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닷 Photo닷 2015.4 - Vol.17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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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04



사진은 ‘기록’일까?

― 사진잡지 《포토닷》 17호

 포토닷 펴냄, 2015.4.1.



  사진잡지 《포토닷》 17호(2015.4.)를 읽습니다. 《포토닷》 17호 끝자락에서 흐르는 “카메라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카메라 소형화의 촉매제가 되었던 것은 브라우니가 기존의 대형 카메라보다 성능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브라우니는 스튜디오에나 놓여 있고 복잡하기만 했던 카메라를 모든 사람들의 손에 들려 주었고, 쉽게 촬영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아무 데나 부담 없이 들고 갈 수 있게 해 주었다(123쪽/이철승).”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헤아립니다.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사람이 아니라면, 또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사람까지, ‘작고 가벼운 사진기’를 좋아하거나 즐깁니다. ‘크고 무거운 사진기’가 더욱 꼼꼼하면서 또렷한 모습을 보여주는 줄 모두 알지만, 덜 꼼꼼하고 덜 또렷하더라도 ‘작고 가벼운 사진기’가 두루 퍼집니다.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크고 무거운 사진기’를 안 쓰지 않습니다. 참말 돈이 없어서 ‘크고 무거운 사진기’를 안 쓰는 사람도 있지만, 크고 무거우면 번거롭거나 성가시거나 힘들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갓난쟁이를 업고 다니는 어머니가 ‘크고 무거운 사진기’를 갖고 다닐 수 없습니다.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뿐 아니라, 아기를 함께 돌보는 아버지도 ‘크고 무거운 사진기’를 들고 다니지 못합니다.


  어린이도 ‘크고 무거운 사진기’는 힘겹습니다. 몸이 여리거나 힘이 여린 사람도 ‘크고 무거운 사진기’는 벅찹니다. 손전화 기계에 달린 사진기를 쓰는 사람은 ‘사진을 모르’기 때문에 손전화 사진기를 쓰지 않습니다. 게다가, 손전화 사진기로 찍은 사진을 종이로 뽑는 사람도 많아요. 이른바 화질이나 해상도는 ‘크고 무거운 사진기’에 대면 어수룩하다고 할 만하지만,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왜 작고 가벼운 사진기를 쓰면서 ‘화질이나 해상도가 어수룩한 사진’을 종이로 뽑으면서 좋아할까요?


  수수께끼는 아주 쉽습니다. ‘사진은 기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여느 아마추어 사진가들처럼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 노력하고 단체로 출사도 다니던 시절도 있었지만, 뭔가 뻔한 일상이 되어 간다고 느꼈다. 아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천에 특별한 연고는 없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20여 년을 살다 보니 제2의 고향 같은 느낌이 있다(35쪽/석정).”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출사 다니기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출사도 ‘취미 생활’입니다. 취미 생활이 나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취미 생활을 넘어서면서 ‘새로운 삶’을 바라보고 싶다면, 출사를 그만두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삶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사진을 찍고 싶다면, 출사를 다닐 수 없기 마련이에요.


  “사진가 윤길중은 장애인들의 생활공간을 찾아 바닥에 한지를 깔고 그 위에서 한 명 한 명의 손과 발을 촬영했다. 부부는 손발을 함께 촬영하기도 했다. 중증장애인의 손발은 대부분 상처가 많고 뒤틀어져 이들이 가장 감추고 싶어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윤길중이 화면 가득히 보여주는 손발 사진은 여러 편의 사연을 함축한 서정시처럼 다가온다(39쪽/박정현).” 같은 이야기도 새겨 읽을 만합니다. 우리가 사진으로 못 담을 모습은 없습니다. 우리는 기록하려고 사진을 찍을 까닭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지으려고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는 이야기가 반갑고 재미있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는 사진으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려는 뜻으로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발표된 지 어언 1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충돌과 반동〉(2002) 시리즈는 작가 이갑철을 상징하는 작업이자, 지금의 이갑철을 있게 한 계기인 한편, 끊임없이 그에게 따라붙는 꼬리표로 작용한다 … 굳이 비유하자면 붉은 벽의 사진들이 로버트 프랭크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는 ‘침묵’에 해당한다면 회색 벽에 배치된 사진들은 마틴 파의 화법을 연상시키지만, 철저히 이갑철다운 방식으로 ‘낭만’을 이야기한다(73∼74쪽/이기원).”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되새깁니다. 이갑철 님이 찍은 사진은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까요? 이갑철 님 사진은 틀림없이 이갑철 님 사진입니다. 이갑철 님 냄새와 손길과 숨결이 깃든 사진이에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로버트 프랭크나 마틴 파 같은 사람들 이름을 떠올릴까요?


  사진을 찍으면서 ‘이야기’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기록’과 ‘작품’과 ‘예술’과 ‘문화’라고 하는 곳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이야기를 찍지 않으니 기록이 됩니다. 이야기를 찍으려 하지 않으니 작품으로 나아갑니다. 이야기를 찍으면서 나누려 하지 않을 때에는 예술이나 문화가 되어요.


  “한 마디로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필립 퍼키스가 사진을 가르치는 태도, 사진을 보는 태도는 너무 편안하다. 편하지만 어쩌다 들려주는 한 마디는 정확하고 날카롭다. 학교보다는 어떤 스승을 만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필립을 만나 내가 가진 가능성을 조금은 편안하게 펼칠 수 있었던 것 같다(96쪽/김수강).” 같은 이야기를 한국에 있는 대학교 강단에서도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아직 먼 일일는지 모르나,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분도 있을 테고, 이런 이야기는 아예 생각조차 않는 분도 있을 테지요.





  사진은 대학교에 가야 배우지 않습니다. 사진은 나라밖으로 떠나야 배우지 않습니다. 사진은 책을 뒤적이지 않아도 배웁니다. 사진은 뛰어난 스승을 찾아가야 배우지 않아요.


