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마지막 축제 - 2013년 문광부 우수교양도서
용서해 지음 / 샨티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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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25

 


삶은 날마다 잔치
― 삶의 마지막 축제
 용서해 글
 샨티 펴냄,2012.12.24./14000원

 


  삶은 날마다 잔치입니다. 새 하루를 웃으며 즐겁게 맞이하면 웃음잔치이고, 새 하루를 울면서 슬프게 맞이하면 눈물잔치입니다.


  삶은 언제나 잔치입니다. 언제나 노래를 부르는 삶이면 노래잔치요, 언제나 투정만 부리면 투정잔치입니다. 언제나 소곤소곤 속닥속닥 도란도란 이야기를 즐기면 이야기잔치일 테고, 언제나 꿍한 채 말다툼을 일삼는다면 말다툼잔치예요.


  내 삶이 웃음잔치가 되게 하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내 삶이 눈물잔치가 되게 하는 사람도 바로 나입니다. 남들이 내 삶을 웃음잔치로 이끌지 않습니다. 남들이 내 삶을 눈물잔치로 내몰지 않습니다. 스스로 가슴에 품는 넋에 따라 하루가 달라집니다. 스스로 마음으로 빚는 꿈에 따라 하루가 거듭납니다.


.. 나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꽉 짜인 일정에 맞추어 마치 기계를 다루듯 악기를 연주했고 공연을 하러 다녔으며, 집에 돌아오면 또 주어진 역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호스피스 센터에 드나드는 세월이 제법 쌓여 가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만 봐도 그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 아닌지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었다. 결국 죽음 이후보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하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18, 43쪽)


  용서해 님이 빚은 이야기책 《삶의 마지막 축제》(샨티,2012)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용서해 님이든 다른 분이든, 오늘 하루를 누릴 사람들입니다. 모레를 누리거나 글피를 누릴 사람이 아니에요. 바로 오늘을 누릴 사람입니다.


  오늘 뜨는 해를 바라봅니다. 오늘 지는 해를 바라봅니다. 오늘 부는 바람을 쐽니다. 오늘 찾아드는 추위를 느끼고, 오늘 풀리는 날씨를 느껴요. 오늘 피어나는 꽃을 마주합니다. 오늘 돋는 봄나물을 뜯어서 먹습니다.


  어제 웃었으니 오늘 안 웃어도 되지 않습니다. 엊저녁에 밥을 먹었으니 아침에 밥을 굶어도 되지 않습니다. 그제에 노래를 불렀으니 오늘은 노래 없이 지내도 되지 않습니다. 그끄제에 햇살 한 줌 쬐었으니 오늘 햇살 안 쬐어도 되지 않아요.


  하고 싶은 놀이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먹고 싶은 밥을 먹고, 가고 싶은 곳을 가며, 나누고 싶은 사랑을 나눕니다.


  벌써 제법 된 일인데, 도시에서는 스모그가 생깁니다. 여느 먼지가 아닌 먼지덩어리요, 푸른 바람이나 맑은 바람이 아닌 매캐한 바람이나 뿌연 바람입니다. 흙땅 없이 시멘트땅에 아스팔트땅이고, 나무 없이 아파트에 건물인 도시입니다. 들과 내와 바다 아닌 자동차와 가게와 전철과 갖가지 물질문명이 춤추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더없이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깃들어 회사를 다니거나 공무원이 되거나 장사를 합니다. 맑은 바람보다는 돈을 바라고 맙니다. 푸른 바람보다는 대학교 졸업장을 바라고 맙니다. 싱그러운 햇살보다는 공무원 이름표를 바라고 맙니다. 따순 햇살보다는 자가용을 바라고 말아요. 어떻게 살아갈 때에 즐거운 내 하루가 될까 헤아릴 겨를 없이, 도시는 너무 바쁘고 너무 빠르며 너무 어지럽습니다.


.. 몸과 함께 사라질 헛된 명성이나 부귀, 권력 같은 것에 마음을 두기보다는 이 몸을 가지고 살면서 내 영혼이 더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경험하고 깨닫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고나 할까 …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라는 말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쩌면 이리도 쉽게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고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  (51, 232쪽)


  옆지기가 그림책을 읽어 줍니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그림책 읽어 주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도 곁에서 몸을 쉬면서 그림책 읽는 소리를 듣습니다. 즐겁습니다. 졸린 작은아이를 품에 안고 다독다독 재우면서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자장노래 열 가락쯤 뽑으니 작은아이는 새근새근 잠듭니다. 잠자리에 살며시 눕히고 자장노래 두 가락 더 부릅니다. 그동안 더 놀던 큰아이는 조금 더 논 다음 잠자리에 눕습니다. 잠자리에 누운 큰아이 이마를 쓸면서 자장노래를 새로 부릅니다. 자장노래 다섯 가락 뽑을 무렵 큰아이도 스르르 잠듭니다. 그런데, 큰아이가 잠들기 앞서 내가 먼저 곯아떨어질듯합니다. 노래를 부르다가 똑 끊어집니다. 조금 뒤 더 이어서 부르다가 그만둡니다. 큰아이도 잠들었겠거니 생각하며 나도 스르르 꿈나라로 접어듭니다.


  깊은 밤, 작은아이가 끙끙거립니다. 왜 그런가 하고 잠에서 깨어 살피니, 흥건하게 쉬를 누었습니다. 다른 때라면 쉬 마렵다고 꽁꽁거리며 일어났을 텐데, 엊저녁에는 하도 늦게까지 노느라 깊이 잠들며 그만 바지에 쉬를 누었군요. 기저귀며 바지며 모두 갈아입히고, 잠자리 바닥에 새 기저귀 한 장 펼칩니다. 기저귀 펼친 자리에는 내가 눕고 작은아이는 내가 눕던 자리로 옮깁니다.


  다시 잠들었다 싶은 깊은 밤, 이제 큰아이가 끙끙거립니다. 쉬 하러 같이 가자며 부릅니다. 아이야, 집에서 무엇이 무섭다고 그러니. 혼자 가도 될 텐데. 여섯 살 큰아이더러 일어나라 하고 대청마루로 함께 나옵니다. 큰아이는 오줌그릇에 쉬를 합니다. 쉬를 다 눈 아이를 눕힙니다. 오줌그릇을 들고 마당으로 내려섭니다. 마당 귀퉁이 밭자락에 아이 오줌을 뿌리고 나도 쉬를 눕니다.


