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야기 찔레꽃 울타리
질 바클렘 지음, 이연향 옮김 / 마루벌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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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살아갈 보금자리는 숲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10] 질 바클렘, 《찔레꽃울타리, 봄 이야기》(마루벌,1994)

 


  시골집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아가면 온통 들과 메와 못입니다. 해창만을 메워 들로 만들기 앞서 이곳은 바다였을 테니, 예전 사람들은 이 마을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아가는 길에 너른 바다를 누렸으리라 생각합니다.


  고흥 읍내로 가 보면, 이곳에도 아파트가 조금 있습니다. 가게가 제법 있고 사람도 퍽 있습니다. 면소재지에 가 보면, 조그마한 아파트가 있거나 아파트 비슷한 작은 빌라가 있습니다.


  도시를 생각해 봅니다. 도시에서는 어디를 가나 아파트이고, 아파트 없는 데에는 빌라입니다. 도시에서 단독주택을 만나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달동네라면 모를까, 또는 마당 딸린 부잣집 있는 동네라면 모를까, 도시사람은 이웃을 발밑에 두거나 머리 위에 두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촘촘히 모인 도시에서는 땅뙈기 한 평 장만해서 살아가기란 몹시 힘겹습니다. 도시사람은 누구나 ‘내 집 장만’을 꿈꾼다 하지만, 막상 도시에서는 ‘내 집’이라 할 만한 데는 거의 없다고 느껴요. 하늘에 붕 뜬 시멘트덩어리가 ‘내 집’이 될 수 없거든요. 오늘은 그곳에서 숨을 쉰다 하더라도 모레나 글피에는 이 시멘트덩어리가 허물어질 수 있어요. 아니, 하늘에 붕 뜬 시멘트덩어리는 쉰 해조차 버티지 못해요. 백 해나 이백 해를 내다보며 짓는 아파트는 하나도 없어요.


  돌이켜보면, 도시에서 짓는 모든 집과 건물은 백 해는커녕 쉰 해조차 버티지 못합니다. 무척 튼튼하거나 우람하다 싶게 이것저것 짓거나 세운다 하더라도 고작 쉰 해만 지나더라도 부질없는 먼지덩어리라고 느껴요. 땅을 밟지 않는 집이라면, 흙을 디딜 수 없는 건물이라면, 숲과 어우러지지 못하는 문명이라면, 모두 얼마 안 지나 한 줌 잿더미로 바뀌리라 느껴요. 나무 한 그루 심을 수 없을 때에는 집일 수 없다고 느껴요. 내 나무를 심고, 아이들 나무가 자라며, 마을나무가 곱게 설 때라야 비로소 사랑스러운 보금자리가 되리라 느껴요.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사람 목숨이 기껏 백 살’이라고 여겨요. 기껏 백 살을 살아가는데 ‘땅 밟고 흙 디디는 집’이 무어 대수로운가 하고 여기는구나 싶어요. 고작 백 살쯤 살다가 죽을 생각을 하기에, 시멘트덩어리로 짓는 집이라 하든, 나무 한 그루 못 심는 집이든, 하늘에 붕 뜬 집이든,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는구나 싶어요. 더 빨리 돈을 벌거나 더 많이 돈을 버는 데에만 마음을 기울이고 말아요.


.. 마타리 부부는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떡갈나무 성에서 살아요. 겉에서 보기엔 평범한 떡갈나무 같지만 텅 빈 기둥 안이, 아주 아름다운 방들로 꽉 찬 훌륭한 성이랍니다 ..  (12쪽)

 


  시골마을 어르신들이 나락을 거두고 마늘을 심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이웃마을에서는 바닷물고기를 낚고, 김과 미역과 매생이를 돌봅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우리 마을이나 이웃한 마을에서 지내는 분들 스스로 먹고 누릴 만한 먹을거리를 헤아린다면, 땅은 아주 조금만 부쳐도 되고, 바닷일 또한 아주 조금만 해도 돼요. 내다 팔아서 돈을 만들고, 돈을 만들어 살림을 북돋운다고 여기기에 땅을 더 넓게 부치고, 바닷일은 더 많이 꾀해요.


