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초상 - 육명심 사진집
육명심 지음 / 한미사진미술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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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181



대단한 얼굴은 없다

― 예술가의 초상

 육명심 사진

 한미사진미술관 펴냄, 2011.10.7.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혼인을 한 육명심 님은 곁님이 신혼여행 때에 혼수품으로 사진기를 가져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때까지 사진도 사진기도 사진찍기도 생각하지 않던 육명심 님인데, 사진기 다루는 법을 곁님한테서 처음으로 배웠고, 사진을 한 장 두 장 찍으면서 새로운 빛을 느꼈다고 합니다. 삶에서 빛을 밝힌 곁님이면서, 사진밭으로 접어드는 빛을 비춘 곁님이라고 할 만합니다.


  육명심 님은 사진에서 빛을 느낀 뒤 무엇을 사진으로 담으면 즐거울까 하고 찬찬히 생각을 기울이고, 둘레를 살펴봅니다. 그러고는 육명심 님 둘레에서 가장 쉬우면서 가깝게 마주하는 사람을 사진으로 담자고 생각합니다. 사진책 《예술가의 초상》(한미사진미술관,2011)은 바로 육명심 님이 ‘예술대학교에서 일자리를 얻어 일할 무렵’부터 찍은 사진으로 태어난 열매입니다.


  그런데, 대단한 얼굴도 대단한 사람도 없습니다. 놀라운 얼굴도 놀라운 사람도 없습니다. 엄청난 얼굴이라든지 엄청난 사람도 없습니다. 빼어난 얼굴도 빼어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으면서 다른 빛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같으면서 다른 숨결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같으면서 다른 넋이 있습니다.


  예술가를 찍었으니 ‘예술가 얼굴’입니다. 그뿐입니다. 농사꾼을 찍으면 ‘농사꾼 얼굴’입니다. 그뿐입니다. 어머니를 찍으면 ‘어머니 얼굴’이고, 아이를 찍으면 ‘아이 얼굴’이에요. 그뿐이지요.






  육명심 님은 “마침 나가는 대학이 예술대학이라 많은 예술가들을 빈번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만날 수 있었고 손쉽게 다가갈 수가 있었다.” 하고 밝힙니다. 육명심 님이 예술대학에 일자리를 얻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을 찍었을 테지요. 육명심 님이 골목동네에서 지내며 살았으면, 골목이웃을 사진으로 담았을 테지요. 육명심 님이 서울로 가지 않고 시골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았으면 시골사람을 사진으로 담았겠지요.


  누구를 찍든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습니다. 서정주를 찍건 박목월을 찍건 아무것이 아닙니다. 중광을 찍건 이외수를 찍건 아무것이 아니에요. 사람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그 사람이 어떤 넋이요 어떤 꿈이고 어떤 사랑인가를 읽을 수 있으면 됩니다. 사람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사진기를 손에 쥔 우리가 그 사람하고 어떤 사이로 만나면서 이 땅에서 어떤 꿈과 사랑을 이루고 싶은가를 말할 수 있으면 됩니다.


  육명심 님은 “예술가들을 찍으려면 먼저 그 사람의 개성과 특징 그리고 예술세계를 조사하여 그것을 카메라를 통해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따로 있었다. 그것은 ‘나’와 ‘너’의 마음의 소통이었다.” 하고 말합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작품 때문에 찍는 사진이 아니라 이야기(소통)를 나누려고 찍는 사진입니다. 기록 때문에 찍는 사진이 아니라 삶(소통)을 나누려고 찍는 사진입니다. 직업 때문에 찍는 사진이 아니라 노래(소통)를 나누려고 찍는 사진입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내가 누군가를 사진으로 찍으려고 하는데, 사진에 찍힐 사람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고서 사진을 찍는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요? 사진기를 손에 쥔 내가 누군가를 사진으로 찍으려고 하면서, 사진에 찍힐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마음인가를 헤아리지 않고서 사진을 찍는다면 어떤 빛이 나올까요?






  사진책 《예술가의 초상》은 크고 무거우며 두껍게 나옵니다. 빨간 빛으로 여민 책은 남달리 손을 써서 여러모로 멋스럽게 생겼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만 한 사진책이 나온다고 나라밖에 알릴 만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면, 이 사진책에 깃든 사진으로 보자면 어떠할까요? 육명심 님은 “이 시인을 찍어 한 문학잡지에 실었다. 후에 문인들이 잘 모이는 다방에 나갔다가 한 원로시인을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 따지는 듯이 크게 나무랐다. 서정주라면 우리 나라 최고의 시인인데 감히 어떻게 그런 꼴로 사진을 찍었느냐는 것이었다. 꼭 시골 무지렁이가 변소간에서 볼기를 까고 쭈구려 앉아 있는 듯한 모습이 참으로 민망하다고 했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육명심 님은 서정주 시인하고 어떻게 만나서 어떤 마음이 되어 사진을 찍었을까요. 육명심 님도 서정주 시인을 ‘시골 무지렁이’로 바라보며 찍었을까요? 어느 원로시인만 사진을 ‘시골 무지렁이’라고 읽었을까요?


  육명심 님은 다른 책에서 “예술가의 초상” 사진을 곧잘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책에서 밝힌 이야기를 살피면, 이녁이 만난 예술가는 ‘이름은 예술가’이지만, ‘우리 곁에서 으레 만나는 수수한 아저씨와 아주머니’와 같다고 합니다. 육명심 님이 찍은 예술가는 그야말로 남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요, 투박한 이웃이고 살가운 동무라고 합니다.


