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의 사진엽서를 통해 본 시선의 권력과 조선의 이미지
권혁희 지음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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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틀에 박힌 채 문화읽기
 [책읽기 삶읽기 26] 권혁희,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의 사진엽서를 통해 본 시선의 권력과 조선의 이미지’라는 이름이 붙은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라는 책을 읽는다. 겉에 적힌 이 글월 한 줄은 284쪽에 이르는 내내 되풀이된다. 사진엽서를 처음 만든 유럽사람들은 언제나 제국주의 눈길에 따라 엽서에 사진을 넣었고, 이 엽서는 제국주의 나라에서 끝없이 교재로 쓰이면서 식민지로 짓눌린 나라들이 얼마나 덜 떨어지거나 엉성했는가를 보여준다고 이야기한다.


.. 서구인들은 카메라로 식민지의 지형과 원주민들의 인종, 풍속 등을 기록해 갔으며 그것을 통치 자료로 활용했다 ..  (35∼36쪽)


 생각해 보면, 19세기 끝무렵과 20세기 첫무렵 사진엽서에 나타나는 모습만 ‘식민지 지형’과 ‘원주민 풍속’을 적바림하지 않는다. 20세기 끝무렵과 21세기 첫무렵 사진이나 사진책이나 사진잡지에도 온통 ‘우리네 삶터 모습’과 ‘우리 겨레 문화’를 적바림한다. 지난날에는 제국주의 눈길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상업주의나 자본주의 눈길이라 할 테지. 남들이 우리 겨레를 사진으로 담든 우리가 내 손으로 이 겨레를 담든, 누구나 ‘문화’를 사진으로 옮기기 마련이다.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를 쓴 권혁희 님은 책을 마무리하면서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식민지 시기에 생산되었던 이미지들과 그 이후의 시각 문화가 가진 연관성을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다(274쪽).”고 밝힌다. 글쓴이는 사진이란 무엇이고 사진으로 담아서 나누는 매체(엽서이든 책이든 잡지이든 무엇이든)란 무엇이며, 사진과 삶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옳게 살피지 못했다. 아니, 처음부터 사진이란 무엇인지 살피지 않았을 뿐더러, 사진을 담은 매체가 어떠한 빛깔이요 어떤 이야기를 담는지 돌아보지 않았다. 이 같은 눈길이라면 《ELLE》나 《VOGUE》 같은 잡지를 보면서 무슨 이야기를 쏟아내려나. 이런 잡지에 나오는 여자 모델은 어떤 사람인가. 이런 잡지에 나오는 사람들 삶은 오늘날 이 땅에서 어떤 계층 어느 자리 문화를 보여준다고 할 만한가.

 식민지 조선 여성이 ‘일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두고 ‘전근대적’이라느니 ‘열학한 사회적 지위’라느니 이야기하는데, 오늘날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살림살이를 담은 사진이나 오늘날 돈이 넘치게 살아가는 사람들 살림살이를 담은 사진을 바라볼 때에는 무슨 이야기가 터져나오려나 궁금하다 못해 아찔하다.


.. 이렇게 여성이 옷감을 짜거나 곡식을 찧는 모습은 식민지 여성의 전근대적이고 열악한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표상으로서 여러 매체에서 재현되었던 것들이다  ..  (42쪽)


 지난날,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에 옷감을 짜거나 곡식을 찧는 모습은 조금도 ‘전근대적’일 수 없다. 더구나 ‘열악한 사회적 지위’일 수조차 없다. 누구나 옷감을 짜고 곡식을 찧는다. 누구나 농사를 짓는다. 누구나 길쌈을 하고 물레를 잣고 실을 뽑으며 바느질을 한다. 누구나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장작을 팬다. 누구나 아이를 업고 아이한테 젖을 물린다. 누구나 물동이를 이고 누구나 지게를 멘다. 아이한테는 아이 몸에 맞는 지게를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준다. 어른은 어른한테 맞는 지게를 어른이 손수 만들어 쓴다. 지난날 이 나라 사람들을 돌아본다면, 몇몇 권력자하고 돈과 힘 있는 사람 빼고는 ‘가난하면서 수수하게 어깨 맞닿으며’ 살아가던 여느 사람이라 할 만하다. 이들 여느 사람들 삶이 어떠한가를 구경꾼 눈길이 아니라 살림꾼 눈길로 읽어야 한다. 2000년대 학자 눈길이 아닌 2000년대 여느 살림꾼 눈길로 살피고, 내 어머니와 아버지, 또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낳아 기르던 어머니와 아버지 들이 1900년대에 어떤 살림 어떤 삶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는가를 톺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하루하루 꾸리는 삶을 옳게 바라보지 못할 때에는 1900년대이든 1800년대이든 2000년대이든, 이런 때 저런 때 사람들 살림살이라든지 삶이라든지 문화라든지 잘못 읽을밖에 없다. 잘못 읽기만 한다면 그나마 낫지만, 뒤틀린 이야기를 뽑아내어 퍼뜨리기까지 한다. 《여성조선》이나 《여성동아》를 여느 아줌마들이 많이 읽는다고 하지만, 여느 아줌마들 삶이 《여성조선》이나 《여성동아》에 차근차근 실린다고 할 만하겠는가. 2100년이나 2200년을 살아가는 뒷날 학자들이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를 내놓은 학자하고 똑같은 눈길로 바라본다면, 먼 뒷날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2010년 이 하루를 《여성조선》이나 《여성동아》 같은 ‘여성잡지’를 들먹이면서 얼마나 비틀리거나 비비 꼬인 채 바라보는 셈이 될까 두렵다.

 사진을 읽든 그림을 읽든 ‘이 사람이 찍은 이 사진은 이런 생각에 젖어 이런 이야기를 쏟아내려고만 할 뿐이야’ 하는 눈길로 읽으면 너무 부질없다. 못난 마음으로 찍은 사진이라면, 사진쟁이가 얼마나 못난 마음인가를 한 줄로 밝히면 넉넉하다. 첫 한 줄은 이런 슬픈 모습을 밝히고, 다음 줄부터는 ‘못난 마음으로 얄궂게 찍은 사진’인데, 이 사진 하나를 돌아보며 오늘날 우리들로서는 새롭거나 새삼스럽거나 남달리 살필 만한 우리 발자취를 엿보는 ‘내 이야기’를 일굴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읽기는 틀에 박힌 생각으로 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삶읽기는 판에 박힌 넋으로 해서는 뒤틀리고 만다. 사진읽기나 그림읽기나 책읽기일 때에도 매한가지이다. 한국사람이 “아름다운 한국”이나 “한겨레 전통”을 사진으로 이야기한다 할 때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 한국사람 스스로 보여주는 모습이 ‘식민지 다스리던 일본 제국주의자’ 눈길에 사로잡힌 채 벗어나지 못하기에 “아름다운 한국”을 그지없이 틀에 박히게 보여주는가. 사진을 찍는 사람뿐 아니라 사진을 읽는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를 내놓은 글쓴이부터 틀에 박힌 사람이 아닌가 궁금하다.


.. 최근까지도 생산되고 있는 ‘한국의 미’나 ‘한국의 전통’ 등의 이미지 가운데 상당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식민지 시기에 생산된 ‘조선 풍속’ 유의 이미지와 상당히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 현재 관광지 기념품점에서 팔리고 있는 사진엽서들을 살펴보면, 일제 시기 조선의 풍속으로 소개되었던 사진엽서 속에서와 같이 여성들은 대개 어린아이를 업고 있거나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 혹은 개천에서 빨래를 하거나 다듬이질이나 물레질 등 가사노동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출연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향토적 정서의 이미지로 복제되고 있다 ..  (264쪽)


 일하는 사람이 있고, 노는 사람이 있다. 고단하게 일하는 사람이 있고, 나긋나긋 노는 사람이 있다. 이쁘장하게 차려입고 길을 걷는 아가씨가 있을 테며, 주름살 깊이 패인 채 길바닥에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가 있겠지. 부산시립박물관과 서울시 문화재과 학예연구사로 일한 글쓴이는 《HUMAN》(최민식 사진) 같은 사진책을 어떻게 이야기하려나. 《Unfinished Portrait》(오형근 사진) 같은 사진책은 또 어떻게 말하려나.