  그런데, 시골에서도 돈은 얼마나 많이 벌어야 시골살이를 이룰까요. 시골사람은 시골에서 땅과 바다와 뻘을 얼마나 삭삭 훑거나 긁어야 밥벌이를 할 만할까요.


  도시가 있기에 시골사람은 곡식과 물고기와 갯것을 내다 팔 수 있습니다. 도시사람은 스스로 흙을 일구지 않으니까, 곡식도 물고기도 갯것도 푸성귀도 모두 사다 먹습니다. 화학비료를 친 곡식이나 푸성귀이든, 똥오줌 거름으로 지은 곡식이나 푸성귀이든, 도시사람으로서는 돈을 주고 사다 먹을밖에 없습니다. 어느 모로 보면, 도시가 없으면 시골사람도 ‘밥벌이를 못한다’ 할 만해요.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살찌우는 살림살이일까 궁금해요. 도시사람은 흙 한 줌 만질 일 없고 땅 한 뙈기 밟을 일 없이 돈만 벌어서 사다 먹기만 해도 될까 궁금해요. 시골사람은 흙을 늘 만지고 땅을 언제나 밟는다지만, 도시사람 먹을거리를 대주느라 등허리가 휘도록 일에 시달려야 할까 궁금해요.


  무엇을 하려고 돈을 벌어야 할까요. 자가용을 굴리려고? 아파트를 사려고? 손전화 기계를 쓰려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영화를 보려고? 나라밖 여행을 다녀오려고? 책을 사서 읽으려고? 이름난 맛집에 가려고? 이름있는 옷을 입으려고?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야 하고, 아이들이 대학교에 가야 하니까, 이래저래 돈을 벌어야 하나요? 아이들을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만들려고 돈을 벌어야 하나요?


  오늘날 대학등록금이 한 해 천만 원이라 하는데, 유치원 보내는 삯도 한 해에 오백만 원 가볍게 들어요. 아이 하나마다 어릴 적부터 한 해에 오백만 원이나 천만 원쯤 우습게 쓴다는 한국 사회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참말 왜 아이 하나에 해마다 거의 천만 원이나 들여 학교에 보내거나 학원에 보내거나 해야 하나요? 어버이들은 왜 이런 돈을 벌려고 고되게 등허리가 휘어야 할까요.


  대학등록금 천만 원을 벌어서 아이들을 대학교에 보내야 할까 궁금해요. 아이들을 대학교에 안 보내고 등록금 천만 원을 안 벌면 되지 않을까 궁금해요. 등록금 벌려고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지내기보다, 시골집에서 ‘내 먹을거리’를 손수 일구면 한 해 삶이 온통 웃음과 즐거움이 되지 않을까 궁금해요. 써야 할 돈을 버느라 삶을 흘릴 노릇이 아니고, 누려야 할 삶을 누리려고 하루를 빛낼 노릇이지 싶어요.


.. 드디어 먼 숲 뒤로 해가 기울고, 쌀쌀한 바람이 들판 위로 불어 옵니다. 집에 갈 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날 밤, 달님이 높이 떠올랐을 때 찔레꽃울타리 마을은 고요하고 평화로웠습니다. 들쥐들은 이제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  (32쪽)

 


  질 바클렘 님이 빚은 그림책 《찔레꽃울타리, 봄 이야기》(마루벌,1994)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아갈 보금자리는 숲이라고 느낍니다. 사람이 보금자리로 삼을 곳은 아파트가 될 수 없고, 사람이 사람다이 지낼 터로는 도시가 될 수 없다고 느낍니다. 흙 한 줌이 풀포기를 키우고 꽃송이를 낳는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하는 아파트와 도시는 어느 누구한테도 보금자리가 될 만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누워서 잠을 잘 수 있는 데가 보금자리이지 않아요. 공부할 방이 있다든지 마루에 텔레비전이 놓인다든지 하는 데가 집이지 않아요. 폭신한 걸상을 놓고 널찍한 침대를 놓으며 커다란 옷장이 있는 데가 집일까 알쏭달쏭해요.


