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와 ‘어린이집’
[말사랑·글꽃·삶빛 37] 학교에서 배우는 말

 


  얼추 이삼백 해쯤 앞서, 페스탈로치라는 분은 ‘어버이와 집 없이 떠도는 가난하고 외로운 아이’들을 그대로 두거나 모르는 척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제법 있는 사람들만 ‘교육을 받아’ 걱정없이 살아가는 모습은 아름답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페스탈로치라는 분은 당신 모든 돈과 힘과 슬기를 그러모아서 ‘어버이와 집 없이 떠도는 가난하고 외로운 아이가 다닐 수 있는 배움집’을 마련했습니다. 이른바 ‘고아원’이라 할 수 있고 ‘초등학교’라 할 만한데, 페스탈로치라는 분이 연 ‘학교’는 ‘서로 삶을 나누고 배우는 조그마한 집’이었어요. 그래서 이곳은 ‘배움집’이라는 이름이 어울립니다.


  오늘날 지구별 곳곳에서 초등교육이 이루어집니다. 평등한 높낮이로 초등학교를 열어 누구나 기초교육을 받도록 꾀합니다. 다만,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장애 있는 아이가 느긋하게 다닐 학교는 드물어요. 장애 있는 아이가 장애 없는 아이하고 나란히 배울 수 있는 학교는 매우 드물기까지 해요. 초등교육 밑틀을 마련해서 퍼뜨린 페스탈로치 넋을 헤아린다면, 아직 한국 사회는 ‘페스탈로치 넋 발끝’에도 가 닿지 못한다고 할 만합니다. 학교 시설은 커지고 체육관이나 수영장까지 짓지만, 또 급식실이 있고 과학실과 전산실에다가 영어교실까지 있지만, 막상 ‘장애가 있거나 없거나’ 모든 아이들을 사랑으로 맞아들이는 품은 열지 못해요.


  ‘초등 기초 교육’이라는 이름을 퍼뜨린 페스탈로치는 초등교육 다음으로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중등교육으로 넘어가는 징검돌로 초등교육을 다루지 않았어요. 어버이가 없어 사랑을 못 받는 아이들이 어버이 사랑을 초등교육을 받으며 누려야 한다고 여겼어요. 지식이나 학식이나 시험공부를 초등교육에서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고, ‘한 사람이 꿈을 꾸며 사랑을 나누는 넋’을 배움집에서 익혀야 한다고 여겼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에서는 1995년까지 ‘국민학교(國民學校)’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1996년부터 ‘초등학교(初等學校)’라는 이름으로 고쳤습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이기 때문에 이름을 바꾸었는데, 교육부나 정부에서 스스로 이름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뜻있는 분들이 오래도록 꾸준히 ‘국민(國民)’이라는 이름이 어떤 뜻이요 어떻게 생긴 낱말인가를 따지면서 시민운동을 한 끝에, 교육부와 정부에서 이 목소리를 받아들여서 고쳤어요. 그러면, ‘국민’이 무슨 낱말이기에 이 낱말이 들어간 학교이름을 바꾸려 했을까요. 국어사전을 들춥니다. ‘국민’ 말풀이를 살피면,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 또는 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 나옵니다. ‘국민학교’ 말풀이도 살펴봅니다. “‘초등학교’의 전 용어”라 나옵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를 보아서는 ‘국민’이나 ‘국민학교’라는 낱말이 왜 말썽이 되는가를 알 수 없습니다. 국어사전은 백과사전이 아니니까 더 깊은 이야기를 다룰 수 없을는지 모르나, 막상 다뤄야 할 알맹이는 안 다루는구나 싶어요. 왜냐하면, ‘국민’이란, 일제강점기에 일본 천황이라는 사람이 ‘황국신민(皇國臣民)’을 간추려서 ‘국민’이라고 썼거든요. 국어사전에도 ‘황국신민’이라는 낱말이 실리기에 뜻풀이를 살피면, “일제 강점기에,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하 된 백성이라 하여 일본이 자국민을 이르던 말”이라고 나옵니다. 곧, ‘국민’이라는 한자말은 일본 한자말이면서 ‘천황을 섬기는 제국주의 일본 사람’을 일컫는 낱말이에요.


