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관한 명상 - 전민조 사진집 눈빛사진가선 10
전민조 지음 / 눈빛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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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89



내 아름다운 손으로 빚는 사진

― 손에 관한 명상

 전민조 사진

 눈빛 펴냄, 2014.11.25.



  테드 랜드 님 그림에 빌 마틴 주니어 님과 존 아캠볼트 님이 글을 넣은 그림책 《손, 손, 내 손은》(열린어린이,2005)이 있습니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그림책입니다. 이 그림책을 보면 첫머리를 “손, 손, 내 손은 슝 던지고 꽉 잡아요.” 하고 엽니다. 이윽고, “발, 발, 내 발은 또박또박 걷고 우뚝 멈춰요.” 하고 이어지지요. 다음으로, “코, 코, 내 코는 흠흠 냄새 맡고 쌕쌕 숨쉬어요.” 하고 말하다가 “눈, 눈, 내 눈은 또랑또랑 쳐다보고 뚝뚝 눈물 흘려요.” 하고 말해요. 이렇게 손이며 발이며 코와 눈이며 하나씩 이야기하면서 다 다른 아이들이 나옵니다. 지구별에 있는 온갖 겨레 아이들이 다 다른 터전에서 다 다른 옷차림과 생김새로 지내는 모습이 흘러요. 그림책을 조금 더 넘기면, “무릎, 무릎, 내 무릎은 콰당탕 엎어질 땐 따따금 아파요.” 하는 이야기와 “뺨, 뺨, 내 뺨은 쪽 뽀뽀해 주면 발그레 빨개져요.” 같은이야기가 흐릅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어린이와 어른 모두 콰당탕 엎어지면 무릎이 아픕니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 누군가 뺨에 쪽 뽀뽀해 주면 발그레 빨개지면서 기쁜 사랑이 흐릅니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 두 손을 써서 공을 던지거나 받을 뿐 아니라, 밥을 지어서 차리고 수저를 들어 밥을 먹어요. 어린이와 어른 모두 두 발을 써서 걷고 달리고 뛰고 구릅니다.



.. 서로 먼저 이해를 구하고 용서하면서 손을 먼저 내미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





  사진이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사진(寫眞)’이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물체의 형상을 감광막 위에 나타나도록 찍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영상”으로 풀이합니다. 영어사전에서 ‘photograph’를 찾아보면, “A photograph is a picture that is made using a camera.”로 풀이합니다. 한국말사전과 영어사전 모두 ‘기계를 다루어 기록하는 것’을 ‘사진’이라 말해요. 그러나, 우리는 사진을 이야기할 적에 ‘기계질’이나 ‘기록’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이 오직 기계질이나 기록뿐이라면 우리가 굳이 사진을 문화나 예술로 다룰 까닭이 없을 테고, 사진이 그저 기계질이나 기록뿐이라면 사진을 즐기거나 읽거나 나누거나 누릴 까닭이 없으리라 봅니다. 사진은 기계질이나 기록에서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기계를 빌어서 우리 마음을 나타내고 생각을 나눌 수 있기에, 사진을 문화나 예술로 다루면서 이야기를 한다고 봅니다.


  나는 사진을 볼 때마다, ‘내 아름다운 손으로 빚는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내가 찍은 내 사진은 내 손으로 빚은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내 이웃이 찍은 사진은 내 이웃이 이녁 손으로 빚은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전문가가 찍든 전문가 아닌 사람이 찍든 모든 사진은 ‘아름다운 손으로 빚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사진을 가르치거나 배울 적에는 기계질이나 기록 값어치만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습니다. 학교나 강단에서 기계질이나 기록 값어치만 가르치거나 배운다면, 어느 모로 본다면 학교나 강단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계질’은 사진기를 장만할 때 상자에 함께 담긴 ‘사용 설명서’를 읽으면 얼마든지 익혀서 ‘사진기라는 기계를 다룰 수 있’고, ‘기록’은 사진 역사를 다룬 두툼한 책 한 권을 읽기만 하더라도 지식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이 사진이 되는 까닭은, 사진이 기계질이나 기록이 아닌 ‘손질’이요, ‘손질’이란, 내 마음을 기울이는 손길이며, 내 생각을 써서 움직이는 손놀림이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요리가가 호텔에서 지어서 차리는 밥이기에 아이들이 맛나게 먹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여느 살림집 여느 어버이가 된장국에 나물무침 하나만 밥상에 올려도 맛나게 먹습니다. 아이들은 ‘값진 밥’이나 ‘비싼 밥’을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이 어린 밥’을 바랍니다. 사랑이 어린 손으로 지은 밥을 먹을 때에 아이들이 즐겁습니다. 사랑이 담긴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길 때에 아이들이 기쁩니다.


  사랑이 어린 손으로 사진기라는 기계를 손에 쥘 적에 비로소 ‘사진’이 태어난다고 느낍니다. 사랑이 어리지 않은 손으로 사진기라는 기계를 쥔다면, 자칫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좋은 뜻으로 사진기를 손에 쥐었어도, 사진에 찍힐 사람한테서 허락이나 동의를 받지 않고 찍는 사진이라면,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초상권 문제가 불거지지요. 저작권 문제도 이런 바탕에서 비롯해요. 어느 한 가지 모습은 꼭 한 사람만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누구나 어느 곳이든 가서 ‘어느 한 가지’ 모습을 비슷하게 찍을 수 있고 조금 바꾸어서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가지 모습을 왜 비슷하게 찍거나 조금 바꾸어서 찍을까요? 어떤 마음이 되어 이렇게 사진을 찍을까요? 굳이 이렇게 사진을 찍어야 할까요?





..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이나 애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애무하는 모습은 쳐다보는 모습만으로도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풍경이다 ..



  전민조 님이 선보이는 사진책 《손에 관한 명상》(눈빛,2014)을 읽습니다. 이 나라에서 저마다 다른 꿈을 가슴에 품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온갖 사람들 이야기를 ‘손’을 바라보면서 들려줍니다. 손길에서 이야기를 읽고, 손길에서 꿈을 읽습니다. 손길에서 사랑을 읽고, 손길에서 눈물과 웃음을 읽습니다. 손길에서 고단한 하루를 읽고, 손길에서 기쁜 웃음을 읽습니다. 손길 하나를 바라보아도 모든 이야기를 읽을 만합니다.


