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시집 네 권

 


  저녁에 시집 네 권을 읽는다. 한 권은 즐겁게 읽고, 세 권은 이렁저렁 시큰둥하게 읽는다. 즐겁게 읽은 시집을 쓴 이도 어떤 문학상 하나를 받았다 하는데, 신문배달 하던 어릴 적 이야기부터 방위병으로 지내며 현역병한테 숱하게 얻어맞은 이야기에다가 탄광일과 김일 하는 삶을 시로 알뜰히 적바림했다. 다른 세 권을 쓴 이도 이런 상 저런 상을 받았다 하고, 누군가는 대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기도 한단다. 그런데 나는 이들 시집 세 권이 썩 즐겁지 않다. 이들은 시를 왜 썼을까. 이들은 시를 써서 왜 상을 받고 왜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기도 할까.


  시는 헛소리를 담지 않는다. 시는 삶을 담는다. 삶을 담지 않고서는 시가 태어나지 않는다. 주절주절 떠들거나 말놀이를 한대서 시가 될까. 주절주절 떠들면 ‘주절주절 시끄러운 소리’요, 말놀이를 하면 ‘꼬투리 잡는 말놀이’가 될 뿐이다.


  일을 하건 놀이를 하건 아이를 돌보건 살림을 꾸리건 마실을 다니건 숲에 깃들건 무얼 하건, 스스로 살아내는 하루를 노래 하나로 영글 때에 비로소 싯말이 태어난다고 느낀다. 어떤 일을 하건 무슨 대수랴. 어떤 일을 하건 스스로 말꽃을 피울 수 있어야 노래를 불러 시를 짓겠지.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스스로 사랑꽃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은 노래를 부르지 못할 뿐 아니라 시노래를 짓지 못한다.


  한 달에 걸쳐 읽는 시집이 아니요, 한 해 내내 읽는 시집이 아닌, 저녁나절 휘리릭 훑고는 두 번 다시 펼칠 일이 없으리라 느끼는 시집 세 권이란 무엇일까. 이 시집이 되려고 싹둑싹둑 베이고 만 숲은 무엇이 된 셈일까. 종이 한 장은 나무 한 그루요, 책 한 권은 숲 한 자락이다. 시집 하나는 숱한 숲이 새로 태어난 넋이다. 사람들은 숲에 어떤 이름을 아로새길 생각인가. 사람들은 숲을 밀어 어떤 돈을 벌 생각인가. (4345.11.1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맛있는 풀

 


  집 뒤꼍 시멘트로 바닥을 바른 틈바구니에서 풀이 돋는다. 척 보기에도 맛난 풀이다. 이 가을에 너희는 우예 이곳에서 이처럼 푸르게 돋을 수 있니. 우리 식구들 맛나게 먹으라는 뜻이니. 너희를 맛있게 먹고 푸른 숨결로 씩씩하게 살아가라는 뜻이니. 반가우며 고맙고 즐겁구나. 푸른 풀잎은 햇살과 바람 머금으며 싱그럽고, 푸른 풀잎 먹는 사람은 햇살과 바람 서린 싱그러운 숨결 먹으면서 기쁜 넋으로 살아갈 힘을 얻겠지. (4345.11.1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자전거쪽지 2012.11.7.
 : 그렇게 자전거 타고 싶나

 


-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다가 자전거수레에 올라타고 논다. 아직 너희 다리힘으로는 자전거를 굴리지 못해, 이렇게 수레에 탈밖에 없지만, 빈수레에 올라타고 놀기만 해도 재미나니.

 

- 돌이켜보면 나도 어릴 적에 빈수레에 올라타고 싱싱 달린다느니 훨훨 난다느니 하고 꿈꾸며 놀기도 했다. 수레 임자인 어른이 이 꼴을 보면 수레 망가진다고 길길이 뿔을 내며 달려들었는데,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며 빈수레에 올라타고 놀곤 했다. 국민학교에서도 빈수레 있으면 서로 올라타고 서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민다며 놀곤 했다.

 

- 해가 아직 걸린 늦은 낮나절, 서재도서관 나들이도 하면서 마을 한 바퀴 휘 돈다. 바람이 제법 세게 불어 멀리 나가지는 않는다. 이웃마을 살며시 도는 동안 작은아이는 수레에서 잠든다. 옆마을 유자밭 지날 무렵 곯아떨어지고, 큰아이는 옆에서 생글생글 웃는다. 큰아이는 제가 동생 재워 주었다고 노래노래 부른다.

 

(최종규 . 2012 - 자전거와 함께 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이들한테 책이란 (도서관일기 2012.11.7.)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아이들한테 책이란 무엇이 될까. 아이들은 책을 얼마나 읽어야 할까. 우리 아이들 또래 다른 아이들은 진작부터 보육원·유아원·어린이집·유치원을 다닌다. 다른 아이들은 이런저런 곳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영화를 보며 영어노래를 배운다. 어느 아이는 한글을 벌써 떼고 혼자 그림책을 읽기도 하리라. 우리 집 다섯 살 큰아이는 이제 한창 글놀이를 할 뿐, 나도 옆지기도 딱히 큰아이한테 글을 가르치지 않는다. 큰아이는 제 이름을 즐거이 쓰며 놀다가, 이제 누가 제 이름을 따로 적어 주지 않아도 혼자 씩씩하게 쓸 줄 안다. 아버지나 어머니한테 그림책 큰 글씨 읽어 달라 하면서 때때로 하나둘 익히곤 한다.


