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제시카 : 하루하루 신기하고 분주한 꼬마 아가씨의 반짝반짝 성장기 - 태어나서 다섯 살까지 여행작가 아빠 엄마가 담아낸 사랑스런 일상들
안영숙 글, 최갑수 사진 / 예담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찾아 읽는 사진책 185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때에

― 안녕, 제시카

 최갑수 사진

 안영숙 글

 예담 펴냄, 2014.6.25.



  아이들과 함께 살아간다고 해서 모두 ‘아이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아이를 그리 안 좋아하면 아이 사진을 안 찍고, 아이를 좋아하더라도 아이와 노느라 바빠 아이 사진을 못 찍습니다. 바깥에서 일을 하거나 돈을 버느라 바쁜 탓에 아이와 어울릴 겨를이 없으면 아이 사진을 못 찍습니다. 어쩌다가 말미를 내더라도 ‘늘 가는 곳’에 가서 ‘늘 보여주는 모습’만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버이가 아이를 찍습니다. ‘아이 사진’은 있는데, ‘어버이 사진’은 없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는 모습을 어버이가 찍는 사진은 있으나, 어버이가 아이를 돌보는 흐름을 좇으면서 찬찬히 찍는 사진은 없습니다. 아이를 따사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차근차근 찍는 사진은 있되, 어버이가 아이한테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빨며 몸을 씻기고 옷을 기우며 밥을 차리는 여느 삶을 차근차근 담는 사진은 아직 거의 없습니다.


  전몽각 님이 빚은 《윤미네 집》은 여러모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진책입니다. 전몽각 님은 여러모로 바쁜 탓에 아이들과 어울릴 겨를이 거의 없습니다. 여느 때에는 아이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에 집에 돌아오고, 주말에는 고단한 몸을 쉬느라 바쁩니다. 그러나 전몽각 님은 ‘아이가 자라는 결’에다가 ‘아이를 돌보는 곁님(아이 어머니)가 베푸는 숨결’을 골고루 살피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전몽각 님이 찍은 아이 모습은 그리 안 많지만, ‘없는 틈’을 쪼개고 만들어서 ‘아이와 어버이가 함께 자라는 사랑’을 사진으로 아리땁게 엮었습니다.




  최갑수 님이 사진을 찍고 안영숙 님이 글을 쓴 《안녕, 제시카》(예담,2014)라는 사진책을 읽습니다. 이 사진책을 달포 즈음 책상맡에 두는데, 우리 집 아이들이 이 책을 들추지 않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윤미네 집》을 방바닥에 펼치면 곰곰이 여러 차례 들여다보는데, 《안녕, 제시카》는 한 번 쓱 보고는 더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달포 즈음 왜 우리 아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가 하고 생각에 잠깁니다. 달포 즈음 지난 오늘 무언가 한 가지 느낍니다. 《윤미네 집》을 들여다볼 적에는 여러모로 재미난 삶과 이야기가 흐릅니다. 《안녕, 제시카》를 들여다볼 적에는 ‘이쁘장한 아이 얼굴과 몸짓’이 나옵니다. 두 사진책은 이런 대목에서 사뭇 다릅니다.


  사진책 《윤미네 집》을 보면, 전몽각 님이 이녁 아이한테 ‘이런 모습을 좀 보여주라’ 하면서 바란 끝에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척 보아도 티가 납니다. 그런데, 이런 사진이 ‘나쁘지 않’습니다. 아이는 꽤 고단했을 텐데, 스스럼없이 사진에 찍혀 줍니다. 철이 들고 난 뒤에는 사진에 안 찍혀 주었다 하는데, 어릴 적에 어버이가 바란 사진에는 ‘이야기가 깃들’기에 스스럼없이 사진에 찍혀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안녕, 제시카》가 나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다만, 최갑수 님이 이녁 아이를 찍은 사진에서는 ‘이야기를 느끼기 쉽지 않다’는 뜻일 뿐입니다. 빛과 빛깔과 빛결이 모두 고운 최갑수 님 ‘아이 사진’입니다. 알록달록 이쁘장한 빛이 서립니다. 다만, 사진책 《안녕, 제시카》에서는 알록달록 이쁘장한 빛을 넘어서는 ‘삶을 누리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안영숙 님은 “첫 여행지 남해. 드디어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다. 꽃밭을 떠나기 싫어하는 제시카 때문에 이곳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다(2011.6.11.).”라든지 “굳이 모종을 옮겨주겠다는 제시카를 말릴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거기가 아니거든(2012.5.2.).” 하는 이야기를 붙입니다. “그네만 타도 행복한 아이(2013.1.11.).”라든지 “교래 곶자왈 산책. 숲은 언제나 따뜻하다(2013.1.29.).” 같은 이야기를 붙입니다. 아마, 이렇게 이야기를 붙이지 않는다면, 이 사진마다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이 사진책을 들여다볼 사람들이 못 알아볼 수 있어요. 사진마다 사진말을 붙여야 합니다. 날짜도 붙여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어요.


  “축구장에서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는 아빠 말에 울음을 터뜨렸다(2013.7.4.).”라든지 “걱정은 어른들의 몫일 뿐이지. 너는 어떻든 반짝반짝 빛나는 하루가 되거라(2013.12.12.).”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똑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없다면, 아이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은 두 어른이 어떤 마음인지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이 사진을 왜 찍을까요? 내 아이라서? 아이가 예뻐서? 아이한테 ‘어릴 적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 선물하’려는 뜻에서?


  사진을 왜 찍을까요? 내 마음이라서? 사진이 재미있어서? 내가 바라보고 느낀 것을 찬찬히 적바림하려는 뜻에서? 작가라서?





  사진책 《윤미네 집》을 들여다본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손꼽는 까닭은 오직 하나입니다. 아이를 바라보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랑이라는 마음이 천천히 스며서 깊이 배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진책 《안녕, 제시카》를 들여다본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보며 무엇을 생각할까요.


