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 밑에 들이지 못한 빨래

 


  아침 일찍 마실을 다녀와야 해서 부랴부랴 일찌감치 밥을 짓고 나물을 헹구어 무치느니 달걀을 삶느니 밤을 삶느니 하느라, 가방을 꾸려 아이들과 대문 밖으로 나갈 적에 빨래를 처마 밑으로 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깜빡 잊는다. 아침에 해가 높다라니 걸렸으니, 낮이나 저녁에 돌아와도 걱정없으려니 하고 여겼달 수 있지만, 요즈음 늦가을 날씨를 떠올리면 어쨌든 저녁에는 이슬이나 찬기운 안 맞게 처마 밑으로 들이든 마루로 올려놓든 해야 했다. 일찌감치 마실을 나가기에 빨래도 일찌감치 해서 밖에 널었으니, 따사로운 아침볕 받은 빨래는 마실을 나갈 무렵 만져 보았을 때 거의 다 말랐다. 기저귀는 다 말랐고. 햇볕을 조금이라도 더 먹기를 바라며 그대로 두었는데, 그대로 두었다가 가을비를 옴팡 뒤집어쓴다.


  비에 젖은 빨래는 모두 다시 헹구어 집안에 넌다. 저녁에 나온 새 옷가지는 미처 빨래하지 못한다. 헹군 빨래가 말라야 비로소 새 빨래를 할 수 있다. 아이들 모두 재운 깊은 밤에 홀로 고요히 생각에 잠긴다. 바보스럽군, 바보스럽네, 바보스럽잖아,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지 않았으면서, 오늘은 또 왜 이렇게 했니.


  서두를 까닭이 없다고, 느긋하게 즐기면 된다고, 1분 마음을 기울이면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린다고, 내 마음쓰기가 어딘가 꼬였다고, 아무래도 나 스스로 삶짓기를 한결 슬기롭게 가다듬는 길을 제대로 못 찾는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제 이 빨래가 그럭저럭 말랐으니, 이듬날 볕에 보송보송 말리기로 하고, 새롭게 밤빨래를 하자. 아이들 깊이 잠든 맑은 이마를 살살 어루만지고, 밤하늘 환하게 빛나는 미리내를 웃으면서 바라보는 가을날 밤이 예쁘다. (4345.1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빨래순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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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드롭스 6
우니타 유미 지음, 양수현 옮김 / 애니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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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벗’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만화책 즐겨읽기 191] 우니타 유미, 《토끼 드롭스 (6)》

 


  오랜 벗들은 내 마음을 잘 헤아려 줍니다. 나도 오랜 벗들 마음을 잘 헤아려 줍니다. 그런데, 아무리 오랜 벗이라 하더라도 무턱대고 마음을 헤아려 주지는 않습니다. 오랜 벗인 만큼 서로를 더 깊이 바라보면서 ‘어긋난 길을 걸어갈’ 적에는 누구보다 따끔하게 한 마디 합니다. 그러고는 덧붙여요. 네가 그 어긋난 길을 가더라도 이제 너는 어른이라 너 스스로 가는 길이니 무어라 하지 않을 테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틀림없이 어긋난 길이니까 스스로 더 살피고 알아보면서 그 길을 가라고.


  벗이기에 서로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벗이기에 서로 거리끼지 않습니다. 벗이기에 서로 스스럼없이 생각을 나눕니다. 다만, 서로 벗이면서 어른인 만큼, 어떠한 길을 걷더라도 스스로 살피고 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하는 대목은 스스로 알아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벗이니까 가르쳐 주지 않아요. 아니, 벗이라 한들 가르쳐 줄 수 없어요. 스스로 느껴야 느끼고, 스스로 알아야 알아요. 스스로 느끼지 못할 때에는 백 마디 천 마디 말은 덧없어요. 모두 한귀로 흘리는걸요.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백 가지 천 가지 책을 쥐어 준다 한들 읽지 못할 뿐 아니라, 읽는다 하더라도 줄거리에 깃든 넋과 이야기를 받아먹지 못해요.


  오랜 벗하고 처음 사귀던 무척 어린 날을 돌이켜봅니다. 아주 어린 나날에는 ‘아이’였던 만큼 벗들이 서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나 스스로 삶으로 겪지 못할 적에는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아요. 나중에 스스로 겪으며 새롭게 받아들이자고 생각하면서 동무가 들려준 이야기를 고맙게 받아들입니다.


