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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나의 집 - 이언진 시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2
이언진 지음, 박희병 옮김 / 돌베개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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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으로 번역한 시는 시가 아니다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4] 박희병 번역, 《이언진 시집 : 골목길 나의 집》



 18세기 천재 시인이라고 일컫는 이언진이라는 분 시를 우리 말로 옮긴 책이 나와 있기에 기쁘게 맞아들이며 읽었습니다. 더없이 뜻깊은 책이요 그지없이 알찬 책이라고 여기며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을 번역이라고 해야 할는지 뭐라고 해야 할는지 어지러웠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영 찜찜합니다. 도무지 이언진이라는 분을 어떻게 돌아보아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호동거실》이라는 책을 우리 말로 옮긴 서울대 국문과 교수 박희병 님은 ‘호동()’이란 ‘골목길’과 같고, 이 골목길에서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책머리에 밝힙니다. ‘비천(卑賤)’이란 “지위가 낮고 꾀죄죄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예나 이제나 잘나고 이름있고 돈있는 사람이 골목길에서 살아가는 법이란 없거나 아주 드뭅니다. 오늘날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예술쟁이가 골목동네로 나들이를 와서 얼핏설핏 담 너머 구경을 하기는 하지만, 정작 골목동네에서 ‘가난하고 낮은 지위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이란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 골목길’이라는 글월이 영 못마땅합니다. 아니, 가없이 슬픕니다. 골목길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러 낮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애써 높이지 않고, 스스로를 괜히 낮추지 않습니다. 언제나 있는 그대로 살아갑니다.

 농사꾼이기에 더 훌륭하거나 거룩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라서 더 빼어나거나 남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똑같은 사람입니다. 더 많은 돈을 못 벌고 더 큰 이름을 못 누리며 더 센 힘을 뽐내지 못할 뿐, 골목길 사람은 여느 자리 사람이든 궁궐 안쪽 사람이든 다 매한가지로 애틋하고 알뜰한 목숨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호동거실》을 우리 말로 옮겼다고 하는 《골목길 나의 집》이라는 책은 골목동네 사람을 꾸밈없이 바라보고자 하는 매무새가 엿보이지 않아 슬프고 씁쓸합니다.


.. ‘골목길’은 서민이나 중산층이 사는 공간을 표상한다. 골목길의 집들에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 시인의 집은 바로 이 골목길 속에 있다. 시인은 골목길 속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응시하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골목길의 온갖 사람들을 응시하고, 조선의 현재와 미래를 응시한다. 그 응시의 결과가 바로 이 시집이다 … 《호동거실》에는 백화(중국의 구어)가 많이 구사되어 있다. 한시에는 원래 백화를 써서는 안 된다. 이런 오랜 관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언진은 백화를 여기저기 마구 사용하고 있다 ..  (6, 188쪽)


 더욱이, 이 책 《골목길 나의 집》은 번역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책을 읽은 저로서는 도무지 번역이라고 느낄 수 없습니다. ‘6언시(글자수를 여섯으로 맞추어 넉 줄로 쓴 시)’를 옮긴 번역책 《골목길 나의 집》인데, ‘6언시’는 5언시나 7언시와 견주어 자유롭게 말하고 입말(그래 봤자 중국 한문입니다)을 살려서 쓰는 문학이라고 하는데, 《골목길 나의 집》은 ‘시’가 아닌 ‘산문’으로 옮겼습니다.

 2005년에 옮겨진 《번역과 번역가들》(열린책들)이라는 책을 읽으면, 에핌 에트킨드라는 분이 “산문으로 번역된 시는 이미 시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산문도 아니라는 것이다(109쪽)”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언진 님 시를 우리 말로 옮긴 《골목길 나의 집》은 틀림없이 뜻이 있고 아름다운 문학입니다. 그러나 번역이라 할 수 없는 번역을 선보이는 한편, 18세기 이언진 님이 살아가던 골목동네를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 ‘높’습니다. 너무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눈썰미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말로 옮길 때에 ‘6언시’처럼 여섯 글자로 맞추거나 어슷비슷한 짧은 글월로 맞추기란 너무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시 문학’이라는 꼴은 갖추어야 하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모두 170 꼭지 시를 옮긴 《골목길 나의 집》이라는 책에서 열세 꼭지를 가려내어, 저 또한 어설프고 어줍잖습니다만, 이언진 님이 골목동네에서 골목사람하고 어깨동무하는 이웃으로 지내던 느낌을 헤아리면서 골목사람들 말투로 다시금 옮겨 봅니다. 책에는 우리 말로 옮긴 산문 밑에 이언진 님이 한문으로 적은 싯말을 고스란히 적어 놓았기에 저 같은 쥐대기도 어설프나마 번역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한문 원문까지 옮겨 적기란 너무 버겁고 부질없다고 느껴, 박희병 님 번역에 제 번역을 붙이기만 합니다. 박희병 님 번역은 넉 줄로 나누어 놓았는데, 이 자리에서는 두 줄로 붙입니다. 왜냐하면 이언진 님 6언시는 넉 줄이 아닌 두 줄로 나누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 문학을 옮겨서 나누려 한다면 시 문학 짜임새와 얼거리와 글맛과 글흐름을 모두 살피어 오늘날 우리 말로 가다듬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4343.5.10.달.ㅎㄲㅅㄱ)
 





(1)
새벽종 울리자, 호동의 사람들 참 분주하네.
먹을 것 위해서거나 벼슬 얻으려 해서지. 만인의 마음 나는 앉아서 안다.
(새벽종 울리자 / 골목사람 바쁘다 /
 밥 빌고 벼슬 얻으려는 / 이 마음 난 앉아서 안다)


(5)
치가(治家)하려면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어야 하고 애 기를 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야지.
‘빈이락(貧而樂)’ 이 세 글자 비결을 알면 얼굴에 근심이 깃들 리 있나.
(살림 하며 눈귀 멀고 / 아이 보며 기저귀 간다 /
 가난이 즐거우면 / 얼굴에 근심 없지)


(9)
집 나가 노닐면 고생 또 고생 집에 있으면 즐겁고 기쁘지.
몸이 늙거나 약해지지 않고 식솔이 기한(飢寒)에 떨지도 않지.
(집 나가면 괴롭고 / 집에서는 즐겁다 /
 늙어도 튼튼하고 / 굶거나 추운 식구 없다)


(15)
조정에서 누차 불러도 응하지 않는 건 범 안고 자고 뱀 품고 달리듯 위태하기 때문.
용퇴하면 화(禍) 적고 복 많을 텐데 뭣 땜에 사주 보고 점을 치는지.
(나라님 부름 싫다 / 범 안은 독뱀 방석 /
 물러서니 걱정 없다 / 내 팔자 그예 좋다)


(19)
호동에 가득한 사람들 그 모두 성현(聖賢) 배고파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도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을 지니고 있음을 맹자가 말했고 나 또한 말하네.
(골목 사람 거룩하다 / 가난하고 배고파도 /
 착하고 고운 마음 / 맹자님도 말했다)


(28)
아이 우는 소리 천뢰(天뢰)와 같아 피리와 거문고 소리보다 훨씬 낫지.
처마의 한적한 물소리 참 좋으니 똑, 똑, 똑 베개맡에서 듣고 있노라.
(아이 울음 하늘 소리 / 뭇 악기보다 좋다 /
 처맛물 조용한 소리 / 누워서 듣는 똑똑똑)


(43)
인정세태는 천만(千萬) 가지고 바다 속엔 온갖 고기가 있지.
선생의 마음은 터럭처럼 세밀해 저자사람 얼굴의 마마 자국까지 알지.
(사람 마음 갖가지 / 바다엔 숱한 고기 /
 내 마음 촘촘한 터럭 / 장사꾼 낯 다 알지)


(58)
저잣거리의 구운 떡 어린애는 그 값을 아네.
좋은 물건이면 그뿐 난 진짜 가짜 따위 가리지 않아.
(저잣거리 구운 떡 / 아이는 아는 제값 /
 좋으니 두루 좋아 / 참거짓 떠나 좋지)


