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을 먹다

 


  저자를 보러 읍내를 다녀오는 길에 감을 산다. 등에 가방 하나 메고 어깨에 천가방 둘을 꿰며 한손으로는 큰아이 손을 잡고 걷다가, 버스역 앞에서 감꾸러미 파는 할머니를 본다. 저녁에 마을로 돌아가는 버스를 탄다며 일어서서 짐을 꾸리시기에 값을 여쭙고는 셈을 치른다. 집에서 따온 감이라 하시는데, 시골 버스역 둘레에서 감을 파는 분들은 으레 당신 집에서 따서 들고 나온다. 할머니 댁은 어느 마을일까. 읍내로 나오는 삯과 집으로 돌아가는 삯을 따질 때에 하루 만 원이나 이만 원쯤 버셨을까.


  버스표를 끊는다. 큰아이가 버스표를 들어 준다. 손이 둘뿐이라 짐꾸러미 들자면 손이 모자라지만, 큰아이가 버스표 들어 주기에 내 손은 넷이라 할 만하다. 감꾸러미 하나 장만하니 큰아이가 감을 먹고 싶다 말한다. 아버지가 바나나송이를 샀으면 아이는 바나나를 먹고 싶다 할 테지. 아버지가 사과꾸러미를 샀으면 사과를 먹고 싶다 할 테고, 귤을 샀으면 귤을 먹고 싶다 하리라.


  마을마다 감나무에 감알이 흐드러진다. 읍내나 면내 어느 가게를 가도 문간에 감꾸러미를 놓고 판다. 가장 너른 먹을거리이면서 무척 맛난 밥거리가 되는 감알이라고 느낀다. 고흥에는 유자도 석류도 참다래도 많이 난다고 하지만, 먼먼 옛날부터 아이 어른 모두 감알 먹으며 가을과 겨울을 따사로이 누렸지 싶다. (4345.1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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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 아저씨의 꿈 웅진 우리그림책 18
엄혜숙 글, 이광익 그림 / 웅진주니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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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품고 보살피는 하루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08] 이광익·엄혜숙, 《세탁소 아저씨의 꿈》(웅진주니어,2012)

 


  나는 시골에서 아이들과 지내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습니다. 나는 대학교를 마치지 않았고, 사진 배우는 강의나 글 배우는 수업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배우지 않았어도 스스로 사진기를 장만해서 사진을 찍었고, 배우지 않았지만 스스로 연필을 쥐어 글을 썼어요.


  누구한테서 배운 사진이나 글이 아니기에, 나는 사진동무나 글동무가 따로 없기도 하고, 사진스승이나 글스승 또한 따로 없습니다.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대로 사진을 찍고, 가장 즐기는 대로 글을 씁니다. 내가 즐겨찾는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고, 내가 즐겁게 타는 자전거를 사진으로 옮기며, 내가 살아가는 보금자리에서 사진을 빚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나날을 글로 쓰고, 내가 즐겨읽는 책을 글로 엮으며, 나와 한솥밥 먹는 살붙이 삶자락을 글로 빚어요.


  가을날 한들한들 춤추는 갈대와 억새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글을 씁니다. 따순 남녘땅 논둑에서 가을날 꽃을 피우는 갓과 유채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글을 씁니다. 마당에서 맨발로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글을 씁니다.


  하늘을 훨훨 나는 멧새를 올려다봅니다. 저 새는 어떤 새일까 고개를 갸우뚱하다가는, 또 밤하늘 가득한 별을 올려다보며 무슨 별일까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는, 또 휭휭 부는 바람 따라 흔들리는 들풀이 어떤 풀일까 고개를 이리저리 기웃기웃하다가는, 내 마음 가는 대로 이름을 붙여 봅니다. 멧자락 위를 지나가다가 멧등성이에 걸려 꼼짝 않는 구름을 바라볼 때에는 ‘구름이 멧등성이에 앉아서 쉬는구나.’ 하고 노래합니다. 아이들 재우는 저녁나절에는 예쁜 아이 착한 아이 멋진 아이 고운 아이, 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바람이 차면 찬 대로 반가운 하루입니다. 햇살이 따스하면 따스한 대로 고마운 하루입니다. 가을이 다가오며 겨울을 그리고, 겨울을 맞이하며 봄을 꿈꿉니다. 봄이 찾아올 무렵 여름을 기다리고, 여름이 깃들면서 가을을 떠올려요. 삶이 온통 웃음이요, 웃음은 고스란히 사진으로 거듭나고 글로 다시 태어납니다.