  손이 아닌 발을 바라보아도 모든 이야기를 읽을 만합니다. 손과 발뿐 아니라, 눈을 읽어도, 어깨를 읽어도, 엉덩이를 읽어도, 머리카락을 읽어도, 안경을 읽어도, 손에 쥔 책을 읽어도, 손에 든 호미를 읽어도, 발에 꿴 신을 읽어도, 발가락에 낀 때를 읽어도, 온몸에 묻은 먼지와 때를 읽어도, 얼굴에 짓는 웃음과 눈물을 읽어도, 뒷모습을 읽어도, 앞모습을 읽어도, 우리는 늘 언제 어디에서나 수많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야기를 읽기에 사진이 됩니다. 이야기를 나누려 하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사진을 찾아 읽습니다. 이야기를 짓기에 사진을 찍는 사람이 되고, 이야기를 지어서 기쁘게 이웃과 나누려 하기에 ‘사진가’라는 이름을 아름답게 얻습니다.



.. 아름다운 손도 사랑이 식으면 폭력을 휘두르는 공포의 손으로 변하는 경우도 많다 ..





  사진을 찍는 사람은 무엇을 헤아려야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초점이나 셔터빠르기나 조리개값이나 빛값을 헤아려야 즐거울까요. 사진기에 눈을 박아 내 곁에 있는 이웃과 동무를 바라볼 적에, 사진가 마음에 ‘이웃을 아끼는 숨결’과 ‘동무를 사랑하는 넋’이 없다면, 사진기라는 기계를 손에 쥔 사람은 어떤 작품을 빚을까요.


  사진이 창작이 되려면, ‘남이 안 찍은 모습’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이 창작이 되려면, ‘남이 찍은 모습과 똑같지 않도록 살짝 바꾼 틀과 장면 연출’로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이 창작이 되려면, 사진에 ‘사진기를 손에 쥔 내 이야기’를 담고, ‘사진기를 바라보는 이웃과 동무가 살아온 이야기’를 싣되, 두 사람은 따사로운 사랑과 너그러운 믿음으로 어우러져야 합니다.


  공모전을 마음에 두고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전시회를 마음에 두고 사진을 만드는 사람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작품집을 내거나 문화재단 지원금을 마음에 두고 사진을 조합하는 사람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사진이 사진이 되도록 사진을 찍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진에 사랑을 담도록 마음을 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방통행으로 강요하는 사랑’이 아니라, 사진에 찍히는 사람이 너그러이 받아들이면서 서로 이웃과 동무가 될 수 있도록 따사로운 사진을 찍을 줄 아는 참다운 사랑을 먼저 가슴에 심은 뒤 사진기라는 기계를 들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전민조 님이 선보이는 사진책 《손에 관한 명상》은 넌지시 이야기합니다. 사진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찍을 모습은 대단한 작품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나(사진가)와 네(사진에 찍히는 이웃)가 모두 아름다운 사람인 줄 알면 됩니다. 나는 ‘사진가’이고, 너는 ‘모델’이나 ‘피사체’가 아닙니다. 사진에 찍히는 사람은 바로 ‘내 얼굴’입니다. 모델을 찍거나 피사체를 다루는 사진이 아니라, 구도와 장면을 연출하는 사진이 아니라, 주제를 일방통행으로 강요하는 사진이 아니라, 서로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사진이 될 때에 비로소 ‘사진’입니다.


  《손에 관한 명상》 첫머리를 열면서 마지막을 닫는 사진은 아기와 어른이 서로 맞잡은 손입니다. 아기와 어버이일 수 있고, 아기와 아버지일 수 있으며, 아기와 할아버지일 수 있습니다. 한쪽이 어떤 어른이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다만, 두 사람은 ‘사진을 찍으려고’ 손을 맞잡지 않습니다. 아기한테 손을 내민 어른도, 어른 손에 제 작은 손을 맡긴 아기도, ‘사진 작품이 될 뜻’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오직 둘 사이에 사랑이 따스하게 흐르기에 손을 맞잡거나 맡깁니다.


  즐겁게 빚은 사진은 우리가 서로 나누는 즐거운 삶이 무엇인가 하는 실마리를 풀어 줍니다. 꾐수를 부려 빚은 사진은 우리 사이에 엉성한 울타리를 쌓고 마는 안타까운 실타래를 보여줍니다. 사진은 모든 실마리를 풀고, 사진은 온갖 실타래로 엉킵니다. 어느 길이 즐거울까요. 어느 길이 고단할까요. 우리는 서로 즐겁게 어우러지면서 살고 싶을까요, 아니면 우리는 서로 미워하거나 다투면서 고단하고 싶을까요. 사진기를 손에 쥔 손은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4347.12.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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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4.12 - Vol.13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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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197



내가 지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진

― 사진잡지 《포토닷》 13호

 포토닷 펴냄, 2014.12.1.



  사진을 찍다 보면 누군가 찍은 사진하고 내 사진이 비슷하거나 똑같을 수 있을까요? 어느 멋지거나 아름답거나 놀랍구나 싶은 곳에 찾아가서 사진을 찍는다면, 이 멋지거나 아름답거나 놀랍구나 싶은 곳에 나 아닌 다른 사람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서로 엇비슷하구나 싶은 사진을 찍을는지 모릅니다. 일부러 엇비슷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어쩌다 보니 엇비슷한 사진이 나올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찍은 멋지거나 아름답거나 놀랍구나 싶은 사진에서 몇 가지만 바꾸거나 손질해서 ‘다른 사진’이라고 내세울 수도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달력 사진’이라는 말이 나돕니다. 달력에 나옴직한 사진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달력에 넣어 한두 달 동안 쳐다보는 사진이라면 ‘여느 사진’은 아니라 할 만합니다. 생각해 보셔요. 한 달이나 두 달 내내 똑같은 사진만 바라보아야 한다면 아무 사진이나 넣을 수 없습니다. 잘 찍은 사진이든 아름답다 싶은 사진이든 놀랍다 싶은 사진을 넣어야 할 테지요.