(78)
밥은 하루 지나면 쉬었는가 싶고 옷은 해 지나면 낡았는가 싶지.
문장가의 난숙한 문투 한당(漢唐) 이래 어찌 안 썩을 리 있나?
(밥은 하루면 쉬고 / 옷은 한 해면 낡고 /
 어리숙한 글쟁이 / 예부터 썩을밖에)


(81)
가난한 집 식탁 썰렁하여서 반찬이란 꼴랑 된장뿐이네.
오늘 아침은 처자가 호강하누나 / 제사 지낸 서쪽 이웃 쇠고기 보내 줘.
(가난해 밥상 썰렁 / 된장 하나만 겨우 /
 오늘 아침 뜻밖에 / 젯상 고기 들어와)


(91)
진짜 보타산과 진짜 관음이 10보 옆에 있다 해도 나는 안 갈래.
내 엄마가 곧 부처 엄마니 / 집에 있으면서 엄마를 잘 공양할래.
(보살 관음 살아서 / 내 곁에 있다 해도 /
 울 엄마가 참 부처 / 울 집에서 섬기리)


(105)
손가락끝, 붓끝, 종이 사이에 하나의 부처 분명 생겨나지만
손가락끝 보고 붓끝 보고 종이를 봐도 부처는 없네.
(손붓이 빚은 부처 / 환히 그려진 모습 /
 손붓 종이 어디도 / 참 부처는 없는데)


(132)
천하엔 본래 일이 없는데 유식한 이가 만들어 내지.
책을 태워 버린 건 정말 큰 안목 그 죄도 으뜸이요, 그 공도 으뜸.
(처음부터 없던 일 / 글쟁이가 지어내 /
 책 불사름 훌륭해 / 엉터리요 멋진 일)



 ┌ 《골목길 나의 집》(돌베개,2009)
 ├ 글 : 이언진
 ├ 옮긴이 : 박희병
 └ 책값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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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퇴하는 민주주의 - 서른 살, 사회과학을 만나다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5
손석춘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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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걸음치는 지식인과 뒤로 가는 우리 삶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7] 손석춘과 일곱 사람, 《후퇴하는 민주주의》



 어제는 아침부터 여러 시간 찬바람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골목마실을 하느라 손가락과 발가락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일터인 도서관으로 돌아와서도 삼십 분 넘게 손발가락이 안 녹아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아파 했는데, 겨우 손가락을 녹이고 나서도 저녁나절까지 몸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하도 힘들고 고되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고 오늘 아침에는 여느 날보다 두 시간쯤 늦게 일어났습니다.

 이리하여 일요일 아침에 골목마다 하얗게 드리운 솜털 같은 눈밭을 뒤늦게 사진으로 담습니다. 어제 괜히 실장갑 하나만 끼고 자전거로 마실을 나왔다가 몸을 축낸 탓에 오늘은 좋은 모습을 많이 놓치고 말았는데, 아쉽게 놓친 모습이야 어쩔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금 눈발이 솔솔 날리며 이 아쉬움을 씻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몸을 잘 건사하면서 살아야 함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그래도 눈송이가 고이 내려앉은 샛골목을 찾아다니며 두 시간쯤 돌아다닙니다. 아픈 다리를 쉬려고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겨울 골목 풍경’을 촬영기에 담는 방송국 사람들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어인 일로 방송국 분들이 이렇게 후미진(?) 골목까지 다 찾아왔는지 궁금합니다만,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결에 “저기 김 나오는 모습 찍어.”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들이 골목 한켠에 자리잡고 찍느라, 굳이 이 골목으로 돌아오며 사진으로 담으려던 한 가지 모습을 못 찍고 가야 합니다. 뭐, 저야 모레이고 글피이고 다시 찾아와서 다시 찍으면 되기는 합니다. 늘 다니는 골목길이요, 언제나 하는 골목마실이니까요. 다만, 오늘 이 골목을 찾아온 방송국 분들한테는 바로 오늘 본 이 모습이 당신들 눈에 비칠 뿐 아니라 당신들 가슴에 새겨지는 골목 풍경이 되겠지요. 오래도록 꾸준히 지켜본 눈길이 아닌, 바로 오늘 한 번 와 본 취재길이니까요.


.. 텔레비전 화면에 고통받고 있는 민중들의 삶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화면에 나타나는 모습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화려한 집안입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의 아들딸은 건방지지만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순수해 보이기도 하고, 꼭 가난한 누구와 사랑을 나누죠.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 젖어들어 자본에 대한 적개심이나 적대감을 해소시켜 가고 있습니다 ..  (손석춘/19쪽)


 ‘로모’ 사진기로 사진을 퍽 오랫동안 즐겨찍는 선배하고 만나 사진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배한테서 ‘렘브란트 빛살’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에 더없이 햇빛이 좋을 때를 가리키는 빛살이라고 한다는데, 저 또한 골목마실을 하면서 이러한 빛살을 느낍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철마다 어느 때에 빛살이 더없이 고운 줄 느낍니다. 1월부터 12월까지 달마다 어느 때에 빛결이 그지없이 맑은 줄 느낍니다. 1일부터 31일까지 날마다 어느 때에 빛무리가 참으로 예쁜 줄 느낍니다.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하루 동안 빛줄기가 어떻게 달라지며 그때그때 어떤 이야기로 나한테 다가오는지를 늘 새롭게 느낍니다.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도 마찬가지인데, 저한테는 ‘빛이 가장 좋은’ 때란 없습니다. ‘빛이 가장 나쁜’ 때도 없습니다. 언제나 그때그때 다른 이야기가 있기에, 빛이 더 좋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저한테는 ‘이야기를 엮어 내는 빛’인지를 살필 노릇입니다. 저로서는 ‘어떤 이야기가 깃든 빛’인가를 느낄 노릇입니다.

 로모 사진을 찍는 선배는 “종규 씨하고 골목마실을 한 필름을 찾고 보니, ‘사는 사람’이 아니면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말을 알겠어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날은 빛이 썩 좋지 않을 때였어요. 겨울에는 해가 일찍 떨어지니까 그때에는 사진을 거의 못 찍거든요.” 하고 대꾸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꺼내는 말은 저 스스로 앞뒤가 어긋납니다. 저한테는 빛이 좋고 나쁠 때가 없다면서 다른 사람한테는 빛이 좋고 나쁠 때가 있다고 했으니까요. 왜냐하면 저는 이 동네에 늘 살면서 늘 모든 이야기를 몸으로 삭이는 사람이고, 선배는 어렵게 한 번 먼 마실을 하면서 돌아다닌 사람이거든요. 어렵게 한 번 찾아왔는데 까르띠에 브레송이 담은 ‘바로 이때’ 같은 빛살을 보여주지 못했거든요. 동지날이 가까와 오는 12월에 접어든 날은 한낮인 한 시에서 세 시 사이에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담아야 빛살이 퍽 곱고 예쁜데, 이때를 놓친 채 골목마실을 했기에 겨울골목 고운 빛줄기를 함께 느끼지 못했거든요.


.. 진짜 행복을 가지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뽑힌 이유는 참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좋은 정치인이라서가 아니라,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 뭔가 짭짤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이명박을 뽑은 것이지요 … 지금 모든 게 이명박 때문인 것처럼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이명박, 작은 이건희인 우리에게 성찰 없는 분노는 카타르시스죠 … 남보다 잘살고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불편해하는, 같이 가고 연대하는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로 만드는 것이 혁명입니다 ..  (김규항/46, 52, 56, 60쪽)


 사진 선배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문득 제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수첩에 몇 글자 끄적입니다. 선배는 ‘지식인들이 왜 이렇게 글을 어렵게 쓸까?’ 하고 묻는데, 제 깜냥으로 오늘날 우리 지식인을 돌아볼 때에 ‘지식인다운 밥그릇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조금이나마 생각있는 대학생들이 졸업논문을 쓸 때에 쉽고 바르고 깨끗한 말을 쓰고 싶어 하지만, 이렇게 ‘쉽고 바르고 깨끗한 우리 말로 논문을 쓰면 논문심사에서 떨어진다’면서, 교수들이 바라는 대로 어렵고 딱딱하고 얄궂고 뒤틀린 한자말이 가득가득한 논문을 쓰곤 합니다. 그런데, 그나마 생각있다는 대학생들이 이처럼 논문을 쓰는 일은 논문 하나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논문을 쓰는 동안 생각있던 대학생들은 ‘어렵고 딱딱하고 얄궂고 뒤틀린’ 말로 마음밭을 다스리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다스린 마음밭에 따라 동무나 식구나 이웃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으레 ‘어렵고 딱딱하고 얄궂고 뒤틀린’ 말이 튀어나옵니다.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애써 털어내거나 씻어내려고 해도 좀처럼 털어내지 못하며 도무지 씻기지 않습니다.

