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스로 알아내는 만화책도 있으나,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도무지 알지 못하다가 끝내 절판되도록 모르는 만화가 있다. 이 만화책을 소개해 준 이가 있어, 2009년에 나왔다는 만화책 하나 이제서야 곰곰이 헤아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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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메라이
시마다 토라노스케 글 그림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10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2012년 11월 16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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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맛

 


  책 한 권을 읽더라도 책맛을 깊이 느끼면 삶맛 또한 알뜰히 느낍니다. 책 한 줄을 읽더라도 책맛을 널리 느끼면 삶맛 또한 살가이 느낍니다. 책 백 권이나 책 천 권을 읽더라도 책맛을 고루 느끼면 삶맛 또한 예쁘게 느낍니다.


  책 한 권을 읽기는 읽되, 책맛이 아닌 ‘책 줄거리’나 ‘책 지식’으로 기울어진다면, 책맛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맙니다. 책 한 줄을 슥 훑기는 하되, 책맛이 아닌 ‘책 정보’만 얼추 살피면, 정작 책맛을 하나도 못 느끼고 맙니다.


  책은 많이 읽어도 되고 적게 읽어도 됩니다. 책은 날마다 읽어도 되고 날마다 안 읽어도 됩니다. 글은 일찍 깨쳐도 되나 글을 영 모르는 채 살아도 됩니다.


  글을 몰라 부끄러울 사람은 없습니다. 책을 안 읽어 부끄러울 사람은 없습니다. 글이나 책을 모른대서 부끄러워야 한다면, 대학교를 안 다녔거나 나라밖으로 배우러 다녀오지 않은 사람 또한 부끄러워야 합니다. 고등학교만 마쳤거나 초등학교만 마친 사람도 부끄러워야 합니다. 또한, 정규직 아닌 비정규직일 때에도 부끄러워야 하고, 장애인이나 따돌림받는 사람이라 할 때에도 부끄러워야 하겠지요.


  사람은 책을 읽기 앞서 사람이어야 합니다. 스스로 사람이지 않고서 책을 먼저 손에 쥔다면 아름다운 꿈을 누리지 못합니다. 언제나 가장 먼저 스스로 사람인 줄 느껴야 합니다. 사람다움을 갖춘 뒤에라야 비로소 책을 읽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사람다움을 갖추지 않았다면 책 만 권을 읽더라도 사랑이나 꿈이나 웃음을 누리지 못합니다.


  책맛을 느끼고 싶다면 스스로 삶을 누려야 합니다. 삶을 즐겁게 누리고, 삶을 예쁘게 누리며, 삶을 살가이 누릴 때에, 시나브로 내 넋이 싱그러이 피어납니다. 내 넋이 싱그러이 피어날 때에, 천천히 책 한 권 읽을 수 있고, 천천히 책 한 권 읽으면서 내 삶길을 곰곰이 되짚습니다.


  책을 읽고 싶으면 읽되, 맨 먼저 사람이 될 노릇입니다. 종이책을 손에 쥐고프면 손에 쥐되, 밭에 고구마싹을 묻어 고구마를 키운 다음 즐겁게 고구마를 캐 볼 노릇입니다. 씨감자를 칼로 썰어 재를 묻힌 다음 내 작은 텃밭에 심어 봐요. 씨감자에서 맺힌 알을 즐겁게 거두어 봐요. 콩 한 알 심어서 몇 알을 거둘 수 있는지 살펴봐요. 볍씨 몇 알 건사해서 집에서 벼를 심어 봐요. 내 아름다운 날을 누리고, 내 사랑스러운 넋을 누리며, 내 밝은 꿈을 누려요. (4345.11.1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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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선물 - 화가 김원숙의 이야기하는 붓
김원숙 지음 / 아트북스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꿈을 그리는 그림
 [책읽기 삶읽기 121] 김원숙, 《그림 선물》(아트북스,2011)


 

  그림을 그리는 김원숙 님은 《그림 선물》(아트북스,2011)이라는 책에서 당신 그림은 당신 꿈을 그리는 일이라고 밝힙니다. 꿈이 있기에 꿈을 꾸고, 꿈을 꾸기에 꿈을 그린다고 할까요. 곧, 그림쟁이라 하든 그림쟁이가 아니라 하든, 그림을 그리는 이는 누구나 이녁 꿈을 그립니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든 어른이 그림을 그리든 누구라도 꿈을 그린다 할 만해요.


