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낱말
아거 지음 / KONG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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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2.10.4.

인문책시렁 238


《어떤, 낱말》

 아거

 KONG

 2019.10.1.



  《어떤, 낱말》(아거, KONG, 2019)을 읽었습니다. 글님 마음에 남은 낱말을 놓고서 삶을 차근차근 되새기는 이야기는 부드럽습니다. 다만, 부드러이 흐르던 글은 곧잘 턱턱 막히곤 합니다. 굳이 안 써도 될 만한 넉글한자(사자성어)를 자꾸자꾸 끼워넣는군요.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은, 그러니까 오롯이 말로 생각을 펴는 사람은 섣불리 넉글한자를 자랑처럼 읊지 않습니다. 이웃하고 말로 생각을 나눌 적에는 예부터 으레 옛말(속담)을 곁들였습니다. 옛말에는 이야기가 흐르면서 삶을 엿보는 슬기로운 눈길이 흐른다면, 넉글한자에는 뭔 소리인지 몰라 뜻풀이를 따로 해야 하면서 똑똑한 티를 내는 우쭐거리는 어깻짓이 흐릅니다.


  이웃님 누구나 말에 마음을 실어서 들려주기를 바랍니다. 이웃님 누구나 겉치레나 겉멋이 아닌 속살림을 가꾸는 속사랑으로 글을 여미기를 바랍니다.


  남한테 보여줄 글이 아닌, 스스로 하루를 되새기는 글을 쓰면 됩니다. 빈틈없는 글쓰기나 훌륭한 글쓰기나 놀라운 글쓰기나 빼어난 글쓰기가 아닌, 오로지 삶을 사랑하는 살림길을 숲빛으로 적시면서 어깨동무하는 글쓰기이면 됩니다.


  정 뭔가 남달리 밝히고 싶은 대목이 있다면, 손수 새말을 짓기를 바라요. ‘사자성어’를 ‘넉글한자’처럼 옮길 수 있고, ‘녹즙’은 ‘풀물’로 옮길 만합니다. 오늘날에는 일본 한자말처럼 ‘작문’을 하는 사람은 거의 사라지고 ‘글쓰기’를 합니다. ‘퍼블리싱’이나 ‘출판’이 아닌 ‘책쓰기·책내기·책짓기’를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멋이 아닌 별빛에 풀빛에 흙빛에 바람빛에 구름빛에 꽃빛을 말글에 담게 마련입니다.


ㅅㄴㄹ


좋은 사람은 신기루였다. 절대 도달하지 못할 영역. 그러다 이 사회가 요구하는 좋은 사람이란 기준이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준에 맞추다 보니 오히려 나란 존재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의문이 생겼다. (14쪽)


대의니, 정의니 하는 명분을 내건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구린내가 진동을 한다. (50쪽)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뜀박질로 어린이집에 당도해 아이를 챙겨 급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해야 할 일투성이다. 밥 먹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밀린 빨래도 돌리고, 아이들 숙제 챙기고, 씻기고, 내일을 위해 또 서둘러 잠자리에 들고, 하루 일과를 돌이켜볼 여유조차 사치인 듯하다. (64쪽)


그런데 틀은 딱 그 안에서만 자유로운, 밖으로 나가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강압 또한 품고 있다. (126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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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 - 친족 성폭력 생존자들의 기록
장화 외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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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2.10.4.

인문책시렁 239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

 장화와 열 사람

 글항아리

 2021.9.3.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장화와 열 사람, 글항아리, 2021)는 책이름 그대로 두 마음이자 두 삶을 걸어온 사람들이 갈무리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책에서 목소리를 낸 열 사람은 열 가지로 다르게 피멍이 맺혔습니다. 피멍을 낸 이들은 한집에서 살아왔습니다. 바깥에서 가싯길을 걷거나 피멍이 맺힌 이를 품을 곳이 보금자리일 텐데, 거꾸로 집이란 곳이 보금자리 구실을 못 했다지요.


