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염소
오인숙 지음 / 효형출판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사진잡지 <포토닷> 2015년 6월호와 <오마이뉴스>에 함께 올리는 글입니다.


..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95



한손을 거들어 살림하면서 사진이랑

― 서울 염소, 사진으로 쓴 남편 이야기

 오인숙 사진·글

 효형출판 펴냄, 2015.5.1.



  집안일을 모두 하고, 집살림을 도맡으면서, 사진까지 신나게 찍는 사진가는 얼마나 있을까요?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살림꾼’이자 ‘사진가’인 사람은 대단히 드물리라 생각합니다. 평등이나 가사분업이라는 말을 헤아리더라도,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가시내가 집안일과 집살림을 맡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가시내가 집안일을 맡지 않으면 사내가 집안일을 맡아야 할 텐데, 씩씩하고 즐겁게 집안일을 맡으면서 아이를 돌보는 사내는 매우 드뭅니다. 한집에서 가시내와 사내가 모두 바깥일을 하거나 사진을 찍는다면, 아마 이 집에는 ‘집일을 돕는 일꾼’을 따로 두겠지요.



.. 동그란 밥상에 일곱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밥 먹던 시절이 있었다. 첫째는 씩씩하게 수저질을 하고, 쌍둥이 녀석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착 달라붙어 참새처럼 반찬을 받아먹고, 웃음꽃을 피워 가며 서로를 바라보던 시간. 그때 우리는 행복했을까 … 학교에서 급식을 시행하면서 정다운 점심시간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교사들도 급식을 이용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점심시간 외출마저 금지되었다 ..  (10, 14쪽)




  《윤미네 집》이라는 멋진 사진책이 있습니다. 이 사진책을 선보인 전몽각 님은 이녁 딸아이를 더없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면서 사진을 일구었습니다. 그런데, 전몽각 님은 집안일을 하거나 아이를 보살피면서 키우는 몫은 맡지 않았습니다. 딸아이가 자라는 긴 나날 가운데 아주 조그마한 토막을 바라보면서 ‘작은 토막 같은 나날’에서 ‘구슬처럼 빛나는 삶자락’을 잡아채어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사진책 《윤미네 집》을 읽을 적에는 두 가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 전몽각 님이 바깥일이 대단히 바빠서 여느 날에는 아이들이 잠든 모습만 겨우 보았고, 주말에 겨우 짬을 살짝 내어 몇 장을 찍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토막토막 짧은 틈을 헤아리면서도 ‘구슬처럼 빛나는 삶자락’을 사진으로 여미었습니다. 바깥일에 바빴던 전몽각 님한테는 집에서 살짝살짝 바라보는 아이들 모습이 언제나 구슬처럼 빛납니다. 다음으로, 전몽각 님은 이녁 딸아이한테서 ‘보배처럼 사랑스러운 삶결’을 모두 바라보거나 느끼지 못했습니다. 전몽각 님이 아닌 전몽각 님 곁님인 ‘아이 어머니’가 이녁 딸아이를 사진으로 찍었으면, 사진책 《윤미네 집》하고 사뭇 다른 이야기가 흐르는 사진과 책이 태어났으리라 느낍니다.


  곰곰이 돌아보자면, ‘전업주부 사진가’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전업주부 작가(글 쓰는 사람)’는 제법 있으나, 이런 분도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전업주부 화가’라든지 ‘전업주부 예술가’는 몇 사람이나 될까요?




  집안일과 집살림을 도맡는다면,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리기만 해도 몹시 바쁩니다. 밥차림은 밥짓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먹을거리를 손수 지어서 거두든, 저잣거리에 마실을 가서 장만하든, 이래저래 품과 겨를이 많이 듭니다. 밥을 차리려면 먹을거리를 손질해야 하고, 밥을 다 먹은 뒤에는 치워야 하지요. 한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입는 옷을 빨래하고 건사해야 하며, 집 안팎을 늘 치우고 갈무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업주부 사진가’가 되기란 가시내한테나 사내한테나 몹시 어렵습니다. 그리고, ‘전업주부 사진가’가 된다면 이제껏 ‘전업 사진가’가 바라보는 눈길에서 크게 벗어나거나 새로운 눈길이 되어 삶을 읽는 사진을 선보일 수 있습니다.



.. 이사하기 며칠 전이었다. 열 살이 되어서도 잠들기 전이면 이야기를 해 달라고 칭얼대는 큰아이에게 곧 떠나게 될 이 집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들려주었다 … 나는 눈을 감고 그(남편)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굵은 목줄로 쇠말뚝에 매인 서울 염소 한 마리, 고개를 떨구고 사무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는다. 햇볕이 그립고 자유롭게 걷고 싶지만 보이지 않는 목줄이 더욱 그를 옥죈다 ..  (18, 41쪽)



  오인숙 님이 빚은 사진책 《서울 염소, 사진으로 쓴 남편 이야기》(효형출판,2015)를 읽습니다. 오인숙 님은 처음에는 교사로 일하던 삶이었고, 나중에 교사살이를 그만둡니다. ‘아주 전업주부’라고는 할 수 없을는지 모르나, ‘집안일과 집살림을 많이 맡는 가시내’입니다. 이렇게 집안일과 집살림을 거느리거나 건사하면서 한손에 사진기를 쥡니다.




  사진책 《서울 염소》에는 오인숙 님이 낳아서 돌본 아이들 모습이 흐르고, 오인숙 님과 함께 사는 곁님 모습이 나란히 나옵니다. 처음에는 오인숙 님하고 함께 사는 곁님 이야기만 책 하나로 엮으려 했다는데, 여러모로 길이 잘 트이지 않아서 이 책은 아이들 이야기와 곁님 이야기를 함께 묶었다고 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곁님 이야기만 담을 적에 ‘서울 염소’라는 이름에 걸맞게 ‘꿈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목이 매인 남편 삶자리’를 더 잘 들려줄 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이야기가 함께 깃들기에, ‘서울 염소’인 남편이 누구하고 어떤 곳에서 어떤 삶을 누리는가 하는 대목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목이 매인 ‘서울 염소’이지만, 회사(일터)에서 일을 마치면 ‘그리운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고, ‘매인 몸’을 따스히 안고 기쁘게 어루만질 아이들이 있어요. ‘서울 염소’가 서울 염소인 채 도시에서 회사일을 하면서 ‘죽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은 바로 이녁(남편)한테 곁님인 오인숙 님과 아이들입니다.