  대단한 얼굴은 없습니다. 그래서, 대단한 사진은 없습니다. 대단한 얼굴과 대단한 사진이 없으니, 대단한 사진가라든지 대단한 사진책이란 없습니다.






  얼굴은 읽는 사람 몫입니다. 사진은 읽는 사람 몫입니다. 책과 이야기도 읽는 사람 몫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둘레 모든 사람 얼굴에서 하느님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서만 하느님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당에서만 하느님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곳에서도 하느님을 안 느낍니다. 하느님은 무엇이고, 하느님 얼굴은 무엇이며, 하느님이 나누어 주는 빛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아이들한테서 하느님을 느낀다고 해요. 그러면,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면 하느님은 더 느낄 수 없을까요? 어떤 사람은 거친 손으로 흙을 만지는 시골 할배나 할매한테서 하느님을 느낀다고 해요. 그러면, 할배나 할매가 되기 앞서 젊은 농사꾼한테서는 하느님을 느낄 수 없을까요?


  김기찬 님은 골목이 좋아서 골목에서 살며 골목사람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육명심 님은 예술대학에서 일하면서 예술가를 가까이 두고 사귀었으며, 저절로 예술가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최민식 님은 부산 자갈치시장 언저리를 돌면서 부산사람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덧붙여 볼 수 있습니다. 육명심 님은 “그녀(박완서 작가)를 촬영하는데 자그마치 반년 넘게 끊임없이 조르고 매달려야만 했다. 전화기 너머로 수없이 끈질기게 설득을 했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로 사양을 하며 애를 몹시 태웠다. 보통은 이런 경우 나도 자존심이 있어서 진작 단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가의 열렬한 애독자인 아내와 딸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찍어야 한다는 배후의 압박으로 결코 단념할 수 없었다.” 하고도 이야기합니다. 육명심 님은 대단한 외곬(고집쟁이)라고 스스로 밝히는데, 이녁 자존심이 아무레 드세었다 하더라도 곁님과 딸아이가 바라고 바랐기에 끝까지 이녁 자존심을 누른 채 박완서 작가를 만나서 사진으로 찍으려고 했답니다.


  가만히 보면, 육명심 님이 사진을 찍을 수 있던 힘이란 ‘육명심 님과 함께 살아가는 한식구’한테서 나오지 싶습니다. 처음 사진을 가르친 이는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아닌 육명심 님 곁님이었고, 사진책 《예술가의 초상》이 태어나기까지도 곁에서 믿고 아끼며 보살핀 곁님과 딸아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은 육명심 님이지만, 사진기에 눈을 박고 바라보는 넋은 육명심 님 혼자가 아닙니다. 둘레에서 육명심 님을 사랑하는 숱한 넋이 한 자리에 모여 사진빛을 이룹니다.


  함께 살고 함께 노래하면서 사진이 천천히 태어납니다. 같이 꿈꾸고 같이 사랑하면서 사진이 시나브로 태어납니다. 너와 내가 만나는 곳에서 사진이 태어납니다. 너와 내가 서로 믿고 어깨동무를 할 적에 ‘사람을 찍는 사진’이 맑게 웃습니다. 4347.7.2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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てっちゃん: ハンセン病に感謝した詩人 (單行本)
權徹 / 彩流社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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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180


사람을 읽는 이야기
― てっちゃん  :  ハンセン病に感謝した詩人
 權徹 사진·글
 彩流社 펴냄, 2013.12.18


  1967년에 한국에서 태어난 권철 님은 199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보도사진을 배웠다고 합니다. 1999년부터는 ‘한센병 회복자’를 취재해서 일본에 있는 잡지에 사진과 글을 실었다고 해요. 이러는 동안 ‘우토로’ 이야기도 사진으로 찍었고, 우토로 이야기는 2005년에 한국에서 《우토로》(민중의소리 펴냄)라는 책으로 태어났습니다. 2014년 3월에는 《가부키초》(눈빛 펴냄)라는 사진책이 한국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한센병을 취재하던 권철 님은 한국에 있는 ‘나환자 병원’에도 찾아옵니다. 전남 고흥 소록도로 취재를 와요. 나는 곁님과 두 아이하고 고흥에서 지냅니다. 고흥으로 들어오기 앞서 이곳에 ‘나환자 병원’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길그림 종이를 방바닥에 넓게 펼치고 헤아려 보았어요. 한국 정부에서 이 병원을 고흥에 지은 까닭을 알 만했고, 고흥에서도 소록도라는 섬에 지은 까닭을 알겠더군요. 그야말로 한국에서는 외지며 먼 데가 고흥이요, 고흥에서도 소록도입니다. 고흥은 샛녘과 하늬녘과 마녘이 바다입니다. 이 가운데 남쪽인 마녘에서 소록도는 왼쪽 끝입니다. 오른쪽 끝에는 나로도가 있습니다. 나로도에는 한국 정부에서 우주선 시험 발사기지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사막에 짓는 우주선 발사기지인데,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멀쩡히 사는 마을’에 발사기지를 세웠어요. 그나마 나로도가 한국에서 아주 외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한센병 이야기를 다룬 사진책 《てっちゃん  :  ハンセン病に感謝した詩人》(彩流社,2013)을 읽다가 ‘고흥 소록도’를 취재한 대목에서 자꾸 눈길이 멎습니다. 권철 님은 사진을 배우고 사진을 찍으려는 뜻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알고 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구나 싶어요. 우리 식구는 고흥을 삶터로 여겨 지내는데, 권철 님한테 고흥은 ‘소록도 병원’이고 ‘취재하러 오는 곳’이에요.






