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송, 고송, 초송, 신송을 찾아서
장국현 지음 / 시사출판사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찾아 읽는 사진책 191



어떤 사진을 믿겠는가

― 神氣

 장국현 사진·글

 호영 펴냄, 2008.4.30.



  ‘금강송’을 사진으로 찍으려 하면서, 가장 큰 금강송 둘레에서 자라던 220년 묵은 작은 금강송을 벤 장국현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동안 이런 짓을 몇 차례 했는지 제대로 밝혀지거나 알려지지 않았으나, 법원에서는 세 차례 했다고 말하면서 장국현이라는 사람한테 벌금을 500만 원 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장국현이라는 사람이 벤 금강송 네 그루는 모두 6000만 원 값을 한다지요. 게다가 장국현이라는 사람이 금강송을 사진으로 찍은 뒤 수백만 원이나 수천만 원, 때로는 일억 원이 넘는 돈을 받고 팔았다지요.


  장국현이라는 사람이 선보인 《神氣》(호영,2008)라는 사진책을 장만해서 찬찬히 살핍니다. 이녁은 이 나라 여러 멧자락을 사진으로 담거나 아름다운 나무를 사진으로 찍으면서 심부름꾼을 늘 데리고 다닙니다. 그리고, 멧골에서 퍽 오래 머문다고 합니다. 사진 한 장 찍기까지 심부름꾼과 함께 두멧자락에서 무엇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밥은 어떻게 먹고, 똥은 어떻게 누었을는지 궁금합니다. 깊은 두멧자락에 숨은 모습을 사진으로 담자면 ‘길이 없는’ 곳으로 다녀야 했을 텐데, 길이 없는 곳을 다니면서 ‘길을 어떻게 냈을’는지 궁금합니다. 두멧자락에서 여러 날, 또는 달포 즈음 지낸다고 한다면 천막을 치든 임시로 집을 짓든 해야 할 텐데, 이동안 나무를 얼마나 베었을까요. 겨울에 여러 날 두멧자락에서 묵자면 불을 때야 할 텐데, 불을 피우려고 나무를 얼마나 베었을까요.


  장국현이라는 사람은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순간포착. 그렇다! 사진은 타이밍의 예술이기도 하다. 변화무쌍한 산의 기후, 그 변화무쌍한 산의 모습 가운데 두 번 다시 없는 결정적인 순간을 만나야 좋은 산 사진이 된다 … 산만 생각하다 보면 그밖의 다른 것은 잊힌다. 모든 생각이 비워지면 대상과 일체가 된다. 그때 한 느낌이 온다. 그 느낌대로 하면 된다(43쪽).” 하고 말합니다. ‘순간포착’이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진은 어느 한때를 찰칵 하고 찍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렸어도 언제나 찰칵 하고 한 장 찍습니다. 그런데 여러모로 궁금합니다. 이녁은 ‘큰 금강송’을 가린다고 하면서 ‘작은 금강송’을 베어냈어요. 그러면, 백두산에서든 한라산에서든 사진을 찍을 적에 ‘앞을 가리는 여느 나무’는 어떻게 했을까요?





  장국현이라는 사람은 “전문가에 의하면 우리 나라 소나무가 50∼100년 후에는 해충과 지구온난화로 사라질 것이라 한다. 인간이 저지른 환경오염으로 소나무가 이 땅에서 사라지면 우리 후손들도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 된다(137쪽).” 하고 말합니다. 문득 살이 살짝 떨립니다. 사람이 저지른 환경오염 때문에 소나무가 사라진다고 하는 말이 어쩐지 하나도 안 와닿습니다. 사람이 저지른 환경오염에 앞서 ‘비싸게 사고팔 사진 한 장 찍는다면서 나무를 함부로 베어낸 탓’에 먼저 그 소나무들이 사라지지 않으랴 싶습니다. 더욱이, 소나무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서 다른 나무를 함부로 다룰 모습이 너무 선합니다.


  사진책 《신기》에서 장국현이라는 사람이 “어떤 분야든 성공의 동력은 열정과 영감이다. 마음을 한 곳에 모으면 마음의 힘이 길러져 원하는 것이 현실로 나타난다(63쪽).” 하고 읊는 말은 어쩐지 텅 빈 소리 같습니다. 참말 참답게 애쓰는 사람은 땀방울과 뜨거운 가슴과 사랑으로 뜻을 이룹니다. 마음을 가만히 다스리면서 한 곳으로 모으면 못 이룰 만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쭙겠습니까. 장국현 이녁은 왜 그렇게 나무를 함부로 베면서 나무를 사진으로 찍는지요? 나무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나무를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지요? 국유림이건 국유림이 아닌 곳이건 나무를 사랑하거나 아끼지 못하는 매무새로 어떻게 나무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는지요? 이녁은 참말 어떤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는지 아리송합니다.