.. 그곳(시골)에 갈 때마다 남편의 병이 깊어지는 듯했다. 먹을 것 손수 농사짓고 살 곳도 스스로 만들어 보겠다 말하는 남편을 보며 복잡한 심경으로 눈빛이 흔들렸다 …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나는 남편에게 단 한 번도 혼자만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 아침마다 빛과 빛 사이로 조용히 산책을 갔다. 이곳에선 자그마한 산새의 노랫소리가 가장 큰 뉴스거리이다..  (108, 142, 157쪽)



  곁에 있는 님인 곁님입니다. 우리는 흔히 ‘남편’이나 ‘아내’라는 말을 씁니다만, ‘남편·아내’라는 낱말을 한국사람이 쓴 지는 얼마 안 됩니다. 예전에는 따로 부름말이 마땅히 없었다고 할 만한데, 오늘날 사회에서는 법률용어나 행정용어로 ‘남편·아내’를 쓰지만, 이런 이름을 한번 되짚어 보아야지 싶습니다. 한집을 이루어 보금자리를 가꾸는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일까요? 사랑으로 살림을 가꾸면서 이야기를 빚는 두 사람은 어떤 짝일까요?


  서로 아끼는 사이일 테고, 서로 헤아리고 보살피는 짝이겠지요. 서로 바라보는 눈길은 ‘하늘에 계신 님’을 마주하는 마음일 테며, 곁에서 따사로이 품고 안으며 돌보는 숨결일 테지요.



.. 쌍둥이 두 딸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사진으로 이해하려고 했듯이 남편에게 드리운 그늘을 이해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그러나 남편은 달랐다. 온갖 표정을 지으며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는 여자아이들과는 달리, 남편은 웃거나 화내거나 무표정한, 딱 세 가지의 얼굴뿐이었다 …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도 나는 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내가 어떤 상황에서 쉽게 화를 내고 좌절하는지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이 평화로우면 그는 나보다 열 배는 평화롭고, 내 얼굴에 그늘이 지면 그의 얼굴에는 열 배나 짙은 그늘이 진다는 것도 ..  (180, 184쪽)



  한손을 거들어 살림하면서 사진이랑 삶이랑 사랑을 가꿉니다. 한손은 집안에 즐거움과 기쁨이 감돌도록 힘을 씁니다. 다른 한손은 집안에 이야기꽃이 피어나도록 도란도란 말을 섞고 사진을 찍습니다.


  한손을 거들어 밥을 짓고 글을 씁니다. 한손은 너와 나 사이에 흐르는 꿈을 짓고, 다른 한손은 너와 내가 저마다 나아갈 사랑스러운 길을 닦습니다.


  사진이 있기에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진이 없어도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진을 곁에 놓고 이야기꽃을 피우니 삶을 즐겁게 밝힐 수 있습니다. 사진을 곁에 놓지 않더라도 마음자리에 이야기꽃을 그림으로 넉넉하게 그려서 담으면 삶을 기쁘게 북돋울 수 있습니다.


  사진으로 찍어서 갈무리한 이야기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웃습니다. 사진으로 찍지 않았어도 마음에 가득가득 아로새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노래합니다. ‘전업주부’로 일하는 수많은 어머니는 사진을 모르거나 사진기를 쥘 겨를이 없지만, 마음에는 언제나 사랑과 웃음과 꿈과 노래와 이야기가 흐릅니다. 아이랑 오순도순 놀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동안 사진 한 장을 함께 찍기에 더욱 즐겁습니다. 곁님이랑 도란도란 말을 섞고 살림을 보듬는 동안 사진 한 장을 살짝 찍기에 더욱 기쁩니다.


  눈물도 사진으로 찍고, 웃음도 사진으로 찍습니다. 슬픔도 사진으로 담고, 기쁨도 사진으로 담습니다. 아주 슬퍼서 차마 사진을 못 찍더라도, 이 기운과 느낌을 언젠가 다른 모습으로 사진으로 찍기 마련입니다. 아주 기뻐서 그만 사진을 못 찍더라도, 이 숨결과 마음을 머잖아 새로운 이야기로 사진에 담아요.


  함께 사는 사이인 터라 더 가까이 바라보면서, 때로는 가만히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한길을 걷는 사이인 터라 한 걸음 더 내딛으면서 손을 맞잡고, 때로는 어깨동무를 하며, 때로는 저마다 따로 다른 길을 가더라도 마음으로 생각하고 돌아보면서 만납니다. 《서울 염소》에 나오는 ‘서울 염소’는 곧 ‘시골 염소’가 될까요? 아니면, ‘시골 아저씨’가 될까요? 4348.5.1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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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5.5 - Vol.18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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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06



사진이 보는 곳, 사진을 보는 마음

― 사진잡지 《포토닷》 18호

 포토닷 펴냄, 2015.5.1.



  사진잡지 《포토닷》 18호(2015.5.)를 읽습니다. 《포토닷》 첫머리에 실은 “평화박물관이 운영하는 전시공간 스페이스99에서 예정됐던 이재갑 사진전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전이 참전군인 단체들의 무력시위와 압력행사로 개막식과 환영식 등 행사가 파행을 겪은 일이 발생했다(17쪽).” 같은 이야기를 짤막하게 읽습니다. 왜 참전군인은 무력시위와 압력행사를 벌이면서 사진전시를 못 하게 할 생각이었을까요? 사진 몇 점이 얼마나 대수롭기에 이런 사진을 사람들이 못 보게 할 생각일까요? 이 전시장에 걸린 사진을 사람들이 보아서는 안 될 까닭이 있을까요? ‘한군국 증오비’를 찍은 사진은 참전군인 이름을 깎아내리는 몸짓이라고 여길 만할까요? 왜 베트남에 ‘한국군 증오비’가 섰는가를 차분히 돌아볼 마음은 있을까요?