 학자는 학문을 하는 사람이다. 학문이란 좁은 우물에 풍덩 뛰어들어 좁은 자료를 좁은 눈길로 바라보는 일이 아니다. 학문이란 너른 바다를 너른 품으로 받아안으며 너른 눈길로 톺아보는 일이다. 너른 사람들 너른 삶을 너른 가슴으로 어루만질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학문이 꽃을 피운다. 여느 사람들로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몹시 드물며 소담스러운 사진엽서를 수없이 만지작거린 학자 한 사람이 내놓은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는 누가 어떤 마음으로 읽어 어떻게 살아가도록 돕는 이야기책이라 할 만한지 글쓴이한테 되묻고 싶다. 여느 한국사람은 틀림없이 식민지 때에 피해자였으면서, 식민지 때를 꿋꿋하고 야무지게 살아낸 살림꾼이다. (4343.11.19.쇠.ㅎㄲㅅㄱ)


―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권혁희 글,민음사 펴냄,2005.5.25./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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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농담하는 카메라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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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석제 님한테 ‘기록하고픈 삶’이란?
 [책읽기 삶읽기 7] 성석제, 《농담하는 카메라》



 소설쓰는 성석제 님이 쓴 산문책 《농담하는 카메라》를 읽다. 책날개를 펼치니 성석제 님이 사진기와 사진찍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찬찬히 나와 있다. 그래, 책이름부터 “농담하는 카메라”이니 사진과 얽혀 성석제 님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풀어내지 않았으랴 생각하며 집어들었다.

 언제였더라 《헌책방에 관한 명상》이라는 책을 낸 분이 있다. 책이름에 끌려 하마터면 이 책을 살 뻔했는데, 헌책방이라는 책쉼터를 제대로 즐기며 제대로 글로 담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기 때문에 섣불리 돈을 치르지 않았다. 먼저 책방에 찾아가 책을 좀 읽어 보았다. 그러니 웬걸, 책이름은 “헌책방에 관한 명상”이라 붙였으나 정작 헌책방 이야기는 한 줄조차 안 적었다. 더욱이 이 책 《헌책방에 관한 명상》은 헌책방을 생각하는 이야기책이 아니라 ‘좀 흔한(?)’ 문학평론이었다.

 책이름에 ‘헌책방’을 넣는다고 반드시 헌책방을 이야기해야 하지는 않는다. 책이름에 ‘자전거’를 붙인다고 꼭 자전거를 말해야 하지는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책이름에 ‘카메라’를 적었다고 으레 사진 삶을 다루어야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농담하는 카메라》라는 책은 사진기와 사진찍기 이야기를 첫머리에 잔뜩 적어 놓는다. 이렇게 하면서 몸글에는 사진 이야기는 딱 두 번 나온다. 더군다나 두 번째 사진 이야기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카파라치’에게 표시가 불분명한 갓길을 주행하는 장면을 찍혀서 상상도 하지 못한 벌과금을 물었다. 화는 났지만 어떻든 조심하게는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카메라가 미국의 총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과속단속 카메라에 곳곳의 CCTV, 수천만 대의 디카, 휴대전화 카메라가 홍수를 이루고 있고 인터넷까지 있는데(291쪽).”이다. 책을 덮으며 혼잣말을 한다. ‘제길, 속았군!’ ‘어어, 이봐, 사진기만이 아니라 펜 또한 총 구실을 한다고. 사진을 함부로 찍으면 여러 사람 목숨을 앗지만, 글 또한 섣불리 쓰면 여러 사람 마음을 다치게 한다고.’

 책을 장만한 돈이 아깝기 때문에 책을 끝까지 읽은 적이란 없다. 내 마음을 건드리며 내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책만 끝까지 읽으려 한다. 내가 책을 장만하는 데에 쓰는 돈은 내 살림돈 가운데 절반 가까이 되니까. 날마다 사들이는 책 숫자는 줄잡아 다섯 권쯤 되니까. 읽다가 ‘제대로 안 살피고 잘못 산 책’이라면 나보고 읽어 주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다른 책을 읽을 겨를을 빼앗기는 셈이다. 그나마 요사이에는 우리 아이가 두 돌이 지나며 가끔가끔 아빠가 아이랑 ‘안 놀아’ 주고 아빠가 읽고픈 책을 삼십 분이건 한 시간이건 읽는다. 아빠가 저 좋다는 책을 읽고 있으면 아이는 아빠 무릎에도 앉고(앉아서 읽으면) 등이나 허리나 배에도 앉는다(눕거나 엎드려서 읽으면). 언제나 한손에는 볼펜을 들고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데, 아이는 아빠가 손에 쥔 볼펜을 뺏으려 한다. 집에 볼펜이 수십 자루 곳곳에 널려 있는데 그예 아빠 손 볼펜을 뺏으려 하고, 아이는 아빠가 읽는 책에 뭔가 끄적이고 싶어 한다.

 엊그제 《농담하는 카메라》를 억지로 끝까지 읽는 동안 아이는 아빠한테 달라붙지 않는다. 웬일이라니 하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농담하는 카메라》를 읽으며 고작 두어 군데 밑줄을 그었을 뿐, 나로서는 ‘널리 이름있고 사랑받는’ 성석제 님 글이 썩 재미나다거나 놀랍다거나 괜찮다거나 읽을 만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책을 읽으며 자주 밑줄을 긋는다든지, 책을 읽으며 받은 느낌을 빈자리에 신나게 끄적이다 보면 아이는 쪼르르 달려와 아빠 손 볼펜을 빼앗으려 한다.

 아무래도 나로서는 ‘두 다리나 자전거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자가용 몰기를 즐겨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쓴 책은 못 읽겠다. 내가 바라보는 누리하고 너무 달라서 못 읽지는 않는다. 내가 꿈꾸는 누리하고 글쓴이가 살아가는 터전이 몹시 동떨어지기에 못 읽지도 않는다.

 자전거를 타고 읍내에 먹을거리를 사거나 볼일을 보러 다니다 보면, 요즈음은 날마다 ‘차에 밟히거나 치여 죽은 풀벌레와 나비와 잠자리’를 여러 열 마리씩 본다.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어 쌀쌀한 날씨에 아스팔트 바닥이 따뜻하니까 길가에 앉아 쉬는 메뚜기며 사마귀며 뱀이며 나비며 잠자리며 벌이며 …… 자동차는 아무 느낌이나 아픔조차 없이 이들을 짓밟는다. 자전거를 몰면서 길바닥을 잘 내려다보지 않으면 나부터 이들을 밟을까 걱정스럽다. 시골버스를 타고 읍내로 다닐 때에는 이 버스한테 밟혀 죽는 풀벌레를 느끼지 못한다. 천천히 달리는 시골버스에서 풀벌레 죽음을 못 느끼는데,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는 숱한 자가용을 모는 이들은 풀벌레 죽음이나 생채기를 한 번이라도 느끼려는지. 게다가, 내리막길을 달릴 때에 내 앞에서 하느작거리다가 자전거나 내 머리나 얼굴이나 몸에 부딪히는 나비나 잠자리는 맥을 못 추고 풀숲이나 길바닥에 뾰로롱 떨어진다. 고작 자전거에 부딪히고도 크게 다치거나 죽는 풀벌레인데 차에 부딪히면 어찌 되겠나. 아이를 안거나 걸리며 시골길을 다니며 풀벌레가 내 몸에 부딪힐 때에는 풀벌레가 다치지 않으나, 기껏 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라 하더라도 풀벌레는 크게 다친다. 다만, 오르막을 낑낑거리며 달릴 때에는 잠자리나 나비가 내 자전거 손잡이에 내려앉곤 한다.