  작은아이가 아직 안 태어난 지난날, 도시에서 살며 자연그림책이나 생태그림책을 되게 많이 사서 보았다. 자연사진책이나 생태사진책도 꽤나 많이 사서 모았다. 글로 된 환경책도 퍽 많이 사서 읽었다. 그런데 막상 시골로 삶터를 옮겨 보금자리를 이루고 보니, 이런 자연그림책이나 저런 생태사진책이 그닥 쓸모있지 않다. 늘 숲을 보니까 자연그림책이 덧없다. 언제나 숲이 곁에 있으니 생태사진책이 부질없다. 자연그림책이 숲을 더 깊거나 넓게 보여주지 않는다. 자연그림책은 숲하고 동떨어진 채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 ‘숲맛’을 조금이라도 느끼도록 해 주려고 빚는다. 생태사진책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시골사람이 시골을 더 살가이 깨닫고 느끼도록 이끄는 자연생태 이야기책은 아직 없다. 아니, 아마 앞으로도 나올 일이 없으리라 본다.


  우리 서재도서관으로 뿌리내리면서 집숲으로도 가꿀 수 있기를 바라는 시골 폐교 자리에 아이들과 놀러온다. 이 터를 교육청한테서 우리보다 먼저 빌려 건물 둘레에 나무를 빼곡히 심고 내팽개친 분들은 한 해 내내 한 차례도 이곳에 찾아오지 않았다. ‘나무 심었으니 이제 내 땅이야!’ 하는 듯할 뿐, 조금도 돌보지 않고 건사하지 않는다. 우리 식구는 이 좋은 터에 풀약 하나 안 치고 정갈한 숲과 밭으로 돌보면서 책이 함께 있는 예쁜 마을쉼터를 일구고 싶다.


  우리한테는 마음이 있고 책이 있다. 아직 돈은 없다. 날마다 꿈을 꾼다. 머잖아 우리들 주머니에 돈이 들어와 이 터를 ‘버려진 땅’이 아닌 ‘싱그럽고 푸르게 빛나는 숲과 책밭’이 되도록 보살필 수 있으리라고 즐겁게 바란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러거나 저러거나 아랑곳하지 않는다. 저희 아버지가 책을 몇 만 권 건사하든 말든 대수롭지 않다. 어떤 이가 이 터를 돈으로 거머쥐려고 나무를 잔뜩 심든 말든 대수롭지 않다. 그예 재미난 놀이터요, 그저 마음껏 노래하고 뛰거나 구르는 좋은 앞마당이다. 겨울 지나고 새봄 찾아오면 곳곳에서 딸기꽃 피고 들딸 먹는다며 아이들 날마다 마실을 하자고 조르겠지.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 도서관 지킴이 되어 주는 분들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1.341.7125.)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50) -의 치유 : 상실감의 치유

 

아이가 느낄지도 모르는 상실감의 치유를 위해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웬디 이월드·알렉산드라 라이트풋/정경열 옮김-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포토넷,2012) 57쪽

 

  ‘상실감(喪失感)’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후의 느낌이나 감정 상태”를 뜻한다고 해요. 쉽게 말하자면 “잃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이 보기글처럼 “아이가 느낄지도 모르는 상실감”처럼 적으면 ‘느끼다’라는 낱말이 겹으로 쓰인 꼴이 되고 말아요. 적어도 “아이의 상실감”처럼은 적어야 올바르고, “치유(治癒)를 위(爲)해”와 묶어서, “아이가 잃어버린 마음을 달래자면”이나 “아이가 무언가 잃은 허전함을 다독이려면”이나 “아이가 무언가 잃어 아픈(슬픈) 마음을 보듬자면”으로 손보면 한결 낫습니다. ‘최소한(最小限)’은 ‘적어도’로 손보고, ‘부분적(部分的)으로라도’는 ‘조금이라도’로 손봅니다.

 

 상실감의 치유를 위해
→ 상실감을 씻자면
→ (잃은) 아픔을 달래자면
→ (잃어버린) 슬픔을 다독이려면

 

  한자말 ‘상실감’과 ‘치유’를 그대로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상실감을 치유하자면”이나 “상실감을 치유하려면”쯤으로는 적어야 알맞습니다. ‘(무엇)의 치유’처럼 적는 꼴은 일본 말투입니다. 한국 말투로는 이렇게 적지 않아요. 한국 말투로는 ‘(무엇)을 치유한다’처럼 적거나 ‘(무엇)을 씻는다/달랜다/다독인다/다스린다’처럼 적어요.


  깊이 헤아릴 수 있다면 ‘상실’이나 ‘치유’ 같은 한자말부터 안 쓸 만합니다. 이러한 한자말을 자꾸 쓰기 때문에 ‘-의’ 넣는 일본 말투가 한국 말투라도 되는 듯 끝없이 스며들어요. 스스로 낱말부터 알맞게 살피고 고를 때라야, 비로소 말투를 슬기롭고 어여삐 다스릴 수 있어요. 작은 말씨 하나를 헤아리면서 서로 기쁘게 나눌 말빛을 찾아요. 작은 낱말 하나 곱게 영글면서 다 함께 활짝 꽃피울 말삶을 북돋을 수 있어요.


  스스로 잃어버린 한국말을 찾을 수 있기를 빌어요. 한국사람 스스로 잃은 넋과 말과 삶을 아름다이 되찾아 환하게 빛낼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1.11.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아이가 무언가 잃어버려 아픈 마음을 달래자면 적어도 조금이나마 그렇게 해야 한다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