  베트남 사내는 한국 군인이 쏜 총에 맞아서 죽어야 했습니다. 베트남 가시내는 한국 군인한테 몸을 짓밟힌 뒤 총에 맞아서 죽어야 했습니다. 버젓이 알려진 이 같은 이야기를 고개 숙여 뉘우치는 참전군인이 있고, 이러한 이야기를 꽁꽁 감추는 참전군인이 있습니다.


  일본사람은 배를 타고 한국으로 건너와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짓밟았습니다. 이 짓을 뉘우치는 일본사람이 있고, 이러한 일은 정벌이라고 여기는 일본사람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인데, 한겨레도 지난날 고구려는 중국 쪽으로 군대를 보내어 땅을 넓혔다고 말합니다. 다만, 고구려가 땅을 넓혔다는 말을 할 뿐, 이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짓밟았는가 하는 대목은 역사책에 한 줄로도 안 나옵니다. 그저 ‘정벌’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포토닷》 끝자락에 실은 “정작 천만 명에 육박하는 이들이 생산하는 사진들을 살펴보면, 그것이 그 어마어마한 숫자만큼 다양하지 않다는 건 확실하다. 각종 사진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그곳에 올라오는 대다수의 사진은 주로 ‘피사체의 힘’에 의지하는 그림 같은 풍경과 화보 스타일의 인물사진에 편중돼 있다(112쪽/이기원).”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몇몇 이름난 사진기를 즐겨쓰는 사람들이 모인 인터넷모임이 퍽 많고, 회원도 대단히 많습니다.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립니다. 한국에서 사진을 즐기는 사람은 그야말로 아주 많습니다.


  따로 ‘전문 사진장비’를 쓰지 않더라도 손전화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았고, 요즈음은 스마트폰으로 무척 멋지다 싶은 사진을 찍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터넷 사진모임’ 사진은 《포토닷》에 실은 글에서도 다루듯이 ‘피사체의 힘’이나 ‘그림 같은 풍경’이나 ‘화보 스타일 인물사진’이기 마련입니다. 사진으로 삶을 드러내거나 밝히거나 나누려고 하는 몸짓은 좀처럼 터져나오지 못합니다. 멋져 보이는 사진이 아닌, 삶을 사랑하는 사진으로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합니다.


  ‘멋져 보이는’ 사진이나 ‘그림 같은’ 사진은 겉모습입니다. 겉모습은 겉치레입니다. 겉모습이나 겉치레는 삶이 아니라 껍데기입니다.





  값비싸거나 값진 장비가 사진을 찍어 주지 않습니다. 사진은 바로 ‘내가 스스로’ 마음을 열어서 찍습니다.


  “작업이라는 게 결국 나를 향한 스스로의 질문이고, 이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에, ‘기억’이란 소재는 평생 가져갈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24쪽/이재용).”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사진을 찍든 글을 쓰든, 늘 내가 나한테 묻습니다. 어떤 사진을 찍으려 하는지, 어떤 글을 쓰려 하는지, 늘 내가 나한테 묻습니다. 사진 한 장을 어디에서 누구와 나누려 하는지, 글 한 줄을 어디에서 누구와 나누려 하는지, 이 같은 이야기도 늘 내가 나한테 묻습니다.


  베트남에서 전쟁이 터졌을 적에, ‘돈(달러)을 벌려고 사람 죽이는 짓’을 시킨 대통령이나, ‘돈을 벌 생각으로 사람 죽이는 짓’을 한 사람이나 서로 같습니다. 사람을 죽이라고 시킨 사람만 나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죽인 사람만 나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손을 맞잡고 서서 그들 스스로 저지른 ‘살인’을 뉘우치고 새 삶으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되지 못한다면, 사진을 제대로 찍지도 못하고 제대로 읽지도 못합니다.





  “작가는 남도에 터를 잡기 시작한 8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남도의 풍경을 발견해 간다. 그에게 사진은 표현이 아니라 ‘발견’이다. 오래 전부터 쓰여 왔던 역사와 신화의 원형, 혹은 땅의 주인이 작가의 눈앞에 이미 있었고, 널려 있었다(43쪽/최연하).”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문화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문화회관이라는 건물에 문화가 있지 않습니다. 문화단체에서 문화를 세우지 않습니다. 문화예술인이라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 둘레에서 수수하게 삶을 짓는 사람들이 언제나 스스로 문화를 이룹니다. 네가 짓는 하루가 바로 문화이고, 내가 가꾸는 하루가 새삼스레 문화입니다.


  오늘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사람이 ‘흙’과 풀과 숲이라고 하는 문화를 가꿉니다. 오늘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사람이 ‘살림’과 집과 보금자리라고 하는 문화를 가꿉니다. 오늘 아기한테 젖을 물리거나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는 여느 어버이가 ‘말’과 이야기와 노래라고 하는 문화를 가꿉니다.


  베트남전쟁과 얽힌 이야기를 마주하려고 베트남으로 찾아가서 ‘한국군 증오비’를 사진으로 찍은 분이 있다고 합니다. 이분이 ‘한국군 증오비’를 사진으로 찍었든 안 찍었든 베트남에는 어엿하게 ‘한국군 증오비’가 있습니다. ‘한국군 증오비’를 찍은 사진을 한국에서 전시를 할 수 있든 없든(개막식은 제대로 못 치렀다고 하지만, 사진전시는 잘 마쳤다고 합니다), 베트남에는 어엿하게 ‘한국군 증오비’가 쉰 해 가까이 서서 비와 바람과 햇볕을 맞았습니다. 베트남사람 가슴에는 한국군이 뿌린 ‘미움’이라는 씨앗이 자랐습니다.




  “과거 서울의 모습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들이 꼭 설명이 필요할 정도로 난해하거나 어려운 작업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왜?’ 이런 캡션을 달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한미사진미술관 전시를 비롯해 이전 전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촬영 장소와 시기처럼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했더라도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마치 답안지를 펼쳐놓고 문제지를 푸는 것처럼 전시를 보는 것이 과연 ‘감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67쪽/이기원)?”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답답한 일이 곧잘 터지는 한국 사회입니다. 사진 한 장을 한결 너르고 기쁘게 누리는 길이 생각과 달리 잘 안 열리기도 하는 한국 사회입니다.