  사진은 늘 나 스스로 배웁니다. 모든 삶은 늘 스스로 배웁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 옷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주 전체가 패션이다(107쪽/김용호).” 같은 이야기마따나, 우리 삶 모두 ‘패션’이고 ‘사진’입니다. 우리 삶은 모두 사진으로 찍을 만하고, 사진으로 기쁘게 찍을 수 있습니다.


  “작품을 하려고 사진을 하지 않습니다. 기록을 남기려고 사진을 남기지 않습니다. 문화나 역사가 되려고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거나 읽으려는 우리는 늘 ‘삶을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어제와 오늘과 모레를 누리려는 사랑’을 가슴에 품습니다. 사진책 《예스터데이》가 반갑다면, 작품도 기록도 문화도 역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따사로운 사랑으로 내가 나를 마주하고, 이웃과 동무를 사귀며, 꿈을 작은 씨앗 한 톨로 심기 때문입니다(129쪽/최종규).” 같은 이야기를 찬찬히 되읽습니다. 이야기를 노래하면서 즐겁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함께 웃을 수 있으니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기를 내려놓아도 사진을 찍습니다. 마음으로 사진을 찍으면 돼요. 이름난 작가가 선보이는 전시회에 가지 않아도 돼요. 내가 찍은 사진을 내가 흐뭇하게 바라보면 되고, 내 이웃이나 동무가 찍은 사진을 서로 오순도순 이야기꽃 피우면서 들여다보면 됩니다.


  사진비평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온갖 ‘미사여구’와 ‘철학스러운’ 한자말과 영어를 섞어서 써야 비평이 되지 않습니다.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 비로소 비평이고, 이 비평은 ‘말’이면서 ‘이야기’입니다. 사진읽기와 사진찍기는 아주 쉽고 재미있습니다. 우리 삶은 저마다 다르면서 새롭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럽거든요. 4348.4.7.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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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레몽 드파르동 지음, 정진국 옮김 / 포토넷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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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91



사진기를 쥐고 길을 잃은 채 떠돌다

― 방랑

 레몽 드파르동 사진·글

 정진국 옮김

 포토넷 펴냄, 2015.3.15.



  사진기를 쥐고 길을 잃은 채 떠도는 사람이 많습니다. ‘출사’를 나가거나 ‘촬영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출사도 좋고, 촬영여행도 괜찮습니다. 출사를 다니기에 나쁠 까닭이 없고, 촬영여행이기에 궂을 일이 없습니다.


  사진마실(출사)은 시외버스나 기차를 타고 멀리 다녀올 수 있습니다. 비행기나 배를 타고 더 멀리 다녀올 수 있고, 여러 날 바깥잠을 자면서 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마실은 우리 집 마당에서 누릴 수 있고, 이웃집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면서 누릴 수 있습니다. 사진기를 목에 걸고 자전거마실을 다닌 분이라면 잘 알 텐데, 사진기를 목걸이처럼 대롱대롱 흔들면서 자전거를 달리다 보면, 사진으로 찍을 만한 재미나고 예쁘며 멋진 모습이 끝없이 찾아옵니다. 도무지 자전거를 달릴 수 없습니다. 가다 서고, 또 가다 서면서 자꾸자꾸 새로운 모습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 우리는 현실 대신, ‘정보’라든가, ‘기록’이라는 말이나 내세우며 방패막이로 삼기나 한다. 아무튼, 그래서 사진 찍는 재미가 훨씬 크겠지만 … 나는 무서운 사건을 찍을 줄은 알았지만,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접근하거나, 화젯거리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찍기를 겁냈다. 그럴 엄두를 못 냈다 … 사진기자로서 너무 주제와 가까이 있었다가, 나중에는 자유로운 사진가로서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렸다 … 더는 사진기자가 아니고 그렇다고 사진예술가도 아니다. 그냥 사진가다 ..  (9, 11, 28, 42쪽)





  레몽 드파르동 님이 ‘방랑’을 하면서 느끼고 생각한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엮은 《방랑》(포토넷,2015)을 읽습니다. 이 책에서는 ‘방랑(放浪)’이라는 한자말을 쓰는데, 이 낱말은 “딱히 어느 곳을 생각하지 않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기”를 가리킵니다.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길이 방랑인 셈이고, 생각나는 대로 걷는 길이 방랑인 셈이며, 그날그날 새롭게 떠나는 길이 방랑인 셈입니다.


  얽매이지 않고 다니기에 방랑입니다. 얽히거나 설키지도 않은 채 홀로 떨어지기에 방랑입니다. 남을 붙잡지 않고, 나도 남한테 붙잡히지 않는 걸음이기에 방랑입니다. 너 하나를 바라볼 까닭이 없이, 오직 내가 나만 바라보면서 나서는 길이 방랑입니다.


  떠도는 사람은 어느 한곳에 매이려 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곳에 매일 까닭이 없다고 할 텐데, 어느 모로 본다면 ‘머물지 않기’가 방랑이요, 어느 한곳에 마음을 두거나 기울이거나 쏟거나 바치지 않는 몸짓이 방랑입니다.


  마음 가는 대로 어느 곳이든 갈 수 있기에 방랑일 텐데, 이는 자유하고는 다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자유’는 ‘홀고 가볍게 사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홀가분함’이 자유입니다. ‘방랑’은 ‘떠돌기’입니다. ‘나그네’나 ‘떠돌이’가 방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방랑에서 나는 새로운 사진을 얻었다 …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어디론가 가는 것만으로 안 되고, 비행기 표만 쥔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방랑을 작심하고 돌아다녀서도 안 된다 … 가장 흥미로운 이미지는 좋은 사진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진에서 흔히 못 보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세상은 더욱더 똑같은 모습이 되어 간다. 마구잡이로 지은 건물과, 많은 것을 오염시키는, 있는 그대로 한 세상이 보인다 … 나는 항상 궁금했다. 내가 사랑에 빠지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신통치 않은 사진이나 찍게 될까 ..  (14, 16, 34, 70, 78쪽)





  떠돌아야 하는 사람은 머물 곳이 없어서 떠돕니다. 떠돌면서 지내는 사람은 머물 마음이 없으니 떠돕니다. 떠돌아서 더 좋지 않고, 머물기에 더 낫지 않습니다. 떠돌 적에 더 재미나지 않고, 머물 적에 더 재미있지 않습니다. 그저 다른 삶입니다.