 


.. 친한 친구도 없고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던 내게 동물들은 가장 먼저 마음을 열어 준 친구였습니다 ..  (10쪽)


  아름다운 말 한 마디는 따로 없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삶을 아름다이 누릴 적에는, 내가 쓰는 어느 말이든 모두 아름답습니다. 스스로 삶을 슬프게 깎아내리거나 얄궂게 뒤틀 적에는, 내 입에서 나오는 어느 말이든 모두 슬프거나 얄궂습니다. 낱말만 예쁘장하게 꾸민대서 내 말마디가 예쁘게 거듭나지 않습니다. 말투만 그럴듯하게 치레한대서 내 말본새가 그럴듯하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아이들을 바라보고 들판을 마주하는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마음을 다스립니다. 살붙이와 부대끼고 빨래를 복복 비비는 마음을 다스립니다.


  하늘에서 똑 떨어지는 꿈이란 없어요. 선물처럼 짠 하고 찾아오는 꿈이란 없어요. 어떠한 꿈이든 생각으로 빚습니다. 모든 꿈은 마음으로 일굽니다. 스스로 꾸리는 삶에서 생각이 자라고 마음이 큽니다. 스스로 누리는 삶에서 생각이 빛나고 마음이 부풉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보셔요. 저녁에 지는 해를 보셔요. 봄날 해가 어느 쪽에서 떠서 어느 쪽으로 지는가를 살펴보셔요. 여름날 해가 뜨는 높이와 가을과 겨울에 해가 뜨는 높이를 가늠해 보셔요. 한겨레 옛사람이 집을 지으며 남녘을 등에 지고 마루와 마당에서는 동녘과 서녘을 바라보도록 한 까닭을 헤아려 보셔요.


  해가 움직이는 길을 따라 빨래대를 달리 놓습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에 빨래대 놓는 자리가 바뀝니다. 봄과 여름에는 빨래가 쉬 마르고, 가을과 겨울에는 빨래가 천천히 마릅니다. 철에 맞추어 삶을 맞추고, 삶에 맞추어 생각을 맞추며, 생각에 맞추어 말을 맞춥니다. 내가 읊는 말마디는 내 삶에서 태어납니다. 내가 즐기며 가꾸고 보듬는 삶에 맞추어 말 한 마디 싱그러이 태어납니다.

 


.. 나는 동물을 좋아해서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동물원 사육사가 될 수는 없었어요. 사육사는 공무원인데, 재일 조선인은 공무원이 될 수 없었거든요 ..  (20쪽)


  아침밥을 짓고 저녁밥을 짓습니다. 한솥밥을 지어 다 함께 먹습니다. 밥짓는 내 손길은 사랑을 담아 목숨을 건사하는 손길입니다. 숨결을 푸르게 북돋우고 마음결을 곱게 살찌웁니다.


  후끈후끈 뜨거운 국물을 마십니다. 김 모락모락 나는 국물을 아이한테 먹입니다. 따스한 밥을 먹고, 따스한 밥을 먹입니다. 무를 썰고 오이를 썹니다. 날푸성귀를 흐르는 물에 헹군 다음 물기를 빼내고서 톡톡 썹니다. 알맞게 썬 날푸성귀를 골고루 섞으며 된장이나 양념장으로 버무립니다. 때때로 감자와 양파를 볶거나 버섯이나 양배추를 볶습니다. 푸성귀는 날로 먹어도 맛나고, 감자와 양파를 볶은 다음 떡볶이떡을 넣어 자글자글 끓인 다음 함께 넣어 먹을 때에도 맛납니다.


  졸린 아이를 재우고 이불깃을 여밉니다. 나란히 드러누워 하루를 돌아봅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새롭게 자라고, 어른들은 나날이 새롭게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내 몸을 씻기고 아이들 몸을 씻깁니다. 내 머리를 감고 아이들 머리를 감깁니다. 아이들 뒤를 닦고 나도 뒤를 눕니다. 다섯 살 큰아이는 스스로 양말을 꿰고 옷을 입을 뿐 아니라, 식구들 옷가지를 혼자서 척척 갭니다. 두 살 작은아이는 스스로 양말을 꿰거나 단추를 꿰거나 신을 꿰려면 좀 멉니다. 그래도 오래지 않아 작은아이 스스로 옷을 꿰고 신을 꿸 텔지요. 자꾸자꾸 옷을 새로 꺼내어 입고 자꾸자꾸 옷더미를 만들는지 모릅니다. 누나하고 둘이서 끝없이 뛰고 기고 날고 하면서 하루를 보내겠지요.


