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 돈 없이도 행복한 유기농 만화
권경희 지음, 임동순 그림 / 미디어일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도시 떠나 시골에서 지내는 꿈
 [만화책 즐겨읽기 188] 임동순·권경희,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미디어 일다,2011)

 


  우리 네 식구가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며 ‘무엇이 좋은가?’ 하고 누가 물을 적에는 ‘음, 생각해 보는 모두 다 좋아요.’ 하고 대꾸합니다. 왜 그런가 하고 말할 까닭 없이, 즐겁고 좋으며 사랑스럽기에 시골로 삶터를 옮겨서 지내거든요.


  그렇다고 도시에서 지낼 적에 ‘무엇이 나빴나?’ 하고 얘기하지는 않아요. 이 땅에는 좋고 나쁨은 따로 없으니까요. 받아들이기 나름이고 누리기 나름이니까요.


  다만, 나는 자동차 소리를 즐기지 않습니다. 전철이 하루 내내 오가며 내는 시끄러운 소리를 즐기지 않습니다. 길가를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손전화 수다 떠는 소리를 즐기지 않습니다. 장사꾼 지나다니는 소리를 즐기지 않습니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도시에서 살면서 무엇 하나 신나게 즐기지는 못했다고 느껴요. 이웃이 많고, 가게가 많으며, 물건 하나 사기 손쉽다 할 테지만, 마음을 차분하거나 느긋하거나 한갓지게 보듬으면서 하루를 빛내기는 어려웠구나 싶어요.


  터전이 마땅하지 않으니 마음을 차분하게 보듬지 못할 수 있어요. 터전이 마땅하지만 마음을 차분하게 못 보듬기도 해요. 터전이 알맞지 않아 마음을 느긋하게 다스리지 못할 수 있어요. 터전이 알맞은데에도 마음을 못 느긋하게 다스리곤 해요. 터전이 예쁘지 못한 나머지 마음이 한갓지지 못할 수 있어요. 터전은 예쁘나 마음은 좀처럼 못 한갓질 수 있어요.


  여러모로 살펴보면, 터전은 터전대로 가장 사랑스러운 곳으로 잡아서 지내야 하는데, 무엇보다 내 터전을 바라보는 내 눈길을 가꾸어야 하는구나 싶어요.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내 눈길을 가꾸지 못하면, 어디에서도 즐거운 하루로 맞아들이지 못하겠구나 싶어요.


- 그래, 오랫동안 버려졌던 밭이니 개간하는데 힘들 거라고 어느 정도 각오는 되어 있었다. 무수한 돌과 무성한 잡초가 앞을 막더라고, 이렇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두 여자였다. 게다가 서른도 훨씬 넘은 두 여자는 벌레 같은 걸 보고 꺄악 소리 지르고 도망치는 소녀도 당근 아니었다 … 우리가 빌린 밭 백 평의 상태가 바로 그러했다고나 할까?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그 밭은 누군가가 계속 쓰레기를 버리고 묻고 태웠던 바로 그런 땅! (14∼16쪽)
- 농촌의 제초제 사용이 일반화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렇지만 농업진흥청의 관리감독 하에 비료, 농약, 제초제 사용이 관행이 되어 버린 지금, 이제 농사를 시작한 우리가 그런 것을 사용하지 마시라고 오랫동안 농사지어 오신 분들을 설득할 수도 없는 형편. (91쪽)


  도시에서 살아갈 적에 우리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어떻게 어울리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어디어디 놀러간다든지 맛집을 찾아간다든지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인천에서 골목마실을 즐겼으니, 골목마실을 함께 해 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이것저것 해 보더라도 다닐 만한 데란 조용하거나 한갓지거나 풀이랑 나무랑 꽃이 있는 데예요. 골목마실을 하며 들여다보는 모습이란 꽃그릇이랑 골목나무랑 골목풀이에요. 골목나무에 깃드는 골목새를 바라보고, 골목꽃에 내려앉는 나비를 바라봐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무엇을 하는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음, 딱히 무엇을 하지는 않습니다. 마룻바닥에 앉아 바깥을 하염없이 내다 보기도 하고, 마당 평상에 앉아 하늘바라기를 하기도 합니다. 마을 들판을 걷거나, 이웃마을 돌기둥을 구경하러 다녀오기도 합니다. 차를 얻어타고 바닷가를 다녀온다든지 읍내에 있는 구백 살 가까운 느티나무 밑에서 다리쉼을 하기도 해요.


