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고마워, 듀이 - 도서관 고양이가 건네는 위로
비키 마이런.브렛 위터 지음, 배유정 옮김 / 걷는책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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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가 들려주는 삶 이야기
 [책읽기 삶읽기 109] 비키 마이런·브렛 위터, 《정말 고마워, 듀이》(걷는책,2011)

 


  비키 마이런 님과 브렛 위터 님이 함께 엮은 이야기책 《정말 고마워, 듀이》(걷는책,2011)를 읽습니다. 저마다 고양이를 사이에 놓고 꿈과 사랑으로 가득한 나날을 누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기쁠 때, 슬플 때, 즐거울 때, 고단할 때, 좋을 때, 외로울 때, 기운날 때, 풀죽을 때, 어김없이 곁에서 따사로이 동무가 되었던 고양이 이야기를 펼쳐요.


  이를테면 ‘반려동물’도 ‘애완동물’도 아닙니다. 《정말 고마워, 듀이》에 나오는 사람들이 ‘한집에서 함께 살던 고양이’는 이녁 아이하고 똑같은 살붙이입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며 함께 눈을 떠서 함께 살아가는 동무입니다.


  생김새와 모습과 꼴은 ‘사람’이라지만, 막상 ‘사람인 한식구’ 가운데 말을 제대로 안 섞거나 생각을 주고받지 못하는 일이 꽤 잦은 오늘날이지 싶어요. 오늘날 어버이는 아이들을 학교와 학원에 보내느라 바쁠 뿐 아니라 등허리가 휜다고 해요. 그렇지만 아이와 마주앉아 예쁘게 이야기꽃 피울 겨를은 못 내요. 오늘날 아이들은 집을 떠나 학교와 학원을 떠돌면서 마음을 나눌 말벗을 찾느라 힘들고 바빠요. 집안에서는 어버이가 돈을 벌어 저희를 학교와 학원에 넣느라 힘들고 바쁘다 하기에, 집밖에서 동무를 찾습니다.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주고받을 동무를 집밖에서 찾고, 집밖에서 어울리며, 집밖으로 나돌아요.


.. 내가 사랑하는 아이오와 주 스펜서는 외부 사람들이 볼 때는 인구 1만 명의 작은 마을이다 … 이 고장에선 사람들의 관계는 뿌리가 깊고, 전화 한 통화로도 도움의 손길과 우정을 기대할 수 있다 … 오히려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접근 가능하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현대사회에서 도서관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자유로운 곳이다 … 제가 어렸을 때 마을에서 모기 방역을 하기로 해서 트럭들이 차 지붕에 오렌지색 경고등을 달고는 살충제를 뿌리고 돌아다녔죠. 며칠이 지난 후 어머니가 제게 물어 보았어요. ‘무슨 소리가 들리니?’ 그래서 저는 ‘아니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라고 대답했죠. 어머니는 ‘단순히 모기를 잡는 약이 아니었어. 모기만 잡는 것이 아니라 다른 벌레도 다 죽인 거야. 그렇기 때문에 새들의 울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거야’라고 하셨지요 ..  (32, 34, 47, 91쪽)


  《정말 고마워, 듀이》를 엮은 두 사람은 ‘고양이’를 생각하면서 ‘삶이야기’를 깨닫습니다. 참으로 고맙구나 싶은 고양이를 티없이 바라보면서 저마다 어떤 삶을 사랑하며 지내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한테 고양이란 한식구이기도 하지만, 삶을 깨닫도록 이끄는 이슬떨이가 되기도 합니다.


  가만히 돌이키면, 우리 겨레이든 이웃 겨레이든, 큰식구를 이루어 숲에서 살아가던 지난날, 어느 집에서건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슬떨이가 되고 말벗이 되었어요. 어느 집에서건 아이들이 어른한테 이슬떨이도 되고 말벗도 되었어요. 한식구는 서로서로 좋은 이슬떨이가 되면서 말벗입니다. 옆지기와 나는 가장 가까우며 좋은 이슬떨이이자 말벗이에요.


  곧, 고양이가 있으면 고양이를 바라보며 내 삶을 헤아립니다. 고양이가 없으면 아마 개를 바라보며, 또 나무를 바라보며, 어쩌면 꽃을 바라보며, 또는 들판에 심은 푸성귀를 바라보며, 가끔은 들새나 멧새를 바라보며, 이따금 개구리나 풀벌레를 바라보며, 가만가만 잠자리나 나비를 바라보며, 저마다 다 다른 넋을 북돋우겠지요. 논개구리보다 아주 작은 풀개구리를 살뜰히 바라보면서 ‘네 삶은 어떠하니?’ 하고 눈을 빛내며 이야기꽃 피울 수 있어요. 늦여름 막바지에 꽃을 피우는 벼포기를 마주하며 ‘네 삶은 어떻게 피어나니?’ 하고 눈을 빛내면서 이야기마당 펼칠 수 있어요.


.. 삶은 단순하고 인생은 아름다웠다 … 좋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사람들에게는 단지 고양이일 뿐이었다. 우리가 그랬듯이 그 사람들도 토비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 어머니에게 인생은 언제나 힘겨운 싸움이었다. 이호한 그날 이후부터 애벌린의 삶은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 그녀는 또 하나의 가족을 잃은 것이다. 그녀에게 위안을 주던 친구를 잃은 것이다 … 나는 재즈도 필요없고 큰 집도 필요없고 비싼 반지도 필요없어요. 그냥 나와 함께 인생의 길을 걸어갈 친구를 원해요 ..  (45, 59, 87, 221, 310쪽)


  들으려 하는 귀가 있으면 어디에서라도 이야기를 듣습니다. 나누려 하는 입이 있으면 언제라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람들 스스로 어떤 이음고리가 있어야 하지는 않아요. 사랑스러운 고양이가 꼭 있을 까닭은 없어요. 사랑스러운 숲을 새롭게 찾아나서야 하지는 않아요. 바로 오늘 내가 있는 이곳에서 사랑을 느끼면 돼요. 아파트로 이루어진 곳에서든, 40층이나 50층짜리 높은 건물 한 귀퉁이 사무실에서든, 스스로 어떤 사랑을 빛내면서 어떤 삶을 누리고픈가 하는 대목을 돌아보면 돼요. 사랑과 삶을 돌아보면서 내 모습을 깨닫고, 내 모습과 마찬가지로 내 이웃들 모습을 깨달으면 돼요. 그러고서 말을 걸어요. 마음으로 말을 걸어요. 어떻게 살아갈 때에 아름다울까요, 하고 말을 걸어요. 어떻게 살아갈 때에 즐거울까요, 하고 말을 걸어요. 어떻게 살아갈 때에 웃을 수 있을까요, 하고 말을 걸어요.


  에어컨한테 말을 걸 수 있겠지요. 숟가락한테 말을 걸 수 있겠지요. 물꼭지를 틀고는 물방울한테 말을 걸 수 있겠지요.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한테 말을 걸 수 있겠지요. 창문을 열고 바람한테 말을 걸 수 있겠지요.


  모두들 내 좋은 동무예요. 저마다 내 예쁜 길동무예요. 서로서로 내 살가운 삶동무예요.


.. 당연히 새끼 고양이들은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웠다. 아주 작은 몸집으로 뒤뚱거리며 어미 곁에 찰싹 붙어 있었다 … 비키는 비록 고양이를 싫어했지만 이 녀석을 포기할 순 없었다 … 비키는 강이 흐르는 계곡 위로 우뚝 솟아오른 산과 끝없이 펼쳐지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거대한 독수리들이 있는 코디엑을 사랑했다. 숲이 자신을 에워싸는 듯한 느낌도 좋았고, 마을의 친근한 가게들도 마음에 들었다 ..  (183, 187, 214쪽)


  내가 스스로 내 마음을 열어 다가갔기에 ‘고양이 듀이’ 또한 이녁 마음을 열며 다가옵니다. 내가 스스로 내 마음을 열어 다가간다면, 우리 시골집 마당에서 자라는 쑥 한 포기 또한 나한테 마음을 열며 다가와요.