  집이란, 삶을 이루는 곳이요, 보금자리란, 삶을 누리는 곳이라고 느껴요. 마을이란, 나와 이웃이 예쁘게 어우러지는 즐거운 터전이라고 느껴요. ‘나라’라고 한다면, 경제성장율이라든지 무슨무슨 숫자와 통계로 따지는 쳇바퀴나 톱니바퀴가 아니라, 보금자리가 모여 마을을 이루도록 이끄는 조그마한 ‘꽃울타리’쯤 되는 그림이라고 느껴요.


  경찰도 군대도 공무원도 법관도 부질없어요. 국회의원도 시장도 군수도 덧없어요. 병원도 보건소도 진료소도 쓸모없어요. 공장도 발전소도 놀이공원도 쓸데없어요. 사람이 살아갈 때에 곁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봐요. 이른바 ‘외딴섬에서 살아간다’고 헤아려 보셔요. 외딴섬에서 우리는 어떤 연장을 갖고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삶을 누릴 때에 즐거울까 하고 떠올려 보셔요.


  시골마을 논밭에는 고속도로도 국도도 건널목도 신호등도 있을 까닭이 없어요. 교통순경도 경찰도 형사도 있을 까닭이 없어요. 법이 있어야 농사를 짓는 사람은 없어요. 법을 몰라도 즐거이 나락을 일구고 바닷물고기를 낚어요. 대학교 졸업장으로 감을 따는 사람은 없어요. 토익점수를 내밀며 냉이를 캐는 사람은 없어요. 김을 매고 마늘을 심는데 군인이 총을 들 까닭이 없어요. 스스로 흙을 일구는 삶이라면 군대도 정치도 경제도 있을 까닭이 없어요. 있어야 한다면 두레일꾼이 있어야겠지요. 있어야 한다면, 너른 들판을 뛰놀 아이들이 있어야겠지요.


  숲에서는 숲만 있으면 돼요. 숲에 깃드는 사람한테는 사랑 하나 있으면 돼요. 사랑스레 나무를 어루만지고, 사랑스레 풀을 뜯으며, 사랑스레 집을 짓고 살아요. 자동차도 비행기도 기차도 쓸 일이 없어요. 두 다리로 숲을 거닐면 넉넉해요. 온몸으로 바람을 누려요. 온마음으로 숲내음을 맡아요.


  가을날 아침에 나무줄기에 볼을 가만히 대 보셔요. 가을볕 받는 나무마다 따사로운 숨결을 나한테 나누어 줘요. 멧새가 노래하고, 바닷물결이 춤추며, 구름이 하늘을 예쁘게 그려요. (4345.11.15.나무.ㅎㄲㅅㄱ)

 


― 찔레꽃울타리, 봄 이야기 (질 바클렘 글·그림,이연향 옮김,마루벌 펴냄,1994.10.1/1만 원)

 

(최종규 . 2012 - 그림책 읽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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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바람 글쓰기

 


  바람이 드세게 부는 바닷가에 선다. 바닷바람을 맞는다. 저 먼 바다는 남해가 아닌 태평양이다. 이 나라 땅덩이쯤 가볍게 삼킬 만큼 널따란 바다이다. 바닷속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이루어지며 바람이 불까. 아이들이 훌쩍거리는 코를 훔치려는 손닦개를 주머니에서 꺼내다가 살짝 놓치기라도 하면, 이 드센 바닷바람은 휘리릭 빼앗아 저 바다로 가져갈 테지. 코를 훌쩍이는 아이들은 드센 바닷바람을 쐬면서도 씩씩하게 논다. 춥다는 말도 바람에 흔들린다는 말도 없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뛰고, 바람이 드세면 드센 대로 논다.