 자동차를 몬다고 몹쓸 사람이라거나 못된 사람이라거나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동차를 몰기 때문에 ‘우리 누리와 삶터를 더 넓고 깊이 살필 수 없’으며, 이처럼 넓고 깊이 살필 수 없음을 ‘아예 못 느끼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는 ‘다름’으로 말할 수 없는 대목이다. 다른 삶이 아닌 어긋난 삶이다.

 성석제 님은 자동차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맛난 밥’을 먹으러 다닌다. 글솜씨가 꽤 있어 성석제 님 글을 좋아할 만한 분이 많겠다고 느끼지만, 사람들은 성석제 님 글에서 ‘글솜씨’ 말고 무엇을 읽거나 가슴으로 껴안을 수 있을는지는 잘 모르겠다. 글솜씨와 글재주와 글멋과 글맛에 앞서 다른 무엇인가를 글줄에 담아야 하지 않을까.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성석제 님은 성석제다운 무엇인가 뜨겁고 넉넉한 매무새를 고이 실어야 하지 않을까. “여름에는 면을 몇 번 뽑기도 전에 주인이 입은 옷이 온통 땀으로 젖어 버린다. 면을 뽑는 건 요리사지만 면이 요리사에게서 뽑아내는 것도 있지 싶을 정도다. 주인은 기계를 쓰지 않는다. 기계를 쓰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자신이 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기계를 써서 대량생산을 할 정도로 손님이 많지도 않다. 배달할 사람이 없어 배달도 하지 않는다. 요점은 손으로 면을 뽑아서 음식을 만드는 그곳이 그 면의 환경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193쪽).” 같은 글월을 읽으며 그렇겠구나 하고 생각하다가는 어딘가 아쉽다. 무언가 더 해야 할 말을 못했구나 싶고, 사람과 사물을 퍽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할 만하지만 참말 꼼꼼히 들여다보며 쓴 글인지 알쏭달쏭하다. 성석제 님한테 ‘기록하고픈 삶’이란 무엇일까? 성석제 님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다가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써서 책으로까지 내놓아 사람들한테 읽히려 하는가?

 내 오랜 골목동네 단골 중국집에 요즈음은 거의 못 간다. 맛이 없어서 못 가지 않는다. 나같이 바보스러운 단골이 괜히 이 단골집 손맛을 이곳저곳에 알리는 바람에 그만 이 집에 손님이 넘치고 말아, 지난해부터였나 아침 열한 시에서 낮 세 시 무렵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며 먹어야 하는 데로 바뀌었으며, 이곳 일꾼은 저녁까지 쉴 겨를조차 없이 일하며 밥을 못 드신단다. 하도 일이 많고 일손이 밀려 젓가락 설거지조차 못해 나무젓가락을 쓰는데다가, 낮 두어 시면 일찌감치 짜장면이 다 떨어질 뿐더러 저녁 대여섯 시이면 그날그날 마련하는 밥감(음식재료)마저 다 떨어진다. 예전에는 배달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배달을 나갈 엄두를 못 낸다. 요리사나 잡일꾼을 더 둔다면 한결 일이 수월할 테며 덜 바쁠 뿐 아니라 돈 또한 훨씬 많이 벌 테지. 그러나 내 단골 중국집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하겠는가.

 성석제 님이 《농담하는 카메라》라 하는 자그마한 산문책 하나에서 이 모든 실타래와 이음고리를 밝히거나 풀어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실타래를 풀지 않고서야 성석제 님 당신 삶과 얽힌 실타래를 건드릴 수 없다. 이러한 이음고리를 밝히지 않고서야 성석제 님 당신 삶이 놓인 자리나 뿌리를 보듬을 수 없다.

 나로서는 사랑을 담지 않은 글과 믿음을 싣지 않은 사진을 볼 때만큼 못마땅하며 힘들 때가 없다. 글재주 있는 몇몇 분들이 써 내는 잘 팔리는 글책은 도무지 못 읽어 주겠다. 손재주 있는 몇몇 분들이 엮어 내는 꽤 이름값 높은 사진책은 참말 못 봐 주겠다. 글은 손으로 끄적인다지만, 손으로 끄적이기 앞서 마음으로 쓴다. 사진은 손으로 기계 단추를 눌러 찍는다지만, 손으로 단추를 누르기 앞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

 “기록하는 글쓰기”라고 말하는 성석제 님은 《농담하는 카메라》라는 이름을 붙인 책에서 당신이 들여다보거나 마주하거나 지내 온 삶을 ‘조곤조곤 당신 깜냥껏 말맛과 말치레를 달아’ 풀어 놓는다. 아주 나쁜 책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꽤 팔릴 만하다 싶은 책이다. 그런데 성석제 님은 ‘꽤 읽힐 만’하다는 대목하고 ‘꽤 팔릴 만’하다는 대목 사이에서 헤매고 있지 않는가 싶다.

 글쓰기를 하며 살아간다는 분으로서 ‘요지 + 의’ 말투가 지나치게 자주 나오는 대목이 껄끄럽다. “손전화기를 쓰지 말라는 요지의 안내를 했다(235쪽)”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요지의’를 보는데, 글을 이렇게 쓰면 어떡하나. 88쪽 “사설시조가 있음으로 해서”라든지, 308쪽 “차의 에어컨”이라든지, 37쪽 “지리산에 처음 간 것은”이라든지, 43쪽 “어리석음(貪瞋癡)이 없는”이라든지, 10쪽 “시간을 확인한다는 실용적인 목적으로”라든지, 20쪽 “유이무삼(有二無三)하게 인정한” 같은 글월은 곰곰이 돌아보며 스스로 가다듬을 수 있기를 바란다. 덧붙여 ‘막국수’라는 이름 풀이에서 ‘막’은 “마구”만을 뜻하지 않는다. ‘막’은 “바로 이제”를 뜻하기도 한다. “이제 막 나온 국수”를 가리켜 ‘막국수’라고 할 수 있으며, 막국수집을 하는 분들 가운데 ‘막국수’를 아무렇게나 해서 먹는 국수가 아니라 그때그때 손님이 주문을 할 때에 바로바로 해서 그 자리에서 곧바로 먹도록 하는 국수라 말하며 마련하는 분이 있다. 이름 하나를 풀이할 때에 섣불리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데’ 하는 말에 휘둘리면 안 된다. (4343.10.1.쇠.ㅎㄲㅅㄱ)


― 농담하는 카메라 (성석제 글,문학동네 펴냄,2008.6.7./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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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
수지 모건스턴.알리야 모건스턴 지음, 최윤정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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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도 바보 엄마도 바보, 그런데 삶이 온통 바보
 [책읽기 삶읽기 2] 수지 모르겐스턴+알리야 모르겐스턴,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웅진지식하우스,1997)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를 읽다. 1997년에 처음 나온 책이 2010년에 새 옷을 입고 다시 나왔다. 나는 1997년 판으로 읽었다. 이 책을 우리 말로 옮긴 이는 프랑스 어린이책을 우리 말로 무척 많이 옮긴 분. 이분이 옮긴 어린이책에서도 번역이 썩 정갈하다거나 알맞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에서도 번역은 그리 내키지 않는다. 딸 말투와 어머니 말투를 잘 살렸다고 느끼지 못한다. 더욱이 어머니와 딸이 그때그때 쉴새없이 바뀌는 마음자리를 나타낸다거나 줄줄줄 늘어뜨리는 마음앓이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말투로 담아내지 못한다. 더 따스하면서 한결 부드러이 적바림하는 번역을 만나는 일이란 한낱 꿈일까.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를 처음 집을 때부터 책을 덮을 때까지, 이 책이름은 반편이일밖에 없다고 느낀다.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되지만, 엄마 또한 딸이었다. 책이름은 엄마가 바라보는 딸 모습이지, 딸이 바라보는 엄마 모습이 아니다. 새로 나온 이 책 겉에 붙은 띠종이에는 “울어 봤어? 엄마 때문에…”라는 말이 적혀 있고 “세상 모든 소녀들이 어른이 되기 위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울어 봤니? 딸 때문에.’라든지 ‘온누리 모든 어머니가 어버이가 되자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말은 붙지 않는다. 굳이 안 붙여도 될는지 모른다만, 딸을 낳은 어머니라는 이 땅 사람들은 처음 딸로 태어나 자라는 동안 오롯한 한 사람으로 크도록 옳고 바르며 참다이 삶을 배운 적이 거의 없음을 살펴야 한다. 어머니 된 사람이 딸 마음을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당신 딸이 당신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까닭은 딸한테도 당신한테도 아쉬움이 있을 텐데, 이보다 어머니 된 당신이 어린 나날부터 당신 어버이한테서 제대로 삶을 배우며 느긋하며 넉넉하고 따사롭게 살 수 있도록 너그러운 삶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런 슬프고 아픈 굴레를 당신 스스로 당신 딸아이한테 고스란히 물려주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말은 “식구들과 얼굴 맞대고 얘기를 나눌 시간도 없다(22쪽).”, “딸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26쪽).”, “날 이해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31쪽).”, “나는 엄마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서러워서 운다(57쪽).” 같은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어머니이고 딸이고 이와 같이 막혀 있는 집안 삶을 풀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참 바쁘다. 무엇 때문인지 알 겨를이 없으나, 모두들 그지없이 바쁘다.