  사진을 찍는 까닭은 ‘사진’이라는 틀을 빌어 이야기를 엮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까닭은 ‘글’이라는 틀을 빌어 이야기를 엮기 때문입니다. 어떤 물건 하나를 건사하는 까닭은, 이를테면 아이가 처음 발에 꿴 신이라든지, 아이가 어릴 적에 입던 치마라든지, 아이가 어릴 적에 쓰던 놀잇감이라든지, 아이한테서 처음 빠진 이라든지, 이런저런 것을 건사하는 까닭은, 이런저런 것에서 이야기가 끝없이 흘러나오기 때문이요, 이 이야기는 보금자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린 사랑이 따스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유치원에 간 제시카. 선생님은 ‘분리불안’이 생길지도 모르니 잘 살펴 달라고 아빠에게 부탁. 하지만 제시카가 유치원 가고 없는 며칠, 분리불안은 아빠에게 생겼다(2014.5.5.).”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살짝 아쉽습니다. 분리불안을 생각하니 분리불안이 생깁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안 가면 사회성이 없을까요? 사회성이란 무엇일까요? 사회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야 사회성일까요? 날마다 터지는 온갖 사건과 사고를 알아야 사회성일까요? 대통령 이름을 알거나 온갖 물질문명을 누릴 줄 알아야 사회성일까요? 손전화를 쓰고 카드를 쓰며 자가용을 몰 줄 알아야 사회성일까요?


  시골에서 풀내음을 맡으면서 구름을 읽을 줄 아는 아이는 사회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노는 아이는 사회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아이들은 어떤 숨결일까요? 아이들은 어떤 빛일까요? 아이들은 어떤 사랑일까요? 아이들은 어떤 노래일까요? 아이들은 어떤 꿈일까요? 아이들은 어떤 삶일까요?


  아이를 찍든 늙은 할매와 할배를 찍든 늘 똑같습니다. 겉모습을 찍기에 사진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이는 몇 가지 모습을 찍기에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찍어야 사진입니다. 마음을 써야 글입니다. 마음을 불러야 노래입니다. 마음을 그려야 그림입니다. “함께 나가지 못한 엄마를 위해 들꽃을 꺾어 온 제시카. 엄마 마음을 헤아려 줘서 고마워. 그 마음 잊지 않을게(2014.5.6.).”와 같은 이야기를 굳이 안 달아도, ‘아, 아이가 꽃을 꺾어 어버이한테 드리려는 사랑이네’ 하고 사진만 보면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유치원 가는 길, 제시카가 꼭 인사를 건네는 나무. 나무야 어제는 잘 잤니(2014.5.14.).” 하는 이야기를 따로 안 붙여도 됩니다. 그저 사진만 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이녁이 아이 어버이라면 다 알리라 생각해요. 아이 눈빛만 바라보아도 아이가 무슨 마음이요 생각인지 아는가요, 모르는가요? 아이 목소리만 들어도 아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는가요, 모르는가요? 아이가 웃는 소리를 귀여겨들으면서 얼마나 즐거운가를 아는가요, 모르는가요?


  아이들은 사진 잘 찍어 주는 어버이를 더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저희를 사랑하는 아버이를 마냥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저희를 꾸짖어도 어버이를 믿고 사랑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차린 밥을 그냥 먹습니다. 못 먹을 것인지 먹을 만한지 따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가자고 하는 데에 스스럼없이 따라나섭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어버이를 믿고 좋아하며 사랑합니다. 어버이는 어떤가요? 아이들을 언제나 믿고 좋아하며 사랑하는가요? 그렇다면, 어버이가 찍을 ‘아이 사진’은 언제나 한 가지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함께 읽고 나누는 즐거움을 살포시 담으면 됩니다. 아이가 노래를 부를 적에 동영상으로 담아 놓아야, 아이가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알지 않아요. 사진기가 없어서 사진을 못 찍어도 돼요. 언제나 우리 가슴에 아이하고 나눈 사랑을 담으면 됩니다. 사진책 《안녕, 제시카》에서 이러한 가슴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는데, 적잖이 아쉽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늘 어버이를 믿으니, 어버이를 믿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니라, 함께 노래하고 놀고 춤추고 얘기꽃을 피우면서, ‘가끔’ 참말 ‘가끔’ 한 장만 남겨 보셔요. 사진기 단추를 누를 겨를에 아이하고 놀다가, 사진기는 딱 2초만 손에 쥐고 찰칵 한 장 찍은 뒤 저리 뒤로 밀어 놓으셔요. 4347.8.1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가 한국기층문화의 탐구 4
황헌만 사진, 김홍식 외 글 / 열화당 / 199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찾아 읽는 사진책 182



시골집을 찍는 사진

― 草家

 황헌만 사진

 김홍식·박태순·임재해 글

 열화당 펴냄, 1991.1.20.



  사진책 《草家》(열화당,1991)를 읽을 때에는 늘 즐겁습니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집이 가득가득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스러운 집에서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사람들 모습을 사진으로 엿볼 수 있고, 아름다운 집에서 살림을 꾸리는 사람들 모습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초가》라는 책은 ‘사진책’이라기보다는 ‘인문책’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사진책으로 삼습니다. 글로 ‘풀집’을 이야기할 때에는 제대로 와닿지 않지만, 사진으로 풀집을 이야기할 적에는 살갗으로 와닿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은 황헌만 님은 “초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부터의 일이었고,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미련스럽다 할 지경으로 이 일에 매달려, 이제 한 권의 책으로 엮게 되었다(237쪽).” 하고 말합니다. 1991년에 나온 책이니 그리 오래지 않은 지난날에 찍은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황헌만 님이 아니더라도 1970∼80년대에 조금만 눈빛을 밝혀 시골을 돌아다녔으면 ‘풀집’ 사진과 ‘고샅’ 사진과 ‘시골’ 사진을 훌륭히 남길 수 있었어요.


  1970∼80년대에 한국 사진가 가운데 몇 사람쯤 시골마을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았을까 궁금합니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막바지에 이른 때요 간첩신고가 불을 뿜던 때였기에, 시골에서 사진을 찍기란 아주 힘들었을까요?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이 불꽃을 피우던 때였기에, 먹고살기에 빠듯하여 필름을 장만해서 사진을 찍기란 몹시 힘들었을까요?


  《초가》에 나오는 모습은 아주 오래된 집이 아닙니다. 쉰 해를 묵거나 백 해를 묵은 사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너무 빠르고 끔찍하게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 깃발이 나부낀 바람에, 이 책에 나오는 모습은 아스라이 머나먼 옛날 옛적 이야기 같습니다.