- “너 환상이 너무 크다! 키가 크면 아무리 말라도 무겁다고. 그리고 넌 남자 눈으로 보는 거고, 난 아빠 눈으로 보는 거니까.” (25쪽)
- “지나가던 배달부나, 큰 짐 지고 가는 할머니나, 사람 좋아하는 큰 개나, 그런 게 갑자기 닥치면 어쩌려고 이런 데 서 있냐!” “다이키치, 걱정이 너무 많아.” “이게 보통이야.” “아, 그래?” (110쪽)


  벗이란 함께 살아가는 이웃입니다. 이웃은 이웃이요, 벗은 이웃 가운데 오래도록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솥밥 먹는 살붙이를 두고도 벗이라 일컬을 수 있어요. 이를테면, 한솥밥 먹는 옆지기랑 아이들은 ‘삶벗’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벗이거든요. 다른 한편으로는 ‘길벗’입니다. 함께 길을 걸어가는 씩씩한 벗이에요. 어느 모로 보면 ‘마음벗’이에요. 마음으로 생각을 나누기도 하고, 마음으로 사랑을 북돋우기도 하는 예쁜 벗이에요.


  ‘말’이나 ‘이름’을 놓고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합니다. 이를테면, ‘아내’와 ‘남편’ 같은 말이나 이름을 놓고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말은 언제부터 누가 왜 어떻게 썼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1500년대나 400년대나 기원전 1000년 무렵에는 서로 어떤 말과 이름을 썼을는지 돌아봅니다. 단군이 이 땅에 왔을 무렵은 어떠했을까 헤아려 봅니다. 단군에 앞서 1만 해쯤 앞서는, 또는 10만 해쯤 앞서는 어떤 말과 이름이 있었을까 되새겨 봅니다.


  하나하나 따지면, ‘아내’랑 ‘남편’이라는 낱말을 우리 겨레가 쓴 지는 얼마 안 되었어요. 어쩌면 백 해조차 안 되었을는지 몰라요. 이백 해 앞서만 하더라도 이런 말을 어느 누구도 몰랐을 수 있어요.


  한문을 쓰던 사대부나 권력자나 궁궐 기득권은 이런 낱말을 안 쓰고 중국말로 따로 가리키는 말과 이름이 있었을 테지요. 흙에 기대어 흙을 빚고 살던 거의 모든 여느 사람들 또한 이런 낱말을 안 썼겠구나 싶어요. ‘바깥사람’이나 ‘안사람’이란 말을 썼을까요. 글쎄, 아니라고 느껴요. ‘바깥사람’이나 ‘안사람’이라는 이름 또한 ‘아내’와 ‘남편’처럼 쓴 지 얼마 안 되었으리라 느껴요. 예전에는 흙일을 둘이 나란히 해야 했거든요. 다만, 오백 해쯤 앞서까지도 부엌일은 가시내만 하도록 시켰을 수 있으리라 느껴요. 그런데, 천 해쯤 앞서도 부엌일을 가시내만 했을까 하고 떠올리면, 또 이천 해쯤 앞서는 부엌일을 누가 어떻게 했을까 하고 되새기면, 이때부터 이야기가 달라져요.


- ‘아,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그나저나 린, 요새 코우키 얘기만 나오면 가시를 세우면서.’ (68쪽)
- ‘휴대폰, 꼭 있어야 할까? 이것(스팸쪽글)만 없으면 편할 것 같은데. 아, 또 왔다. 이상한 메일만 잔뜩. 귀찮아. 코우키도, 이젠 싫어.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르겠고.’ (104∼105쪽)
- “전 코우키랑 사귀고 있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예요.” “흠, 그렇구나.” “하지만 소중한 사람이에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지킬 거예요.” (178∼179쪽)


  이름이란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이름이 붙든 삶이 대수롭습니다. 삶을 아름다이 일구지 못하면서 이름만 번듯하대서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이를테면, ‘장애자’한테 ‘장애인’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이다가 ‘장애우’라는 이름을 다시 붙인대서 삶이 달라지지 않아요. 이름만 바꿀 뿐, 한국 사회에서 금을 긋거나 나누는 틀은 너무 딱딱하고 메마를 뿐 아니라 드세고 억세요. 허울은 그럴듯해도 알맹이는 허술하곤 해요.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장애 있다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사회 밑틀이 ‘장애 있는 사람’이 홀가분하게 마실을 다닐 수 있도록 이루어지지 않거든요.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장애 있는 사람이 움직이기에는 매우 나빠요. 장애 없는 사람조차 거님길을 걸어서 돌아다니기에 몹시 힘들어요. 이를테면, 장애 없다는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어디를 다녀온다고 할 적에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걱정스러운가요. 자동차가 얼마나 싱싱 달리고, 길섶은 얼마나 좁으며, 자동차 배기가스는 얼마나 고약한가요. 거님길에는 가게에서 내놓은 짐이나 전봇대나 길알림판이나 버스정류소나, 걸림돌이 얼마나 많은가요.