 “집이고 학교고 다 정해진 리듬에 의해서 돌아간다. 모든 게 의무적이다(41쪽).” 같은 딸아이 외침을 읽을 무렵에는 이 책을 굳이 끝까지 들출 까닭이 없다고 깨닫는다. 어쩌면 풀이법은 바로 이 대목에 나와 있으니까. 그래도 구태여 끝까지 책을 읽고는 이 책을 집어던진다. 어머니이든 딸이든 서로가 서로를 헤아리거나 살피거나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으면서 기껏 하는 말이란 “그래도 난 이 세상 딸들을 다 준다 해도 어떤 딸과도 내 딸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173쪽).”하고 “우리는 계속 말다툼을 해댈 것이며, 서로를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부딪칠 것이다(177쪽).” 같은 이야기이다. 책 한 권을 통틀어 서로가 서로를 마음읽기 한 적이 없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말을 맨 마지막에 ‘가르침(교훈)’처럼 집어넣는다. 사람들이 말하는 흔하디흔한 연속극하고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그토록 흔하디흔하다는 연속극을 보는 사람이란 대단히 많다. 줄거리가 뻔하며 마무리 또한 뻔한 줄 안다지만 연속극을 보는 사람은 몹시 많으며, 뻔한 연속극을 보며 으레 눈물을 흘리거나 웃음을 터뜨린다.

 오늘날 도시사람들로서는 텔레비전 연속극이 ‘뻔하다’ 외고 또 외더라도 연속극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오늘날 도시 물질문명으로 가득해 버린 이 나라에서는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 같은 책이 널리 받아들여지며 읽힐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모두들 ‘참으로 바쁘게 살며 살붙이나 이웃이나 동무끼리 오붓하고 넉넉하게 이야기꽃 피우는 삶’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살붙이끼리 마음읽기를 하는 이야기꽃 한마당을 마련하지 못하는데 어떡하겠는가. 제아무리 아름답다 하거나 놀랍다 하는 영화나 책보다 살붙이나 이웃이나 동무끼리 주고받는 이야기꽃 한마당처럼 아름답거나 놀라울 수 없다. 제아무리 많은 돈과 높은 이름과 대단한 힘이라 할지라도 참답고 착하며 고운 사랑과 믿음보다 반가울 수 없다. 그렇지만 도시에서 살거나 도시 둘레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은 돈을 더 많이 더욱 빨리 벌어야 한다. 자가용을 더 빨리 몰아야 하고 기차이든 버스이든 건널목 신호쯤이야 쉽게 어기며 훨씬 빨리 달려야 하고 산에도 굴을 내고 냇물에는 다리를 놓으며 마구마구 달려야 한다. 들꽃을 사랑하거나 들새를 아끼거나 들숲을 건사한다는 마음을 품을 틈이 없는 도시 터전이다.

 고3 딸아이가 시험성적이나 대학교에 목매달지 않고 딸아이 꿈을 소롯이 간직할 수 있다거나 어머니를 비롯해 아버지가 함께 회사일+성공+명성에 발목잡히지 않으며 ‘돈을 왜 벌어야 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을 때에 바야흐로 말문이 열리며 마음문을 스스로 연다. 그예 슬픈 얼굴이 담긴 책을 슬픈 줄 모르며 읽는 사람들이 슬프다. (4343.9.21.불.ㅎㄲㅅㄱ)


―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 (수지 모르겐스턴+알리야 모르겐스턴 글,최윤정 옮김,웅진지식하우스 펴냄,1997.3.10./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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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투의 유혹 - 일본어가 우리말을 잡아먹었다고?
오경순 지음 / 이학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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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앞뒤로 살을 조금 붙인다. 예전 글대로만 놓아 두면, 제대로 헤아리지 못할 분이 있겠다고 새삼 느낀다. 마음을 쏟아 댓글을 달아 주며 이야기를 걸어 오는 분들이 고맙다. (2010.10.31.) 


 스스로 번역투에 사로잡힌 슬픈 책
 [책읽기 삶읽기 1] 오경순, 《번역투의 유혹》(이학사,2010)



 일본 문학을 우리 말로 꾸준히 옮기는 오경순 님이 내놓은 책 《번역투의 유혹》을 읽다. 드디어 이런 말을 하는 번역쟁이 한 사람 태어났구나 생각하며 몹시 기쁘게 받아들어 읽다. 그러나 이 책은 여느 사람들이 읽도록 마음을 쏟아 쓴 글이 아니라 오경순 님이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글을 조금 손질해서 묶었다. 처음 책을 쥐었다가 덮을 때까지 오직 한 군데에서만 밑줄을 그을 만한 대목을 보았다. 바로 머리말에 적은 “십여 년간 늘 번역을 가까이 하며 온몸으로 깨달은 사실 하나-역시 질 좋은 번역은 뛰어난 외국어 실력보다는 한국어 실력으로 판가름 난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5∼6쪽).”는 대목.

 슬프다. 그렇지만 어쩌랴. 밑줄을 그은 이 한 줄조차 “십여 년 간”으로 띌 대목을 붙였고, “가까이하며”로 붙일 대목을 띄어 놓았는데. 자잘한 띄어쓰기조차 곰곰이 살피지 못하는 이야기로 어찌 ‘일본 번역투가 우리 말투에 얼마나 끔찍하게 스며들었는가’를 밝힐 수 있겠는가.

 어찌 보면 오경순 님이나 출판사 일꾼으로서는 “십여 년간”이라 적바림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간’이라는 낱말이 1989년부터 뚱딴지처럼 ‘명사’에서 ‘접사’로 바뀐 까닭이나 흐름을 읽지 못한다면 이와 같이 적을밖에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제는 잘 살피지 않지만, 한글학회 국어사전에서는 ‘간’을 이름씨로 다룬다. 1989년까지 사람들이 쓰던 맞춤법은 바로 한글학회에서 마련한 맞춤법이다. ‘間’이라는 낱말은 ‘동안’을 한자로 옮겨서 쓰는 낱말일 뿐이다. 국립국어원 국어사전을 들여다보면 두 가지 ‘間’이 실리면서 “서울과 부산 간”이나 “부모와 자식 간”이나 “운동을 하든지 간에”는 띄어서 적도록 하고, “이틀간”과 “한 달간”은 붙여서 적도록 한다. 이때에 국립국어원 국어사전이 적바림한 풀이말을 읽으면, “‘동안’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라 되어 있다. 그러면 ‘동안’은 어떠한 낱말인가. 국립국어원은 ‘동안’을 ‘명사’로만 다루지, ‘접사’로 다루지 않는다. 이리하여 “3시간 동안”과 “사흘 동안”처럼 적도록 한다. 두 낱말은 뜻이 같은데 쓰임새는 다르고야 만다. 우리 말을 한결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흘 동안”이라 적는다면 띄어야 하고, 한자말을 조금 더 쓰고 싶다며 “사흘간”이라 적는다면 붙여야 한다면, 이런 맞춤법이 무슨 맞춤법이 될 수 있는가. 국어학자와 정부 국어기관 스스로 모순이 사로잡힌 모양새이다.