  권철 님한테 일본은 ‘사진을 배운 곳’이면서 ‘사진을 찍는 곳’이요 ‘삶을 꾸리는 곳’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꽤 많은 한국사람은 일본을 ‘놀러가는(관광·여행) 곳’으로 삼을 텐데, 요즈막에는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터진 곳’으로 여기기도 하리라 느낍니다. 한편, 참으로 많은 사람들한테 일본은 ‘한국으로 쳐들어와서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곳’으로 여깁니다.

  사람마다 바라보는 눈이 다릅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가슴이 다릅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결이 다릅니다. 사람마다 사랑하는 빛이 다릅니다. 우리는 저마다 무엇을 바라볼까요. 우리는 서로서로 무엇을 이야기할까요.

  사진책 《てっちゃん》에서는 ‘텟짱’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텟짱만 나오지 않습니다. 한센병과 얽힌 사람들이 나오고, 마을이 나오며, 시설이 나옵니다. 한센병이란 무엇일까요. ‘나병’과 ‘문둥병’은 무엇일까요. 1941년에 이 병을 고치는 약이 나왔다고 하는데, 일본은 왜 1996년까지 한센병 환자를 ‘완전 격리’를 시키고 불임수술까지 시키는 짓을 일삼았을까요. 한국에서도 왜 한센병을 제대로 바라보거나 헤아리는 눈길이 얕을까요.






  사진책을 읽다가 생각에 잠깁니다. 사진책을 덮으며 생각에 젖습니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참을 참대로 바라보려는 눈길은 서로 엇비슷합니다. 거짓을 거짓대로 깨달으려는 눈길도 서로 어슷비슷합니다. 그리고, 참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든지 거짓을 옳게 알아채지 못하는 눈길까지 서로 비슷비슷합니다.

  꼭 한센병 환자가 아니어도 그렇습니다. 이른바 고급호텔이라는 곳에 후줄근한 차림새로 들어가려 하면 어찌 될까요. 고급호텔이 아닌 공공기관에서도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들어가려 하면 어떻게 되나요. 중앙정부에서 한센병 환자를 ‘완전 격리’를 시키기도 했지만, 우리들은 마을에서도 누군가를 따돌리거나 괴롭힙니다. 우리들은 동네에서도 누군가를 업신여기거나 푸대접합니다. 여느 삶자리에서 여느 이웃을 따돌리거나 업신여기던 흐름이 불거지면서 ‘사람을 괴롭히거나 푸대접하는 정책’이 태어납니다.

  권철 님이 빚은 사진책 《てっちゃん》에 나오는 텟짱과 여러 한센병 환자는 아주 수수합니다. 텟짱 얼굴이나 몸은 잔뜩 곪거나 삭았다고 할 만하지만, 수수하게 보이는 한센병 환자도 많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요. 겉모습으로 마주할까요. 속마음으로 마주할까요.

  눈을 감고 손을 잡아요. 눈을 감고 살포시 안아요. 눈만 감아도 겉모습이 아닌 속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귀를 열어도 겉차림이 아닌 속내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몸뚱이에 깃든 숨결을 헤아리면서 사귀는 이웃입니다. 몸뚱이에 서린 넋을 살피면서 만나는 동무입니다. 나와 네가 이웃인 까닭은 서로 푸른 숨결로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네가 동무인 까닭은 서로 맑은 넋으로 꿈꾸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진으로 담는다고 할 적에는 겉모습을 담지 않습니다. 속마음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동무를 사진으로 찍는다고 할 적에는 옷차림을 찍지 않습니다. 속내를 사진으로 찍습니다. 권철 님이 텟짱을 비롯한 한센병 환자를 만나거나 사귄다고 할 적에도, 속마음으로 만나고 속내로 사귀었겠지요. 사진으로 사람을 읽을 적에 ‘종이나 필름에 앉힌 모습’이 아니라 ‘사람 마음에 스미는 빛’을 읽는다면 다 함께 아름다운 삶을 이룰 수 있겠지요. 4347.7.2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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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골 졸업사진첩 - 시간에게 길을 묻다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 엮음 / 아카이브북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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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잡지 <포토닷> 2014년 7월호에 싣는 글입니다.

진안골에서 공동체박물관을 하시다가

전주로 옮겨 서학동사진관을 하시는

김지연 님이 늘 새롭게 기운을 내어

아름다운 사진빛을 밝히시기를 빕니다.


..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80



사진기 없는 사람한테 사진

― 사진에게 길을 묻다, 진안골 졸업사진첩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 엮음

 아카이브북스 펴냄, 2008.4.12.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를 꾸렸던 김지연 님은 전라북도 전주로 일터를 옮겨 ‘서학동사진관’을 엽니다. 진안에서 꾸린 계남정미소 이야기를 갈무리해서 《정미소와 작은 유산들》(눈빛,2013)을 선보이기도 했고, 《정미소》(아카이브북스,2002)와 《나는 이발소에 간다》(아카이브북스,2005)와 《우리 동네 이장님은 출근중》(아카이브북스,2008)과 《근대화상회》(아카이브북스,2010)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용담 위로 나는 새》(아카이브북스,2010)를 선보이면서 계남정미소를 ‘공동체박물관’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꾸린 넋을 보여줍니다. ‘용담댐’을 둘러싸고 사라져야 한 마을과 얽힌 이야기를 조림초등학교 교장이던 전형무 님이 갈무리한 적이 있기에, 이를 차근차근 되살리면서 진안골에서 보금자리를 떠나거나 옮기거나 잃어야 했던 12616명에 이르는 사람들 이야기를 새롭게 보여주었어요. 이와 함께 2008년에는 《사진에게 길을 묻다, 진안골 졸업사진첩》(아카이브북스,2008)을 내놓았습니다.