  밤하늘 올려다봅니다. 저녁에 잠들 무렵에는 구름 없이 별이 쏟아지더니, 어느새 구름이 제법 끼고 달빛도 어슴프레합니다. 바람이 살살 불며 후박나무 잎사귀를 건드립니다. 겨울바람입니다. 쏴르르 쏴르르, 쏴아 쏴아, 낮이든 밤이든 바람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보면, 바닷가에서 물결치는 소리하고 닮습니다. 맑은 물결이 모래밭 간질이는 소리랑 맑은 바람이 나뭇잎 간질이는 소리는 그윽합니다. 시냇물 구르는 소리랑 풀벌레 노래하는 소리는 고즈넉합니다.


  아이들은 숲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을 때에 얼굴이 환합니다. 아이들은 숲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며 새근새근 잘 잡니다. 어른도 똑같을 테지요. 어른도 자동차 소리 시끄러운 도시에서보다 숲바람 숲노래 그윽한 시골에서 새근새근 잠들기 좋겠지요. 아이뿐 아니라 어른 누구나 기계 소리 가득하고 전깃불 훤한 도시에서보다 멧새와 풀벌레와 별빛과 달빛이 어우러지는 시골에서 코코 잠들며 쉬기 좋겠지요.


.. 숲으로 들어와 살면서 나의 감각들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주변의 나무나 돌, 작은 동물이나 벌레들은 물론 소리, 기온이나 습기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훨씬 또렷이 느끼고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보고, 느끼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져 보는 행위들 하나하나에서 전에는 느끼지 못하던 감사함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 나는 자연 속에서 보내면서 풀잎 하나 나뭇잎 하나도 의미 없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건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  (148, 235쪽)


  삶은 날마다 잔치입니다. 그러면, 날마다 잔치인 삶을 어떻게 누리면서 나눌 때에 한껏 아름다울 만할까요. 삶은 언제나 잔치입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잔치인 삶을 누구와 어디에서 누리면서 나눌 때에 한결 빛날 만할까요.


  어제 낮, 고흥읍 장날에 맞추어 읍내에 먹을거리 장만하러 마실을 갔습니다. 게와 오징어와 조개와 튀김닭 들을 장만합니다. 감 여러 꾸러미를 장만해서 장모님 댁하고 형님 집에 부칩니다. 큰아이를 데리고 읍내를 걷는데, 조그마한 고흥읍이지만 자동차 소리 꽤 시끄럽고, 배기가스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아저씨들은 길을 걷는 아이가 있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태웁니다. 저잣거리 길바닥에 쪼그려앉아 장사하는 할머니한테서 이것저것 사는데, 이 옆으로 자동차가 꾸준히 지나갑니다. 할머니 앞에 쪼그려앉아 물건을 사며 자동차 배기가스를 흠씬 들이마십니다. 저잣거리 할머니는 이 자리에서 자동차 배기가스를 얼마나 많이 마시는가 하고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자가용 몰며 좁다란 저잣거리 골목을 굳이 지나가려 하는 이들은 이런 대목을 생각하지 못하겠지요. 왜 저잣거리에까지 자동차를 밀고 지나가려 할까요. 왜 조금이나마 걸을 생각을 못할까요. 왜 내 이웃을 살피지 못할까요.


  동짓날 지난 뒤로 낮해가 차츰 길어집니다. 햇살 좋으면 이불을 빨아 널 만합니다. 어제 낮에는 새로 돋은 광대나물 살짝 뜯어 맛을 보았습니다. 곧 피어날 광대나물꽃을 기다릴까 하다가, 줄기와 잎 똑똑 끊어서 먹으면 다시 새 줄기와 잎 돋겠거니 생각하며 먹습니다.


  천천히 동이 틉니다. 아침이 밝으면 아이들이랑 밭자락과 이웃 논둑을 슬슬 돌면서 봄풀 몇 가지 뜯을까 싶습니다. 겨울 딛고 새봄 부르는 어여쁘고 작은 풀포기에 담긴 햇살을 온식구 다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4346.2.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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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일요일들
은희경 지음 / 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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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23

 


생각을 읽는 말과 책
― 생각의 일요일들
 은희경 글
 달 펴냄,2011.7.20./12000원

 


  내가 쓰는 말은 내가 품은 생각입니다. 내가 품은 생각은 내가 누리는 삶입니다. 스스로 누리는 삶에 따라 생각이 자라고, 생각이 자라는 만큼 말이 태어납니다. 국어사전 한 질을 통째로 읽거나 외운대서 아름다운 말을 쏟아낼 수 없어요. 이오덕 님이 쓴 《우리 글 바로쓰기》 같은 책을 읽는대서 우리 말글을 알맞게 가다듬거나 바르게 쓰지 못해요. 먼저 생각을 가다듬어야 말을 가다듬을 수 있고, 생각을 가다듬자면 삶을 가다듬어야 해요.


  삶이 바로선 사람은 생각이 바로섭니다. 생각이 바로설 적에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삶이 바로서지 않으면 생각이 바로서지 않습니다. 생각이 바로서지 않는데 말이 바로설 수 없어요. 삶은 엉터리이면서 말만 번드레한 사람은 생각 또한 엉터리요 번드레할 뿐입니다. 입에 발린 말로 껍데기만 내세우는 꼴입니다.


  아마, 오늘날 같은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지 모릅니다. 이른바 ‘감정노동’이라는 말까지 있는 만큼, 마음하고는 다른 말을 내뱉고, 마음하고는 동떨어진 생각을 품으며, 마음에 와닿지 않는 삶을 보내기도 해요. 아이들 가르치느라 도시에서 살아야 하고, 아이들 학원 보내느라 힘들게 돈을 벌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아이들 가르치는 삶이 무엇인지 슬기롭게 깨닫지 못하니, 스스로 굴레에 갇혀요. 가르침이 무엇인지 모르고, 스스로 삶으로 누리지 못하니까, 쳇바퀴질에서 맴돕니다.