 생각해 보면, 정부에서는 이제 지난 1989년부터 스무 해에 걸쳐 모순에 사로잡혀 왔으나 ‘관례’처럼 쓰는 ‘間’ 같은 숱한 말마디를 바로잡을 마음이 없는지 모른다. 정부에서는 ‘間’을 접사로 나누어 다루면서 ‘그간’과 함께 ‘그동안’까지 한 낱말로 삼았다. 그러나 ‘-동안’을 따로 접사로 다루지는 않는다. 이런 모순은 ‘한국 말’은 띄도록 하고 ‘한국어’는 붙이도록 하는 데에서도 드러나고, ‘불란서어’는 붙이되 ‘프랑스 어’는 띄도록 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게다가 ‘불란서인’은 붙여야 하고 ‘프랑스 인’은 띄어야 한다.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 또한 띄어야 한다. 우리는 같은 말을 하면서도 얼토당토않다 싶도록 모순되는 말을 골치가 아프게 배워서 손이 아프도록 써야 한다. 이리하여, 오늘날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는 맞춤법이 다르다. 또 대학교하고도 맞춤법이 서로 다르며, 여느 회사와 언론기관 또한 맞춤법을 다르게 맞출 뿐 아니라, 출판사끼리도 맞춤법이 다른데, 어린이책을 만드는 출판사와 어른책을 만드는 출판사 사이에서도 다른 맞춤법을 쓰는 한편, 어린이책을 만드는 출판사 사이에서도, 또 어른책을 만드는 출판사 사이에서도 맞춤법이 갖가지이다. 바로 1989년부터 이렇게 어지럽고 어수선하게 뒤죽박죽이 되는 맞춤법을 쓰고 있다.

 《번역투의 유혹》을 들여다본다. 73쪽을 보면 김광해 교수 논문을 바탕으로 ‘우리 말 가운데 한자말이 50%가 넘는다’고 적바림하다가는, 223쪽에서는 아무런 바탕을 대지 않으며 “약 70%가 한자어이며 일본식 한자어는 15∼25%나 된다고 한다”고 적바림한다. 어떻게 50%에서 70%로 껑충 뛸 수 있지? 더구나, 우리 말 가운데 한자말이 50%입네 70%입네 하고 읊는 분들이 내놓는 통계와 자료는 무엇에 기대고 있지? 박사학위 논문쯤 된다면 이 나라 국어사전에 ‘안 실어야 하는데 억지로 실은 얄딱구리할 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나 담긴 국사학 한문’이 얼마나 되는가를 살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런 통계나 자료가 얼마나 알맞거나 올바른가를 깊이 따진 다음 숫자를 들이대야 하지 않는가.

 155쪽 번역 보기를 살피면, “불쥐의 가죽옷”으로 옮긴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불쥐의 가죽옷”이란 무엇인가. 이런 말이 말이 되는가. “불쥐 가죽으로 만든 옷”이라고 적어야 올바르다. “불쥐 가죽으로 만든 옷” 이야기는 만화책 《이누야샤》에도 나온다. 일본에서는 오랜 옛이야기로 퍼져 있다. 그런데 이런 옛이야기를 알거나 모르거나를 떠나, 토씨 ‘-의’를 잘못 썼구나 하고 깨달아야 한다. 《번역투의 유혹》이라는 책을 내며 오경순 님 스스로 번역투에 빠져 있으면 어떡하나.

 멀리 들여다볼 구석조차 없이 머리말부터 들여다보면, 6쪽에 “번역문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는 데 방해받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그 요인을 제거하고” 같은 글월이 있다. 이 자리에 쓴 토씨 ‘-의’는 얼마나 알맞을까. “번역글을 올바로 헤아리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걸림돌이 무엇인지를 살펴 이를 솎아내고”쯤으로 고쳐서 적어야 알맞을 텐데.

 68쪽을 보면 ‘가급적’과 ‘되도록’을 나란히 쓰고 있다. 보기글을 옮기자면, “일본어투 ‘-적’이 붙은 말은 가급적 줄여 써야 하며 일한 번역에서도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되도록 이해하기 쉬운”으로 나온다. ‘-적’을 줄여야 한다면서 냉큼 ‘가급적’을 쓰는 모습은 무엇인가. 게다가, 이 글월을 읽으면 ‘되도록’이라는 우리 말을 알맞게 쓰기도 한다. 스스로 앞뒤가 어긋난 채 글을 쓰는 오경순 님이라니. 그지없이 슬프고 가슴시리다. 이런 말잘못은 148쪽에도 나온다. “적절히 담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직역하면”이라는 글월인데, ‘직역(直譯)’이란 “그대로 옮김”을 뜻한다. “그대로 직역”이란 엉터리 겹말이다.

 191쪽을 보면 “원문의 ‘정신spirit’과 ‘의미sense’를 살리려고 노력했으며, ‘자연스럽고 편안한 표현easy form of expression’으로”라 적는다. 난데없이 붙이는 영어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 꾸밈말일까 궁금하다. ‘정신’과 ‘의미’라 적으면 그만이지 않을까. 조금 더 생각한다면, ‘넋’과 ‘뜻’이라 할 수 있고, ‘마음’과 ‘뜻’이라 해도 좋다.

 책 하나로 모든 이야기를 다 쏟아낼 수는 없다. 책 하나로 우리네 말삶과 글삶을 어지럽히는 실타래를 슬기롭게 풀어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스스로 번역투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살갑고 아름다운 번역밭을 일구고자 한다면, 글쓴이 오경순 님은 조금 더 많이 땀을 흘려야 하지 않으랴 싶다. 말다운 말을 한 번 더 살피고, 글다운 글을 다시금 곱씹으면서, 숱한 번역쟁이와 글쟁이가 빠져 있는 글감옥이나 글수렁을 깨달아 주며 살포시 건져내도록 도와야지 싶다.

 지식이 많다고 말을 더 잘하지 않는다. 재주가 좋다고 글을 더 잘 쓰지 않는다. 참답고 착하며 고운 마음을 갖추어야 말을 알뜰살뜰 풀어낸다.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사랑하며 믿는 매무새일 때에 비로소 말을 알차게 일군다. 지식인이라는 굴레를 스스로 털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라도 번역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4343.9.20.달.처음 씀/4343.10.31.해.고쳐씀.ㅎㄲㅅㄱ)



― 번역투의 유혹 (오경순 글,이학사 펴냄,2010.7.31./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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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ai 2010-09-23 19:55   좋아요 0 | URL
이 책에 관해 이미 쓴 글이 있으니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단, '십여 년간'에서 '간'은 의존명사(표준국어대사전 10번)가 아니라 접미사(표준국어대사전 16번)입니다. 따라서 붙여 쓰는 게 맞습니다. 맞는 말을 틀리다고 하면 곤란하죠. 참고로 '가슴시리다'는 국립국어원에서 한 단어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뭐, 자잘한 띄어쓰기 문제이지만요. 말머리에 '받아들어 읽다'는 오타라고 치고 넘어가겠습니다.

숲노래 2010-09-24 03:38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그런데 '간(間)'을 국립국어원에서 뚱딴지처럼 '접사'로 삼고 있었군요. 1989년에 정부가 맞춤법을 갑자기 바꾸기 앞서까지 '간(間)'은 틀림없이 이름씨(명사)였습니다. 정부에서 맞춤법을 님 말씀과 같이 바꾸었어도 한글학회에서는 '간'을 '접사' 아닌 '이름씨'로 여깁니다. 이를 놓고 학회와 연구원 사이에서 아직 실마리를 마련하지 않은 줄 압니다. (그러고 보면, 아직 실마리가 마련되지 않았기에 출판사마다 '간'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조금씩 다르겠군요. 1989년까지 쓰던 맞춤법이 옳다고 여기는 출판사는 이름씨로 여기며 띌 테고, 1989년부터 바뀐 맞춤법대로 배운 편집자라면 으레 붙이겠네요.)