  이야기가 흐른다. 삶이 흐른다. 하루하루 즐거운 나날이 이어지기에 바람을 맞이할 수 있다. 무엇을 바라보고 어떻게 누리며 어디에서 즐기는가를 떠올리도록 이끄는 바람이 분다. 바람은 모든 소리를 잠재운다.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이든, 손전화 울리는 소리이든, 사람들 떠드는 소리이든, 공사장 기계 소리이든, 어떠한 소리라도 이 바람소리 앞에서는 덧없는 먼지조각일 뿐이다. 바람은 숲을 살리고, 들을 살리며, 메를 살린다. 바람은 새를 살리고, 바람은 벌레를 살리며, 바람은 나무를 살린다. 바람은 풀을 살리고, 바람은 꽃을 살리며, 바람은 사람을 살린다. 바람이 흐르지 못하는 곳에서는 푸른 숨결이 아름다이 흐드러지지 못한다. (4345.11.1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글쓰기 삶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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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돌보는 넋 (도서관일기 2012.11.13.)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한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종이책은 몇 천 권이라느니 이만 권쯤 된다느니 하는 말이 있으나, 한 사람이 종이책을 몇 권 읽을 수 있는지 어느 누구도 모릅니다. 스스로 읽은 책을 숫자로 세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나, 숫자로 세는 뜻이 부질없을 만큼 책을 읽거나 안 읽는 사람이 많아요. 따지고 보면 그래요. 내 은행계좌에 돈이 얼마나 있느냐는 대수롭지 않아요. 1억이 있든 1억 100원이 있든 9999만 원이 있든 다르지 않습니다. 100만 원이 있든 99만 원이 있든 101만 원이 있든 다르지 않아요. 곧, 내 은행계좌에 1만 원이 있거나 100만 원이 있거나 1억 원이 있거나 똑같은 셈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라 할 텐데, 책을 한 권 읽었거나 열 권 읽었거나 백 권 읽었거나 천 권 읽었거나 만 권 읽었거나 늘 같아요.


  돈을 더 많이 가졌대서 더 대단하거나 훌륭하거나 아름답거나 즐거운 삶이 되지 않습니다. 책을 더 많이 읽었대서 더 똑똑하거나 슬기롭거나 참답거나 착한 넋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벌어들인 돈을 스스로 얼마나 아름다이 나누거나 쓸 줄 아느냐에 따라 내 돈이 빛이 나거나 흐리멍덩해집니다. 스스로 읽은 책을 스스로 얼마나 삶으로 녹여서 하루하루 누리거나 즐길 수 있느냐에 따라 내 책읽기가 빛이 나거나 흐리멍덩해져요.


  느즈막한 낮나절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씨에 나로섬에서 책손님이 찾아듭니다. 낮나절이라지만 하늘이 찌푸려 어둡습니다. 우리 서재도서관은 건물 반쪽만 덩그러니 빌렸기에 전기도 물도 쓸 수 없어, 이렇게 찌푸린 날에는 창가에 서도 책을 읽기 수월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도서관에 들어와 책시렁 사이를 누비면서 책마다 풍기는 ‘곰팡내’도 맡고, 곰팡내 사이사이 깃든 ‘책을 빚은 사람 넋’을 헤아리다 보면, 책으로 누리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이 많은 책’이 아니에요. 이 책들 가운데 내 삶을 내 손으로 열도록 이끌 ‘아름다운 책 하나’ 만날 수 있으면 돼요. 곧, 도서관에는 책이 아주 많아야 하지 않습니다. 도서관에 굳이 10만 권 100만 권 1000만 권을 갖추어야 하지 않아요. 다문 열 권이나 백 권을 갖춘 조그마한 도서관이라 하더라도, 이 도서관을 찾아온 사람들 마음을 살찌우거나 북돋울 만한 ‘이야기가 있을’ 때에 비로소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걸맞아요.