  마음을 열 때에 아름답게 거듭나는 삶이에요. 마음을 가꿀 때에 스스로 새힘을 차리면서 활짝 웃는 삶이에요. 마음을 돌볼 때에 나와 이곳에서 한솥밥 먹는 살붙이도 빙그레 웃으며 마음을 보살피는 삶이에요.


  내가 나를 마음으로 좋아하면서, 내 보금자리를 좋아할 수 있어요. 내 보금자리를 마음으로 좋아하면서, 이 보금자리 깃든 마을을 좋아할 수 있어요. 내 보금자리 깃든 마을을 좋아하면서, 이 마을이 서로 얼크러진 땅덩어리를 좋아할 수 있어요.


  ‘고양이 듀이’를 마주하든 ‘후박나무 한 그루’를 마주하든, 나는 언제나 지구별 사랑스러운 꿈벗이랑 어깨동무하는 나날입니다. 나는 어디에서나 마음을 활짝 열며 가장 싱그럽고 빛나는 생각을 주고받는 나날입니다.


.. 당신이 부상당한 동물에게 마음을 주면 그들은 절대 그것을 잊지 않는다 … 마시멜로는 나의 일부분이다. 만일 어떤 남학생이 내 스웨터에 붙어 있는 마시멜로 털을 싫어한다면 그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것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 그 책의 초고가 나와서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듀이가 내 어깨너머로 함께 읽고 있다고 느꼈다. 아니에요. 듀이는 속삭였다. 그건 그렇게 된 게 아니거든요. 마음속에 그런 속삭임이 들리면 나는 그 문단, 문장, 단어에 집중했다. 듀이의 이야기를 똑바로 전해야 했다 … 나는 식단도 바꾸었다. 약도 줄였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기 시작했다 ..  (249, 309, 385, 386쪽)


  할 수 없는 일이란 없기도 한데,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을 굴릴 까닭도 없어요. 할 수 있는 일뿐이기에, 내가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하고 가만히 생각하면 돼요. 어쩌면 한꺼번에 백 가지나 천 가지 일을 할는지 모르지요. 만 가지 일을 한자리에서 할 수도 있지만, 이 가운데 꼭 한 가지만 골라 가장 즐겁게 누릴 수 있어요.


  사랑을 하고 싶으면 사랑을 하면 됩니다. 꿈을 키우고 싶으면 꿈을 키우면 됩니다. 나무를 심고 싶으면 나무를 심어요. 밥을 먹고 싶으면 밥을 먹어요. 숲길을 걷고 싶으면 숲길을 걷지요.


  가장 좋아할 만한 삶을 생각합니다. 가장 즐거울 만한 길을 살핍니다. 가장 아름다울 만한 사랑을 어루만집니다. 미국땅 한켠에서는 ‘고양이’ 한 마리를 곁에 두면서 가장 좋아할 만하고 가장 즐거울 만하며 가장 아름다울 만한 삶을 찾던 사람들이 있어요. 한국땅 골골샅샅에는 ‘누구한테 마음을 열면’서 삶을 사랑하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내 살붙이는, 내 이웃은, 나를 둘러싼 모든 목숨들은 어느 때에 저마다 이녁 삶을 사랑하면서 하루를 곱게 누리려나요. (4345.8.23.나무.ㅎㄲㅅㄱ)


― 정말 고마워, 듀이 (비키 마이런·브렛 위터 글,배유정 옮김,걷는책 펴냄,2011.12.15./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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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 4월에서 8월까지 모든 진보에게 묻는다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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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 아닌 평화를 이룰 삶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1] 손석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 책이름 :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 글 : 손석춘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2.8.15.)
- 책값 : 1만 원

 


  방바닥을 걸레질합니다. 하루에 몇 차례씩 걸레질을 하거나 비질을 하곤 합니다. 어린 두 아이와 살아가면서 그야말로 쉴 겨를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어버이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도록 하는 보금자리에서 숱한 일을 쉴 틈 없이 하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걸레질이 지겹거나 비질이 귀찮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어지르거나 작은아이가 똥오줌을 눈다 하더라도, 닦거나 치울 만하니까 닦거나 치웁니다. 어지른 것을 치우고 똥오줌 또한 치우면서 집안을 한 번 더 쓸거나 닦는 셈이리라 느낍니다.


  집 안팎에서 놀며 땀에 젖거나 지저분해진 옷을 벗겨 씻깁니다. 새 옷을 입힙니다. 아이들 옷가지 빨래는 날마다 수북하게 나옵니다. 한 살을 더 먹으면 빨래가 줄까, 두 살을 더 먹으면 빨래가 가뿐할까, 하고 생각한 지 다섯 해가 흐릅니다. 앞으로 해는 흐르고 흘러 또 다섯 해가 흐를 테고, 거듭 다섯 해가 흐르겠지요. 이동안 아이들마다 팔힘이나 다리힘이 부쩍 붙는다면, 바야흐로 아이들은 저희 옷을 저희가 빨래하거나 건사하거나 보듬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갖은 집일과 빨래와 밥하기에 얽히며 살아가지만, 이처럼 보낼 나날은 아주 짧으리라 느껴요. 무럭무럭 큰 아이들이 저희 삶을 저희 깜냥껏 빛내는 모습을 마주하면서 활짝 웃을 날이 아주 길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 대한민국 찬가를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 가운데는 4월혁명 세대도 있고 가까이는 한총련 세대도 있다. 그들의 찬가는 사뭇 객관적 통계로 뒷받침된다. 헐벗고 굶주린 나라가 산업화에 성공했고 민주화도 이뤘으며 마침내 선진화에 이르고 있다는 논리다. 그래서일까. 진보 일각에서도 마치 박정희를 비판만 하면 낡은 진보, ‘꼴통 진보’ 따위로 매도하는 윤똑똑이들이 나타났다. 박정희가 이룬 경제성장을 인정해야 새로운 진보이고 수구좌파가 아니라는 논리는 사뭇 학문의 옷까지 걸치고 등장했다. 박정희가 일본제국주의에 혈서를 써 가며 충성을 맹세할 만큼 출세를 위해서라면 민족을 배신하길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도, 쿠테타 직후 〈민족일보〉 발행인 처형을 비롯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숱한 민주 인사들의 생명을 앗아간 살인범이었다는 사실도, 민주공화국 헌법을 유린하고 사실상 총통으로 군림하며 정수장학회니 육영재단, 영남대 재단 따위로 다른 사람 재산을 빼앗거나 축적한 사실도, 국가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에 ‘채홍사’를 둘 만큼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다는 증언도 죄다 중요하지 않다 ..  (9∼10쪽)


  빨래를 날마다 너덧 차례나 예닐곱 차례까지 합니다. 겨울철에는 하루 서너 차례 빨래로 마무리지었으나, 여름철에는 예닐곱 차례뿐 아니라 여덟아홉 차례 빨래를 할 때가 있습니다. 후끈후끈 무더운 날에는 아이도 어른도 옷을 자주 갈아입고 자주 씻기고 씻으면서 새삼스레 빨래를 합니다. 무더운 날에는 빨래도 잘 마르니 자주 빨아 바지런히 말립니다.


  때로는 빨래만 바지런히 하고, 옷 개기는 미적미적 미룹니다. 예쁘게 개어 옷장에 넣어도 워낙 빨리 옷을 버리고 갈아입으니 다른 일을 할래, 하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다른 집일에 마음을 쓰느라 그만 깜빡 잊곤 합니다. 요즈음에는 마당에서 빨래를 걷을 적에 아예 마당에서 선 채 빨래를 갭니다. 이렇게 개지 않으면 옷가지를 집안으로 들이고서 옷을 못 개리라 느껴요. 옷가지를 들고 집으로 들어오면 다른 집일이 나를 부르는 바람에 옷은 나중에 개도 되지, 하고 여기고 맙니다.