 “사진인으로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예술가로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나는 소나무를 찾아 이 땅을 헤매고 다닌다. 이는 나의 의무이자 나만이 누리는 권리이자 기쁨. 그러나 사진 소재가 될 만한 나무는 정말 보기 힘들다(117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다가 고개를 살래살래 젓습니다. 아니지요. 아닙니다. 사진으로 찍을 만한 나무가 없을 수 없습니다. 사진으로 찍도록 마음을 쏟지 못했을 뿐입니다. 도시에서 자동차 배기가스를 마시며 콜록콜록 앓는 나무를 사진으로 담아도, ‘사진 찍는 사람 가슴’에 깊고 너른 사랑이 있으면 아름답게 찍습니다. 굴참나무를 찍든 떡갈나무를 찍든 콩배나무를 찍든 아왜나무를 찍든, 사진을 찍는 사람들 가슴에 어떤 숨결이 흐르느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더 뛰어난 나무’를 찍기에 사진이 뛰어나지 않습니다. 더 크거나 더 멋져 보이는 나무를 찍기에 사진이 더 크거나 멋져 보일 수 없습니다. 이름난 연예인이나 배우를 찍으면 사진도 이름날까요? 웃기지도 않는 소리입니다.


  장국현이라는 사람은 “좋은 소나무를 사진에 담기 위해서 전국을 특히 강원도 지방에 험준한 산에 금강송을 찾으러 다니기 때문에 대단한 소나무들이 있는 곳을 보았다. 그러나 말할 수는 없다. 두 아름∼네 아름이나 되는 이런 노거송은 살아 있는 국보급이기 때문에 베어내면 안 된다(165쪽).” 하고 말합니다. 문득 무릎을 칩니다. 이녁이 ‘국보급 나무가 있는 곳을 말할 수 없는 까닭’을 어렴풋하게 짚어 봅니다. 나무를 지키려는 뜻에서 말하지 않겠다는 마음인지, 이녁이 나무를 함부로 베어내서 망가뜨렸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마음인지, 어느 쪽이 참인지 참으로 알쏭달쏭하다고 느낍니다. 이제껏 어떤 사진을 찍었는지, 또 앞으로 어떤 사진을 찍으려 하는지, 참으로 믿을 길이 없습니다. 4347.9.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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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4-09-27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말도 안되!!! 나무 사진을 찍기 위해 나무를 베었다니요. 소름끼치도록 섬뜩합니다.
책 제목이 가관이군요. 神氣.... 그것 참. 진저리 칠 따름입니다. 흐아아 ㅠㅠ

숲노래 2014-09-27 17:08   좋아요 0 | URL
그냥 나무도 아닌 `국유림`에서 `국보급 나무`를 함부로 베었는데,
지난해인가 올해에 비로소 바깥에 알려져서
처음으로 벌금 500만 원을 울진 법원에서 물렸다 하는데,
벌금이 고작 500만 원이랍니다...

청와대이며 국회의사당이며 인천공항이며...
곳곳에 이 사람 사진이 걸렸다더군요...
 
두나's 도쿄놀이
배두나 글.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찾아 읽는 사진책 190



놀 때에 즐겁게 사진

― 두나's 도쿄놀이

 배두나 글·사진

 테이스트팩토리 펴냄, 2007.8.13.



  배우 배두나 님은 2006년에 《두나's 런던놀이》를 선보이고, 2007년에 《두나's 도쿄놀이》를 선보이며, 2008년에 《두나's 서울놀이》를 선보입니다. 그러고는 더는 ‘두나놀이’를 잇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배우로 뛰느라 바쁜 탓이지 싶습니다. 어쩌면 너무 바쁘거나 다른 놀이를 찾았기에 ‘사진놀이’는 그만두었을 수 있습니다.


  배두나 님은 도쿄라는 곳을 “결정적으로 실망한 건 우리가 사는 서울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었다. 수박 겉핥기식 여행의 배고픔과 목마름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그렇지만 도쿄는 참 희한한 곳이다. 그때는 도쿄 여행을 고생만 하고 재미없는 여행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돌아와서는 문득문득 생각나고, 또 가 보고 싶어졌다(1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도쿄와 서울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도쿄는 미국에 있는 도시를 흉내내어 커진 곳이요, 한국은 미국과 일본에 있는 도시를 흉내내어 커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울에서 나고 자란 배두나 님이 보기에 도쿄에서 새롭거나 재미난 모습을 남다르게 찾기란 어려울 수 있어요.


  그러면, 배두나 님은 서울을 얼마나 잘 알까 궁금합니다. 서울이라는 곳을 얼마나 속속들이 알거나 읽을까 궁금합니다.






  마땅한 소리이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속속들이 헤아리거나 살피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알려고 하면 다 알 수 있으나, 모두 알려고 하는 사람은 퍽 드뭅니다. 요즈음은 여러모로 울타리가 높아서, 다 알려고 해도 알기 어렵기도 하며, 굳이 알아야 할까 싶은 대목이 있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굳게 잠겨 그곳 사람이 아니면 문을 안 열어 주는 커다란 아파트가 있습니다. 아파트 어귀부터 못 들어갑니다. 이회창이라는 분은 예전에 대통령 후보로 나올 무렵 가회동 어느 빌라에서 살았다고 했는데, 이녁은 ‘월세 2000만 원’짜리 ‘가난한 서민’이었다고 밝힌 적이 있어요. 같은 서울이지만, 누군가한테는 2000만 원이 전세 보증금이고, 누군가한테는 2000만 원이 월세입니다. 그리고 누군가한테는 2000만 원이 아무것도 아닌 돈이 되고, 누군가한테는 2000만 원이 그림떡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잣집 빌라나 아파트 둘레에 얼씬하지 못합니다. 같은 서울이지만 다 알 수 없어요. 그런데, 부잣집 빌라나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가난한 골목동네로 찾아갈 일이 없어요. 골목을 골골샅샅 두루 두 다리로 거닐면서 헤아리는 부잣집 사람은 찾아볼 일이 없습니다. 더욱이, 조그마한 골목집에 이웃이나 동무로 찾아가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즐겁게 노는 부잣집 사람은 몇이나 될까 잘 모르겠어요.