  사진책 《사진에게 길을 묻다, 진안골 졸업사진첩》은 책이름 그대로 졸업사진책을 보여줍니다. 진안골에서 나온 졸업사진책을 하나둘 그러모아서, 이 졸업사진책에 깃든 사진을 보여주고, 졸업사진책마다 묻어난 이야기를 꺼내어 펼칩니다.


  김지연 님은 ‘낡은 방’이라는 이름으로 ‘낡은 방’에서 홀로 지내는 시골 할매와 할배 이야기를 보여주기도 해요. ‘낡은 방’을 보면 ‘진안골 졸업사진책’이 떠오르고, ‘진안골 졸업사진책’을 보면 ‘낡은 방’이 떠올라요. 왜냐하면, 진안골 졸업사진책에 나오는 어린이는 어느새 늙고 허리가 구부러지면서 ‘낡은 방’을 지키는 할매나 할배가 됩니다. 낡은 방을 지키는 할매와 할배는 지난날 들과 숲을 쏘다니면서 뛰놀던 ‘진안골 졸업사진책’ 주인공입니다.





  아마 어느 할매와 할배는 학교 문턱을 못 밟았을 수 있습니다. 학교 문턱은 밟았으나 얼마 못 다니고 그만두어야 했을 수 있습니다. 여섯 해 국민학교(예전에는 국민학교였으니까요)를 마치거나 세 해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마쳤어도 졸업사진책을 장만할 돈이 없었을 수 있습니다.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사진기 없는 사람한테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사진기가 없으니 수학여행이나 봄소풍이나 운동회를 할 적에 단체사진으로 처음 찍히는데, 졸업을 앞두고 비로소 한 장이나 두 장쯤 더 찍히는 사람한테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더욱이, 사진기뿐 아니라 돈도 없어서 ‘사진으로 찍혔’으나 사진 한 장 건사할 수 없는 사람한테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졸업사진책을 장만하지 못해 그예 마음속에만 ‘사진으로 찍힌 모습’을 그리는 사람한테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 빛바랜 초등학교 졸업사진에서 희미해진 시력으로 자신의 얼굴이나 쉽게 찾을 수 있겠는가. 그 빛나던 소년기며 청춘의 꿈은 어디로 묻혀버리고 굳은 얼굴에 주름진 얼굴뿐인가 ..  (머리말/김지연)



  국민학교 졸업사진책은 지난날 어린이 삶을 얼마나 보여줄까 궁금합니다. 중·고등학교 졸업사진책은 지난날 푸름이 삶을 어느 만큼 밝힐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모든 모습을 보여주기는 어렵습니다. 아주 작은 조각만 보여준다 할 만합니다.


  그러면, 다큐멘터리로 찍는 사진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어느 만큼 보여줄까요. 다큐사진이 보여주는 모습과 빛과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 얼마나 커다란 조각이 될까요.





  《사진에게 길을 묻다, 진안골 졸업사진첩》을 넘기면 거의 모두 단체사진입니다. 자그마한 학교에서는 자그맣게 졸업사진책을 내놓습니다. 퍽 예전에는 아이들 숫자가 퍽 많았으나, 요즈음으로 올수록 아이들 숫자가 줄어듭니다. 어느 해에는 아이 숫자보다 교사 숫자가 많습니다. 이러다가 끝내 시골마을 조그마한 학교는 문을 닫습니다. 용담댐이 들어서면서 사라져야 한 학교가 있으나 용담댐이 아니어도 새마을운동과 도시화 물결을 타면서 시골은 줄어들어야 했어요.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한테 시골내기로 살도록 하는 교육은 예나 이제나 없어요. 농업고등학교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농업중학교나 농업초등학교는 아예 없어요. 시골사람은 아이들한테 시골일, 그러니까 흙일을 가르치거나 물려주지 못해요. 학교교육은 오로지 ‘도시에 있는 학교’에 보내는 데에 눈길을 맞추고, ‘도시에 있는 큰 학교’는 아이들이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장 일꾼이나 가게 일꾼이나 전문직이나 예술가 같은 어른이 되도록 이끕니다. 도시에 있는 학교 가운데, 중·고등학교나 대학교 가운데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넌 앞으로 커서 농사꾼이 되어 들과 숲을 지키면 참 아름답겠구나’ 하고 가르치는 곳은 없습니다.



.. 이 ‘졸업’ 전을 기회로 한 지역사회의 모태를 다시 한 번 추억하고 감싸안고 발전하는 문화적 분위기로 가꾸어 가고 싶습니다 ..  (머리말/김지연)



  진안골 졸업사진책을 들여다보면, 더러 ‘시골일’ 모습이 보입니다. 시골일이란 무엇일까요? 모내기와 풀베기입니다. 소먹이기와 벼베기입니다. 나락을 말리거나 절구질을 하거나 베틀을 밟는 일이 시골일입니다. 모시나 삼에서 실을 얻어 바느질을 할 적에 시골일입니다. 나무를 하고 아궁이에 불을 때며 가마솥에 밥을 짓는 일이 시골일입니다. 거름을 그러모으고 흙을 일굴 적에 시골일입니다.