'가슴시리다' 같은 낱말뿐 아니라 '신나다' 같은 낱말 또한 국어연구원에서는 한 낱말로 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낱말을 국어사전에 안 실렸다는 까닭으로 한 낱말로 삼지 않을 까닭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국어사전에 안 실린 '책쉼터'라든지 '책잔치'라든지 '책읽기'라든지 얼마든지 붙여서 씁니다.

'나들목'이라는 낱말은 제가 처음 공식 자리에서 쓴 뒤로 교통방송에서 받아들여 주어서 이제는 한 낱말이 되어 국어사전에도 실렸습니다. 우리 여느 삶에서 두루 쓰는 말 가운데 국어사전 올림말로 삼아야 하거나, 또는 올림말이 되지 않더라도 넉넉히 즐겨쓰는 낱말은 하나하나 우리 스스로 붙여서 쓰면서 쓰임새를 넓혀야 한다고 느낍니다.

'즐겨쓰다' 같은 낱말도 국어사전에는 안 실려 있는데, 님께서 쓰는 인터넷창을 보시면 '즐겨찾기'라는 항목이 있겠지요? 사람들이 이처럼 쓸모와 찾을모를 마련하여 쓰는 낱말이 우리 말과 글을 북돋웁니다.

덧붙여, 저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문제는 다루고 싶지 않습니다. '말을 다루는 삶'과 '글을 살피는 넋'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런 테두리에서 이번 오경순 님 책은 더없이 슬프고 딱합니다. 그동안 오경순 님 번역책을 꽤 많이 읽어 온 사람으로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몹시 가슴아팠습니다.

faai 2010-09-24 17:12   좋아요 0 | URL
저자야 저는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다른 부분은 맞는 말씀이고 제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날 출판사 중에 국립국어원이 아니라 한글학회를 따르는 곳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 식견이 짧은 탓일지도 모르나, 솔직히 그런 출판사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대다수 출판사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거기에 가독성 문제 등으로 출판사 고유 원칙을 덧붙이죠. 말씀하신 대로 '신나다' 같은 단어는 붙여 쓰는 곳도 많습니다. 논란이 있는 단어죠. '좀더' '싶어하다' 등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책쉼터' 같은 단어야 명사+명사로 볼 수 있기에 논외로 합니다).

그러니 접사 '간'이 '뚱딴지'라는 주장은 과하다 싶습니다. 저 또한 말은 언중과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근 20여 년 동안 훨씬 많은 사람이 '간'을 구분해서 썼다면, 그것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렇게 바뀌게 된 배경 또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썼기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유독 한글학회만 '간'을 의존명사로 고집해야 할 까닭이 있는지요.

만약 한글학회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치죠. 그래도 논란이 되는 단어를 어느 한 쪽 주장만을 근거로 틀렸다고 단정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자잘한 띄어쓰기'라든가 '뚱딴지'라고 표현할 사안은 아니죠.

글이 좀 길어졌습니다. 맞춤법 문제를 다루고 싶지 않다고 하셨는데 죄송합니다.

숲노래 2010-09-24 18:07   좋아요 0 | URL
'간'이 뚱딴지같이 바뀐 맞춤법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쓴 댓글에서는 그와 같이 느끼도록 되어 있군요(다시 읽어 보니). 왜 뚱딴지라는 낱말을 썼느냐 하면, 정부에서 1989년에 맞춤법을 바꿀 때에 1930년대부터 지켜 오던 한글학회 맞춤법을 한글학회 일꾼이나 다른 학자하고는 깊이 생각과 문제와 현실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갑작스레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한글학회 국어사전에서 '간'은 '의존명사'가 아닌 '명사'입니다. 요즈음 퍽 많은 책에서는 '간'을 붙이지만, 띄는 곳 또한 제법 많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숫자나 푼수는 줄어들겠지요. 책 만든 경력이 오랜 곳에서는 '국립국어원 맞춤법'을 많이 '존중'하지만 '안 따르기'도 합니다.

작은따옴표를 붙여서 말씀드리는 까닭을 잘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스무 해 동안 써 온 '관례'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큰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989년에 바꾼 맞춤법은 그동안 예순 해 가까이 써 오던 '맞춤법을 관례와 버릇과 문화를 어기고 쓰라고 강요한' 노태우 독재정권 맞춤법이거든요. 게다가 1989년에 정부가 단독으로 바꾸어 억지로 쓰도록 한 맞춤법이 2010년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자주 바뀌었는지 곰곰이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요즈음에도 해마다 몇 가지씩 갑작스레(그러니까 뚱딴지처럼) 바뀌는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꽤 많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기가 되는 표준국어대사전 풀이말과 보기글도 해마다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종이로 찍은 국어사전은 돈이 많이 들어 못 바꾸지만, 인터넷 국어사전은 틈틈이 바꿉니다. 왜 정부 관계자 스스로 '20년 동안 바꾸어 쓰는 맞춤법을 20년 앞서인 1989년에 바꾼 그대로 이어가지 않고 자꾸자꾸 바꾸고' 있을까요?

'간'을 붙여서 쓰기로 한 1989년부터 2010년까지 사람들 말버릇이 아닌 글버릇에서는 붙여서 쓰고 있다지만, 이러한 붙여쓰기는 2011년에 갑자기 띄어서 쓰도록 바뀔 수 있어요. 이런 맞춤법이 바로 오늘날 우리 나라 맞춤법이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어쩔 수 없이 우리 나라 현실에서는 '뚱딴지'라는 낱말을 쓸밖에 없습니다.

다른 많은 분들은 우리 말글 이야기를 놓고 댓글을 달 때에 참 '생각없고' '살피지 않는 엉터리 마음'으로 아무렇게나 헛말을 늘어놓습니다. faai 님께서는 곰곰이 살피고 마음을 기울여서 이야기를 해 주셔서, 저로서도 댓글 하나를 달면서 더 살피고 헤아리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모로 고맙습니다. 이렇게 댓글을 달아 주셨기 때문에, '간'이라는 낱말 하나를 둘러싸고 정부와 학회와 학자와 편집자들이 애먹어야 하는 안타까움과 '현실에서 벌어지는 슬픔'을 한결 깊이 돌아볼 수 있네요.

요사이 너무 바빠서 다른 국어사전을 제대로 들여다보며 말씀드리지 못하는데, 다음주 월요일이나 화요일쯤 틈을 내어 1940년대 국어사전부터 하나하나 살피며 '간'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찾아서 갈무리를 해야겠네요.

faai 2010-09-25 00:25   좋아요 0 | URL
시간 들여 이렇게 거듭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된장 님 말씀은 대부분 수긍합니다. 당장 실무에서는 국립국어원을 따를밖에 없지만, 실제 쓰임새와 동떨어진 표현들을 비롯해 답답한 부분이 많거든요. 어쩌다 보니 책 내용과는 계속 대화가 멀어졌습니다. 된장 님 덕분에 한글학회라든가 노태우 정권 같은 몰랐던 사실도 배우는 계기가 됐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앞으로 종종 들르겠습니다.

숲노래 2010-09-25 03:54   좋아요 0 | URL
엊저녁 곰곰이 생각해 보니, 1989년에 갑작스레 바뀌며 틈틈이 다시 고치는 정부 맞춤법에서, 지난날까지 띄어서 쓰던 '그동안-이동안-저동안'이 붙여서 쓰는 한 낱말이 되었습니다.