  앞으로 오백 해나 천 해쯤 지나면, 우리 뒷사람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개화기를 지나고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해방과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신분과 계급이 거의 사라졌다고 일컫습니다. 그러나, 종이쪽에 적은 신분이나 계급만 안 보일 뿐, 우리 사회는 사람들을 숱한 새 신분과 새 계급으로 나눠요. 먼저, 학교 졸업장이라는 신분과 계급이 있어요. 대학졸업장 없이는 공무원시험이든 여느 회사 취직시험이든 치를 수 없어요. 신문사도 출판사도 잡지사도 방송사도 대학졸업장을 반드시 갖춰야 해요. 곧, 대학졸업장은 새로운 신분증입니다. 은행계좌 숫자에 따라 삶자리가 갈리면서, 돈 크기에 맞추어 계급 또한 갈립니다. 동네와 마을이 계급으로 갈리고, 일자리에서도 계급으로 갈립니다. 한국 사회는 밥그릇이라 하는 나이에 따라 새삼스러운 신분과 계급이 있습니다. ‘년차’라고 하는 회사 밥그릇으로도 신분과 계급을 새삼스레 나눕니다.


  이 모든 신분이나 계급은 도시에만 있어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신분이나 계급에 갇혀요. 돈을 벌자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핑계입니다. 아이들 가르친다는 말도 핑계입니다. 어쩌면, 수렁이나 덫일는지 모르지요.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스스로 신분이나 계급에 갇히도록 하는 수렁이나 덫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 오백 해쯤 뒤를 헤아려 봅니다. 2500년을 살아갈 뒷사람은 2000년대 사회를 어떻게 읽고 말하려나요. 봉건사회 다음으로 찾아온 2000년대 오늘날을 2500년대 사람들은 어떻게 읽고 말하려나요.


.. 소설을 쓰고 있을 때는 온힘을 다해 나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 …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에게도 좋아하는 작가들이 있어요. 동료나 후배이긴 해도 어쩔 수 없이 약간은 팬의 마음으로 대하게 되죠. 모임 같은 데에서 옆자리에 앉게 되면 기분이 좋구요. 그쪽에서 무슨 말을 하든 재미있어 할 준비를 갖추고 귀를 기울여요 … 봄날이었을까, 나는 오렌지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 행사가 끝난 다음날 선생님께서 아침밥을 먹자고 부르셨다. 박완서 선생님과 오정희 선생님이 와 계셨고, 햇살이 비쳐드는 선생님 댁의 아침밥상에서 세 분의 대선배가 나누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랬다. 정말 이것이 현실일까. 그렇구나. 꿈이 아니야. 내가 작가가 된 거야, 아아! ..  (6, 47, 199쪽)


  은희경 님이 쓴 《생각의 일요일들》(달,2011)이라는 산문책을 읽습니다. 생각이 있는 일요일인지, 생각을 하는 일요일인지, 생각이 쉬는 일요일인지, 생각이 모이는 일요일인지, 아무튼 생각하고 일요일이 만납니다. 책 하나에 깃든 글 한 줄 읽으면서, 소설쓰는 은희경 님 삶과 넋과 말을 만납니다.


  소설쓰는 은희경 님은 어떻게 소설쟁이 길을 걸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아마, 꿈을 꾸었겠지요. 그리고, 글을 썼겠지요. 그리고, 다시 꿈을 꾸었겠지요. 그러고서, 또 글을 썼겠지요.


  꿈을 꾸고(생각) 글을 씁니다(삶). 다시 꿈을 꾸고(생각) 글을 씁니다(삶). 거듭거듭 꿈을 꾸고(생각) 글을 씁니다(삶). 이리하여 소설(말)이 태어납니다. 소설(말)이 태어나면서 꿈(생각)이 천천히 이루어지고, 꿈이 천천히 이루어지면서 글(삶)을 쓰는 하루가 새롭게 빛납니다. 삶을 누리려고 생각을 밝히고, 생각을 밝히면서 말이 샘솟아요. 삶을 일구면서 생각이 자라고, 생각이 자라면서 말이 나타납니다.


.. 하지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 주고 싶어요 … 한국어는 소수의 언어이다. 한국 작가는 제한된 독자밖에는 가질 수 없다, 고 생각해 왔다. 헝가리어를 쓰는 사람은 더 적다. 그런데 자기 언어에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죽은 지 400년 뒤에 유명해진 국민 작가가 있는데, 내가 놀란 것은 400년 전에 씌어진 글이 지금도 아무 곤란 없이 잘 읽힌다는 점이다 ..  (137, 158쪽)


  사백 해 앞서 어떤 헝가리 글쟁이가 쓴 글을 오늘날 헝가리 사람들이 ‘즐겁게’ 읽는다고 합니다. 헝가리는 참 아름다운 나라로군요. 사람들도 삶터도 말도 아름답기에, 사백 해 앞서이건 사천 해 앞서이건, 또 사백 해 뒤이건 사천 해 뒤이건, 헝가리는 아름다움을 곱게 이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면, 오늘날 한국사람은 어떠할까요. 2000년대 한국사람이 쓴 글을 1600년대 사람이 ‘즐겁게’ 읽을 만할까요. 2000년대 한국사람이 오늘 쓰는 글을 1600년대 사람이 ‘즐겁게’ 읽을 만하다면, 앞으로 2400년대 한국사람도 2000년대 우리들 글을 ‘즐겁게’ 읽을 만하리라 느껴요.


  뿌리가 없이 쓰는 글이라면, 참말 뿌리가 없습니다. 잎사귀를 틔우지 않는 글이라면, 참말 잎사귀가 트지 않습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만한 글을 쓰면, 참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요.


  글이란 내 생각입니다. 글이란 내 삶입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푸성귀 돌보는 손길은 내 삶입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며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손길은 내 삶입니다.


  내 삶은 어디 먼 데에 있지 않아요. 내 삶은 바로 내 곁에 있어요. 삶을 읽을 때에 생각을 읽고, 생각을 읽기에 글을 읽습니다. 이렇게 하기에 예쁘거나 아름답지 않아요. 저렇게 하기에 밉거나 못나지 않아요. 즐거움을 깨닫고 즐거움이라는 씨앗을 삶자리에 뿌릴 때에 즐거움은 웃음꽃으로 피어나요.