  가만히 돌아보면, 아이나 어른이나 스스로 품고 보살피는 하루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품는 하루요, 스스로 기쁘게 맞는 하루입니다. 스스로 예쁘게 마무리하는 하루요, 스스로 곱게 돌아보는 하루예요.

 


.. 아저씨가 내게 악수를 청하셨다. “나는 사육사가 되고 싶었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했어. 그렇지만 넌 꼭 훌륭한 사육사가 되길 바란다.” 아저씨 손은 참 크고 따뜻했다. 세탁소에서 늘 다림질을 하고 있어서 손이 크고 따뜻한가 보다 ..  (32쪽)


  이광익 님이 그리고, 엄혜숙 님이 글을 쓴 《세탁소 아저씨의 꿈》(웅진주니어,2012)이라는 그림책을 읽습니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며 살아가는 ‘김황’이라는 분 이야기를 적바림한 그림책입니다. 재일조선인으로 나고 자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쁨으로도 슬픔으로도 금긋지 않고 차분하게 들려주는 그림책입니다.


  김황 님이 남녘이나 북녘에서 태어났으면 어떠한 삶을 꾸렸을까요. 김황 님이 일본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어떠한 나날을 보냈을까요. 재일조선인으로 나고 자라며 살아가는 하루란 어떤 뜻과 값과 보람과 빛과 웃음이 될까요.


  누구보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낄 수 있기에, ‘삶을 돌보는’ 글쓰기를 하며 하루를 빛내는 김황 님이리라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듯 들짐승을 아끼고 사랑하는 넋을 건사하기에, 세탁소 일꾼으로 지내면서 글을 쓰고 책을 펴내는 삶을 북돋우는구나 싶습니다.


  예쁘게 살고 싶으면 예쁘게 꿈을 꿉니다. 참답게 살고 싶으면 참답게 꿈을 꿉니다. 생각이 꿈으로 거듭납니다. 꿈은 삶으로 나타납니다. 삶은 이야기로 꽃을 피웁니다. 이야기는 널리널리 퍼지며 두루두루 즐거운 노래로 흘러넘칩니다. (4345.11.7.물.ㅎㄲㅅㄱ)

 


― 세탁소 아저씨의 꿈 (이광익 그림,엄혜숙 글,웅진주니어 펴냄,2012.7.30./110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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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1-08 19:22   좋아요 0 | URL
요즘 동화책에 빠져 있어요. 재밌어요.
된장 님도 동화를 쓴다면 잘 쓰실 것 같은데... ㅋ
위와 같은 동화그림도 좋아합니다.

숲노래 2012-11-08 20:05   좋아요 0 | URL
음... 언젠가 쓰리라 생각해요~~~ ^^
 

‘벽지’와 ‘시골’
[말사랑·글꽃·삶빛 34] 살아가는 생각이 나타나는 말

 


  ‘도시(都市)’라는 곳은 언제 처음 생겼을까 헤아려 봅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를 살피면 “일정한 지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이 도시라고 일컫는데, 신라 때 서라벌이 도시라 할 만할까요. 고구려 때 개성이나 평양은 도시라 할 만한가요. 4300년 앞서 옛조선에서 서울로 삼은 데는 도시라고 할 만할까요.


  오늘날 한국에서 ‘서울’은 땅이름 한 가지로만 많이 쓰지만, ‘서울’은 땅이름이기 앞서 어느 한 나라에서 정치와 경제가 모이는 한복판인 데를 가리키는 낱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하고 서울 아닌 ‘시골’ 두 가지로 삶터를 나누었어요. 한겨레 삶자락을 돌아본다면, ‘도시 = 서울’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를테면, 시골서 사는 분들은 도시에서 찾아온 손님을 바라보며 언제나 “서울에서 오셨어요?” 하고 묻습니다. 부산에서 오든 대구에서 오든, 인천이나 대전에서 오든 ‘도시 = 서울’이라 ‘서울사람’이라고 바라봅니다. ‘도시사람 = 서울사람’인 셈이니까요.