  왜 주먹부터 휘두를까요. 왜 아랫도리를 응큼하게 노릴까요. 어릴 적부터 집에서 어버이하고 한또래는 무엇을 보여주거나 들려주는 삶인가요. 집이 헝클어졌다면, 마을하고 배움터는 사람들을 붙잡아 주거나 이끄는 몫을 할 수 없는가요.


  제가 나고자란 인천에서도, 오늘 살아가는 전남 고흥에서도, 둘레를 보면 노닥술집(유흥주점)이 끔찍하도록 많습니다. 시골 면소재지조차 노닥술집이 있고, 흥청망청입니다. 술 한 모금이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만, 왜 나눔술이 아닌 노닥술이어야 할까요? 왜 숱한 사내하고 벼슬꾼하고 돈바치는 어디에서 돈이 쏟아지기에 노닥술집에서 흥청망청일 수 있을까요?


  사랑으로 살림을 지어 삶을 나누는 길을 본 적도 배운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이들은 돌이순이를 안 가리고서 아랫도리를 괴롭히거나 짓밟는다고 느낍니다. 둘레를 봐요. 돌이만 우글거리는 푸른배움터는 몹시 사납습니다. 순이돌이가 함께 다니는 푸른배움터도 나날이 사납빼기로 물듭니다. 어린배움터마저 참 빠르게 사납게 뒹구는 길입니다.


  옳고그름을 가리기 앞서, ‘삶·살림·사랑’부터 차분히 돌아보고 이야기하며 그릴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이나 배움터에 밀어넣기 앞서, 왜 배우고 무엇을 가르치는지 짚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암꽃하고 수꽃이 없으면 씨앗도 열매도 맺을 수 없는 풀꽃나무입니다. 순이하고 돌이가 없으면 사람이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어느 길을 가야 할까요? 10월 1일을 ‘국군날’이라 하면서, 무시무시한 총칼을 희번덕일 뿐 아니라, 칼이랑 몽둥이를 쥐고서 저놈(적군)을 날렵하게 죽이거나 때려눕히는 짓을 ‘무술시범’이랍시고 아이들한테 버젓이 보여주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영화·연속극’ 가운데 순이돌이가 서로 사랑으로 아끼면서 새롭게 짓는 보금자리를 수수하게 들려준 적은 얼마나 될까요?


  피멍이 맺히는 까닭은 한둘이 아닙니다. 숱한 바보짓이 얼크러지면서 불거집니다. 언제나 오늘이 사랑할 때입니다. ‘살섞기’가 아닌 사랑을 할 때입니다. 그리고 순이 못지않게 돌이도 숱하게 노리개질(성폭력)을 받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싸움터(군대)에 이르기까지, 또 일터(회사)에서마저 숱한 돌이도 노리개질에 시달리는데, 순이 곁에서 돌이도 목소리를 함께 내어 이 썩어빠진 나라와 틀거리를 이제부터 뜯어고칠 수 있기를 빕니다.


ㅅㄴㄹ


다수의 사람이 내 경험을 불편하게 여기는 일은 내가 나를 ‘정상’이 아니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23쪽)


긴 침묵 끝에 내놓은 엄마의 답변은 정말 최악이었다. “그래도 가족인데 어떻게 하겠니?” (34쪽)


나는 아빠가 내가 어려을 때 한 짓을 범죄라고 일갈했다. 아빠는 그저 내가 귀여워서 했던 장난이었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내 경험은 그저 개인의 문제일까? 사촌 오빠는 내게 왜 그랬을까? 아빠는 나한테 왜 그랬을까? 내 입을 막은 건 무엇이었을까? (46쪽)


처음 나를 강간했던 때 오빠의 나이는 고작 열네 살이었다. (89쪽)


“아빠랑 오빠가 저 성폭행하고 엄마가 아동학대 했어요”라고 말했지만 결국 내가 돌려보내진 곳은 그 가족들이 있는 집이었다. (94쪽)