  황헌만 님은 “따라서 여기에 수록된 초가들은, 지금에는 찾아볼 수 없게 되거나 ‘지붕개량’으로 다른 모습을 띠고 있기도 하다. 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구, 도로 건설, 산업단지 조성 등으로 ‘국토의 살결’이 오죽 달라졌는가. 초가는 한반도로부터 떠나가고 있으나, ‘초가 사진’이 마치 초상화들처럼 남아 있게 된 것에 한 작가로서의 보람과 긍지를 삼아 볼 수 있을까(237쪽).” 하고 말합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오늘날에는 ‘슬레트 지붕’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슬레트 지붕은 머잖아 모두 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나라에서 돈을 들여 치워 주기도 하지만, 슬레트 지붕은 비바람과 햇볕에 삭고 낡아 쉬 부스러집니다. ‘새마을운동 역사 기록관’을 세울 일이 아니라면 슬레트 지붕을 건사할 일이 없을 테고, 이런 지붕을 얹은 시골집이나 도시집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도 아주 드물리라 생각해요.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사진은 무엇을 찍을까요. ‘남기는 일(기록)’이 사진찍기일까요. 무엇이든 다 찍어서 남기면 사진이 될까요. 이를테면, 독재자를 찍는 사진도 ‘남기는 일’이 되고, 독재정권 군홧발을 휘두른 이들을 찍는 사진도 ‘남기는 일’이 되나요.






  적잖은 사진가는 나라에서 주는 돈을 받고 4대강사업 현장을 ‘그림처럼 멋있게’ 찍습니다. 이런 사진도 우리 사회와 역사를 남기는 일이 될까요.


  《초가》에 글을 쓴 박태순 님은 “대중문화 조작의 이런 노래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가 즐겨 부르던 민요는 무어라 했던가.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금도끼로 찍어내고 은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지어내어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라 했다(210쪽).”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래요. 저도 어릴 적에, 1980년대에 이런 노래를 흔히 듣고 불렀습니다. 저도 동무들과 동네 골목에서 놀면서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골집을 찍는 사진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요즈음은 시골에 할매와 할배가 아주 많습니다. 젊은이는 거의 다 도시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시골에서는 시골에 남는 젊은이나 어린이나 푸름이를 깔봅니다. 도시로 갈 재주가 없어서 남는 찌끄레기인 듯 여기기까지 합니다. 이와 달리, 도시에서 시골로 온 사람을 두고는 ‘돈도 있고 생각도 있는’ 사람으로 칩니다. 시골에서 내처 살아온 사람과 시골로 새롭게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는 시골사람 눈매가 사뭇 다릅니다.


  시골은 어떤 곳일까요. 오늘날 시골을 돌며 사진을 찍는 사진가 한 사람이 있다면, 이녁은 어떤 빛을 사진으로 담으려 할까요. 어릴 적부터 시골에 그대로 뿌리를 내려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서 사진을 찍는 사진가는 있을까요? 나이 들어 깨우친 빛이 있기에 도시를 떠나 시골로 들어와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서 사진을 찍는 사진가는 있을까요? 그저 늙고 쭈그러든 할매와 할배만 어두컴컴하거나 슬프거나 쓸쓸한 모양새로 찍는 사진가만 있을까요?


  아이들이 시골에서 놀 수 있기를 빕니다. 어른들이 시골에서 일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시골에서 살림집을 곱게 꾸미면서 아름답게 꿈을 꿀 수 있기를 빕니다. 아름답게 가꾸는 삶을 아름다운 눈빛을 밝혀 사진으로 찍는 이웃이 있기를 빕니다. 사랑스레 돌보는 시골살이를 사랑스러운 손길을 뻗어 사진으로 담는 동무가 있기를 빕니다. 4347.8.1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토닷 Photo닷 2014.8 - Vol.9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83



예쁘게 찍는 사진 한 장

― 사진잡지 《포토닷》 9호

 포토닷 펴냄, 2014.8.1.



  사진잡지 《포토닷》 9호를 읽습니다. 대구에 문을 연 ‘아트도서관’ 소식을 짤막하게 읽습니다. 몇 군데 신문에도 아트도서관 소식이 나왔는데, 한국에 사진과 얽힌 책을 느긋하게 볼 수 있는 데가 거의 없는 만큼, 이러한 소식은 짤막한 기사가 아닌 깊이 들여다보는 취재로 다루면 한결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호에서는 짤막하게 다루었지만, 다음 호에서는 아트도서관을 찬찬히 이야기하는 글과 사진을 다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잡지이기에 사진과 얽힌 여러 가지 소식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진상을 받은 이들 소식이 나오고, 사진전시회 이야기가 흐릅니다. 눈여겨볼 만한 작가들 이름과 작품을 보여줍니다. 아무래도 사진잡지이니 사진 이야기와 사진가 소식을 다룰 수 있어야겠지요. 그러면, 사진 이야기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사진가 소식은 무엇을 다루어야 ‘사진가 소식’이 될까요.


  “정경자(40)의 사진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느낌 있는 사진’이 아닐까 싶다. 무언가 꼭 집어서 말할 수 없는 말랑말랑한 감성 그리고 뭔지 모를 슬픔이 그녀의 사진 곳곳에 묻어 있다(김소윤/42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정경자 님 사진을 ‘느낌 있는 사진’이라 말하는데, 우리가 보는 모든 사진에는 ‘느낌이 있’습니다. 느낌이 없다면? 느낌을 못 받는다면? 이때에는 사진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진에는 빛이 있습니다. 빛을 느끼는 사진입니다. 그런데, 빛을 못 느끼는 사진이 있다면? 사진을 읽으면서 빛을 못 느낀다면? 이때에는 사진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사진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담는 사진이요, 이야기를 읽는 사진입니다. 사진에서 이야기를 느끼거나 읽을 수 없다면, 이때에도 사진이 아니라고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사진을 읽는 사람 가슴속에 느낌이나 빛이나 이야기가 없다면, 사진을 찍은 이가 아무리 느낌과 빛과 이야기를 담았더라도 제대로 드러나지 못할 수 있어요. 사진을 찍는 사람 못지않게 사진을 읽는 사람도 느낌과 빛과 이야기를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창작(찍기)과 비평(읽기)은 서로 나란히 느낌과 빛과 이야기로 어우러진 사랑입니다.


