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거닐다 - 교토, 오사카... 일상과 여행 사이의 기록
전소연 지음 / 북노마드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찾아 읽는 사진책 188



즐기는 사진과 즐거운 사진

― 가만히 거닐다

 전소연 글·사진

 북노마드 펴냄, 2009.1.10.



  전소연 님이 일본 어느 한 곳을 찬찬히 거닐듯이 돌아다닌 발자국을 담은 이야기책 《가만히 거닐다》(북노마드,2009)를 오랜만에 읽습니다. 이 책을 언제 장만해서 책꽂이에 꽂았는지 가물가물합니다. 한참 지난 일 같은데, 아마 몇 해쯤 묵었을는지 모릅니다.


  애써 장만한 책을 왜 몇 해 묵혔을까요. 책이름처럼 ‘가만히 거니’는 마음 그대로 가만히 읽을 생각이었을까요.


  전소연 님은 “어쩌면 여행지를 선택하는 일은 운명과도 같다. 시기적절하게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곳에 가야지’라는 생각이 스미게 되면 그곳에 가야 하는 운명이 되고 마는 것이다(21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책을 읽을 적에도 으레 이와 같이 된다고 느낍니다. 꼭 알맞다 싶은 때에 그 책이 나한테 옵니다. 어느 책 하나를 만날 때에는 그 책이 내 마음에 스며들 만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에는 그 사람이 내 사랑으로 다가올 만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어느 한 곳을 아침 낮 저녁 밤 새벽에 걸쳐 찬찬히 거니는 전소연 님은 “풍경을 흑백과 컬러로 담고 싶어서 두 개의 카메라를 선택하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 위한 취재 여행의 경우는 모든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갖고 있는 카메라 전부를 가져가기도 한다(35쪽).”고 말합니다. 그렇지요. 사진을 찍을 적에는 사진기를 쓰는데, 사진기마다 빛결과 빛느낌이 다릅니다. 모든 사진기가 똑같은 빛결과 빛느낌이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기계만 쓰면 됩니다. 그러나, 사진기 만드는 회사가 여럿이고, 같은 회사라도 기종마다 빛결과 빛느낌이 참말 달라요.


  화소수 때문에 결과 느낌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기계를 만든 사람들 마음에 따라 결과 느낌이 달라져요. 그리고, 기계를 장만해서 손에 쥐는 사람들 삶에 따라 결과 느낌이 달라집니다.





  똑같은 장비라 하더라도, 도시와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다른 결과 느낌을 보여줍니다. 어린이와 어른은 서로 다른 결과 느낌을 보여줍니다. 멧골과 바닷가에서 저마다 다른 결과 느낌을 보여줍니다. 40층 아파트와 5층 아파트는 서로 다른 결과 느낌을 보여줍니다. 자전거를 달릴 적하고 자가용을 달릴 적에 저마다 다른 결과 느낌을 보여줍니다.


  생각해 보면, 똑같은 연필을 놓고도 사람들은 다 달리 글을 씁니다. 연필 하나를 놓고 누군가는 글을 쓴다면 누군가는 그림을 그립니다. 사진을 찍을 적에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무언가 남기고 싶어 찍는 사람이 있고, 즐거워서 찍는 사람이 있으며, 사진을 이웃이나 동무한테 선물할 생각으로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여행을 할까요. 여행을 하는 동안 무엇이 즐겁거나 재미있을까요. 전소연 님은 “이곳 일본에 와서 새삼 느끼는 것이 있다면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리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는 것이었다(75쪽).” 하고 말합니다. 여행을 하러 일본에 가서 거닐 적이 아닌, 여느 삶을 일구면서 한국에 있을 적에는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 될까요. 한국에서도 살림살이는 적게 갖추어도 된다고 느낄까요. 그러면, 사진 여행을 한다고 할 적에는 사진기를 몇 대 갖추어야 할까요. 사진기마다 느낌이 다 다르기에 여러 가지 사진기를 고루 챙기면, 내 느낌을 더 잘 나타낼까요, 아니면 사진기 하나로도 내 느낌을 다 달리 나타내는 길을 열 수 있을까요.


  가만히 거닐 적에 사진을 찍습니다. 누군가는 신나게 달리면서 찍을 수도 있겠지요. 누군가는 한 자리에 꼼짝 않고 있으면서 사진을 찍을 테고요. 가만히 거닐 적에는 걸음걸이에 따라 차츰 새롭게 나타나는 흐름을 바라봅니다. 걸음걸이에 맞추어 이웃 살림살이를 바라보고, 걸음걸이에 따라 길과 집과 마을을 골고루 헤아립니다. 가만히 거닐 적에 ‘가만히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만나서, 이 모습을 찬찬히 사진으로 찍습니다. 바삐 달리는 사람은 바삐 달리는 사람들을 봅니다. 한 자리에 멈춘 사람은 나처럼 한 자리에 멈춘 다른 사람들을 봅니다. 가만히 거닐 적에는 ‘가만히 생각에 잠기고 가만히 사랑을 속삭이는 이웃’을 만납니다. 가만히 주고받는 이야기를 사진에 싣고, 가만히 키우는 꿈을 사진으로 옮깁니다.






  그런데, “교토에서는 버스가 정차한 뒤에 급할 게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걸어나오는 승객과 마지막 승객까지 기다려 주는 운전기사가 만드는 작용·반작용이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심지어는 내리면서 기계에 잔돈을 바꾸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편안하다 못해 답답하기까지 했다(145쪽).” 같은 대목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아니, 갸우뚱할 일은 없습니다. 한국에서 지낼 적에 그예 빨리빨리 움직이는 삶에 몸을 맞추었으니, 느긋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답답하기까지’ 했다고 느낄 만합니다. 그러니까, 일본을 거닐어도 일본 결과 느낌을 헤아리기보다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전소연 님 삶자락에 따라 바라본다고 할까요.


  어쩌면 너무 마땅할는지 모릅니다. 사진은 내가 찍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는 대로 찍는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나와 당신의 이야기는 시작된다(167쪽).”와 같은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사진을 한 장 찰칵 찍을 적에 너와 내가 이야기 첫머리를 연다고 말하는데, 내가 너를 ‘답답하기까지’ 했다고 느낀다면, 서로 어떤 이야기를 여는 셈일까요. 그저 내 삶대로만 너를 바라보면서, 네가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꾸밈없이 바라보려는 몸짓은 없는 노릇 아닐는지요.