  정진국 님이 쓴 《사진가의 여행》(포토넷,2012)이라는 책을 읽다가 196쪽에서 “폴은 이렇게 프랑스 벽지 사람들을 보여준다.”와 같은 대목을 봅니다. 책을 읽다가 문득 멈춥니다. 국어사전을 펼칩니다. ‘벽지(僻地)’ 말풀이를 찾아보니, “외따로 뚝 떨어져 있는 궁벽한 땅.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이 불편하고 문화의 혜택이 적은 곳을 이른다” 하고 나옵니다. ‘벽지’와 비슷하게 쓰는 ‘오지(奧地)’라는 낱말도 찾아봅니다. ‘오지’ 말풀이는 “해안이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대륙 내부의 땅. ‘두메’로 순화” 하고 나오는군요.


  새삼스레 한국말 ‘시골’과 ‘두메’ 뜻풀이가 궁금합니다. 이 낱말도 국어사전에서 찾아봅니다. ‘시골’은 “도시에서 떨어져 있는 지역. 주로 도시보다 인구수가 적고 인공적인 개발이 덜 돼 자연을 접하기가 쉬운 곳을 이른다” 하고 나오네요. ‘두메’는 “도회에서 멀리 떨어져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변두리나 깊은 곳”이라고 나와요.


  다시 책을 읽습니다. “프랑스 벽지 사람들”이란 “프랑스 시골 사람들”이겠구나 싶습니다. 한국말로 ‘시골’을 한자말로 ‘벽지’라 적은 셈이로구나 싶습니다. 한국말로 ‘두메’를 한자말로 ‘오지’라 적는 셈이고요.


  그런데, 시골서 살아가는 사람은 ‘교통이 불편’할까 알쏭달쏭합니다. ‘문화 혜택’을 못 누리는 시골사람일까 아리송합니다. 교통이란 무엇이고 문화란 무엇인가요. 자동차로 오가기 좋거나 기차와 비행기가 다녀야 교통이 좋다 할 만할까요. 자전거로 다니기에 넉넉하고 두 다리로 걸어다니며 한갓진 데는 교통이 어떻다고 말해야 할까요. 극장이 있거나 병원이 있어야 문화가 될까 헤아려 봅니다. 극장도 병원도 없지만 삶을 아름다이 누린다면, 또 나무와 꽃과 벌과 새와 나비를 실컷 누린다면, 어느 쪽이 문화를 즐긴다고 할 만할까 헤아려 봅니다.


  누군가한테는 극장이나 편의점이나 옷가게나 찻집이 문화 혜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한테는 숲과 골짜기와 들판과 바다가 문화 혜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파트도 문화요 흙집도 문화예요. 한쪽은 도시 문화이고 한쪽은 시골 문화입니다. 한쪽은 서울살이요 한쪽은 시골살이예요.


  아이들은 맨발로 뛰놀기를 좋아합니다. 나도 어릴 적에 맨발로 뛰놀기를 즐겼습니다.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뿐이라 하더라도 맨발이 훨씬 즐거워요. 시골 아이들은 맨발로 뛰놀 흙이 곳곳에 널립니다. 오늘날은 풀약을 잔뜩 치기는 하지만, 풀밭이 있고 흙땅이 있어요. 논밭을 거닐 수 있고, 바닷가와 갯벌을 오갈 수 있어요. 참으로 문화란 무엇이고, 문화를 누리는 삶이란 무엇이며, 문화가 아름다운 터란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주고받는 말은 삶자리에 따라 다릅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결대로 말을 하고, 시골사람은 시골에서 살아가는 무늬대로 말을 해요. 서울사람은 서울말이요, 시골사람은 시골말입니다. 어느 쪽이 다른 쪽보다 낫거나 뛰어나거나 훌륭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을 어여삐 일굴 때에는 어여쁘다 여길 말이 태어납니다. 스스로 삶을 알차게 돌볼 때에는 알차게 샘솟는 말이 흐드러집니다. 스스로 삶을 기쁘게 누릴 때에는 서로 기쁘게 나눌 말을 새롭게 짓습니다.