  어느 쪽이 좋고, 어느 쪽이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삶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사진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서울을 사진으로 찍을 적에 청담동이나 압구정동을 잔뜩 찍을 만해요. 누군가는 서울을 사진으로 찍을 적에 골목이웃 살림집에서 호젓하게 노는 삶을 신나게 찍을 만해요.




  서울에서 자동차와 찻길만 잔뜩 찍는 사람이 있을 테고, 서울에서도 텃밭을 일구고 마당을 손질하며 나무를 보듬고 골목꽃을 사랑하는 손길을 신나게 찍는 사람이 있을 테지요.


  배두나 님은 “누군가는 ‘저녁 한 끼를 먹으러 일본 가는 두나’라고 빈정댔지만, 난 고단한 내 친구에게 밥 한 끼 먹이러 일본까지 날아간 내가 기특할 때도 있다(24쪽).” 하고 말합니다. 삶은, 남 눈치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일본에 가든 자전거를 타고 이웃집에 가든, 삶은 모두 같습니다. 내가 손수 차린 밥을 함께 먹든, 전화를 걸어 튀김탉을 시켜서 같이 먹든, 밥은 모두 같습니다. 함께 먹는 마음을 살필 노릇입니다.


  그런데, 배두나 님은 아직 ‘남 눈길’에서 홀가분하지 못합니다. 도쿄여행이나 이웃집 골목마실이나 무엇이 다르겠어요. 속내와 마음은 같아요. 사랑과 꿈은 같아요. 그러니, “사실 이날은 모든 것이 감격 그 자체였다. 우리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껴안고 있는데도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도 감격이었고, 손을 잡고 시부야  이곳저곳을 거닌 것도 그랬다(61쪽).”와 같은 이야기는 살짝 서글픕니다. 참말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아무것도 아닌 일에서 즐겁게 웃다가 살짝 눈물이 날 만한 배두나 님 삶입니다.

  사람들이 알아보면 어떻고 안 알아보면 어떠한가요.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찍고 싶은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이쁘장하게 나오도록 찍기에 사진을 잘 찍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멋들어져 보이도록 찍기에 사진을 잘 찍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배두나 님이 선보인 《런던놀이》는 살짝 풋풋한 기운이 감돌지만, 아직 겉치레가 많이 끼었습니다. 《서울놀이》는 이녁이 나고 자란 서울에서 스스로 즐겁게 누린 삶을 보여줄 만했는데, 막상 서울내기로서 느긋하면서 호젓하게 서울을 누린 즐거움을 제대로 담지 못했습니다. 《도쿄놀이》는 풋풋함이 모두 가신 채 다른 사람들이 찍은 ‘그림 같은 느낌’을 적잖이 흉내낸 사진이 엿보이면서, 틈틈이 배두나 님 나름대로 ‘노는 삶’을 조금 실어서 보여줍니다.






  사진은 찍을 뿐 아니라 읽으니, 아무래도 ‘사진을 볼 사람’을 아예 생각 안 할 수 없다고 할 테지만, ‘사진찍기’를 ‘사진놀이’로 즐기려 했다면, ‘사진을 찍은 사람’ 마음이 더 드러나도록 사진을 찍고, 고르고, 살펴서, 책 하나로 엮으면 더 재미있고 아기자기했으리라 느껴요.


  “살인적인 요금 탓에 택시는 아예 탈 엄두도 못 내고, 지하철을 갈아타면서 도쿄의 거리를 뚜벅뚜벅 걸어다녔다. 하루 종일 걷다 보면 다리는 무척 피곤했지만, 덕분에 사진은 많이 찍은 것 같다. 특히 지하철에서는 제법 재미있는 광경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주머니 속에 커다란 아사히 맥주를 넣고 신문을 보고 있는 아저씨가 너무 귀엽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실례를 무릅쓰고 ‘찰칵’ 셔터를 눌렀다(200쪽).” 하고 이야기하면서 보여주는 사진은, 《도쿄놀이》에 실은 사진 가운데, 남 눈치를 안 보고 찍은 몇 안 되는 사진들이고, 바로 배두나 님 마음과 사랑과 삶을 살포시 드러낸 몇 안 되는 사진들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진을 더 실었으면, 이렇게 스스로 찬찬히 더 오래 걸어다니면서 사진놀이를 누렸다면, 《도쿄놀이》가 한결 멋스러우면서 살가우며 재미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런던놀이》과 《서울놀이》에서는 이런 대목이 제대로 안 담기거나 못 담겼다고 할 만합니다.