  그런데 ‘달력 사진’이라고 하면 몇 가지 틀에 얽매입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 손길이나 숨결이나 마음이 드러나는 사진보다는, 달과 철에 따라 숲이나 시골이나 바다를 보여주는 사진이기 일쑤입니다. 보드랍게(자연스럽게) 흐르는 사진이 아니라 어떤 틀을 억지로 짜서 맞추는 사진이기 마련입니다. 우스갯소리처럼 ‘달력 사진 찍느냐?’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찍은 사진이 달력에 넣을 만하다면 여러모로 값있다 할 수 있으나, ‘달력에 넣을 만한 틀에 사로잡힌 사진’이라고 한다면 내 손길도 내 눈길도 내 마음도 제대로 담지 못한 사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잡지 《포토닷》 13호를 읽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을 누리면서 저마다 다른 눈길로 사진을 찍는 여러 사람 이야기를 읽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서 사진은 거울 속에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보다 자기 내면의, 내 안으로의 잠수를 의미해요. 조금 더 깊이 잠수할수록 더 깊은 골짜기의 감정을 데려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26쪽/김정아).” 같은 이야기는 무엇을 말할까요. 나는 내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내 사진을 가장 잘 찍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브레송을 흉내낸다면 ‘브레송을 흉내낸 사진’이 됩니다. 살가도를 흉내낸다면 ‘살가도를 흉내낸 사진’이 됩니다. 쿠델카를 흉내낸다면 ‘쿠델카를 흉내낸 사진’이 되어요. “이방인이 찍은 이방인, 아저씨(오형근)가 찍은 아줌마와 소녀와 군인은 우리 주위에 늘 있었으나 잘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오형근에 의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주체가 되었다(50쪽/최연하).” 같은 이야기는 무엇을 말할까요. 이방인이란 누구일까요. 한국말사전 풀이를 살피면 ‘이방인 = 외국사람’입니다. 오형근이라는 분이 찍은 ‘이방인’이라면, 너와 내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지 싶습니다.


  누가 누구를 찍든 너와 나는 다릅니다. 어버이와 아이도 다릅니다. 이웃과 동무 사이도 다릅니다. 두 사람이 아무리 한마음이라 하더라도 둘은 다른 목숨입니다. 다른 목숨은 서로 다른 눈길로 삶을 바라봅니다. 서로 다른 몸짓으로 삶길을 걷습니다. 어떤 사진가가 누군가를 찍었기에 ‘더 이방인스러운 사진’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를 찍더라도 ‘다 다른 사람 숨결과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밤에 하늘을 보면 까맣습니다. 밤에 둘레를 바라보면 새까맣습니다. “처음에는 컬러로 촬영했는데,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진이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했고 그나마 살아 있는 색상은 모두 파란색뿐이었다. 그래서 흑백으로 찍어 보고 싶었다. 흑백으로 바꾸고 나니 콘트라스트를 내 마음대로 바꾸는 것이 가능해졌고, 사람들이 헤엄치고 지나간 자리가 초현실적으로 보였다(71∼72쪽/웨인 레빈).” 같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밤에 둘레를 살피며 조용하거나 한갓진 길을 걷는다면 ‘까망과 하양으로 어우러진 누리’를 마주합니다. 밤하늘 별빛은 까망과 하양으로 빚은 아름다운 빛물결입니다.






  어느 곳을 바라보든 내가 바라봅니다. 어떤 사람을 바라보든 내가 바라봅니다. 나는 내가 바라본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는 내가 마주한 삶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버마 정부는 이를 묵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잔혹한 학살을 돕고 있다. 버마 정부는 로힝야 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저널리스트는 물론 외국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이들의 눈을 피해 촬영을 계속해 왔다. 그러다 몇 번 체포되기도 했는데 그러면 버마에서 추방당한다. 다행히 버마 경찰 안에도 온건파가 있어 무사히 풀려나기도 하지만(81쪽/수텝 크립사나바린).”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버마 정권’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누군가는 ‘미얀마 정권’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어느 한쪽에 서야 올바른 모습을 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버마’를 그리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독재이든 아니든 ‘미얀마’라는 새 이름이 붙은 나라에 녹아들며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정치권력은 다르지만 같은 하늘을 등에 지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그곳에서 수수하게 삶을 잇습니다.




  “일곱 살짜리 아들이 묻는다. 바닷가에서 잡아온 집게는 죽어서 어디로 갔느냐고. 아들의 생애 최초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변기에 버렸다고 답한다(97쪽/강홍구).” 같은 이야기를 읽다가 우리 집 아이를 떠올립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 ‘형이상학적 질문’을 했을까요? 이는 오로지 어버이 눈길이자 생각입니다. 아이는 그저 궁금해서 물을 뿐입니다. 어버이는 아이가 궁금해서 물은 말에 제대로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이가 궁금한 대목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그저 ‘궁금할’ 뿐이지만, 어버이는 ‘달리 보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사진을 찍는 눈길로 보자면, 사진은 늘 바라보는(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이와 어버이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니, 아이와 어버이는 똑같은 일을 겪어도 서로 다르게 움직이고 생각합니다. 강홍구라는 분은 강홍구 님 눈길대로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생각이 고스란히 강홍구 님 사진이 될 테지요.


  “늪에는 생명 탄생의 비밀이 숨어 있어요. 생명체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자연과 동화될 수 있는 터미널 같은 곳이죠. 황폐해진 도시를 벗어나 회색빛에서 녹색빛으로 장면전환을 하듯 죽음과 삶, 전쟁과 평화처럼 서로 상치되는 접경지대 같은 탈출구가 늪인 것 같습니다(106쪽/조성제).”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 늪을 바라보는 조성제 님 눈길을 엿볼 수 있습니다. 조성제 님은 조성제 님 삶에 따라 늪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다른 사람 눈길이 아닌 바로 조성제 님 눈길입니다.





  이제 4대강사업은 엄청난 막개발이요 돈날림 막삽질인 줄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4대강사업을 밀어붙이던 지난날 이 4대강사업에 빌붙어 돈을 벌거나 이름을 얻은 이들이 무척 많습니다. 차윤정 같은 이들은 4대강사업에 한몸을 실으면서 냇물과 숲과 마을이 무너지는 일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은 지난날 ‘막삽질을 꼭 해야 냇물과 숲과 마을이 산다’는 말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똑같은 일을 놓고 누구는 왜 이렇게 보고 누구는 왜 저렇게 볼까요?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 하고 뻔히 알 수 있는 일이라는데, 왜 누구는 앞일을 내다보지 않거나 잘못 내다볼까요?