  “일하면서 여성성을 버려야 하는 슬픈 현실을 자주 직면한다. 나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지, 연애를 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보리’는 코미디언처럼 까부는 행동으로 보호막을 쳤고, 나는 문신을 하고 옆머리를 삭발하면서 까칠하게 벽을 쳤다(101쪽/김태은).” 같은 이야기를 읽고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패션사진을 찍는 ‘여자’ 사진가는 사진가라기보다 ‘여자’ 대접(?)을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진가인데, 왜 사진가 아닌 ‘여자’ 대접을 받아야 했을까 궁금합니다. 어떤 사진가들이 ‘내 이웃’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고 ‘여자’로만 바라보려 했을까요.




  가만히 보면, 지난날 어느 대통령 한 분도 베트남사람을 ‘이웃나라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베트남으로 날아가서 사람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면서 돈을 벌려고 했던 사람들(거의 모두 사내)도 베트남사람을 ‘이웃나라 동무’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소위 예술사진을 생산한다는 작가, 혹은 이러한 사진들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사진의 이러한 본질적 측면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럴싸한 장면들을 그럴싸하게 프린트해 전시장에 걸어 놓고 예술의 작위를 수여한다고 다 같은 예술사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행위들은 어떤 사진도 예술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남용한 것뿐이다. 사진은 우선 사진으로 존재할 뿐이다(111쪽/장정민).”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어떤 사진이든 모두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됩니다. 이 사진만 문화나 예술이 되지 않습니다. 저 사진만 패션이나 빈티지가 되지 않습니다. 그 사진만 다큐나 리얼리즘이 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담은 사진이라면, 어떤 사진이든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되며, 패션이나 다큐도 됩니다. 이야기를 담지 못한 사진이라면, 아무리 이름난 작가가 빚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작품’으로 그칠 뿐, ‘사진’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합니다.


  “사진을 사진답게 찍을 때에 비로소 사진답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모습을 찍으면 그저 ‘그럴듯할’ 뿐입니다. 멋있어 보이게 찍는다면 그저 ‘멋있어 보일’ 뿐이지요. 이렇게 만지작거리거나 저렇게 꾸민다고 해서 사진이 빛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붙이거나 저렇게 자른다고 해서 사진이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사진 한 장에 담을 이야기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비로소 사진이 됩니다. 내가 걷는 길을 나 스스로 제대로 바라보고 느껴서 가슴에 담을 때에 비로소 ‘방랑(떠돌기)’이 되고, 이 방랑길에 사진 한 장 찍어서 이웃과 나누는 삶을 짓습니다(127쪽/최종규).” 같은 이야기처럼, 그럴듯하게 찍는 사진은 그럴듯하게 보일 뿐입니다. 멋들어지게 찍는 사진은 멋들어지게 보일 뿐입니다.


  누군가는 그럴듯하거나 멋들어지게 보이려는 사진을 찍습니다. 이런 사진을 찍는다고 나쁘지 않습니다. 그저 이런 사진을 찍었을 뿐입니다. 이야기를 엮어 사진을 찍는다면, 이야기를 엮어 사진을 찍은 셈입니다. 이런 사진을 찍는다고 좋지 않습니다. 그저, 사진에 이야기를 담았을 뿐입니다.


  멋들어지게 불러도 노래가 될 테고, 멋들어지게 써도 글이 될 테지요. 멋들어지게 지어도 밥이 될 테며, 멋들어지게 빨아도 깨끗한 옷이 되겠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삶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으면 삶을 사진으로 못 찍습니다. 삶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기에 겉모습이나 겉치레에 휘둘립니다. 이른바 ‘멋져 보이는’ 작품이나 ‘그림 같은’ 작품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웃과 함께 나누려고 하는 사진 이야기가 아니라, 이웃한테 자랑하고 싶은 ‘그럴듯한 솜씨자랑’으로 나아가고 맙니다.


  삶을 바라보려고 할 때에는 이웃과 동무가 지내는 하루를 차분하게 바라보면서 한솥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웃을 아끼고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이 될 때에 비로소 서로 마음을 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어야 바야흐로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어야 ‘사진으로 담을 삶’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 참전군인은 지난날 삶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에는 돈(달러)만 바라보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름값(명예)만 바라보고 맙니다. 예나 이제나 삶과 사랑과 사람을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베트남에 조용히 선 ‘한국군 증오비’는 한국사람한테 넌지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국사람이 베트남에 심은 미움을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받아들여서 제대로 삭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일본더러 한국에 고개숙여 뉘우치라고 아무리 외친들 일본 정치권력은 한국에 고개숙여 뉘우치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는 이들은 그저 등을 돌릴 뿐입니다. 베트남 참전군인이 아무리 사진전시장 앞에서 무력시위를 하더라도 ‘역사는 바뀌’지 않습니다. 베트남 참전군인이 군홧발로 짓이긴 발자국은 압력행사를 벌이더라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증오비’가 ‘평화비’로 거듭나려면, 주먹과 총칼을 휘두른 사람이 스스로 주먹도 총칼도 내려놓고 따순 가슴이 되어야 합니다. 사진 한 장은 언제나 따순 가슴인 사람들이 찍고 읽으며 나눕니다. 4348.5.11.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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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Rain 2 - 김중만 사진집
서영아 지음, 김중만 사진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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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05



빗물과 사진, 눈물과 사랑

― After Rain 2

 김중만 사진

 서영아 글

 소담출판사 펴냄, 2003.5.15.



  봄에 봄비가 내립니다. 봄비에는 봄내음이 깃듭니다. 봄내음은 땅을 깨우고, 땅이 깨어나면 풀씨가 깨어나며, 풀씨가 깨어날 무렵 나무마다 겨울눈도 깨어납니다.


  여름에는 여름비가 내립니다. 여름비에는 여름내음이 깃듭니다. 여름내음은 들마다 푸른 숨결로 퍼지고, 푸른 숨결을 받은 풀과 나무는 싱그러이 열매를 맺습니다. 일찌감치 꽃을 피운 딸기나 앵두는 여름에 새빨간 열매와 씨앗을 산뜻하게 내놓아요.