  바로 옆에 수북하게 쌓인 옷가지는 어서 개 달라고 부릅니다. 부러 못 본 척하지는 않으나 가만히 바라봅니다. 아이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조금 더 잠을 자 주는구나 싶습니다. 밤새 틈틈이 비가 오더니 아침 일곱 시 즈음에는 햇살이 노오랗게 비치고, 뒤꼍에서 매미가 노래합니다. 아침햇살은 나뭇잎과 풀잎 사이에 곱게 드리웁니다. 물기 머금은 흙은 보들보들 빛납니다. 더위는 한풀 꺾인 듯하다가도 쉬 물러서지 않습니다. 아직 팔월 한복판인걸요.


  어느 논자락에는 벌써 이삭이 맺히고 열매가 익습니다. 이삭 맺힌 논은 얼마 없지만, 남녘나라에서 많이 따사로운 전남 고흥 시골마을 논자락은 조금 더 일찍 노오란 들판으로 바뀌리라 생각합니다. 나뭇잎은 푸르고, 들판은 노오라며, 하늘은 파랗게 눈부실 때에, 이 빛깔 사이사이 하얗게 흐르는 구름이 있을 적에, 네 식구 천천히 들길을 거닐면서 두 팔을 스르르 듭니다. 맑은 빛을 맞아들입니다. 밝은 볕을 받아들입니다. 고운 숨결을 끌어안습니다.


  걸을 수 있어 들길을 걷습니다. 누울 수 있어 풀숲에 눕습니다. 달릴 수 있어 멧길을 낑낑거리며 달립니다.


  바람은 산들산들 붑니다. 빛살은 골고루 퍼집니다. 풀벌레는 곳곳에서 노래합니다. 이 모든 목숨붙이 사이에서 사람은 예쁜 생각을 틔웁니다.


.. 그들의 반발감은 ‘조중동 프레임’을 남용하는 사람들로 인해 더 확고해지기도 했다. 자신의 잘못을 생뚱맞게 조중동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적잖게 목격해 왔다 … 조중동 때문만으로 소통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진보정치 세력과 국민 사이에, 좁게는 진보정치 세력 내부에, 더 좁게는 바로 진보 개개인 내부에 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 먹통은 이명박 정권만이 아니다. 적잖은 진보도 먹통이다 … 문제는 아무리 대안 토론회를 열고 책을 출간해도 국민과의 소통이 막히는 데 있다. 대다수 언론이 대안을 담은 신간 소개조차 모르쇠다 … 진보를 내세운 언론도 진보세력이 내놓는 대안 보도에 인색한 데 있다 ..  (17, 30, 106쪽)


  손석춘 님이 쓴 자그마한 책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철수와영희,2012)를 읽습니다. 진보정치나 진보운동이 걸어온 길을 찬찬히 짚으면서, 옳은 넋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만히 그리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국땅에서 나고 자란 젊은 넋이 바라던 옳은 길이란 무엇이었나 하고 밝힙니다. 한국땅에서 아이를 낳고 어버이나 어른이 될 젊거나 푸른 넋이 스스로 붙안을 만한 예쁜 길이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 한국의 대다수 시민은 ‘노동자’라는 말을 부담스러워 한다. 이해할 수 있다.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노사 관계를 비롯해 노동 교육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문과 방송에서 노동자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도 아니다 … 한국은 노동자라는 말은 물론, 노동운동이나 임금협상과 단체협상 그 모든 게 시민권조차 확보하지 못한 나라다 … 진보정당의 분열상은 대서특필하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정작 생활 현장에서 실제로 진보 대안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무시하는 모습을 이해하기는 난감하다 ..  (22∼23, 25, 110쪽)


  누구한테나 들려줄 만한 말인데, 억척스레 살아갈 까닭이 없습니다. 힘을 내어 살아갈 때에 즐겁지, 억척스레 살며 즐거울 수 없습니다. 악을 쓰며 살아갈 까닭이 없습니다.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때에 기쁘지, 악을 쓰며 사는 동안 기쁠 수 없습니다.


  자가용이 있으면 하루만에 훌쩍 다녀올 만한 길이라면, 자전거를 타면 이틀이나 사흘에 걸쳐 천천히 다녀올 만한 길입니다. 두 다리로 걷는다면 열흘이나 보름이 걸릴 만한 길일 수 있습니다.


  꼭 자가용을 몰아야 좋은 삶이 아닙니다. 자전거를 우악스레 빨리 몰아야 좋은 나들이가 아닙니다. 죽을 동 살 동 쉬잖고 걸어야 좋은 마실이 아닙니다.


  자가용 있어도 즐겁고, 자가용 없어도 즐겁습니다. 돈 넉넉히 있어도 즐거우며, 돈 얼마 없어도 즐겁습니다. 즐거움은 자가용이나 돈에 깃들지 않아요. 즐거움은 오직 내 마음에 깃들어요. 너른 마음에 깃드는 즐거움이에요. 착한 마음에 스미는 기쁨이에요. 맑은 마음에 찾아드는 웃음이에요. 고운 마음에 넘치는 사랑이에요.


.. 김대중이 군사독재 아래서 “경제성장의 열매는 이들과 결탁한 소수 특권층에 의해 거의 독점되어 왔으며 노동자·농민들은 성장의 결실 배분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배제되어 왔다”고 주장했지만, 바로 그 노동자와 농민들이 갈망했던 ‘김대중 대통령’ 아래서도 경제성장의 열매는 소수 특권층이 독점했다 …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국가에서 국민 대다수가 억척스럽게 살아가면서도 얼마 안 되는 여가시간 대부분을 텔레비전 드라마 시청으로 보낸다. 케케묵은 바보상자론을 펴려는 게 아니다. 다만 차분히 토론해 볼 필요는 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드라마를 보았는가를. 드라마에 나오는 대기업 회장과 그 가족들의 모습은 한결같다 ..  (76∼77, 123쪽)


  나는 진보가 더 좋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진보(進步)’를 한국말로 쉽게 풀자면 ‘나아짐’이나 ‘높아짐’이라 하는데, 한 마디로 ‘발돋움’이라 할 테지요. 한결 앞으로 나아가고 한결 슬기롭게 높아진다는 뜻일 테지요. 아무튼, 나아지거나 높아질 때에 아름다울 수 있지만, 나아지거나 높아진다는 뜻을 꼭 발돋움으로 따져야 하지는 않아요. ‘생활 진보’라 말할 것 없이, 오이꽃이나 수박꽃이나 호박꽃이나 수세미꽃을 보는 하루도 아름답고 즐거우며 놀랍습니다. 감꽃이나 벼꽃이나 매화꽃이나 딸기꽃이나 달맞이꽃이나 나팔꽃이나 오얏꽃을 보는 하루도 예쁘며 빛나고 훌륭합니다.


  진보정당일 때에 진보가 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삶이 아름다울 때에 ‘환하게 웃는 길로 나아간다’고 느껴요. 내가 웃고 네가 웃는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만화책 《도라에몽》에 나오는 ‘이슬이’는 ‘영민이’와 ‘진구’뿐 아니라 ‘퉁퉁이’와 ‘비실이’한테도 손수 구운 과자를 나눕니다. ‘도라에몽’과 ‘진구’는 ‘이슬이’뿐 아니라 ‘퉁퉁이’와 ‘비실이’도 불러 즐겁게 구름을 타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놀이를 즐깁니다.


  함께 나아가는 길이에요. 가을날 누렇게 익은 들판에서 거두는 벼는 이이한테만 먹이고 저이한테는 안 먹여도 되지 않아요. 골고루 나누는 사랑이자 꿈입니다. 다 함께 누리는 밥이자 삶입니다.