  “할아버지와 나 사이에 짧은 대화가 오고 갔고, 그 잠깐 사이에 주문은 종료되었다. 할아버지는 외국인과 의사소통을 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시는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따끈한 우동 한 그릇을 말아 주셨다(219쪽).”와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읽습니다. 일본 할아버지가 왜 웃었는지 전소연 님은 모릅니다. 다만 ‘외국사람과 얘기를 나누어서 흐뭇하다’고 느꼈을는지 모른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소연 님이 찍는 사진은 언제나 전소연 님이 바라보는 대로 찍는 사진입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움직이고, 스스로 즐기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사진입니다.


  사진 한 장을 놓고, 좋음과 나쁨으로 가를 수 없습니다.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은 없습니다. 즐기는 사진이 있고 즐거운 사진이 있습니다. 즐기는 사진이란, 나 혼자 즐기는 사진입니다. 즐거운 사진이란 너와 내가 한집 사람이 되거나 한마을 이웃이 되어 나누는 사진입니다. 그래요, 《가만히 거닐다》라는 사진책은 스스로 삶을 즐기고 싶은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내 이야기’를 드러내는 이야기꾸러미입니다. 4347.9.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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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明心 이것은 사진이다
육명심 지음 / 글씨미디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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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83



사진이 아니면 뭘까

― 이것은 사진이다

 육명심 사진·글

 글씨미디어 펴냄, 2012



  가을볕은 곡식과 열매가 무르익도록 돕습니다. 가을볕은 가을에 내리쬐는 볕입니다. 봄에는 봄볕이 내리쬐겠지요. 그러면 겨울에는? 겨울볕이 내리쬡니다. 그런데, 한국말사전에는 ‘봄볕·가을볕’ 두 낱말만 나오고 ‘여름볕·겨울볕’은 안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름과 가을에 쬐는 볕을 어떻게 적어야 할까요?


  봄에는 봄비요 가을에는 가을비입니다. 여름에는 여름빛이고 겨울에는 겨울빛입니다. 한가위를 앞둔 가을에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가을하늘’은 그지없이 파랗습니다. 비가 오지 않고 여러 날 지나면 도시에서는 ‘파란하늘’이 아닌 매캐한 하늘이 될 테지만, 시골에서는 비가 오지 않고 여러 날 지나더라도 ‘파란하늘’이 눈부십니다. 참으로 가을에는 겨울이나 봄이나 여름보다 한결 새파랗습니다.


  그런데, 손바닥만큼 조금만 하늘을 볼 수 있다면 하늘빛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가을에는 하늘이 눈부시고 높다 하지만, 막상 하늘을 넓게 누리지 못한다면 이런 말은 ‘그저 말일 뿐’입니다. 마음으로 스며들지 못해요.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도시에서 삽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시골에서 살며 사진을 찍는 사람도 매우 적고, 시골에서 살며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사람도 매우 적어요. 전문직이든 예술가이든 작가이든 누구이든 모두 도시에서 산다고 할 만합니다. 이 가을에 가을내음을 그윽히 맡지 못합니다.



.. 어찌 된 일인지 내 말은 학생들에게 ‘쇠귀에 경 읽기’였다. 정말 막무가내로 내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패션계에 부는 바람에 휘말리듯 세계적으로 뜨는 외국의 사진풍을 따라가기게 급급했다 … 나는 기질적으로 군대생활이 맞질 않았다. 지금도 그 시절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걸핏하면 기합 받던 악몽이 되살아나서 몸서리가 난다 ..  (8, 14쪽)



  가을에 하늘을 제대로 올려다보지 못하는 사람한테 ‘가을하늘’이나 가을빛이나 하늘빛을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겨울에 새하얀 눈을 집어서 먹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도시내기한테 들려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새봄에 동백꽃잎을 부쳐서 먹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도시 이웃한테 알려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름에는 들딸기를 날마다 훑어 끼니로 삼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도시사람한테 속삭이기는 쉽지 않아요. 이러한 삶을 모르고, 이러한 삶을 헤아리지 않으며, 이러한 삶을 못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스스로 살아가는 곳에서 바라보고 느끼며 생각합니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사는 아이들은 슥 바라보아도 어떤 아파트인지 압니다. 두멧시골에서 태어나 사는 아이들은 개똥벌레와 다슬기를 곧바로 알아챕니다. 도시 아이들은 깜깜한 밤을 알지 못하고, 시골 아이들은 해가 지면 바로 깜깜해지는 줄 압니다.


  사는 대로 보고, 보는 대로 느끼며, 느끼는 대로 압니다. 아는 대로 배움길을 나서고, 배움길을 나서는 대로 다시 삶이 됩니다. 이 얼거리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육명심 님은 《이것은 사진이다》(글씨미디어,2012)라는 책에서 이야기합니다. 대학교에서 젊은이한테 사진을 가르치는데 ‘쇠귀에 경 읽기’처럼 이녁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왜 못 알아들을까요? 어쩔 수 없어요.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 본 적이 없으니 ‘바라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한’ 적이 없어요. 육명심 님은 군대가 이녁한테 얼마나 끔찍하고 몸소리까지 쳐지는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며 삶으로 이루어졌지만, 군대에 간 적이 없는 젊은이는 하나도 모릅니다. 본 적도 느낀 적도 생각한 적도 없으니까요. 군대에 갔어도 널널한 데에서 폭력이나 얼차려 하나 없이 지냈으면, 이때에도 ‘군대’ 이야기를 못 나눕니다.



.. 신혼여행 가서 삼각대를 받쳐놓고 둘이서 정답게 사진을 찍으면서 아내에게서 카메라의 조작법을 생전 처음 배웠다 … 아내는 사진뿐만 아니라 한걸음 나아가서 사진을 통한 정신적인 해방의 길로 나를 인도한 것이다 … 마음이 열리니 지혜의 눈도 아울러 떠지는 것 같았다 … 신기한 것은 쉽게 찍힌 사진은 그 결과도 좋다. 그리고 당연히 어렵게 찍힌 사진은 그 결과가 뻔하다 ..  (19, 73, 76쪽)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언제나 이녁 스스로 살아가는 자리에서 찍습니다. 이녁 삶이 그대로 사진이 됩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늘 이녁 삶자리에서 글과 그림을 빚습니다.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거의 다 도시에서 삽니다. 도시에서 살며 사귀는 이웃도 도시사람입니다. 도시에서 살며 도시사람만 만나고, 도시 언저리에서 맴돕니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을 가도 그 나라 도시에 머뭅니다. 다른 나라 시골은 자동차나 기차나 버스로 씽씽 가로지를 뿐입니다. 한국에서도 그래요. 한국에서도 시골은 고속도로로 씽씽 가로지르는 곳일 뿐이지요.