  “때로는 사진이 작가를 바라보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의 작품을 보며, 과연 ‘본다는 것’은 무엇일지 골똘해진다(최연하/58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사진잡지이기에 언제나 ‘보기(바라보기)’를 생각합니다. 사진이란, ‘보고 느껴서 찍으며 이야기를 빚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 사진을 읽을 적에는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어떤 이야기로 빚으려고 사진을 찍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 사진을 읽을 때에는 저 사람이 어떤 꿈을 어떤 노래로 엮으려고 사진을 찍었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바라보고, 사진을 마주하면서 사람(찍은 사람과 찍힌 사람)을 마주합니다.


  “세피아 톤은 촛불에 그슬린 과테말라 성당의 벽면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마야인들이 나무껍질로 만든 종이가 시간이 지나면 세피아 톤과 비슷한 색상으로 변해 간다(루이스 곤잘레스 팔마/67쪽).”와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사진은 눈을 떠서 찍으며, 사진은 눈을 떠서 읽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진을 바라볼 적에 무지개빛, 까망하양, 이렇게 두 갈래를 살피는 한편, ‘다른 결’, 그러니까 ‘세피아 톤’이든 무엇이든 생각합니다.


  빛결에는 어떠한 숨결이 깃들까요. 세피아 톤을 마음에 담는 이녁은 어떠한 이녁 숨결을 사진 한 장에 살포시 담아서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까요. 사진을 찍을 때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무지개빛을 쓰지는 않는가요. 사진을 찍으며 넓게 돌아보지 않고 까망하양을 쓰지는 않는가요.





  사진은 언제나 우리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무지개빛이 감돌면, 까망하양으로 사진을 찍어도 언제나 무지개빛이 살포시 드러나면서, 이 사진을 읽는 이들도 무지개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까망하양과 같은 기운이 서리면, 무지개빛으로 사진을 찍어도 늘 까망하양 기운이 그윽히 나타나면서, 이 사진을 읽는 이들도 까망하양을 느끼곤 합니다.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문제점을 알아보자면 첫째는 사진촬영을 위해 앵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국유림의 나무를 무단으로 잘라낸 사진작가 장국현에 관한 것이다(곽윤섭/73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알아보니, 장국현이라는 분이 ‘금강송’을 사진으로 찍는다면서, 가장 큰 금강송(대왕송) 둘레에서 자라는 다른 금강송(신하송), 이를테면 220년을 묵은 금강송까지 베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금강송은 네 그루에 6000만 원, 그러니까 한 그루에 1500만 원이라는 값을 한다는데, 금강송을 열한 그루를 베어낸 장국현이라는 분한테 법원은 500만 원 벌금을 내라고 했다고 해요. 그리고, 장국현이라는 분은 취재기자한테 “이제 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고 말했으며, 이분은 금강송을 찍은 사진을 한 장에 400∼500만 원에 팔았다고 합니다.


  쓸쓸한 이야기입니다. 쓸쓸하면서 슬픕니다. 장국현이라는 분은 어떤 사진을 찍고 싶어서 이처럼 몹쓸 짓을 했을까 싶은데, 이녁이 신문사나 방송사와 만나서 하는 말을 들으면 스스로 ‘잘못했다’고 느끼지는 않는구나 싶습니다. 어쩌다 ‘들통이 나서 법원에 갔고 벌금을 내는구나’ 하고 느끼지 싶습니다.




  이녁이 사진을 찍는 솜씨가 대단하거나 훌륭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진을 찍는 넋이나 몸가짐이나 마음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지 싶습니다. 재주가 있다고 해서 남을 해코지해도 되지 않고, 솜씨가 있다고 해서 엉터리 짓을 해도 되지 않습니다. 보기에 그럴듯한 그림을 빚는 일이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이야기를 짓는 사진을 선보일 때에 사진찍기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자주 말한다. 사생활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잘 다져져야 그것을 사진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것 같다(장유진/77쪽).”와 같은 이야기를 함께 생각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내 이야기’를 잘 할 노릇입니다. 나 스스로 나를 바라볼 적에 옳고 바르며 아름답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이웃과 마을과 지구별을 바라볼 적에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눈빛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눈길(바라보기)을 다스릴 때에 비로소 사진으로 삶을 풀어내리라 느낍니다.


  가만히 보면, “보자기 뒤집고 쓰고 찍는 게 무슨 예술이냐며 사진을 천대하고 예술로 인정 않는 세력과 투쟁해 온 40년의 시간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정작 내 사진을 찍을 시간이 없었어요. 95세에 처음 개인전을 여는 작가는 세계에서 제가 아마 유일할 거예요(이명동/103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아직 한국에서는 사진이 예술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라고 여길는지 모릅니다. 사진을 사진으로 바라보지 못하던 한국 사회에서 삶을 꾸리고 사진을 찍은 터라, 나무 한 그루를 찍으려고 다른 나무를 수없이 몰래 베는 일이 되풀이될는지 모릅니다. 삶을 가다듬지 않고 사진만 찍을 때에는 삶도 사진도 제 빛을 못 찾을는지 모릅니다.


  사진은 예쁘게 찍을 노릇입니다. 빛을 예쁘게 담을 뿐 아니라, 마음을 예쁘게 가누면서 찍을 노릇입니다. 사진으로 찍을 이웃을 예쁘게 마주할 뿐 아니라, 사진을 찍는 내 삶을 예쁘게 돌볼 노릇입니다.





  “앵글도 좋고, 노출도 정황했다고 편집장이 타고난 사진가라고 말해 줘 얼마나 우쭐했었는지. 운이 좋았겠지만 말이다. 노을이 질 때 다시 찍으면 좋겠다고 해서 아침 첫차를 타고 다시 내려가 하루 종일 건물을 노려보고 있다가 노을이 질 무렵 소중한 한 컷을 담아서 올라왔다. 그 사진이 그 달의 잡지에 실렸다.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 프리랜스 사진가로 다시 ‘건축과 환경’의 사진을 찍으면서 잡지를 통해 내 사진의 색을 만들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김용관/114, 116쪽).”와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읽습니다. 김용관 님은 풋내기인 이녁한테 ‘좋은 말’만 들려줄 뿐 아니라, 풋내기가 찍은 사진을 잡지에 덜컥덜컥 실으면서 기운을 북돋운 선배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김용관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어 보면, 김용관 님 둘레에서 ‘이 사람이 어떤 일에든 바지런하면서 알뜰하더라’ 하고 느낀 뒤에 사진 일을 맡겼다고 합니다. 대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사진을 배운 적이 없으나, 사람됨이 바르고 예쁘겠구나 싶어, 덥석 사진기를 맡긴 셈이라고 할까요. 사진을 찍는 솜씨나 재주는 앞으로 차근차근 키우면 되니, 무엇보다 ‘사진을 마주하는 넋’이 튼튼히 서도록 둘레에서 이끌었다고 할까요.


