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미스터 최 - 사노 요코가 한국의 벗에게 보낸 40년간의 편지
사노 요코.최정호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 남해의봄날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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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94


《친애하는 미스터 최》

 사노 요코·최정호

 요시카와 나기 옮김

 남해의봄날

 2019.7.5



당신은 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아사히신문 같은 얌전한 매체에서 얻으려고 하십니까? 그런 신문은 진실을 전혀 보도하지 않습니다. 고급 신문이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실 테니 부디 그런 것만 보지 마시고 저속한 주간지나 스캔들만 쓰는 삼류 잡지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도 예술제에 출품한 고상한 작품만 보지 마시고 무협이나 조폭 나오는 걸 보세요. (54쪽/사노 요코 1971)


여기에서 즐거운 것은 요코 씨 편지를 받는 것과 언론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뿐이에요. 유럽에 와도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99쪽/최정호 1981)


이봐요, 미스터 최, 독일에 있을 때 저는 깨달았어요. 왜 독일이 철학자를 많이 배출하는지를.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그 문제를 생각한 거예요. (103쪽/사노 요코 1981)


다니카와 데쓰조 선생님의 서재를 구경한 것은 저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됐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한국인이니 일본인이니 하는 아집을 떠나서 위대한 석학의 생전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 볼 수 있었습니다. (146쪽/최정호 1991)


진정한 국제 친선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게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욕하면서 같이 술을 마시고 밥을 먹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 명이 한 명을 담당하면 충분할 것 같아요. (149쪽/사노 요코 1991)



  요즘 우리는 손전화를 쥐고서 손가락으로 톡톡 누리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1초 만에라도 쪽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쪽글뿐 아니라 긴글을 보낼 수 있고, 온갖 그림이나 사진까지 날릴 수 있어요.


  무척 손쉽게 쪽글이며 긴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오늘날, 우리는 손전화에다가 셈틀로 얼마나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서로 띄우고 받을까요. 손쉽게 주고받을 수 있기에 더 알뜰살뜰 마음을 나눌까요, 아니면 가볍게 주고받다가 잊어버리는 글자락이 될까요.


  마흔 해라는 나날이 넘도록 바다를 사이에 두고 글월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마흔 해를 넘는 동안 주거니 받거니 한 글월은 쉰 자락이 살짝 안 된다고 합니다만, 두 사람 사이에서 글월 하나에 담아서 나눈 마음은 매우 깊으면서 넓으리라 생각해요. 더 많이 주고받아야 더 깊거나 넓게 나누는 마음이지는 않거든요. 글월 한 자락마다 온마음을 싣고 온사랑을 실어요. 짧게 적바림한 엽서 한 자락에도 온꿈이며 온숨결을 담습니다.


  글월꾸러미 《친애하는 미스터 최》(사노 요코·최정호/요시카와 나기 옮김, 남해의봄날, 2019)는 진작에 책으로 묶으려 했답니다. 일본에 사는 사노 요코 님은 굳이 ‘허접한 내 글월 따위를 읽고 싶을 사람이 있겠느냐?’며 너털웃음이었다고 하는데, 한국에 사는 최정호 님은 ‘그대가 띄운 글월이야말로 놀라운 빛이며 숨결이 싱그럽게 춤추니, 이 글월을 나 혼자서 누릴 수 없다!’고 여겼답니다.


  그런데 이 글월꾸러미는 사노 요코 님이 눈을 감고서 한참 뒤에야, 그러니까 2010년에 사노 요코 님이 눈을 감았으니 얼추 열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책 하나로 태어납니다.


  글월자락을 천천히 읽습니다. 한 자락을 읽고서 책을 덮습니다. 며칠 뒤에 다시 한 자락을 읽고 또 책을 덮습니다. 이렇게 읽고 덮고 하노라니 한 달 두 달 지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더디 읽는다 하더라도 두 달이면 다 읽어냅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마흔 해를 넘는 애틋한 마음이 흐르던 글월자락도 책으로 묶어 놓으니 참으로 한숨에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 마음에 흐르는 소용돌이를 바라봅니다. 두 사람은 오직 서로를 바라보며 글월을 적었습니디만, 이 글월은 이제 두 사람 아닌 누구나 바라보는 이야기가 되고, 누구나 새삼스레 그날 그곳, 이를테면 1971년 어느 날 어느 곳이라든지, 1981년 어느 날 어느 곳을 어림하는 발판이 됩니다.