  삶이 다르기에 눈길이 다릅니다. 삶이 다르기에 ‘삶을 읽고 찍으며 헤아리는 마음’이 다릅니다.


  아주 마땅한 이야기인데, “뻘이 있는 어촌으로 사진 여행을 떠나려면 일출, 일몰 시간과 함께 썰물과 밀물 시간도 미리 알아두어야 합(128쪽/황성찬)”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를 미리 알아야 합니다. 바닷마을로 사진을 찍으려고 나들이를 간다면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무엇을 모르면 사진을 잘 못 찍을까요?




  스스로 생각해서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해서 알아낸 만큼 스스로 사진을 더 즐겁게 찍거나 더 엉성하게 찍습니다. 일본말을 모르는 채 일본에 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과 일본말을 잘 익힌 채 일본에 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얼마나 다를까요? 중남미에서 쓰는 말을 모르는 채 중남미에 가는 사람과 중남미에서 쓰는 말을 익힌 채 중남미에 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얼마나 다를까요? 시골에 가서 사진을 찍으려 하면서 시골이 어떠한 곳인지 하나도 안 알아본 사람과 찬찬히 알아본 사람은 저마다 어떻게 다른 사진을 찍을까요?


  “누가 찍어도 사진일 때에는 사진입니다. 누가 찍어도 사진이 아닐 때에는 사진이 아닙니다. 이름난 전시장에 작품을 걸거나 작품집을 책으로 묶어야 ‘작가’나 ‘프로’가 아닙니다.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고, 삶을 가꾸면서 이야기를 꽃으로 피울 때에 작가입니다(137쪽/최종규).”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입니다. 삶은 그저 삶입니다. 사랑은 그저 사랑입니다. 더 나은 사진이나 삶이나 사랑은 없습니다. 덜떨어지는 사진이나 삶이나 사랑은 없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일구는 삶만큼 사진이 태어납니다. 나 스스로 어떤 사랑으로 삶을 일구느냐에 따라 내 사진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랑으로 하루를 짓는가요? 어떤 사랑을 담아 삶을 지어서 사진을 이루려는 생각입니까? 4347.12.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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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교본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배수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88



사진기를 어떤 마음으로 쥐는가

― 전쟁교본, 사진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엮음

 이승진 옮김

 한마당 펴냄, 1995.5.3. (2011년 2월에 다시 나옴)



  우리 집 큰아이가 아직 첫돌이 되지 않았을 적을 떠올립니다. 여섯 달 즈음이던 큰아이는 아버지 사진기를 만지작거리며 놀았습니다. 일곱 달 즈음에는 혼자서 사진기를 켰고, 여덟아홉 달 즈음에는 두 손을 덜덜거리면서 사진기를 들고는 찰칵 하고 찍었습니다. 첫돌조차 안 된 아기로서는 사진기를 두 손으로 들며 찍기 퍽 어렵습니다. 손가락이 안 닿기 때문입니다. 첫돌 즈음에는 머리 위로 사진기를 들어올리면서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는 어버이한테서 태어난 아이는 어릴 적부터 사진기가 익숙합니다. 사진기는 아이한테 놀잇감입니다. 이를테면, 지난날에는 사람들 누구나 시골에서 살았고 거의 모든 사람이 시골지기였기에, 지난날에는 아이라면 누구나 호미가 놀잇감이고 서너 살 즈음 되면 낫도 놀잇감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날에는 예닐곱 살에도 지게를 지고 싶어서 만지작거리고 열 살 언저리에는 ‘내 지게’를 아버지나 할아버지한테서 선물로 받았어요.


  아기 적부터 사진기를 만진 아이는 ‘한글’을 모르면서도 디지털사진기를 솜씨 있게 만집니다. 우리 집 큰아이는 두 돌이 될 즈음부터 디지털사진기를 만지작거리면서 ‘찍은 사진 들여다보기’를 할 줄 알았고, 사진기를 워낙 놀잇감으로 좋아하기에 조그마한 디지털사진기를 따로 장만해서 선물로 주었더니 ‘동영상 찍기’를 스스로 찾아내었어요. 이때부터 큰아이는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는 몸짓을 스스로 동영상으로 담으면서 놉니다. 아버지가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서 마실을 다니면, 큰아이는 샛자전거에 앉아서 한손에 디지털사진기를 들고 ‘바람을 찍’고 ‘구름을 찍’습니다. 나무를 찍기도 하고 풀과 꽃을 찍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식구는 시골마을에서 살거든요. 아이와 어른이 늘 마주하거나 바라보는 바람과 구름과 나무와 풀과 꽃이 큰아이한테는 가장 가깝거나 살갑거나 반갑거나 사랑스러운 ‘사진감’이 됩니다.





- 스페인 해변. 뭍에서 나와 돌 많은 바닷가로 올라서면 여인들은 자주 발견한다네. 팔과 가슴에서 묻어나는 검은 기름을. 가라앉은 선박들의 마지막 흔적을.

- 그대, 신의 아름다운 창조물을 갖겠다고 신발이 벗겨지도록 미친 듯 치고받는 저 신사 분들. 서로들 더 잘났다고, 더 잔혹하다고 뽐내며, 그대를 강간할 권리를 더 갖겠다고 저러는 거라오.



  우리 집 큰아이는 2015년이 되면 여덟 살입니다. 이 아이는 사진기를 갖고 놀면서 한 가지를 알아차립니다. 아이가 담고 싶은 모든 것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고 알아차려요. 사진기로 동생도 찍고 어머니와 아버지도 찍습니다. 이웃도 찍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찍습니다. 곧 여덟 살을 맞이할 아이한테 사진기는 ‘모든 것을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담도록 돕는 재미난 놀잇감’입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님은 시를 쓰고 사진을 함께 엮어서 1955년에 《전쟁교본, 사진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라는 사진책을 선보입니다. 한국에서는 1995년에 처음 나오고, 2011년에 다시 나옵니다. 책이름에 드러나듯이, 베르톨트 브레히트 님은 ‘사진이 저지르는 거짓말’을 ‘시’라는 문학을 빌어서 넌지시 밝힙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찍는 기록’이라는 이름을 받는 사진이지만, 이러한 이름과 달리 사진은 ‘거짓말을 하는 전쟁교본’이라고 살그마니 꾸짖습니다.