  아무래도 한국 사회에서는 “한국전쟁의 전란에서 개발독재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깊은 질곡, 어두운 이면에 왜 정작 사진을 찍은 사진가는 부재한가(진동선/122쪽)?” 하고 외칠 수밖에 없으리라 느낍니다. 온갖 아픔과 수렁과 굴레와 쳇바퀴가 그득그득 이어진 한국 사회입니다. 올곧게 한길을 걸어간 사진가를 찾기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진가뿐 아닙니다.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쓴 사람 가운데, 대학교수를 하거나 초·중·고등학교 교사를 맡은 사람 가운데, 공무원이 되거나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 가운데, 어두운 나날을 슬기로운 빛을 밝히면서 걸어간 사람을 얼마쯤 손으로 꼽을 수 있을까요.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아이들한테 거친 말을 하지 않으며, 아이들을 대학입시 노예로 몰아세우지 않은 여느 교사는 그야말로 드뭅니다. 그러나, 지난날에는 지난날대로 너무 벅차고 힘들었으니, 올곧게 한길을 걷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어요. 안타깝지만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 참모습입니다. 옛모습은 털고, 이제부터 새로운 넋이 되어 한길을 올곧게 걸어가면 됩니다. 옛사람이 얽매였던 수렁이나 굴레는 살며시 내려놓고, 오늘을 가꾸는 우리들이 새로운 빛을 가꾸면 됩니다.




  “화각과 화질과 해상도가 더 나은 사진을 얻으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진을 찍는 우리들은 왜 ‘더 나은 사진을 얻으려’고 해야 할까요. 우리들이 찍을 사진은 ‘더 나은 사진’이어야 할까요. 그래서 ‘세계 사진 역사’에도 이름을 걸쳐야 ‘사랑받는 사진가’가 될는지요. ‘매그넘 회원’이 되거나 ‘외국에서 전시회를 열’거나 ‘외국 사진잡지에 소개되’거나 ‘사진 한 장에 제법 비싸다 싶은 값을 받고 팔아’야, 어깨에 힘을 줄 만한 사진가가 될 만할는지요 …… ‘인기 사진가’라 손꼽을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그야말로 ‘인기 사진가’입니다. 다만, ‘인기’를 얻는 사진가일 뿐입니다. 인기를 얻는다고 해서 이분들 사진이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사랑스럽거나 따사롭거나 착하거나 참답지는 않습니다 …… 마음이 있는 사람은 사진기를 처음 쥔 날에도 사진빛을 느낍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사진기를 쉰 해 넘게 쥐었어도 사진빛을 느끼지 못합니다 …… 작가 대접을 받아야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잘 찍고 못 찍고를 떠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최종규/151∼153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오늘 우리들이 이곳에서 아름다운 넋이 되어 삶을 슬기롭게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가가 되려는 사진이 아니라, 작품으로 비싸게 팔려는 사진이 아니라, 내 마음을 살찌우고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웃는 사진을 찍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나저나, 사진잡지 《포토닷》 9호 첫머리에 실린 “아이들을 꼭 귀엽게 촬영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다 귀여운 것도 아니다. 부모에게조차 자신의 아이는 항상 귀엽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아이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아이들은 귀엽기만 하다는 ‘편견’에 반기를 든다. 그래서 그 사랑스럽고도 얄밉기도 한 아이들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담아 부모와 어른들은 ‘미운 7살’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냈고, 또 아이들은 그 표현에 부합하는 몫을 충실히 해내면서 성장해 간다(이철승/32쪽).”와 같은 이야기에서는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합니다. 이야기가 어쩐지 얄궂습니다. 아이들을 꼭 귀엽게 찍을 까닭이 없다는데, 아이들을 귀엽게 안 찍을 까닭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귀여움’이란 바라보는 사람이 느끼는 마음입니다. 바라보는 사람이 귀엽게 느꼈으면 귀엽게 찍으면 됩니다. 바라보는 사람이 안 귀엽다고 느꼈으면 안 귀여운 그대로 찍으면 됩니다.


  이철승 님은 “모든 아이들이 다 귀여운 것도 아니다” 하고 말하는데, 모든 아이들이 왜 다 안 귀여울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귀엽지 않다면, 아이들 탓일까요? 아이들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이들이 안 귀여울까요? 아이들을 착하고 참답게 사랑하지 않을 적에 아이들이 안 귀여운 모습으로 ‘끔찍한’ 모습이 되지 않나요?


  아이들을 어머니 아버지가 살뜰히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으면서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종일반으로 집어넣고, 집에서 아이들과 놀아 주지 않다가, 초등학교뿐 아니라 온갖 학원에 몰아넣고서는, 어느덧 대학입시 노예가 되도록 닦달하는 오늘날 우리 어른들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이 나라 아이들은 ‘미운 일곱 살’ 소리를 듣습니다.


  왜 아이들이 미운 일곱 살이 되어야 할까요. 아이들이 미운 일곱 살이 되도록 닦달하거나 몰아붙인 우리 어른들 모습을 제대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학원에 얽매이고 텔레비전에 길들며 문제집과 교과서 숙제에 짓눌리는 아이들은 일곱 살이 아닌 열네 살에도 ‘죽은 얼굴’입니다. 그렇지만, 즐겁게 뛰놀고 마음껏 노래하는 아이들은 일곱 살이건 열네 살이건 ‘살아서 숨쉬는 얼굴’입니다.




  《포토닷》 9호에 최연하 님이 “작가의 작품을 보며, 과연 ‘본다는 것’은 무엇일지 골똘해진다” 하고 들려준 이야기처럼, 우리는 우리 사회를 제대로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우리 모습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내 모습을 제대로 보고 이웃 모습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어른을 제대로 보고 아이들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사람을 재거나 따지면 그릇된 길로 갈 뿐입니다. 아이들을 아이들 결대로 바라보고, 아이들 숨소리와 눈빛을 사랑스럽게 북돋우는 길로 함께 걸어가지 않는다면, 거의 모든 여느 사진가는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미운 일곱 살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리라 느낍니다.