 어쩌면, 제도권교육은 이 같은 길들이기를 노리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맑고 쉽고 바르고 알맞춤한 말을 쓰면서 맑고 쉽고 바르고 알맞춤한 생각을 가꾸다가는 맑고 쉽고 바르고 알맞춤한 삶을 꾸리지 못하도록 가로막으려는 속셈인지 모릅니다. 초중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교까지. 아니, 대학교에 들어간 머리 좀 똑똑하다는 이들이야말로 제도권에 확 틀어박히도록 길들어 놓고자 이러한 길을 걷는지 모릅니다. 지난날 실학자 가운데 몇몇 사람만 겨우 ‘한글’로 함께 글을 썼지만, 거의 모든 지식인은 양반 사대부끼리 알아먹는 한문으로만 글을 썼습니다. 농사꾼은 한글도 잘 몰랐다고 할 테지만, 이 나라 낮은자리 여느 사람하고 주고받을 만한 글을 쓴 지식인은 지난날에 1%가 안 됩니다. 이 흐름은 일제강점기에서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해방을 맞이한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고, 독재정권이 짓누르고 있던 때에도 썩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늘날이라고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2010년을 앞두고 있는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쉽고 바르고 깨끗하며 싱그럽고 알차고 알맞춤한 우리 말’로 글을 쓰고 말을 하며 책을 내놓는 지식인을 몇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겠습니까. 저잣거리 일꾼이 알아먹을 책을 인문사회과학책으로 써내는 지식인이 몇 사람이 됩니까? 이마트 일꾼뿐 아니라 골목동네 작은 가게 일꾼들이 즐겁게 받아 읽을 문화예술책을 써내는 지식인이 몇 사람 있습니까? 아이 키우느라 바쁘고 고된 어버이한테 손쉽고 신나게 읽힐 교육책이나 정치책이나 경제책을 써내는 지식인이 몇 사람 있습니까?


.. 집이 몇 채건, 갖고 있는 집 가격을 합쳐서 7억 5천만 원이 넘는 사람이 38만 가구입니다 … 집값이 7억 5천만 원은 안 되지만 그래도 집을 한 채 이상 갖고 있는 ‘집은 있는 놈’이 두 번째 계급이에요. 이런 분들은 836만 가구로 전체 가구의 절반이 넘는 54퍼센트 정도 돼요 … 500만 가구 가까이, 전체 국민의 3분의 1정도 되는 분들은 전월세 보증금이 5천만 원도 안 돼서 집값이 설령 반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자기 집을 장만하는 것이 쉽지 않은 분들이에요. 이들이 5계급이에요 ..  (손낙구/99∼101쪽)


 잡지 ‘작은책’ 강의를 그러모은 책 《후퇴하는 민주주의》를 읽습니다. 강사로 나온 분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외칩니다. 우리 나라 민주주의는 뒷걸음을 치고 있다고. 뭐, 말장난이 아니라 참말 우리네 민주주의는 뒷걸음을 치고 있다 할 만한데, 강의에 나선 분들 가운데 ‘뒷걸음’을 말하는 분은 없습니다. 모두 ‘후퇴(後退)’를 들먹입니다. 따지고 보면, 책이름부터 ‘후퇴하는’이지 ‘뒷걸음치는’이나 ‘뒤로 가는’이 아닙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잡지 〈작은책〉은 “일하는 사람이 손쉽게 사서 손쉽게 들고 다니며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려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도 먹물깨나 드신 분들이 이 잡지에 쓰는 글은 ‘손쉽지’ 않았습니다만, 손쉽게 읽히고 손쉽게 글쓰기를 나누고자 무척 애써 왔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잡지 하나가 이토록 애쓰고 몸부림치는 동안 이 나라 지식인들은 어느 자리에서 얼마나 애쓰거나 몸부림을 치고 있었을까요. 이 나라 민주주의가 뒤로 가고 있는 동안 이 나라 지식인들은 얼마나 몸을 바치고 마음을 쏟고 있었을까요. 민주주의를 이루는 뿌리나 바탕이나 알맹이가 뒤로 가지 않도록 이 나라 지식인들은 얼마나 땀을 쏟았을까요.

 말은 지식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책은 지식으로 엮을 수 없습니다. 사진은 지식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말은 삶으로 나눕니다. 책은 삶으로 엮습니다. 사진은 삶으로 찍어 이룹니다.

 우리 식구들한테 곱고 따순 사랑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밥을 하기에 집밥이 맛있습니다. 집밥을 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밥집은 집밥을 먹듯 맛있어 맛집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우리 식구들하고 똑바르고 올바로 생각을 나누고 싶으며 글을 쓰기에 살림글(생활글)이 싱그럽고 재미있고 눈물겹고 웃음이 묻어납니다. 살림글을 쓰는 매무새로 학문을 하고 철학을 펼치며 문화와 문학을 이루고자 힘쓰기에 이 같은 손품이 담긴 책은 오래도록 꾸준히 읽힙니다. 우리 식구들부터 좋아할 수 있도록 찍기에 사진 한 장에는 힘이 있습니다. 어디에 내보이거나 공무전에 붙으려는 작품이기 앞서, 나한테 가장 살가운 사람부터 반길 수 있도록 찍는 사진이라면 사진잔치를 안 열고 사진책으로 묶지 않아도 널리널리 아름다움을 퍼뜨리며 함께합니다.


.. 어디 가서 나하고 같은 학교 나온 사람 만나면 그때부터 말 놓고, 그냥 완전히 집에서 하듯이 퍼집니다. 그리고 아닌 사람들 만나면 괜히 이질감 느끼고, 위화감 느끼고. 이 때문에 공공적인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겁니다 … 대학 와서 전공 학문을 하지 않고 딴 짓을 하는데 어떻게 대학 교육이 정상적일 수 있습니까? 작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서울대 출신 가운데 법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절반을 넘습니다 ..  (김상봉/136, 142쪽)


 여덟 사람이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펼친 《후퇴하는 민주주의》는 우리 삶터가 어느 길을 따라서 흐르는가를 잘 짚고 다룹니다. 여덟 사람이 다 다른 자리에서 당신들 깜냥껏 애쓰고 힘쓰는 모양새가 책 갈피마다 잘 스며 있습니다. 내세우는 책이 아니라 나누는 책임을 이 조그마한 책은 알뜰히 보여줍니다.

 참 야무지다 할 만합니다. 퍽 쏠쏠하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책을 덮으며 가슴 한켠이 싸합니다. 어딘가 허전합니다. 목소리는 다 옳고 맞구나 싶은데 활활 타오르는 심장 한복판을 찌르는 말마디는 찾기가 어려워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는 하나같이 알차고 다부지구나 싶은데 뜨겁게 샘솟는 눈물방울을 느낄 만한 글줄은 보이지 않아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겨울을 더욱 춥게 느끼면서 이 추운 겨울날 몹시 추위를 타면서 지낼 이웃이 누구인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알아차리기 어렵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2020년에도 이 책 《후퇴하는 민주주의》하고 똑같은 이야기가 ‘통계 숫자’만 달라진 채 다시금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네 지식인들이 뒷걸음을 친다고는 느끼지 않으나, 아니 우리네 훌륭한 지식인들이 뒷걸음을 친다고는 보이지 않으나, 아무래도 앞걸음을 꿋꿋하게 걸어가면서 스스로 한 가지 허울 두 가지 껍데기 세 가지 얼굴 네 가지 탈 다섯 가지 이름조각 여섯 가지 지갑 일곱 가지 자동차 여덟 가지 아파트 아홉 가지 가방끈을 내려놓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 가지 굳은살 두 가지 손품 세 가지 다리품 네 가지 자전거 다섯 가지 작은 보금자리 여섯 가지 낮은 어깨동무 일곱 가지 품앗이 여덟 가지 함께살기 아홉 가지 눈물웃음을 얼마나 붙잡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마침 그무렵 김문수 씨와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만나 얘기할 기회가 있어서 나름대로 설명을 했어요. 그런 사람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런 사람이 아마 이러이러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논리와 세계관을 이렇게 합리화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설명을 했더니 그 노동자가 “아휴, 난 뭐 단순하고 무식해서 그렇게 복잡한 이야긴 잘 이해가 안 되고요. 솔직히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아십니까? 배운 놈은 다 똑같다, 그런 생각밖에 안 납니다. 여기 구로동에 있는 운동 공간들 가 보세요. 그게 다 학생운동 출신들이 와서 만든 공간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학생운동 출신들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지 보세요. 노동자들만 남아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일을 몇 번 겪었어요. 그러면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인식하기 전에 ‘똑같지 않은 놈이 한 놈 정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일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  (하종강/207쪽)