  우리들 누구나 일제강점기를 살지 않아요. 우리들 누구나 한국사람이지 일본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학교이름에 ‘국민학교’처럼 붙는 ‘국민’이란 몹시 끔찍하면서 어리석고 어처구니없어요. 교육부와 정부는 이런 이름을 해방 뒤 1995년까지 그대로 내버렸다가 사람들 커다란 목소리에 마지못해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어요.


  그러면, 이제 더 넓게 생각해 봐요. 대통령으로 뽑힌 분들은 ‘국민과의 대화’를 해요. 언제나 ‘국민 여러분’이라고 말해요. ‘국민투표’라는 말은 아직 그대로 남았어요. 학교에서 ‘국민’이라는 이름을 털어야 한다면, 다른 자리에서도 똑같이 털어야 할 텐데, 다른 자리에서는 하나도 안 털어요. 게다가 이런 말뿌리를 깨닫거나 살피거나 알아차리는 어른이 거의 없어요. 아이들은 어른들한테서 말과 넋과 삶을 배우겠지요. 그러니까, 오늘날 아이들은 오늘날 어른들처럼 ‘국민’이 무엇이요, 이런 낱말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슬기로운가를 느끼지 못해요.

  ‘국(國)’이라는 한자가 붙은 다른 낱말 또한 일제강점기에서 비롯했습니다. 꽤 많은 ‘國 무엇’은 한겨레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겨레를 짓밟거나 깔본 제국주의 넋을 드러냅니다. 이런 말은 안 써야 하고, 저런 말을 써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말 하나에 담기는 넋을 살필 노릇이요, 글 한 줄에 서리는 얼을 보아야 합니다.


  1996년에 학교이름이 ‘초등학교’로 바뀌었지만, 정작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얼른 바로잡아야 한다고 외친 이들은 ‘초등’으로 바뀌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여덟 살 어린이부터 열세 살 어린이까지 다니는 첫 배움집 이름이기에 ‘어린이학교’나 ‘어린이배움터’처럼 ‘어린이’를 생각하는 이름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중등 과정으로 넘어가는 초등 과정이 아니기에 ‘초등’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에는 가르침도 배움도 될 수 없다고, 곧 교육이 될 수 없다고 여겼어요. 그러면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걸맞다 싶은 이름은 아니겠지요. ‘대학교’로 나아가는 ‘밑학교(아래에 있는 학교)’가 아니거든요. 푸름이들이 다니며 푸른 넋과 사랑과 꿈을 키우는 마당이 중학교와 고등학교이니, ‘국민학교’를 ‘어린이학교’로 바로잡을 때에는, ‘중·고등학교’는 ‘푸름이학교’라든지 ‘푸른학교’로 바로잡아야 알맞아요.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대목까지 안 짚습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 하나를 털면 끝이라고 여길 뿐입니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찌꺼기조차 제대로 털지 못하는데, 더군다나 학교이름은 바꾼다지만,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무엇을 보고 느끼며 배울 때에 아름답게 자라는가를 생각하지 않아요. 대학바라기에 앞선 초등 교육 과정으로 바라볼 뿐인 나머지, 초등학교에 영어교실을 열잖아요. 더 일찍 지식을 가르치면 지식을 더 일찍 머릿속에 담을 뿐인 줄 깨닫지 않아요.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배우며 익힐 몸가짐이나 꿈이나 사랑은 살피지 않아요. 아이들이 즐겁게 뛰놀 운동장이나 놀이터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아요. 아이들을 학원 한 군데라도 더 보내려고 애쓸 뿐이에요. 아이들이 아이답게 고우며 맑은 눈망울이 싱그러이 빛나도록 어깨동무를 하지 않아요.