  으리으리하거나 번듯한 건물을 세워야 도서관이 되지 않아요. 사서자격증 가진 일꾼 여럿이 지켜야 도서관이 되지 않아요. 컴퓨터나 인터넷으로 책을 살펴보거나 찾아볼 수 있어야 도서관이 되지 않아요. 도서관이 되려면 오직 한 가지를 갖추어야 해요. 책에 깃든 넋을 책손 누구라도 한 가지씩 받아먹으면서 책손 스스로 삶을 살찌우는 길을 즐거이 열도록 도을 수 있어야 도서관이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책방이라 한다면, 새책방이든 헌책방이든 ‘책을 사서 읽을 책손’이 책 하나 장만하면서 스스로 삶길을 열도록 돕는 책을 갖춘 데가 ‘책방’이랄 수 있어요. 책을 돌보는 넋이란, 서재도서관을 열어 이웃들한테 이런 책 저런 책 마음껏 돌아보고 만지도록 하는 넋이란, 살가운 이야기 한 자락으로 서로 사랑을 일구는 징검다리가 되듯, 살가운 책 한 권으로 서로 꿈을 이루는 징검돌이 되고픈 빛 한 줄기에 있습니다. (ㅎㄲㅅㄱ)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 도서관 지킴이 되어 주는 분들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1.341.7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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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치를 말리는 마음

 


  멸치 말리기를 구경한다. 우리 네 식구를 자동차에 태워 고흥마실을 시켜 주는 분이 소록도 다리를 지나고 거금도 다리를 지난 다음, 금산면(거금) 금진마을에서 살짝 멈춘다. 거금다리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자리라 해서 살짝 멈추는데, 다리보다 다리 곁 작은 집에서 멸치를 삶아 햇볕에 말리는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내 눈에 환하게 들어온다. 그동안 멸치는 많이 먹기는 했어도 멸치를 어떻게 말리는지 곁에서 지켜본 적은 없다. 바닷마을 아저씨는 가마솥에 물을 펄펄 끓이고 소금을 부은 다음 소금물에 멸치를 삶는단다. 그냥 말린다든지 소금물에 삶지 않고 말리면 멸치가 다 바스라진단다. 아저씨는 ‘값싼 중국 소금’을 안 쓰고 ‘비싼 무안 소금’을 쓴단다. 아저씨 스스로 멸치를 삶아서 먹어 볼 때에 맛이 다르니, 아무 소금이나 쓸 수 없겠지. 내다 팔기만 하는 멸치가 아니라, 집에서도 먹고 이웃한테도 주며 즐겁게 나눌 먹을거리로 여기니까, 스스로 좋다고 여기는 소금을 찾아서 쓸 테지.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상큼하다. 바다는 파랗고 멸치는 반짝반짝 빛난다. 햇살은 보드랍고 햇볕은 따스하다. 바다에서 건져 막 삶아 말리는 멸치는 반들반들 어여삐 빛난다. 바람이 실어 나르는 바다내음 사이사이 멸치내음이 섞인다. 큰아이가 멸치 하나 슬쩍 집어 입에 넣고는 살살 씹더니 “맛없어!” 하고는 아버지더러 먹으라고 내민다. 아버지가 입에 넣고 천천히 씹는다. 씹지 않아도 입에서 녹는다. 바다 한 모금 먹으며 파랗게 젖는다. (4345.1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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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전 책읽기

 


  굳이 스스로 생각을 하지 않아도 모든 이야기가 술술 흐르기에,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드러누워서, 잠결에, 한손에 과자나 술잔을 들고서, 밥을 먹는 동안,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텔레비전은 혼자서 온갖 이야기를 끝없이 들려줍니다. 귀만 열면 됩니다.


  이리하여, 텔레비전을 보면 볼수록 사람들은 생각을 차츰 잊는데, 나중에는 아예 ‘스스로 삶을 생각하기’를 잃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모두 들려준다고 여겨,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아예 모르거나 믿지 않아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야기만 알거나 믿어요. 텔레비전 바깥에서 흐르는 삶은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들여다보지 못하며 생각하지 못합니다.