.. 대중은 쉽고 재미있는 것을 애호하는 한편, 아예 어려운 것이라야 존경심을 품는 것 같다 … 하늘과 구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역시 산 … 바람이 섞인 빗소리가 너무 좋아 잠들기 아깝다 ..  (217, 222, 224쪽)


  겨울비 하루 내내 들판과 숲을 적신 고흥 시골집에서 은희경 님 산문책을 읽습니다. 빗소리는 참 즐겁습니다. 바람소리는 참 싱그럽습니다. 비님 지나가신 하늘은 티없이 맑습니다. 깜깜한 밤을 빛내는 수많은 별빛을 낮에도 가만히 그려 봅니다. 햇빛이 워낙 밝게 드리우니 별빛을 못 느끼는 한낮일 텐데, 어쩌면, 별빛이 어우러지며 햇빛이 한껏 눈부시게 온 들판과 숲을 포근히 감쌀는지 몰라요. 즐거운 넋으로 쓴 글이 즐거운 웃음이라는 씨앗을 뿌립니다. 4346.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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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심다 - 용기와 신념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의 8가지 이야기
바바 치나츠 지음, 이상술 옮김 / 알마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평화와 민주주의가 없는 나라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6] 바바 치나츠, 《평화를 심다》(알마,2009)

 


- 책이름 : 평화를 심다
- 글 : 바바 치나츠
- 옮긴이 : 이상술
- 펴낸곳 : 알마 (2009.11.9.)
- 책값 : 9500원

 


  고흥군청 민원실에 들러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국가보안법 바로알기 10문 10답》이라 적힌 노란 빛깔 도톰한 책자를 봅니다. 어디에서 누가 만들었는지 간기가 없는 알쏭달쏭한 유인물이라 할 텐데, 군청 민원실 책꽂이에 버젓이 놓입니다. 국가정보원에서 만들었는지, 군청에서 만들었는지, 청와대에서 만들었는지, 또는 어느 정당에서 만들었는지 아리송합니다. 이 책자 곁에 나란히 놓인 한 장짜리 ‘귀농·귀촌’ 안내 전단지조차 전라남도 도청에서 만들었다는 간기를 또렷이 밝히는데, 도톰한 《국가보안법 바로알기 10문 10답》은 어디에도 간기를 안 밝혀요.


  2012년 가을, 고흥군의회에서 ‘고흥군 화력발전소 문제’를 마무리지었습니다. 고흥군에 화력발전소 같은 위험·위해시설을 들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한창 고흥군이 화력발전소를 끌어들이려고 애쓸 적에 조그마한 면사무소뿐 아니라 읍내 버스역에조차 ‘화력발전소를 끌어들이면 고흥군에 얼마나 이바지를 하느냐’ 하는 이야기만 잔뜩 적힌 전단지가 수북히 있었어요. 이 전단지에도 간기가 없어 누가 왜 어떻게 만들어 이렇게 수북히 쌓았는지 아리송했습니다. 그냥저냥 군청에고 면사무소에고 읍내 버스역에까지, 이 전단지를 잔뜩 쌓아 사람들더러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옳고 그름이나 맞고 틀림을 따질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에서 만든 책자와 전단지가 버젓이 놓인다면, 이 곁에는 ‘정체를 알 수 있는’ 곳에서 만든 ‘다른 목소리’가 함께 놓여야 마땅하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말밥거리가 되기에 누군가 ‘스스로 제 모습(정체)을 숨긴’ 채 어떤 책자나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겠지요.


.. 2주일 동안의 취재를 마치고 딜리 공항을 출발할 때 내 뒷머리를 잡아당기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일본인인 나는 일이 끝나면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동티모르 사람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탄압에 시달리면서 살아가야 한다. 생명의 소중함은 어디나 다르지 않을 텐데도 ..  (6쪽)


  군청 민원실에 있던 《국가보안법 바로알기 10문 10답》 1부를 챙겨 집으로 가져옵니다. 찬찬히 살핍니다. 대한민국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자면 국가보안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힘있게 외치는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책자를 덮고 생각합니다. 평화란 무엇일까요. 민주주의란 무엇일까요. 어느 때에 평화라고 말할까요. 어느 때에 민주주의라고 말할까요. 이 나라에 군대가 있어 평화를 누릴까요. 이 나라에서는 대통령을 표로 뽑아 민주주의를 누리는 셈일인가.


  고흥군에 핵발전소와 화력발전소를 끌어들이려 한 이들은 공무원과 개발업자입니다. 군청 공무원이든 중앙정부 공무원이든, ‘서울과 큰도시 전기가 모자라다’고 하니까 발전소를 지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정작 서울이나 큰도시에 발전소를 안 짓고, 고흥군처럼 맑고 정갈한 시골에 발전소를 지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서울과 큰도시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아’, 이런 도시에 발전소 같은 위험·위해시설을 지으면 ‘많은 사람들 안전이 걱정스럽’다 하거든요. 다음으로 개발업자는 고흥군 같은 시골에 발전소를 지어야 땅을 값싸게 사들여 돈을 더 벌 수 있다고 밝힙니다. 위험·위해시설을 짓기 때문에 ‘보상금’ 같은 돈을 준다 하는데, 보상금을 안기려 하는 시설이라 한다면 얼마나 위험하고 나쁘다는 소리일까요. 참으로 고흥군에 도움이 되며 멋스러운 시설이라면, ‘고흥군에서 돈을 주면서 끌어들일’ 노릇이거든요.


  핵발전소와 화력발전소를 둘러싼 실타래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이 나라는 하나도 평화롭지 않습니다. 이 나라 지자체는 조금도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군민한테 제대로 된 정보나 이야기 한 자락조차 들려주지 않고 위험·위해시설을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무엇이 위험하고 무엇이 나쁜가 하는 대목을 군청이나 중앙정부나 개발업자 스스로 밝히지 않습니다. 발전소란 어떤 곳이며, 전기를 한꺼번에 어마어마하게 만드느라 어떤 것을 어떻게 불태워 어떤 배기가스와 쓰레기와 열폐수가 나오고, 어떤 것(연료)을 실어나르느라 얼마나 많은 짐배와 짐차가 이곳을 드나들어야 하며, 얼마나 많은 송전탑을 어떤 도시까지 줄줄이 이어야 하는가를 조금도 밝히지 않았어요. 간추리자면, 정보이건 이야기이건 꽉 막힌 채 ‘발전소 지으면 고흥군에 이바지하니까 꼭 해야 한다’는 명령과 지시만 있었어요. 평화도 아니요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그저 전쟁이고 그예 독재입니다.