  떠돌다가도 마음을 붙일 곳을 찾는다면 머물 수 있습니다. 한동안 떠돌기를 그칠 수 있습니다. 한곳에 마음을 붙이고 살다가도 떠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람이 흐르고 물결이 흐르듯이, 우리 마음도 흐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한곳에 고이지 않습니다. 한곳에 머물더라도 늘 흐르는 마음입니다. 한곳에 있으면서도 이곳을 늘 새롭게 바라볼 수 있기에 마음을 붙이면서 삶을 지을 수 있습니다.


  한곳에 있으면서 이곳에 마음을 못 붙인다면 무척 갑갑해서 이곳을 굴레나 쳇바퀴나 무덤으로 여길 만합니다. 떠돌더라도 이곳이든 저곳이든 마음이 닿지 않아서 마실길을 멈추지 못한다면, 이때에는 ‘떠도는 굴레’나 ‘떠도는 쳇바퀴’나 ‘떠도는 무덤’이라 여길 만합니다.


  길을 나선다고 하기에 늘 방랑이지 않습니다. 새롭게 길을 나서지 못한다면, ‘제자리걷기’와 마찬가지로 어디로든 못 가면서 몸만 이리저리 자리만 바꾸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수많은 나라를 다녀 보아야 사진을 더 잘 찍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나라에만 머물기에 사진을 잘 못 찍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을 사귀어야 사진을 더 잘 찍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더라도 사진을 잘 못 찍지 않습니다.



.. 행복을 좇아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 방랑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가능한 오래 ‘현재’를 살 수 있어야 한다 … 사람들이 왜 이야기할 때 항상 대중의 우상(아이콘)만 떠들면서 지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 나는 고발하러 찾아다니지 않는다. 비난하려고 찾아다니지도 않는다. 증명하려고 찾아다니지도 않는다. 여러분에게 내가 보는 방식을 보여준다. 내게 주어진 한때에 내가 보는 세계, 그 세계의 일부를 … 요즘, 사진가들은 배경에 별로 관심이 없다. 사람의 얼굴, 초상에 몰두한다. 매우 위험한 일이다 … 초상은 생활의 일면, 시간의 일면이다 ..  (38, 40, 86, 112, 158, 160쪽)




  이름난 곳에 다녀 보았기에 이름난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널리 알릴 만한 사건이나 사고를 코앞에서 마주보았기에 널리 알릴 만한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이름난 사람을 사진으로 찍었기에 이 사진이 이름날 만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사진입니다. 이름 안 난 곳에 다녔어도 이름을 날릴 만한 사진이 됩니다. 흔하다 싶은 일을 사진으로 담아도 널리 알릴 만한 사진이 됩니다. 시골에서 조용하고 수수하게 지내는 사람이라든지, 도시 한켠에서 조용하고 투박하게 살림을 꾸리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어도 크게 이름날 만한 사진이 됩니다.


  사진을 사진답게 찍을 때에 비로소 사진답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모습을 찍으면 그저 ‘그럴듯할’ 뿐입니다. 멋있어 보이게 찍는다면 그저 ‘멋있어 보일’ 뿐이지요. 이렇게 만지작거리거나 저렇게 꾸민다고 해서 사진이 빛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붙이거나 저렇게 자른다고 해서 사진이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사진 한 장에 담을 이야기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비로소 사진이 됩니다. 내가 걷는 길을 나 스스로 제대로 바라보고 느껴서 가슴에 담을 때에 비로소 ‘방랑(떠돌기)’이 되고, 이 방랑길에 사진 한 장 찍어서 이웃과 나누는 삶을 짓습니다.



.. 너무 쉬운 소형사진기로 찍고 싶지 않았다.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싶지 않았다 … 나는 나를 설명하고, 설명할 수 있어 좋다. 많은 사진가가 주제 뒤로 숨는다 … 나는 현실 속에 증인으로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연출하고 있었고, 현실에 개입했던 사람이다 … 사막에서는 촬영할 것이 거의 없다. 바로 이런 점이 엄청나게 참신하다 … 나는 움직이지 않고 한곳에서도 방랑할 수 있다. 항상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방랑할 수 있다 … 뭐든 그 사진을 주시하려고 그것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야 한다 ..  (104, 108, 126, 176, 178쪽)




  서울에서 해남까지 두 다리로 걸어야 방랑이 되지 않습니다. 서울 한켠을 조용히 거닐어도 방랑입니다. 인천부터 바닷가를 두루 거쳐 남해를 지나 강원도 고성까지 걷는다고 해서 방랑이라 하지 않습니다. 내 보금자리 작은 방에 드러누워 눈을 감고 그림을 그려도 얼마든지 방랑입니다. 커다란 사진기를 쓰기에 더 큰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사진기를 쓰기에 좁다란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마음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고 이 길을 걷는 숨결에 따라 사진이 새롭습니다.


  흑백사진이어야 더 눈부시지 않습니다. 무지개빛으로 찍는 사진이어야 더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진 한 장에 담을 이야기를 밝게 비추어야 눈부십니다. 사진 한 장에 넣을 이야기를 곱게 일구어야 아름답습니다.