  이름이란 대수롭지 않기에, ‘벗’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됩니다. ‘이웃’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됩니다. 그저 ‘사람’이기만 하더라도 반갑습니다. 서로 마음을 읽고 나누며 아낄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굳이 어떤 이름을 지어서 붙이지 않더라도, 슬기로운 생각을 빛내면서 사랑스러운 꿈을 북돋울 수 있으면, 반가우며 고맙고 즐거운 ‘마을사람’이 되리라 느껴요.


  나는 내 삶을 아낍니다. 내 이웃은 이녁 삶을 아낍니다. 나는 내 삶을 아끼듯 이웃 삶을 바라보면서 이웃이 스스로 아끼며 누릴 삶을 가만히 읽습니다. 이웃 또한 이녁 삶을 아끼듯 내 삶을 바라보며서 이웃 나름대로 나를 바라볼 때에 느낄 ‘내가 아끼며 누릴 삶’이 어떠한 그림인가 하고 따사롭게 마주합니다.


  삶으로 만납니다. 삶으로 사귑니다. 삶으로 어깨동무합니다.


  이름표나 계급장이나 졸업장이나 자격증으로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지 못해요. 어떤 일터에서 사람을 뽑아 쓴다 할 적에 졸업장이나 자격증으로 사람을 가리지 못해요. 얼굴을 보고 함께 지내 보아야 비로소 ‘사람을 조금씩 읽’으면서 ‘삶을 가만히 느껴’요. 사람을 읽고 삶을 느낄 때에 바야흐로 함께 걷는 길을 생각합니다. 함께 나눌 일을 생각하고, 함께 즐길 꿈을 생각해요.


- “뭐든 간에 린 너는 좀더 욕심을 부렸으면 좋겠어. 아직 젊잖아! 보호자 모임 때도 네 아버지가 무척 걱정하더라고.” (123쪽)
- “그냥 바래다 주라 그래.” “다이키치, 그게 더 걱정 안 돼?” “엉? 전혀!” “무슨 일 생길 거란 생각은 안 들어?” “무슨 일은. 무슨 일이 생겨도 이제 고등학생이잖아? 스스로 판단해.” (128∼129쪽)
- “네 생일 케이크 사러 갈 건데, 직접 고를래?” “아, 오늘. 깜빡했다.” (189쪽)


  우니타 유미 님 만화책 《토끼 드롭스》(애니북스,2011) 여섯째 권을 읽으며 ‘벗’이란 무엇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소꿉벗을 헤아리고, 삶벗을 헤아립니다. 마음벗을 헤아리고, 사랑벗을 헤아립니다.


  벗 가운데에는 글벗이 있어요. 그림벗이나 사진벗이 있습니다. 생각을 함께 북돋우거나 살찌우는 생각벗이 있을 테지요. 일벗과 놀이벗이 있어요.


  어떤 이는 사랑놀이 할 생각으로 사랑벗만 찾아 헤맬는지 모르는데, 사랑놀이라고 하면서 살섞기에만 눈길을 둔다면, 이는 사랑놀이 아닌 살섞기가 될 뿐이에요. 살섞기하고 사랑놀이는 다르니까요. 이러면 사랑벗 아닌 살벗쯤 된다 하겠지요.


  누군가는 배움벗을 찾으리라 생각해요. 누군가는 꿈벗을 바랄 테고, 누군가는 이야기벗을 바라겠지요. 밥을 나누는 밥벗이 있어요. 자전거벗이나 나들이벗이 있을 테며, 마을벗과 학교벗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 “아카리 선배한테서 초봉 얘길 듣다니 의외네요. 선배는 얼굴을 살리는 일 할 거 같은데.” “난 매달 정해진 월급을 받는 평범한 일을 하고 싶어! 돈 걱정이나 밥 걱정은 이제 질렸어.” (175쪽)
- ‘별로 우울해 할 틈도 없이 자기 생일파티를 자기 손으로 준비하는 린의 모습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192쪽)


  벗이란 무엇일까요. 내 벗은 나한테 무엇일까요. 나는 내 벗한테 무엇일까요. 나는 벗으로서 어떻게 삶을 일구거나 누리는가요. 내 벗은 내 벗으로서 어떻게 삶을 짓거나 즐기는가요.


  《토끼 드롭스》에 나오는 아이들이 어느새 어린이에서 푸름이로 자랐습니다. 푸름이로 자라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벗’을 차분히 돌아봅니다. 어느 철부지는 아직 사랑벗조차 아닌 살벗만 바라고, 어느 철없는 벗은 아직 삶벗이나 마음벗은 생각조차 못합니다. 어느 푸름이는 애늙은이는 아니요 철부지 또한 아닌 마음으로 ‘벗-삶벗-사랑벗-마음벗-길벗-꿈벗’ 여러 가지를 골고루 생각합니다.