  장국현이라는 분은 나무를 함부로 베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만, 제주섬 오름에서 사진을 찍던 김영갑 님은 라면스프 하나를 며칠 동안 손가락으로 찍어 먹으면서 오름과 하나가 되고 비바람하고 한몸이 되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온갖 장비를 이끌고 찾아가야 놀랍거나 멋진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장비는 사진기 하나만 있어도 됩니다. 사진에 담으려고 하는 이웃하고 한마음이 되고 한몸으로 움직일 때에 아름다운 빛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예쁜 넋일 때에 예쁜 빛이 우리 앞에 환하게 솟아납니다. 4347.8.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굿바이 알라딘 - 만화가 이우일의 폴라로이드 사진집
이우일 사진.글 / 호미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찾아 읽는 사진책 183


사진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니
― 굿바이 알라딘
 이우일 사진
 호미 펴냄, 2007.12.31.


  2014년에 일곱 살을 누리는 우리 집 큰아이는 갓 태어난 뒤부터 아버지 곁에서 사진에 찍힙니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날마다 함께 지내면서 날마다 사진을 찍으니, 나는 이 아이들을 맨 처음 사진으로 찍던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가지 모습도 잊히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 아이들을 놓고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떠올릴 수 있습니다.

  큰아이가 갓난쟁이였을 무렵, 이 아이는 날마다 저를 빤히 들여다보며 사진을 찍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여섯 달쯤 될 무렵인데, 볼볼 기어서 아버지 사진기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입을 맞춘다기보다 입에 넣어 맛을 보고팠구나 싶지만, 사진기는 아기 입보다 훨씬 크니 아기한테 잡아먹히지 않았습니다. 큰아이는 아버지 손전화를 쪽쪽 빨아서 먹느라 하나를 날려 보냈지만, 사진기는 날려 보내지 못했습니다. 돌을 앞두고 두 다리로 설 수 있던 큰아이는 아버지 사진기를 영차 하고 들어 목에 걸어서 놀기도 했습니다. 사진기 몸통과 렌즈 무게가 이 킬로그램 가까이 되었으니, 갓난쟁이로서는 대단히 무거운 것을 들고 목에 걸어서 논 셈입니다.

  나는 큰아이한테 ‘사진찍기’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디지털사진기를 쓰면서 디지털사진기에 찍힌 모습을 화면으로 어떻게 보는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큰아이는 저 혼자 오물조물 만지더니 아버지 사진기로 사진을 찍습니다. 두 돌이 되기 앞서 ‘사진읽기’를 합니다.

  2014년에 네 살인 작은아이는 누나와 달리 아버지 사진기에 그리 눈길을 안 둡니다. 네 살에 이른 요즈음에 가끔 아버지 사진기를 슬쩍 집어들어 갑자기 수십 장을 촤라락 찍어대고는 얌전히 내려놓습니다.






  만화를 그리는 이우일 님이 내놓은 사진책 《굿바이 알라딘》(호미,2007)이 있습니다. 2007년에 나온 책이니 일곱 해만에 이 사진책을 알아보았습니다. 고맙게 아직 판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진책 《굿바이 알라딘》을 보면 이우일 님 딸아이가 나오는데, 이때까지는 아주 어린 아이였다면, 이때부터 일곱 해가 흐른 요즈음은 이우일 님 딸아이는 훌쩍 컸겠지요. 아가씨가 다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폴라로이드 sx-70랜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는 것, 그것으로 단 한 장의 사진을 얻는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으니 공들여 단 한 장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머리말).” 하고 흐르는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사진도 하나요 이야기도 하나입니다. 그리고, 아이도 하나요 어버이도 하나입니다. 우리 집에는 두 아이가 있습니다만, 큰아이는 큰아이대로 오직 하나뿐인 오롯한 숨결이고, 작은아이는 작은아이대로 오직 하나인 옹근 숨결입니다. 아이들한테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직 하나인 어머니요 아버지입니다.

  이우일 님은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쓰셨는데, 폴라로이드 사진기가 아니더라도, 사진은 언제나 하나만 얻습니다. 디지털사진기이든 여느 필름사진기이든 이와 같습니다. 원본파일과 원본필름이 있으면 언제든지 ‘복제’를 한다지만, 복제해서 다시 만드는 사진은 처음 만든 사진하고 빛과 느낌과 이야기가 달라요.

  다시 말하자면, 어떤 사진기를 쓰든, 우리는 오직 ‘사진을 한 장 얻’습니다. 오직 한 장만 얻는 사진찍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자꾸 새롭게 사진을 찍습니다. 한 번 찍은 사람을 다시 찍습니다. 한 번 찍은 나무와 꽃을 다시 찍습니다. 한 번 찍은 백두산과 지리산을 다시 찍습니다. 한 번 찍은 헌책방과 골목길을 다시 찾아가서 한참 거닐거나 누린 뒤 다시 찍습니다.

  사진은 스스로 찍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사진은 스스로 만날 때마다 새롭습니다.

  이우일 님은 이녁이 쓴 사진기와 필름을 놓고 “그게 ‘타임 제로’ 필름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온도가 적당하면 포근하고 아련한 느낌의 사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머리말).” 하고도 이야기합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저는 디지털사진기 가운데 ‘캐논350D’를 무척 오랫동안 썼습니다. 사진기 부속이 모두 낡고 닳아 두 번 갈았는데, 더는 고쳐서 쓸 수 없다고 느껴, 이제는 ‘캐논100D’를 씁니다. 예전에 한 가지 사진기로만 오래 쓴 까닭은 그 사진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빛결이 있기 때문이에요. 다른 사진기로는 도무지 그 빛결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성능이나 화소가 훨씬 높은 다른 사진기로 찍어 보아도, 참으로 그 빛결이 나오지 않더군요.

  필름사진기도 기계마다 빛결이 다릅니다. 사진기 만든 회사마다 빛결이 살짝 다르고, 같은 회사 사진기라도 기종마다 빛결이 달라요.

  생각해 보면 누구나 알리라 느껴요. 똑같은 빛결이 나올 사진기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 다른 사진기를 저마다 제 사진감에 맞추어서 씁니다.

  같은 곳에 서서 같은 것을 바라볼 적에도, 스스로 어떤 마음이고 눈길인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 다른 이야기를 짓습니다. 같은 곳에 서서 같은 것을 사진으로 찍을 적에도, 스스로 어떤 생각이고 눈빛인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이야기가 깃든 사진이 태어납니다.