  배두나 님 집에는 사진책이 얼마나 있을까요? “사진집 섹션은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구경하는 곳이라 마지막에 둘러본다. 사랑해 마지않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집 중에 혹시 소장하고 있지 않은 책이 없나를 확인한 후, ‘절대 없음’에 뿌듯해 하며 구석구석을 뒤졌다. 그중에서 눈에 띈 책이 있었으니, 데이비드 해밀턴의 사진집. 그의 사진집 몇 권을 꽤 오랜 시간 감상한 후, 책 가격에 긴장하여 딱 한 권만 골랐다. 덤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진가 셀리 만의 사진집도 한 권 샀다. 그러고 나니 나는 언제 울적했느냐는 듯 반짝반짝 행복해졌다(222쪽).” 하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사랑스럽습니다. 다만, 브레송이나 셀리 사진책도 아름답기는 한데, 일본마실을 갔으면, 일본 사진책을 더 살펴서 장만해도 되리라 느껴요. 아니, 일본에는 한국에 알려지지 못했으나 놀랍고 대단하며 아름답게 사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그런 사진책들 이야기, 그러니까 한국에서 사진비평을 하는 사람들이 건드리지 못하거나 안 건드린 ‘예쁜 일본 사진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면 그야말로 ‘두나놀이’답게 빛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두나가 일본에서 처음 만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일본 사진가’ 이야기를 살며시 곁들일 때에, ‘사진놀이’를 지켜보면서 함께 놀자고 생각하는 우리 사진이웃한테 맛깔스러운 선물 하나를 건네줄 수 있겠지요.


  놀 때에 즐겁게 사진입니다. 놀기에 즐겁게 사진입니다. 아무쪼록 앞으로 즐겁게 놀 수 있기를 바라요. 그리고 ‘서울놀이’나 ‘도쿄놀이’처럼 뭉뚱거리는 사진에서 한 발짝 나아가, ‘시골놀이’나 ‘숲놀이’나 ‘바다놀이’, 또는 ‘전주놀이’나 ‘강릉놀이’, 또는 ‘서울 어느 한 곳 놀이’도 기쁘게 누리시기를 빕니다. 4347.9.1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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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눕다 경계에 서다 고려인 - 한금선 사진집
한금선 지음 / 봄날의책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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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85



바람에 누워도 일어나는 풀꽃

― 바람에 눕다 경계에 서다 고려인

 한금선 사진

 봄날의책 펴냄, 2014.8.19.



  풀을 베거나 뽑으면 한동안 땅바닥에 풀빛이 없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풀은 이내 돋습니다. 새로운 풀씨가 싹을 트고, 새로운 풀줄기가 오르면서 새로운 풀잎이 천천히 퍼집니다. 나뭇가지를 베면 처음에는 민둥민둥 앙상하지만 이윽고 새로운 줄기가 뿅 나옵니다. 아주 가늘고 작은 가지가 하나둘 나오고, 어느새 제법 굵게 자랍니다.


  다치거나 긁히거나 베인 자리에서 피가 나옵니다. 아야 아프네 하고 들여다봅니다. 다치거나 긁히거나 베인 자리에서 끝없이 피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어느 만큼 피가 나온 뒤 천천히 아뭅니다. 천천히 아문 뒤 딱지가 지고, 딱지가 떨어질 무렵 새로운 살이 돋습니다.


  풀은 그야말로 꾸준하게 자랍니다. 김을 매는 사람으로서는 풀이 그악스럽다 여길 만한데, 소한테 풀을 뜯기는 사람이라면 꾸준하게 자라는 풀이 고맙습니다. 풀을 뜯어서 먹는 사람한테도 풀은 고마운 밥입니다. 뜯어도 뜯어도 새로 나기 때문입니다. 상추도 부추도 고들빼기도 쑥도, 뜯으면 뜯을수록 새로 돋아서 그야말로 자꾸자꾸 새로 먹을 수 있습니다.


  오이도 토마토도 호박도 똑같아요. 따고 다시 딸 수 있습니다. 꾸준하게 새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딸기도 늦봄과 이른여름 사이에 꾸준히 새로 딸 수 있어요. 새로 꽃이 피고 지면서 새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문득 사람살이를 떠올립니다. 사람은 어떠한가요. 사람은 새로 자라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새로 자라지 않는 사람인가요. 사람은 날마다 꾸준히 자라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어느덧 제자리에서 멈추면서 자랄 줄 모르는 사람인가요.





.. 물론 인터뷰 중에는 촬영을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분들과 시선을 맞춘 채 얼굴을 맞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가 끝나면 내가 찍을 차례인데, 그때는 살아온 역사와 사연을 말하는 동안의 감정 기복이라든가 표정이 그들의 얼굴에서 모두 사라진 뒤였다. 맞바라보는 동안 자연스레 시선이 배경을 이룬 벽으로 확장되었는데, 아까의 눈빛은 나올 수 없지만 뒤에 다닥다닥 걸린 가족사진이라든가 카펫을 두른 벽 등이 그들이 하는 이야기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  (218쪽)



  한금선 님이 찍은 사진으로 엮은 《바람에 눕다 경계에 서다 고려인》(봄날의책 펴냄,2014)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한금선 님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고려인’ 취재를 나섭니다. 촬영기를 가진 사람과 취재를 하는 사람이 언제나 앞에 섭니다. 사진기를 가진 사람은 언제나 뒤에 섭니다. 촬영기를 돌리거나 취재를 하려고 이야기를 묻는 사람이 ‘일하는’ 동안에 사진기를 쥔 사람은 뒤에 서거나 밖에 나가야 합니다.