성매매를 하기까지의 접근 과정이 너무 간단해서 사람들이 성매매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성폭행 가해자들뿐 아니라 방관한 어른들까지 내게는 모두 가해자와 같은 편이나 다름없었다고. (120, 121쪽)


하지만 여전한 의문은, 사회가 왜 이 극악한 범죄자들을 보호하며 피해자인 아이를 그 손에 맡겨놓는 것도 모자라, 아이가 자라서 법에 호소해도 제대로 처단하지 않고 범죄자들이 편안하게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가 하는 점이다. (154쪽)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 부끄러워할 때까지, 정말로 죄 있는 사람이 응당한 책임을 다할 때까지, 정말 수치스러워해야 할 사람이 치욕에 떨며 고개를 들지 못할 때까지 나의 말하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199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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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복희
김복희 지음 / 봄날의책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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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2.9.8.

인문책시렁 233


《노래하는 복희》

 김복희

 봄날의책

 2021.9.3.



  《노래하는 복희》(김복희, 봄날의책, 2021)를 읽었습니다. 어린이노래(동요)를 가만히 생각하면서 글님 어린날하고 오늘날 어떤 발걸음인가 하는 이야기를 엮습니다. 순이로 태어나서 싫었고, 완도라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싫었다고 밝히는데, 우리 스스로 순이란 몸이건 돌이란 몸이건 처음부터 싫을 까닭이 없고, 시골이건 서울이건 대수로울 일이 없습니다.


  스스로 입은 몸을 싫어할 적에는 둘레(사회·학교)에 물들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나고자라며 뛰노는 터전을 싫어할 적에도 둘레에 휘둘리기 때문이에요.


  이 나라에서는 순이로 태어나건 돌이로 태어나건 고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저마다 걸어갈 가시밭길이 다를 뿐, 순이도 돌이도 가시밭길을 걸어야 합니다. 시골살이도 서울살이도 둘레(사회·학교·정부)가 바라는 대로 맞추자면 어디에서나 똑같이 고되며 힘들다가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은 몸은 없습니다. 더 나은 고장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 나은 노래도 없고, 더 나은 책도 글도 말도 삶도 살림도 없습니다. 모든 몸은 다릅니다. 순이랑 돌이는 서로 다르기에 서로 가만히 보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생각을 키워서 천천히 사랑을 어질게 키워 즐겁게 어깨동무하는 길을 스스로 찾을 만합니다. 시골도 서울도 서로 다르기에 서로 물끄러미 보면서 마음으로 만나는 생각을 가꾸어 천천히 살림을 슬기롭게 다스려 상냥하게 손잡는 길을 스스로 찾을 만하지요.


  글님은 아직 순이란 몸을 입었을 텐데, 순이로서 글을 쓰는 하루가 싫을까요? 순이가 아니었으면 글을 안 썼을 테고, 책을 못 냈을 테지요. 이제는 시골인 완도를 떠나 서울이나 서울곁(수도권)에서 살아갈까요? 그런데 시골인 완도에서 태어나면서 온갖 삶을 마주하는 하루를 보내었기에 글을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책을 낼 수 있습니다.


  요새는 미움과 싫음을 바탕으로 여미는 글이나 책이 수두룩합니다. 그만큼 이 나라(정부·사회)가 멍청하고 모진 속내를 드러내는 셈이면서, 미움하고 싫음이란 줄거리는 잘팔리는 줄거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부터 안 팔리거나 덜 읽히는 이야기가 있으니, ‘참사랑·참삶·참살림’입니다. 미움과 싫음으로 금을 그으면서 싸우는 줄거리로 여미는 글이 나쁠 까닭은 없되, 스스로 빛을 갉아먹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랑할 까닭이 없으면서, 자를 까닭도 없습니다. ‘자(잣대·틀)’를 바라보지 마요. ‘저(나)’를 바라볼 노릇입니다. 나를 보고 너를 보면서 우리가 일굴 사랑이라는 길을 헤아린다면, 아마 글님은 이다음부터는 구태여 미움과 싫음으로 범벅을 하는 글을 사뿐히 내려놓으리라 봅니다.