'간'이란 '동안'을 한자로 적은 낱말입니다. 그러니까 '동안'이 우리 말이요 '間'은 한자말입니다. 이때에 우리 말 '동안'은 토박이말이고, 한자말 '間'은 외국말이 됩니다. 우리 말과 한자말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찬찬히 헤아려 주시면 고맙겠어요. 제가 왜 '間'이라는 한자말을 외국말이라 가리키는지를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1989년까지 '간'이 '명사'였던 까닭은 우리 말 '동안'을 한자로 옮겨서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89년부터 '그동안'을 붙여서 쓰면서 '그간'이라는 낱말에서 '-間'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정부에서는 '-동안'이라는 접사를 새로 만들지 않았으며, '동안'을 명사 아닌 접사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間' 하나만 명사에서 접사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간'을 붙여서 쓰니 '몇 년간'이라는 글월에서도 붙여쓰기를 하며 접사로 다루어야 정부가 바꾼 맞춤법이 앞뒤가 맞게 되어 버렸구나 싶어요.

잘 아시겠지만, 초등학교 교과서 맞춤법에서는 '그 동안-이 동안-저 동안'처럼 띄어서 씁니다. 이는 1989년에 정부가 바꾼 맞춤법이 아닌 1930년대부터 한글학회에서 마련한 맞춤법 틀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이책에서는 '동안'하고 똑같은 뜻인 한자말 '間'은 명사인 셈입니다. 어린이책에서도 '그간'은 붙일 수 없어요. '그 간'이라고 띄어서 적어야 올바릅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을 띄거든요. '몇 해 동안'이나 '몇 년 동안'이지 '몇 해동안'이나 '몇 년동안'이 아니니까요.

정부 맞춤법을 1989년에 바꾸며 '몇 년간'처럼 적도록 했다면, 아주 마땅하게도 '몇 년동안'처럼 써야 앞뒤가 맞으며 올바릅니다. '동안'을 명사 아닌 접사로 바꾸어야 해요. 그러나 정부에서는 '동안'을 섣불리 함부로 접사로 바꾸지 못합니다. 아니, 바꿀 수 없을 테지요. 그런데 '동안'은 명사로 그대로 둘 뿐 아니라 건드리지 못하면서 '그동안-이동안-저동안'을 "사람들이 쓰기 좋도록 붙인다"는 편의성을 내세우는데, 편의성을 내세우면서 '-동안'이라는 접사 문제는 슬쩍 넘어갑니다.

이렇기 때문에 초등학교 교과서 맞춤법이 1989년부터 '뚱딴지처럼' 새삼스레 불거지고 맙니다. 정부 스스로 교과서(초등과 중등 교과서 맞춤법이 또 다릅니다)와 어른책 맞춤법이 다르고 마는 모순이 되어요.

고작 '間'이라는 낱말 하나라 할 테지만, 이런 속살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살피지 못한다면, 이번에 오경순 님이 내놓은 책은 한낱 겉훑기에 겉치레에다가 참말과 참글을 건드리지 못한 슬픈 책이 될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생각을 깊이 한다면, 제가 이렇게 구태여 길게 글을 늘여뜨리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 보았습니다. 그러나 짧게 쓰면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으니 faai 님조차 제 글이 무슨 마음으로 쓴 글인가를 읽을 수 없지 않았겠느냐 싶기도 합니다.

다음주에 1940년대 국어사전부터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생각을 다시 갈무리한다면 '間'이라는 외국말인 한자말 하나를 둘러싸고 우리 삶을 담아내는 말과 글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가를 한결 또렷하게 돌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새삼 고맙습니다.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 - 불안의 시대를 건너는 청춘들에게
손석춘 지음 / 우리교육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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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섬기는 삶이 사람을 섬기는 책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5] 손석춘,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



 거님길 바닥돌을 새로 갈아치우는 데 들일 돈으로 교육과 문화와 복지를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참 예전부터 불거져 나왔으나 아직까지 공무원 귓결에 스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공무원 귓결뿐 아니라 정치꾼 귓결에도 안 스치고 있으리라 봅니다.

 나무 한 그루가 얼마나 금세 자라는가를 헤아린다면, 굳이 돈을 들여 거리거리에 벚나무를 잔뜩 심지 않아도 넉넉합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나무심는날에 맞추어 반마다 몇 사람씩 거리거리 다니면서 어린나무 한 그루를 심거나 나무 씨앗 하나를 심어서 고이 기르도록 한다면,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가 심은 나무는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이면 아이들한테 그늘을 드리울 만큼 자랍니다. 이 나무는 이 어린이가 고등학교를 마칠 즈음에는 어른들한테까지 그늘을 드리울 수 있겠지요. 아이들이 스스로 심어 스스로 기르고 돌본 나무일 때에는 이 나무가 아름드리 나무가 되도록 사랑하고 아낍니다. 나중에 아이가 어른이 되어 저희 아이를 낳아 키운다 할 때에는 골골샅샅 숱한 이야기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도시이든 시골이든 사람들 터전을 아름다이 가꾸는 길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돈을 들여 꾸밀 때에는 언제 어디에서나 아름다움하고는 동떨어집니다. 돈을 들이지 않고 땀을 들이고 마음을 기울이며 손길을 바치면 언제나 아름다움하고 가까울 뿐 아니라, 이러한 땀과 마음과 손길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나라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4대강 살리기’라는 토목공사가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살리기’라는 이름을 붙여 ‘사업’으로 벌이고 있는데, 이 나라 대한민국은 수많은 사람들 일자리가 바로 토목공사에서 비롯합니다. 주택보급율이 일찌감치 100퍼센트가 넘었어도 아파트 짓기를 멈추지 않을 뿐더러, 제 고향마을인 인천 같은 곳은 240만 인구를 360만이 되도록 아파트를 어마어마하게 때려짓는 꿈까지 꾸고 있는 까닭이란, 바로 이와 같은 토목공사 일자리로 대한민국 사람들이 먹고살기 때문입니다.

 서민이라고 하는 사람은 서민대로 토목공사 일을 합니다. 중산층이라고 하는 사람은 중산층대로 토목공사 일을 합니다. 더욱이, 재벌이라고 하는 사람은 재벌이라고 하는 사람대로 토목공사 일을 합니다.

 알차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일을 하는 서민이 드뭅니다. 알차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일을 하는 중산층이 드뭅니다. 알차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일을 재벌이 드뭅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 많은 돈’에 휩쓸리고 있으며, 이러한 소용돌이는 광고지와 다를 바 없다는 몇몇 신문뿐 아니라 스스로 왼쪽이라느니 진보라느니 하고 내세우는 신문까지 어슷비슷합니다. 어떠한 신문이든 자유로운 목소리가 아닌 광고주를 찾아 돈을 벌어 일삯을 치르고 글삯을 내어 밥벌이를 하는 얼거리에 매여 있습니다.


.. 다만, 언제까지 기성세대의 잘못만 추궁할 일은 아닙니다. 기성세대 탓만 하다가는 소중한 10대 시절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 앞으로의 인생도 기성세대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문제는 흑백의 울타리에 갇힌 민주주의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도 가두는 데 있습니다 ..  (27, 240쪽)


 《신문 읽기의 혁명》이라는 책을 혁명처럼 내놓았던 손석춘 님이 젊은이들한테 ‘온누리를 옳게 읽는 자기계발서’ 틀거리로 엮어 내놓은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손석춘 님은 아주 너그럽게도 《신문 읽기의 혁명》 같은 책을 따로 써내 주었습니다. 이렇게 애써 《신문 읽기의 혁명》 같은 ‘지식청년 자기계발서’가 없이는 이 나라 젊은 지식인들이 ‘신문읽기’를 제대로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둘레를 조금만 돌아보아도 알 수 있는데, 신문읽기이니 영화읽기이니 책읽기이니 사진읽기이니 그림읽기이니 교육읽기이니 정치읽기이니를 ‘어떤어떤 자기계발서’를 들추어야 비로소 알아채는 지식인이 더없이 많습니다. 대학생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젊은이이든 중고등학생 푸른 넋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스스로 곧은 삶을 일구지 못하는 가운데 스스로 곧은 책을 알아보지 못하고 스스로 곧은 말을 붙들지 못합니다.