  여러 시골마을 졸업사진책을 보면, 웬만해서는 ‘시골일’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시골학교 아이들이 ‘학교 안팎’에서 자주 하거나 늘 하거나 으레 하는 일이란 시골일이지만, 막상 졸업사진책에는 시골일을 안 담으려 합니다. 커다란 학교 건물을 보여주려 합니다. 무언가 대단하다 싶은 ‘애국조회’나 ‘제복 입은 사열’이나 ‘시가지 행진’을 보여주려 합니다.





  고개를 넘고 넘어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이 무척 많았어요. 교사라면 사택에서 지냈을 테지만, 아이들은 무척 먼 데에서 두 다리로 걸어서 학교를 다녔어요. 몇몇 졸업사진책에는 ‘고개 넘어 학교 오는 아이’ 모습을 사진 한 장으로 담아서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런 사진은 누가 찍었을까요. 이런 사진은 누가 찍어서 남겼을까요. 십 리나 이십 리가 되는 멧길을 넘고 넘어서 학교를 다니던 아이들 발자취를 졸업사진책에서 보여주지 않으면, 이러한 발자취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 옛날에 아이들이 새벽바람으로 멧골을 넘고, 밤바람으로 다시 멧골을 넘던 이야기를 옛날 아이들이 스스로 사진으로 찍어서 남길 수 없어요. 아이들이 새벽과 밤마다 흘린 땀을, 학교를 다니면서 땀을 흘리면서 옴팡 젖은 옷을, 늘 땀내 풍기는 옷을 입으며 작은 교실 작은 책걸상에 앉은 아이들 눈빛을 사진으로 남긴 한국 사진작가는 아직 없습니다.


  졸업사진책에 깃든 사진은 무엇을 보여줄까요. 시골집 사진틀에 걸린 사진은 무엇을 말할까요. 모를 심거나 나락을 베거나 말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절구를 찧거나 멧돌을 돌리거나 아궁이에 불을 때거나 밥그릇에 밥을 퍼서 밥상에 올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소한테 먹일 풀을 베거나 깊은 멧골에서 나무를 해서 지게에 지고 다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예전에는 드물었고, 오늘날에는 찍을 수 없습니다. 참말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한겨레 삶을 보여주는 사진이란, 우리 이야기를 드러내는 사진이란, 들과 숲하고 어깨동무하던 수많은 사람들 빛과 숨결을 보여주는 사진이란 어디에 있을까요.



.. 단짝 친구는 어디에서 잘 살고 있을까. 혹은 먼저 가 버린 건 아닐까. 돋보기를 끌어당기며 빛바랜 사진 속에서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얼굴과 학교 교정을 눈으로 더듬어 본다 ..  (머리말/김지연)




  연필과 종이가 없던 사람은 모든 이야기를 머리에 담았습니다. 책이 없던 사람은 모든 이야기를 가슴에 담았습니다. 사진기가 없던 사람은 모든 꿈과 사랑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지갑이나 사진틀에 사진 한 장 없더라도, ‘낡은 방’에 깃든 허리 구부러진 시골 할매와 할배는 언제 어디에서나 아련한 옛일을 그림을 그리듯이 떠올릴 수 있습니다. 누군가 이녁한테 찾아와서 말을 여쭈면, 이녁이 어리거나 젊은 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밥을 먹었으며 어떤 논밭을 부치면서 땀흘렸는가 하는 이야기를 참말 그림을 그리듯이 들려주곤 합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이들은 어떤 모습을 담을까요. 사진에 담긴 모습과 사진에 안 담긴 모습은 어떻게 다를까요. 사진에 담으려는 모습과 사진에 담으려는 생각을 미처 못 하는 모습은 얼마나 다를까요.


  진안골 아이들이 졸업사진책에서 웃습니다. 진안골 어른들이 졸업사진책에서 아이들과 어깨를 겯고 웃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을 찍은 아이가 있습니다. 찍힌 사진이 어떤 곳에 어떻게 남을는지 모르는 채 그냥 사진에 찍힌 아이가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해묵은 졸업사진책’을 모아서 이 졸업사진책에 깃든 사진으로 ‘옛날 모습’을 되새기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지자체나 문화예술단체에서 이런 일을 합니다. 이런 움직임도 좋고 저런 일도 좋습니다. 다만, 우리는 한 가지를 알아두어야 합니다. 졸업사진책은 ‘찍는 사람’ 눈길이고 ‘기록하는 사람’ 눈높이입니다. 졸업사진책에 찍히지 않은 눈빛과 ‘기록되지 않은 사람’ 눈썰미를 헤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 깃든 수많은 이야기를 알아볼 수 있기를 빕니다. 사람들 가슴마다 애틋하거나 따스하게 드리운 온갖 빛과 노래를 읽을 수 있기를 빕니다. 4347.6.1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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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이야기 - 민족사진가협회 자료집
민족사진가협회 엮음 / 현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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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179



사람한테서 나오는 이야기

― 사람과 이야기

 민족사진가협회 엮음

 현자 펴냄, 2006.12.28.



  민족사진가협회에서 시골 할매와 할배를 찾아다니면서 영정사진을 찍어 주었다고 합니다. 시골 할매와 할배는 몹시 반겼다고 해요. 이때에 민족사진가협회 사람들은 영정사진만 찍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할매와 할배한테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할매와 할배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할매와 할배가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겪은 이야기를 들으며, 할매와 할배가 이녁 딸아들한테는 들려주지 못하던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살포시 묶어 《사람과 이야기》(현자,2006)라는 사진책이 태어납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시골 할매나 할배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이가 없습니다. 시골 할매나 할배하고 함께 살면서 이녁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딸아들이 없습니다. 아이(손자 손녀)를 데리고 시골집 할매와 할배를 찾아가서 인사를 하는 딸아들은 있지만, 막상 시골집 할매와 할배가 어떤 삶을 일구었는지 찬찬히 들으면서 생각을 밝히려는 젊은이는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시골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할매와 할배는 시골에도 도시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도시에서도 할매와 할배는 참으로 외롭거나 쓸쓸합니다. 이녁 이야기를 들어 주는 젊은이가 몹시 드뭅니다. 할매와 할배하고 함께 살면서 이야기꽃을 도란도란 피우는 젊은이를 보기란 매우 힘듭니다.