 우리가 아름답게 설 수 있는 길을 이야기로만이 아닌 몸으로 보여줄 때 비로소 참다운 지식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민주주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랑스럽게 손잡을 수 있는 길을 말로만이 아닌 삶으로 들려줄 때 바야흐로 참된 지식이요 슬기이며 한 걸음 힘차게 내딛는 민주주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고운 몸짓과 맑은 눈길로 어우러질 수 있는 길을 글쪼가리 아닌 꾸덕살로 펼쳐 낼 때 시나브로 참말이고 참앎이며 왼날개와 오른날개가 다 다르게 빛나는 민주주의가 되리라 믿습니다. (4342.12.20.해.ㅎㄲㅅㄱ)


 ┌ 《후퇴하는 민주주의》(철수와영희,2009)
 ├ 글 : 손석춘, 김규항, 박노자, 손낙구, 김상봉, 김송이, 하종강, 서경석
 └ 책값 :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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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지 말라는 거야? - '금지'와 '허용' 사이 청소년을 위한 세상읽기 프로젝트 Why Not? 1
마르크 캉탱 지음, 브뤼노 살라몬 그림, 신성림 옮김 / 개마고원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ㆍ인권ㆍ평화ㆍ믿음ㆍ즐거움 모두 없는 한국
 [잠깐 읽기 53] 마르크 캉탱, 《왜 하지 말라는 거야?》



- 책이름 : 왜 하지 말라는 거야?
- 글 : 마르크 캉탱
- 그림 : 브뤼노 살라몬
- 옮긴이 : 신성림
- 펴낸곳 : 개마고원 (2009.7.30.)
- 책값 : 1만 원


 (1) 어른한테도 없고 어린이한테도 없는 인권


 청소년한테는 ‘청소년 인권’이 있다고 합니다. 어린이한테는 ‘어린이 인권’이 있다고 합니다. 아기들한테는 ‘아기 인권’이 있다고 합니다. 여성한테 ‘여성 인권’이 있고, 장애인한테 ‘장애인 인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인권 가운데 제대로 보듬거나 지키도록 하는 인권은 거의 없는 우리 나라가 아닌가 하고 느끼곤 합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무슨무슨 인권’이라 할 때 ‘무슨무슨’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나 목숨들은 거의 한 번도 제대로 된 권리를 못 누리는 사람들이거나 목숨들이곤 합니다. 길에서 차여 치여 죽는 들짐승 권리를 말한다 할 때에, 자가용을 모는 이들을 비롯해 도로공사 공무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들 목숨한테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하기 좋아 ‘청소년 인권’이고 ‘청소년 최저임금’이지만,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청소년한테 제대로 된 권리를 누리도록 돕거나 이끄는 어른이란 몹시 드뭅니다. ‘청소년 알바 최저임금’은 거의 언제나 ‘청소년 알바 최고임금’으로 머물곤 합니다.


.. 미국에서는 열여섯 살이면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습니다. 조수석에 어른을 태우고 운전하는 게 아니라 혼자서도 운전을 하지요 … 얼마 전 미국 어느 주에서는 열두 살 된 어린애가 종신금고형을 선고받았대요. 게다가 가석방될 여지도 남겨 두지 않았다나요 ..  (16쪽)


 조금 더 헤아려 봅니다. ‘남성 인권’이나 ‘재벌총수 인권’이나 ‘경찰 인권’이나 ‘기무사 요원 인권’ 같은 말은 쓰지 않습니다. 저 또한 남성입니다만, 남성들이 ‘인권을 짓밟히거나 빼앗기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재벌총수가 아주 드물게 법정에 서는 일은 있지만, 죄가 있다는 판결이 나오면서 몰래 끌어들인 검은돈을 송두리째 빼앗기거나 그동안 노동자한테 제대로 안 준 일삯을 모조리 뱉어내도록 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경찰한테도 마땅히 인권이 있어야 합니다만, 경찰한테는 인권보다 ‘특권’이나 ‘법을 넘어서는 권력’이 있어, 우리들 여느 사람들을 함부로 두들겨패거나 붙잡기도 합니다. 경찰들이 시민들 집회를 아예 ‘집회금지’로 못박고 있습니다. 이러한 ‘집회금지’를 법원에서는 ‘경찰이 집회금지를 못박는 일은 옳지 않다’는 판결을 내리지만, 경찰은 ‘옳지 않다’는 판결을 받아도 끝없이 ‘집회금지’를 밀어붙입니다. 헌법으로 집회며 결사며 언론이며 자유라고 적혀 있어도, 우리 나라 경찰은 이러한 헌법 자유를 손쉽게 깔아뭉갭니다.

 요사이 떠도는 ‘기무사 요원 사찰’을 생각해 보아도, 국가권력에 기대거나 빌붙는 이들이 이 땅 여느 사람들을 내리누르는 힘이란, 또 내리누르면서 얻는 콩고물이란 참 대단하구나 하고 새삼 느낍니다.


.. 프랑스에서는 만 6세에서 16세까지 의무적으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육받을 ‘권리’라고 하지 않고 ‘의무’라고 말하지요. 최소한 10년 동안, 모두 합해 대략 1500일 동안 학교에 다닐 의무가 있어요 ..  (20쪽)


 중학교를 다니던 때 학교에서 했던 일 하나가 떠오릅니다. 그무렵(1988∼1990년) ‘어린이 인권선언’이 우리 나라에도 나왔다고 떠오르는데, 중학생이면 ‘청소년’이지 어린이는 아니지만, ‘어린이 청소년 인권선언’으로 삼아 우리들(중학생)한테도 권리가 있음을 학교 교사들이 깨닫기를 바라면서, 이 인권선언글을 어디에선가 얻어서 전지에 펜으로 또박또박 적어서 학교장한테 겨우 허락을 받아 한 주 동안 건물 들머리에 세워 놓은 적이 있습니다.

 기껏 종이 한 장짜리 인권선언이요, 이런 글을 애써 전지에 적어서 세워 놓아도 교사들은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외려 히죽히죽 웃으면서 “인권? 웃기지 말아? 니들한테 무슨 인권이 있어?” 하던 교사가 참 많았습니다. 이들은 우리한테 뺨따귀질이나 주먹질이나 몽둥이질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그 교사들 나이는 오늘날 제 나이보다 몇 살 어린 나이인데, 고작 서른 안팎인 젊은 교사들이 무엇 때문에 뿔이 났다고 “오늘 나한테 걸리면 한 놈은 내 손에 죽는다”고 을러대면서, 교단에서 동무녀석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도 주먹질을 멈추지 않곤 했습니다. 밀걸레자루가 여럿 부러지고 동무녀석이 교단에서 고꾸라졌어도 등짝에다가 부러진 밀걸레자루를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곤 했습니다. 코앞에서 이런 모습을 거의 날마다 지켜보면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헌병이 우리 독립운동가를 이렇게 때리고 괴롭혔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벌써 그때 일이 스무 해나 지난 일이라니 까마득하다고 느끼는 한편, 그 뒤로 스무 해가 지난 2009년이라 하여도 주먹다짐이나 욕부림은 그치지 않는 굴레가 아닌가 싶습니다. 옛날 같은 주먹다짐이나 욕부림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이들끼리 서로를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새로운 짓거리는 끊임없이 살아나고, 또다른 교실폭력과 학교폭력이 되풀이되지 않느냐 싶습니다.