  참말 사진은 거짓말을 할까요? 참말 사진이 하는 기록은 거짓말일까요? 참말 사진은 전쟁에 이바지를 하거나 전쟁을 터뜨리는 구실을 맡을까요?


  사진책 《전쟁교본》에 나오는 여러 ‘우두머리(독재정권 지도자)’를 들여다보면, 사진은 거짓말도 할 수 있다고 알아차릴 만합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하려는 이는 사진기를 손에 쥐면 사진기로 거짓말을 합니다. 전쟁을 일으키려는 사람은 철공소에서 쇠붙이로 낫이나 호미를 만들지 않고 장갑차나 미사일이나 총알이나 비행기 따위를 만듭니다. 전쟁을 일으키거나 부추기려는 사람은 연필을 쥐어 종이에 글을 쓸 적에 ‘천황 만세!’라든지 ‘종군위안부가 되어라!’라든지 ‘카미카제가 되어 목숨을 바쳐라!’ 따위를 외칩니다.




- 오, 그대, 자식 걱정에 애태우는 여인이여! 우린 당신이 사는 도시 위로 온 사람들. 우리에겐 당신과 당신의 아이들이 목표였다오. 왜냐고 묻는다면, 알아주오. 공포 때문이었다는 걸.

- 한 해변이 붉은 피로 물들어져야 했다. 일본, 미국, 그들 누구의 것도 아닌 해변이. 그들은 말한다. 서로 죽이라 강요받았다고. 그래, 나는 믿는다, 믿고 말고. 그러나 딱 하나 물어 보자. 누구로부터?



  온누리를 티없이 바라보려고 하는 어린이가 사진기를 손에 쥐면, 이 아이는 사진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사진기로 삶을 지어서 놉니다. 어린이는 스스로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온누리를 휘어잡아 독재정권 문어발을 더 뻗으려는 어른이 사진기를 손에 쥐면, 이 어른은 사진으로 거짓말을 합니다. 전쟁에 미친 어른은 전쟁을 부르짖고 싶어서 사진기를 내세웁니다. 전쟁에 미친 어른은 총칼을 앞세워 사진가한테 ‘사람들이 전쟁에 나설 수 있도록 거짓 사진’을 찍으라고 시킵니다.






- 르포사진이 눈부시게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술은 세상을 지배하는 상황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 사진은 부르주아의 수중에서 진실에 ‘역행하는’ 공포스러운 무기가 되어 있다. 매일 인쇄기가 뱉어내는 엄청난 양의 사진자료들은 진실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실의 은폐에만 기여해 왔다. 사진기 역시 타이프라이터처럼 거짓말을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예전 대통령 한 분이 밀어붙인 4대강사업은 자그마치 22조 원이나 허투루 쏟아부은 바보짓이라고 드러났습니다. 이런 바보짓 이야기는 4대강사업을 밀어붙인 대통령이 물러나고 나서야 ‘예전에 4대강사업을 부추기면서 아주 훌륭한 정책이라고 외친 신문과 방송’까지 한목소리로 털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을 함부로 밀어붙인 대통령한테 22조 원을 뱉어내라고 하는 목소리나 움직임을 찾아보기 힘들고, 이런 정책을 함께 머리를 맞대어 밀어붙인 지식인과 교수와 기자와 공무원한테 잘못을 묻는 목소리나 움직임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지난 몇 해 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지난 몇 해 동안 한국 사회 글·그림·사진은 어떤 일을 벌였을까요. 이들은 글과 그림과 사진으로 사람들한테 ‘참말’을 밝히거나 보여주었을까요, 아니면 ‘거짓말’을 감추거나 꾸몄을까요.


  《흐르지 않는 강》(눈빛 펴냄,2014) 같은 사진책이 나오고, 《4대강 사업과 토건 마피아》(철수와영희 펴냄,2014) 같은 이야기책이 나옵니다. 이에 앞서 《나는 반대한다》(느린걸음 펴냄,2010)라든지 《4대강 X파일》(호미 펴냄,2011)이라든지 《강은 흘러야 한다》(미들하우스 펴냄,2009) 같은 책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4대강에 부가 흐른다》(국일증권경제연구소 펴냄,2009) 같은 책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참말을 쓸까요. 아니면 거짓말을 쓸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참말을 보여줄까요. 아니면 거짓말을 보여줄까요.


  사진기를 어떤 마음으로 쥐는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사진기는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말을 합니다. 사진기는 스스로 비틀기나 감추기를 하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스스로 비틀거나 감춥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자르기(트리밍)를 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 필름이나 파일에서 어느 대목을 숨기거나 지웁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필름이나 파일에 어떤 모습을 슬그머니 끼워넣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사진을 찍는 사람이 거짓말을 할까요? 사진을 읽는 사람도 왜 거짓말을 고분고분 받아들일까요? 《전쟁교본》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를 되읽습니다. 





- “여보게 형제들, 지금 무얼 만들고 있나?” “장갑차.” “그럼 겹겹이 쌓여 있는 이 철판으론?” “철갑을 뚫는 탄환을 만들지.”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왜 만들지?” “먹고살려고.”



  전쟁은 독재정권 우두머리가 일으킨다고 하지만, 전쟁에 나서는 사람은 바로 ‘우리’입니다. 전쟁무기는 우두머리 한 사람이나 전쟁을 꾀하는 몇몇 장군과 정치꾼이 만들지 않고 바로 ‘우리’가 만듭니다. 우리는 왜 총칼을 손에 쥐면서 군인이 되거나 공장에서 전쟁무기를 만들까요? 바로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먹고살아야’ 한다면서 전쟁 꼭둑각시가 되거나 허수아비나 총알받이가 됩니다. 우리 스스로 힘이 없다고 여기기에 전쟁 수렁에 빠지고, 개발바람에 휩쓸립니다.


  입시지옥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정부에서 정책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우리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밀어넣기 때문입니다. 입시지옥에 씩씩하게 맞서고, 전쟁무기 만드는 공장과 전쟁을 부추기는 언론과 정책에 야무지게 손사래를 칠 때에 비로소 ‘거짓말’이 꽁무니를 뺍니다. 대통령 한 사람을 바꾸기에 바뀌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삶을 새롭게 바꾸면서 아름답게 지을 때에 바뀌는 삶입니다.