  더 좋은 무엇을 누린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스스로 바라는 무엇 하나를 누리는구나 싶어요. 더 나쁜 무엇하고는 등을 돌린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스스로 꿈꾸는 무엇 하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내 길을 걷는구나 싶어요.


  누군가는 도시에서 꿈을 찾겠지요. 누군가는 시골에서 사랑을 빚겠지요. 누군가는 도시에서 일거리를 얻겠지요. 누군가는 시골에서 아이들과 홀가분하게 뛰어놀겠지요.


  마음껏 자라나는 나무를 바라보다가 줄기를 살며시 쓰다듬습니다. 기운차게 솟는 풀포기를 바라보다가 한 닢 두 닢 뜯어서 입에 넣고 맛을 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켭니다. 바람에 나부끼며 바람노래를 부르는 들풀을 고개 까딱까딱 하면서 지켜봅니다.


  햇살을 가득 내 가슴으로 안습니다. 들노래를 듬뿍 내 가슴으로 얼싸안습니다. 들꽃 한 송이 따서 아이 귀에 꽂고, 아이가 딴 들꽃송이가 어여뻐 사진 한 장 찍습니다.


- “와, 너무 맛있다!” “직접 캐신 거라 더 맛있으실 거예요.” “밥 한 그릇 더!” ……를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다음날 결국 언니 한 분이 밤에 추위 때문에 잠을 못 이루어 탈이 나셨고. (44쪽)
- 아, 이게 이 동네 스타일인가 봐, 라고 적응해 갈 즈음, 우리 집을 향해 눈에서 레이저 빔을 쏘시던 할머니마저도 절친으로 돌변! “이거 보리콩인데 심어 봐! 그동안 자네들이 나한테 너무 잘해서 주는 겨!” (79쪽)


  작은아이가 바지에 쉬를 합니다. 바지를 갈아입힙니다. 또 바지를 버리는구나! 그래, 버리렴. 아버지가 신나게 빨아 주지. 복복 비벼 빨래합니다. 빨래는 후다닥 합니다. 물기를 쪼옥 짠 빨래를 마당에 널며 해님을 바라봅니다. 해님, 고맙습니다, 이 빨래도 보송보송 잘 말려 주셔요.


  밥을 합니다. 설거지를 합니다. 밥상을 차립니다. 두 시간 훌쩍 지납니다. 나는 밑반찬을 안 하고 끼니마다 반찬을 새로 하니, 밥하는 겨를을 꽤 많이 들입니다. 하루에 너덧 시간 넉넉히 밥차림에 품을 들입니다. 우리 시골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하루 대여섯 시간 남짓 밥차림에 품을 들여요. 머릿수가 많으니 그만큼 손이 가고, 남다른 밥 한두 가지 더 하자니 겨를도 많이 들어요.


  상다리가 휘어지지는 않으나 밥을 차려 다 함께 먹습니다. 차리기는 한참, 먹기는 후다닥, 이랄 만하지만 다 좋습니다. 먹자고 차린 밥이니까요. 풀내음 나는 먹을거리를 좋아할 수 있고, 풀내음 나는 먹을거리가 도시사람한테 안 익숙할 수 있지만, 우리 식구들 즐기는 풀내음 먹을거리를 기쁘게 밥상에 올립니다.


  바깥에서 사다 먹는 밥으로는 느낄 수 없는 맛과 멋과 웃음과 기쁨이 밥상에 오른다고 느낍니다. 바깥에서 밥을 사다 먹을 적에는 손님이랑 더 오래 얼굴 마주하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느끼지만, 아이들이 많이 어려 이리 뛰고 저리 소리지르며 노니, 어쩌면 바깥에서 밥을 사다 먹을 때에는 아이구야 머리가 지끈지끈 귀는 화끈화끈 골이 띵하네 싶기도 합니다.


  저녁이 되어 별바라기를 합니다. 깜깜한 하늘에 보름달 휘영청 밝습니다. 에이 참, 모처럼 손님이 왔는데, 초승달이나 그믐달이면 얼마나 좋을까. 아주 새까매서 온통 까만 하늘 가득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느끼도록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새벽에 아이들 쉬를 봐주러 일어나서는 새벽별을 올려다봅니다. 보름달 넘어간 새벽에는 별이 와르르 쏟아집니다. 어쩜, 이 고운 밤별을 또 나 혼자만 누리나? 그래도 뭐, 누릴 사람이 잘 누리면 되지요.