  이리하여, 초등학교에서는 교사나 학생이나 ‘말’을 말답게 못 가르치고 못 배웁니다. 말을 말답게 가르치고 배우자면, 학교는 입시싸움터여서는 안 돼요. 학교가 지식공장이나 시험공장처럼 흐른다면, 아이들은 아무런 삶도 사랑도 꿈도 배우지 못해요. 지식공장이나 시험공장처럼 학교를 굴리면, 아이들은 톱니바퀴가 되고 말아요. 공장 부속품처럼 되거나 노예처럼 되고 말아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예쁜 토박이말’을 배워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마을에서 ‘아름다운 삶’을 배워야 해요. 어른들 스스로 아름답게 일구는 삶을 언제 어디에서나 지켜보며 즐길 수 있어야 해요. 시험성적으로 금을 긋는 학교일 때에는 아이들 마음이 망가져요. 중학교 예비지식을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려 하면 아이들 꿈이 무너져요. 대학바라기를 내다보며 일찌감치 학원에 집어넣으면 아이들 사랑이 사라져요.


  어린이는 어린이다운 꿈을 키우는 말을 어른한테서 배울 때에 즐겁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다운 사랑을 나누도록 돕는 말을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을 때에 기쁩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다운 삶을 일구도록 이끄는 말을 동무하고 살가이 나눌 때에 환하게 빛납니다.


  ‘학교(學校)’란 무엇일까요. 배우는 기관인가요? 가르치는 시설인가요? 배우는 집인가요? 놀고 배우며 살아가는 마당인가요? 지난 1996년에 비록 ‘어린이학교’나 ‘어린이배움터’라는 이름으로 바뀌지 못했지만, 학교에 ‘어린이’라는 이름을 넣을 때에 아름다우며 참뜻을 살릴 수 있다고 느낀 몇몇 분들이 ‘유치원’이나 ‘유아원’ 아닌 ‘어린이집’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제는 이 ‘어린이집’ 이름마저 ‘예비 초등 교육기관’처럼 바뀌었으나, 어린이가 다닐 배움집이기에 ‘어린이집’이에요. 어린이는 놀면서 자랍니다. 어린이는 놀고 또 놀며 다시 놀면서 몸과 마음이 큽니다. 어린이한테는 놀이터가 있어야 해요. 어린이는 마당을 누려야 해요. 어른도 놀이터가 있어야 해요. 어른도 마당을 누려야 해요. 어른은 마당 한켠에서 일하고, 어린이는 마당 한켠에서 놀아야 해요. ‘어린이마당’이 이 땅에서 슬기롭고 어여쁘게 이루어지는 모습을 꿈꿉니다. (4345.11.1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국어사전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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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113] 풀이름

 


  마을 어르신한테 풀이름을 여쭈면 당신이 아는 풀이름은 이렁저렁 알려주지만, 당신이 모르는 풀이름은 이내 “몰러.” 하고 말씀합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당신이 뜯어서 먹는 풀이름은 웬만해서는 다 압니다. 굳이 안 뜯어서 안 먹는 풀이름은 딱히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없이 예쁘구나 싶은 꽃이 돌울타리 따라 죽 피었기에 마을 어르신한테 여쭈어 보면 으레 “몰러. 난 안 심었는데, 바람에 씨가 날아왔서 뿌리내렸나 봐. 꽃이 이쁘니 그냥 뒀지.” 하고 말씀합니다. 전남 고흥 어르신들은 고구마도 그냥 ‘감자’나 ‘감저’라고 말해요. 감자도 감자이고 고구마도 감자인 셈인데, 민들레이건 부추이건 마을마다 이름이 달라요. 마을 깊숙한 두메와 멧골에서는 또 두메와 멧골마다 이름이 다르고요. 어째 이리 이름이 다를까 싶으면서도, 저마다 삶자락이 다르니 저마다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는 모습이 달라, 이름도 달리 붙이겠구나 싶어요. 이를테면, 우리 집 다섯 살 큰아이는 안경 맞추러 ‘안경집’에 가고 신발 사러 ‘신발집’에 가며 자동차는 기름 넣으러 ‘기름집’에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와 옆지기는 아이한테 아무 가게이름도 안 가르쳤으나, 아이는 스스로 느낀 대로 말해요. 곧, 풀이름이라 할 때에도 표준말 이름을 달달 외워서 맞출 까닭이 없어요. 저마다 달리 살아가는 내 마을살이에 맞추고 내 보금자리를 헤아리며 ‘내가 느낀 풀이름’ 하나 붙이고 ‘내가 바라보는 꽃이름’ 하나 붙이면 돼요. 학자가 붙인 ‘민들레’ 이름이 아니요, 임금님이 붙인 ‘쑥’ 이름이 아니에요. (4345.11.1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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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사람들