  부엌에서 밥을 짓는 어버이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춥니다. 이 어버이는 좁은 부엌을 넓게 누리면서 밥을 짓고, 삶을 지으며, 살림을 지으니, 이 밥을 함께 먹을 아이들은 밥과 삶과 살림과 사랑을 물려받습니다. 기쁨으로 가득해서 활짝 웃습니다. 맑게 웃는 아이들 모습은 ‘경제개발과 산업화가 덜 된 나라’로 찾아가야 찍을 수 있지 않아요. 바로 ‘우리 집 부엌’에서도 얼마든지 찍을 수 있습니다. 낯선 아이를 찍어야 새로운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집 아이나 이웃 아이를 찍어도 얼마든지 새로운 사진이 됩니다. 마음이 새로울 때에 새로운 사진을 빚습니다.


  더 먼 길을 더 오래 걸어야 방랑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온누리를 뚜벅뚜벅 걷는 씩씩하고 다부진 숨결이 될 때에 방랑입니다. 사진책 《방랑》은 사진기를 손에 쥐고 이 땅을 씩씩하고 다부지게 밟을 ‘사진벗’한테 건네는 작은 선물입니다. 4348.4.4.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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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5.3 - Vol.16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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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03



저마다 사진에 담는 말

― 사진잡지 《포토닷》 16호

 포토닷 펴냄, 2015.3.1.



  사진잡지 《포토닷》 16호(2015.3.)를 읽습니다. 《포토닷》 16호는 새로운 해에 새롭게 찾아온 봄날을 엽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잡지 삼월호는 봄날을 열고, 잡지 유월호는 여름을 열며, 잡지 구월호는 가을을 엽니다. 한 해를 열두 달로 나누면, 석 달마다 새로운 철이 돌아오고, 석 달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자랍니다.


  “최근 지속적으로 불거지고 있는 수상작에 대한 사진 조작과 합성에 대한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월드프레스포토 재단은 올해도 새로운 규정을 마련했다. 지난해부터 최종 수상작에 대한 디지털 검증을 공식 선정과정에 포함시킨 데 이어 올해는 아예 카메라에 저장된 그대로의 원본 파일을 제출할 것을 의무 규정으로 정한 것이다(21쪽/이철승).”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읽습니다. 사진공모전에서 필름을 내야 한다면, 사진을 이리저리 만질 수 없었을 테지요. 그러나, 원판 필름이나 원본 파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찍히는 사람’과 몰래 이야기를 꾸밀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꾸며서 찍은 사진을 ‘꾸미지 않은 사진’하고 어떻게 가릴 수 있을까요? 꾸며서 찍은 사진과 꾸미지 않은 사진은 누가 알아볼 수 있을까요? 꾸미지 않기에 사진다운 사진이 되고, 꾸미기에 사진답지 않은 사진이 될까요?


  “사진을 전공할 때부터 작가로서의 자신을 사진가라기보다는 Visual Storyteller라고 생각했다. 어떤 매체를 사용하고 어떤 표현양식을 가지는가보다는 내가 어떤 얘기를 풀어내고자 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31쪽/차주용).”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요즈음은 ‘사진가’보다 ‘예술가’가 많습니다. 요즈음은 ‘사진기를 손에 쥔 예술가’가 대단히 많습니다. 그런데, 사진기를 쥔 예술가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립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니면서 사진밭을 기웃거리고, 사진을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사진밭에서 일거리를 찾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울타리(경계)를 허무는 모습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울타리가 없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어느 모로 본다면 제자리를 모르는 모습입니다. 제철을 모르고 제길을 모르는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사진을 안 꾸며야 하지도 않으나, 사진을 꾸며야 하지도 않습니다. 사진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사진은 ‘찍어야’ 할 뿐입니다. 사진은 ‘찍’되, 이야기를 찍어야 합니다.


  ‘만듦사진’은 좋은 사진도 나쁜 사진도 아닙니다. 만듦사진은 그저 만든 사진일 뿐입니다. 만들든 안 만들든,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패션사진이나 상업사진은 거의 모두 ‘만들’거나 ‘꾸며’서 찍지만, 이 사진을 모두 ‘사진’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달리, 이야기를 담으려 하지 않고 손짓만 하거나 포토샵으로 매만지기만 한다면 사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때에는 손짓이나 포토샵질이 되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예술은 그저 예술입니다. 문화는 그저 문화입니다. 삶은 그저 삶입니다. 사진도 언제나 그저 사진이기에, 사진은 예술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고, 예술도 사진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특별한 모델이 있거나 찾으려 하지 않으며, 내게는 모두가 훌륭한 피사체다 … 나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환경과 꿈을 공유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56, 63쪽/니콜라 앙리).”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니콜라 앙리라고 하는 분은 ‘이야기를 엮으’려고 오랫동안 살피고 생각한 끝에 한 장을 찍는다고 합니다. 이녁이 찍는 사진은 이야기를 드러내려고 수없이 만지고 살피며 ‘어떤 모습을 꾸미는 몸짓’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면 이녁이 하는 일은 사진일까요, 아닐까요. 예술일까요, 아닐까요. 삶일까요, 아닐까요. 이야기일까요, 아닐까요.


  “작가나 작품의 스타성에 의존하는 대형 사진전시를 보다 보면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저 작품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치부하는 것 같아서다(77쪽/이소민).” 같은 이야기를 찬찬히 되읽습니다. 대형 사진전시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부풀리는 사진전시는 으레 ‘스타성’에 기울면서 돈벌이에 많이 치우치다 보니, 어느새 ‘사진으로 이야기를 나누려는 기쁨’을 소홀히 하기 일쑤입니다. 대형 사진전시를 하더라도 ‘사진으로 이웃과 나누는 이야기’에 마음을 기울인다면, 대형 사진전시를 나무라는 말은 불거지지 않으리라 느낍니다.