  이를테면, 무상급식을 하면 돈있는 집한테든 돈없는 집한테든 골고루 좋겠지요. 무상급식을 할 돈은 세금을 골고루 슬기롭게 거두면 되겠지요. 나는 100원을 벌기에 10원을 세금으로 냅니다. 내 이웃은 10000원을 벌기에 1000원을 세금으로 냅니다. 또는, 나는 10원을 벌기에 세금을 따로 내지 않습니다. 내 동무는 100000원을 벌기에 10000원이나 20000원을 세금으로 냅니다.


  어린 아이들은 작은 손으로 흙을 조금 떠서 나릅니다. 힘센 어른들은 푸대에 흙을 잔뜩 담아 지게로 몇 섬씩 나릅니다. 그런데,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떡을 한 점씩 줍니다.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밥그릇 하나씩 베풉니다. 집에 아이가 있는 어른은 떡을 두 점 받거나 석 점 받습니다. 몸이 아파 드러누운 어른은 흙푸대를 한 섬도 안 날랐으나 떡과 밥을 똑같이 받습니다. 아기를 밴 어머니는 떡과 밥을 둘씩 받기도 합니다. 아기를 밴 어머니 또한 흙푸대는 한 섬도 안 날랐으나 떡과 밥은 외려 더 받는다 할 만합니다.


  너무 마땅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마땅한 이야기는 이쪽 신문을 읽으며 이쪽 생각을 하든 저쪽 신문을 읽으며 저쪽 생각을 하든 누구한테나 마땅하고 옳으며 똑같습니다. 귀여운 손자는 왼쪽 사람한테도 귀엽고 오른쪽 사람한테도 귀엽습니다. 우리 집 아픈 아이는 왼쪽 사람한테도 보살필 애틋한 아이요 오른쪽 사람한테도 보살필 애틋한 아이예요.


.. 무엇보다 진보가 할 일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 우리에게 사람과 사회, 역사의 변화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진보운동을 시작했겠는가. 그 첫 마음을 소통해야 옳다 … 진보 대혁신의 출발점은 개개인의 자기성찰과 학습이다 ..  (97, 113쪽)


  우리 삶은 굳이 ‘진보’로 가지 않아도 됩니다. ‘진보’가 굳이 이 땅에 뿌리내리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착함·참다움·고움’ 이렇게 세 가지가 이 땅에 뿌리내리면 돼요. 누구한테나 착한 빛과 서로서로 참다운 꿈과 다 함께 고운 사랑이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으면 즐거워요.


  고운 아이한테도 미운 아이한테도 떡 한 점씩 나눕니다. 고운 이웃도 미운 이웃도 따로 없이, 저마다 논밭을 푸르게 일굽니다. 능금나무는 모든 사람한테 달콤한 열매를 나누어 줍니다. 복숭아나무는 모든 아이들한테 달콤한 열매를 베풉니다. 포도나무는 모든 어른들한테 달콤한 열매를 선사합니다.


  정치이든 경제이든 문화이든 교육이든 예술이든, 또 집안일이든 집살림이든, 능금나무 같은 길을 걸어가면 좋으리라 느껴요. 복숭아나무처럼, 포도나무처럼, 또 볏포기처럼 배추처럼 무처럼, 누구한테나 맛나고 달콤하며 배부른 숨결을 불어넣는 예쁜 길을 걸어가면 참말 좋으리라 생각해요.
  삶을 배워야지요. 사랑을 얘기해야지요. 꿈을 이루어야지요. (4345.8.1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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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기적 같은 일 - 바닷가 새 터를 만나고 사람의 마음으로 집을 짓고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송성영 지음 / 오마이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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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이끄는 생각으로 살아가다
 [책읽기 삶읽기 112] 송성영, 《모두가 기적 같은 일》(오마이북,2012)

 


  마을에서 매미 우는 나무 있는 집은 우리 집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하곤 합니다. 이웃 어느 집이건 나무가 우람하거나 많은데, 이 많은 나무 가운데 매미 우는 나무는 거의 찾아보지 못합니다.


  면내나 읍내에 나가면 매미 노랫소리를 쉬 듣습니다. 도시에서도 매미 노랫소리를 곧잘 듣습니다. 이와 달리 시골 한복판에서는 매미 노랫소리를 못 들으니 좀 알쏭달쏭한데, 가만히 생각하니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분들 누구나 풀약을 무척 자주 쳐요. 논둑에도 밭둑에도, 논에도 밭에도 틈틈이 풀약을 칩니다. 나무 밑이라고 달라지지 않아요.


  도시는 자동차가 몹시 많습니다. 도시사람은 담배를 무척 많이 피웁니다. 그렇지만 도시 길거리에 심은 나무에 풀약을 틈틈이 치는 일은 드물지 싶어요. 도시 길거리에서 자라는 나무 밑이나 둘레에는 담배꽁초이며 쓰레기이며 잔뜩 있지만, 나무뿌리 있는 땅속에는 시골처럼 풀약 기운이 스며들 일이 적으리라 느껴요.


.. 그동안 생활비를 꺼내 쓰는 통장에 있는 100만∼200만 원을 전부로 알고 살아온 제게는 분명 엄청난 거금이었습니다. 욕심이 눈앞을 가렸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저는 그 거금으로 농사지을 땅과 빈집을 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옆에 작은 흙집까지 지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  (15쪽)


  저녁에 읍내 마실을 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해 떨어지고 별이 뜬 읍내 밤하늘은 까맣습니다. 까만 밤하늘에 별빛이 반짝입니다. 시골 읍내에서는 별을 꽤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읍내보다 훨씬 까맣습니다. 훨씬 까만 밤하늘에는 훨씬 반짝이는 별이 더 많이 보입니다.


  밤이 까맣기에 별이 밝습니다. 밤이 까맣지 않다면 별은 밝지 않을 뿐더러, 별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밤이 하얗다면 별은 깜깜합니다. 밤이 하얀 곳에서는 아예 별을 잊거나 모른 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해가 밝기에 푸른 잎사귀 싱그러운 풀과 나무를 알아봅니다. 해가 맑기에 하늘이 파랗고 구름이 하얗습니다. 해가 곱기에 가을날 누런 들판을 바라볼 수 있고, 해가 예쁘기에 새와 꽃과 벌레와 냇물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기로 불을 밝혀도 집안에서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해가 내리쬐는 낮에도 책을 읽을 수 있으나, 해가 떨어진 깊은 밤에도 전기불을 켜면 언제라도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해가 없는 깊은 밤에도 길거리에 불빛을 드리우면 걸어다니기에 좋고 얼굴을 알아볼 수 있으며 나방 날갯짓을 살필 수 있어요.


.. 전 그저 부드러운 뒷산과 좌우 산줄기가 바람을 막아 주고 있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아 좋았습니다 … 밑도 끝도 없이 터를 구하는 데 3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고 푼수처럼 말하자 동네 어르신이 마뜩찮다는 투로 말했습니다. “뭐 그렇게 까다롭게 땅을 구하러 다녔데요이. 어디든 정 붙이고 살믄 고만이지.” ..  (26, 62쪽)


  새벽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노랫소리라 느끼기에 새벽녘 찾아드는 소리 모두 노래라고 여깁니다. 멧새도 들새도 풀벌레도 바람도 나뭇잎도 풀잎도 모두 노랫소리를 들려준다고 생각합니다. 철마다 새롭게 찾아드는 노래이고, 아침 낮 저녁 밤으로 새롭게 울려퍼지는 노래라고 맞아들입니다.


  새끼를 깐 멧새나 들새 노랫소리는 새삼스럽습니다. 갓 깨어난 새끼가 무럭무럭 자라나며 퍼지는 노랫소리는 남다릅니다. 그러고 보면, 갓 태어난 아이들 노랫소리도 새삼스럽습니다. 하루하루 씩씩하게 자라나는 아이들 노랫소리도 남다릅니다.