  사진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사진가는 뒤에서 부스러기를 줍는 사람일까요. 사진가는 찰칵 소리를 내어 촬영을 가로막는 헤살꾼일까요. 사진가는 취재하려고 무언가 묻는 사람 눈길을 흐리거나 흐트리는 걸림돌일까요.


  가만히 따져 봅니다. 촬영기를 돌리는데 옆에서 자꾸 찰칵찰칵 소리를 내면 거슬립니다. 딴 소리가 스미니까요. 취재를 하려고 묻는 사람 옆에서 자꾸 취재원 눈길을 빼앗으면 골이 날 만합니다. 취재를 하려는 사람은 취재원이 저한테 온마음을 쏟기를 바라니까요.


  그래요. 사진가는 외롭습니다. 사진가는 외로워야 합니다. 아니지요. 외로워야 하는 사진가는 아닙니다. 혼자 움직여야 하는 사진가일 뿐입니다. 혼자 움직이되, 홀가분할 수 있어야 하는 사진가입니다. 홀가분하게 움직이되 즐겁게 춤추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하는 사진가입니다.






  생각해 보셔요. 촬영기를 돌리는 사람은 빙글빙글 춤을 추지 못합니다. 사진기를 쥔 사람은 빙글빙글 춤을 추듯이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촬영기는 세발이에 앉혀서 안 흔들리도록 해야 할 테지만, 사진기는 걸음걸이에 맞추어 함께 움직이면서 ‘어느 한때’를 사랑스레 담을 수 있습니다. 취재를 하려고 묻는 사람은 말씨 하나에 온힘을 기울여야 하는데,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양말이나 손가락이나 신발이나 마룻바닥이나 접시나 양탄자나 주름살이나 안경이나 거리낄 일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꼭 한 가지만 살그마니 떼어서 찍을 수 있어요.


  홀가분하게 찍기에 홀가분한 사진입니다. 즐겁게 찍기에 즐거운 사진입니다. 신나게 찍기에 신나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찍어 이야기를 엮는 사람은 어디로든 움직입니다. 집 안쪽에서 둘러봅니다. 집마다 있는 사진틀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손님한테 차려 주는 맛난 밥상을 바라봅니다. 집 바깥으로 나와서 마당을 거닙니다. 사진은 ‘어느 한때’만 ‘찰칵’ 하고 찍으면서 이야기를 빚습니다. 사진가 한 사람이 빚은 이야기는 영상이나 글하고 사뭇 다릅니다. 영상은 끊임없이 흘러서 모든 것을 다 보여주려는 듯합니다. 글은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알뜰히 담아서 몽땅 알려주려는 듯합니다.


  사진은 영상이나 글처럼 하지 못합니다. 사진은 언제나 ‘어느 한때’만 ‘찰칵’ 담을 뿐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때를 찰칵 담기에, 사진을 읽는 사람은 이 점에서 저 점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 점과 저 점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무슨 삶이 있을까, 어떤 사랑이 있을까, 어떤 사람이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하고 스스로 곰곰이 헤아립니다.






.. 이후 또 어떤 작업 현장에서 어떤 작업 방식과 조우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난관 없이 관성적으로 찍었다면 저 보물 같은 순간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  (221쪽)



  한금선 님은 촬영기를 쥐거나 연필을 쥔 사람한테 막혀서 ‘제대로 사진을 못 찍’을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금선 님은 촬영기와 연필 때문에 사진을 사진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길을 얻습니다. 촬영기를 돌리는 자리에 굳이 사진기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연필이 사각사각 춤추는 데에 구태여 사진기가 있을 일이 없습니다. 사진기는 사진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됩니다. 사진기는 사진기가 있을 자리에 있어야 환하게 빛나고 맑게 흐르며 싱그러이 숨을 쉽니다.


  지난날 한금선 님이 선보인 《집시 바람새 바람꽃》(눈빛 펴냄,2007)을 보면, 이무렵 한금선 님은 어떤 틀에 스스로 가두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한금선 님과 마주한 사람들하고 어깨동무를 하거나 활짝 웃거나 노래하는 사진이 못 되었다고 느낍니다.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 다른 삶으로 저마다 다른 사랑을 속삭이는 무지개를, 무지개가 아닌 먹구름으로 보았지 싶어요.


  《바람에 눕다 경계에 서다 고려인》은 어떤 삶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면서 어떤 이야기로 그러모으는 어떤 사랑일까 궁금합니다. 고려인은 한금선 님이 만나기 앞서이든 만난 뒤이든 언제나 고려인입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 있고,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눈물에 젖은 삶에 아픈 사람이 있고, 눈물에 젖은 삶에 아프면서도 곧잘 웃음을 지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며 웃습니다. 따사로운 손길로 어루만지는 곁님이나 동무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웃습니다. 주름진 얼굴에는 죽음을 이긴 고비가 깃들 뿐 아니라, 웃음과 노래와 춤으로 얼크러진 사랑잔치가 함께 깃듭니다. 사진기를 쥔 우리들은 이러한 숨결을 어느 만큼 바라보거나 느끼거나 살필 수 있을까요.