  《전쟁교본》이라는 사진책은 ‘시’라는 노래를 빌어 사진이 일삼는 거짓말을 까밝힙니다. 그러니까, 사진은 거짓말을 일삼을 수 있지만, 우리가 스스로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마음이 되면, 언제나 기쁘며 멋진 ‘참말’로 삶을 지을 수 있는 사진이 될 수 있습니다. 사진이 어느 쪽으로 나아갈는지, 어느 길에 서는 사진이 즐거울는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4347.1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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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4.11 - Vol.12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93



사진잔치를 하는 곳

― 사진잡지 《포토닷》 12호

 포토닷 펴냄, 2014.11.1.



  서울과 대구에서 사진잔치를 엽니다. 강원도에서도 사진잔치를 엽니다. 사진과 얽힌 큰잔치가 하나둘 태어납니다. 한국에서 사진을 찍는 이들이 빚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사진잔치에 걸리고, 이웃나라에서 사진을 찍는 이웃이 엮은 고운 노래가 사진잔치에 찾아옵니다. 그런데, 한국 곳곳에서 열리는 사진잔치 이야기를 듣거나 자료집을 보면 으레 한 가지 아리송한 대목이 있습니다.


  사진잡지 《포토닷》 12호를 읽습니다. 사진비평을 하는 진동선 님이 “이론과 실기 모든 측면에서 아마추어들의 실력이 전공자들의 수준에 이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사진의 문화는 사진 전공자를 위한 프로만의 장과 공모전 중심의 취미를 위한 아마추어의 장으로 완전히 이분화되어 있다(82쪽/진동선).”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 이야기마따나, ‘사진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끼어들 틈이 없는 사진잔치가 열리는구나 싶어요. 사진을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모이는 사진잔치가 아니라, ‘전문 사진가’가 엮은 작품을 내걸면서 이러한 작품을 사람들한테 내보이거나 알리는 자리처럼 사진잔치가 이루어지는구나 싶어요.


  한국에서 열리는 책잔치도 이와 비슷합니다. 한국 곳곳에서 열리는 책잔치는 잔치라기보다 ‘책장사’이기 일쑤입니다. 책잔치에서도 책을 사고팔기 마련이지만, 장사판을 넘어서는 잔치마당으로 어우러지지 못합니다. 책을 쓴 사람과 책을 엮은 사람이 책을 읽는 사람과 어우러지는 자리가 아주 드물어요.


  사진잔치는 어떠할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얼마나 사진잔치에 함께 할까요? 사진을 읽는 사람이 얼마나 사진잔치에 함께 할 만할까요? 사진책을 내는 사람들은 사진잔치에서 얼마나 자리를 얻어서 이야기를 꾸릴 만할까요?





  “사진은 오직 작가가 만들어낸 순연한 결과물일까. 대부분의 현대사진은 사진의 힘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면서 새로운 변화를 제시하거나, 연극의 퍼포먼스를 옮겨오기, 이미지를 낯설게 배치하고 조작하기, 지금-여기의 공시적 공간을 기록하는 등 사진의 의미를 찾아나서는 관객에게 많은 코드를 제시해 왔다(58쪽/최연하).”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읽습니다. 최연하 님 말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현대사진’은 ‘퍼포먼스’처럼 보입니다. ‘이미지 낯설게 배치하거나 조작하기’를 넘어설 만한 사진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사진을 찍는 사진’이란 어디에 있을까요?


  “두 달 뒤인 5월에 쓰나미 지역을 갔었는데, 그때 느낀 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지면에서 올라오는 그 장소에 있었던 생활 그리고 그곳에 살았던 사람의 기척이었어요(36쪽/미연).”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일이란 삶을 찍는 일입니다. 퍼포먼스를 찍는다면 퍼포먼스도 우리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마치 퍼포먼스와 같으니, 현대사진은 자꾸 퍼포먼스로 나아가지 싶어요. 텔레비전과 손전화가 사람들을 휘어잡으니, 이러한 얼거리에 따라 사진가도 똑같이 퍼포먼스를 하려 드는구나 싶어요.




  그렇지만, 도시를 떠나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시골을 떠나는 사람이 아직 훨씬 많으나,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는데에도 도시를 떠나는 사람이 꾸준히 늘어납니다. 대학 교육도 받고 전문 일자리를 누리면서도 도시를 떠나는 사람이 꽤 많아요. 그러면, 이러한 모습을 슬기롭게 바라보면서 사진으로 찍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러한 사람들 모습과 이야기와 삶과 사진을 엮는 사진잔치는 언제쯤 태어날 수 있을까요?


  “지도 위의 한 줄이 하나의 인생을 얼마나 바꿔 놓을 수 있을까? ‘변경/한국’은 북한의 평양, 남한의 서울에서 찍은 사진 두 장을 나란히 병치해 야기되는 모든 종류의 가능성을 고려해 보려는 프로젝트이다(78쪽/유스케 히시다).”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남녘과 북녘은 참으로 다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도시와 시골이 참으로 다릅니다. 더욱이, 서울에서도 이곳과 저곳이 참으로 다릅니다.


  남·북녘을 가로지르는 사진 못지않게, 한국 사회는 둘로 쪼개어진 채 시름시름 앓습니다. 서로 아끼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설 자리가 좁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진에서 어떻게 담아낼까요? 이러한 이야기는 퍼포먼스로 보여줄 수 있을까요?





  “너무나 찬란한 계절 가을이다. 20층 아파트 베란다에 나가 멀리 북한산이 바라보이는 풍경을 주시한다(115쪽/조광제).”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도시에서도 가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도 하늘을 바라보면, 또는 한국 어디에나 있는 멧자락을 마주하면, 가을도 겨울도 봄도 여름도 모두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꼭 지리산이나 오대산이나 설악산이나 금강산이나 백두산에 가야 ‘멋진 가을빛’을 담지 않습니다. 아파트 옥상이나 20층에서도 가을빛을 담을 수 있습니다. 굳이 ‘멋진’ 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찍으면 됩니다. 이야기를 엮으면 됩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면 됩니다.