  가을에는 가을비가 내리고, 겨울에는 겨울비가 내립니다. 철마다 다른 빗물입니다. 똑같은 비는 없습니다. 봄에 내리는 비도 삼월과 사월과 오월이 다르고, 사월에 내리는 비도 첫무렵과 끝무렵에 내리는 비가 달라요.


  빗소리를 듣고 빗내음을 맡으면서 생각합니다. 빗물에 서리는 다 다른 숨결을 읽을 수 있다면, 빗물을 사진으로 찍을 적마다 늘 다른 이야기를 엮고 언제나 새로운 노래를 부를 만하리라 봅니다.






  김중만 님이 찍은 사진에 서영아 님이 글을 붙인 사진책 《After Rain 2》(소담출판사,2003)을 읽습니다. 사진책 《비 온 뒤》는 1권과 2권으로 나뉘어서 나옵니다. 배우나 가수나 연예인이나 모델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 얼굴과 몸짓이 가득한 사진책입니다. 김중만 님은 “지금 잘나가고, 잊혀버린 이름이라 해서 연연하지 않고 사진성 위주의 선택을 했다. 그들과 보낸 지난 짧고 긴 시간을 소중하게 느낄 수만 있다면, 그들의 모습이 우리들의 마음 어느 곳 한곳에 머물러 외로움을 만져 줄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다.” 하고 말합니다. 이런 말이 아니더라도 굳이 ‘잘나가는 사람’을 사진책에 넣어야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넣어야 할 사진책입니다. 함께 이야기를 느끼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도록 북돋우는 사진을 넣어야 할 사진책이에요.


  이름난 배우나 가수를 찍은 사진으로 사진책을 엮는다면, 이름난 사람들 얼굴값으로 사진을 판다고 할 만합니다. 연예인이나 모델 이름값으로 사진을 파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굳이 이렇게 사진책을 엮어야 할 까닭이 없을 뿐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재미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름난 도시를 여행했다면서 이런 도시를 찍은 사진으로 사진책을 엮으면 재미없습니다. 이름난 관광지만 찾아다녔다고 자랑하려는 듯이 사진책을 엮어도 재미없어요.





  다만, 이름난 사람을 찍든, 이름난 관광지를 찍든, 사진 한 장에 이야기를 담는다면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찍히는 사람 이름값’에 따라 사진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개 사랑모임(팬모임)’에 있다면, 이름난 아무개를 찍은 사진을 좋아할 수 있을 테지만, 취미나 취향이 아니라 ‘사진’을 생각한다면, 삶을 사랑하는 이야기가 깃든 사진으로 사진책을 엮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2003년에 《비 온 뒤》를 선보인 김중만 님은 이무렵이 “사진을 시작한 지, 올해로 28년째가 된다. 길기도 하고, 짧은 시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무엇을 했을까?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은 올바른 길인가?” 하고 돌아봅니다. 어느덧 김중만 님은 사진길을 걸은 지 마흔 해째 됩니다. 이 길을 앞으로도 걸어간다면 쉰 해도 되고 예순 해도 되겠지요.


  오래도록 한길을 걷는 사진가는 ‘올바른’ 삶이었을까요? 아마, 아무도 모르리라 느낍니다. 그저, 이 길을 걸은 사람 스스로 묻고 말할밖에 없으리라 느낍니다. 스스로 올발랐다고 여기면 올바릅니다. 스스로 좋았다고 여기면 좋습니다. 스스로 아름다웠다고 여기면 아름답습니다. 스스로 즐거웠다고 여기면 즐겁습니다.





  사진책 《비 온 뒤》를 살펴보면, 여러 배우나 모델 사진 사이에 꽃과 풍경 사진이 흐릅니다. 그러고 보니, 김중만 님은 《비 온 뒤》 머리말에서 “한 장 사진을 찍기 위해 지났던 이름 잊어버린 길가의 모습들. 항구와 낡은 까페 테라스. 여름의 하늘과 깊은 밤 바다와 황량했던 사막. 아이들의 웃음과 절망의 눈물. 터지는 기쁨 속의 내 마음 긴 시간들. 방황, 어둠, 어떻게 지나왔을까. 바로 저기인데.” 같은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넋 놓고 생각해 보니, 지난 긴밤처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온 듯싶다. 하루하루를. 일 년을. 수십 년을, 그냥 먼산 바라보듯 지내온 길인가 보다.” 같은 이야기도 적었어요.


  패션사진이 아닌 ‘꽃 사진’은 바로 김중만 님이 이녁 사진넋을 돌아보는 이야기가 되리라 느낍니다. 패션사진은 잡지이든 화보이든 광고이든 ‘그 사진을 찍어 주기를 바라는 곳’에 주려고 찍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에도 김중만 님 마음과 숨결이 깃들기 마련이지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는 곳’ 마음과 숨결을 함께 생각해서 엮어야 합니다. ‘꽃 사진’은 오로지 김중만 님 마음과 숨결로 빚는 사진입니다.




  스스로 웃는 삶이 꽃 사진에 드러납니다. 스스로 울고 지치던 나날이 꽃 사진에 나타납니다. 스스로 노래하고 사랑하던 하루가 꽃 사진에 서립니다.


  “한 장 사진을 찍기 위해 내 한몸 아끼지 못한 채 달려가는 길 위에 가끔은 웃고, 가끔 아픈 채, 지나가는 구름, 스쳐 가는 바람결 따라 흔들리는, 기쁨을 이제는 안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못내 미워하는 얼굴도, 그리움으로 더불어 사랑하며 살게 된다.”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사진을 찍으며 살아가는 기쁨을 ‘바로 오늘이 되었기’에 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예전부터 진작 알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사진 찍는 기쁨’과 ‘삶을 짓는 기쁨’을 모른다면 이 길을 걸을 수 없으니까요. 반갑고 애틋하며 고마운 이웃하고 동무를 사진으로 찍듯이, 반갑고 애틋하며 고마운 하루를 누립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기쁘게 찍는 사진입니다. 바로 오늘 여기에서 기쁘게 누리는 삶입니다. 철마다 다른 빗물을 느끼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삶마다 웃음과 눈물이 어우러지면서 흐르는 사랑을 느끼면서 하루를 짓습니다. 4348.4.19.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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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그내면과외면
마크드 프라이에 / 행림출판사 / 1990년 8월
평점 :
품절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92



너희가 태어나고 내가 자란 곳

― 한국KOREA, 그 내면과 외면

 마크 드 프라이에 사진

 행림출판 펴냄, 1990.8.30.