  돈을 버는 일이 나쁠 수 없어요. 돈만 생각하니까 쓸쓸할 뿐입니다. 기쁘게 벌어서 즐겁게 나누는 돈이 아니라, 그저 쌓기만 하는 돈이 된다면 씁쓸할 뿐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 한 장으로 삶을 노래하는 기쁨을 나눌 수 있다고 느낍니다. 사진을 읽는 사람은 사진 한 장으로 사랑을 노래하는 즐거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참을 촬영하고 있는데 한 모녀가 옆에서 핸드폰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촬영해 달라고 했다. 이들을 찍어 준 후 내 카메라를 들어 보였더니 포즈를 취해 준다. 시간이 지나면 한몸이 과거와 미래로 나뉘겠지만, 현재는 둘로 나뉘어 외양의 아름다운 순간을 드러내고 있다.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딸의 신체는 분명 어머니의 부분이었으니 말이다(80쪽/남택운).”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사진이 흐릅니다. 네 사진을 내가 찍고, 내 사진을 네가 찍습니다. 낯선 사람이 찍어 달라는 사진을 한 장 찍어 주면서, 낯선 사람이 오늘까지 살아온 나날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이들이 걸어온 길과 오늘 선 자리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두 헤아립니다.


  “우리가 고민해 봐야 할 것은 과연 증명사진을 통해 한 개인의 성품이나 인상을 원하는 대로 보여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또한 각 직업군이나 기업마다 그에 적합한 사진 스타일이 존재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104쪽/이기원).” 같은 이야기를 읽다가 책을 살짝 덮습니다. 증명사진이 한 사람을 오롯이 보여줄 수 없다면, 다른 모든 사진도 한 사람을 오롯이 드러낼 수 없습니다. 사진관에서 찍는 증명사진뿐 아니라, 전문 사진가 여러 사람이 찍는 사진도 ‘한 사람 삶을 오롯이 밝히지 못한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우리는 새롭게 한 마디를 할 수 있습니다. 사진 한 장이 한 사람을 모두 보여줄 수 없지만, 사진 한 장이 한 사람을 모두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한 사람한테 깃든 숨결과 넋과 사랑과 꿈을 사진 한 장으로 찍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사진 한 장으로 한 사람을 모두 담아서 드러낼 수 있습니다.


  “누네마티는 여정 내내 혹여 아이들의 학교에서 모국어(위구르어)를 더 이상 교육받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서북공정을 위해 많은 한족들을 신장자치구와 티베트 등으로 이주시켰다. 학교에서는 아직까지 민족어와 북경어를 함께 가르치지만 머지않아 북경오로만 교육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언제부턴가 나돌고 있다고 한다(116쪽/이경택).” 같은 이야기는 먼 나라에서 터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서도 터지는 이야기입니다. 일제강점기에만 겪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사람들은 고장말을 잊거나 잃습니다. 학교교육이 널리 뿌리를 내리면서, 모든 마을에서 다 같은 교과서만 바라보아야 하니, 서울 표준말이 아니고는 말을 익히지 못해요. 이제 한국에서 부산말이나 광주말을 따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시골에서도 시골말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교과서와 책과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이 ‘다 다르던 말’을 ‘다 같은 말’로 바꾸어 놓습니다.


  다 다른 말이 다 같은 말로 바뀌면 어떻게 될까요? 모두 틀에 박힌 말이 될 테지요. 모두 틀에 박힌 말이 되면, 우리 삶은 어떻게 흐를까요? 모두 틀에 박힌 삶으로 흐를 테지요. 모두 틀에 박힌 삶으로 바뀌면 사진은 어떻게 될까요?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은 다를 테지만, 사진기에서 나오는 사진은 모두 틀에 박히고 말 테지요.



  “사진이론을 많이 익힌 사람은 사진이론에 맞추어 사진을 찍거나 읽습니다. 사진역사를 많이 살핀 사람은 사진역사에 맞추어 사진을 찍거나 읽습니다. 이론이나 역사를 따로 안 살피거나 거의 모르는 사람은 이론이나 역사에 맞추어 사진을 찍거나 읽는 일이 드뭅니다 … 아주 많은 사람들은 어느 사진 한 장이 어떤 사진기로 찍었는지 거의 모르거나 아예 안 살핍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 이름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회사 사진기로 얻은 사진인가?’는 사진읽기에서 대수롭지 않고 ‘누가 찍은 사진인가?’도 사진읽기에서 대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 어떤 사진을 찍든, 사진에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야기를 담기에 사진찍기요, 이야기를 느껴서 나누기에 사진읽기입니다(125∼126쪽/최종규).” 같은 이야기를 찬찬히 곱씹습니다. 이론이나 역사를 가르치기에 사진을 더 잘 알 수 있지 않습니다. 이론이나 역사를 가르치면 이론이나 역사를 더 잘 알 뿐입니다. 실기를 많이 가르치면 실기를 더 잘 알 뿐입니다. 답사를 자주 다니면 답사를 잘 알 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면서 배워야 할까요? 우리는 무엇을 나누면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요?


  우리는 삶을 보여주고 나누면서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사진에 담는 이야기는 언제 어디에서나 늘 삶입니다. 사진에 담는 삶이라는 이야기는 언제 어디에서나 늘 사랑입니다. 삶을 알고 사랑을 아낄 때에 비로소 사진을 알고 아낄 수 있습니다. 삶을 느끼고 마주하면서 따사로이 바라볼 수 있을 때에 바야흐로 사진을 제대로 느끼고 마주하면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책을 읽어야 똑똑해지지 않듯이, 더 많은 이론과 역사를 익혀야 사진을 잘 찍거나 잘 읽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르면서 아름다운 삶과 사랑을 기쁘게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거나 읽는 몸짓은 언제나 우리 삶과 사랑으로 그대로 나타납니다. 저마다 사진에 담는 말이란, 저마다 제 삶에 심는 사랑씨앗 한 톨입니다. 4348.3.16.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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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5.2 - Vol.15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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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02



남이 찍은 사진만 본다면

― 사진잡지 《포토닷》 15호

 포토닷 펴냄, 2015.2.1.