  돌이켜보면, 꿈이 아니라면 그릴 수 없습니다. 꿈을 꾸기에 그림을 그립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그림을 못 그립니다. 꿈이 없는 사람도 종이와 붓을 장만해서 무언가 슥슥삭삭하기는 할 텐데, 슥슥삭삭하는 일이 그림이 되지는 않아요. 한마디로 ‘슥삭질’이나 ‘슥슥삭삭’은 될 테지만, 이밖에 달리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림을 그리는 이한테는 ‘그림그리기 = 꿈그리기’이고, 글을 쓰는 이한테는 ‘글쓰기 = 꿈쓰기’입니다. 사진을 찍는 이라면 ‘사진찍기 = 꿈찍기’요, 노래를 부르는 이라면 ‘노래부르기 = 꿈부르기’예요.


  그래서 나는 아무 노래나 섣불리 부르지 못합니다. 내가 부르는 노래는 내 꿈을 부르는 셈이기에, 노래가락과 노래말을 찬찬히 살펴요. 노래가락이 달콤하거나 아름답다고 느끼더라도, 노래말이 어둡거나 슬프다면 내 삶이나 꿈 또한 어둡거나 슬프기를 바라는 셈이 되기에, 어둡거나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는 한편, 이런 노래를 불러야 한다면 노래말을 고쳐서 불러요.


.. 아무래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사랑인 것을 … 아, 정답이 없구나. 느낌대로 그리기만 하면 그게 정답인 거구나, 틀린 답이란 게 없구나 … 나는 꿈을 그린다. 내 그림은 모두가 다 꿈이다. 아니, 모든 예술가는 꿈을 그리고 쓰고 노래한다 ..  (20, 157, 167쪽)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마다 그리고픈 그림을 그릴 뿐이기에 잘 그리는 그림이나 못 그리는 그림은 없어요. 그림 역사에 이름을 남겼기에 잘 그린 그림이 되지 않습니다. 미술관에 걸리거나 박물관에서 건사하기에 잘 그린 그림이 될 수 없습니다. 비싸다 싶은 값으로 사고팔리니까 잘 그린 그림이 되지 않아요.


  어떤 그림이든 이 그림을 그린 사람 삶과 넋과 꿈이 담겨요. 그림을 읽는 사람은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어떤 삶을 누리며 어떤 넋을 나누었고 어떤 꿈을 이루는가를 하나하나 읽습니다. ‘유행’이나 ‘사조’나 ‘기법’을 읽을 사람은 없어요.


  다만, 비평이나 평론을 하는 이 가운데에는 ‘그림읽기’ 아닌 ‘유행읽기’나 ‘기법읽기’에 휘둘리는 분이 있어요. 유행이나 사조나 기법을 밝혀야 마치 그림읽기가 되는 듯 잘못 알기 때문인데, 대학교에서 이처럼 가르치니 어쩔 수 없어요. 그림을 그린 이가 어떤 삶을 누리면서 어떤 꿈을 꾸느냐를 읽어야 비로소 그림읽기인데, 엉뚱한 다리를 짚는달까요.


  신문읽기이든 문화읽기이든 늘 매한가지입니다. 정보나 줄거리를 읽으려고 신문이나 문화를 읽지 않아요. 신문에 깃든 삶을 읽거나 문화에 서린 넋을 읽으려고 신문이나 문화를 읽어요.


  누군가는 삶도 넋도 꿈도 없이 오직 재미로만 영화를 만들거나 글을 만들거나 그림을 만들기도 해요. 이렇게 만드는 영화나 글이나 그림은, 이러한 영화나 글이나 그림대로 뜻이 있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러한 뜻이란 무엇일까 궁금해요. 삶도 없고 넋도 없으며 꿈도 없는데, 재미만 있으면 무엇할까 궁금해요.


.. 내 속에 이런 쓰레기통이 들어 있었다니. 한심하기 그지없이 들리던 온갖 시어머니 상들은 내 속에 일던 바람들에 비하면 온화한 것이었다 … 세상살이를 왜곡 없이 수용하되 노예가 되지 않는 창의성, 현실의 앞뒤, 위아래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크고 깊은 눈, 또 삶을 사랑하고 더 아름답게, 즐겁게 살려는 용감한 노력들 … 그렇다고 지금 대단한 부자가 된 건 아니지만, 이전에 안타까워하던 만큼은 가지게 됐는데도, 기대한 만큼의 편안함은 오지 않았다. 내가 인생의 큰 행복을 돈에다 걸 만큼 어리석지는 않지만, 그저 불편하고 거추장스럽던 삶의 여건 몇 가지 정도는 나아질 거라 믿었었나 보다. 나 자신과 돈, 둘 다에게 큰 실망이다 ..  (71, 177, 235쪽)


  그림을 팔아 돈을 번대서 즐거울 수 없습니다. 돈벌기를 즐긴다면 그림을 팔아 돈을 벌 때에 즐거울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림을 즐겁게 그리고픈 이라면, 그림을 그려 돈을 벌든 안 벌든 대수롭지 않아요. 그림을 그려야 즐겁고, 그림을 누려야 즐거워요.