  좋거나 나쁘다고 가를 수 없습니다. 좋거나 나쁘다고 가를 까닭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읽으면 될 뿐입니다. 작가도 평론가도 모두 도시에서 삽니다. 전시관이나 갤러리도 모두 도시에 있습니다. 신문사와 방송사도 모두 도시에 있습니다. 대학교도 도시에만 있고, 사진관이나 스튜디오 일자리를 얻으려면 도시로 가야 합니다. 시골자락에 스튜디오나 갤러리를 여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어요. 그러니, 사진문화나 사진예술은 언제나 ‘도시’ 테두리에만 있습니다. 가끔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사진을 찍더라도, 시골을 시골대로 바라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면서 사진으로 담을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시골로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찾아온 다음 볼일을 마치면 곧장 고속도로를 다시 타고 도시로 돌아가듯이, 시골자락에서 사진 몇 장 찍더라도 ‘목적 달성’이 끝나면 시골내음을 맡거나 시골빛을 보거나 시골살이를 누릴 일이 없습니다.


  사진은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요? 스스로 사는 대로 찍습니다. 사진은 어떻게 읽는가요? 스스로 사는 대로 읽습니다. 육명심 님은 한국사 전공 교수한테 ‘국토순례’를 젊은이한테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진뿐 아니라 역사를 할 적에도 ‘스스로 사는 만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일행은 달리던 차에서 모두들 후다닥 카메라를 들고 뛰어내렸다. 나는 차 안에서 일행이 돌아올 때까지 그냥 앉아 있었다. 물론 남들이 다 달려들어 사진을 찍으면 안 찍는 평소의 버릇도 있지만, 그 당시 찍고 있는 한 주제와 다른 대상이라 외면했던 것이다 … 어느 날 한국사를 전공하는 대학 교수를 만나 한가하게 시간을 함께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 교수에게 국사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전공필수과목으로 반드시 ‘국토순례’를 넣어야 한다고 주문을 했었다. 일절 차를 타지 말고 직접 발로 걸어서 이 나라 구석구석까지 모조리 돌아보는 실습과목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을 했다 ..  (183, 227쪽)



  사진은 ‘보는 대로 찍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는 대로’란 ‘눈에 들어오는 모습대로’가 아닙니다. 저마다 ‘사는 대로’ ‘눈에 어떤 모습이 들어옵’니다.


  시골에서 살며 멧새나 풀벌레 소리가 익숙한 사람은 가느다란 소리만 듣고도 어떤 새나 벌레가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 이러한 소리와 숨결도 함께 담습니다. 도시에 살며 멧새나 풀벌레 소리가 낯선 사람은 아무리 큰 소리를 들어도 어떤 새나 벌레가 어디에 있는가를 모릅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 이러한 소리나 숨결을 조금도 못 담습니다.


  똑같은 자리에 두 사람이 섰어도 ‘사뭇 다른 사진’이 나오는 까닭이 있지요. 삶이 다르니까요. 삶이 달라 바라보는 눈이 다르니까요. 육명심 님은 “대화를 진행할수록 사진가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차가운 편견만을 확인하기도 한다. 이럴 때, 상대와의 대화에서 기선을 잡아 심리적인 주도권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다. 정신적으로 상대를 제압하지 않고는 참다운 인물사진을 얻을 수 없다(81쪽).” 하고 말씀합니다. 육명심 님은 ‘주도권 잡기’로 사진을 찍으셨지만, 다른 사람들은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사이에 삶이 다르니, 찍히는 쪽에서 찍는 쪽을 얕잡을 수 있어요. 때로는 우러를 수 있어요. 얕잡는 사람은 나쁠까요? 우러르는 사람은 좋을까요? 이도 저도 아닙니다.



.. 특히 ‘신지형학 사진’의 무대를 돌아보면서 그들은 그들의 사진을 찍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존 팔의 폭포 사진에서도 그것은 지금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의 발견임을 직감했다. 그들은 그렇게 사진을 찍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들대로 우리 눈을 통한 사진을 찍을 일이다. 몇 년 전 외국의 좋은 사진을 많이 소개하는 한 신문사가 기획한, ‘매그넘’ 사진가들이 직접 한국을 찍은 사진전을 보고 우리나라는 역시 우리가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불교 사진을 보고 그런 생각을 더욱 굳혔다. 그러나 정작 우리 사진가에게 불교 사진을 당장 찍으라 하면 과연 그만큼이라도 찍을 수 있을가. 우리가 우리 문화를 가슴으로 사랑하고 깊은 이해를 갖추지 않으면 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  (270∼271쪽)



  사진을 찍을 적에는 한 가지로만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육명심 님은 육명심 삶결대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주도권 잡기’를 해서 ‘모든 사람(찍히는 사람)’을 육명심 님 숨결이 드러나도록 찍었습니다. 찍히는 사람 숨결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보다는 찍는 사람 숨결이 확 풍기도록 찍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주도권 잡기’를 할 만합니다. 누군가는 굳이 ‘주도권 잡기’를 안 합니다. 나(찍는 사람)를 얕잡아보거나 깔본다면 얕잡아보거나 깔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부아를 잔뜩 내는 처칠을 찍은 사진처럼, ‘찍히는 사람 삶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그리고, 이처럼 ‘찍히는 사람 삶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진을 찍으면 겉보기로는 ‘찍히는 사람 숨결’만 드센 듯 여기기 쉽지만, 오래도록 이 사진을 들여다보면 ‘찍는 사람 숨결’이 시나브로 피어납니다.