ㅅㄴㄹ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그랬듯이 질문을 많이 하면 주의도 받기 쉽다는 것을 체득했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하지 않게 된 어른은 아니고, 질문을 조금 묵혀두려고 잠깐 입을 벌렸다 입을 다무는 어른이 되었다. (15쪽)


완도에 사는 동안 어린 나는 자고 일어나면 내가 남자아이가 되어 있기를 바랐다. 남자아이가 된다면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을 줄 알았다. 여자라는 것에서, 완도라는 곳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24쪽)


볼 수 있는 마음이 없거나 보려는 마음이 없는 상태가 두렵다. 여름의 파란색과 겨울의 흰색이 기를 쓰고 내게 달려들려고 한대도, 나를 사랑해 주려고 한대도 내 마음이 그것을 보지 않는다면, 보고도 안 보고 마는 상태로 나 자신을 몰아간다면, 그렇게 내 마음이 텅 비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112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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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논쟁의 기록과 진실 - 문화운동가 임진택의 애국가 바로잡기
임진택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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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2.9.8.

인문책 시렁 236


《애국가 논쟁의 기록과 진실》

 임진택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0.11.10.



  《애국가 논쟁의 기록과 진실》(임진택,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0)을 읽기 앞서까지 ‘애국가’란 이름인 노래를 돌아본 적은 없습니다. 노랫말에 담은 뜻은 훌륭하더라도 어린이가 알기 어려운 한자말이 많다고 느끼기는 했습니다. 어린배움터(국민학교)를 다니던 1982∼87년에는 날마다 이 노래를 불러야 해서 지긋지긋할 뿐 아니라, ‘노랫말이 뭔 소리래?’ 하면서 골이 아팠어요. 국민교육헌장하고 애국가를 날이면 날마다 외우도록 시켜서 못 외우면 두들겨맞아야 했거든요.


  어린배움터를 마치는 1988년 2월 어느 날 “이제 더는 날마다 외우기를 시키지는 않을 테니 한숨 돌리겠네.” 하고 혼잣말을 내뱉았어요. 이 혼잣말이 좀 컸는지, 길잡이(담임교사)가 들었고, 길잡이한테 또 얻어맞는구나 싶었지요. 그런데 길잡이는 “며칠 뒤면 졸업이니 오늘은 봐주지. 중학교에서는 외우라 시키지는 않을 테지만, 입시지옥이 너희를 기다린단다.” 하며 이죽거렸습니다.


  우리는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로 여기지만, 이녁은 ‘에키타이 안’이란 일본이름으로 바꾼(창씨개명) ‘일본사람’이었으며, 나중에 ‘에스파냐사람’으로 나라를 갈아탔다고 합니다. 노래를 엮고 이끄는 솜씨가 있었기에 숱한 ‘일본사람’을 젖히고서 이끎이(지휘자)가 될 뿐 아니라, ‘일본축전곡’이나 ‘만주환상곡’을 엮어서 선보일 수 있었다고 여길 만합니다.


  오늘날에는 에키타이 안이 걸어온 민낯을 하나하나 밝혀낸다지만, 일본이 총칼로 이 나라를 짓밟던 무렵에 이이가 일본이며 만주이며 유럽을 다니면서 무엇을 했는지 알아챈 사람은 어쩌면 아예 없거나 거의 없었으리라 느낍니다. 하늘한테서 받아 스스로 갈고닦은 솜씨를 총칼나라(제국주의·군국주의·식민주의)에 바친 에키타이 안일 텐데, 나라(정부)에서 스스로 조금만 살펴도 민낯을 더 널리 캐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참다이 ‘나라사랑’이라면 힘·이름·돈에 따라 춤추지 않습니다. 힘·이름·돈에 따라 춤추기에 ‘힘있고 이름있고 돈있는 나라에 붙어’서 ‘한 줌짜리 솜씨’를 뽐내려고 합니다. 총칼을 휘두르는 무리한테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고 온힘을 바친 김구·안창호 님이 바란 뜻을 헤아린다면, 〈만주환상곡〉(에키타이 안)은 이제 걷어내고서 〈아름다운 강산〉(신중현)이나 〈고향의 봄〉(이원수)을 나라사랑노래로 새롭게 삼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나라사랑노래는 둘이어도 아름답습니다. 무엇보다 어린이가 쉽고 즐겁게 부를 수 있어야 나라사랑노래답습니다.