  그때 한국에서는 이렇게 마음앓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무렵 일본에서는 엉터리 일본 정치에 이렇게 날선 목소리로 나무라는 사람이 있었군요. 군사독재에 입도 벙긋하지 못하던 숨은 눈물이 흐르고, 이웃나라에 군사독재가 있는 줄 생각조차 못했다는, 더구나 제국주의 강점기라고 하는 슬픈 사슬을 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털어놓는 그림님이 있습니다.


  모든 삶은 발자취입니다.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 보낸 몇 해만 발자취이지 않습니다. 수수한 사람들이 얼키고설키면서 길어올리는 자그마한 이야기도 발자취입니다. 어쩌면 아주 수수한 사람들이 따사롭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주고받은 글월자락이야말로 길이길이 남기면서 새로운 빛을 바라보는 길동무로 삼을 만하지는 않을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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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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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89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히스테리아 옮김

 황금가지

 1996.7.1./2016.12.1. 고침판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이 될 수 없는 것이 더 삭막하고 짜증 나는 일이에요!” (13쪽)


페트로니우스는 불편한 신발을 벗고 둥근 바위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바위는 다뜻했다. 공기보다 더 따뜻했다. 정말 사람들은 항상 맨발로 살아야 한다. 신발은 발을 너무 꽉 조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꼭 맞으면 발이 까지기도 한다. (89쪽)


그들은 서로 박자를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세 번째 움은 뒤에 앉아서 그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이 악몽이 얼마나 오래 계속될까? (94쪽)


“난 정말로 내가 무슨 가치가 있나 의심스러워져요. 난 그저 주방용 기구처럼 항상 집에 있는 거예요.” (153쪽)


그것은 맨움용 광대 복장이었고 맨움의 다른 옷처럼 우스꽝스러웠다. 어째서 물속에서조차 광대가 되어야만 하지? (160쪽)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마련입니다. 목소리가 생긴 뜻이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마다 말소리가 다릅니다. 나라나 겨레마다 말소리가 다르기도 하지만, 같은 나라에 같은 겨레라 하더라도 고장마다 말소리가 달라요. 고장이라는 터전은 어디나 다르니 말소리도 마땅히 다를 테지요.


  다 다른 말소리란, 다 다른 삶소리란 뜻이라고 느낍니다. 다 다르게 짓거나 누리거나 가꾸는 삶에 맞추어 다 다른 말이 태어나고 흐릅니다.


  사내가 내는 목소리하고 가시내가 내는 목소리가 다릅니다. 마땅하지요. 사람이라는 목숨으로는 같으나, 결이 달라요. 그런데 결만 다르다면 소릿결만 다를 텐데, 숨결뿐 아니라 삶결이 다르지요. 사내랑 가시내 사이에서는 억누르거나 억눌리는 삶결이 엇갈렸습니다.


  《이갈리아의 딸들》(게르드 브란튼베르그/히스테리아 옮김, 황금가지, 2016)은 두 사람, 바로 가시내랑 사내 사이에 엇갈린 삶결을 확 뒤집는 얼개로 이야기를 폅니다. 곰곰이 보자면 이 문학책은 두 가지를 드러내려고 했지 싶어요. 첫째, 이 책을 읽는 이들이여, 거북하게 느껴라! 왜냐하면, 이 줄거리가 안 거북하다면, 오늘날 이 삶터도 안 거북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둘째, 이 책을 읽는 이들이여, 뭔가 바꿔야 하지 않니? 왜냐하면, 뭔가 바꿔야겠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이 거북한 얼개를 그대로 떠안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일 테니까요.


  가시내가 광대 차림으로 살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가시내가 어떤 차림새로 살든 구경거리로 쳐다봐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내도 매한가지이지요. 사내가 어떤 차림새로 살든 광대나 구경거리가 될 까닭이 없습니다. 이쪽 사람이 저쪽 사람을 억누른다든지, 거꾸로 저쪽 사람이 이쪽 사람을 억눌러야 할 까닭이 없어요.


  《이갈리아의 딸들》은 목소리가 없는 어수선판에서 목소리를 내기에 뜻있습니다. 다만, 목소리는 내되 이다음길까지는 짚지 않거나 못합니다. 마땅하지요. 문학책 하나가 뒷길까지 모조리 짚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가꿀 이다음길이나 뒷길은 바로 우리 스스로 생각을 바꾸고 목소리를 내어서 지어야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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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선 - 김지연 사진 산문
김지연 지음 / 열화당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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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87


《전라선》

 김지연

 열화당

 2019.6.10.