  제가 나고 자란 곳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굳이 다른 곳은 돌아보지 않고 제 삶자리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좀 멀리 돌아다니면서 다른 고장을 사진으로 찍을 만할 텐데, 굳이 다른 고장으로 마실을 다니지 않으면서 제 고장에서만 즐겁게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나고 자란 곳은 사진으로 안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즐겁게 온갖 곳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기쁘게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찍고 저곳에서도 찍어요. 그런데 막상 제가 나고 자란 곳만큼은 찾아가지 않는 사람이 있고, 제가 나고 자란 곳에 찾아가더라도 이곳을 사진으로 안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고 자란’ 제 고장을 사진으로 찍기에 더 훌륭하지 않습니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마음을 붙이면서 지내는’ 고장을 사진으로 찍기에 더 아름답지 않습니다. 어느 고장을 사진으로 찍든, 우리는 저마다 ‘마음에 사랑스레 스며드는 고장’을 기쁘게 맞아들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이 고장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서 ‘이 고장 모습’을 누구보다 잘 찍거나 훌륭하게 찍지 않습니다. 이 고장에서 나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은 사람이기에, 어쩌다 한두 번 찾아와서 며칠이나 몇 달이나 몇 해쯤 머무르는 눈길이나 몸짓으로는 ‘이 고장 모습’을 제대로 못 찍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 하늘에는 계절이 있고, 땅에는 실체가 있다. 모든 물질에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듯, 모든 작업에는 장인 정신이 깃들어 있는 법이다 ..



  “난희와 교에게. 여기가 바로 너희들이 태어난 땅이란다.”로 첫머리를 여는 사진책 《한국KOREA, 그 내면과 외면》(행림출판,1990)을 읽습니다. 벨기에사람 마크 드 프라이에 님이 빚은 사진책입니다. 벨기에라는 나라에서는 손꼽히는 사진가라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리 안 알려진 사진가입니다. 사진책 《한국》을 선보인 적이 있으나, 이 사진책은 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자취를 감춘 지 제법 되었습니다.


  사진책 《한국》 첫머리는 “여기가 바로 너희들이 태어난 땅이란다”로 엽니다. 무슨 말일까요? 어떤 뜻일까요? 아마 마크 드 프라이에 님은 한국 아이를 둘 받아들여서 이녁 아이로 돌보았다는 뜻이겠지요. 한국에서 벨기에로 가야 하던 아이들한테 ‘너희가 태어난 곳’이 어떤 삶자리인지 보여주려는 마음으로 빚은 책이라는 말일 테지요.


  문득 ‘내 고장’을 떠올립니다. ‘내 고장’은 어디일까요? 내가 태어난 곳이면 내 고장이 될까요? 오늘 내가 사는 곳이 내 고장이라 할까요?


  ‘이 글을 쓰는 내’가 태어난 고장은 인천입니다. 광역시도 직할시도 아닌 ‘경기도 인천’일 적에 그곳에서 태어났고 자랐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공장에서 내뿜는 매연을 늘 맡으면서 국민학교를 다녔고, 연탄공장 탄가루를 함께 마시면서 어린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루 내내 철길 소리를 들었고, 큰 짐차 소리를 들었습니다. 동무들과 골목에서 뛰놀고 바닷가나 둠벙을 찾아다니며 낚시를 하기도 했지만, 내 어릴 적 고장인 인천은 매캐한 바람과 조용한 골목 두 가지입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이 고장을 떠났고, 사진을 처음 배우고 나서도 다른 고장(서울)에서 사진을 찍을 뿐, ‘태어난 고장’을 사진으로 찍으려는 생각은 조금도 안 했습니다. 서른세 살 무렵에 ‘태어난 고장’으로 돌아가서 ‘사진책도서관’이라는 곳을 연 뒤에 비로소 ‘내 고장’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태어난 고장’을 사진으로 찍지 않고, ‘사는 고장’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물을 둘러보면서 그 고유한 균형미를 창출해 낸 정교한 감성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고,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사진책 《한국》을 보면 한국 사진가로서는 거의 안 찍는다 싶은 모습이 처음부터 끝까지 흐릅니다. 절집 사진이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한국 사진가가 절집에 찾아가서 흔히 찍는 모습을 사진책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절집으로 들어서는 문간에 붙은 백열등을 한국 사진가가 찍을 일은 없겠지요. 절집에서 빨래를 하는 스님 모습을 한국 사진가가 찍는 일도 매우 드뭅니다. 꽃무늬 문살을 찍은 사진에서도 마크 드 프라이에 님은 ‘문살 무늬’보다 ‘문살에 드리운 그림자’가 한결 도드라진 사진을 보여줍니다.


  여느 시골집 수수한 마당과 살림살이를 보여줍니다. 시골에 세우는 기도원 같은 예배당 사진도 여러 장 나옵니다. 그런데 기도원인지 예배당인지 헷갈릴 만한 시설을 찍은 사진도, 이 시설 둘레에 우거진 숲과 파란 하늘을 함께 보여줍니다. 둘레에서 한들거리는 들꽃을 나란히 보여줍니다.


  사진책 《한국》은 ‘겉과 속(내면과 외면)’을 보여준다고도 하겠지요. 그러나 ‘겉과 속’이라기보다는 그저 ‘삶’입니다. 여기에서도 보고 저기에서도 보는 삶입니다. 너한테서도 보고 나한테서도 보는 삶이에요. 한국이라는 나라에 두 발을 디디고 지내는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삶입니다. 잘나지도 않고, 못나지도 않은 삶입니다. 올림픽을 둘러싸고 정부에서 자랑하려고 하는 높다란 건물이 서는 한국이 아니고, 포항제철이라든지 커다란 공단을 내세우려고 하는 한국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밥상에 나란히 둘러앉아서 어우러지는 수수한 삶이 흐르는 한국입니다. 골목과 고샅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있는 한국이고, 저잣거리에서 부산한 이야기가 있는 한국입니다.