  사진잡지 《포토닷》 15호(2015.2.)를 읽습니다. 《포토닷》 15호를 보면 우리 사회가 사람들을 어떤 틀에 가두려고 하는 몸짓을 넌지시 나무라는 이야기를 살짝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여신의 두상에는 창의성을 말살하는 획일적인 미술교육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는 동시에 한국에서 부쩍 성장하기 시작한 성형산업으로 인해 맹목적으로 추종되고 학습되어지는 ‘이상적인 미’에 대한 고민도 함께 담겼다(이철승/27쪽).”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한국 사회에서 하는 미술교육을 보면 ‘베껴그리기’입니다. 내 그림을 그리도록 이끄는 미술학원을 찾아보기 아주 어렵습니다. 거의 모든 미술학원은 ‘입시학원’입니다.


  논술학원도 거의 다 입시학원입니다. 노래나 춤을 가르친다는 학원도 거의 다 입시학원입니다. 피아노학원이나 태권도학원 같은 데는 어떠할까요? 이런 곳은 입시와 살짝 동떨어졌다고 할 만하지만, 입시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억지스럽게 다녀야 하는 테두리에서는 엇비슷합니다. 마음껏 삶을 누리려고 하는 아이들이 기쁘게 다니는 학원은 참말 찾아보기 어려워요.


  한국에서 ‘사진기 있는’ 사람이 많고 ‘사진작가로 뛰는’ 사람이 많지만, ‘나다움’을 보여주거나 드러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저을 만합니다. 학교와 사회와 제도와 문화가 모두 틀에 박힌 곳에서 잔뜩 억눌리기 때문입니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 분들 역시 작품을 보고 그곳이 어린이대공원일 것이라는 생각은 못하시더라고요. 이처럼 늘 옆에 있고 일상적인 것이라 미처 관심을 주지 못하고 놓치는 것들이 있는데 저는 이런 것을 비현실적으로 보이는데 집중하려고 했어요(손준호/37쪽).”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우리가 사진으로 찍을 만한 모습은 늘 우리 옆에 있습니다. 아주 먼 데에 ‘놀라운 사진감’이 있지 않아요. 저 먼 나라에 간다든지, 적어도 일본이나 중국쯤 날아가야 ‘재미난 사진감’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집에도 재미난 사진감이 있고, 내 이웃과 동무가 날마다 일구는 삶이 놀라운 사진감입니다.


  내 옆을 볼 수 있어야 내 삶을 봅니다. 내 삶을 볼 수 있어야 내 옆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풍경을 신념과 이데올로기로 나누어진 체제로 만들고 바라본다. 그래서 풍경은 문화적 구조물이다. 풍경은 아름다운 의미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누군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런 명사이다. 만일 장군이 아니라 시인이 바라본다면 아무르는 ‘아빠’라는 의미로 전환될 수 있지 않겠는가(남택운/92쪽).” 같은 이야기처럼, 적잖은 사람들은 틀에 갇히고 굴레에 허우적거립니다. 아름다움을 스스로 일구지 못합니다. 남이 만든 틀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아름다운 줄 잘못 알기 일쑤입니다. 이름난 사람이 어느 것을 바라보면서 아름답다고 외치면, 모두 줄달음치듯 그곳으로 가서 ‘이름난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아름답다는 것’에 빠져듭니다.


  책에도 베스트셀러가 있고, 사진에도 인기작가가 있습니다. 책에서도 사람들이 스스로 새로움을 찾지 못하며, 사진에서도 사람들이 스스로 새로움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물꼬만 터주면 될성부를 사람을 만나면 충분히 대우해 주고 지원하려 한다. 돈을 깎지 않고 더 대접하면 그들도 흥이 나서 일하고 결과는 늘 풀러스 알파였다. 대기업의 이미지 광고를 촬영할 때에 나의 목표는 모델이나 촬영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해 주느냐는 것이다(준초이/104쪽).” 같은 이야기를 찬찬히 생각합니다. 우리들 누구나 ‘될성부른’ 사람입니다. ‘될성부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들 누구나 아름다운 싹이 마음속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싹을 스스로 틔우지 않았을 뿐입니다.


  학교교육을 바라보셔요.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꿈을 찾도록 도와주지 않아요. 학교교육에서는 다 다른 아이들이 ‘다 같은 시험점수’를 받도록 내몹니다.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꿈을 키우고 싶으나, ‘다 같은 교과서’만 들여다보도록 내몰아요. 다 다른 아이들은 그예 ‘다 같은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하고, 다 다른 아이들은 그만 줄서기를 해야 합니다. 스스로 무엇을 잘 할 만한지 모르는 채, 남들이 시키는 대로 휩쓸려요.


  이리하여, “대형전시는 객관적으로 작품을 선보인다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작품에 개입하는 경향을 보인다. 좀더 정확하게는 관객에게 작품감상의 방식과 작품에서 받는 인상과 감정까지도 ‘가이드라인’을 정해 두고 통제하는 모양새다. 그렇기에 어떤 대형 사진전에 가더라도 전시장 벽면에서 ‘감동’, ‘순간의 거장’, ‘이 시대 최고의 사진작가’와 같은 글자를 마주할 수 있다. 작가에 대한 신격화는 관객에게 작가나 작품에 대한 비평적, 주관적 감상을 거부하고 일관된 작품 감상법을 주입시킨다(이기원/117쪽).” 같은 이야기가 불거집니다. 왜 사람들은 ‘대형전시’를 보러 가야 할까요? 왜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가꾸는 사진잔치를 보러 가지 못할까요? 왜 사람들은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한 권조차 읽기 벅찰 만큼 바쁘게 살아야 할까요? 왜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짓도록 돕는 수많은 책을 골고루 읽고 누리면서 느긋하고 아름답게 살기 어려울까요?






  이제는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이제는 남이 시키는 일은 그만해야 합니다. 이제는 나비처럼 훨훨 날아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바라는 꿈을 키워야 합니다.