.. 중립적인 위치에서 원조 활동을 벌이던 NGO와 국제기관이 안전상의 문제로 차례차례 철수 또는 활동을 축소하는 사이, 그 여파로 피해를 입는 것은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에 처한 이라크 사람들이다 … “나는 무슨 말을 들어도 상관없지만 아이들을 지키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습니다.” 신부는 말한다. “가톨릭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아이들도 그런 나쁜 말을 듣거나 나쁜 모습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의 마음에 남을 상처가 가장 걱정이었습니다.” ..  (111, 185쪽)


  학교에서 교사는 학생한테 평화나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과서에는 평화와 민주주의가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과서는 늘 ‘대학 입시 문제’에 틀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여러 갈래 과목이 있다고 하지만, 중·고등학교 수업은 늘 ‘대학 입시 문제’를 하나라도 더 맞히도록 하는 쪽으로 흐릅니다. 시험공부를 시키는 교과서이지 삶배움으로 이끄는 교과서가 아니에요. 교과서에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다루기는 하지만, 시험문제를 잘 맞히도록 하는 지식을 다룰 뿐, 아이들이 사회에서 평화를 누리거나 민주주의를 빛내는 길을 밝히지 않아요. 평화가 어디에서 오고, 평화를 우리 스스로 어떻게 일구며, 평화는 서로 어떻게 어깨동무할 적에 태어나는가 하는 대목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교사부터 스스로 평화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교사는 평화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입시지도와 진학지도로 바쁘며, 온갖 서류를 꾸려야 하니 바쁩니다. 학생 또한 스스로 평화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대학입시와 상급학교 진학에 온 넋을 쏟아야 하느라 바쁩니다. 영어 낱말 하나를 더 외우느라 바쁩니다. 한국사람이면서 정작 ‘한국말 한 가지’ 옳고 바르게 쓰는 데에는 마음을 두지 못해요. 왜냐하면,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쓰기보다는 영어 낱말 하나를 더 외워야 대학입시와 중간·기말시험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니까요.


  학교는 평화롭지 않습니다. 교사도 학생도 스스로 느낍니다. 교사도 학생도, 또 학부모도 여느 사람들도 학교는 ‘입시전쟁터’라고 느낍니다. 대학입시를 치르는 싸움터가 학교라고 여깁니다. 학교로는 모자라 학원을 세워 아이들을 몰아넣습니다. 학원으로 모자라 방과후학교이니 체험학습이니 봉사활동이니 외부인사 초청 특강이니 하면서, 또 나라밖 영어유학이니 하면서 서로 들볶고 스스로 들볶입니다.


  평화롭지 않은 학교에는 민주주의가 없습니다. 오직 대학입시 한길만 바라볼 뿐이기에, 민주주의가 들어서지 못합니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 민주주의가 없습니다. 교사와 교사 사이에도, 학생과 학생 사이에도 민주주의가 없습니다.


  더 깊이 파고들면, 교사도 학생도 ‘국가보안법’이 무언지 모릅니다. 알 턱이 없고 알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가보안법 이야기는 대학입시에 안 나오거든요. 교과서에도 안 실리거든요.


.. 강권 정치를 펴던 밀로셰비치 정권은 독립을 외치는 알바니아계 주민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 세르비아 치안 부대 등에 의한 비인도적인 인종 청소를 저질렀다. 주민을 추방하고 학살하는 것도 모자라 알바니아인 여성에게 세르비아인 아기를 갖게 하려는 성폭행도 수없이 자행되었다. 문화·교육 면에서도 코소보의 ‘세르비아화’가 진행되어 공립학교에서는 알바니아인 교사가 대량 해고되고 세르비아식 교육이 강제되었으며 알바니아인은 학교에서 자신들의 언어를 쓰는 것조차 금지당했다 ..  (145쪽)


  교과서에는 ‘밥하기·빨래하기·아이돌보기’ 같은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대학입시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안 다룹니다. 교과서에는 ‘사랑하기·꿈꾸기·생각하기’ 같은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어린이는 푸름이가 되며 차츰 사랑에 눈을 뜨고, 사랑놀이에 마음을 기울이지만, 성교육 한두 시간 어설피 하고 지나갈 뿐, 참사랑을 밝히며 가르치고 배우며 누릴 겨를이 없어요. ‘성교육 지식’이 아니라 ‘삶을 누리는 사랑’을 보지도 듣지도 배우지도 익히지도 누리지도 살지도 못한 아이들은 밥그릇 나이로만 ‘어른’이 되어 모텔방을 드나들 뿐이에요. 서로를 아끼는 사랑을 깨닫지 않아요. 서로를 아끼는 사랑으로 빚는 아름다운 아기를 헤아리지 않아요. 서로를 아끼는 사랑으로 빚는 아름다운 아기를 어떻게 돌보고 가르쳐서 해맑은 넋으로 뛰놀며 자라도록 이끌 때에 즐거운가를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오늘날 푸름이나 젊은이들은 아이돌보기와 얽힌 지식조차 모릅니다. 아기를 어떻게 어디에서 낳는가조차 모르며, 밥을 어떻게 짓고, 밥은 어떻게 얻으며, 빨래는 어떻게 하고, 옷은 어떻게 짓거나 깁거나 손질하는가조차 몰라요. 아이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이들은 대학입시 시험문제만 알아요. 어른들도 아무것도 몰라요. 아이들을 대학입시에 밀어넣는 틀거리만 알 뿐, 아무것도 몰라요.


.. 나는 민간인 희생자들 간의 차이를 알 수 없습니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 간의 차이를 알 수 없습니다. 살인을 명령하는 사람들 간의 차이를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사람을 선과 악으로 나누지 못합니다. 나는 정치가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를 악마에게 팔아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잘못되고 치우친 정보를 전하는 언론도 믿을 수 없습니다 … 누군가의 욕망이 아닌, 내 인간성이 바라는 것만을 따를 것입니다 … 스스로 평온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습니다. 나라안이 평화롭지 않은 나라는 다른 나라와 평화롭게 지낼 수 없습니다 ..  (19∼21쪽)


  삶이 삶답지 못한 곳에는 평화가 싹트지 못합니다. 삶이 삶답지 못해 평화가 싹트지 못하는데, 평화가 자랄 일이란 없습니다.


  사랑이 사랑답지 못한 곳에는 민주주의가 싹트지 못합니다. 사랑이 사랑답지 못해 민주주의가 싹트지 못하는데, 민주주의가 자랄 일이란 없습니다.


  대통령을 뽑는 한 표 권리를 쓸 수 있기에 평화나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군수와 국회의원이나 기초의원을 내 한 표로 뽑을 수 있대서 평화나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삶을 삶답게 누릴 때에 평화입니다. 사랑을 사랑답게 나눌 때에 민주주의입니다. 삶을 누리지 못하면서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랑을 나누지 못하면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 평화를 만드는 것은 정치가나 국제기관의 수장 같은 커다란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만 하는 일이 아니다. 사회의 평화와 안전은 정치적인 움직임보다도 오히려 우리 보통 사람들이 보통의 생활 가운데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203쪽)


  일본사람 바바 치나츠 님이 쓴 《평화를 심다》(알마,2009)라 하는 인문책을 읽습니다. 일본사람 바바 치나츠 님은 ‘지구별 분쟁 지역’을 두루 돌아다닙니다. 왜 안타까운 싸움이 생기고, 왜 슬픈 피죽음이 일어나며, 왜 쓸쓸한 미움이 커지는가를 살핍니다.