  나는 늘 노랫소리에 둘러싸인 채 살아갑니다. 나를 둘러싼 노랫소리는 내 마음결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 마음결이 따사로울 때에는 노랫소리 또한 따사롭습니다. 내 마음결이 칙칙할 적에는 노랫소리 또한 칙칙합니다. 내 마음결이 보드라울 때에는 노랫소리 또한 보드랍습니다. 내 마음결이 딱딱할 적에는 노랫소리 또한 딱딱해요.


  내 마음이 생각을 이끕니다. 내 마음이 이끄는 생각이 삶을 이끕니다. 내 마음이 이끄는 생각으로 누리는 삶이 사랑을 이끕니다.


.. 산 위의 나무들은 땔감이 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몫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람을 막아 주고 산소를 공급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푸른 빛깔에 고운 단풍까지 아낌없이 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  (293쪽)


  좋다고 느끼는 마음으로 좋다고 느낄 삶을 누립니다. 좋다고 느끼는 마음으로 좋다고 느낄 사랑을 나눕니다. 좋다고 느끼는 마음으로 좋다고 느낄 꿈을 이룹니다. 스스로 어떻게 느끼는가에 따라 오늘 하루 다르게 찾아옵니다. 스스로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오늘 이야기는 새롭게 빛납니다.


  이 시골집에서 살아도 싱그러운 하루입니다. 저 시골마을에 깃들어도 상큼한 하루입니다. 저 골목집에서 살아도 해맑은 하루입니다. 저 아파트숲에 깃들어도 산뜻한 하루입니다.


  마음이 사랑스럽지 못하다면 삶이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눈빛이 사랑스럽지 못하다면 삶이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손길이 사랑스럽지 못하니 삶이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몸짓이 사랑스러울 때에 삶은 시나브로 사랑스레 거듭납니다.


  내가 걸어갈 길은 스스로 일굽니다. 내 길은 내가 닦습니다. 내 생각은 내가 예쁘게 다스리지만, 내 생각은 나 스스로 바보스레 내팽개치곤 합니다.


.. 전력 소모량이 많은 대도시 주변에 핵발전소를 건설하면 구태여 자연경관을 해치고 전자파로 건강까지 해치는 송전 철탑을 세워 먼 거리까지 전기를 끌어다 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핵발전소를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하겠다는 것은 아무리 안정성을 강조한다 해도 그만큼 위험천만한 시설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핵발전소 반대를 이기적인 님비 현상으로 몰아붙이고 있지만, 정작 이 위험한 시설에서 멀리 떨어져 살며 물 쓰듯 전기를 사용하는 대도시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이기적인 사람들일 것입니다 ..  (322쪽)


  송성영 님이 전라남도 고흥에 새 보금자리를 얻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수필책 《모두가 기적 같은 일》(오마이북,2012)을 읽습니다. 송성영 님은 흙을 일구는 삶을 생각하지만, 밥벌이는 글을 써서 메꾸곤 했답니다. 송성영 님 옆지기가 ‘미술 교사’ 노릇을 하며 알뜰히 버는 돈이 있어, 시골자락에서 흙과 벗삼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고도 합니다.


  나도 시골에서 살아가고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내가 시골에서 살아가며 글을 안 쓴다면 삶이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글쓰기에 마음과 품과 겨를을 들이는 만큼 흙이랑 풀이랑 나무한테 마음과 품과 겨를을 들이겠지요. 글을 써서 책을 빚을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글을 안 쓰고 흙이랑 풀이랑 나무한테 마음과 품과 겨를을 들이면, 돈벌이는 없거나 적거나 다를 수 있으나, 밥벌이는 넉넉할 수 있는 한편 새로운 ‘벌이’를 할 수 있으리라 느껴요.


  이를테면, 흙을 더 잘 알 수 있고, 풀이랑 나무를 한결 넓게 알 수 있어요. 글에 마음을 기울이는 만큼 글을 한결 잘 쓰거나 한결 잘 읽을 수 있어요. 흙에 마음을 기울이는 만큼 흙을 한결 잘 알거나 한결 잘 다룰 수 있어요. 바닷사람이 바닷물에 마음을 기울이는 만큼 물질과 고기잡이를 한결 잘 알거나 한결 잘 할 수 있어요. 자가용을 장만한 사람 또한 자가용한테 마음을 기울이는 만큼 자가용을 한결 잘 알거나 잘 몰 수 있겠지요.


  스스로 이끄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스스로 이끄는 생각이 삶을 이룹니다.


  그나저나, 송성영 님은 “우리 집을 포함해 달랑 집 두 채만 있는 바닷가 오지임에도 번듯한 새집에 깃들여 살며 기운이 펄펄 살아난 아내는 이사 오자마자 이력서를 챙겨 방과 후 강사 자리를 찾아나섰습니다. 큰 도시에 비해 문화적 여건이 낙후한 고흥에는 미술 전공자들이 귀한 모양입니다. 아내는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다 초등학교 세 군데에서 강사 자리를 얻었습니다(226쪽).” 하는 이야기를 적바림합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큰 도시에 비해 문화적 여건이 낙후한 고흥’은 어떤 모습인지 아리송합니다. ‘문화적 여건’이란 무엇이고, ‘낙후한 모습’은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나 또한 전라남도 고흥군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느 시골마을 여느 시골사람으로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내 이웃 할머니가 백일홍을 바라보며 예쁘다 말하는 모습이란 ‘문화를 누리는 삶’이며 ‘그림 같은 그림을 알아보는 눈길’이라고 느껴요. 높고 낮은 멧자락을 낀 비탈밭 돌을 골라 돌울을 쌓아 빚은 밭이랑 논은 모두 ‘아름다운 예술품’이로구나 싶어요. 풀빛 우거진 숲이 넓게 이어진 멧자락 모두 ‘예쁜 문화예술’이로구나 싶어요.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이 될 만큼 싱그럽고 해맑게 지키며 돌본 시골마을 고흥은 어디나 ‘문화요 예술이며 문명이고 사랑’이 되리라 느껴요.


  다만, 시골 분들 스스로 삶을 애틋하게 사랑하며 어깨동무하는 길을 더 씩씩하게 믿지 못한 나머지, 자꾸자꾸 풀약을 칩니다. 논에도 밭에도 자꾸자꾸 풀약을 치고 맙니다. 풀약을 안 치고 똥오줌 거름으로 지은 곡식이랑 열매가 훨씬 높은 값을 받는 요즈음이기 때문에 유기농 농사를 지어야 하지는 않아요. 풀약을 친 곡식이나 열매는 사람 몸에도 안 좋을밖에 없을 뿐더러, 내 똥오줌을 거름으로 삼아 흙을 살찌우며 거둔 곡식이나 열매는 흙일꾼인 시골사람부터 달삯쟁이인 도시사람 모두 튼튼하게 살릴 수 있어서 좋아요. 돈 때문에 짓는 유기농이 아니에요. 돈을 더 벌자고 하는 유기농이 아니에요. 삶을 사랑하고 삶을 빛내며 삶을 가꾸고픈 꿈이 있어서 유기농을 해요.

  꼭 유기농이 아니더라도, 내 보금자리와 마을을 한결 푸르게 사랑하면서 풀과 나무를 바라본다면, 모든 들풀이 모든 약초이듯, 모든 들풀을 손으로 살가이 쓰다듬으며 좋은 벗이자 밥이자 넋으로 맞아들일 만하겠지요.


