지 《춤추는 저어새》(소년한길,2011)를 내놓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을 내놓겠구나 싶은데, 우리 어른들이 사진을 한다고 하면서 늘 놓치는 대목 가운데 하나인 ‘누구한테 사진을 읽히려 하고 누구하고 함께 볼 사진을 찍으려 하는가’를 슬기롭게 풀어내려 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우리 아이들한테는 글로 빚은 아름다운 책을 비롯해서 그림과 만화로 이루는 어여쁜 책에다가 사진으로 일구는 아리따운 책을 선물해야 하거든요. 어른들 스스로 ‘글만 있는 책’을 차츰 적게 즐기고 ‘사진을 함께 곁들이거나 사진을 퍽 많이 넣는 책’을 즐기면서, 막상 아이들한테는 ‘사진으로 이루어진 책’을 베풀지 않는 일은 알맞지 않습니다. 오늘날처럼 숱한 아이들이 손전화 사진기로도 사진을 찍을 뿐 아니라, 사진을 가까이에서 늘 마주하는 터전에서 ‘어린이 사진책’이 없거나 모자란 일은 몹시 안타깝거나 슬프다 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여느 어른이 그려서 아이한테 보여준다는 그림이나 만화를 보면 ‘일부러 유치하게 그리는’ 그림이나 만화가 참 많거든요. 아이들한테 삶을 삶 그대로 보여주면서 삶을 찬찬히 읽거나 느끼도록 이끄는 그림이나 만화가 꽤 드뭅니다. 이런 흐름에서 어른들이 아이 앞에서 할 몫 가운데 하나는, 글은 글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만화는 만화대로 사진은 사진대로 가장 훌륭하면서 어여쁜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린이 사진책 《민들레 일기》는 이제 막 꽃을 피운 민들레 꽃송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이야기를 엽니다. 시골자락 논둑에 피어난 민들레 꽃송이를 살며시 들여다봅니다. 시골자락에서 논을 갈고 눈삶이를 하며 모를 심어 돌보다가 벼베기를 하는 분들은 민들레를 잡풀로 여겨 뽑을 수 있지만, 그냥 그대로 꽃구경을 하려고 둘 수 있습니다. 서양민들레가 짓궂게 널리 퍼지니까 때로는 ‘요놈 서양민들레!’ 하면서 뽑을 테지만, 서양민들레이건 아니건 고운 꽃이라 여기며 얌전히 지켜볼 수 있습니다.

 논둑에 피어난 민들레는 논둑에 피어났기에 다른 자리에 피어난 민들레보다 좋은 보금자리를 얻었다 할 만합니다. 논에는 늘 물을 대니까 이곳 민들레는 물 걱정이 없겠지요. 게다가 논은 다른 흙땅보다 기름질 테니 먹이 얻기에 한결 나을 테고요.

 《민들레 일기》를 들여다보면, 흙을 일구는 일꾼이 이 사진책 때문에 민들레 꽃송이만 뽑지 않았구나 하고 느낍니다. 사진으로 보이는 민들레 둘레 논둑은 말끔하게 풀베기를 해 놓았거든요. 그러니까, 아주 자연스레 담은 민들레 사진은 아닙니다. 《민들레 일기》를 펼칠 때에도 사진이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작은 꽃송이와 넓은 무논을 보여주고자 광각렌즈를 써야 할는지 모르지만, 민들레를 바라보는 거리하고 뒤편 무논하고 어우러진 모습이 살짝 어중간하지 않나 싶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민들레를 바라보며 담는 사진이기는 하되,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 틀에 박혔다 할 만합니다. 그리고 너무 맑은 날에만 사진을 담아서, “민들레 일기”라는 이름이 썩 어울리지 않을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흐린 날이 있고 궂은 날이 있으며 비오는 날이 있습니다. 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라든지 아주 쨍쨍한 날이 있을 테지요. 어린이 사진책 《민들레 일기》에서는 따로 ‘날짜 일기’를 옆에 보여주지 않는다면 언제쯤 모습일는지를 읽기 어렵습니다. 이 사진책을 읽을 눈높이는 높은학년 어린이만이 아니요, 낮은학년 어린이부터 읽는 줄을 헤아린다면, 또 이 그림책을 볼 어린이란 시골 어린이가 아닌 도시 어린이임을 살핀다면, 사진 찍음새와 책 엮음새에 더 마음을 쏟았어야 했다고 느낍니다.