.. 차를 운전하고 있는 성인의 경우를 한번 볼까요. 그는 몹시 바빠서 다른 운전자들에게 화를 냅니다. 그가 볼 때, 다른 운전자들이 더 빨리 갈 수 있는데도 빨리 운전하지 않는 것 같거든요. 그는 마치 자기 약속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듯 자기를 지체하게 만드는 느림보를 마구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 느림보는 단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제한속도를 준수하고 있을 뿐이에요. 다들 똑같은 필요성에 따라 움직이는 건 아니거든요! ..  (60쪽)


 몇몇 교사가 말썽쟁이이기 때문일까요? 몇몇 교사들은 교대에 다닐 때부터 당신 스승한테서 ‘애들은 말보다 주먹이 앞서면 말을 잘 듣는다’고 배웠기 때문일까요? 우리 사회에 민주가 튼튼히 뿌리내리고 평화가 아름다이 자리잡으면 이와 같은 주먹다짐은 사라질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주먹다짐이 살아숨쉴 뿐 아니라 영화나 연속극 따위에 자꾸만 그려지는 까닭은, 아무래도 우리 정치판과 사회판과 경제판과 문화판 모두 끝없는 싸움박질과 밥그릇싸움이 피튀기듯 이루어지기 때문일까요?

 예전 같은 부정선거는 없다지만, 정치가 민주와 평화와 통일로 이루어졌다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한 표 권리가 있다지만, 사회가 민주와 평화와 통일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는 느끼기 힘듭니다.

 ‘함께 하자’는 목소리는 듣기 어렵고 ‘하지 말라’는 목소리만 들립니다. 너른 터는 하나둘 사라지면서 주차장과 쇼핑몰이 되어 갑니다(또는 ‘허울좋은 광장’으로 바뀝니다). 아이들이 뛰어놀 골목길이나 운동장이나 마당이 없는 한편, 어른들 또한 마음껏 어우러지거나 얼싸안을 골목길이나 운동장이나 마당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쉴 자리가 없고 어른들 또한 쉴 자리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제 어버이나 이웃 어른한테서 세상을 하나하나 배우고 어른들 일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차근차근 배우거나 따라할 틈이 없습니다. 돈벌이 일은 조각조각 갈리고, 돈벌이 일을 하느라 식구들은 서로서로 쪼개집니다.


.. 속임수를 쓰는 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는 짓입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특별한 이야기를 꾸며낼 필요도 없지요 ..  (98쪽)


 요 며칠 인천에서 서울로 일하러 오가면서 아침저녁으로 지옥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옥철에서 시달리는 동안 서로서로 괴롭겠지만, 서로서로 악다구니가 되어 옆사람이 짜부가 되건 오징어떡이 되건 몸이 눌리건 발을 밟히건 ‘나까지 전철에 더 타야’ 하고 ‘내가 더 타면 그때부터는 그만’이라는 생각을 저절로 품지 않느냐 싶습니다. 처음부터 서로를 미워하거나 괴롭힐 마음은 아니었을지라도 하루하루 지옥철에 시달리고 길들면서 시나브로 사랑과 믿음이 옅어지거나 스러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서로서로 더 많은 돈을 벌면 그만이요, 더 널리 사랑을 나누거나 더 깊이 믿음을 함께하려는 생각은 못 품지 않느냐 싶습니다.
 







 (2) 프랑스사람이 말하는 《왜 하지 말라는 거야?》


 프랑스 어른이 프랑스 어린이한테 ‘인권이란 무엇인가’를 들려주려고 쓴 책 《왜 하지 말라는 거야?》를 읽습니다. 나라안에서도 나라안 어린이한테 우리네 사람 권리란 무엇인가를 들려주고자 이와 비슷한 책을 더러더러 쓰곤 합니다. 다만, 아직가지 나라안 사람들이 쓰는 ‘제대로 누릴 사람 권리’ 이야기는 겉핥기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속깊이 파고들지 못하며, 간지러운 구석을 긁지 못합니다. 골고루 들여다보지 못하며, 아픈 생채기를 보듬지 못합니다. 이와 견주어 《왜 하지 말라는 거야?》는 간지럽고 아픈 자리를 살며시 건드리면서 퍽 쉽고 슬기롭게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 사람들이 어떤 일을 열심히 금지해 놓고 정작 자기 자신에겐 허용하는 경우가 너무 많거든요! 간혹 더 나쁜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전직 장관이 범법행위로 유죄선거를 받았다는 뉴스를 곧잘 접할 거예요. 결국, 금지조항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 자신이 정작 금지조항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거죠 ..  (111∼112쪽)


 오늘날 우리 세상에는 사랑도 자유도 평화도 통일도 믿음도 즐거움도 모두 사라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인권 또한 저절로 사라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너도 나도 외는 말마디, ‘먹고살기 힘들다’와 ‘먹고살기 바쁘다’에 눌리고 밟힙니다. ‘살아남아야 한다’와 ‘살려면 어찌할 수 없다’에 뭉개지고 차입니다.

 우리 어른들 스스로 아이들 앞에서 사랑하면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자유롭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평화로이 어깨동무하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통일을 꿈꾸지 않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서로서로 믿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즐거운 일과 놀이를 함께 나누지 않습니다.

 이런 판에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이런 가운데 아이들은 어른들이 읊는 말마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어른들이 몸으로 보여주기로는 형편없거나 보잘것없거나 얄딱구리한데,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이들한테는 영어 동화책이나 영어 교재가 아닌 《왜 하지 말라는 거야?》 같은 책을 쥐어 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아이들한테 이 책을 쥐어 주기 앞서, 우리 어른들부터 《왜 하지 말라는 거야?》 같은 책을 곰곰이 읽고 되새기고 톺아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책을 쥐어 주고픈 어른들은, 어른들 스스로 먼저 좋은 책을 찾아 읽고 삭이고 받아들이면서 좋은 삶을 일구어야지 싶습니다.


.. 안타깝게도 어떤 것이 금지인지 검열인지 종종 그 경계가 모호할 때가 있습니다. 검열관들 쪽에서, 그건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거라고 주장하면서 일부러 경계를 흐려 놓는 경우도 많지요 ..  (137쪽)


 그런데, 《왜 하지 말라는 거야?》라는 책은 퍽 아쉽습니다. 틀림없이 간지러운 곳을 긁는 책이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제 간지러움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어김없이 생채기를 달래는 책이요 아픈 구석을 찌르는 책이지만, 제 생채기에서는 고름이 철철 흐르고 제 아픈 구석에는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습니다.

 프랑스하고 한국이라는 나라는 너무 벌어져 있기 때문일까요. 한국에서는 프랑스에서 이루어지는 ‘인권’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왜 하지 말라는 거야?》 같은 프랑스 책은 퍽 높은 눈높이에서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길을 다루고 있지만, 우리는 아주 밑바닥에서 끝없이 뒹굴고만 있기 때문일까요.

 애써 좋은 책 하나를 우리 말로 옮겨내어 이 땅 아이들한테 좋은 마음밥이 되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어른들은 왜 우리 터전에서 우리 삶을 우리 스스로 헤아리면서 아이들한테 참다이 마음밥이 되고 슬기롭고 따숩게 마음동무가 될 책을 우리 땀을 흘리면서 빚어내지 못할까요? 왜 이런 일에는 깊이 힘을 쏟지 못할까요? 이러한 책이 돈이 되든 안 되든, 이러한 책을 펴내어 잘 팔리든 안 팔리든, 참말 한국땅에 꼭 하나쯤 있어야 할 ‘맑고 밝고 환하고 고운 권리 이야기’를 신나게 펼칠 어른들이란 도무지 찾아보아서는 안 될 노릇인가요?