서울의 부암동 숲이 손질이 잘된 비단옷 같은 느낌이었다면 전주의 건지산 길은 무명이나 삼베 옷 같았다. (18쪽)


미카엘 수녀님은 아침에 휴대폰으로 찍은 수많은 사진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구름과 꽃과 나비…… ‘아름다운 것’들을 보는 대로 다 찍었고 그것을 보여주면서 기분이 들떠 있었다. (24쪽)


나는 그이가 나온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아, 풍신나게 생겼네.” 그이는 자기 모습을 보며 쑥스러워했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보다 훨씬 예쁜데 말이다. 그이는 “붕어빵을 좀 많이 구워 놨더라면 사진이 보기가 더 좋았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84쪽)


아이의 예쁜 손가락에는 요즘 보기 드문 꽃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대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더니 한 아이가 달려와서 내 손에 사탕 두 알과 초콜릿 과자 하나를 쥐여 주고 달아났다. (231쪽)



  전라도에서 열 해 즈음 살면 ‘전라사람’이 될까요? 전라도에서 나고 자라야 비로소 ‘전라사람’일까요? 전라도에서 나고 자랐으나 일찌감치 이 고장을 떠났으면 그이는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만 열아홉 살에 그 고장을 떠났습니다. 한동안 인천으로 돌아가서 몇 해를 살았는데요, 아무튼 그 고장에서 나고 자랐으니 저는 오늘 전라도에서 열 해 즈음 살았더라도 ‘전라사람’ 아닌 ‘인천사람’일까요?


  서울이란 고장에서 열 해쯤 산 적이 있는데, 그때에 저는 ‘서울사람’이었을까요? 군대를 강원도에서 보냈으니, 군인으로 지내던 나날은 ‘강원사람’인 셈일까요? 제가 앞으로 경상도로 삶터를 옮긴다면 그때에는 어느새 ‘경상사람’으로 바뀔까요?


  《전라선》(김지연, 열화당, 2019)을 읽다가 ‘전라도’라는 이름을, 또 전라도라는 터를, 또 전라도뿐 아니라 경상도에 강원도에 충청도에 경기도에 인천에 서울에, 갖가지 고장 이름을 혀에 살짝 얹어 봅니다.


  나고 자란 이라면 고작 어린 날 두어 해를 살았어도 ‘그 고장 사람’이라 하기 일쑤요, 쉰 해나 예순 해를 어느 고장에서 살았어도 그 고장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면 ‘그 고장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금을 긋는지 모르겠습니다. 금을 굳이 그어야 하는가도 아리송합니다. 어느 고장이든 아름다운 숨결이 흐를 테고, 어느 마을 어느 기찻길이나 버스길이나 들길이나 숲길에도 사랑스러운 손길이 닿을 텐데요.


  사라진 기차역을 떠올리는 김지연 님은, 사진으로 남은 아스라한 이야기하고 오늘 코앞에서 마주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맞물려 놓습니다. 까르르 웃던 먼먼 옛날 아이들하고 쿡쿡쿡 웃고 뛰노는 오늘날 아이들을 나란히 마주하면서, 둘 사이에 흐르는 따스한 기운은 뭘까 하고 스스로 물으면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전라도도 경상도도 모두 아름다운 고장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모든 고장이 사이좋게 어깨를 겯으면서 함께 피어나면 좋겠습니다. 높거나 낮거나 크거나 작은 금을 모두 털어내고, 오붓하게 수다를 하며 뛰노는 마을길을 누리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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밈 : 언어가 사라진 세상
앨리너 그래이든 지음, 황근하 옮김 / 검은숲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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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81 


《밈 : 언어가 사라진 세상》

 앨리너 그래이든

 황근하 옮김

 겊은숲

 2017.11.30.



“너까지가 아니라, 거의 모든 인간들처럼 저 역시 모호한 단어 뜻은 가끔씩 까먹고, 그러니까 찾아보는 거고.” (32쪽)


10년 전인 그때조차 다른 학교의 교수들은 서서히 컴퓨터와 기계로 대체되고 있었다. 밈이 개발된 지금, 아이들은 무엇이든 그저 다운로드 받기만 하면 된다. (44쪽)


그의 말은 수수께끼 같았다. “이제 단어도 그와 같아집니다. 여러분은 모든 단어를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찾아볼 필요조차 없을 겁니다.” (313쪽)


“그가 그렇게 심각한 단어 독감을 그렇게 오랫동안 앓았음에도 지금까지 잘 버틴 건,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 그건 그저 유아론적인 연습이 아니었어. 그것은 대화였어. 너와의 대화.” (504쪽)



  말이 사라진다면, 삶이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아주 마땅한 소리입니다만, 모든 말은 삶에서 비롯하거든요. 삶이 있기에 말이 있고, 삶이 없기에 말이 없습니다. 삶이 없는 사람은 죽은듯이 살 텐데, 죽은듯이 산다면 말을 할 일도 까닭도 뜻도 보람도 없어요. 곧 ‘삶 = 새로운 말’이요, ‘죽음 = 말이 사라짐’인 셈입니다.