 그냥 ‘논둑에 핀 민들레 한해살이’만 들여다본다면, 굳이 시골자락까지 찾아가서 민들레를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도시 어디에서나 보는 민들레를 찍어도 됩니다. 어쩌면, 도시 어린이한테는 도시 어디에서나 보는 민들레 한해살이를 담을 때에 더 남다르거나 돋보인다 할 수 있어요. 도시 어린이로서는 길가 한 귀퉁이에서 애처롭거나 간당간당 뿌리를 내려 줄기를 올리고 꽃을 피운 민들레가 어찌저찌 살아남는가를 지켜보면서 ‘민들레를 비롯한 숱한 풀꽃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북돋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민들레 일기》는 일부러 논둑 민들레 하나를 마주하면서 사진으로 이야기를 빚는 뜻을 더욱 끌어내야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논둑에 민들레 한 송이만 남기고 다른 풀은 모조리 베어낸 썰렁한 모습 때문에 사진을 찍는 틀이 딱딱하게 굳을밖에 없다 여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농사꾼이건 논둑밀이를 다 합니다. 논둑에 난 풀을 다 뽑아내지는 않으나(이렇게 하다가는 큰비가 찾아올 때에 논둑이 무너지니까요), 낫으로 풀을 다 베어요. 외려 ‘논둑 다른 풀은 모두 베었으나 민들레 한 송이만큼은 남긴 모습’을 찬찬히 보여주면서 또다른 이야기라든지 새로운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습니다. 논둑 풀을 베는 모습도 보여주면서 ‘아, 민들레는 농사꾼 아저씨 낫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하는 말을 넣을 만하며, ‘이야, 농사꾼 아저씨는 노랗고 예쁜 꽃 한 송이는 곱게 남겨 놓았습니다.’ 하는 말을 넣을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서 농사짓기를 하면서 풀베기란 얼마나 고된 일인지 느끼도록 할 테고, 농사를 지을 때에 민들레 또한 벨 수밖에 없는 풀이 되기도 하겠다고 느끼도록 할 테며, 우리 삶터와 자연과 풀꽃이 어떤 이음고리로 이어지는가를 살피도록 할 터입니다.

 한 자리에서 찍자면 말 그대로 아주 똑같은 한 자리에서만 찍을 노릇이지, 살짝 한쪽으로 기울인다든지 뒷모습이 자꾸 조금씩 움직인다든지 하는 일은 썩 반갑지 않습니다. 아예 똑같은 한 자리를 못을 박고 찍거나, 민들레 둘레 시골 논밭자락을 두루 느끼도록 이끌 때에 반갑습니다.

 요즈음 초등학교에서도 ‘식물 관찰 일기’를 쓰도록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이 둘레 터전에서 ‘스스로 자라 스스로 씨앗을 맺고 스스로 흙으로 조용히 돌아가는 들꽃’을 얼마나 지켜볼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 해를 두루 통틀어 꽃송이 하나를 바라보며 아이 스스로 아이 마음밭을 한 해를 통틀어 곱다시 보살피도록 돕는 어른이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어린이 사진책 《민들레 일기》는 민들레꽃 한 송이를 빌어 민들레 한 송이만 예쁘장하게 바라보자는 사진이야기가 아니요, 민들레꽃 한 송이와 마찬가지로 어여쁘면서 착하고 좋은 내 ‘어린 나날’ 삶임을 깨닫거나 느끼도록 이끄는 사진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땅에서 사진을 한다는 이가 꽤나 많은 만큼, 한국땅에서 사진을 한다는 이들 가운데 1/10이든 1/100이든 어린이를 사랑하는 넋을 기르는 사진을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꿈을 꾸어 봅니다. 황헌만 님은 민들레이니 저어새이니 두루미이니 섬서구메뚜기이니를 찍었지만, ‘민들레 사진이든 메뚜기 사진이든 이렇게 달리 찍을 수도 있습니다’ 하는 매무새로 새롭게 민들레 사진책을 빚는 젊은 사진쟁이가 태어난다면 기쁘겠습니다. 냉이라든지 꽃다지라든지 쑥을 들여다보는 ‘어린이 사진책’을 일구어도 기쁘겠습니다. 개구리라든지 지렁이라든지 참새라든지 까마귀라든지 다람쥐라든지 참나무라든지 두릅나무라든지 은행나무라든지 얼마든지 살필 수 있으며, 우리 둘레 수수한 목숨붙이를 ‘어린이 사진책’ 눈높이와 눈썰미와 눈결을 돌아보면서 사진이야기를 빚으면 참으로 기쁘겠어요.

 틀에 박지 않으면서 틀에 매이지 않는 좋은 어린이 사진책을 기다립니다. 다 다른 어린이가 다 다른 삶틀을 스스로 가꾸면서 나날이 좋은 마음밭 일구는 목숨빛을 내도록 어여쁜 빛그림을 베푸는 한국땅 사진쟁이를 기다립니다. (4344.3.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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