  예부터 ‘늙은 사람’은 ‘나이를 먹으며 삶을 누린 발자국’을 슬기로 삭혀서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예부터 ‘늙은이’는 이야기를 지어 젊은이와 아이한테 차곡차곡 남겼어요.


  어린이·젊은이·늙은이, 이렇게 세 사람은 서로 빛이 되면서 삶을 짓습니다. 어린 꿈과 젊은 꿈과 늙은 꿈은 한자리에서 밝게 빛났습니다.


  사진책 《사람과 이야기》 첫머리에는 예전에 민족사진가협회 대표였던 김영수 님이 쓴 머리말이 있습니다. 김영수 님은 지난 2011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애틋하면서 아련합니다. 문득 궁금합니다. 김영수 님은 할매와 할배 영정사진을 찍어 주셨는데, 막상 이녁 영정사진은 찍었을까요. 이녁 영정사진은 다른 사진가들이 찍어 놓았을까요.






  김영수 님은 책 첫머리에서 “경제성장을 최우선 목표로 내세운 그동안의 정책들이 지역의 인구 노령화 및 도시와 크게 차이 나는 소득격차 결과를 가지면서 오랫동안 지속한 우리네 공동체 문화를 붕괴하고 개인주의를 급성장시키고 있었습니다. 다 함께 모여 정담을 나누는 모습도 이웃 간의 정도 만나기 쉽지 않았고, 제각기 다른 삶과 가치관 형태는 가족과 이웃의 일차적인 소통마저 차단하면서 사람이 나누어야 할 기본적인 정조차 소원하게 만드는 변수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머리말).”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는 박정희 군부독재가 일으킨 새마을운동을 내세워서 시골사람을 도시로 끌어들였어요.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착하게 살던 사람들을 도시로 끌어모아서 공장 일꾼으로 부려요. 공장에서 아주 값싼 일삯을 주면서 ‘경제성장’과 ‘경제발전’을 목청껏 외칩니다.


  이동안 시골사람은 엄청나게 짓눌립니다. 시골에서 거둔 곡식을 정부(농협)에서 아주 눅은 값으로 사들여요. 시골에서 시골사람이 거둔 곡식을 정부(농협)가 아니면 거둘 수 없게끔 길을 가로막아요. 이러면서 정부가 한 일은 ‘외국 곡식 사들이기’입니다. 한국 시골에서 거둔 곡식을 헐값으로 사들일 뿐 아니라, 외국에서 곡식을 더 값싸게 사들여서 이 나라 시골마을이 옴팡 무너지도록 부추깁니다.


  도시에서 ‘곡식을 사서 먹는’ 사람은 어떤 곡식을 사서 먹는지 잘 모릅니다. 한국이 식량자급률이 얼마나 낮은가를 깨닫거나 느끼는 도시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요즈막(2013년)은 식량자급률이 23퍼센트라고 하는데, 그나마 이 숫자는 ‘쌀 자급률’ 때문입니다. 쌀을 빼면 식량자급률은 10퍼센트조차 안 되리라 느껴요. 게다가 쌀 자급률도 100퍼센트가 아닙니다. 한국에서 거둔 곡식으로 한국사람이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중앙정부와 지역정부는 고속도로를 새로 늘리고 아파트를 새로 지으며 도시를 더 키우려 합니다. 골프장과 공장과 발전소와 송전탑을 자꾸 늘리기만 합니다. 식량자급률은 끝없이 떨어지는데, 스스로 먹고살 길을 마련하려 하지 않아요.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은 시골지기(농사꾼)가 될 마음이 없고, 시골학교에서 시골아이한테 시골사람 되도록 가르치는 제도가 없습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를 시골지기로 가르치거나 이끄는 제도는 더더욱 없습니다.






  도시에서 문화나 예술로 사진을 찍던 이들이 시골로 영정사진을 찍는 ‘봉사’를 한다면서 찾아갈 적에,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을 만할까 궁금합니다. 시골 할매와 할배는 도시에서 모처럼 찾아온 사진가들한테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만할까 궁금합니다.


  영정사진을 찍을 적에는 가장 고운 옷을 차려서 입는다고 하는데, ‘가장 고운 옷’이란 무엇일까요. 양복일까요? 한복일까요?


  들에서 일하며 입는 일옷 차림새로 영정사진을 찍을 수는 없을까요? 손과 얼굴에 흙이 묻은 모양새로 영정사진을 찍을 수는 없을까요? 시골사람이 시골사람답게 시골빛으로 웃고 우는 삶자락을 고스란히 담는 ‘영정사진’과 ‘삶사진’과 ‘사진’을 빚을 수는 없을까요?


  다른 곳 사진가가 아닌 민족사진가협회 사진가라 한다면, 사진기를 목에 걸고 논에 들어가서 함께 손으로 모를 심을 수 있기를 빕니다. 사진기를 어깨에 걸고 숲과 들에서 함께 나물을 캐거나 뜯을 수 있기를 빕니다. 사진기를 목에 걸고 숲에서 나무를 해서 지게에 나뭇단을 짊어지고 오르내릴 수 있기를 빕니다. 사진기를 어깨에 걸고 아궁이에 불을 땔 수 있기를 빕니다.