  사람을 찍든 숲을 찍든 정물을 찍든 늘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내 삶결대로 찍는 사진인 만큼, 내 삶결부터 제대로 읽은 뒤에 즐겁게 찍을 노릇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사진을 찍으면서 ‘무지개’가 됩니다. 한국에서 사진문화가 무지개빛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저마다 다른 사진이기에, 사진이 아닌 사진이 없습니다. 사진이, 사진이 아니면 뭘까요. 이것은 이 사진이고 저것은 저 사진입니다. 4347.9.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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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4.9 - Vol.10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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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184



사진을 즐길 수 있는 마음

― 사진잡지 《포토닷》 10호

 포토닷 펴냄, 2014.9.1.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웃습니다. 즐길 수 없는 사람이 웃지 못합니다.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사랑을 속삭입니다. 즐길 수 없는 사람이 사랑을 속삭이지 못합니다. 너무 마땅할 뿐 아니라, 웬만하면 누구라도 이 대목을 잘 느끼거나 알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줄 알면서도 못 즐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줄 아는데에도 즐기기보다는 ‘안 즐기는 길’을 걷는 사람이 많습니다.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웃는다면, 사진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웃으면서 찍어요. 어떤 대회에 나가 1등이나 2등을 거머쥐어야 ‘즐기는 사진’이 아닙니다. 대회에서 3등이나 4등쯤 받아야 ‘잘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대회에서 ‘입선’쯤은 해야지 ‘좋은 사진’이 아닙니다.


  스스로 삶을 즐기면서 찍는 사진일 때에 비로소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사진입니다.


  그런데,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사진은 ‘잘 찍은’ 사진이나 ‘좋은’ 사진이지는 않아요. 즐거운 사진은 즐겁습니다. 아름다운 사진은 아름답습니다. 사랑스러운 사진은 사랑스럽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까요? 대회에서 1등을 받은 사진은 ‘대회 1등 받은 사진’일 뿐입니다. 어떤 스승한테서 배운 사진은 ‘어떤 스승한테서 배운 사진’입니다. 다른 사람을 흉내내어 찍은 사진은 ‘흉내낸 사진’입니다.





  사진잡지 《포토닷》 10호(2014.9.1.)를 읽습니다. 한금선 님은 얼마 앞서 《바람에 눕다 경계에 서다》(봄날의책,2014)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새롭게 선보이는 사진책과 함께 이녁 이야기를 《포토닷》 10호에서 읽습니다. “연구소와 방송제작팀이 받은 촬영허가는 실내에서의 인터뷰 촬영으로 제한되었다. 카메라 셔터소리가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에 방송 인터뷰 도중에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고, 인터뷰가 끝나고 사진가의 순서가 되면 감정과 표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게다가 사진으로 찍을 수 없는, 강제이주 당시의 허허벌판은 상상만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 사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대화를 나누며, 이는 다시 리듬을 타듯 사진작업으로 옮겨갔다(한금선/37쪽).”와 같이 흐르는 이야기처럼, 다른 매체에서 촬영기를 돌리는 동안 옆에서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찰칵’ 소리가 난다면서 못 찍게 할 테지요. 그러면 사진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진은 어떻게 찍어야 할까요.


  촬영기가 찍는 모습은 사진기로 굳이 찍을 만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촬영기가 찍는데 굳이 사진기가 더 찍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촬영기가 어디에 머리를 들이밀면서 몇 시간째 있다면, 사진기를 든 사람은 다른 곳을 돌아다니면 돼요. 촬영기를 들이밀던 사람이 다른 데로 가면, 사진기를 든 사람은 그곳으로 넌지시 찾아가서 조용조용 이야기를 찍으면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즐기는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아픈 이웃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참말 ‘즐깁’니다. 이야기를 즐깁니다. ‘즐기는 삶’은 하하호호 깔깔낄낄 하는 웃음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웃음과 함께 눈물을 즐깁니다. 기쁠 때에도 어깨동무를 하고 슬플 때에도 어깨동무를 해요. 서로서로 이웃과 동무로 여겨 반가이 만나는 삶이 ‘즐기는 삶’입니다.


  “지영철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의 북위 38도 지역을 찾아가 사진을 촬영했다. 38도 지역은 역사적인 이데올로기일 뿐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나 사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north latitude 38°’의 본질이다(김소윤/45쪽).”와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읽습니다. 한국과 미국이 사는 모습은 그리 다르지 않아요. 한국과 중국이 사는 모습도, 남녘과 북녘이 사는 모습도, 부자와 가난뱅이가 사는 모습도, 참말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무엇이 같을까요?


  옷차림은 다르겠지요. 자동차도 다르겠지요. 그러나, 부자와 가난뱅이 모두 숨을 쉬어야 삽니다. 부자도 가난뱅이도 물을 마셔야 삽니다. 부자이건 가난뱅이이건 햇볕을 먹어야 삽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숲이 있어야 합니다. 사막이 넓은 나라라 하더라도, 지구별 곳곳에 숲이 푸르게 있기 때문에 삶을 꾸릴 수 있어요.


  “여행은 새로운 가능성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새로운 생각과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철저히 관찰자 입장에서 현지인들을 대할 수 있고, 이를 기반으로 한 작업은 서로 다른 문화를 중계하는 역할을 한다(나탈리 코거/70쪽).”와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읽습니다. 참말 그래요. 여행을 다니면서 새롭게 느낍니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 새롭게 바라봅니다. 여행을 다니기에 내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다니지 않아도 우리는 늘 새 마음이 되어요. 아침마다 새 마음이 됩니다. 아침저녁으로 마음을 새롭게 추스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을 새로 가다듬지 않으면 ‘헌 사람’이 되어요. 생각해 보셔요. 헌 생각으로 헌 사람이 된다면, 헌 삶을 날마다 똑같이 되풀이한다면, 이런 삶은 재미있을까요? 여행을 다닐 때에만 새 마음이 된다면 우리 삶은 지겹고 힘들어요. 여행을 다닐 때에는 ‘여행 마음’이 되어 즐겁게 노래하고, 집에 있을 적에는 ‘살림 마음’이 되어 즐겁게 사랑할 때에 삶이 빛납니다.