 


  나를 취재하고 싶다는 전화를 가끔 받는다. 충청북도 멧골에서 살 적에도 “취재하시는 일은 좋은데, 여기까지 오셔야 하는데요.” 하고 말하면 으레 전화를 뚝 끊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더라. 전라남도 시골에서 사는 요즈음도 “취재하시려는 뜻은 고마운데, 예까지 오셔야 해요.” 하고 말하면 슬그머니 전화를 뚝 끊고는 입을 스윽 씻네.


  시골서 살아가는 하루는 조용하니 좋다. 서울서 충청북도조차 멀다고 여기는 서울사람들이, 서울서 전라남도까지 오겠나. 충청북도나 전라남도 아닌 부산이나 광주라면, 또는 대전이나 마산이라면, 또는 안동이나 구례쯤만 되어도 좀 달랐으리라 싶은데, 어찌 되든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하다.


  서울사람들은 숲이 얼마나 좋은가를 모른다. 숲에서 안 태어나고 숲에서 안 자랐으며 숲에서 일 안 하기에 숲이 얼마나 좋은가를 모를까. 아마 그러하리라. 언제나 아파트 둘레에서 살고, 언제나 자동차한테 둘러싸여서 살며, 언제나 숱한 신문과 방송과 잡지와 책과 영화와 언론과 연예인과 스포츠와 주식과 뭣뭣에 휩쓸린 채 살아가는 서울사람으로서는, 숲을 숲 그대로 느끼기란 아주 어려우리라 본다.


  나를 취재하고 싶다는 분한테 늘 똑같이 말한다. “휴가라고 생각하며 놀러오셔요. 여러 날 출장 간다고 생각하며 나들이하셔요. 시골집은 작지만 방 하나 비니 여러 날 묵으셔도 돼요. 밥은 제가 차리니 밥값도 안 들어요. 숲이 예쁘고 들이 아름다우며 바다가 멋져요. 밤에는 미리내를 보고, 낮에는 나뭇잎 살랑이는 파랗고 맑은 바람 쐬며 냇물을 마셔요.” 그런데 아직 이런 말에 마음이 이끌리는 서울사람, 그러니까 서울에서 일하는 글쟁이(기자·작가·편집자)는 없는 듯하다. 하기는, 시골사람 스스로 시골을 떠나 서울로 가겠다는 마당인데, 서울사람이 제발로 시골로 찾아오기란 몹시 힘들 만하리라. (4345.11.1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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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라서

 


겨울은 추워서 겨울이고
봄은 따스해서 봄이고
나는 나라서 아름답고
숲은 숲이라서 푸릅니다.

 


4345.10.2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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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빵놀이

 


  빵을 콩알처럼 돌돌 뭉쳐서 마룻바닥에 올려놓는다. “콩이야.” 하면서 ‘빵콩’을 만든다. 시골서 살며 언제나 콩을 보는 아이한테는 동글동글 생기면 어쨌든 ‘콩’이라고 말한다. 우리 식구가 시골로 오지 않고 도시에서 내처 살았으면 아이는 동글동글한 녀석을 바라볼 때에 무어라 말했을까. 아무튼, 빵콩을 잔뜩 만든 아이는 마룻바닥에 하나하나 늘어놓다가 주섬주섬 그러모아 꿀꺽 먹는다. 이러면서 빵놀이도 끝. (4345.11.1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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