  그러니까, 현대사진에 없는 한 가지는 이야기입니다. 현대사진에 퍼포먼스가 있고, 비틀기나 뒤틀기는 있으나, 정작 이야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대 물질문명 사회에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없는 사회에 그대로 길들인 채 사진기만 손에 쥐면, 현대 물질문명 사회를 퍼포먼스로 그릴밖에 없어요. 이야기가 무엇인지 처음부터 모르고, 이야기를 처음부터 바라본 적이 없으니, 현대사진을 하는 젊은이는 그예 퍼포먼스와 비틀기와 뒤틀기로 예술을 할 뿐, 스스로 삶을 짓거나 빚어서 이야기로 꾸려서 보여주지 못합니다.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나 찍습니다. 사진은 온마음을 다해 삶을 사랑하면서 찍습니다. 이한구 님이 겪은 군대 이야기가 깃든 ‘군용’에도, 사진가 아닌 여느 군인이던 젊은 사내가 군대에서 끼리끼리 어울려 웃고 울며 찍은 ‘기록’에도 애틋한 삶이 흐릅니다(127쪽/최종규).” 같은 이야기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사진을 찍습니다. 군대에 가야만 군대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숲에서만 풀과 나무와 꽃을 찍지 않습니다. 골목동네에서도 나무와 꽃과 풀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우리 얼굴에서 꽃내음을 맡으면서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사진으로 담아야 할까요? 이야기를 담아야지요. 어떤 이야기를 담아야 할까요? 삶이라는 이야기를 담아야지요. 사진잔치는 어떻게 꾸리면 즐거울까요? 삶이라는 이야기를 담는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 오순도순 모여서 기쁘게 웃고 노래하면서 춤을 추는 아름다운 사랑으로 꾸리면 즐겁습니다. 4347.11.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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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정원
육영혜 지음 / 포토넷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 이 글은 사진잡지 <포토닷> 2014년 12월호에 실으려고 쓴 글입니다. 다음달 잡지에 실을 글인데, 이번에 이야기하는 이 사진책이 조금 더 빨리 눈길과 사랑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미리 글을 걸칩니다 ..


..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87



내 벗님은 사진벗, 삶벗

― 기억의 정원

 육영혜

 포토넷 펴냄, 2014.10.6.



  어버이한테서 제금을 나와 혼자 살 적에는 혼자 밥을 지어서 먹습니다. 혼자 집살림을 건사하고, 혼자 빨래를 하며, 혼자 집안을 치웁니다. 혼자 지은 밥은 혼자 수저를 들어 혼자 먹습니다. 혼자 살며 혼자 밥을 먹을 적에는 한 사람 몫만 차립니다. 이때에는 국이나 찌개를 끓인다든지 반찬을 마련할 적에 살짝 어설플 수 있습니다. 혼자 먹으니 많이 안 먹기 마련이고, 혼자 먹을 밥을 차리면서 남새를 쓸 적에 많이 남아서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살다가 둘이 살면 두 사람 몫 밥을 짓습니다. 예전과 다른 씀씀이가 됩니다. 밥을 짓거나 국을 끓일 적에도 두 사람 몫이고, 반찬도 두 사람 몫으로 합니다. 조금 넉넉히 밥을 지어도 그리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두 사람은 어느덧 사랑을 속삭여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가 하나 태어나면 젖먹이를 지나고 젖떼기밥을 거쳐 어른과 똑같이 수저를 들고 밥을 먹어요. 바야흐로 세 사람 몫 밥을 짓습니다. 이렇게 세 사람이 밥을 먹다가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네 사람 몫 밥을 짓습니다. 이제는 작은 냄비를 못 씁니다. 네 사람 몫 밥을 짓거나 국을 끓이자면 큰 냄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재미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잡지 일을 시작한 1년 동안은 “재미있다”라는 답을 건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질문에 “좋아한다”라고 답합니다 ..  (11쪽)



  네 사람이 먹을 밥을 날마다 끼니에 맞추어 짓자면 퍽 바쁩니다. 아침저녁으로 손을 쉴 겨를이 없습니다. 게다가, 아이들은 밥만 먹지 않아요. 개구지게 뛰놀지요. 아이들과 함께 놀아야 하며, 아이들한테 말과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신나게 뛰놀며 땀을 잔뜩 흘린 아이들을 깨끗이 씻겨야 하고, 아이들 옷을 바지런히 빨아서 말리고 개야 합니다.


  아이와 살면서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는 밥짓기가 아주 고단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끼니를 챙기고 샛밥이나 주전부리까지 챙겨야 하니까요. 그러나, 냠냠 짭짭 맛있게 잘 먹는 아이들 입놀림과 수저질을 볼 때면, 고단함은 말끔히 사라져요.


  늦봄부터 이른여름까지 시골집 처마 밑은 아주 부산스럽습니다. 어미 제비는 알에서 깬 새끼 제비를 먹이려고 하루에 수백 차례나 먹이를 물어다 나릅니다. 암제비와 수제비가 서로 갈마들며 먹이를 날라요. 애벌레와 나비와 잠자리와 날벌레와 풀벌레와 지렁이를 그야말로 쉴 틈 없이 나릅니다.


  해마다 제비집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생각합니다. 새끼 제비한테 먹이를 물어다 나르는 어미 제비 마음은, 아이들한테 밥을 지어서 먹이는 어버이 마음과 같으리라 느낍니다. 다시 말하자면, 잘 먹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버이는 새롭게 기운을 내면서 신나게 밥을 지을 수 있습니다. 잘 먹고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을 마주하는 어버이는 새삼스레 힘을 내고 빙그레 웃으면서 밥을 차려 먹일 수 있습니다.