  이우일 님은 “사진을 찍을 때 무엇으로 어떻게 찍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사람이 찍는 것이니 찍는 이의 마음과 시선이 가장 중요하다고(머리말).” 하고 말합니다. 그림을 그릴 적에도 늘 이와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그림결로 그림을 그리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연필로 그림을 그리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든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든 벽에 그림을 그리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 하는 대목을 담을 때에 ‘그림’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어떤 사랑인가 하는 대목을 실을 때에 ‘글’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어떤 꿈인가 하는 대목을 얹을 때에 ‘사진’입니다.

  사진책 《굿바이 알라딘》을 천천히 읽은 뒤 덮습니다. 이우일 님은 이녁 사진에 더러 말을 몇 마디 붙입니다. 애써 말을 안 붙여도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알 만합니다. 굳이 말을 붙였기에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한결 잘 알 수 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반짝거리는 물건에 초점을 맞추면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58쪽).”와 같이 적은 글월에 밑줄을 긋습니다.

  즐겁고 싶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노래하고 싶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시나요? 참말 재미있어서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읽으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시나요? 참으로 재미있어서 사진을 읽습니다. 하루하루 재미있으니 새롭게 동이 트며 아침이 찾아옵니다. 하루하루 재미가 넘치니 아침이 지나 낮이 되고 저녁이 찾아와 밤이 깜깜하며 별빛이 흐릅니다. 사진은 삶빛입니다. 4347.7.3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후의 언어 - 나는 왜 찍는가
이상엽 글.사진 / 북멘토(도서출판)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글은 지난 7월 8일에 썼지만, 사진잡지 <포토닷>  2014년 8월호에 실으려고 썼기에, 그동안 묵힌 글을 올립니다. 어제 <포토닷> 2014년 8월호가 나왔습니다. 사진책을 즐겁게 읽으며 사진과 삶을 읽는 이웃이 늘기를 바랍니다.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81



사진으로 이루는 빛을 바라보다

― 최후의 언어, 나는 왜 찍는가

 이상엽 글·사진

 북멘토 펴냄, 2014.6.25.



  이상엽 님이 선보이는 사진책 《최후의 언어, 나는 왜 찍는가》(북멘토, 2014)를 읽습니다. 이상엽 님은 스스로 묻습니다. 이상엽 님은 이녁 스스로 ‘마지막 말’을 물은 뒤, ‘나는 왜 찍는가’를 묻습니다. 이 책은 이상엽 님이 이제껏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밝히려는 이야기꾸러미입니다.



.. 언제나 먹고사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아이들이 셋이나 되는 처지는 도시 생활의 미래를 무척이나 어둡게 한다 … 수면을 재빨리 차고 지나가는 물새들과 이름도 모르는 산새들이 숲과 계곡에 가득하다. 망원렌즈가 없어 그저 눈과 귀로 감상할 뿐이다 ..  (28, 35∼36쪽)





  누군가는 먹고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먹고살기는 어렵지 않으나 꿈이 없어서 헤맬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먹고살기도 어렵고 꿈이 없어 헤매기까지 합니다. 누군가는 먹고살기 어렵지 않으면서 스스로 꿈을 밝혀 즐겁습니다. 이들은 저마다 어떻게 다른 셈일까 헤아려 봅니다. 밥을 어느 만큼 먹거나 돈을 얼마나 벌 적에 넉넉하다 할 만하고, 어떤 꿈을 어떻게 이루려 할 적에 즐겁다고 할 만할까 생각해 봅니다.


  하루 두 끼니를 먹으면 어떨까요. 하루 네 끼니를 먹으면 어떨까요. 다달이 천만 원을 벌면 어떨까요. 다달이 백만 원을 벌면 어떨까요. 도시에서 아파트를 가지면 넉넉할까요. 시골에 오두막 같은 집이 있으면 아쉬울까요. 자가용을 굴리면 넉넉하고, 자전거나 두 다리로 움직이면 아쉬울까요.


  이야기를 돌려서 사진으로 생각해 봅니다. 하루에 사진을 몇 장쯤 찍을 때에 넉넉하거나 즐거울까요. 내가 찍은 사진은 어느 만큼 사랑을 받거나 얼마에 팔리거나 몇 장쯤 팔릴 때에 넉넉하거나 즐거울까요. 그리고, 어떤 사진기를 써야 사진이 그럴듯하게 나온다고 할 만할는지요.


  값진 장비가 사진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날마다 100장을 찍거나 300장쯤 찍으면 훌륭하다고 할 만할까 궁금합니다. 사진 한 장을 백만 원에 팔 수 있으면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상엽 님은 “라이카를 들고 멋진 사진을 찍는 작가”는 얼마 안 보인다고 말하는데, 라이카뿐 아니라 대형사진기이든 중형사진기를 들고 멋진 사진을 찍는 작가는 얼마나 된다고 할 만할까요. 소형사진기 가운데 아주 값싼 장비로, 똑딱이라 일컫는 가볍고 작으며 값싼 디지털사진기로 멋진 사진을 찍는 작가는 몇이나 된다고 할 만할까요.



.. 무언가를 은폐하고 음모하기 위해 쳐 놓은 것이 가림막이다. 재개발지구에서, 4대강에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가림막을 보았다. 그리고 여기 제주도 강정에서 또 본다 … 명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거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라이카를 들고 멋진 사진을 찍는 작가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  (59, 69쪽)





  사진기를 손에 쥐어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니, 사진장비를 허투루 다룰 수 없습니다. 아무 사진기나 쓸 수 없습니다. 사진기마다 값이 다른 까닭은, 사진기마다 화질이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값을 더 얹어서 장만하는 사진기를 쓸 적에 화각과 화질과 해상도 모두 한결 뛰어나겠지요.


  그러면, 화각과 화질과 해상도가 더 나은 사진을 얻으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진을 찍는 우리들은 왜 ‘더 나은 사진을 얻으려’고 해야 할까요. 우리들이 찍을 사진은 ‘더 나은 사진’이어야 할까요. 그래서 ‘세계 사진 역사’에도 이름을 걸쳐야 ‘사랑받는 사진가’가 될는지요. ‘매그넘 회원’이 되거나 ‘외국에서 전시회를 열’거나 ‘외국 사진잡지에 소개되’거나 ‘사진 한 장에 제법 비싸다 싶은 값을 받고 팔아’야, 어깨에 힘을 줄 만한 사진가가 될 만할는지요.