 스스로 옳고 바르게 살아가고 있으면 광고지 같은 몇몇 신문이 아무리 허접하고 엉터리보다 못한 이야기를 줄줄 읊고 있더라도 속아넘어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맑고 밝게 살아가고 있으면 누군가한테 돈을 먹고 뚱딴지 같은 소리를 퍼뜨리는 목소리가 판을 치든 떡을 치든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신문을 읽으면 올바로 읽을 올바른 삶입니다. 책을 읽으면 올바로 되새기는 올바른 넋입니다. 학교교육을 받으면 올바로 배우고 가르치는 올바른 매무새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지 못한 까닭에 《신문 읽기의 혁명》이나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 같은 ‘또다른 자기계발서’를 찾아 들고야 맙니다. 우리가 찾아 들어야 할 책이라면 사람 삶 밑바탕을 건드리는 책이어야 할 터인데, 사람 삶 밑바탕을 건드리는 책을 쥐어도 속내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찾고 새겨야 할 책이라면 자연 흐름 밑뿌리를 보듬는 책이어야 할 텐데, 자연 흐름 밑뿌리를 보듬는 책을 거듭 살피더라도 온몸으로 삭이며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막강한 자본의 힘을 배경으로 대화를 봉쇄하거나 대화의 흐름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여론몰이는 민주주의의 성숙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자본을 소유한 극소수 사람들은 여론이 공론장에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절대다수인 민중이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다 보면 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같은 이유에서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은 절대 소수에 지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이익이 국민 전체의 이익인 양 호도합니다 ..  (107쪽)


 손석춘 님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빗대어 우리 삶터가 얼마나 ‘안 민주주의’이거나 ‘민주주의를 억누르’거나 ‘민주주의와 동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참말 우리 삶터는 아주 글러먹은 독재요 봉건이요 식민지요 쇠사슬입니다. 이는 정치를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한테 머리길이를 다그치고 치마와 바지 매무새를 나무라며 오로지 대학바라기만 하도록 내몰며 아이들 스스로 제 고운 삶을 붙안지 못하게끔 가로막습니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스스로 올바른 넋 올바른 삶이라 한다면 올바른 말로 올바른 길을 이야기하면서 뒤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습니다. 헌법을 내리누르고 있는 터무니없는 교칙이라는 허울이 얼마나 그릇되어 있는가를 깨달으며, 이런 어처구니없는 교칙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녔으면 누구나 알리라 봅니다만, 아마 오늘 우리 터전에서는 제대로 느끼는 사람이 몹시 드물지 않느냐 싶은데, 학교에서는 교장이 임금님입니다. 우두머리요 왕초입니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으나 학교에서 교장이 임금님이요 우두머리요 왕초인 얼거리는 그대로입니다. 외려 나날이 더 깊어진다 할 만하고, 되레 갈수록 단단해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예전처럼 손찌검을 한다든지 몽둥이질을 한다든지 하는 일은 많이 줄었다고 하는데, 주먹다짐이 살짝 줄었지 돈과 권력으로 휘두르는 몹쓸 짓은 서슬 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국가보안법과 같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는 교칙이며 교장 권력이고 교육감 지휘봉입니다.


.. 국민은 언제나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만 강조하는 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멉니다. 법을 만들고 고치고 없애는 과정에 국민이 하나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을 때, 법치는 비로소 민주주의입니다. 한 사회가 풀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를 찾아 그것을 해결하는 법을 만들거나 고치고 없애는 일, 그것이 바로 정치입니다 ..  (126쪽)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총칼이나 주먹다짐이 아닌 말로 일을 풀어 나간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는 껍데기만 민주주의입니다. 속알맹이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서 어떤 일이고 말로 풀리는 법이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노동자와 기업주가 말을 나누며 일을 푸는 모습을 보기란 참 힘듭니다. 꼭 집회를 해야 하고 어김없이 몸싸움을 해야 합니다. 헌법에는 집회를 하는 자유가 적혀 있으나, 어떠한 일터에서도 집회를 하는 자유를 살려 주지 않습니다. 집회를 꺾어 누르는 경찰을 불러들여 흠씬 두들겨패고 감옥에 집어넣기까지 하거나 벌금을 왕창 물립니다.

 민주주의 나라가 아닌 이 나라이기 때문에 이 나라에서 말로 일을 푼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어림 반푼어치조차 안 됩니다. 이 나라에서는 어떠한 일이든 말이나 평화로운 몸짓으로 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민주주의를 바란다면, 민주주의가 없는 이 나라에 참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며 허울만 좋은 거짓 민주주의는 쓸어내고 싶다면, 말로는 아무런 일을 풀거나 맺을 수 없는 이 나라에서야말로 온몸으로 두들겨맞는 삶을 건사하고 싱긋싱긋 방긋방긋 웃으면서 평화로운 말과 몸짓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바보스러운 사람들하고 똑같이 삿대질을 한다고 민주주의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못난 엉터리들하고 마찬가지로 주먹다짐을 한다고 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들을 나무라거나 꾸짖는다고 민주주의가 싹트지 않습니다.

 그래, 손석춘 님은 ‘젊은 지식인한테 도움이 될 자기계발서’로서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를 쓰셨는데, 이 나라에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아름다운 민주주의가 꽃피우기를 바라거나 꿈꾼다면 이러한 자기계발서는 안 써야 맞습니다. 우리가 쓸 책은 자기계발서가 아닌 ‘기성세대라 하는 우리 어른 가운데 조금이나마 올바르게 생각하고 꿈꾸며 살아가는 목숨 하나’로서 ‘나는 내 터전에서 얼마나 올바르고 아름답고 슬기롭게 살아가는가’를 꾸밈없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글을 써야 합니다.


.. 그런데 왜 자신의 미래 모습이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청소년이 5퍼센트에 지나지 않을까요. 실제로는 대다수가 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왜 물구나무 선 인식을 하고 있을까요.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주권 의식을 가지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불편한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노동자를 비하하거나 노동 운동을 폄훼해 왔기 때문입니다 ..  (188∼189쪽)


 손석춘 님이 쓸 글은 아름다운 문학이어야 합니다. 손석춘 님이 젊은이 앞에 선물해 줄 책은 슬기로운 삶자락 이야기여야 합니다. 손석춘 님이 머리를 쥐어짜며 풀어낼 말마디란 ‘국어사전에 숨어 있는 예쁘장한 낱말’이 아니라 ‘저잣거리 여느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가 당신들끼리 주고받는 가장 수수하고 손쉽고 살가운 말’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을 써낸다고 해서 젊은 지식인들이 알아채 주지 않습니다. 젊은 지식인들은 아름다운 문학보다는 ‘꼴통 보수들이 휘두르는 총칼 같은 무기’에 맞설 만한 ‘총칼 같은 지식조각’들이니까요. 슬기로운 삶자락을 들려준다 한들 젊은 지식인들은 삶이 아닌 입으로 일을 하거나 싸움을 하거나 모임을 꾸리기 때문에 더없이 고단합니다. 수수하고 손쉽고 살가운 말마디로 책을 쓰면 아주 반갑지만, 이러한 책에 깃든 멋과 맛을 듬뿍 받아들이며 받아먹는 고운 젊은 넋은 얼마 안 됩니다.

 아마 ‘자기계발서’가 아닌 ‘삶책’을 쓴다면 손석춘 님은 굶어죽기 딱 알맞습니다. 그런데, 바로 굶어죽기 딱 알맞을 책을 손석춘 님 같은 분들이 써야 합니다. 굶어죽을 다짐으로 삶책을 써야지, 웬만큼 팔리고 읽힐 만한 자기계발서를 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손석춘 님이 이 땅에 참되고 착하고 고운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며 줄기를 올리고 잎을 틔워 꽃이 피어나기를 바라거나 꿈꾸고 있다고 느끼니까요. 제가 잘못 생각했나요? 제가 잘못 생각했다면 고개 숙여 뉘우칩니다. (4343.5.16.해.ㅎㄲㅅㄱ)


 ┌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우리교육,2010)
 ├ 글 : 손석춘
 └ 책값 :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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