.. 전시를 보기 위해 여러 전시 공간을 찾아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전시장이 위치한 주변 동네도 함께 돌아보게 됩니다 ..  (13쪽)



  《기억의 정원》(포토넷 펴냄,2014)이라는 조그마한 책을 봅니다. 1979년에 태어나 2013년에 숨을 거둔 육영혜라는 분을 기리는 조그마한 책입니다. 육영혜라는 분은 어떤 사람일까요? 사진 작가일까요? 아닙니다. 사진 비평가일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이녁은 어떤 사람일까요? 사진잡지와 사진책을 엮어서 내놓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사진잡지 《줌인》에서 취재기자로 일했고, 사진잡지 《포토넷》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습니다. ‘기억발전소’라는 곳을 세워 책·사진·전시가 어우러진 이야기를 꾸리는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조그맣고 얇은 사진책 《기억의 정원》을 찬찬히 넘기면서 읽다가, 한국에서 태어나는 사진책도 이처럼 작고 얇으면서 가볍게 엮어, 사진 즐김이가 값싸게 장만하도록 한다면 참으로 즐거우면서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책은 굳이 양장으로 꾸며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책은 얇고 단단한 종이를 써도 됩니다. 사진책은 조그맣고 앙증맞으면서 곱게 엮어도 됩니다. 꼭 커다랗게 보여주어야 사진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기쁘게 이야기를 나누도록 할 때에 사진책입니다. 삶에서 길어올리는 따사롭고 환한 이야기를 알뜰살뜰 꾸려서 꽃으로 피어나도록 이끌 때에 사진책입니다.




.. 일본의 대형 서점에서 찾은 사진·예술 전문 잡지들. 오랜 전통을 고수하며 변화의 시도를 머뭇거리는 잡지가 있는가 하면, 젊은 감성을 업고 신생한 잡지가 공존하고 있었다. 긴 생명력을 지닌 잡지와 새로운 조류를 반영하는 잡지, 언뜻 보기에 이 둘은 분명한 자기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 틈에는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가 작용한다 ..  (38쪽)



  작은 사진책 《기억의 정원》은 ‘사진 작가 목소리’나 ‘사진 비평가 목소리’가 아닌 ‘사진 편집자 목소리’를 엮습니다. 작가 눈길로 바라보는 삶이 아닌, 편집자 눈길로 바라보는 삶을 보여줍니다. 비평가 생각으로 북돋우는 사진 문화가 아닌, 편집자 생각으로 가꾸는 사진 문화를 이야기합니다.


  편집자는 이름이나 얼굴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 있습니다. 사진잡지뿐 아니라 문학잡지에서도 편집자는 이름이나 얼굴이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편집자는 작가를 끌어올리거나 이끄는 몫을 맡습니다. 지친 작가를 북돋우고, 고단한 작가를 다독이며, 어려운 작가를 돕는 구실을 맡습니다. 빙그레 웃는 작가와 어깨동무를 하며, 구슬피 우는 작가를 따숩게 얼싸안는 노릇을 맡습니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아, 사진길을 넓고 깊게 갈고닦는 일을 합니다.


  한참 《기억의 정원》을 읽다가 내려놓습니다. 우리 집 두 아이한테 밥을 차려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감자와 고구마와 단호박과 달걀을 함께 삶습니다. 무와 호박과 톳으로 국을 끓입니다. 아이들이 맛나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기억의 정원》을 읽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버이는 밥을 맛나게 먹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기쁘고, 사진가는 사진을 반갑게 즐기는 독자를 마주하면서 기쁩니다. 밥을 맛나게 먹는 아이가 있으니 어버이는 새롭게 기운을 내면서 살림을 꾸리고 삶을 짓습니다. 사진을 반갑게 즐기는 독자가 있으니 사진가는 새삼스레 힘을 내면서 문화와 예술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버이는 작가요 비평가이면서 편집자 몫을 모두 합니다. 편집자는 작가와 비평가를 독자한테 이어 줍니다. 편집자가 있기에 작가와 비평가는 모두 빛이 납니다. 편집자가 사이에서 따사롭게 보금자리를 돌보니 작가와 비평가는 한결 넉넉히 이야기를 가다듬습니다.





.. 일반적으로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느냐 아니냐, 전업 작가냐 아니냐로 아마추어와 프로를 구분하는데 이는 기존 제도에서 비롯된 형식적인 구분일 뿐, 작업에 임하는 태도와 작품의 내용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리고 사진 내에 다양한 전문 영역이 존재하는 만큼 예술 범주의 사진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전문성은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  (47쪽)



  육영혜 님이 걸어온 길은 사진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을까요? 한국에 사진이 들어온 뒤 이제껏 편집자 구실을 하면서 사진책을 엮고 사진잡지를 펴낸 이들 땀방울은 사진 역사에 발자국 하나 남길 수 있을까요?


  앞으로는 편집자 이름을 떠올리거나 그리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고, 앞으로는 사진 역사에 편집자 이름을 넣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편집자는 제 이름을 알리려고 사진을 살피면서 독자 사이에 다리를 놓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제 이름을 알리려고 아이를 돌보거나 키우지 않습니다. 삶을 가꾸는 기쁨을 누리니 밥을 짓고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처럼, 작가와 비평가와 독자가 서로 살가이 만나면서 사진으로 노래를 부르고 웃음꽃을 피우기를 바라는 편집자로 나아가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편집자 한 사람이 떠난 자리는 쓸쓸합니다. 내 사진을 보아 줄 편집자가 떠났기에, 내 글을 읽어 줄 편집자가 스러졌기에, 이 빈 자리가 아쉽고 허전합니다. 《기억의 정원》에 남은 이야기를 곰곰이 되읽습니다. 육영혜 님 말마따나 대학을 다녔느냐 안 다녔느냐, 또는 전업이냐 아니냐를 놓고 ‘작가인지 아닌지’를 가를 수 없습니다. ‘프로와 아마’를 가르는 일도 덧없습니다. 누가 찍어도 사진일 때에는 사진입니다. 누가 찍어도 사진이 아닐 때에는 사진이 아닙니다. 이름난 전시장에 작품을 걸거나 작품집을 책으로 묶어야 ‘작가’나 ‘프로’가 아닙니다.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고, 삶을 가꾸면서 이야기를 꽃으로 피울 때에 작가입니다.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와 삶을 가꾸는 이야기를 담은 사진을 찬찬히 살피고 헤아리면서 이러한 사진을 북돋우거나 이끌거나 아끼는 말 한 마디 보탤 수 있을 때에 비평가입니다.


  내 벗님은 사진벗입니다. 내 사진벗은 삶벗입니다. 육영혜 님은 작가와 비평가와 독자 모두한테 애틋한 사진벗이요 삶벗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이 떠난 길에 가을꽃 한 송이 바칩니다. 4347.11.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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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4-11-0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참 곱습니다.^^

숲노래 2014-11-08 13:29   좋아요 0 | URL
일찍 이 땅을 뜬 편집자 육영혜 님이 고운 삶이었기에
표지도 책도 곱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