  풀약을 안 친 멧자락이나 들판에서는 어느 풀을 뜯어먹어도 배가 부르면서 몸이 싱그럽게 살아나요. 풀약을 친 멧자락이나 들판에서는 어느 풀도 섣불리 뜯어먹을 수 없어요. (4345.8.5.해.ㅎㄲㅅㄱ)

 


―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송성영 글,오마이북 펴냄,2012.6.22./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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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사회 - 벌거벗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
한홍구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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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을 놓아야 할 정부와 시민
 [책읽기 삶읽기 111] 한홍구·최철웅·엄기호·홍성수·한상희, 《감시사회》(철수와영희,2012)

 


  한홍구·최철웅·엄기호·홍성수·한상희, 이렇게 다섯 사람이 펼친 강의를 담은 이야기책 《감시사회》(철수와영희,2012)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정부가 시민을 감시하는 일은 옳지 않고, 시민이 정부를 감시해야 옳다 하는데, ‘정부’와 ‘시민’이 따로 있을까 궁금합니다. ‘시민(市民)’이라는 말은 ‘도시사람’이라기보다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공민(公民)’을 가리킨다 할 테지만, 아무래도 도시 아니고는 이 이름을 쓰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내가 살아가는 시골마을 어르신들 누구나 스스로 ‘농민’이라 말하지 ‘시민’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이름을 따지느냐 하면, 정부를 이루는 공무원이고 국회의원이고 대통령이고 장관이고 누구이고를 떠나, 도시에서 태어나 중앙정부나 지역자치정부 일꾼이 되기도 하지만,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로 들어가서 ‘정부 행정 일꾼’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농민에서 시민이 되었다가 정부가 됩니다. 그런데, 예순 살 즈음 지나면 정년퇴직을 할 테니 다시 시민이 되거나 농민이 됩니다. 참말 ‘정부’란 얼굴이 있을까요. 정부란 무엇일까요. 시민이 감시해야 한다는 정부란 무엇인가요.


.. 저는 감시는 원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누구를 감시하죠? 시민이 정부를 감시해야죠. 시민이 권력을 감시해야 합니다. 왜? 권력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가만히 놔두면 건방져져요. 방자해집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원리 자체에 견제와 감시가 있죠.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거꾸로 되어 있어요. 권력이 국민을 감시합니다 … 자신감 있는 사회는 감시를 잘 안 하죠. 그런데 이북은 어때요? 소련 무너졌지, 동유럽 무너졌지, 중국은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사실상 자본주의 국가가 되어버렸죠. 불안합니다. 탈북자는 늘어나지, 대북전단은 계속 날아오지, 감시를 많이 할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남쪽과 북쪽 중에 어느 편이 더 국민 감시를 잘할까요? ..  (13, 18쪽)


  민주주의 얼거리이기 때문에 정부가 비뚤어지거나 비틀리지 않게끔 ‘지켜보’거나 ‘살펴보’아야 한다는데, 정부에서 행정 일꾼으로 일하는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에요. 적어도 스물대여섯 살은 먹었을 테며, 웬만한 간부 자리에 있다면 마흔이나 쉰 즈음 될 테지요. 한창 ‘나이를 먹은’ 사람이 정부 행정 얼거리를 이룹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는 이들도 예순이나 일흔을 넘기 일쑤입니다. ‘어린’ 사람이 아니에요. 곧, 누가 지켜보거나 살펴본대서 어느 일을 더 잘 하거나 더 못 할 만한 철부지가 아니에요.


  그렇지만, 철부지 아닌 ‘어른’이라 할 사람들이 정부 행정 얼거리에 깃들 때에는 뜻밖에도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일쑤예요. 참말 어른스럽게 일하면서 참으로 어른답게 아름다운 길을 걸어야 할 텐데, 뚱딴지 같거나 어처구니없는 짓을 자꾸 일삼아요.


  이를테면, 나라돈을 빼돌리는 일도 뚱딴지 같은데, 덧없는 막개발과 막공사를 밀어붙이는 일도 뚱딴지 같습니다. 전쟁무기 만들거나 사들이는 데에 어마어마하게 돈을 퍼붓는 일도 뚱딴지 같습니다. 관공서나 공공기관 건물을 크고 우람하며 멋들어지게 짓는 일도 뚱딴지 같습니다.


  즐거이 살아갈 터전이 되도록 애쓸 어른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사이좋게 어깨동무할 터전이 되게끔 힘쓸 어른일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정부가 시민을 감시하든, 시민이 정부를 감시하든,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 사회일 때에는 하나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못 믿으면서 지켜보거나 살펴보아야 할 때에는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 부유층이 민간경비로 보안시설을 세우고 자기들만의 주거공간을 세워요. 어쩌면 새로운 봉건사회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 봉건시대 영주들이 자기 성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았듯, 이제는 부르주아들이 하층민과 더 이상 어울려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천명하는 것이죠 … 유시티라는 것도 돈 많은 사람들이 가서 사는 곳이지, 하층민들이 사는 동네가 아닌 거잖아요 … 중·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아이’들은 재수 없어 했잖아요. 쟤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앉아 있는 ‘똘마니’, ‘꼬봉’이라고 놀렸던 이유 중 하나가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었죠..  (77∼78, 97쪽)


  나는 ‘권력이 되라’는 뜻으로 만드는 정부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오늘날 정부 행정 일꾼은 스스로 ‘권력이 되려’고 합니다. 금으로 빚은 무언가를 가슴에 차든, 법전을 다루는 일을 하든, 경찰이나 군인이 되든, 여느 교사나 여느 공무원이 되든, 모두 ‘남다른 권리(특권)’를 누립니다. 여느 사람들은 누리지 못하는 숱한 권리가 이들 공무원한테 주어져요.


  공무원이 누리는 권리는 시민한테서 나왔을까요. 아마 시민은 세금을 많이 물어야 할 테고, 작은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간접세가 따라붙으니 언제나 세금을 많이 낼 테며, 이렁저렁 모이는 돈으로 공무원 특권이 더 커지리라 봅니다. 그런데 시민이 돈을 벌어 돈을 쓰며 세금을 내자면, 시골에서 농민이 먹을거리를 일구어야 합니다. 농민이 시민을 먹여살리고, 시민이 돈벌이를 해서 정부를 뒷받침합니다. 정부는 시민 앞에서 권력을 뽐내고, 시민은 농민 앞에서 생각이 없습니다.


  보기 하나를 들자면, 한여름을 맞이해, 도시사람(시민)은 너나없이 물 좋고 시원하며 바람 좋은 데로 나들이를 떠납니다. 도시사람이 찾아가는 바다나 들이나 멧자락은 모두 시골입니다. 시민들이 농민 삶터에서 한여름 더위를 긋습니다. 시민들이 농민 일터에서 한여름 말미를 즐깁니다. 그런데, 시민들은 농민들 삶터에 쓰레기를 잔뜩 남깁니다.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린 쓰레기를 도로 이녁 시민들 자동차에 담아 집으로 가져가는 일이 매우 드뭅니다. 여름 휴가철이 지나면 농민들 삶터이자 일터인 들판과 바다와 멧자락은 온통 쓰레기투성이입니다. 시민들은 정부가 권력을 뽐내며 시민을 휘어잡는다고 말하지만, 막상 시민은 농민을 바보처럼 여깁니다.


..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아시죠? 거기 보면 초등학교에 가서 생활기록부를 열람하는 장면이 꼭 나옵니다. 교감선생님이 나오셔서 근엄한 얼굴로 생활기록부를 펼치는 장면은 그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죠. 출연자의 행동발달 상황 등을 들춰보면서 다들 깔깔거리며 웃곤 하는데, 저는 아주 섬뜩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출연자의 동의를 받겠지만, 개인의 생활기록부를 보고 싶어 하는 궁금증 자체가 문제입니다. 생활기록부는 학생에 대한 사적인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생님과 학생, 선생님과 학부모 사이에서만 교육적인 목적으로 활용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그것이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된다는 것은 생활기록부의 목적에 전혀 맞지 않죠 … 저도 학교에서 종종 저소득층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 추천서를 써 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의 경제적 처지를 모르면 써 줄 수가 없습니다. 저소득층 학생을 위해 장학금을 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일이지만, 그러려면 그 학생은 민감한 개인정보를 저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  (138, 146쪽)


  이야기책 《감시사회》에 좋은 말이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정교한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보는 눈입니다(201쪽).”라고. 이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정부는 ‘데이터베이스’, 곧 ‘숫자’로 시민을 재거나 따져서는 안 됩니다. 학교는 학생을 숫자, 곧 성적이나 시험으로 재거나 따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시민은 농민을 숫자, 곧 ‘곡식 값’이나 ‘푸성귀 값’이나 ‘열매 값’이나 ‘고기(물고기와 뭍고기 모두) 값’으로 재거나 따져서는 안 됩니다.