  “현대사진이 너무 서구 중심 사고의 미학들로 흘러가는 현실에서 우리가 근원적으로 가졌던 우리 안의 이야기를 우리의 목소리로 보여주고 싶었다. 여태까지 많은 작가들이 서구미학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생산해 내지 않았나 싶다(이일우/80쪽).”와 같은 이야기마따나, 한국에서 사진을 하는 적잖은 분들이 ‘한국 사진’이 아닌 ‘서양 사진’을 합니다. 때로는 이도 저도 아닌 사진을 합니다. 아무래도, 몸은 한국에 있으나 마음은 한국에 없기 때문입니다. 몸은 한국에 있어도 ‘한국이라는 뿌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몸은 한국에 있더라도 ‘한국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자꾸 다른 사람 눈치를 보아야 할까요. 우리는 왜 우리 모습 그대로 즐겁게 사진길을 걷지 못할까요.


  내가 찍은 사진은 남이 봅니다. 남이 찍은 사진을 내가 즐겁게 봅니다. 그러나, 사진은 보여주려고 찍지 않아요. 스스로 삶을 즐길 때에 사진을 찍어요. 내 사진을 남이 보든, 남 사진을 내가 보든 늘 똑같습니다.


  “처음 제주도에 내려와서는 집에서 길 하나만 건너도 울창한 숲이 많았다 … 지금 제주는 개발 광풍이 불고 있다. 이제야 제주의 자연을 조금 알 것 같은데, 개발에 의해 사라지는 게 너무 아쉽다 … 내가 찍은 나무들이 모양도 이상하고, 시들하다 보니, 다 베어 버리고 그 위에 콘리트를 발라버렸더라. 사람들에게 땅을 팔기 위해서 정비를 해 놓은 것이다(김옥선/94쪽).”와 같은 이야기는 제주섬에서만 엿볼 수 있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아주 흔하게 봅니다. 부산에서는 서울 다음으로 흔하게 봅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나무를 아끼지 않아요. 나무가 없으면 종이를 못 얻고, 종이를 못 얻으면 책을 못 찍는데, 나무를 아끼는 사람이 참말 없습니다.


  그런데, 나무가 없으면 책만 못 찍지 않아요. 모든 종이를 못 쓰지요. 게다가 나무가 없으면 푸른 바람을 못 마셔요. 나무가 없으면 사람들은 모조리 숨이 막혀 죽어야 합니다. 나무가 살찌우는 사람이고, 나무가 살리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진을 찍을 때에 스스로 즐거울까요. 어떤 삶을 가꿀 때에 스스로 기쁠까요. “사진을 하면서 줄곧 소리가 들리는 사진, 이미지가 연상되는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안웅철/111쪽).”와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합니다. 우리는 소리가 들리는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웃음이 묻어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이 피어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하고, 우리는 이야기가 터져나오는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지 쉰 해가 넘었기에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리뷰를 받고 문제점을 고쳐 나간 사진가의 실력은 빠르게 성장한다(김주원/134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늘 이웃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이녁 사진을 추스르는 사람이 사진을 ‘잘 찍’겠지요. 언제나 사진을 새롭게 찍으려는 사람이 사진을 잘 찍어요.


  다만, ‘새롭게 찍기’란 ‘표현방식을 다르게 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새롭게 찍기’란 아침마다 똑같이 동이 트는 하루를 맞이할 적에 늘 새로운 마음이 되는 일입니다. 한집에서 늘 얼굴을 맞대는 살붙이하고 날마다 새로운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새롭게 찍기’입니다.


  “같은 곳에 서서 같은 것을 바라볼 적에, 사진길 쉰 해를 걸어온 사람이 사진길 다섯 달을 걸은 사람보다 깊거나 넓게 알아채거나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햇수, 나이)이 아니라, 우리 앞에 있는 것한테 얼마나 마음을 기울이거나 사랑을 쏟을 수 있느냐에 따라 ‘우리가 찍는 사진에 담을 빛이 달라’집니다 … 주명덕 님 말마따나 ‘찍는 사람의 마음이 아름답고 따뜻하’다면, 사진에 감도는 빛은 아름다우면서 따뜻한 숨결이 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름답지 않거나 따뜻하지 않은 마음이라면? 이때에는 아름답지 않고 따뜻하지 않은 숨결이 사진에 고스란히 드러날 테지요(최종규/143, 145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대목은 늘 하나라고 느껴요. 내 삶을 보느냐 못 보느냐, 이 대목을 읽어야지 싶어요.


  스스로 내 마음을 어떻게 건사하느냐를 읽어야지 싶습니다. 스스로 내 삶을 어떻게 다스리려 하느냐를 알아야지 싶습니다. 삶을 아름답게 가꿀 때에 사진도 아름답게 찍어요. 언제나 사랑을 노래하는 마음일 적에 사랑스러운 사진을 찍고 노래가 흐르는 사진을 찍어요.


  손재주로 찍는 사진은 없습니다. 마음으로 찍는 사진만 있습니다. 4347.9.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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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덕 초기 사진들
주명덕 지음 / 시각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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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잡지 <포토닷> 2014년 9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오늘 <포토닷> 9월호가 집에 왔기에 이 글을 올립니다.





..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82



한길 걷는 마음으로 사진을

― 주명덕 초기 사진들

 주명덕 사진

 시각 펴냄, 2000.7.15.



  1940년에 태어난 주명덕 님은 1960년대부터 사진을 선보였다고 합니다. 어느덧 쉰 해를 아우르는 사진길을 걷습니다. 요즈음도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려고 꾸준히 사진을 찍는다고 하지요. 어느 모로 보면 놀라운 모습이지만, 어느 모로 보면 아주 마땅한 모습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쉰 해가 지나건 일흔 해가 지나건 똑같이 글을 씁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할매와 할배는 일흔 해뿐 아니라 아흔 해 동안 흙을 만지며 살아가곤 합니다.


  한길이란 무엇일까요. 한길을 걷는 넋이란 무엇일까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아이가 이녁 품에 찾아오는 날부터 언제까지나 아이를 바라봅니다. 아이가 마흔 살이 되건 여든 살이 되건, 아이는 늘 아이입니다. 아이가 일흔 살이 되건 아흔 살이 되건 이녁 어버이는 늘 어버이입니다.


  나무는 즈믄 해를 가볍게 삽니다. 나무는 즈믄 해뿐 아니라 오천 해나 만 해를 살 수 있습니다. 나무는 씨앗을 떨구어 어린나무가 자라도록 북돋웁니다. 그러면, 쉰 해쯤 살던 나무가 씨앗을 떨군 뒤 이 나무가 오천 살이 되고, 옆에 있는 나무는 사천구백쉰 살이 되면, 두 나무는 서로 어떤 사이가 될까요.



