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빨래가 힘들다는 거짓말

 


  손빨래를 늘 하면서 손빨래가 힘들다고 생각하거나 느낀 적은 없다. 그런데, 둘레 사람들은 마치 손빨래가 힘든데 굳이 그 짓을 왜 하느냐고 말하기 일쑤이다. 몸소 손빨래를 해 본 적 없기 때문일까. 손수 손빨래를 한 적은 있으나, 누가 시켜서 억지로 했기 때문일까.


  기계한테 빨래를 맡기면, 기계는 속옷이든 양말이든 겉옷이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기저귀이든 아이 바지이든 아이 웃옷이든 달리 주무르지 않는다. 빨래하는 기계는 모든 옷가지를 똑같이 흔들고 섞으면서 빨고 짠다. 이와 달리, 사람은 모든 옷가지를 다르게 비비고 헹구고 짠다. 사람이 손빨래를 할 적에는 기저귀는 기저귀대로, 겉옷은 겉옷대로, 속옷은 속옷대로 찬찬히 주무르고 비비며 헹군다.


  식구들 옷가지를 날마다 여러 차례 만지작거리며 생각한다. 손빨래란, 손으로 밥을 짓는 일하고 같다. 손으로 밥을 짓는 일이란, 손으로 씨앗을 심어 흙을 돌보는 일하고 같다. 손으로 흙을 돌보는 일이란, 손으로 아이들을 살살 어루만지며 아끼는 일하고 같다.


  나이 스물이 되도록 손빨래를 하지 않는 아이들이 나이 서른이 된대서 손빨래를 할 수 있으리라 느끼지 않는다. 손빨래를 하지 않던 아이들이 걸레를 빨아서 방바닥 훔칠 줄 알리라 느끼지 않는다. 손빨래 한 적 없는 아이들이 혼인을 해서 갓난쟁이를 낳은 다음, 똥기저귀나 똥바지를 어떻게 빨래할까 하고 걱정하거나 갈팡질팡할밖에 없으리라 느낀다.


  식구들 옷가지를 기계한테만 맡겨 빨래할 적에는, 스스로 즐거운 삶을 놓칠 뿐 아니라, 아이들한테 아무런 삶을 못 보여주고 못 가르치며 못 물려주리라 느낀다. 손으로 씨앗을 흙에 심어 먹을거리를 거둔 다음, 손으로 밥을 지어 함께 먹듯이, 손으로 옷가지를 건사한다. 손으로 바느질을 한다. 손으로 빨래를 하고, 손으로 갠다. 손으로 옷을 꺼내어 입는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비질하고, 손으로 서로를 따사로이 어루만지며 사랑한다. (4345.11.2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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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없이 아버지하고만 엿새

 


  이제 아이들 어머니가 ‘람타’ 공부를 마치고 오늘 시골집으로 돌아온다. 몇 시쯤 시골집에 닿을까. 저녁에 아이들 잠들고서 닿을까. 아무튼 아이들은 어머니 없이 닷새 밤을 자고 엿새째 맞이한다. 어머니 없는 허전함은 두 아이 모두 느끼지만, 작은아이가 훨씬 크게 느끼는구나 싶다. 이럴 때일수록 더 따스하고 살가이 맞이해야 하는데, 아버지 되는 사람은 아이들 칭얼거림을 조금 더 따스하거나 살가이 맞이해 주지 못한다.


  문득문득 내 말투에서 나 스스로 ‘훈육’과 같은 기운을 느낀다. 이런 기운을 느끼면서 생각을 다스린다. 나는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잖니. 그래, 아직 나는 나 스스로 사랑하지 못해서 아이들한테까지 어머니 없는 엿새 동안 ‘훈육’ 같은 말을 쏟아내지 않는가.