  오늘날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제대로 안 씁니다. 예전에는 대학교수나 지식인이 되려고 사자성어를 비롯한 온갖 한자말을 일본이나 중국에서 빌어 학문을 했습니다. 이제는 대학교수나 지식인, 또 기자와 학자와 작가가 되려고 미국에서 영어를 빌어 학문을 하고 글을 쓰며 문학과 책을 빚습니다. 초등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치고,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도 영어를 가르쳐요. 어떤 삶이요 어떤 문화인가를 살피지 않아요. 무턱대고 영어를 가르칩니다. 지식인이나 작가로 살아가는 어른은 스스로 어떤 말이며 어떤 넋인가를 돌아볼 겨를 없이 갖가지 한자말과 영어로 이녁 생각을 적바림합니다. 삶을 살피지 않고 말을 앞세워요. 삶을 돌아보지 않고 글을 써요.


  살아가는 생각이 나타나는 말입니다. 살아가는 모습이 드러나는 말입니다. 흙을 밟고 풀을 만지는 시골 할머니는 풀내음과 흙내음 물씬 풍기는 말을 합니다. 자가용을 몰고 아파트에서 지내는 도시 젊은이는 쇳덩이와 시멘트로 둘러싸인 내음이 풍기는 말을 합니다. 더 낫거나 덜 떨어지는 말이란 없습니다. 삶자리 따라 말자리가 다를 뿐입니다. 삶을 짓는 꿈에 따라 말을 빚는 넋이 다를 뿐입니다.


  어린이는 어떤 삶을 누리며 어떤 말을 나눌 때에 아름답게 꿈을 키울까 생각해 봅니다. 푸름이는 어떤 삶을 즐기며 어떤 말을 주고받을 때에 아리땁게 사랑을 빛낼까 헤아려 봅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어떤 삶을 꽃피우며 어떤 말을 북돋울 때에 어여쁘게 마음을 밝힐까 가만히 그려 봅니다. (4345.1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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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48) -에서의 14 : 자유세계에서의 최고의 모델

 

‘자유세계’에서의 최고의 모델로 선전하는 미국식 모델은 미국을 뺀 다른 곳에서는 선언의 수준에 머물렀다
《이임하-적을 삐라로 묻어라》(철수와영희,2012) 421쪽

 

  “최고(最高)의 모델(model)로 선전(宣傳)하는”은 “가장 훌륭하다고 내세우는”이나 “가장 첫손으로 꼽는”으로 다듬고, 바로 뒤따르는 “미국식(-式) 모델(model)은”은 “미국은”이나 “미국 모습은”으로 다듬어 봅니다. ‘모델’이라는 낱말을 두 차례 쓰기보다는 한 번만 쓰면 더 낫고, 아예 덜면서 글흐름에 녹아들도록 하면 한결 낫습니다. “선언(宣傳)의 수준(水準)에 머물렀다”는 토씨 ‘-의’만 덜어 “선언 수준에 머물렀다”로 손볼 수 있는데, “선언과 같을 뿐이었다”라든지 “허울좋은 말뿐이었다”나 “허울만 그럴듯했다”로 손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선언’이란 알맹이 없이 말만 그럴듯하다는 뜻을 가리키니까, 말만 그럴듯하다고 하거나 허울만 좋아 보인다고 하면 넉넉하리라 생각해요.

 

 ‘자유세계’에서의 최고의 모델로 선전하는 미국식 모델
→ ‘자유세계’에서 첫손가락으로 꼽는 미국
→ ‘자유세계’에서 가장 좋다고 손꼽는 미국
→ ‘자유세계’에서 첫손으로 내세우는 미국
 …

 

  토씨 ‘-의’를 잇달아 넣으며 글을 쓰는 버릇이 자꾸 퍼집니다. 쓸 만하기에 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나, 곰곰이 살피면 글쓴이 스스로 이녁 생각을 슬기롭게 담아 나타내는 말투를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쓰는구나 싶어요. 초등학교에서도 대학교에서도 내 생각을 내 나름대로 슬기롭게 나타내도록 가르치기보다는 대학바라기 시험공부나 영어공부만 시켜요. 하루빨리 삶다운 삶을 찾고 배움다운 배움을 찾아서, 말다운 말과 글다운 글이 아름다이 꽃피울 수 있기를 빕니다. (4345.11.7.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자유세계’에서 가장 좋다고 손꼽는 미국은 미국을 뺀 다른 곳에서는 허울만 좋아 보일 뿐이었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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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들보라 사진틀 놀이

 


  사진틀을 붙잡고 이리저리 흔드는 산들보라. 사진에 멍멍이 있어서 멍멍이 바라보며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니. 멍멍이가 사진에서 튀어나오려 하니. 꼭 네 눈높이에서 멍멍이가 예쁘게 보이는구나. (4345.1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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