.. 이번 작업으로, 고려인에 대해서라기보다 사람과 사람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더 알고 느끼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  (222쪽)



  바람에 누워도 일어나는 풀꽃입니다. 풀과 꽃과 나무는 바람이 불면 흔들리면서 춤을 추고 노래합니다. 그만 비바람에 꺾이는 풀과 꽃과 나무가 있고, 비바람을 꿋꿋하게 견딘 풀과 꽃과 나무가 있습니다. 풀과 꽃과 나무는 비바람에 꺾인들 죽지 않습니다. 아니, 죽을 수 있어요. 그러나, 비바람에 꺾여 죽어도 새로운 씨앗이 이 땅에 드리워서 새롭게 태어나요. 아프고 괴로우면서 고단한 나날을 지나야 했던 고려인들 가슴에는 슬픔과 생채기와 얼룩이 있어요. 그리고, 슬픔 곁에는 즐거움이, 생채기 곁에는 웃음이, 얼룩 곁에는 사랑이 함께 있습니다. 삶을 이루는 이야기가 알뜰살뜰 있습니다.


  소담스레 밥상을 차려 이웃을 부릅니다. 소담스레 차린 밥상맡에는 사진가도 앉을 수 있습니다.  어제 그토록 모진 가시밭길에서 피울음으로 슬퍼야 했던 사람들이 오늘 잔치마당을 베풀면서 하하 웃고 기쁘게 노래합니다. 앞으로 다가올 날들은, 모레는, 글피는, 새로운 해는, 또 새로운 해는, 다시 새로운 해는, 고려인들한테 어떤 삶이 될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한테는, 또 남녘에서 살거나 북녘에서 살거나 중국에서 살거나 일본에서 사는 한겨레한테는, 오늘 하루가 어떤 날이 될까요.


  바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는 풀과 꽃과 나무한테는 국경이 없습니다. 풀씨와 꽃씨와 나무씨는 국경이나 정치나 이론이나 졸업장이나 재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저 홀가분하게 어디로든 날아가서 깃들어 뿌리를 내려 싹을 틔웁니다. 한국(남녘이나 북녘)으로 가고픈 고려인이 있으나, 앞으로도 그곳에 그대로 남아 살아라겨는 고려인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 고려인이며 한겨레입니다. 그리고, 어디에서든 싱그러운 숨결이며 사람이자 사랑입니다. 사진을 찍는 우리들은 사람을 찍고 사랑을 찍습니다. 사진을 읽는 우리들은 사람을 읽고 사랑을 읽습니다. 한금선 님이 고려인을 이웃으로 만나 알뜰살뜰 사진으로 찍어 나누어 주니 반가우면서 고맙습니다. 4347.9.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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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Deconstruction - Kim Atta
김아타 지음 / 학고재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사진책이 아닌 '행위예술 도록'이지만, 이 책을 사진책으로 나누어 놓기에, '사진비평'으로 쓰기는 했지만, 사진과 예술이 제자리를 찾기를 바랄 뿐입니다.


..





찾아 읽는 사진책 190



사진인가 예술인가

― 해체

 김아타 사진·글

 학고재 펴냄, 2008.3.20.



  김아타 님이 1990년대 첫머리에 벌인 여러 가지를 묶은 《해체》(학고재,2008)를 읽습니다. 이 책은 1990년대에 나오기 어려웠으리라 느낍니다. 그렇다고 2008년에 나오기도 만만하지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면 2010년대에는? 2020년대나 2030년대에는 어떠할까요? 다른 나라라면 모르되, 한국에서는 앞으로도 다시 나오기 어렵겠구나 싶습니다.


  김아타 님은 커다란 사진기를 써서 ‘행위예술’을 합니다. 그뿐입니다. 행위예술입니다. 사진기를 써서 무엇인가 찍지만, 사진을 찍지는 않습니다. 행위예술을 ‘기록’합니다. 김아타 님이 보여주고 싶은 예술활동을 적어서 남들한테 보여주는 이음돌이 바로 사진기입니다.


  김아타 님은 ‘누드’가 아닌 ‘나체’를 찍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누드란 무엇이고 나체란 무엇일까요? 먼저, ‘누드(nude)’는 영어이고, “알몸”을 뜻합니다. ‘나체(裸體)’는 한자말이며, “알몸”을 뜻해요. 두 가지 낱말은 한국말이 아닙니다. 한국말사전을 찾아보면 누구나 알 텐데, 두 낱말은 모두 한국말 ‘알몸’으로 고쳐서 쓰라고 풀이합니다. 왜 그럴까요? 한국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적잖은 사람들은 ‘사진가’라는 말을 안 씁니다. 사진가 아닌 ‘포토그래퍼’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포토그래퍼는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포토’를 ‘메이킹’합니다.


  김아타 님은 누드가 아닌 나체를 찍는다고 하지만, 외국말을 놓고 장난을 해 본들, 바탕은 달라지지 않아요. 말장난으로 이녁 예술활동을 덮어씌우려 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최광호 님처럼 조금 더 쉽게, 조금 더 알아들을 수 있게, 한국에서는 한국말로 이야기할 노릇입니다. 김아타 님은 미국에서 어떤 영어로 이녁 예술활동을 말하겠어요? 미국에서 미국사람한테 ‘나체’라는 한자말로 말을 할까요?