  “온누리를 티없이 바라보려고 하는 어린이가 사진기를 손에 쥐면, 이 아이는 사진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사진기로 삶을 지어서 놉니다. 어린이는 스스로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온누리를 휘어잡아 독재정권 문어발을 더 뻗으려는 어른이 사진기를 손에 쥐면, 이 어른은 사진으로 거짓말을 합니다. 전쟁에 미친 어른은 전쟁을 부르짖고 싶어서 사진기를 내세웁니다 … 왜 사진을 찍는 사람이 거짓말을 할까요? 사진을 읽는 사람도 왜 거짓말을 고분고분 받아들일까요(최종규/129∼131쪽)?” 같은 이야기마따나, 우리는 누구나 삶을 즐기려고 이 땅에 태어납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재미없습니다. 남을 속이려고 사진을 찍는 사람은 스스로 아슬아슬하며 조마조마합니다. 참말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참되게 섭니다.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려는 사랑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스스로 기뻐서 노래와 웃음이 저절로 터져나옵니다.


  내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내 눈길로 사진을 읽으면 됩니다. 내 삶을 가꾸면 됩니다. 내 하루를 손수 지으면 됩니다.


  남이 찍은 사진은 굳이 안 보아도 됩니다. ‘남’이 아닌 ‘이웃’과 ‘동무’가 찍은 사진을 보셔요. 그리고, 나 스스로 내 눈길로 사진을 찍어요. 내가 내 눈길로 찍은 사진을 이웃과 동무한테 보여주셔요. 그러면 됩니다. 사진문화와 사진예술은 먼 별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이야기가 사진문화요, 내 삶이 사진예술입니다. 4348.2.16.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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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터데이 - 추억의 1970년대 눈빛포토에세이 3
박신흥 지음 / 눈빛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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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91



바로 오늘, 처음 한쪽을 넘긴다

― 예스터데이, 추억의 1970년대

 박신흥 사진

 눈빛 펴냄, 2015.1.5.



  2015년을 한복판에 놓고 살피면, 마흔 해 앞서는 1975년이고, 마흔 해 뒤는 2055년입니다. 오늘 2015년을 사는 사람한테 1975년은 어쩐지 퍽 까마득한 지난날이 될 만하고, 2055년도 무척 까마득한 앞날이 될 만합니다. 나이가 마흔 살이 넘는 사람이라면 1975년이 애틋하게 그리운 날이 될 테고, 아직 서른 살이 안 되었거나 이제 막 열 살을 넘었으면, 1975년을 떠올리기는 몹시 어려울 테지만 2055년을 기다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이와 젊은이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넉넉하고, 아저씨(아줌마)와 어르신은 지나온 발자국이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1975년에 찍은 사진 한 장이 오래도록 애틋한 그리움이 됩니다. 누군가 2015년에 찍은 사진 한 장이 이날부터 2055년까지 살가운 그리움이 됩니다. 햇수를 더 먹기에 애틋하거나 살갑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 스스로 그리움을 사진에 싣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그리울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 스스로 아무런 느낌이나 이야기를 사진에 얹지 않는다면, 백 해나 이백 해가 흐르더라도 아무런 느낌이나 이야기를 길어올리지 못합니다.





.. 1970년대 그무렵의 사람들은 토속적인 사람의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먼 산의 풍경을 바라보듯 무심하면서도 정이 담겨 있었다. 그 시대의 이야기가 표정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  (10쪽)



  사진책 《예스터데이, 추억의 1970년대》(눈빛,2015)를 읽습니다. 《예스터데이》를 펴낸 박신흥 님은 1970년대에서 ‘추억’을 읽습니다. 왜냐하면 박신흥 님 스스로 그무렵에 사진을 찍으면서 ‘추억’을 가슴에 새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에 사진을 찍은 사람은 꽤 많습니다. 그러면 그무렵에 사진을 찍으면서 ‘1975년에 찍는 이 사진은 앞으로 추억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2015년 오늘 사진을 찍으면서 ‘2015년에 찍는 이 사진은 앞으로 추억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스무 해나 서른 해나 마흔 해를 묵은 사진이기 때문에 ‘추억’이 되거나 ‘어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어 찰칵 소리를 내도록 단추를 누르는 사람이 스스로 마음밭에 추억이라는 씨앗을 심기에, 이 사진 한 장이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거나 노랫가락이 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많습니다. 사진기는 지구별 곳곳에 널리 퍼졌습니다. 사진기는 수십만 대나 수백만 대가 팔렸고, 어쩌면 수천만 대나 수억만 대가 팔렸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많은 사진기로 저마다 어떤 사진을 찍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사진기가 수백만 대가 팔렸다면,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녁 삶을 사진으로 담는지요? 수백만에 이르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삶을 노래하면서 다 다른 이야기를 사진으로 얹어 ‘다 다른 사진책 수백만 권’을 지을 만한지요?





..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은 각기 자신만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고, 아이들의 꾸밈없는 모습을 사진에 담으며 나는 행복감을 느꼈다 ..  (15쪽)



  어제 태어나서 어제 살던 사람한테 오늘은 새로운 하루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루를 가꾸느라 바쁠 테니, 어제 하루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잊기 일쑤입니다. 오늘 하루를 누리느라 기쁘거나 신나거든요.


  오늘은 늘 모레로 나아갑니다. 오늘 사진 한 장을 찍으면, 이 사진 한 장은 ‘바로 오늘 찍’기 때문에 ‘바로 오늘’ 기쁨이 솟습니다. 지나간 모습을 찍기 때문에 기쁘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모습을 찍기에 벅차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함께 얼굴을 마주하면서 웃고 노래하는 살붙이나 이웃이나 동무를 찍는 사진이기에 기쁘면서 벅찹니다. 우리는 누구나 ‘오늘’을 찍으면서 오늘 하루가 아름답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모레에 이르면, 어느새 오늘이 새로운 하루입니다. 오늘이었던 하루는 모레로 가면 어제가 됩니다. 이리하여, 새로운 모레인 새로운 하루에는 어제 찍은 사진을 ‘새롭게 잊’습니다. 어제 찍은 사진을 ‘새롭게 잊’기 때문에, 오늘 하루에도 ‘오늘을 새롭게 마주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바로 이곳에서 새삼스레 찍습니다.