- 그렇다! 도시처럼 답답하게 막힌 게 없이 이렇듯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여 있으니, 우리도 이웃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50쪽)
- 두 번째로 자주 듣는 질문은 부모님의 과격한 표현을 빌자면, ‘도대체 시골 구석에서 어찌 벌어 먹고 살려는 거냐?’ 뭐 그렇게 얼렁뚱땅 웃으며 대답하지만 글쎄, 그냥 우리는 벌어 먹지 않고 땅을 일구어 기른 것을 먹고 싶을 뿐이랄까? (54쪽)


  임동순 님 그림과 권경희 님 글이 어우러진 만화책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미디어 일다,2011)를 읽습니다. 한 분은 도시에서 나고 자라며 일하다가 시골로 떠났고, 한 분은 시골에서 나고 자라다가 도시로 일하러 나왔는데 새삼스레 시골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 하더라도 초·중·고등학교는 모두 다니셨을 테니, 이렇게 학교를 다니며 시골살이를 얼마나 누렸을까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살아가는 고흥 시골마을을 돌아보면,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시골살이를 누린다고는 못 느껴요. 거의 다 시골 면내나 읍내에서 ‘도시 아이들과 똑같이’ 무언가 피시방이나 편의점이나 어떤 문화·편의시설에서 돈을 쓰고 하루를 보내고프다고 여길 뿐이지 싶어요. 시골에서 멧골을 오르거나 바다를 누비거나 들을 쏘다닌다고는 느끼지 못해요. 초등학교나 어린이집을 다니는 시골 아이도 시골에서 무언자 숲을 누린다고는 느끼지 못해요.


  그러니까,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를 일군 두 분 가운데 한 분도 ‘고향은 시골이지만 삶터를 이루는 넋은 도시’에 있었다고 할 만하지 않을까 싶어요.


-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큰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실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직접 들으면 작물은 클 수밖에 없다. 왜냐? 거기엔 다음과 같은 과정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밭고랑 사이를 걸어가다가 작물보다 크게 자란 풀을 보면 안 뽑고 지나갈 수가 없어!” (107쪽)
- “그래서 어떤 집을 원하나요?” “아, 네, 그러니까, 이 철없는 제 인간노예들이 원하는 집은 말이죠. 산밑에 아궁이 때고 텃밭 있고 조용하고, 기타 등등등등등등.” (138쪽)


  사랑은 서로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마음을 따사로이 어루만지면서 자랍니다. 시골 논밭 풀과 나무도 서로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마음을 너그러이 보듬을 때에 자랍니다. 아이와 어른 사이도 서로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마음을 즐겁게 북돋울 때에 자랍니다.


  꽥꽥 소리를 지른대서 아름다이 자라지 않습니다. 교과서에 적힌 지식대로 이끈대서 훌륭하게 자라지 않습니다. 힘으로 우악스레 내리누른대서 멋지게 자라지 않습니다.


  오직 따순 손길로 아름다이 자랍니다. 오로지 넉넉한 마음길로 훌륭하게 자랍니다. 그예 보드라운 꿈길로 멋지게 자랍니다. 바로 내 마음속 사랑을 곱다시 키우며 아끼려고 시골살이를 꿈꾸면서 즐깁니다. (4345.10.31.물.ㅎㄲㅅㄱ)

 


―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임동순 그림,권경희 글,미디어 일다 펴냄,2011.10.25./150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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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사람 병원 안 가기

 


  나는 도시에서 살 적에도 병원을 가지 않았다. 왜 안 갔느냐. 병원을 생각조차 안 하고 살았으니까. 나는 내 삶을 꾸릴 뿐이지, 이렇거나 저런대서 병원에 갈 일이란 없다고 받아들였다. 도시를 벗어나 외진 두멧자락 시골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병원을 가지 않는다. 왜 안 가느냐. 병원이란 내 삶자락 가까이 없기도 하고, 생각할 까닭이 없기도 하며, 하루하루 새롭게 맞아들이는 삶이 기쁘니까.


  병원을 드나드는 누군가를 떠올려 본다. 왜 병원을 드나들까. 병원을 드나들며 ‘아픔’이나 ‘슬픔’이나 ‘생채기’나 ‘멍’이 아물까. 병원을 드나들며 ‘무언가 되겠지’ 하는 생각뿐 아닐까.