  최광호 님은 ‘벗긴 몸’이 아닌 ‘벗은 몸’을 이야기합니다. 가시내 옷을 벗겨서 ‘가시내 맨 살결을 찍는 사진을 예술’이라고 여기는 틀을 아주 가볍게 깹니다. 김아타 님도 깨고 싶은 틀이 있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면 그 틀을 깨면 돼요. 그 틀을 깨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면 돼요.


  《해체》를 보면, 책 뒤쪽에 “작업을 시작한 지 6개월, 나는 데리다의 전유물이었던 해체를 가져왔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1990년대 우리의 정서가 그 행위를 용서하지 않았고, 그 행위를 용서하지 않았고, 작업의 결과 또한 이해받지 못하였다. 그것은 아티스트에게 힘든 환경이었다. 하지만 작업과정은 축복 같은 처절함이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김아타 님이 보여주는 ‘해체’란 김아타 님 삶이나 넋이라기보다는 데리다라고 하는 사람 삶이거나 넋인 셈입니다. 아니, 데리다만 ‘해체’를 할 수 있지 않으니, 김아타 님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숨결로 이녁 나름대로 보여줄 수 있는 ‘해체’를 한 셈입니다.





  김아타 님은 언제나 이녁을 ‘아티스트’라고 밝힙니다. 한국에서 흔히 쓰는 ‘예술가’라는 말을 안 씁니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많이 움직이다 보니 영어가 익숙할 테니 ‘아티스트’라고 할는지 모르는데, 1990년대 첫머리부터 이렇게 외국 이론과 외국말로 이녁 작품인 행위예술을 보여주려 하니, 여러모로 벽에 부딪히는구나 싶습니다. 틀을 깨려고 행위예술을 하지만 오히려 틀에 갇힌다고 할까요. 틀을 부수려고 행위예술을 했지만 외려 스스로 새로운 틀을 만든 셈이라고 할까요.


  김아타 님은 2014년에 《장미의 열반》이라는 산문책을 선보입니다. 이 산문책을 펴낸 출판사에서는 ‘뉴욕 세계사진센터 아시아 작가 최초 개인전, 세계적 사진 전문 출판사 애퍼처에서 한국인 최초 사진집 출간, 런던 파이돈 프레스사 선정 세계 100대 사진가, 1억 원에 빌 게이츠 구매 등 아티스트 김아타란 이름을 장식할 화려한 수식어는 무수히 많다’와 같은 이야기를 보도자료로 적어서 띄웁니다. 김아타 님 해적이를 보면 ‘2008년 조선일보 주최 ‘100년 후에도 잊히지 않을 미술작가 10인’에 선정되었다’와 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대목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김아타 님은 참으로 ‘아티스트’이거나 ‘예술가’이거나 ‘미술작가’입니다. 김아타 님이 손에 사진기를 쥐었어도 ‘사진가’는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여러 매체나 기관에서 김아타 님한테 사진상을 건네기도 했습니다만, 사진상을 받을 수도 있을 테지만, 김아타 님이 하는 일을 ‘사진’이 아닙니다. 뭐랄까, 김아타 님이 즐기는 영어로 말하자면, ‘포토 아트’입니다. 백남준 님이 ‘비디오 아트’를 했다면, 김아타 님은 ‘포토 아트’를 한다고 할 만합니다.




  김아타 님은 《해체》라는 책 끝자락에 “바다가 깊어 보이지만 사람의 마음보다 깊지는 않다. 그날도 나는 정신을 풀었다. 작은 바람이 뭍의 살을 발라내는 것을 보았다.” 하는 이야기를 적습니다. 바다도 깊고 우리 마음도 깊습니다. 삶도 깊고 예술도 깊습니다. 깊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바다뿐 아니라 흙 알갱이 하나도 깊습니다. 나뭇잎도 깊습니다. 아이들 눈망울도 깊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바라보면서 느낄 수 있으면, 어디에서나 깊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조록 김아타 님은 이녁 ‘포토 아트’를 슬기롭게 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김아타 님이 하는 행위예술은 ‘사진’이 아닌 ‘포토 아트’인 만큼, 사진비평을 하는 이들은 이녁 행위예술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비평을 하기를 바랍니다. 《해체》는 사진책이 아닙니다. 사진으로 엮었지만 ‘행위예술 도록’입니다. 백남준 님이 보여준 비디오 아트를 사진으로 남겨서 묶으면 ‘비디오 아트 도록’이라 하지 ‘사진책’이라 하지 않습니다.


  꽤 예전에, 사진을 놓고 예술인가 아닌가 하는 말다툼이 많았다고 하는데, 사진은 언제나 사진입니다. 예술은 언제나 예술입니다. 사진을 예술로 여기지 않는대서 서운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언제나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술은 언제나 예술이기 때문에, 예술을 하면서 예술활동을 ‘사진찍기’인 듯이 말하거나 다루지 않기를 바랍니다. 4347.9.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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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평화 - 한대수 사진집
한대수 지음 / 시공사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찾아 읽는 사진책 189



노래하며 사진을 찍으렴

― 작은 평화

 한대수 사진

 시공사 펴냄, 2003.11.12.