  그런데, 어제를 잊지 못하는 사람은 어제 찍은 모습에 얽매인 나머지, ‘오늘 이곳에서 바로 내가’ 찍을 사진을 그만 놓칩니다. 어제는 어제이고 오늘은 오늘이지만, 어제 찍은 사진이 너무 마음에 든다면, 앞으로(모레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 요즘은 사람을 주제로 한 사진을 찍기가 참 어렵다. 일일이 양해를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초상권 시비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  (34쪽)



  사진책으로 엮는 사진은 모두 ‘어제’ 찍은 모습이라 할 텐데, 어제 찍은 모습만으로는 책을 이루지 못합니다. 어제이면서 바로 오늘이요, 오늘이면서 새롭게 모레로 나아가는 모습일 때에 사진책을 엮습니다. 우리가 엮어서 함께 누리는 사진책은 ‘어제와 오늘과 모레가 하나되는 숨결을 담은 사진’을 그러모읍니다.


  사진책 《예스터데이》에는 틀림없이 1970년대 모습이 애틋하면서 아련하면서 사랑스럽게 흐릅니다. 그리고, 이 사진책에 깃든 모습을 2015년 바로 오늘 이곳에서 얼마든지 찍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박신흥 님이 1970년대 느끼거나 누린 ‘사랑스럽고 살가운 사람한테서 피어나는 따사로운 눈망울’을 2015년 바로 오늘 이곳에서 느끼거나 깨닫거나 알아본다면, 바로 오늘 이곳에서 찍는 사진은 앞으로 2055년으로 힘차게 달리는 ‘새롭게 사랑스럽고 새롭게 애틋하며 새롭게 살가운’ 사진이 됩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마흔 해쯤 뒤에 ‘짠!’ 하고 내놓아서 사진책으로 엮을 만한 사진을 오늘 찍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 찍은 사진을 마흔 해쯤 묵힌 뒤에 선보이면 ‘이야 놀랍네!’ 하고 느낄 만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하고 나눌 만한 사진이기에, 열 해 뒤나 스무 해 뒤나 마흔 해 뒤에도 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하고도 나눌 만한 사진입니다.





.. 현재라는 시간성 속에 묻혀 있는 삶의 발자국에는 잃어버린 내 모습이 있다 ..  (70쪽)



  사진은 늘 오늘을 찍습니다. 사진은 늘 모레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찍습니다. 사진은 늘 오늘을 찍는데, 사진에 찍힌 오늘은 곧바로 어제가 됩니다. 오늘을 찍은 사진은 곧바로 어제가 되지만, 어제가 되는 오늘 찍은 사진은 늘 모레로 나아갑니다.


  우리 가슴을 적시는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나 오늘과 어제와 모레가 한결로 흐릅니다. 어느 한 가지만 똑 떨어진다면, 이것은 ‘작품’은 될 터이나 사진은 못 됩니다. 어느 한 가지만 두드러진다면, 이것은 ‘기록’은 될 테지만 사진은 안 됩니다. 어느 한 가지만 생각해서 찍는다면, 이것은 ‘문화’나 ‘역사’는 될 테지만 사진은 될 수 없습니다.


  작품을 하려고 사진을 하지 않습니다. 기록을 남기려고 사진을 남기지 않습니다. 문화나 역사가 되려고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거나 읽으려는 우리는 늘 ‘삶을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어제와 오늘과 모레를 누리려는 사랑’을 가슴에 품습니다. 사진책 《예스터데이》가 반갑다면, 작품도 기록도 문화도 역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따사로운 사랑으로 내가 나를 마주하고, 이웃과 동무를 사귀며, 꿈을 작은 씨앗 한 톨로 심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처음 한쪽을 넘깁니다. 어제 넘기는 첫째 쪽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첫째 쪽을 넘기고, 이튿날 둘째 쪽을 넘깁니다. 날마다 한 쪽씩 신나게 넘깁니다. 지난 마흔 해에 걸쳐 꾸준하게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삶이기에 어느덧 사진책 한 권이 태어날 만합니다. 날마다 새롭게 꿈꾸고 사랑하는 하루이기에, 이러한 꿈과 사랑을 모아서 사진책 한 권으로 엮을 만합니다.


  아침에 동이 틉니다. 저녁에 노을이 지면서 해가 기웁니다. 달이 뜨고 별이 돋습니다. 다시 동이 트고, 또 해가 하늘에 걸리더니, 어느새 노을이 지면서 해가 이울다가, 새삼스레 달과 별이 찾아옵니다. 깊은 두멧시골에서는 미리내가 하늘을 밝힙니다. 아주 깨끗한 두멧자락에서는 온갖 빛깔로 눈부신 미리내가 하늘을 덮습니다. 오늘날 도시에서는 느끼기 어렵지만, 밤빛은 ‘까만 바탕에 박힌 하얀 점’이 아닙니다. 드넓은 알래스카나 시베리아나 몽골 같은 곳에서 바라보는 밤하늘빛은 무지개빛이라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서울이나 부산 같은 곳만 하더라도 달빛조차 느끼기 어려워요. 그래서, ‘무지개처럼 빛나는 미리내’를 맨눈으로 본 사람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그러면 밤무지개를 본 사람이 없으니 밤무지개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닐 테지요? 오늘 이곳에서 첫째 쪽을 넘기는 아름다운 사랑과 같은 사진을 찍은 사람한테는, 사랑은 손에 잡을 수 있고 마음밭에 씨앗으로 심을 수 있는 따사로운 숨결입니다. 우리 누구나 따순 바람이 되어 오늘과 어제와 모레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사진책 《예스터데이》를 가만히 어루만집니다. 4348.1.30.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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