  십만 권이나 백만 권쯤 되는 책을 팔 만한 글을 쓰는 작가를 가리켜 ‘베스트셀러 작가’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베스트셀러 작가’는 ‘훌륭한 작가’나 ‘아름다운 작가’나 ‘사랑스러운 작가’는 아닙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해서, 사진 역사에 이름을 올리지 않습니다.


  ‘인기 사진가’라 손꼽을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그야말로 ‘인기 사진가’입니다. 다만, ‘인기’를 얻는 사진가일 뿐입니다. 인기를 얻는다고 해서 이분들 사진이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사랑스럽거나 따사롭거나 착하거나 참답지는 않습니다. 사진 한 장 판 적이 없어도, 사진책 한 권 내놓은 적 없어도, 스스로 사진을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사랑스럽거나 따사롭거나 착하거나 참답게 가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 즐겁기에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 웃고 노래하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한테 자랑하려고 우쭐거리려고 낚시를 할 수 있겠지요. 남한테 으스대려고 뜨개질을 할 수 있겠지요. 남한테 보여주려고 사진을 찍을 수 있겠지요. 그러면, 자랑하는 사진이나 으스대는 사진이나 남한테 보여주려는 사진은 스스로 우리 삶을 얼마나 밝힐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는 까닭은 내가 바라보려는 빛이 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사진을 찍어서 나누려는 까닭은 내가 바라보려는 빛을 가만히 보듬으면서 사랑이라는 씨앗을 얹어 이야기꽃으로 피어나도록 하려는 마음이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 나는 비정규 노동자 천의봉, 최병승 두 사람이 행위예술을 하고 있다고 느껴 버렸다. 이 시대 노동계급들에게서 말이다 …전범기업 니콘은 전후 평화헌법으로 군수시장을 잃자 민수로 눈을 돌려 카메라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카메라로 지금까지 수많은 사진가들이 전쟁을 고발하는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이 벌인 전쟁을 부인하고 있다 ..  (88∼89, 143쪽)



  사진으로 이루는 빛을 바라봅니다. 사진으로 이루는 삶을 바라봅니다. 사진으로 이루는 넋을 바라봅니다.


  이상엽 님은 ‘노동자’를 자주 바라봅니다. 이상엽 님은 노동자를 바라보면서 ‘예술’을 느낍니다. ‘아름다움’을 떠올리고, ‘사랑’을 배웁니다. 다른 사진가는 다른 것을 바라보면서 예술을 느끼거나 아름다움을 떠올리거나 사랑을 배웁니다. 어느 쪽을 바라보기에 더 낫지 않습니다. 이쪽을 보기에 더 낫지 않습니다.


  사진은 이쪽과 저쪽을 나누지 않습니다. 사진은 국경도 성별도 나이도 학력도 따지지 않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와야 훌륭하게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이름난 스승한테서 배워야 아름답게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마음을 훌륭하게 다스리는 사람이 훌륭하구나 하고 느낄 사진을 찍습니다. 눈길과 생각과 사랑을 아름답게 돌보는 사람이 아름답구나 하고 느낄 사진을 빚습니다.


  사진을 열 해쯤 찍어야 ‘사진다운 사진’을 찍지 않아요. 사진을 서른 해쯤 찍어야 ‘사진다운 사진’을 바라보거나 느끼지 않아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사진기를 처음 쥔 날에도 사진빛을 느낍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사진기를 쉰 해 넘게 쥐었어도 사진빛을 느끼지 못합니다.





.. 오늘은 40킬로미터쯤 돌아다녔다. 자전거를 타고 내성천을 도는 지율 스님의 뒷모습을 좇았다. 몸으로 페달을 밟아 가며 내성천을 돌아보는 사이 우리가 자연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을 구원하는 길이라 생각해 본다. 영주시 평은면에는 지금 영주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  (219∼220쪽)



  이상엽 님이 만난 수많은 이웃 가운데 지율 스님이 있습니다. 지율 스님은 참말 ‘스님’입니다. 그런데, 지율 스님은 백 날이 넘도록 물조차 안 마시면서 ‘밥굶기 싸움’을 했어요. 어떤 넋일까요. 지율 스님은 무엇을 지키려 했을까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더 빨리 달려야 한다면서 고속철도와 고속도로를 자꾸 뚫는데, 온몸을 바쳐서 고속철도를 막으려고 하던 지율 스님은 어떤 숨결이었을까요.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우리가 삼십 분쯤 더 빨리 달릴 수 있으면 무엇이 즐거울까요. 삼십 분쯤 더 빨리 달릴 수 있도록 기찻길이나 찻길을 닦는 데에 얼마나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가요. 이런 돈을 우리 삶을 가꾸는 데에 쓸 수 없을까요. 고속철도나 고속도로를 닦는다며 숲과 들과 골짜기를 허물기보다는, 숲과 들과 골짜기를 푸르게 건사하면서, 어른과 아이 모두 푸른 빛을 누리도록 하는 길이 아름답지 않을까요. 삼십 분 덜 빠르게 달리면서 푸른 빛을 아름답게 누릴 때에, 비로소 사진도 아름답게 태어나지 않을까요. 돈을 더 벌어서 하려는 경제개발은 그치고, 꿈과 사랑을 이웃하고 나누는 어깨동무로 나아가야 비로소 삶이 깨어나면서 사진도 함께 깨어나지 않을까요.


  작가 대접을 받아야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잘 찍고 못 찍고를 떠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꾸준히 팔아야 작가로 지내지 않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이 값에 팔거나 저 값에 파는 틀을 넘어, 삶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책을 내거나 전시회를 열기에 작가로 서지 않습니다. 사랑하며 삶을 새로 짓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날이라고 느낄 줄 아는 가슴으로 날마다 새로운 날이 되도록 생각을 짓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똑같다고 느끼면 아무 사진을 못 찍습니다. 모레와 글피가 으레 똑같으리라 여기면 어떤 사진도 못 찍습니다. 날마다 다르면서 새롭게 빛나는 삶인 줄 온몸으로 마주하면서 온마음으로 사랑할 때에 비로소 사진 한 장 찍습니다. 이상엽 님은 앞으로도 씩씩하게 사진을 찍겠지요. 4347.7.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