  너무 모르는 사람들은 잘못 생각한다. 시골에는 병원이 없으니 ‘아플 때에 어떡하느냐’ 하고 걱정하는데, 시골에는 아플 일이 없고 아픈 사람이 없으니 병원이 있을 까닭이 없다. 숲과 멧자락과 냇물과 들이 있으니, 사람 아플 일이 없다. 먼 옛날 사람을 죽이던 돌림병이란 무엇인가. 모두 도시에서 비롯한 죽음이다. 모두 도시에서 권력을 거머쥔 이들이 삶자락을 거칠게 짓밟거나 끔찍하게 억누르면서 생겨난 죽음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정쟁을 벌이면서 ‘시골 숲사람 삶’을 마구 어지럽혔다. 무거운 세금과 피말리는 소작료를 잔뜩 얹으니, 숲사람이던 시골사람 누구나 시름시름 앓다가 쓰러질밖에 없었다. 병원이 없어서 쓰러진 사람은 없다. 모진 미움과 끔찍한 전쟁이 사람 스스로 사람 죽이는 꼴이었다.


  도시에 살던 사람이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간다든지,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그예 시골에서 살아간다든지, 시골에서 삶자리 마련해서 뿌리내리려는 사람은 ‘병원에 갈 마음’이 없다. 몸이 아프면 내 몸이 의사요 내 손이 약손이다. 몸이 아프도록 일할 까닭이 없다. 몸이 즐거울 만큼 일한다. 마음이 흐뭇하도록 삶을 일군다. 몸이 가볍고 마음이 곱다면, 어느 누구라도 아플 일이 없다. 몸이 가볍지 않고 마음이 곱지 않으니, 자꾸자꾸 몸이 처지거나 힘들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병원을 곁에 둘밖에 없다. 스스로 톱니바퀴 구실을 하느라 몸이 메마르고 지친다. 스스로 쳇바퀴 구르는 삶에 얽매이면서 마음이 허물어지거나 다친다. 도시사람 아픈 몸은 시골에서 여러 날 조용히 지내면 나을 수 있지만, 좀처럼 톱니바퀴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도시사람 아픈 마음은 시골에서 푹 쉬며 숲바람을 쐬고 들햇살을 쬐면 달랠 수 있는데, 참말 쳇바퀴 수렁에서 헤어나지 않는다.


  아픈 사람들아, 부디 병원 말고 시골로 오렴. 시골로 와서 몸도 마음도 홀가분하게 내려놓고 맑은 바람과 밝은 햇살을 마시렴. 싱그러운 물과 고운 밥을 맞아들이렴. 약 아닌 사랑을 먹고, 처방전 아닌 믿음을 가슴속에 새기렴. (4345.10.3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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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 눈길

 


  나는 내가 입을 옷을 입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어라 하건 아랑곳할 일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쳐다본대서 대수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먹을 밥을 먹지, 다른 사람이 바라본대서 내가 못 먹는 밥을 먹을 수 없고, 내가 즐기는 밥을 안 먹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쳐다본대서 내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옆지기를 내동댕이치거나 걷어찰 수 없어요. 다른 사람이 쳐다보니까 논밭에서 김매기를 안 해도 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부엌에서 밥을 짓고 밥상을 행주로 닦으며 밥그릇과 수저를 놓습니다.


  누가 쳐다보건 말건 바람을 마십니다. 누가 들여다보건 말건 햇살을 쬡니다. 누가 마주보건 말건 가만히 들새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누가 떠들건 말건 나는 나대로 가을녘 풀벌레 노랫소리 차참 이우는 결을 느낍니다. 겨울 앞둔 가을녘, 이제 풀벌레 노랫소리는 거의 잠들고 바람소리 가득한 사이사이 멧새 몇 마리 가늘게 밤노래를 불러 줍니다.


  다른 사람이 쳐다본대서 ‘내키지 않는 책’을 장만해서 읽을 까닭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많이 읽었대서 나도 ‘다른 사람이 많이 읽었다는 책’을 장만해서 읽을 까닭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했건 말건, 다른 사람이 깎아내렸건 말건, 나는 내가 읽을 책을 읽을 뿐입니다. 나는 내 길을 걷고, 내 삶을 사랑하며, 내 꿈을 돌보고, 내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나는 내 가슴속에서 환하게 영그는 빛줄기를 바라봅니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곱게 피어나는 꽃송이를 마주합니다. 나는 내 넋과 얼이 즐거이 노래하는 춤사위를 기쁘게 지켜봅니다. (4345.10.3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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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걸리 물맛 느끼는 책읽기

 


  나는 처음부터 막걸리 물맛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도시인 인천에서 살다가 시골인 충청북도 음성으로 깃들어 한 해를 살며 조금씩 물맛을 달리 느꼈고, 더 외진 시골인 전라남도 고흥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비로소 물맛을 느낍니다. 냇물과 수도물과 정수기물이 어떻게 다른가를 혀로도 알고 눈으로도 알며 마음과 몸으로도 압니다. 페트병에 담아서 파는 먹는샘물 맛 또한 냇물 맛하고 사뭇 다른 줄 몸으로 느낍니다. 제아무리 맑고 싱그러운 냇물이라 하더라도 페트병에 담은 채 여러 날 여러 달 지내고 나면 맑거나 싱그러운 기운이 송두리째 사라지는구나 하고 느껴요.