 우리가 우리 자유를 지키자면 우리 자유를 있는 힘껏 부리며 자유로운 이야기를 담는 책을 빚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사람된 권리를 누리자면 우리 사람된 권리를 용쓰며 뽑아내어 사람된 권리 이야기를 다루는 책을 일구어야 합니다. 바라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고, 참되게 바라는 매무새를 이어가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으며, 참되게 바라는 매무새대로 우리 삶을 단단히 붙잡고 부둥켜안도 부대껴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4342.8.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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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람의 말 - 6·9 작가선언
작가선언 6·9 지음 / 이매진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미친이는 미친소와 함께 물러나라고 외치려면
 [잠깐 읽기 51] 작가선언 6ㆍ9, 《“이것은 사람의 말”》



- 책이름 : “이것은 사람의 말”, 6ㆍ9작가선언
- 글 : 작가선언 6ㆍ9, 192 사람
- 펴낸곳 : 이매진 (2009.6.29.)
- 책값 : 5000원



 (1) 오늘 우리가 하는 일과 읊는 말


 아침에 일본 만화쟁이 ‘나가이 고’ 님 작품인 《마징가 Z》와 《그레이트 마징가》와 《Z 마징가》 아홉 권을 금세 읽어냅니다. 그러께에도 한 번 보았고 지난해에도 한 번 보았는데, 오늘 아침에 스캐너로 겉그림을 긁다가 문득 한 번 다시 넘겨 보는데, 한 번 이야기에 빠져드니까, 아홉 권을 내리 다 읽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합니다.

 일본에서는 1970년대 첫머리에 그렸고, 우리 나라에도 곧이어 들어온 ‘마징가 제트’가 일본 로봇이었음을 어릴 때부터 찬찬히 알았던 사람은 드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어릴 때에는 알지 못했으며, 어른들은 옳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일본이라 해서 굳이 꺼려야 할 까닭이 없으며, 일본이든 미국이든 중국이든 아름답게 일구는 문화와 문학이라면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면서 즐길 노릇입니다.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우리들은 이웃나라 훌륭한 문화와 예술을 꾸밈없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 스스로 일구는 문화와 예술 또한 꾸밈없이 바라보지 못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 반성이 멈추는 순간 우리의 말은 오물이 되고, 민주주의가 멈추는 순간 우리의 삶은 허깨비가 된다. (고나리)
― 국민을 잠재적 폭도로 여기는 정권은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고인환)
― 민주주의는 공기와 같아서, 숨쉴 수 없게 된 후에야 그것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권혁웅)



 모처럼 되넘기며 읽는데, 지난해와 그러께 책장을 넘길 때에는 눈여겨보지 못하던 대목 몇 군데가 새삼스레 눈에 박힙니다. 1권 첫머리에서는 “이 녀석의 악마와 같은 파괴력을 써서, 신과 같은 온화한 마음으로, 내가 세계를 구한다!” 하고 외치는 대목이 눈에 뜨이고, 4권 첫머리에서는 “올림푸스의 별들도 예전엔 괴수신이 아니라 지구와 똑같은 생물의 사람들로 가득했었지. 지구인보다 훨씬 거인이긴 했지만 지구인과 다름없는 생활이 있고, 사람들 사이에는 ‘사랑’이 있었어!” 하고 외는 대목이 눈에 뜨입니다.

 마징가 로봇 이야기를 살피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으로 로봇들이 때리고 부수고 죽이고 죽고’ 하면서 지구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싸움판이 나옵니다. 그저 싸우고 또 싸웁니다. 그예 죽이고 또 죽입니다. 나쁜 마음으로 죽이고 착한 마음으로 죽입니다. 나쁜 이도 착한 이도 맞은편보다 더 힘이 세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왜 싸우려 하는지, 왜 서로서로 악다구니가 되어 괴롭히고 들볶으며 ‘세계 정복’을 하려고 드는지는 밝히지 못합니다. 오로지 ‘세계 정복’이 꿈일 뿐입니다. 세계 정복을 꿈꾸는 이들은 어디에서 돈이 철철 흘러넘쳐 그 숱한 무기와 로봇을 만드는지, 또 지구를 지키는 쪽 또한 어느 메에서 돈이 콸콸 솟아나서 그 대단한 무기와 로봇을 만드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나쁜 쪽이든 착한 쪽이든 온통 전쟁무기 만드는 데에 돈과 땀과 힘을 바칠 뿐이요, 싸움로봇이 휩쓸면 그 어떤 문명이든 문화이든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됩니다. 주먹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이 아닌, 주먹 앞에 역사가 없고 문화가 없으며 교육이 없습니다. 오직 주먹힘 하나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납니다.


― 문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경제발전 운운하는 거창한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 아래 억압된 정직한 욕망이다. (김남혁)
― 이제 더는 하소연할 길조차 없는 억울한 사람들을 때리지 마라. (김연수)
― 술 마시고 깨어 보니 역사를 몽땅 훔쳐가 버렸네. 일어나자, 친구야. 도둑 잡으러 가야지. (신용목)



 어제부터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책을 죽 읽다 보니, 자연 삶터에서 모든 목숨붙이는 ‘텃세, 제거, 경쟁, 분산’에 따라 서로서로 살아남기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을 읽다가 ‘경쟁’이라는 말마디에 오래도록 눈길이 멎습니다. 말 그대로 좀더 힘세고 좀더 슬기로우며 좀더 튼튼한 녀석들이 살아남습니다. 좀더 여리고 좀더 어리숙하며 좀더 가냘픈 녀석들은 밀려나다가 죽어납니다.

 그런데 이 ‘겨루기’란 푸나무와 짐승한테서만 볼 수 있지 않다고 느낍니다. 사람 또한 아주 예전부터 겨루기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겨루기가 아닌 텃세인지 모르며 ‘없애기(죽이기, 제거)’라 할 수도 있고, ‘나누어 모여 살기(공동체, 분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겨루기를 하지 않고 ‘어깨동무’나 ‘품앗이’를 하기도 할 테며, ‘사랑’과 ‘나눔’으로 서로 함께 살아나기도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푸나무이든 짐승이든 서로서로 기대어 살아가기도 하니까요.

 그나저나 이 ‘겨루기’라는 대목을 오래도록 곱씹어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터는 어찌 된 노릇인지 그렇게 ‘경제성장’을 높디높이 이루고 있다고 하지만, 겨루기는 나날이 거세고 거칠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터는 국민소득도 오르고 물질문명도 거의 마음껏 누리는 데다가 자가용 끌면 못 가는 데가 없는 판인데, 이렇게 느긋하게 잘살 수 있게 되었는데도, 더욱 불꽃 튀도록 겨루기를 하고 있습니다. 더더욱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입니다. 남보다 더 높이 오르려 하고, 남보다 더 누리려 하며, 남보다 더 가지려 합니다. 나한테 없으면 빼앗든지 못 쓰게 하든지 들볶든지 깔보든지 깎아내리든지 합니다.


― 사람의 마을에는 사람이 살아야 한다. 그곳에도 사람이 지나갑니까? (우대식)
― 사랑이나 꿈 때문에 절망해 볼 권리를 달라. 돈 때문이 아니라. (윤이형)
― 내 이웃이 헌법적 자유와 권리를 빼앗기고 도멸을 삼키며 죽어갈 때, 나는 어디에 있었나? (이안)


 아주 많은 어버이와 교사 들은, 아이들한테 일찍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한글을 떼도록 하고 무슨무슨 책을 읽히며 ‘영재교육-재능교육’ 따위를 ‘조기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시킵니다. 사교육이든 공교육이든 아이한테 더 많은 지식을 더 어릴 때부터 머리속에 집어넣도록 하는 데에 힘쏟고 있는 가운데, 아이들이 집 바깥으로 나와 신나게 뛰어놀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놀 골목이나 놀이터를 깡그리 없앤 데다가 너른터(광장)마저 꽁꽁 틀어막았는데, 이렇게 없애고 틀어막고서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유익한 교육방송’을 보여주기만 합니다. ‘체험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자연 이야기도 체험학습’이요, ‘동네 문화와 역사도 체험학습’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터에서 땅을 딛고 놀고 넘어지고 어울리는 길은 뿌리뽑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이웃을 보면서 역사와 문화를 몸과 몸으로 배우도록 하는 길은 내팽개칩니다.

 그러고 나서 지식인들은 한 마디씩 합니다. ‘시골에 아이들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도시에는 아이들이 많지만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권력을 움켜쥐었다는 제도권 공무원과 정치꾼이 아이들을 이처럼 못살게 군다지만, 제도권 공무원과 정치꾼을 누가 뽑았겠습니까. 제도권 공무원과 정치꾼이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어른들이 뽑은 공무원과 정치꾼입니다. 바로 우리 어버이들 스스로 공무원이 되어 일을 해서 아이들을 먹여살리고, 정치꾼이 되어 집식구를 거느립니다.