ㅅㄴㄹ


그가 쓴 만주환상곡 합창 부분의 주제는 놀랍게도 “10년 세월 성숙한 만주국이 일본과 굳건히 연결되어 독일과 이탈리아를 응원한다”라는 내용이다 …… 더욱 알 수 없는 정황은 안익태가 독일 주재 일본 정보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의 사저에서 2년 반을 함께 지냈다는 사실이다. (18쪽)


김구가 남긴 이 자료를 보면서 나로서는 참으로 분하고 참담했다.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를 임시정부가 수용해서 독립군에게 열심히 보급하고 중국, 미국 등 연합국과 함께 조국 광복에 매진했던 1940년대 초, 정작 안익태는 에키타이 안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이탈리아 등 추축국을 순회하며 에텐라쿠와 일본축전곡, 만주환상곡을 열렬히 지휘하고 다녔다. (69쪽)


자신의 반민족행위를 숨기고 스페인으로 피신한 안익태는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끝난 후 자기가 작곡한 애국가 곡조가 분단된 대한민국에서 공식 국가(國歌)로 사용됨을 알게 되고, 1955년 이승만 대통령 80회 생일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이승만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작곡한 한국환상곡(코리아 판타지)의 악보를 선물했는데, 맨 앞장에는 ‘한국환상곡’의 연주 연보(年譜)를 빼곡히 기록해 놓았다. 그런데 그가 기록해 놓은 연보는 거짓말이었다. 후일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당해 연도의 해당 장소에서 연주된 곡목은 한국인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이 아니라 일본인 에키타이 안이 지휘한 ‘일본축전곡’과 ‘만주환상곡’ 또는 ‘교쿠토(極東)’였다. (239쪽)


※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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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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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2.8.6.

인문책시렁 234


《김지은입니다》

 김지은

 봄알람

 2020.3.5.



  《김지은입니다》(김지은, 봄알람, 2020)를 읽었습니다. 종이책으로 나오지 않더라도 속낯 이야기는 널리 퍼졌습니다만, 종이책으로 나와 주었기에 ‘우두머리(대통령) 만들기’를 꾀하는 무리가 무엇을 노리고 무엇을 하며 무슨 마음인가를 헤아릴 만합니다.


  그들은 ‘아니’라고 아직도 말하지만, 서울시장 박원순과 부산시장 오거돈과 충남지사 안희정, 이 세 사내는 ‘말삶이 어긋난 뒷길’을 보였고, 이 뒷길이 바깥으로 불거지면서 ‘민주당·스스로 진보라 여기는 무리(조직·단체)’가 얼마나 두동진(모순된) 모습인가를 환히 드러내었습니다.


  그들은 ‘박근혜 무리·이명박 무리’가 저지른 잘못은 왜 안 따지느냐고 목소리를 높입니다만, 이쪽 무리이건 저쪽 무리이건 잘못은 똑같이 잘못이요, 뉘우칠 일은 똑같이 뉘우칠 일이며, 물러나서 사슬살이(감옥생활)를 톡톡히 치를 일입니다. 티끌 하나도 안 묻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둘러댈 수 없습니다. 티끌이 묻었으면 씻고서 조용히 지내야지요.


  안희정이 저지른 노리개질(성폭력)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두머리 자리에 선 이들은 순이도 돌이도 늘 노리개로 삼습니다. 힘·이름·돈으로 누르거나 밟아서 ‘사람들이 꼭두각시처럼 넋을 잃고 따라다니도록’ 몰아댈 뿐입니다.