  아침놀을 바라본다. 저녁놀을 바라본다. 밤별을 보고 새벽별을 본다. 작은아이는 스물네 시간 아버지 바짓자락 붙잡고 달라붙는다. 똥을 누러 갈 수도 없고, 빨래를 널러 나올 수도 없다. 밥도 겨우겨우 짓는다. 밥하는 곁에서 구경하는 일은 좋으나, 불 옆에서 자꾸 손잡이를 돌리려 하니 쫓고야 만다. 불 곁에서 알짱거리는 작은아이 큰아이한테 마음쓰다가 커다란 냄비 뚜껑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아이들 어머니가 돌아오는 오늘, 옆지기가 오는 때에 맞추어 읍내에 나가 마중을 할까 싶기도 하고, 그냥 마을 언저리에서 마실을 다닐까 싶기도 하다. 밤새 잠을 이루지 않고 아버지 곁에 붙어 아버지도 잠을 못 이루게 하던 작은아이는 새벽 여섯 시 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잠이 든다. 아침 일곱 시를 넘기니 큰아이가 일어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모르지. 큰아이는 큰아이대로 놀아야 할밖에 없고, 작은아이는 작은아이대로 밤새 못 이룬 잠을 달게 자도록 곁에서 토닥여야 할 테지. 이번 엿새 동안 작은아이가 젖을 뗄 수 있을까. 어머니가 다시 와도 젖을 안 물고 밥만 먹을 수 있을까. 젖이 없으니 물을 많이 마시고 밥도 바지런히 먹던데, 어찌 보면, 아이들은 개구지게 놀도록 지켜보다가 꽤 배가 고프다 싶을 때에 짠 하고 밥상을 차려야지 싶기도 하다. 스스로 배가 고파 노래노래 부를 때에 마지못해 주는 척하며 밥을 내주어야 다들 맛나게 밥그릇을 비우리라 본다. (4345.11.2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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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놀

 


아침놀을 바라보면
알아요.

 

하루가
얼마나
맑게 빛나고

 

내 삶이
어느 만큼
아름다운가를.

 


4345.10.2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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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값등록금 아닌

 


  반값등록금이야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 다만, 반값등록금 아닌 한 해 천만 원 등록금으로 돈을 버는 이들이 당신 돈벌이를 반토막으로 쉽게 줄이겠다고 나설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런데, 반값등록금을 외치는 젊은이들이 자꾸 놓치는데, 당신(젊은이)들이 대학생이 되기까지 당신 어버이는 해마다 오백만 원∼천만 원에 이르는 돈을 교육비로 썼다. 유치원부터 고3까지 해마다 이만 한 돈을 썼다. 대학등록금은 고작 네 해에 내는 돈일 뿐이지만, 유치원부터 고3까지 해마다 오백만 원∼천만 원에 이르는 돈이 나간 줄 얼마나 알아챌까 궁금하다.


  나는 대학교를 다섯 학기만 다니고 그만두었는데, 내가 처음 대학교에 발을 디딘 1994년만 하더라도, 내 선배들은 나한테 으레 “너희가 대학생이 되기까지 너희 부모는 1억 원 넘게 썼다.”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이런 말을 하는 대학교 선배가 없는 듯하다. 대학생이 되기까지 여느 어버이가 써야 하는 어마어마한 사교육비 생각은 뒤로 한참 젖히고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 써야 하는 고작 사천만 원밖에 안 되는(?) 돈 이야기만 울부짖는다.


  곰곰이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대학생이라 해서 생각이 열린 사람이 아니다. 그저 대학생일 뿐이다. 대학생이 되기까지 입시공부만 했지 사회공부마 삶공부나 사랑공부를 한 이가 누가 있을까. 갓난쟁이 적부터 스무 살이 되기까지 제도권학교에 얽매인 채 대학바라기만 하던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고부터는 ‘연애도 자유’요 ‘섹스도 자유’라 하는데, 참말 사랑을 배운 적 없고 사랑을 생각한 일 또한 없이 이렇게 놀아나면서 대학등록금만 반값으로 깎자고 외치는 일이란 무엇일까.