― 이성은 행동하지 않는다. 너의 울고 있는 말들을 보여줘. (정은경)
― 자유와 사랑을 원합니다. (허윤진)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먼저 바꾸어야 하는데,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은 바꾸지 않는 가운데 화살만 남들한테 돌리고 있다고 할까요.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먼저 들여다보고 느껴야 하는데,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은 거들떠보지 않거나 지나치는 가운데 남 탓과 남 이야기만 하고 있다고 할까요. 우리 아이들은 바로 우리 모습을 고스란히 바라보고 남김없이 받아들이면서 크고 있는데, 정작 우리들은 우리 아이들 앞에서 아름답고 훌륭하고 싱그럽게 살아가지 않고 있다고 할까요. 우리는 우리 모습과 삶을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주기 마련이지만, 우리 참모습은 숨기거나 감추거나 내버린 채 나라밖 그럴싸한 껍데기만 아이들한테 들씌우려고 한달까요.


 (2) 《“이것은 사람의 말”》에 담긴 글쟁이들 말


 ‘작가선언 6ㆍ9’라는 이름으로 글쟁이 백아흔두 사람이 한 마디씩 외친 목소리를 그러모은 책 《“이것은 사람의 말”》을 읽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은 책상맡에서 머리만 굴리며 펜놀림으로 뽑아낸 글모음이 아닙니다. 보름이라는 짧은 동안에 엮어낸 글모음이기는 하나, 너른터로 뛰쳐나와 촛불을 들든 돌멩이를 들든 빈손으로 말없이 선 채로 자리를 지키든 하던 글쟁이들이 온몸으로 부대끼며 헤아리던 목소리를 담아냅니다.

 글쟁이 백아흔두 사람 목소리는 꼭 한 사람한테 가 닿습니다. 아니, 꼭 한 사람한테 보내려고 쏘아붙이는 말화살이요 말칼입니다. 바로, 이명박 대통령 한 사람한테.

 그렇지만 이 책을 쥐어들어 읽는 저는, 백아흔두 사람 외마디소리를 읽는 저로서는, ‘틀림없이 이명박 대통령한테 하고픈 말’을 외쳤다는 백아흔두 사람이었을 터이나, 어쩐지 제대로 화살을 쏘는 말을 꺼낸 사람은 꼭 두 사람만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퍽 부질없는 말잔치, 꽤 달콤한 말사탕, 제법 날카로운 듯한 말채찍, 썩 힘알이없는 옹알이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 이명박 정권은 문화와 민주를 파괴하는 광기의 야만을 국민 앞에 사죄하고 물러가라. (박민규)


 아무래도 이명박 대통령 탓만 할 수는 없으리라 봅니다. 대통령 한 사람만 잘못했다고 해서 우리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지는 않으니까요. 우리 스스로 좀더 옳고 바르게 살아내지 못한 탓에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일 테니까요.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 나 스스로한테 외치는 말마디’조차, 나한테서 무엇이 잘못되거나 어긋나거나 뒤틀렸다고 느끼는가 하는 대목에서 엉성궂습니다. 흐리멍덩합니다. 모두들 글쟁이라서 글솜씨가 빼어나서 ‘은유와 비유’로 이야기를 펼치시는지 궁금합니다만,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겠다는 “작가선언 6ㆍ9”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청계천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살아 있는 물이 아니다. 이대로 모두가 유령이 될 순 없다. (정주아)


 《“이것은 사람의 말”》을 펴낸 출판사에서는, 오늘날 정권이 엉뚱한 길로 마구 내달리는 모습을 꾸짖으려는 마음으로 책을 펴냈다고 합니다. 우리 스스로 이 몹쓸 정권을 바로잡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값을 퍽 값싸게(5000원) 붙여서 내놓았다고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을 했다고 느끼는 한편, ‘작가선언 6ㆍ9’를 더욱 힘차고 또렷하고 널리 나누려 하던 마음결이라면 한 쪽에 한 줄씩 넣는 책짜임이 아닌, 백아흔두 줄에 이르는 외침을 더 작은 판으로 더 수수하게 묶고 책값은 아예 1000원쯤 붙일 수 있도록 엮어내어 수만 권을 찍어서 뿌려야 알맞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백아흔두 줄을 열 몇 쪽짜리 더 작은 책자로 꾸며 한 권에 500원씩만 받으면서 수십만 권을 찍어서 뿌려야 한결 알맞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뭇소리 없이 입다물고 있는 우리들이 아님을 느끼니 서운하지는 않습니다. 이만한 몸부림이라도 보여주는 글쟁이들이니, 이와 같은 발버둥으로라도 치면서 우리 삶터를 새롭게 바라보고 부둥켜안고자 하니 반갑습니다. (4342.8.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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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표절하라 - 세상을 바꾸는 18가지 즐거운 상상
트래피즈 컬렉티브 지음, 황성원 옮김 / 이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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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은 ‘구호’가 아닌 ‘삶’이다
 [잠깐 읽기 49] 트래피즈 컬렉티브, 《혁명을 표절하라》



- 책이름 : 혁명을 표절하라
- 글 : 트래피즈 컬렉티브
- 옮긴이 : 황성원
- 펴낸곳 : 이후 (2009.4.9.)
- 책값 : 2만 원


 영어로 나온 책에는 “Do it yourself”라는 이름이 붙은 《혁명을 표절하라》를 읽습니다. 이 책은 모두 열여덟 갈래로 나누어서,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내 삶과 내 삶터와 내 나라를 뜯어고칠(혁명) 수 있는 길이란 무엇인가’를 따지고 있습니다.

 한글판 책이름이 “혁명을 표절하라”처럼 세게(?) 나와서 그렇지, 이 책은 반체제 불순분자(?)들 이야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반체제’가 될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상 흐름을 그대로 둔다면 왼날개이든 오른날개이든 가리지 않고 쫄딱 무너지면서 죽음바다에 빠질 수 있을 테니까요. 오늘은 잘 빠진 자가용을 싱싱 몰면서 거리낌없이 즐긴다 하여도, 이처럼 즐길 수 있는 나날이 앞으로 얼마나 있겠습니까. 태평양 섬나라 별 다섯짜리 호텔에서 멋진(?) 나날을 보내며 신나게 노닥거릴 수 있다 하여도, 이렇게 태평양 섬나라에 호텔을 짓고 비행기가 날게 하고 자가용이 달리게 하는 만큼 우리네 삶터와 자연이 얼마나 허물어지거나 망가지고 있는가요.


.. 우리가 일생 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기여하는 것은 투표용지에 있는 후보자나 정당에 도장을 찍는 일뿐이다 … 불쌍하게도 우리는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하는 대신 일생 동안 15차례 정도 국회의원 투표를 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것을 민주적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민주적 원칙들이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지역들이 많이 있다 … 대부분의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력과 지위, 돈이다 ..  (21, 94쪽)


 지난주에 어느 책읽기 모임에 함께했습니다. 그때 마침 이 책 《혁명을 표절하라》를 다루었습니다. 예닐곱 사람이 모여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서로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면 좋은가를 나누는데, 다들 갈팡질팡입니다. 좀처럼 이 책 줄거리를 새기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한테 정부는 꼭 있어야 하는가?’와 ‘우리한테 군대는 꼭 있어야 하느냐?’ 두 가지 이야기로 제법 오래도록 말이 오갔습니다.