  아이들이 즐겁게 먹을 밥을 차려서 밥상에 올리며 즐겁습니다. 무언가 더 값진 밥을 차릴 때에 즐겁지 않아요. 배부르게 먹고, 고맙게 먹으며, 기쁘게 먹으면 넉넉해요. 어떤 맛집을 찾아갈 때에 즐겁지 않아요. 집에서 내가 손수 차려서 나누는 밥이면 넉넉해요.


  아이들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어도 되지만, 그림책 없이 들길을 걷거나 숲속에서 하늘바라기를 해도 즐거워요. 마당에서 별하늘을 누린다든지, 텃밭에서 풀을 함께 뜯어서 먹어도 즐겁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늘 풀을 뜯어먹으니, 아이들도 곧잘 어디에서나 스스로 풀을 뜯어서 입에 넣곤 합니다. 아이들 스스로 풀맛을 헤아립니다. 아이들 스스로 풀 한 포기에 감도는 햇볕과 바람을 헤아립니다.


  나는 어버이로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나는 어버이로서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까요. 아이들이 도시에서 이름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가도록 등을 밀어야 하나요. 아이들이 서울에 있는 이름난 대학교에 잘 붙도록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닦달해야 하나요.


.. 웅장한 유적지와 박물관 들엔 가는 곳마다 죽음이 가득했다 … 한 문제 차이로 떨어졌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이끼가 아름답게 끼어 있는 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찌 보면 둘 다 맞는 견해인데도 정답은 하나여야 하는 세상이 싫었다 … 화가인 나에게 많은 사람들은 “나는 그림에 대해 잘 모르지만……”으로 말문을 뗀다. 나는 건강한 관객들에게 그렇게 자신 없는 말을 하게 만든 도도한 현대 미술세계가 참 안타깝다 ..  (126, 161, 210쪽)


  나는 시골에서 꿈을 그립니다. 네 식구 시골마을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꿈을 그립니다. 낮에는 환한 햇살을 바라보며 꿈을 그립니다. 밤에는 새까만 하늘에 초롱초롱 빛나는 별을 그리며 꿈을 보듬습니다.


  재주 많은 사람도 나쁘지는 않다 할 테지만, 재주보다는 웃음이 환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솜씨 뛰어난 사람도 나쁘지 않다 할 테지만, 솜씨보다는 사랑이 맑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는 내 꿈을 내 글에 담습니다. 나는 내 꿈을 사진으로 옮깁니다. 나는 내 꿈을 온몸으로 살아냅니다. 나는 내 꿈에 따라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아이들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하루가 저뭅니다. 늦가을 바람이 선선합니다. (4345.11.15.나무.ㅎㄲㅅㄱ)


― 그림 선물 (김원숙 글·그림,아트북스 펴냄,2011.9.30./16000원)

 

(최종규 . 2012 - 책읽기 삶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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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음표 한자말 174 : 조망(眺望)


지혜의 신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에 날개를 펴듯이 변방은 변방 특유의 조망(眺望)을 가지고 있었다
《변방을 찾아서》(돌베개,2012) 13쪽

 

  “지혜(智慧)의 신 미네르바의 부엉이가”는 “슬기를 일컫는 신 미네르바 부엉이가”나 “슬기로운 신 미네르바 부엉이가”로 손볼 수 있습니다. ‘황혼(黃昏)’은 ‘저물녘’이나 ‘해거름’이나 ‘해질녘’이나 ‘저녁노을’로 다듬고, “변방(邊方) 특유(特有)의”는 “변방다운”이나 “시골다운”이나 “두메다운”이나 “언저리다운”이나 “둘레다운”으로 다듬습니다. “가지고 있었다”는 “있었다”나 “보여주었다”나 “드러냈다”로 손질합니다.


  한자말 ‘조망(眺望)’은 “먼 곳을 바라봄. 또는 그런 경치”를 뜻한다고 합니다. 다시금 ‘경치(景致)’라는 낱말뜻을 찾아보면 “산이나 들, 강, 바다 따위의 자연이나 지역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곧, ‘경치 = 모습’인 셈이요, ‘조망’ 또한 ‘모습’을 가리키는 낱말이로구나 싶습니다. 한국말 ‘모습’을 한자말로는 ‘조망’이나 ‘경치’로 적는다고 할 만해요.