  한대수 님이 찍은 사진을 보면 즐겁습니다. 왜냐하면 한대수 님은 스스로 즐겁게 살면서 스스로 즐겁게 노래하고 스스로 즐겁게 사진을 찍기 때문입니다. 즐겁게 사는 사람은 거리낄 일이 없습니다. 즐거우니까요. 즐거움을 생각하니까요. 즐겁게 노래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즐겁습니다. 마음속에 오직 즐거움을 담으면서 노래하니 다 같이 즐겁습니다. 이제 사진을 생각합니다. 즐겁게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어떤 모습을 담을까요? 즐겁게 찍은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 될까요?


  삶이 슬프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야말로 슬픕니다. 슬픈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면,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모두 슬픔에 젖습니다. 슬픈 마음으로 사진을 찍으면 어떠할까요? 찍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 슬픔에 젖겠지요.


  사랑을 담아 노래를 부르면, 서로서로 사랑을 나눕니다. 사랑을 담아 글을 쓰면, 서로서로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사랑을 담아 사진을 찍으면, 너와 내가 모두 사랑을 누립니다.


  사진에는 좋거나 나쁜 빛이 없습니다. 어떻게 찍든 모두 사진입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모습을 담는 사진이고,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담기는 빛입니다. 즐겁기에 더 좋지 않고, 슬프기에 더 나쁘지 않습니다. 기쁘기에 더 낫지 않으며, 아프기에 덜떨어지지 않습니다.






  《작은 평화》(시공사,2003)라는 사진책을 읽습니다. 평화라면 평화일 테지만, 이 사진책은 굳이 ‘작은 평화’입니다. 평화라 한다면 너른 평화나 큰 평화라 할 수 있을 텐데, 한대수 님은 이녁 사진책을 ‘작은 평화’로 이름을 붙여서 선보입니다.


  한대수 님은 “이 책에 실린 모든 사진들은 내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 순간들을 포착한 것이다(책머리에).” 하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한대수 님 마음을 건드린 모습들은 ‘작은 평화’인 셈입니다. 언제나 ‘작은 평화’를 그리는 삶이고, 날마다 ‘작은 평화’를 떠올리는 삶이며, 노래를 부르거나 사진을 찍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사랑을 속삭이거나 ‘작은 평화’를 바라는 삶입니다.


  ‘작은 평화’란 무엇일까요. 밥 한 그릇이 자그맣게 평화입니다. ‘작은 평화’는 어디에 있을까요. 한뎃잠을 자든 공원 긴걸상에 누워서 자든 호텔에 깃들어 자든 40층 아파트에서 자든 모두 자그맣게 평화입니다. 머리를 붉게 물들이든, 태어날 적부터 붉은 머리카락이든, 저마다 자그맣게 평화예요.


  자그마한 평화는 어디로 갈까요. 자그마한 평화는 자그마한 사랑으로 나아갈 테지요. 자그마한 사랑은 어디로 갈까요. 자그마한 사랑은 자그마한 꿈으로 나아가겠지요. 자그마한 꿈은 어디로 갈까요. 자그마한 꿈은 자그마한 샘물처럼 퐁퐁 솟아서 자그마한 냇물을 이루다가 자그마한 바닷가로 흘러들어 자그마한 노래로 거듭나리라 느껴요.






  노랫가락에 평화로운 숨결이 서립니다. 사진 한 장에 평화로운 마음이 꿈틀거립니다. 노랫가락에 따사로운 숨결이 깃듭니다. 사진 한 장에 따사로운 넋이 자랍니다.


  사진책 《작은 평화》를 찬찬히 읽고 나서 첫 쪽으로 돌아갑니다. 한대수 님이 책머리에 적은 글을 다시 읽습니다. “나는 뉴요커다. 이 변화무쌍한 혼돈의 도시에서 나는 이혼을 하고, 재혼도 하고, 연애도 하고, 시련을 겪으며, 차이나타운에서 업타운까지 거대한 애버뉴의 길목마다 지울 수 없는 추억을 새겨 왔다(책머리에).”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한대수 님은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뉴욕에서 무척 오래 지냈습니다. 요즈음은 한국에서 늦둥이를 낳아 싱글벙글 지내시지 싶습니다. 그동안 뉴욕에서 평화를 꿈꾸며 노래를 부르던 삶을 사진으로 담아 《작은 평화》를 선보였다면, 앞으로는 ‘양호’와 함께 꿈꿀 평화를 노래하면서 사진을 한 장 두 장 선보일 테지요.


  아름답게 꿈꾸며 노래합니다. 아이들이 이 땅에서 아름답게 꿈꾸며 노래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게 꿈꾸며 사진을 찍습니다. 아이들이 이 지구별에서 아름답게 꿈꾸며 사랑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꿈을 꾸기에 아름다움으로 나아가고, 사랑을 속삭이기에 아름다움을 스스로 빚습니다. 꿈을 꾸며 아름다움으로 나아가기에 노래가 샘솟고, 사랑을 속삭이기에 노래 한 가락 즐겁게 부르면서 한손에 사진기를 쥐고 다른 한손에 연필을 쥡니다. 4347.9.1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과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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