.. 많은 사람들은 “위대한 날” 혹은 “혁명”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면서 그날 이후에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는, 무거운 기대의 짐을 지고 산다. 하지만 현실은 더 느리고 예측불가능하며,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향하는 길은 곧은 직선이 아니다 … 언론의 미래는 훨씬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요청들이 그 내용을 장악하는 훨씬 더 큰 복합체의 모습을 띠게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변두리에서 적은 자원을 가지고도 발행 부수를 적게 하고 주류에 대항하겠다는 자세를 버리면, 대안적인 관점을 가진 집단들이 신문과 전단지, 팸플릿, 자립형 잡지를 발행할 수 있다 … 사람들에게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아마존 열대우림을 파괴하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설득한다면, 이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돈독이 오른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당신 마을 주변에 있는 녹지 공간에 건설허가를 어떻게 받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독자들은 왜 당신이 탐욕과 돈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종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  (25, 383, 399쪽)


 인도가 평화로운 나라이면서 홀로 우뚝 서는 나라가 되기를 꿈꾼 간디 님은 ‘주먹힘 안 쓰고 굳이 맞서지 않기’를 외치면서 몸소 이와 같이 살았습니다. 《전쟁과 평화》라는 문학뿐 아니라 《국가는 폭력이다》와 같은 책을 써낸 톨스토이 님은 ‘군대 때문에 우리 삶이 더 팍팍해진다’고 외치면서, ‘전쟁을 일으키는 쪽은 이웃한 나쁜 나라 정부가 아닌, 바로 군대힘을 거머쥔 우리 나라 정부’임을 밝혀냈습니다.

 군수산업이니 군산복합체이니 하는 말도 있습니다만, 군대라는 곳은 총칼이라는 무기만 들고 있지 않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매한가지이지만, 군대를 거느리면서 가장 많이 들이는 돈은 바로 ‘인건비’입니다. 군인한테 주는 일삯과 군인을 먹여살리는 밥값과 군인을 입히고 재우는 옷값과 집값 따위입니다. 총칼을 장만하는 데에도 적잖이 큰 돈을 쓰지만, ‘수십만 군인을 부리는 데’에 더 많은 돈이 쓰입니다. 그리고, 군인이 쓸 물건을 만들고 군인이 잠잘 집을 만들고 군인이 휘두를 총칼을 만들며 군인이 먹을 밥을 빚는 따위 일을 하는 데에 훨씬 더 많은 사람들 품과 땀과 세월이 들어야 합니다.

 이런 데까지 통계를 내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봅니다만, 군대를 두는 우리들은 ‘나라를 지키는 일’보다 ‘군대를 지키는 일’에 어마어마한 돈과 품과 땀을 바치면서(어쩌면 나라살림 절반 넘게 바쳐진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정작 우리네 교육과 문화와 복지와 사회와 기술과 의료와 기초생활을 다스리는 데에는 거의 아무런 돈이든 품이든 땀이든 안 바치고 있는 셈입니다.


.. 값싼 석유는 갈수록 희소해지고, 이주가 증가하며, 기후 혼란은 악화되고, 오염이 폭증하고 있다. 생존은 점점 더 격한 투쟁이 될 것이다 … 의약품을 좀더 높은 가격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팔 수 있는 북반구에서는 시장화할 수 있는 약물들에 대한 연구 개발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다 … 빈곤한 국가에 있는 사람들의 약 50퍼센트는 형편없는 수질과 위생 수준 대문에 발생한 건강 문제를 겪고 있지만, 현금이 넉넉한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 ..  (64, 147, 151쪽)


 《혁명을 표절하라》라고 하는 책은 이러한 대목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권력자가 권력자 그대로 세상을 거머쥐면서 뒤흔드는 틀거리는 다치지 않게 하면서, 이 틀에서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바꾸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바꾸어야 함’은 틀림없이 옳습니다. 세상 어느 혁명도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바꾸지’ 않는 가운데에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혁명이 아닌 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개혁이 아닌 보수라 하여도 매한가지입니다. 늘 그대로 고인 물로 머무는 보수는 ‘썩어문드러’집니다. 보수가 참다운 보수가 되려면 날마다 새로워지도록 뼈를 깎듯 애써야 참다운 보수입니다. 진보도 똑같고 혁명도 똑같습니다. 세상만 뜯어고친다고 해서 혁명이 아닙니다. 세상이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고 외치는 목소리라 하여 진보가 아닙니다. 진보이든 혁명이든 개혁이든 보수이든, 또한 수구이든, 언제나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바꾸는’ 일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 우리가 바라는 미래는 소수의 앞서 나간 사람들이 거대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일상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 우리의 감추어진 투쟁의 역사를 다시 공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런 투쟁의 역사는 도처에 있기 대문에 쉽게 발굴할 수 있다. 이런 역사들은 냉담함(그건 해 봤자야)과 무기력(그건 너무 막강해)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교훈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삶 속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는 자유와 진보의 대부분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행동하고 집단적으로 투쟁을 통해 성취한 것이라는 점을 배우게 된다 ..  (23, 190쪽)


 내 삶을 사랑하면서 내 이웃 삶을 사랑하고, 내 몸을 아끼면서 내 이웃 몸을 아끼며, 내 터전을 돌보면서 내 이웃 터전을 돌봅니다.

 삶을 사랑하는 길은 여러 갈래이고, 몸을 아끼는 매무새는 여러 가지이며, 터전을 돌보는 슬기는 숱하게 많습니다. 《혁명을 표절하라》라고 하는 책은, 우리가 우리 깜냥껏 우리 삶터를 좀더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돌볼 수 있는 길을 ‘미국(이나 유럽) 문화와 사회 틀거리에 알맞게’ 갈무리해서 보여줍니다. 집회를 하든 시위를 하든, 대안언론을 꾸리든 빈집점거를 하든, 무슨 일을 하든 우리 스스로 즐겁게 어깨동무할 수 있는 길찾기를 보여줍니다.

 이리하여, 《혁명을 표절하라》라고 하는 책은, 아직 세상흐름을 잘 읽지 못하는 분들이라든지 세상흐름을 어설피 짚고 있는 분들한테는 여러모로 도움이 될 길잡이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찌감치 길찾기를 해 오고 있는 가운데 제 깜냥껏 제 길을 걷는 분들한테는 ‘미처 모르거나 자칫 놓치기’도 했던 몇 가지를 고맙게 얻을 수 있는 책이 되리라 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며 나 스스로 즐거웁자고 하는 이야기를 열여덟 가지로 알맞게 나누면서 한눈에 알아보기 좋도록 꾸려 놓았기에,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괜찮은 ‘실용서’가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다만, 실용서입니다. “Do it yourself”이든 “혁명을 표절하라”이든, 이와 같이 내 삶을 꾸려 나가는 밑생각이나 밑슬기를 깨닫거나 얻는 생각깊은 책은 아닙니다. 《즐거운 불편》처럼 온몸 부딪힌 실천을 보여주는 책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하느님》처럼 삶에서 우러나온 슬기를 손쉽게 보여주는 책은 아닙니다. 《국가는 폭력이다》처럼 사회 권력자가 감추거나 숨기는 뒷모습을 낱낱히 밝히는 책은 아닙니다.


.. 빈 공간을 점거하고자 하든, 구입하거나 임대하고자 하든 간에 건물을 물색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관심 있는 지역의 모든 도로를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차를 몰고 다녀 보는 것이다 ..  (355쪽)


 ‘혁명’이 무엇이기에 ‘표절’까지 하면서 배우거나 몸소 해 보아야 하는가를 다루는 책으로 《혁명을 표절하라》를 집어들려고 했다면 479쪽에 이르는 책을 넘기는 내내 거북하거나 짜증스러울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렇지만, “Do it yourself”라는 영어책 이름대로 ‘나 스스로 어떻게 바꾸면서 이 삶터를 바꾸고 내 삶도 한결 나아지도록 할까?’라는 갈림길에서 헤매는 분한테는 새롭게 생각을 틔워 주면서 마음문을 열어 주리라 봅니다.


.. 자원이 지금보다 평등하게 분배된다면 자원 경쟁도 줄어들 것이다 ..  (472쪽)


 책읽기 모임에서 발제를 맡은 분이 쪽글을 하나 써 와서 읽었습니다. 이분이 쓴 쪽글 끄트머리에 “나부터 바꾸지 않고서는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놀이가 아니면 혁명이 아니다’라고 이제 우리는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적혀 있습니다.

 이 글줄마따나, 곰곰이 따지면 혁명은 나부터 즐겨야 합니다. 혁명은 표절할 수 없습니다. 혁명은 따라할 수 없습니다. 혁명은 배울 수도 없습니다. 그저, 헉명은 내가 ‘살아내’면서 시나브로 이룰 뿐입니다.

 지루했던 책읽기를 마치면서 새삼스레 ‘혁명하는 이야기를 바보처럼 책에서 찾으려 했단 말이야?’ 하고 생각하며 뒷통수를 벅벅 긁습니다. (4342.8.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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