  시골에서는 유치원 삯을 지자체에서 낸다. 시골에서는 중·고등학생이 되어도 사교육비는 퍽 적게 든다. 그러나 이웃 작은도시만 하더라도 유치원 삯부터 다달이 적어도 50만 원은 들여야 하고, 이밖에 이래저래 자질구레하게 나가야 하는 교육비를 더하면 고작 일고여덟 살짜리 아이 하나한테조차 다달이 백만 원이 나간단다. 대학등록금 천만 원 시대라고 하지만, 정작 이 말 뒤에 감추어진 ‘유치원 사교육비 천이백만 원 시대’인 줄 드러나지 않는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면 이 대목을 잘 느끼고 알리라. 그런데, 막상 도시에서 살아가며 아이 낳아 돌보는 어른들이 이런 말을 외치지 않는다. 스스로 못 느낄까. 스스로 안 느낄까. 스스로 생각을 안 할까.


  아직 철부지인 갓 스무 살 젊은이가 ‘반값등록금’을 외친다 하면, ‘어른이라 하는 이’들은 곁에서 똑같이 목청 높여 외칠 일이 아니다. 이 젊은이들한테 이제껏 너희가 너희 어버이 살림돈을 얼마나 바닥내면서 유치원·초·중·고등학교를 다녔는가를 일깨워야 한다. 우리가 바라볼 곳은 ‘반값등록금’이 아니다. (4345.11.2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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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 책읽기

 


  하느님은 예배당에 없다. 예배당에는 예배당만 있을 뿐이다. 숲에는 숲이 있지, 숲 말고 다른 것이 없다. 다만, 요즈음 숲에는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가 있다. 자가용 타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자가용 창문을 열고 휙휙 쓰레기를 던지기 일쑤라, 시골 들판을 걷거나 자전거로 지나가다 보면 곳곳에서 ‘자가용을 모는 사람이 버렸구나’ 싶은 쓰레기를 본다.


  하느님은 성경책에 없다. 성경책에는 성경책만 있을 뿐이다. 아이들을 바라보면 아이들이 보인다. 아이들을 느끼고 싶으면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살며시 껴안으면 된다. 어린이 마음을 다루는 책이라든지, 어린이 몸짓을 살피는 방송이라든지, 어린이한테 무엇무엇 가르친다는 교재를 들여다본대서 아이들을 느낄 수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 다른 어떤 지식이나 정보로 다룰 수 없다.


  하느님은 십자가에 없다. 십자가에는 십자가만 있을 뿐이다. 정치권력자는 전쟁영웅한테 훈장을 주고, 무슨무슨 훌륭한 일을 했다는 사람한테 훈장을 준다. 그러면 전쟁영웅이란 무엇인가. 이 나라에서는 전쟁영웅인 그이가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될까. 베트남전쟁 영웅은 어떤 사람일까. 한국전쟁 영웅은 어떤 사람일까. 베트남사람은 한국사람 총에 맞아 죽어도 될 만한가. 괴뢰군이나 인민군이란 없다. 국군도 없고 미군도 없다. 모두 ‘여느 사람’이요 ‘여느 아버지’요 ‘여느 어버이’일 뿐이다. 군인옷을 입었고 멀찍이 떨어졌기에 못 알아챌 뿐, 전쟁영웅이 죽인 적군이란 바로 내 이웃집 아저씨이거나 내 오래된 동무이곤 하다. 문화영웅이나 교육영웅이나 스포츠영웅이란 무엇일까. 십자가에는 십자가만 있듯, 훈장에는 훈장만 있다. 사람을 옭아매는 굴레만 있다.