  손으로 짓는 삶이란, 스스로 말을 짓는 삶입니다. 우리 손을 쓰지 않을 적에는 우리 스스로 누리는 삶이 없는 셈이니, 우리가 오늘을 누리는 모습을 나타낼 말이 없기 마련입니다.


  이는 한국이나 유럽 어디를 보아도 매한가지입니다. 삶이 있을 뿐 아니라, 삶을 두 손으로 지은 수수한 흙사람은 언제나 스스로 모든 말을 낱낱이 즐겁게 지었습니다. 삶이 없이 손가락만 까닥이며 시킨 벼슬아치나 임금이나 힘꾼은, 중국말을 빌려서 썼습니다. ‘내 삶’이 없으니 ‘내 말’이 없기 마련이라, 딴나라에서 말을 빌려서 우쭐거리지요.


  《밈 : 언어가 사라진 세상》(앨리너 그래이든/황근하 옮김, 겊은숲, 2017)은 삶을 기계한테 내주고는 스스로 뭘 해야 할는지 몰라 그저 톱니바퀴가 되거나 노닥거리는 하루가 된 사람들이 스스로 말을 잊거나 잃으면서 무엇을 잊거나 잃는가를 까맣게 모르는 모습을 그립니다.


  생각할 노릇입니다. 스스로 생각하면서 일거리를 짓고 살림살이를 가꾸지 않는다면, 스스로 할 말이 없고, 스스로 펼 이야기가 없습니다. 남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사람이라면 남이 시키거나 펴는 말을 그대로 따라서 씁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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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상가 체 게바라 - 새로운 사회와 인간 교육
리디아 투르네르 마르티 지음, 정진상 옮김 / 삼천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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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상가 체 게바라》

 리디아 투르네르 마루트

 정진상 옮김

 삼천리

 2018.12.14.



“오늘 이야기할 주제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나를 소개한 나란호 씨의 말을 너무 신뢰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내 생각을 말하면 나는 겸허한 혁명가이고 1년차 학생일 뿐입니다……. 나는 ‘혁명 대학교’의 재정부 1학년 학생입니다.” (100쪽)


체는 자신이 행복해지고 딸이 자신처럼 되기를 바라면서 딸에게 두 가지를 부탁한다. “…… 학습과 혁명적인 태도, 즉 훌륭한 품행, 신중함, 혁명에 대한 사랑, 동지애 등등. 나는 네 나이 때 그러지 못했다. 사람들이 서로의 적이 되어 싸우던 그런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 (122쪽)


엘음브리토 캠프에서 찍은 사진에서 체는 에밀 루드비히가 쓴 《괴테》를 읽고 있다. 별로 이상할 것이 없지만 전투 중이라는 조건에서 그 시절 시에라마에스트라처럼 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런 책을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142쪽)



  날마다 새로 배우는 길이지 싶습니다. 즐겁다 싶은 일도, 싫다 싶은 일도 배웁니다. 재미난 일도 서운한 일도 배우고, 놀라운 일이나 수수한 일도 배웁니다. 이렇게 배운 모든 일은 우리 마음으로 차곡차곡 스며들어서 아이들한테 이어갑니다.


  아이는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아이는 아이다움을 되새기면서 어른스러운 빛을 폅니다. 지난날에 배운 빛하고 스스로 지은 빛을 더하니 새로운 빛이 되어 새로운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어요.


  《교육사상가 체 게바라》(리디아 투르네르 마루트/정진상 옮김, 삼천리, 2018)는 쿠바라는 나라에서 혁명이란 길을 걸은 체 게바라 님이 어떤 배움넋을 맞아들여서 어떤 배움길을 걷는 동안 어떤 배움빛이 되었는가 하는 실마리를 찾아나서려 합니다.


  체 게바라 님이 딸아이한테 들려준 말을 살피면, 이녁은 ‘싸울 수밖에 없고, 싸워야 하던 때’에 자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싸움이란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라, 빛이 빛답게 퍼지기를 꿈꾸는 몸짓이었겠지요.


  오늘 이곳에 어른으로 선 제가 아이들한테 물려줄 길이란 즐거운 배움빛이라고 느낍니다. 신나는 놀이빛을 물려주고, 아름다운 살림빛을 물려줄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여러 가지가 아니라면 굳이 물려줄 까닭이 없겠지요. 삶을 든든하게 다스리며 알차게 가꾸는 배움손이 되어 하루를 맞이합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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