  참말 왜 평화와 민주주의 아닌 싸움과 독재가 이리도 판칠까요. 지구별 어느 나라이든 전쟁무기가 그토록 많은데, 아니 지구별 어느 나라이든 군대가 그토록 크고 많은데, 왜 어느 나라에서도 평화는 찾아들지 못할까요. 지구별 어느 나라도 대통령이든 누구이든 한 표 권리로 뽑는다는데, 왜 민주주의는 싹트지 못할까요.


  평화는 어디에 있을까요.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나요. 평화를 부르는 사람은 어디에 있나요. 민주주의를 일구는 사람은 어디에 있나요. 평화란 무엇이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요. 자유와 평등과 통일과 자주란 무엇일까요.


  양복을 입어야 점잖은 차림새일까요. 자가용을 몰아야 느긋한 살림일까요. 아파트에서 살아야 아늑한 보금자리일까요. 대학교를 마쳐야 사람 구실을 할까요. 은행계좌에 돈이 넘쳐야 넉넉한 하루일까요. 아이들을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맡겨야 복지일까요.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밤하늘에 뭇별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겨울바람 스산하게 불며 후박나무 잎사귀를 건드립니다. 마을 들고양이가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쏘다닙니다. 마늘잎은 함박눈을 머금으며 한결 씩씩하고 푸른 빛깔을 뽐냅니다. 갈대와 억새와 부들은 짙누렇게 물듭니다. 이웃마을에서 닭이 울고, 먼 멧자락에서 멧새가 노래합니다. 4345.12.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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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선물 - 화가 김원숙의 이야기하는 붓
김원숙 지음 / 아트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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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그리는 그림
 [책읽기 삶읽기 121] 김원숙, 《그림 선물》(아트북스,2011)


 

  그림을 그리는 김원숙 님은 《그림 선물》(아트북스,2011)이라는 책에서 당신 그림은 당신 꿈을 그리는 일이라고 밝힙니다. 꿈이 있기에 꿈을 꾸고, 꿈을 꾸기에 꿈을 그린다고 할까요. 곧, 그림쟁이라 하든 그림쟁이가 아니라 하든, 그림을 그리는 이는 누구나 이녁 꿈을 그립니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든 어른이 그림을 그리든 누구라도 꿈을 그린다 할 만해요.


  돌이켜보면, 꿈이 아니라면 그릴 수 없습니다. 꿈을 꾸기에 그림을 그립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그림을 못 그립니다. 꿈이 없는 사람도 종이와 붓을 장만해서 무언가 슥슥삭삭하기는 할 텐데, 슥슥삭삭하는 일이 그림이 되지는 않아요. 한마디로 ‘슥삭질’이나 ‘슥슥삭삭’은 될 테지만, 이밖에 달리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림을 그리는 이한테는 ‘그림그리기 = 꿈그리기’이고, 글을 쓰는 이한테는 ‘글쓰기 = 꿈쓰기’입니다. 사진을 찍는 이라면 ‘사진찍기 = 꿈찍기’요, 노래를 부르는 이라면 ‘노래부르기 = 꿈부르기’예요.


  그래서 나는 아무 노래나 섣불리 부르지 못합니다. 내가 부르는 노래는 내 꿈을 부르는 셈이기에, 노래가락과 노래말을 찬찬히 살펴요. 노래가락이 달콤하거나 아름답다고 느끼더라도, 노래말이 어둡거나 슬프다면 내 삶이나 꿈 또한 어둡거나 슬프기를 바라는 셈이 되기에, 어둡거나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는 한편, 이런 노래를 불러야 한다면 노래말을 고쳐서 불러요.


.. 아무래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사랑인 것을 … 아, 정답이 없구나. 느낌대로 그리기만 하면 그게 정답인 거구나, 틀린 답이란 게 없구나 … 나는 꿈을 그린다. 내 그림은 모두가 다 꿈이다. 아니, 모든 예술가는 꿈을 그리고 쓰고 노래한다 ..  (20, 157, 167쪽)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마다 그리고픈 그림을 그릴 뿐이기에 잘 그리는 그림이나 못 그리는 그림은 없어요. 그림 역사에 이름을 남겼기에 잘 그린 그림이 되지 않습니다. 미술관에 걸리거나 박물관에서 건사하기에 잘 그린 그림이 될 수 없습니다. 비싸다 싶은 값으로 사고팔리니까 잘 그린 그림이 되지 않아요.


  어떤 그림이든 이 그림을 그린 사람 삶과 넋과 꿈이 담겨요. 그림을 읽는 사람은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어떤 삶을 누리며 어떤 넋을 나누었고 어떤 꿈을 이루는가를 하나하나 읽습니다. ‘유행’이나 ‘사조’나 ‘기법’을 읽을 사람은 없어요.


  다만, 비평이나 평론을 하는 이 가운데에는 ‘그림읽기’ 아닌 ‘유행읽기’나 ‘기법읽기’에 휘둘리는 분이 있어요. 유행이나 사조나 기법을 밝혀야 마치 그림읽기가 되는 듯 잘못 알기 때문인데, 대학교에서 이처럼 가르치니 어쩔 수 없어요. 그림을 그린 이가 어떤 삶을 누리면서 어떤 꿈을 꾸느냐를 읽어야 비로소 그림읽기인데, 엉뚱한 다리를 짚는달까요.


  신문읽기이든 문화읽기이든 늘 매한가지입니다. 정보나 줄거리를 읽으려고 신문이나 문화를 읽지 않아요. 신문에 깃든 삶을 읽거나 문화에 서린 넋을 읽으려고 신문이나 문화를 읽어요.


  누군가는 삶도 넋도 꿈도 없이 오직 재미로만 영화를 만들거나 글을 만들거나 그림을 만들기도 해요. 이렇게 만드는 영화나 글이나 그림은, 이러한 영화나 글이나 그림대로 뜻이 있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러한 뜻이란 무엇일까 궁금해요. 삶도 없고 넋도 없으며 꿈도 없는데, 재미만 있으면 무엇할까 궁금해요.