  사람이 마실 물은 ‘흐르는 물’입니다. 가둔 물을 플라스틱병에 가두어 놓고 마실 때에는 사람 몸뚱이 또한 ‘갇힌 몸’처럼 된다고 느낍니다. 정수기로 거른다거나 주전자로 끓인다거나 해서는 물맛을 느끼지 못할 뿐더러 물 한 방울이 고운 목숨으로 나한테 스며들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맑게 숨쉬는 물을 마시면서 맑게 숨쉬는 넋으로 살아갈 나예요. 싱그러이 빛나는 물을 마시면서 싱그러이 빛나는 얼로 살아갈 나예요.


  시골 막걸리는 시골마을 냇물로 빚습니다. 도시 막걸리는 수도물이나 정수기물로 빚겠지요. 시골 막걸리는 시골마을 쌀로 빚습니다. 도시 막걸리는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데에서 사들인 쌀로 빚습니다. 오늘날 한국 시골에서 농약 안 쓰는 데는 아주 드물지만,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나라는 훨씬 어마어마하게 농약을 칩니다. 농약을 쳐서 지은 쌀을 배로 실어 한국으로 올 적에는 또 어떤 농약이나 방부제를 뿌릴까요. 벌레 먹지 않도록 갖가지 농약과 방부제를 뿌리잖아요.


  이제 도시로 마실을 가서 도시사람 즐긴다는 막걸리 한 잔을 콸콸 부어 받을 적에는, ‘아, 이 막걸리 물빛과 물내음과 물맛 모두 사람 숨결을 살리기는 힘드네.’ 하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꿉니다. 구정물이건 비눗물이건 내 몸을 살찌우는 고마우며 반가운 밥이로구나 하고 여기며 막걸리잔을 들이켭니다. 스스로 내 마음을 씻고 고운 물 한 방울 입에 털어넣습니다.


  도시에서 볼일을 마치고 시골집으로 돌아오면 맨 먼저 시골집 냇물을 꿀꺽꿀꺽 들이켭니다. 크아, 좋구나. 나는 이 맛을 느끼고 이 내음을 맡으며 이 빛깔을 바라보면서 내 몸과 마음을 사랑해야지. 내가 사랑하며 살아갈 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지. 내가 아끼며 보살피고 북돋울 믿음이 무엇인가를 헤아려야지. 내가 즐기며 누리고 나눌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지. (4345.10.3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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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 서는 아이들

 


  우리 시골집에 놀러온 네 살 아이가 저보다 한 살 위인 우리 집 큰아이더러 꼬박꼬박 ‘언니’라 부르는 말을 들으며 깜짝 놀랍니다. 다섯 살 우리 집 큰아이는 ‘나이에 따라 달리 가리키는 부름말’을 아직 모릅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오래도록 ‘나이가 한 살 더 많대서 언니’라느니 ‘나이가 한 살 더 적대서 동생’이라느니 하고 나눌 줄 모를 수 있어요. 큰아이더러 ‘너는 언니’라고 말해 주면, 큰아이는 으레 “나는 벼리야, 사름벼리.” 하고 말합니다. 작은아이는 큰아이한테 ‘동생이야’ 하고 말해 줄 때에도 큰아이는 으레 “아니야 보라야, 산들보라.” 하고 말하곤 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입니다. 사람은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한테 형이나 오빠라 한다면, 어떻게 해서 형이나 오빠가 될까요. 나이가 더 있거나 계급이 더 있다는 틀거리란 무엇일까요. 이 나라 어른들은 왜 아이들을 일찍부터 유아원이나 어린이집에 집어넣으면서 ‘아이들 스스로 나이에 따라 금긋기’를 하도록 몰아세울까요. 왜 아이들은 나이에 따라 줄을 서야 할까요. 모두들 삶을 사랑하고 아끼며 누릴 빛나는 숨결일 텐데요. (4345.10.3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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