  여느 수수한 삶으로 더 깊고 넓게 스며들 때에 ‘이야기와 사진’이 새롭게 태어나리라 느낍니다. 여느 투박한 삶을 사랑하고 아낄 때에 ‘이야기와 사람’이 새롭게 보이리라 느낍니다. 여느 고운 삶을 마주하며 바라볼 때에 ‘이야기와 삶’이란 무엇인지 새롭게 드러나리라 느낍니다.


  여러 시골마을을 돌아다닌 이야기를 뭉뚱그려서 한 권으로 엮었는데, 마을마다 삶과 사람과 빛과 사랑이 다른 만큼, 마을마다 따로 사진책 한 권이 되도록 꾸준하게 《사람과 이야기》를 선보였다면 훨씬 돋보일 만하리라 생각해요. 앞으로는 ‘영정사진 봉사’보다는 ‘이야기동무 나눔’으로, ‘이야기벗 나들이’로 시골 할매와 할배를 만나서 사진삶을 보여준다면 더 좋겠습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이야기를 꾸밈없이 사진으로 담는 즐거움을 보여주기를 빌어요. 4347.6.3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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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4.7 - Vol.8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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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178



사진은 누구 곁에 있는가

― 사진잡지 《포토닷》 8호

 포토닷 펴냄, 2014.7.1.



  작은아이가 돌을 지날 무렵부터 곁님은 옆방에서 따로 잡니다. 우리 식구가 깃든 시골집은 방이 작기도 하지만, 곁님은 스스로 삶을 새로 빛내려고 날마다 바지런히 공부를 합니다. 홀로 조용히 공부를 하려고, 아이들이 모두 잠든 때에 즐겁게 기운을 냅니다. 나는 늘 두 아이를 건사하면서 잠들고, 아이들이 느긋하면서 아늑하게 꿈나라를 누비기를 바라면서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이처럼 지낸 지 어느새 세 해째요, 아이들은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며 재우는 저녁빛이 익숙합니다. 아이들도 어머니가 몸과 마음을 살리려는 공부를 하는 줄 알기에, 기꺼이 아버지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가끔 어머니가 좁고 작은 방에서 함께 잡니다. 이럴 때에는 그야말로 다닥다닥 붙어서 잡니다. 예전에는 이보다 더 좁고 작은 방에서 더 많은 식구가 지냈으니, 지난날을 헤아린다면 우리 집은 그리 좁거나 작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네 식구가 모처럼 작은 집에서 다닥다닥 잠자리에 들면, 큰아이는 부러 벽에 착 붙어서 자려고 해요.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느긋하게 다리를 뻗고 자도록 마음을 씁니다.


  일곱 살 큰아이가 어쩜 이렇게 마음을 쓰는가 하고 생각하면, 자다가도 짠하면서 사랑스럽습니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가슴을 토닥토닥 해 줍니다. 볼을 살살 어루만지면서 예쁜 아이 고운 아이 착한 아이 같은 말을 나즈막하게 속삭입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어버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늘 새롭게 깨닫습니다.


  사진잡지 《포토닷》 8호를 읽습니다. 사진잡지 사진잡지 《포토닷》은 2014년 7월을 앞두고 씩씩하게 여덟째 책을 선보입니다. 여덟째 책에서는 여러모로 눈여겨볼 이야기가 흐릅니다. 먼저, 폐차장에서 찌그러진 자동차를 사진으로 찍는 분 이야기를 읽습니다. “윤승준(59)은 폐차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장면들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자동차마니아인 그에게 폐차장의 발견은 2013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리아 난민을 촬영하기 위해 들른 요르단에서 마치 광활한 무덤과 같은 거대 폐차장을 발견했다(33쪽/김소윤).” 윤승준 님으로서는 자동차입니다. 윤승준 님이 바라보는 자동차는, 꽃을 사랑하는 이들이 찍는 꽃 사진하고 똑같다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어버이로서 내가 늘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길하고 같다고 할 만해요.





  우리는 늘 곁에 있는 누군가를 사진으로 찍어요. 곁에 없는 사람을 찍을 수 없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을 찍는 사진입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을 찍는 사진이기에, ‘곁에 있는 사람’을 찾으려고 이곳저곳 떠돌기 마련이에요.


  먼 나라로 취재를 다니는 분들도 먼 나라에서 ‘곁에서 마주할 이웃’을 만나고 싶으니 찾아다닙니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내 곁에 있어’야 사진으로 찍어요. 곁에 두고 마음으로 사귀고 사랑으로 어깨동무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세계에 대한 개인적인 시선이 무의미해진 지금 미술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더욱더 개인적이 되거나 개인적인 시각을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인 영상적 시각과 최대한 충돌시키는 길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50쪽/강홍구).”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지요. 요즈음은 참말 ‘미술가’이면서 ‘사진밭’에 발을 담그려는 이들이 자주 보입니다. 또한, ‘사진가’이면서 ‘미술밭’에 발을 담그려는 이들이 곧잘 보여요.


  왜 그럴까요. ‘교류’를 하고 싶기 때문일까요? 울타리를 허물고 싶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일까요? 곁에 누가 있는지 모르는 탓에 이곳저곳을 떠돌거나 헤매는 셈일까요?