  정부는 시민을 사랑과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민은 농민을 사랑과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정부는 곧 시민입니다. 시민은 곧 농민입니다. 서로 다른 얼거리가 아니라, 서로 같은 사람입니다. 하늘 높은 정부가 아니요, 도시에서 돈만 벌면 되는 시민이 아닙니다. 모두들 똑같이 밥을 먹고 물을 마십니다. 모두들 똑같이 햇살을 누리고 바람을 쐽니다. 모두들 똑같이 지구별이라는 데에서 흙에 집을 짓고 흙을 밟으면서 목숨을 잇습니다.


  서로서로 “사람살이를 바라보는 따스한 눈길”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우리들 살림살이를 따스히 바라볼 때에 호젓하고 홀가분합니다. 즐겁게 살아갈 길을 찾을 노릇이지, 이웃나라에는 없는 높은 건물을 세운다거나 커다란 절집을 짓는다거나 냇둑에 시멘트를 퍼붓는다거나 하는 바보스러운 짓은 그칠 노릇이에요. 소비와 경제성장과 개발이 아니라, 자립과 독립과 공동체, 그러니까 스스로 살고 스스로 생각하며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는 두레를 깨달을 노릇이에요.


.. 일제가 왜 조선사람을 교육시켰겠어요? 충실한 일제의 군인으로 키우기 위해서였잖아요. 여러분 처음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했던 것이 뭡니까? 운동장에서 ‘앞으로나란히’부터 배우잖아요. 일종의 제식 훈련을 한 거죠 ..  (22∼23쪽)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제국주의에 몸과 마음을 바치라며 ‘국민학교’를 세웠습니다. 오늘날 한국은 초등교육과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으로 아이들을 어떤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가 헤아려 봅니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이끄는 대한민국 교육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서울 고등학교, 부산 고등학교, 밀양 고등학교, 속초 고등학교, 원주 고등학교 들에서는 참말 지역빛을 살리면서 마을 일꾼이 될 만한 씩씩하고 튼튼한 아이를 가르치는가요.


  중학교 아이들은 시를 배우는가요. 중학교 아이들은 평론이나 비평이나 논술이 아니라 시를 시답게 읽고 즐기거나 누릴 수 있는가요. 초등학교 아이들은 책을 읽는가요. 독후감이나 ‘대입 논술 대비’로 여기는 독후활동 따위에 시달리지 않나요.


  삶을 다루지 않는 책이라면 어느 책이든 부질없습니다. 지식을 다루는 책이라면 인문책이든 예술책이든 부질없습니다. 네덜란드 그림쟁이 고흐는 지식이 아닌 삶을 그렸습니다. 한국 그림쟁이 박수근이든 이중섭이든 천경자이든 지식을 그림으로 그리지 않았어요. 언제나 이녁 삶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황순원이나 박경리나 김남주나 고정희가 지식을 문학으로 빚었을까요. 이들 또한 하나같이 삶을 문학으로 빚었을 뿐입니다.


  정부가 할 몫이란 삶을 북돋우는 일입니다. 시민이 할 몫이란 스스로 삶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농민이 할 몫이란 한결같이 흙과 풀을 보살피는 일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지식 다루는 책이 아닌 삶을 밝히는 책을 읽을 노릇입니다. 지식을 부풀리지 말고, 삶을 살찌우면서 스스로 아름답게 꿈을 꿀 노릇입니다.


  따지고 보면, 정부에서 시민을 감시하거나 말거나 아랑곳할 까닭이 없어요. 감시하고프면 감시하라지요. 내가 텃밭 흙을 일구고 풀을 뽑는 하루살이를 지켜보라지요. 내가 아이들과 뒹굴며 밥하고 빨래하며 누리는 하루살림을 살펴보라지요. (4345.6.28.나무.ㅎㄲㅅㄱ)

 


― 감시사회 (한홍구·최철웅·엄기호·홍성수·한상희 글,철수와영희 펴냄,2012.6.30./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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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듯 같은 듯 - 언어와 문화의 한.일 비교
사이토 아케미 지음 / 소화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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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스한 마음으로 한국에서 살아가기
 [책읽기 삶읽기 108] 사이토 아케미, 《다른 듯 같은 듯》(소화,2006)

 


  마음을 따스하게 품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내 삶과 내 이웃들 삶을 따스하게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마음을 차갑게 내팽개치며 살아가는 사람은 내 삶이든 내 이웃들 삶이든 아무렇게나 짓밟거나 허물어뜨릴 수 있습니다.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삶입니다. 마음자리에 따라 거듭나는 삶입니다.


  나 스스로 착한 마음을 깨달아 언제라도 착한 기운이 감돌도록 힘쓰지 않는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착함’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해요. 나 스스로 고운 삶을 깨달아 언제라도 고운 넋이 되도록 애쓰지 않는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고움’이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해요.


.. 한국에서 나이는 말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 한국인의 성씨는 286개(2002년 조사)로, 약 30만 개에 이르는 일본인의 성씨에 비하면 훨씬 적다 … 일본어라면 ‘선생’을 붙이는 것만으로 충분히 경칭이 되나 한국에서는 일반적인 대화에서도 ‘교수님’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  (19, 44, 93쪽)


  착한 삶은 누가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고운 삶은 누가 알려주지 못합니다. 참다운 삶은 누가 이끌어 주지 못합니다. 착하고 고우며 참다이 누릴 삶은 언제나 나 스스로 느끼고 익히며 꾸릴 수 있습니다.


  좋아할 만한 삶은 내가 좋다고 느낄 때에 좋아할 만한 삶입니다. 돈을 버는 일자리는 나 스스로 찾아서 얻습니다. 마음을 나눌 짝꿍은 나 스스로 만나고 사귑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내 손으로 돌보며 사랑합니다. 내 눈으로 꽃을 바라보며 예쁘구나 하고 느낍니다. 내 손으로 풀잎을 쓰다듬으며 어여쁘구나 하고 느낍니다. 내 손으로 나무를 얼싸안으며 아리땁구나 하고 느낍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대로 살아갑니다. 나는 남이 바라는 대로 살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꿈꾸는 대로 살아갑니다. 나는 남이 등떠미는 대로 살지 못합니다. 내 길은 내가 바라봅니다. 내 뜻은 내가 다스립니다. 내 말은 내 입과 손으로 읊습니다.


.. 급한 일이라도 있어 앞질러야 할 때는 마치 인파를 누비듯 지그재그로 걷는 것이 일본인의 습관이다. 그래도 어깨나 팔이 닿으면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한다 … (한국사람이) 사과의 말을 적게 하는 것과 더불어 또 하나 이상한 것은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아끼는 것이다 … 일본인에게는 ‘친한 사이에도 계산은 깨끗하게’라는 무언의 규칙이 있다 ..  (21∼23, 26쪽)


  착한 삶은 어떤 삶일까 생각해 봅니다. 총칼을 들지 않거나 주먹다짐을 하지 않을 때에 착한 삶이 될 만한가요. 어느 눈길로는 이만 하기만 하더라도 착한 삶이 되겠지요. 퍽 많다 싶은 돈을 혼자 차지하지 않고 내려놓을 때에 착한 삶이 될 만한가요. 어느 눈길로는 이쯤 되더라도 착한 삶이 되겠지요. 이런저런 대학교 졸업장을 앞에 드러내지 않을 때에 착한 삶이 될 수 있나요. 어느 눈길로는 이런 모습 또한 착한 삶이 되겠지요.