  우두머리에 선 놈이나 우두머리에 서려는 놈은 왜 하나같이 노리개질을 일삼을까요? 이들은 스스로 삶을 짓거나 살림을 가꾸거나 사랑을 나누지 않거든요. 이들이 ‘운전기사 딸린 자가용’이 아닌 ‘스스로 발판을 구르는 자전거’를 타면서 일한다면 바보짓을 할 틈이 없습니다. 이들이 힘·이름·돈이 있는 사람하고만 사귀면서 얼굴을 팔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손수 빨래하고 밥하고 쓸고닦’으면서 ‘곁일꾼(수행비서)을 안 둔다’면 이때에도 멍청짓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곁일꾼은 몸종이 아닙니다만, 말썽을 일으킨 모든 벼슬꾼(정치꾼·공무원)은 스스로 ‘작은일’을 안 챙기면서 곁일꾼을 몸종처럼 부렸습니다. 이들이 자가용 아닌 버스·택시를 타거나 걷는다면, 또 이들이 그림책·동화책을 읽고 스스로 노래(동시)를 써서 아이들 곁에서 함께 놀이를 한다면, 어디에도 부끄러울 짓이란 없이 머슴 노릇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머슴이 아닌 우두머리가 되려고 하는 모든 이들은, 국민의당이건 민주당이건 정의당이건 녹색당이건 똑같습니다. 노리개질(성폭력)이란 말썽을 안 일으킨 무리(조직·정당)가 이 나라에 있나요? 없습니다.


ㅅㄴㄹ


종종 위법과 편법을 목격했다. 선거라는 것이 원래 이런가 싶었다. 알아서는 안 되는 일투성이인 무서운 곳에 온 것 같았다 …… “뭔 소리냐! 선거 안 할 거야?” “모르면 가만히 있어. 시키는 대로 해!” “원래 선거는 그래. 지면 다 끝이야. 결과가 중요해.” 경선이 끝난 뒤, 안희정 조직의 결정에 따라 문재인 캠프에 가서 일했다. (79쪽)


일부 선배들은 “너희들은 대통령 만들러 온 거야, 원래 정치권은 이래”라며 폭력을 묵인했고, 또 그들 자신이 가해자이기도 했다. 노래방에 가 여자 후배를 옆에 앉혀 술을 따르게 했고, 노래를 부르게 했다. 머리나 뺨을 주먹으로 때리기도 했고, 볼을 비비거나 껴안기도 했다. (81쪽)


안희정에게 첫 피해를 당할 때쯤에는 이미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오직 대권만을 바라보는 사람들 속에 갇힌 채, 어디에도 어려움을 이야기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는 상태였다. (87쪽)


안희정은 성평등을 지지하는 진보적 지도자인 것처럼 알려져 있었지만 내가 본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권세를 잘 알고 누리는 사람이었다. “내 위치에 이런 것까지 해야 되겠느냐”며 일정을 당일에 취소하기도 했다. (105쪽)


결국 조직을 나온 나는 공공의 적이 되었다. 안희정을 대통령 만들고 그 곁에 오래 있으려던 사람들에게 나는 ‘조배죽(조직을 배신하면 죽는다)’의 대상이었다. (116쪽)


“여자가 있으면 분위기가 좋아져. 지사님이 부드러워져.” 그리고 그렇게 분위기를 풀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 내 역할은 충분하다는 말을 들었다. (122쪽)


세 명의 판사는 피고인 안희정에게는 묻지 않았다. ‘왜 김지은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여러 차례 농락했는가?’ (150쪽)


피고인 측 증인으로 증언한 사람들 중 일부는, 우연인지 모르지만, 재판 중 안희정과 관계 깊은 국회의원의 비서관이 되었고, 자치단체장의 자문위원이 되기도 했다. (155쪽)


안희정 부인의 글은 잘 짜인 총공격 명령과 같이 느껴졌다. 대선 캠프에 위기가 찾아오면 좌표를 찍고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총공격 시스템. (182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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