  사진은 사진으로 보여줄 때에 사진입니다. 그림은 그림으로 보여줄 때에 그림입니다. 예술은 예술로 보여줄 때에 예술입니다. 저마다 서는 자리가 다르지요. 저마다 빛나는 숨결이나 무늬가 달라요. 스스로 ‘사진가’이고 싶다면 사진으로 이야기를 해야 마땅하고, 스스로 ‘미술가’나 ‘예술가’이고 싶다면 미술이나 예술로 이야기를 해야 아름답습니다. 그림을 그리던 반 고흐 같은 분은 ‘그림쟁이(미술가)’입니다. 반 고흐 같은 분은 예술가가 아닙니다. 그림을 사랑해서 그림으로 삶꽃을 피운 분입니다.





  “나에게 한 사진가는 안셀 아담스와 같이 항상 같은 범위 안에서 이미지를 찾을 필요는 없다고 조언해 주었다. 만약 내가 밝은 이미지 톤을 원하면 그냥 그렇게 원하는 대로 찍으면 된다는 생각을 던져 주었다(60쪽/피터 스타인하우어).”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아주 마땅한 이야기입니다. 안셀 아담스는 안셀 아담스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사진을 찍어요. 안셀 아담스가 내 흉내를 낼 까닭이 없고, 내가 안셀 아담스 흉내를 낼 까닭이 없습니다. 안셀 아담스는 언제나 안셀 아담스답게 곁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었어요. 피터 스타인하우어라는 분은 늘 피어 스타인하우어라는 이녁 넋 그대로 곁을 바라보면서 사진으로 찍을 때에 환하게 빛납니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가정에는 대대로 물려받은 오래된 가구들이 많은데,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가구들을 보는 것과 거기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고가구에는 수집가의 역사까지도 담겨 있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다(69쪽/줄리앙 스피와크).”와 같은 이야기를 잘 살필 수 있어야 해요. 스스로 이야기를 찾아야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진으로 찍을 이야기는 남이 알려주지 않습니다. 사진학과에서 사진감(사진 주제)을 캐내어 베풀지 않습니다. 사진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진공모에서 1등을 받았다고 해서 어떤 사진을 즐겁게 찍거나 잘 찍거나 훌륭하게 찍을 수 있지 않아요.


  “사진비평은 사진작품을 말하는 것이지만, 실은 작품을 매개로 비평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평론가의 목소리가 담기지 않은 글은 오래 가지 못한다(85쪽/최원호).”와 같은 이야기를 새길 수 있기를 빌어요. 사진비평은 비평을 하는 사람이 이녁 삶을 드러내어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입니다. 사진창작은 무엇이겠어요? 작품 만들기가 창작이 될 수 없어요. ‘작품 만들기’가 아니라 ‘작품을 빌어’ 우리 이야기를 스스로 빚어서 보여줄 때에 비로소 사진창작, 곧 사진찍기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어떤 목소리를 내려 하는가 하는 이야기가 흐르지 않는다면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어떤 삶을 날마다 맞이하면서 생각을 짓는가 하는 이야기가 감돌지 않는다면 사진도 창작도 아무것도 안 됩니다.




  사진을 찍는 이들 누구나 “본다는 문제는 내 작업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왜 남극을 보고 감동을 받을까(97쪽/임상빈)?”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서로 기쁘게 웃으며 어깨동무를 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사진은 내 감정에서 나온다. 내가 내 사진에서 찾는 것은 질리지 않는 것이다(115쪽/우창원).”와 같은 이야기처럼, 스스로 내 삶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즐거워요. 스스로 즐거운 사진일 때에 질리지 않아요. 스스로 즐겁게 지어서 먹는 밥은 늘 맛있어요. 늘 맛있는 밥은 질리지 않습니다.


  사진은 어느 먼 별나라나 달나라에 따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태어나는 사진입니다. 삶을 사랑할 때에 사진이요, 삶을 꿈꿀 때에 사진입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지나다니며 보는 모든 것이 마치 그림이 될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143쪽/김주원).”와 같은 느낌을 받아야 합니다. 스스로 삶을 그리고, 스스로 삶을 노래할 때에 사진입니다.


  사진은 누구 곁에 있는가요? 바로 내 곁에 있습니다. 사진은 어디에 있는가요? 바로 내 옆에 있습니다. 사진은 어디에서 태어나는가요? 바로 내 손에서 태어납니다. 사진역사나 사진문화는 무엇인가요? 내가 날마다 일구는 삶이 바로 역사이면서 문화입니다.


  “소한테 먹일 풀을 베거나 깊은 멧골에서 나무를 해서 지게에 지고 다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예전에는 드물었고, 오늘날에는 찍을 수 없습니다. 참말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한겨레 삶을 보여주는 사진이란, 우리 이야기를 드러내는 사진이란, 들과 숲하고 어깨동무하던 수많은 사람들 빛과 숨결을 보여주는 사진이란 어디에 있을까요 … 연필과 종이가 없던 사람은 모든 이야기를 머리에 담았습니다. 책이 없던 사람은 모든 이야기를 가슴에 담았습니다. 사진기가 없던 사람은 모든 꿈과 사랑을 마음에 담았습니다(153쪽/최종규).”와 같은 이야기를 새삼스레 헤아립니다. 사진기가 있기에 사진을 찍고, 사진기가 없어도 사진을 찍습니다. 디지털파일이나 필름에 담아도 사진이고, 가슴이나 마음에 담아도 사진입니다. 이야기가 있을 때에 사진입니다. 이야기가 없이 디지털파일이나 필름만 잔뜩 만들면 사진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있으면, 흔들려도 사진입니다. 이야기가 있기에, 초점이 어긋나도 사진입니다. 이야기가 사랑스러우니, 사진이 사랑스럽습니다. 4347.6.2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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