.. 이 시절(1963∼1975)은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에 사진으로 이바지해야 한다는 꿈에 사로잡혀 있던 시기이다. 사진으로는 미숙하던 시절이었지만, 사진에 대한 열정과 신념은 대단했던 듯하다. 언제 어디에서든지 한번 사진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칠 줄 모를 만큼 할 말이 많았다 … 바로 위의 누이가 다니던 학교에,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서클이 하나 있었는데 홀트씨 고아원에 봉사하러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우리 누이를 만나러 그곳에 갔다가 그곳 고아들을 보고 가슴이 뛰어서 사진을 찍게 되었습니다 ..  




  사진 한길 쉰 해를 살았기에 더 훌륭하지 않습니다. 사진 한길 다섯 달을 보냈기에 덜 훌륭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진을 읽을 적에 ‘사진 찍은 사람이 몇 해쯤 사진을 찍었는지’ 헤아리지 않습니다. 헤아릴 만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진을 읽을 적에 ‘사진 찍은 사람이 필름을 몇 통쯤 썼거나 디지털파일을 얼마나 만들었는지’ 살피지 않습니다. ‘이런 사진을 낳은 장비가 궁금하다’고 여길 사람도 있지만, 사진을 읽으면서 ‘사진 찍은 사람이 쓴 장비’를 생각할 일은 없습니다. 오직 사진을 바라볼 뿐입니다.


  사진을 찍을 적에도 사진만 바라봅니다. 사진이 될 빛만 바라봅니다. 같은 곳에 서서 같은 것을 바라볼 적에, 사진길 쉰 해를 걸어온 사람이 사진길 다섯 달을 걸은 사람보다 깊거나 넓게 알아채거나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햇수, 나이)이 아니라, 우리 앞에 있는 것한테 얼마나 마음을 기울이거나 사랑을 쏟을 수 있느냐에 따라 ‘우리가 찍는 사진에 담을 빛이 달라’집니다.


  주명덕 님이 지난 2000년에 선보인 《주명덕 초기 사진들》(시각 펴냄)을 읽습니다. 나는 이 사진책을 지난 2000년에 곧바로 장만했습니다만, 이 사진책은 오래지 않아 판이 끊어집니다. 나온 지 열 해 안팎인 사진책인데 이 사진책을 구경하는 일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이 책이 있다지만, 다른 도서관에서는 이 책을 건사했을까 궁금합니다. 사진길 걷는 사진가 가운데 이 책을 사들여서 갖춘 이는 얼마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 내 사진을 통해서 사회의 문제점을 찾아가고 또 문제를 제기하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시가 유신 시절이었는지라, 사회가 그리고 매체가 도대체 다큐멘터리 사진을 받아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발표할 수 없는 사진은 찍으나마나 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그러면서 다큐멘터리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 초기 매그넘 회원들의 사진이 내겐 교과서였습니다. 유진 스미스와 윌리엄 클라인도 그렇고요. 한편 라이프지나 룩크지에 실린 에세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영향을 주었지요 ..






  주명덕 님은 《주명덕 초기 사진들》에 붙인 이야기를 빌어 ‘사회에 문제를 밝히는 길’을 사진이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될까요. 지난날 우리 사회나 정치나 언론은 주명덕 같은 분들이 찍은 사진을 선보일 자리를 왜 선뜻 내어주지 않았을까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지난 1960년대나 1980년대보다 어느 만큼 나아졌다고 할 만할까요. 지난날 주명덕 님은 “다큐멘터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데, 오늘날 사진길을 걷는 사람은 어떤 이야기와 모습과 삶이든 마음껏 사진에 담아서 스스럼없이 선보일 수 있을까요.


  주명덕 님이 1963년부터 1975년 사이에 찍은 사진을 그러모은 《주명덕 초기 사진들》에 깃든 이야기와 모습과 삶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무렵 우리들 이야기요 모습이며 삶일 뿐입니다. 더 낫지도 덜 떨어지지도 않은 이야기이자 모습이자 삶입니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우리 이야기입니다. 도드라지지도 감추어지지도 않을 모습입니다.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살포시 어깨동무할 삶입니다.



.. 그 시절에 가장 크게 나한테 영향을 미친 것은, 함께 일하던 〈월간 중앙〉 편집진들이었습니다. 칭찬과 격려의 말보다는 왜 이상한 사진만 찍느냐고 하는 질책이었죠 … 어떤 선배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따뜻한 감정이 묻어나는 사진을 찍을 수 있느냐고 내게 물어 왔습니다. 그때 나는 찍는 사람의 마음이 아름답고 따뜻하면 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






  사진감으로 무엇을 고르든 우리는 삶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이쪽에 있는 삶을 찍거나 저쪽에 있는 삶을 찍을 뿐입니다. 다큐나 건축이나 패션이나 아트나 메이킹이나 스냅이나 보도나 인물이나 풍경이나 정물이나, 온갖 갈래로 나누어 저마다 다른 사진을 찍으나, 어느 갈래에 서더라도 삶을 찍기 마련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스스로 바라보는 삶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스스로 나아가려는 삶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스스로 꿈꾸거나 사랑하는 삶을 찍습니다.


  주명덕 님 말마따나 “찍는 사람의 마음이 아름답고 따뜻하”다면, 사진에 감도는 빛은 아름다우면서 따뜻한 숨결이 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름답지 않거나 따뜻하지 않은 마음이라면? 이때에는 아름답지 않고 따뜻하지 않은 숨결이 사진에 고스란히 드러날 테지요.