  텔레비전과 한몸이 되고 말아, 끝내 생각하는 힘이나 마음을 잊거나 잃은 사람이 되면, 책을 읽을 수 없겠지요. 어쩌다가 어떤 종이책 하나 손에 쥔다 하더라도, 생각주머니 없는 사람이 책을 손에 쥘 적에는 줄거리 훑기나 글자 살피기를 넘어서지 않아요. 책읽기란 ‘글쓴이 생각 읽기’인데, 글쓴이가 어떤 넋으로 책 하나를 온 슬기를 그러모아 엮었는가 하는 대목을 생각하거나 살피지 못해요.

  ‘글쓴이 생각 읽기’인 책읽기이기에, 책읽기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을 북돋우는 길을 천천히 찾습니다. 생각을 스스로 북돋우면서 내 삶을 스스로 살찌우는 길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그런데 ‘생각을 읽는 책’이 아닌 ‘생각을 잊도록 하는 텔레비전’으로 조금씩 기울어지면, ‘생각을 잊도록 하는 텔레비전’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두면, 스스로 깊이 사랑하는 길하고 등을 지고, 스스로 넓게 꿈꾸는 자리하고 고개를 돌려요. 이제 ‘이야기를 엮는 사람’ 삶하고도 멀어집니다. 내 이웃과 동무가 엮는 이야기를 느끼지 못하고, 나 스스로 엮는 이야기를 알아채지 못해요.


  텔레비전이 사람살이를 망가뜨리듯, 학교교육이 사람살이를 망가뜨립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밝히는 배움뜻이라 한다면 사람살이를 북돋우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 학교교육은 아이들한테 ‘대학입시 지식조각’만 열두 해에 걸쳐 집어넣은 다음, 대학교 네 해 동안 ‘도시에서 회사원 되는 지식조각’을 새삼스레 집어넣어요. 곧, 지식조각만 머리에 그득 차는 바람에, ‘스스로 생각하며 일구는 삶’은 도무지 깨닫지 못하다가는 그만 ‘내 마음기둥’이나 ‘내 마음밭’이 무엇인가를 느끼지 못해요.


  생각이 죽는 사람은 마음이 죽고 사랑이 죽으며 꿈이 죽습니다. 생각이 죽는 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웃음이 죽고 기쁨이 죽으며 신(신나는 놀이)이 죽습니다. 남이 시키는 대로 구릅니다. 남이 말하는 대로 듣습니다. 남이 보여주는 대로 믿습니다. 여기에서 ‘남’이란 ‘텔레비전’이거나 ‘손윗사람’이거나 ‘권력자’입니다. 생각이 사는 사람은 ‘내’가 마음속에서 말하는 소리를 듣고, ‘내가’ 가슴속에서 노래하는 꿈을 듣습니다.


  여러모로 말썽거리가 많아 ‘ㅈㅈㄷ신문 없애기’라든지 ‘방송 뜯어고치기’를 소리높여 외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신문을 없애거나 방송을 뜯어고친다 하더라도 말썽거리는 사라지지 않아요. 가장 큰 말썽거리는 바로 내 마음이거든요. 내 마음이 텔레비전 앞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내 눈길이 신문글에 휘둘리지 말아야 해요. 내 마음은 내 삶이 베푸는 기운으로 살아야 해요. 내 눈길은 내 사랑이 보여주는 모습으로 빛나야 해요.


  이것을 없애거나 저것을 몰아내지 않아도 돼요. 나 스스로 새 사람이 되고, 나 스스로 아름다움을 찾으며, 나 스스로 삶을 즐거이 누리면 돼요. 텃밭을 일구면 내 삶이 바뀌고, 내 삶이 바뀌면 마을이 바뀌며, 마을이 바뀌면 나라가 바뀌어요. 내가 내 삶자리에서 내 삶을 아름답게 누리지 못하면, 마을도 나라도 다람쥐 쳇바퀴로 흐를 뿐이에요. 삶을 읽는 책을 느껴야 해요. (4345.1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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