.. 한국사람에게나 서양사람에게나 공통적으로 통하는 말이 있다. “사진은 천 마디의 말을 한다”는 것이다 ..



  밖에서 보아야 안을 더 잘 보지 않습니다. 안에만 있기에 안을 못 보지 않습니다. 밖에 있든 안에 있든,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볼 수 있습니다. ‘태어난 고장’을 사진으로 찍든, ‘사는 고장’을 사진으로 찍든, 스스로 ‘이 고장’을 사랑하려는 마음일 때에는, 이 고장을 찍은 사진이 사랑스럽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무너지거나 사라지는 흐름’을 보거나 느끼려 하는 마음이라면, 어느 고장을 가더라도 무너지거나 사라지는 모습만 마주하면서 이런 사진을 찍습니다.


  티벳이나 부탄이나 스리랑카에 가야 거룩한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거룩한 숨결로 거듭나면서 이웃을 거룩한 사랑으로 어깨동무할 수 있다면, 바로 이곳에서 내 옆집에 있는 아주머니나 아저씨를 사진으로 찍으면서도 거룩한 숨결이 드러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처럼 지구별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온갖 모습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마크 드 프라이에 님처럼 ‘한국에서 벨기에로 날아와야 했던 두 아이’를 헤아리면서 두 아이한테 선물하려는 마음으로 온사랑을 담아서 아주 작은 삶자리를 뚜벅뚜벅 걸어다니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삶을 찍기에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찍기에 이야기가 피어납니다. 관광지에 간다면 관광사진을 찍습니다. 여행지에 간다면 여행사진을 찍어요. 명상을 하거나 종교가 흐르는 곳에서는 명상사진이나 종교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갈래를 지으면 사진이 좀 재미없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내가 일구는 삶을 바라보고, 이웃과 동무가 누리는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 재미있고 웃음꽃이 가득한 이야기가 흐르는 사진이 됩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다릅니다. 철마다 다릅니다. 아니, 철마다 새롭습니다. 한곳에 머물며 사진을 찍어도 철철이 다른 사진을 빚습니다. 한 사람을 바라보며 찍어도 ‘삶이 흐르고 나이가 흐르며 이야기가 흐르는’ 숨결을 얼마든지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딱 하루만 머무르더라도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에 흐르는 바람과 기운이 다르니까, 아니, 새로우니까, 다름을 느끼는 마음이라면 ‘다른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고, 새로움을 느끼는 가슴이라면 ‘새로운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습니다. 한 시간쯤 골목을 걸어도 사진책 한 권이 태어날 수 있을 만큼 ‘다르거나 새로운’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 다르거나 새로운 마음이 된다면 말이지요.





.. 한편으로는 한국사람과 함께 살면서 복잡한 인간관계를 몸소 체험해 볼 수도 있고, 종교나 철학을 탐구해 볼 수도 있다.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는 음식을 먹어 보거나, 그저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사진책 《한국》을 이녁 두 아이한테 선물하는 마크 드 프라이에 님은 한국사람한테도 선물을 베풉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살거나, 한국으로 와서 사는 사람 모두한테 싱그러운 선물을 나누어 주어요. 어떤 선물인가 하면, 우리 누구나 바로 오늘 이곳에서 무엇을 하든 저마다 기쁘며 신나게 ‘삶’을 누릴 테니까, 이 삶을 고맙게 여기고 사랑스레 마주하면, 언제 어디에서나 아름다운 이야기잔치를 열 수 있다는 말을 들려주는 선물입니다.


  그저 여기에 있기만 하면서도 흐뭇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있어서 하하 호호 웃을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내가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사진을 찍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맛집을 찾아나서도 재미있고, 골목을 거닐어도 재미있으며, 시골마실을 다녀도 재미있습니다. 이불빨래를 사진으로 찍어도 재미있고, 냇가이든 수영장이든 물놀이를 즐기는 ‘우리 집 아이’를 사진으로 찍어도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찍는 사진에서는 바로 ‘우리 스스로’ 고운 님이 됩니다. 4348.4.1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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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속의 새 - WILD BIRD
김수만 지음 / 아카데미서적 / 1988년 8월
평점 :
절판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45



숲에서 노래하는 새와 함께

― 자연속의 새

 김수만 사진

 아카데미서적 펴냄, 1988.8.1.



  숲에는 온갖 새가 있습니다. 숲이기에 온갖 새가 서로 어울리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숲에는 나비가 있으니 나비 애벌레가 있습니다. 숲에는 불나비가 있기에 불나비 애벌레가 있습니다. 숲에는 나무뿐 아니라 풀이 우거져서 풀벌레가 있습니다. 애벌레와 풀벌레가 많을 뿐 아니라 나무열매도 많은 숲입니다. 숲이라는 곳은 새가 살기에 아주 좋은 터전입니다. 게다가 숲을 살찌우는 냇물이 흘러요. 냇물에는 물고기가 살아요. 멧새는 숲에서 먹이와 물을 넉넉히 누립니다. 보금자리도 알뜰히 여밉니다.


  도시에는 어느 새도 살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 살아남는 새는 아주 대단합니다. 얼마 안 되는 먹이를 견딜 뿐 아니라, 새를 괴롭히는 온갖 사람들한테서 버티고 견디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시달리고 또 시달리면서도 도시를 떠나지 않으니 참으로 대단합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새가 왜 시골로 안 가고 도시에 남느냐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는 도시 모습을 보여줄 뿐이지, 얼마 앞서까지만 해도 모두 시골이었던 터전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서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바로 그곳에서 둥지를 틀고 서로 이웃이 되어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새한테서 고향을 빼앗은 셈이요, 삶과 사랑을 모두 짓밟은 꼴입니다. 고향도 삶도 보금자리도 사랑도 빼앗긴 새이지만, 새는 차마 도시를 버리지 못합니다.





  몇 가지 새만 겨우 살아남는 도시를 생각해 봅니다. 도시라는 곳은 새가 살기에는 아주 안 어울립니다. 그러면, 도시라는 곳은 사람이 살기에 잘 어울릴까요? 사람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지낼 만한 곳이 도시일까요?