  대학교를 가느냐 마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일터를 얻어 얼마나 달삯을 받느냐 또한 대수롭지 않습니다. 《토끼 드롭스》에 나오는 ‘린’은 벗을 생각합니다. 벗 가운데에서도 삶벗을 생각합니다. 삶을 나누고 사랑을 꽃피우며 꿈을 누리는 벗이란 어떠한 사람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마음속 깊이 애틋한 벗을 그립니다. 마음속 넓게 스미는 벗을 키웁니다.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며 아름다운 벗으로 자리매깁니다. 스스로 고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며 고운 벗으로 빛납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다 있대서, 집안살림 넉넉하대서, 자가용 있거나 널찍한 아파트 있대서, 학교 시험성적 높대서, 삶이 즐겁거나 아름답지 않아요.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느끼며 하루를 누릴 때에 비로소 삶이 즐겁거나 아름답습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푸름이 ‘린’이 아름답게 삶을 빛내면서 사랑을 누릴 앞길을 살포시 그려 봅니다. (4345.11.14.물.ㅎㄲㅅㄱ)

 


― 토끼 드롭스 6 (우니타 유미 글·그림,양수현 옮김,애니북스 펴냄,2011.1.28./8000원)

 

(최종규 . 2012 - 만화책 즐겨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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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62) 존재 162 : 이 아이들의 존재

 

하지만 철없고 덜렁댄다 해도 이 아이들의 존재는 정말 감사하다
《우니타 유미/양수현 옮김-토끼 드롭스 (6)》(애니북스,2011) 193쪽

 

  ‘하지만’은 ‘그러하지만’을 잘못 적은 낱말입니다. ‘그렇지만’이나 ‘그러나’나 ‘그런데’로 손질합니다. ‘정(正)말’은 ‘참말’이나 ‘매우’나 ‘참으로’나 ‘무척’으로 손보고, ‘감사(感謝)하다’는 ‘고맙다’로 손봅니다.

 

 이 아이들의 존재는 정말 감사하다
→ 이 아이들이 있어 참으로 고맙다
→ 이 아이들이 있으니 참말 고맙다
→ 이 아이들이 더없이 고맙다
→ 이 아이들이란 그야말로 고맙다
 …

 

  나는 내 옆지기가 있어 고맙습니다. 우리 집 어린 두 아이가 늘 웃고 노래하며 함께 살아가기에 고맙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이 반갑습니다. 고운 보금자리에서 서로 눈빛 밝히며 환하게 웃음꽃 피우는 삶동무가 즐겁습니다. 아이들이 있고, 사람들이 있으며, 서로서로 예쁘게 있습니다. 아름답게 ‘있는’ 넋과 얼을 사랑스레 생각해 봅니다. (4345.11.1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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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철없고 덜렁댄다 해도 이 아이들이 있어 참으로 고맙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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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어 주는 누나

 


  누나가 동생한테 그림책을 읽어 준다. 다만, 그림을 보여주며 읽혀야 읽어 주는 셈이 될 테지만, 책은 혼자 들고 머리도 혼자 박고서는 읽어 준다. 동생은 그저 그림책 껍데기만 바라보면서 누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동생은 누나 목소리만 들으면서도 재미난 듯하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한테 책을 읽힌다 할 적에도 어떤 줄거리 어떤 그림을 꼭 이러저러하게 보여주어야 재미나다거나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없지 싶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 목소리 고운 결을 듣고 싶은 마음이지 싶다. 굳이 그림을 보지 않아도 된다. 애써 그림책 줄거리를 들어야 하지 않다. 어버이 목소리를 들으면서 따순 사랑을 받아먹고픈 마음이라고 느낀다. 어버이 목소리에 깃든 너른 꿈을 받아먹고, 그림책을 찬찬히 읽는 어버이 보드라운 살결을 부비고 싶은 마음이지 싶다.


  아이들은 지식을 배우려고 태어나지 않는다. 어른들은 지식을 가르치려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 아이들은 삶을 누리고 즐기려고 태어난다. 어른들은 삶을 예쁘게 짓고 알차게 빛내려고 아이를 낳는다. (4345.11.1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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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

 


숲길 걸으며
숲내음 숲열매 숲소리
받아먹은 사람은
숲 사이에
고속도로 내지 않아요.

 

숲속 오두막
숲바람 숲하늘 숲저녁
하룻밤 묵은 사람은
숲 둘레에
송전탑 세우지 않아요.

 

숲은
나무 한 그루에서 생겨요.

 

숲은
풀 한 포기에서 태어나요.

 

숲은
내 마음속 사랑과 꿈으로
차근차근 이루어져요.

 

가을숲이
포근한 숨결로 노래합니다.

 


4345.9.1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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