.. 내 속에 이런 쓰레기통이 들어 있었다니. 한심하기 그지없이 들리던 온갖 시어머니 상들은 내 속에 일던 바람들에 비하면 온화한 것이었다 … 세상살이를 왜곡 없이 수용하되 노예가 되지 않는 창의성, 현실의 앞뒤, 위아래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크고 깊은 눈, 또 삶을 사랑하고 더 아름답게, 즐겁게 살려는 용감한 노력들 … 그렇다고 지금 대단한 부자가 된 건 아니지만, 이전에 안타까워하던 만큼은 가지게 됐는데도, 기대한 만큼의 편안함은 오지 않았다. 내가 인생의 큰 행복을 돈에다 걸 만큼 어리석지는 않지만, 그저 불편하고 거추장스럽던 삶의 여건 몇 가지 정도는 나아질 거라 믿었었나 보다. 나 자신과 돈, 둘 다에게 큰 실망이다 ..  (71, 177, 235쪽)


  그림을 팔아 돈을 번대서 즐거울 수 없습니다. 돈벌기를 즐긴다면 그림을 팔아 돈을 벌 때에 즐거울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림을 즐겁게 그리고픈 이라면, 그림을 그려 돈을 벌든 안 벌든 대수롭지 않아요. 그림을 그려야 즐겁고, 그림을 누려야 즐거워요.


  아이들이 즐겁게 먹을 밥을 차려서 밥상에 올리며 즐겁습니다. 무언가 더 값진 밥을 차릴 때에 즐겁지 않아요. 배부르게 먹고, 고맙게 먹으며, 기쁘게 먹으면 넉넉해요. 어떤 맛집을 찾아갈 때에 즐겁지 않아요. 집에서 내가 손수 차려서 나누는 밥이면 넉넉해요.


  아이들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어도 되지만, 그림책 없이 들길을 걷거나 숲속에서 하늘바라기를 해도 즐거워요. 마당에서 별하늘을 누린다든지, 텃밭에서 풀을 함께 뜯어서 먹어도 즐겁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늘 풀을 뜯어먹으니, 아이들도 곧잘 어디에서나 스스로 풀을 뜯어서 입에 넣곤 합니다. 아이들 스스로 풀맛을 헤아립니다. 아이들 스스로 풀 한 포기에 감도는 햇볕과 바람을 헤아립니다.


  나는 어버이로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나는 어버이로서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까요. 아이들이 도시에서 이름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가도록 등을 밀어야 하나요. 아이들이 서울에 있는 이름난 대학교에 잘 붙도록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닦달해야 하나요.


.. 웅장한 유적지와 박물관 들엔 가는 곳마다 죽음이 가득했다 … 한 문제 차이로 떨어졌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이끼가 아름답게 끼어 있는 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찌 보면 둘 다 맞는 견해인데도 정답은 하나여야 하는 세상이 싫었다 … 화가인 나에게 많은 사람들은 “나는 그림에 대해 잘 모르지만……”으로 말문을 뗀다. 나는 건강한 관객들에게 그렇게 자신 없는 말을 하게 만든 도도한 현대 미술세계가 참 안타깝다 ..  (126, 161, 210쪽)


  나는 시골에서 꿈을 그립니다. 네 식구 시골마을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꿈을 그립니다. 낮에는 환한 햇살을 바라보며 꿈을 그립니다. 밤에는 새까만 하늘에 초롱초롱 빛나는 별을 그리며 꿈을 보듬습니다.


  재주 많은 사람도 나쁘지는 않다 할 테지만, 재주보다는 웃음이 환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솜씨 뛰어난 사람도 나쁘지 않다 할 테지만, 솜씨보다는 사랑이 맑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는 내 꿈을 내 글에 담습니다. 나는 내 꿈을 사진으로 옮깁니다. 나는 내 꿈을 온몸으로 살아냅니다. 나는 내 꿈에 따라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아이들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하루가 저뭅니다. 늦가을 바람이 선선합니다. (4345.11.15.나무.ㅎㄲㅅㄱ)


― 그림 선물 (김원숙 글·그림,아트북스 펴냄,2011.9.30./16000원)

 

(최종규 . 2012 - 책읽기 삶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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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어 - 물고기가 사는 곳에 사람이 삽니다
김수우 지음 / 심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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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마음으로 읽는 책
 [책읽기 삶읽기 117] 김수우·윤석정, 《百年魚》(심지,2009)

 


  부산 중구 동광동4가 5-2번지 2층에 〈백년어서원〉이라 하는 책쉼터가 있습니다. 인터넷에도 작은 방(http://cafe.daum.net/100fish)이 있어요. 서울 못지않게 커다란 도시인 부산에는 사람도 많고 집도 많고 자동차도 많습니다. 어디를 가도 북적거리고, 어디를 가도 밤하늘 하얀 별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큰길에 서면 자동차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골목에 서도 싱싱 달리는 자동차가 많아 아슬아슬합니다. 나뭇잎을 간질이는 바람결을 느끼면서 햇살을 누릴 만한 땅뙈기가 매우 모자라요. 풀잎을 춤추게 하는 바람무늬를 바라보면서 햇볕을 쬘 만한 터가 아주 작아요.


  책쉼터 〈백년어서원〉은 도시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마음을 쉬고 몸을 달래면서 스스로 삶을 북돋우도록 돕는 자그마한 둥지 구실을 하지 싶어요. 이곳을 지키는 김수우 시인은 윤석정 님이 나무에 새긴 ‘나무물고기’마다 한 가지씩 이야기를 달아 《百年魚》(심지,2009)라 하는 책을 내놓았어요. 이 책은 여느 책방에서는 구경할 수 없습니다. 인터넷책방에서도 품절이라고만 뜰 뿐, 장만하기 퍽 힘들어요. 그러나, 즐거이 다리품을 팔아 〈백년어서원〉에 찾아가면 이 책을 기쁘게 만나 읽을 수 있어요.