  김수만 님이 빚은 《자연속의 새》(아카데미서적,1988)를 읽습니다. 김수만 님은 이 나라에서 씩씩하게 살면서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아서 새로운 삶을 이으려고 하는 새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청호반새는 우리 나라의 중부 지방에 충청도를 중심으로 상당히 많은 수가 번식하고 있다. 아마도 이 지역에 풍부한 먹이와 둥지를 틀 수 있는 좋은 토질의 논과 산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81쪽).”는 이야기는 1980년대까지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자연속의 새》는 1988년에 처음 나왔으니, 이무렵에는 이 말이 맞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 충청도는 온갖 고속도로가 끝없이 가로지를 뿐 아니라, 수도권하고 가깝다고 여겨서 공장이 대단히 많고, 골프장도 참으로 많으며, 새로운 도시가 자꾸자꾸 들어섭니다.





  김수만 님은 “산업이 발달하면서 새들이 살고 있는 자연 상태의 환경도 점차 파괴되어 가고 있는데, 이에 대응하여 보다 많은 새들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함과 동시에 그들이 사는 지역을 자연보호구역으로 설정하여 희귀조의 보호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118쪽).” 하고 말합니다. 새를 사진으로 찍는 동안 ‘새가 살기 어려운 터전’을 몸으로 느끼셨을 테고, 몸으로 느낀 이야기를 이처럼 외칠 수밖에 없으리라 느껴요.


  그런데, 여러 새한테 천연기념물 이름을 붙여 준다 하더라도 새가 살아남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여러 새가 사는 터전을 자연보호구역 이름을 붙이려 하더라도 새가 이곳에서 살기에는 쉽지 않습니다. 어떤 새가 천연기념물인지 헤아리려는 사람이 드물기도 하고, 새가 살 만한 숲이나 들에 어김없이 농약을 뿌려대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시골마다 헬리콥터를 써서 농약을 뿌립니다. 들에는 ‘들 농약’을 뿌리고, 숲에는 ‘숲 농약’을 뿌려요.


  들과 숲에 농약을 뿌리는 사람들은 ‘나쁜 벌레’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나쁜 벌레’는 새가 즐겨찾는 먹이입니다. 새가 잡아먹을 벌레를 농약으로 잡아서 죽이려 하면, 새는 어떻게 될까요. 죽어야겠지요. 더군다나, 고속도로와 발전소와 송전탑과 관광단지와 골프장과 공장을 끊임없이 시골에 짓기 때문에, 어느 조그마한 숲이나 멧자락을 자연보호구역으로 묶는다 하더라도, 이런 곳을 제대로 보살피기 어렵습니다.


  “저 새는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에 무작정 새를 쫓아간 곳이 지금의 행주산성이었읍니다. ‘새들이 먹이를 찾으면서 놀고 있는 곳, 세상에 이렇게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수 있는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지금은 꿈속에서도 새의 사진을 찍곤 하지만, 그곳에서 처음 본 아름다운 새들의 모습은 14살의 어린 소년의 마음을 가득 채웠고, 새에 대한 저의 관심과 열정은 그때부터 싹트기 시작했읍니다(123쪽).”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사진을 함께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자연속의 새》를 내놓고, 《쉽게 찾는 우리 새》(현암사,2003)와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현암사,2004) 같은 사진책을 내놓은 김수만 님은 이녁이 어릴 적에 새노래를 들으면서 새를 궁금하게 바라볼 수 있었어요. 오늘날에는 김수만 님처럼 집 둘레에서 새를 마주하기 아주 어렵습니다. 도시 아이는 자동차와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이 가깝습니다. 시골 아이도 숲이나 들보다는 자동차와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이 훨씬 가깝습니다.





  아직 이 나라가 송두리째 망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새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아직 이 나라에서 숲이나 들이 모두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속의 새》만큼은 아니어도 ‘한국에서 보금자리를 짓는 새’ 이야기를 글이나 사진이나 그림으로 엮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한 가지를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새가 살 수 없는 곳은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 새가 자취를 감출수록 사람이 사는 터전도 망가진다는 뜻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새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산다면, 우리 마음에 아름다운 꿈이나 사랑이 자라기 어렵습니다. 새와 함께 춤을 추고 노래할 수 있는 삶일 때에, 비로소 사람살이에서도 아름다운 춤과 노래가 사랑스레 피어날 수 있습니다.


   김수만 님은 “스무 살이 되자 이제는 새를 보고 익히기만 할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새들의 모습과 생활을 사진에 담아 한글로 알리는 일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장비가 필요했는데 그만 한 여력이 없었던 저는 오직 카메라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읍니다(12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꿈을 지었고, 스스로 꿈을 돌보았으며, 스스로 꿈길을 걸었습니다.


  사진기 값을 누가 대줄까요? 스스로 장만해야지요. 사진을 누가 찍을까요? 스스로 찍어야지요. 새 한 마리를 찍으려고 숲에서 여러 날 숲사람이 되어서 지냅니다. 새 한 마리가 들려주는 노래를 귀여겨들으면서 ‘새가 어떤 마음인지’를 헤아립니다.


  참새나 박새나 딱새 같은 조그마한 새가 한 해 내내 노래합니다. 봄과 여름에 제비가 이 땅에 찾아와서 노래합니다. 여름철에는 꾀꼬리 노랫소리를 듣고, 겨울에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오리 날갯짓을 바라봅니다.


  어릴 적에 새를 바라보면서 노래를 듣는 아이들은 새처럼 날갯짓을 꿈꾸면서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새와 함께 노래하는 개구리와 매미와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는 아이들은 푸른 숨결을 파란 바람에 실어 삶을 짓는 이웃을 헤아립니다.


  숲에 새가 있습니다. 숲에 사람이 있습니다. 숲에서 새가 사이좋게 어우러집니다. 숲에서 사람이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합니다. 숲바람을 마시는 목숨은 고요하면서 착하기에 평화를 사랑합니다. 새도 사람도 고요하면서 착한 넋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빕니다. 4348.4.13.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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