 

 변방 특유의 조망(眺望)을 가지고 있었다
→ 시골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 두메다운 모습이 있었다
→ 언저리다운 빛을 드러냈다
→ 시골다운 얼굴이었다
→ 두메다웠다
 …

 

  보기글을 쓰신 분 생각으로는 ‘조망’이라는 한자말이 당신 뜻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런데 한글로만 적어서는 당신 뜻이 제대로 드러난다고는 느끼지 못해 묶음표를 새로 쳐서 ‘眺望’이라고 덧붙였구나 싶어요.


  글이란 글을 쓰는 사람 넋을 보여주기에, 이와 같이 쓸 수도 있고, 이와 달리 쓸 수도 있어요. 누군가는 ‘조망’이나 ‘조망(眺望)’처럼 글을 써야 이녁 생각을 남들한테 펼치지만, 누군가는 ‘모습-얼굴-얼굴빛-빛-무늬-결’ 같은 낱말로 이녁 생각을 이웃과 주고받아요.


  살아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글을 쓰는 모습이 됩니다. 생각하는 모습이 곧바로 글매무새가 됩니다. 삶이 넋으로 드러나고, 넋이 말로 나타납니다. (4345.11.15.나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슬기를 나타내는 신 미네르바 부엉이가 저물녘에 날개를 펴듯이, 시골은 시골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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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아이 재우는 마음

 


  옆지기가 집에 있어도 집일을 도맡고, 옆지기가 집에 없어도 집일을 도맡는다. 다만, 옆지기가 집에 있으면 아이들이 어머니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지만, 옆지기가 집에 없으면 아이들이 아버지 옷자락을 잡고 늘어진다. 두 아이를 혼자 건사하면서 집일을 하고 글쓰기를 하자면 등허리가 휘고 팔다리가 늘어진다. 아이 하나를 안고 설거지를 해 보아라. 아이 하나를 업고 빨래를 해 보아라. 아이 하나를 무릎에 누여 재우며 옷가지를 개 보아라. 아이 하나를 안고 밥을 짓고 국을 끓여 보아라. 아이 하나를 업고 방바닥을 쓸고 닦아 보아라.


  집일은 가시내가 할 일이 아니요, 사내가 나누어 할 일이 아니다. 집일은 집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일인 한편, 사내이든 가시내이든 누구나 옳고 바르며 예쁘고 슬기롭게 할 줄 알아야 하는 일이다.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넋 또한, 어머니만 건사할 마음이 아니라, 아버지도 함께 가꾸며 살찌울 마음이다.


  시골에서는 젊은 아빠들 볼 일이 없어 모르겠는데, 도시에서 지낼 적에 만난 젊은 아빠들이 으레 ‘애들 똥은 도무지 못 치우겠다’고들 말하던데, 애들은 스스로 밑을 닦거나 씻을 수 있을 때까지 어버이가 밑을 닦거나 씻겨야 한다. 애들이 부끄럼을 타니까 혼자 씻겠다고 하지 않는다. 이제 혼자 씻을 만한 나이가 되었으니 혼자 씻을 뿐이다. 이때까지 어버이는 아이들을 정갈히 씻기고 알뜰히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옆지기가 집에 없는 동안 두 아이를 입히고 먹이고 씻기고 재운다. 두 아이랑 함께 놀고 코를 훔치고 투정을 받고 안아 주고 주전부리를 준다. 이마를 쓸어넘이고 이불깃을 여미고 자장노래를 부르고 옷을 갈아입힌다. 용케 두 아이가 나란히 곯아떨어진다. 참말 같은 때에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다가 색색 잠든다.


  비로소 한숨을 돌리며 물 한 잔 마신다. 나도 같이 누울까 하다가 조금 일어나서 버텨 본다. 이 아이들 저녁에 무엇을 차려서 함께 먹으면 즐거울까 어림해 본다. 이제 가을햇살 뉘엿뉘엿 기울 테니까 빨래를 걷어야지. 걷은 빨래는 큰아이하고 함께 갤까. 그러나 큰아이가 여러 날 몸앓이를 하는걸.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씩씩하게 훌훌 털고 일어나 여느 때처럼 개구지게 온 마을 휘휘 젓고 뛰놀기를 빈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놀자. (4345.11.1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빨래순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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