.. 하늘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배경입니다. 가장 아득하고 가장 가깝습니다. 누구에게나 높이이면서도 깊이이고 동시에 넓이로 열립니다 … 참 지혜는 삶은 공평하다는 것을 믿는 마음이 아닌지 … 진실한 사람에겐 어떤 형태의 삶이라도 제값을 지니고 반짝입니다 ..  (13, 23쪽)


  〈백년어서원〉에서는 따순 차를 마실 수 있고, 책꽂이에 가득한 여러 책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책이야 도서관에도 있고 새책방에도 있습니다. 요즈음은 곳곳에 북카페가 많이 생겨서, 북카페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어요. 그러나 〈백년어서원〉이 갖춘 책은 다른 북카페하고 사뭇 다릅니다. 제법 큰 출판사에서 차리는 북카페하고도 퍽 다릅니다. 하나하나 알뜰히 사서 읽으며 그러모은 책들이 있는 〈백년어서원〉이기에, 이 책들을 건사한 사람 눈길을 함께 읽을 수 있어요. 시를 쓰는 김수우 님이라서 시집을 꽤 널리 살필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김수우 님이라서 사진 담긴 책을 여러모로 쏠쏠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숨가쁜 도시에서 숨을 돌리도록 이끌고, 앞만 보느라 바쁜 도시에서 옆을 보도록 돕습니다.


  더없이 마땅한데, 밭에서 김을 맬 적에 앞만 보며 김을 맬 수 없어요. 앞 뒤 옆을 골고루 살피며 알뜰히 김을 매야 합니다. 한쪽만 바라보면서는 흙일을 하지 못해요. 이곳저곳 골고루 돌아보는 눈썰미와 손길이 되어야 흙을 만질 수 있어요.


  바다에서 고기를 낚는 이들도 이와 매한가지예요. 멧골에서 나무나 풀을 만지는 이들도 이와 같아요. 밤에 하늘을 올려다보셔요. 내 눈길 테두리에서만 별을 바라보지 않아요. 고개를 빙 돌리면서 온 하늘을 두루 살피며 별을 바라봐요. 한낮에 하늘을 올려다보셔요. 나는 내 눈으로 바라보이는 곳만 바라보지 않아요. 고개를 빙 돌리면서 온 하늘 구름을 보고, 저 먼 끝자락 파란빛까지 즐겁게 바라봐요.


.. 선행은 자연을 따르는 까닭에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음입니다. 그러나 선한 인연을 열매를 맺기 마련 … 주는 자는 늘 넉넉하고 제 것을 챙기는 자는 늘 모자라기 마련 .. (49, 57쪽)


  오늘날은 새책방도 헌책방도 인터넷에 목록 띄운 가게가 많아, 집이나 일터에서도 손쉽게 책을 살 수 있어요. 머잖아 도서관에서도 인터넷으로 ‘빌릴 책’을 신청해서 집에서 받도록 할는지 몰라요. 아니, 종이책을 몽땅 전자책으로 바꿔서 집에서 셈틀을 켜면 느긋하게 화면으로 책을 읽도록 할는지 몰라요.


  그런데 말예요, 사람들이 집이나 일터에서 셈틀을 켜며 ‘살피거나 찾는’ 눈길이랑 손길로 어떤 책을 살피거나 찾을 수 있을까요. 목록에 30만 권이나 50만 권이나 100만 권이 올랐다고 하는 인터넷책방에서 1만 권이나 10만 권쯤 목록을 죽 훑을 수 있나요. 다문 1000권이라도 훑고 나서 책을 사는가요.


  몸을 움직이고 다리품을 팔아 책방으로 나들이를 가면, 그야말로 수많은 책을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면서 살피거나 찾을 수 있어요. 목록만 뒤져서는 만날 수 없는 책을 골고루 만나면서 내 마음을 북돋아요. 목록으로 볼 때에는 알기 어렵던 책을 가만히 어루만지면서 줄거리를 훑을 수 있어요.


  값을 치러 책을 삽니다. 책방에 서서 넋이 사로잡히도록 읽은 책을 삽니다. 안 읽은 책을 살 수 없습니다. 책방에 나들이를 가서 ‘읽은’ 책을 사고, 읽은 책을 집으로 가는 길에 다시금 읽으며, 집에 닿아 새롭게 읽습니다.


  한 번 읽고 덮은 뒤 다시는 안 들출 책이라면 살 까닭이 없습니다. 두 번 세 번 열 번 백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라야 살 까닭이 있습니다. 두고두고 읽을 뿐 아니라 아이들한테 곱게 물려주고픈 마음이 드는 책이라야 살 만합니다. 나무를 베어 얻은 종이로 책을 짓는 까닭은 ‘더 많이 팔아치워 더 많이 돈을 벌자’는 뜻이 아니에요. 오래도록 알차게 건사해서 뒷사람한테 슬기롭게 물려주자는 뜻입니다.


.. 천천히 가면 얼마나 무수한 것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요 … 이름이 우리의 본질은 아니지만 이름을 통해 만나므로 내 이름도 당신 이름도 꽃잎보다 눈부십니다. 이름을 불러 관계하니, 이름은 곧 마음입니다 ..  (93, 171쪽)


  이야기책 《百年魚》를 읽습니다. 백 가지 나무물고기는 저마다 어떤 빛과 꿈과 사랑을 담았는가 곰곰이 생각합니다. 물고기 모양으로 다시 태어난 나무는 저마다 어떤 이야기를 품에 안았는가 생각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맑은 숨을 들이마시며 목숨을 잇는 나는 날마다 어떤 생각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는가 생각합니다.


  내 어버이는 나한테 어떤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요. 나는 나한테 어떤 이름을 스스로 붙여 주었나요. 나도 내 어버이처럼 어버이가 된 뒤,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이름을 붙여 주었나요. 앞으로 우리 아이들은 어떤 어버이가 되어 어떤 아이들한테 어떤 이름을 붙여 줄 만할까요.


.. 나는 손님이 아니라 주인인 것을 ..  (213쪽)


  누구나 하늘이요 누구나 땅입니다. 누구나 바다요 누구나 냇물입니다. 누구나 꽃이며 누구나 숲입니다.


  마음을 열면 스스로 하늘이 되고 숲이 됩니다. 마음을 펼치면 누구나 서로를 넉넉히 끌어안는 바다가 되고 냇물이 됩니다. 시원한 바람이 됩니다. 해맑은 잎사귀가 됩니다. 어여쁜 노래 들려주는 풀벌레와 멧새가 됩니다.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빌어요. 슬기로운 마음을 아리따운 생각으로 돌보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빌어요. 두 다리로 이 땅을 씩씩하게 밟을 수 있기를 빌어요. 두 손으로 이웃과 동무하고 살가이 어깨를 겯고 걸을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1.10.흙.ㅎㄲㅅㄱ)

 


― 百年魚 (김수우 글,윤석정 깎음,심지 펴냄,2009.3.31./110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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