  내가 느끼는 착한 삶은 무엇일까 헤아려 봅니다. 내 밥을 내가 차리고, 내 밥이 될 먹을거리를 나 스스로 얻으며, 내 삶자리에서 쓰레기 아닌 거름을 내어 보금자리와 흙을 살찌울 수 있을 때에 착한 삶이리라 느낍니다. 나와 살붙이를 사랑으로 돌볼 줄 알며, 따숩고 너그러운 말로 하루하루 기쁜 웃음을 나눌 때에 착한 삶이 된다고 느낍니다. 두 다리를 좋아하고, 자전거를 누릴 때에 착한 삶이라고 느낍니다. 하늘빛을 좋아하고 풀빛을 사랑할 때에 착한 삶이라고 느낍니다. 내 삶에서 가장 빛나는 열매를 글 하나로 엮어 여럿이 즐겁게 읽도록 내놓을 수 있을 때에 착한 삶이라고 느낍니다.


.. 문득 한국인과 일본인은 대화할 때 내뱉는 단어의 수부터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한편 한국인은 이야기하는 쪽도 적극적이지만 듣는 쪽도 빈틈을 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말을 받는다 … 일본인은 외부인, 특히 낯선 사람이나 친밀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침묵으로 대처하는 데 반해, 가정 내에서는 분노나 항의를 분명하게 표출하는 일이 많다. 그리고 한국인은 그와 반대의 패턴이 많다고 한다 ..  (48∼49, 79쪽)


  나는 내 길을 걷습니다. 나는 딴 사람 길을 걷지 않습니다. 나는 내 길을 사랑합니다. 나는 딴 사람 길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 둘레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아끼며 사랑하는 길을 바라보며 이 길이 참 좋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사랑하는 내 길을 마음껏 누리면서, 내 둘레 이웃들이 좋은 느낌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아름다우리라 느낍니다.


  서로 같은 사람이고 서로 같은 목숨입니다. 사람이라는 자리에서 서로 같고, 목숨이라는 넋에서 서로 같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고 서로 다른 목숨입니다. 태어나서 일구는 삶이 다르고, 느끼거나 바라보는 삶이 다릅니다. 가장 잘할 수 있거나 가장 좋아할 만한 대목이 서로 다릅니다. 가장 빛내거나 가장 슬기로울 대목이 서로 다릅니다.


  풀은 모두 풀이지만, 미나리와 쑥은 서로 다른 풀입니다. 쑥은 모두 쑥이지만, 돋는 자리에 따라 서로 다른 쑥입니다. 감나무 한 그루에서 맺는 감은 모두 같은 감알이지만, 감나무 한 그루에서 딴 감알을 나란히 놓으면 모두 달리 생기고 모두 조금씩 다른 맛이 납니다.


  똑같이 생긴 구름은 한 번도 없고, 똑같이 태어나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같은 ‘한 갈래 사람’이며 ‘한 갈래 목숨’이지만, 저마다 다른 빛을 뽐내며 저마다 다른 숨을 살찌웁니다.


.. 한국인 친구 집에 놀러갔다 늦게까지 이야기에 빠지거나 하여 불가피하게 하룻밤 묵어야 할 경우가 가끔 있다. 이런 날에는 정성이 듬뿍 담긴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즐거운 시간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그 어떤 것보다 따뜻한 대접이라고 생각한다 … 한국이 가진 다양한 식문화의 일단은 원기 왕성한 아저씨,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이런 노점(포장마차)이 짊어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  (61, 134쪽)


  다르면서 좋고 같으면서 좋습니다. 다르면서 아름답고 같으면서 아름답습니다.


  다만, 제도권 틀이나 울타리를 앞세워 끼워맞출 때에는 하나도 안 좋고 하나도 안 아름답습니다. ‘유행’이란 바보짓입니다. ‘자격증’이란 덧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한쪽 길로 쏠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길로 저마다 다른 아름다운 빛을 뽐내며 어깨동무를 할 뿐입니다. 유행을 만들거나 얘기하거나 보여주거나 휘둘리도록 하는 일은 모두 ‘어두운 나쁜 무리’가 벌이는 끔찍한 짓입니다. 유행에 앞서거나 유행에 뒤처진다고 말하는 일은 몽땅 ‘어두운 나쁜 무리’가 우리들을 바보스레 내몰면서 멍청한 사람이 되도록 깎아내리는 짓입니다. 자격증도 이와 같아요. 어떤 일을 할 때에 왜 자격증이 있어야 할까요. 교사가 되려면 교사 자격증이 있어야 할까요? 아니에요. 교사가 되려면 참말 교사다운 삶을 꾸려야 합니다. 밥을 잘 짓자면 요리사 자격증을 따야 하나요? 아니에요. 밥짓기를 사랑 담아 할 수 있어야 밥꾼(요리사)이에요.


  통·번역 자격증이라든지, 중장비 자격증이라든지, 운전 자격증이라든지, 무술 자격증이란 얼마나 덧없을까요. 대통령이나 아기 어버이가 되는 일도 자격증이 있어야 할까요. 아니에요. 우리가 하는 어느 일이든, 사랑이 밑받침되어야 비로소 할 수 있어요. 사랑과 믿음과 꿈, 이 세 가지를 고루 섞어 슬기와 땀과 웃음, 이 세 가지로 신나게 펼칠 때에 비로소 우리가 하는 일이 돼요.


  좋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착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고운 마음이어야 합니다. 곧,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갈 때에 비로소 교사가 될 만하고, 중장비나 자동차를 다룰 만하며,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될 만할 뿐더러, 의사이든 변호사이든 작가이든 시인이든 농사꾼이든 노동자이든 될 만합니다.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믿음직하며 가장 좋은 넋으로 살아가야 비로소 ‘한 사람’입니다.


.. 같은 동아시아에 있는 한국에서는 자전거가 그다지 일상적인 교통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지 않은 게 신기하다 … 한국에서는 자전거를 타느니 다소 무리를 하거나 대출을 받아 차를 사는 게 낫다고 여겨진다 … 내 눈에는 도무지 우스운 게 없는데 무엇이 우스운지 궁금해 했더니 여학생 중 한 명이 “교수님, 일본에서는 치마를 입고도 자전거를 타나요? 속옷이 보이지 않아요?”라며 창피한 듯 말했다. “괜찮아요. 나도 일본에서는 근처에 장을 보러 갈 때 치마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데요.” 내 대답에 여학생들 모두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듯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  (169, 171쪽)


  사이토 아케미 님은 강원도 춘천에 있는 한림대학교에서 일본말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다고 합니다. 나이가 제법 많으니 언제까지 대학교수로 일하실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한국에서 한국사람한테 일본말 가르치는 일을 하며 겪은 이야기를 담아 《다른 듯 같은 듯》(소화,2006)이라 하는 책을 내놓은 적 있습니다. 이 책은 일본에서 먼저 내놓고 한국에는 나중에 내놓았다는데, 이 책을 처음 쓰신 지 어느덧 열 해가 훌쩍 지난 만큼, 그 뒤 겪거나 느낀 다른 이야기를 새로 묶을 만한데, 아직 다른 책은 안 내놓으신 듯합니다. 여러모로 바쁘기에 이 같은 책을 새롭게 내놓을 겨를이 없을는지 모르는데, 따스하게 마음을 다스리며 마주한 두 나라 사람들 이야기를 꾸준히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야기책 《다른 듯 같은 듯》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견주는 ‘비교 문화 체험’이 아닌, 두 나라를 마음 깊이 아끼며 사랑하는 고운 꿈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는데, 사랑 가운데에서도 따순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4345.6.9.흙.ㅎㄲㅅㄱ)

 


― 다른 듯 같은 듯 (사이토 아케미 글,소화 펴냄,2006.7.15./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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