.. 내 주위의 젊은 사람들이 사진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면 70년대에 어떤 사람이 찍었던 것을 왜 또 다시 답습하느냐고 하면서 너희는 미래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말해 주곤 합니다 … 나는 본능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어떻게 채우느냐의 여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저 보는 것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보는 것은 항상 자기가 스스로 준비를 해서 키우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바라보는 눈빛대로 사진이 태어납니다. 마주하는 몸짓대로 사진이 자랍니다. 이웃을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가 찍는 사진 한 장이 달라집니다. 그냥저냥 스쳐 지나갈 뿐 아니라 쳐다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 옆에 있는 수많은 사람을 사진으로 찍을 일이 없습니다. 이와 달리, 스쳐 지나갈 수 없는 이웃으로 내 옆에 있는 수많은 사람을 바라본다면, 늘 사진기를 손에 쥐어 쉴 겨를 없이 사진을 찍습니다. 누군가는 금강송에 꽂혀 금강송을 사진으로 찍을 테지만, 누군가는 금강송을 타고 올라 솔방울을 갉아먹는 다람쥐에 꽂혀 다람쥐를 사진으로 찍을 테지요. 누군가는 금강송보다는 먼 멧자락을 감돌면서 올라오는 구름빛에 꽂혀 구름과 하늘을 사진으로 찍을 테고, 누군가는 발치에서 돋는 조그마한 들풀이나 들꽃에 꽂혀 살그마니 몸을 굽히고 쪼그려앉아서 사진을 찍습니다.


  강운구 님은 ‘개불알꽃’이 아닌 ‘봄까지꽃’이라는 봄풀 이름을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개불알꽃’은 일본 학자가 붙인 이름인데, 일제강점기와 해방 언저리에 한국 학자가 이 이름을 섣불리 ‘학술 이름’으로 받아들여서 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봄풀을 어떻게 바라보거나 마주하려느냐에 따라 이름 한 가지를 새롭게 느끼거나 달리 맞아들일 뿐 아니라, 사진기를 손에 쥘 적에도 눈빛이 거듭날 수 있습니다. ‘개불알꽃’을 찍는 마음과 ‘봄까지꽃’을 찍는 마음은 같을 수 없습니다. 봄까지꽃을 알아보는 사람은 이 봄풀과 함께 자라는 ‘코딱지나물꽃’과 ‘별꽃’을 알아봅니다. 별꽃 둘레에서 잇따라 돋는 꽃마리꽃과 꽃다지꽃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차리고, 냉이꽃과 씀바귀꽃에 봄내음이 얼마나 물씬 서리는가를 느껴서 사진으로 담아요.



.. 우리 나라 사진 하는 사람들은 고생하는 시기를 갖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한 사람의 피아니스트가 있기 전에는 피나는 고된 훈련의 과정이 있었을 텐데, 그것에 대해서는 다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나는 내 사진을 가다듬는 길은 다른 사람을 찍어 주는 데에서부터라고 생각합니다 ..




  주명덕 님이 앞으로 예순 해나 일흔 해에 걸쳐 사진길을 걸어가면서 새롭게 빚어낼 빛을 기다립니다. 주명덕 님이 한창 젊을 적에는 ‘정치와 사회라는 울타리에 가로막혀 못 하던’ 사진을 오늘날에 새삼스럽게 해 볼 수 있을 테며, 아직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씩씩하게 걸을 수 있을 테고, 남들이 많이 걷는 길이라 하더라도 남다른 눈빛을 밝히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초기 사진들’은 사진가 한 사람이 싱그러운 눈빛으로 자랄 적에 찍은 이야기입니다. ‘초기 사진들’을 선보이는 사람은 지난날에도 오늘날에도 한결같이 싱그러운 눈빛으로 늘 새로 자라는 모습을 담은 노래입니다. 우리는 다섯 달쯤 한길 걸은 풋내기일 적에도 자라지만, 쉰 해쯤 한길 걷는 이슬떨이일 적에도 자랍니다. 지나온 삶을 묵은 사진에서 읽으면서, 앞으로 나아갈 삶을 톺아봅니다. 4347.8.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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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페 일기 2 - 행복이란, 분명 이런 것 다카페 일기 2
모리 유지 지음, 권남희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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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186



아이들을 왜 사진으로 찍는가

― 다카페 일기 2

 모리 유지 글·그림

 권남희 옮김

 북스코프 펴냄, 2009.12.15.



  아이들을 사진으로 왜 찍을까요? 귀엽거나 사랑스러우니까 찍을까요? 우리 아이들이니까 찍을까요? 반가운 이웃집 아이들이니까 찍을까요? 사진으로 찍기에 가장 수월하거나 즐겁기 때문에 찍을까요?


  나는 아이들을 낳아서 함께 살아가기 앞서,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지 않았습니다. 내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라기보다, 내 사진감이 아니기도 했고, 아이들이 어떤 숨결인지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 어린이로 자란 숨결이지만, 어른이라는 몸뚱이로 지내면서 ‘아이로 누리는 삶’을 떠올리거나 되새기지 못했습니다.


  우리 집 두 아이와 시골에서 살면서 사진을 바지런히 찍습니다. 우리 아이들이기 때문에 찍는다고도 할 테지만, 이보다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이 아이들 눈빛과 몸짓에서 ‘내가 누린 어린 나날’을 읽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노는 모습은 바로 내가 어릴 적에 놀던 모습입니다. 이 아이들이 짓는 웃음은 바로 내가 어릴 적에 짓던 웃음입니다. 무엇보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날마다 누리는 고운 이야기를 사진으로 찬찬히 담아서 물려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진을 선물한다고 할까요.


  그런데 나는 사진만 찍지 않습니다. 아이들과 지내는 이야기를 꾸준히 글로 씁니다. 아이들과 틈틈이 그림놀이를 합니다. 함께 그림을 그려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은 모두 그러모읍니다. 아이가 깍두기공책에 쓴 글놀이 자국도 고스란히 모읍니다. 이러면서 저절로 ‘동시’를 써요. 왜 동시를 쓰느냐 하면, 누구보다 우리 아이들한테 읽히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저희 삶을 깨닫고 가꾸는 길에 길동무가 될 만한 이야기는 바로 어버이인 내가 스스로 지어서 나눌 때에 가장 즐겁다고 느껴서 동시를 써요.





  사진책 《다카페 일기》(북스코프,2009) 둘째 권을 읽었습니다. 여러 해 앞서 읽었습니다. 《다카페 일기》는 2012년에 셋째 권이 한국말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집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오순도순 사이좋게 어우러지는 웃음빛이나 웃음노래를 담은 사진책입니다.


  모리 유지 님은 《다카페 일기》 둘째 권을 열며 “주로 집 안이나 집 근처에서만 찍었습니다. 하루하루 물 흐르듯이, 내일도 모레도 부디 잔잔히 흐르길 기도하면서(머리말).” 하고 말합니다. 잔잔히 물처럼 흐르는 삶이 되기를 바라면서 사진을 찍었다는군요. 그래요, 물을 생각하고 꿈꾸기에 모리 유지 님 사진은 언제나 물과 같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을 닮는 사진이 아니라, 오롯이 물빛이 되는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모리 유지 님은 왜 이녁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을까요?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얼마나 즐거울까요? 사진이 늘 함께 있으니 어버이도 아이도 기쁘게 웃고 노래하면서 하루하루 누릴 만할까요?


  모리 유지 님네 아이들은 유치원을 거쳐 학교에 들어갑니다. 예방주사를 맞고 패밀리레스토랑에 갑니다. 놀이공원에도 가고 동물원에도 가며, 그야말로 ‘도시에서 흔히 보는 여느 집’과 같이 아이들을 돌봅니다. 아마 이 아이들은 차근차근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갈 테며, 대학입시를 치르겠지요. 그러고는 대학교에 들어가서 몇 해 지내다가 회사에 들어가려 할 테고, 짝꿍을 찾아 시집이나 장가를 가면서 제금을 날 테지요. 머잖아 손자 손녀를 맞이할 테고요.






  그야말로 물과 같이 흐르는 삶입니다. 다만, 냇물이나 골짝물이나 바닷물처럼 흐르는 삶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냇물이나 골짝물이나 바닷물이란 ‘숲’이에요. 사람이 억지로 따로 만든 ‘도시’가 아닙니다. 태어나고 주사 맞히고 학교 보내고 시집장가 보내고 회사원 되도록 하고 아이 낳도록 해서 늙다가 죽는 삶이란, 숲다운(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닙니다. 도시에 맞는 흐름이요, 댐에 가둔 수돗물과 같은 흐름입니다.


  그러면, 숲다운(자연스러운) 흐름이란 무엇일까요? 숲다운 흐름으로 물처럼 빛난다면, 아이들이 밥을 짓고 옷을 지으며 집을 짓는 길을 익힐 테지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밥·옷·집이라는 살림을 물려줄 테지요. 몸을 다스리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칠 테고, 마음을 가꾸면서 삶을 날마다 새로 짓는 길을 보여줄 테지요.


  사진책 《다카페 일기》는 ‘도시에서 누리는 수돗물 흐름’으로 보자면 무척 보드랍니다. 수돗물도 꽤 맑습니다. 수돗물은 지저분하지 않아요. 다만, 수돗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아요. 수돗물을 쓰려면 시골마을과 숲을 엄청나게 물에 가두는 댐을 크게 지어야 합니다. 수돗물을 쓰려고 땅밑에 물관을 엄청나게 파묻습니다.





  스스로 곱게 흐르는 냇물과 골짝물이 있는데, 왜 우리는 따로 댐을 짓고 물관을 파묻어야 할까요. 스스로 해맑게 흐르는 물줄기가 있는데, 왜 우리는 해맑게 흐르는 물줄기를 아름답게 건사하지 않으면서 자꾸 공장과 찻길과 자동차와 물질문명으로만 치달을까요. 지구별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은 이런 물질문명과 도시 물결에 그대로 휩쓸리기만 해야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지구별 아이들은 모두 똑같은 흐름을 타면서, ‘유아원·유치원·학교·학원·대학교·짝짓기·회사원 되기·아이 낳기·집 장만·자가용 몰기·늙기·여행·여가생활·죽음’과 같은, 그러니까 언제 어디에서나 늘 모두 똑같은 틀에 맞추어서 삶을 보내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다카페 일기》 둘째 권은 “이른 저녁 시간에 목욕을 하고 베란다에서 시원하게 보내는 것, 편의점에서 얼음을 사는 것, 제일 좋아하는 마쓰야의 생과자를 먹는 것, 새 커피콩이 뜨거운 물을 머금고 놀랄 만큼 부푸는 것, 앰프의 진공관을 바꾸고 히죽거리는 것, 바다의 숙제 답을 몰래 가르쳐 줘 일찍 끝내게 하는 것, 하늘이를 간지럼 태워서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것 …… 아내와 둘이 드라마의 다음 편을 기다리는 것, 그런 작은 선물을 많이 준비하면서 앞으로도 담담하게 하루하루를 즐기며 살아가야지 생각합니다(맺음말).” 하고 흐르는 말로 끝맺습니다. 사진책 《다카페 일기》에 흐르는 사진과 이야기는 아주 수수합니다. 수수하면서 예쁘장합니다. 예쁘장하면서 아기자기합니다. 아기자기하면서 애틋합니다. 애틋하면서 살뜰합니다.


  그러나, 이뿐입니다. 따사로우면서 보드라운 빛이 흐르지만, 이렇게 흐르면서 끝납니다. 아니, 이렇게 끝맺어도 넉넉하다고 할 수 있어요. 더 바라야 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한 가지를 물을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이 아이들은 어떤 삶을 스스로 찾아서 누릴 때에 아름답거나 즐겁거나 사랑스러울까요. 이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느끼고 찾고 살피고 누리면서 마음을 살찌울까요. 알록달록 눈부신 하늘빛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이들은 귀여운 모습으로만 찍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마냥 지켜보기만 하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 얼거리를 아이들한테 그냥 물려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셔요. 이 정치 얼거리와 경제 얼거리와 교육 얼거리를 아이들한테 그냥 물려주겠습니까? 이 입시지옥과 취업지옥을, 이 끔찍한 공해덩어리 도시 물질문명과 핵발전소와 전쟁무기를 아이들한테 그냥 물려주겠습니까? 폭력이 춤추는 군대를 아이들한테 그냥 물려주겠습니까?


  아이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하면서 찍는 사진은 아이들이 ‘입시지옥 중학교’에 들어가기 앞서까지 찍을 수 있겠지요. 그러면, 중학생이 된 아이들은 이제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바라보면 될까요?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될까요?


  사진을 찍는 여느 어버이 한 사람이 지구별이나 사회를 몽땅 갈아엎는 길을 보여줘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손을 놓고 아무것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이 이 지구별에서 ‘어른들이 만든 슬프고 바보스러운 것’을 그대로 물려받도록 할 마음을 품는 어버이란 없을 테니까요. 수수하며 부드러운 삶을 누릴 수 있는 밑바탕은, 이 지구별을 넓게 품으면서 깊이 사랑하는 여느 어버이들 작은 손에 있습니다. 4347.8.2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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