  하느님은 하늘에 없다. 하느님은 바다에도 땅에도 어디에도 없다. 하느님이 있는 곳은 오직 내 마음속이다. 못 믿겠으면 내 마음을 읽으면 된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 노예교육에다가, 이에 앞서 유치원이니 어린이집이니 유아원이니 보육원이니 하는 여덟 해 바보교육에다가, 나중에는 대학교이니 대학원이니 유학이니 하는 쳇바퀴교육에 허덕이면서, 갓난쟁이일 적부터 서른이 넘을 무렵까지 ‘내 마음속 스스로 들여다보기’를 할 겨를이 없다. 그나마 틈틈이 혼자 여행이라도 다니면 조금이나마 ‘내 마음속 조용히 돌아보기’를 할 텐데, 여행길에 나서면서 느긋하거나 너그러운 마음이 되는 사람은 뜻밖에 퍽 드물다.


  쉽게 말하자면,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하느님인 줄 아무도 모른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이녁 마음읽기를 못 한다.


  가만히 마음을 다스리며 생각을 기울여 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웃으면 내 아이가 웃고, 내 옆지기가 웃으며, 내 이웃이 웃는다. 익살꾼이 웃겨야 웃지 않는다. 가벼운 내 웃음 한 자락이 훨훨 퍼진다. 내가 찡그리면 내 아이도 내 옆지기도 내 이웃도 몽땅 찡그린다. 내가 사랑스레 활짝 웃으면, 내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웃음꽃이 피어나며 둘레 사람들 마음이 따뜻해진다. 왜 그럴까? 왜 그런지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 몹시 사랑스러운 웃음을 흘리거나 나누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 곁에서는 마치 ‘빛이 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들 하는데, 참말 빛이 나니까 빛이 난다고 느낀다. 왜 그럴까? 왜 환한 사랑 꽃피우는 사람한테서는 빛이 날까?


  생각해야 한다. 느껴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 보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하느님이라서, 저마다 다른 하느님이 저마다 어떤 마음이 되고 어떤 생각이 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이 지구별이 달라진다. 하느님은 예배당에도 성경책에도 십자가에도 없다. 하느님은 바로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이기에, 모든 사람이 스스로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려 하느냐에 따라 지구별 목숨이 달라진다. 아주 작은 한 사람이 스스로 삶을 바꾸어 도시를 떠나면 도시도 살고 시골도 산다. ‘도시에 한 사람 자리가 비어’서 도시가 살지 않는다. 도시는 이대로는 몽땅 무너지고 둘레 시골마저 망가뜨린다. 그래서 이런 슬픈 굴레를 깨닫고 도시를 떠나 시골살이를 하겠다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이 한 사람 기운이 도시를 따스히 보듬고 시골 또한 살가이 쓰다듬기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살아날 수 있고, 지구별이 숨쉴 수 있다.


  이 나라 한국이 안 무너지고 버티는 까닭은 삼성이나 에스케이나 무슨무슨 재벌이 수출을 많이 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나라 한국이 안 무너지고 버티는 까닭은 ‘어린이와 젊은이 모두 떠난 시골’에 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씩씩하게 남아서 식량자급율 20%를 지켜 주기 때문이다. 비록 오늘날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농약 많이 쓰고, 풀 한 포기 그대로 건사하지 않지만, 시골에서 숲을 사랑하고 곡식을 거두는 따순 손길이 있기에, 이 손길 힘을 받아 한국이라는 나라 하나 버틸 수 있다.


  잘 생각해야 한다. 이제 시골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시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야 한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도시사람은 ‘쌀조차 다른 나라에서 사다 먹어’야 한다. 아직은 그나마 ‘농약 가득 서린 쌀’이라 하더라도, 이 나라 쌀을 먹지만, 앞으로는 이 나라 값싼 쌀조차 못 먹고, 다른 나라에서 비싸게 사다 먹어야 한다. 곡물재벌이나 씨앗재벌 금고를 두둑히 채우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이 나라 사람들 모든 삶이 얽매이면서 흔들리고 만다.


  사람이 살자면, 시골에서 살아야 마땅하지만, 도시에서 살더라도 사람다움을 건사하고 싶다면, 하느님이 어디에 있는지 깨우쳐야 한다. 스스로 깨우치도록 마음을 닦고 다스리며 아껴야 한다. 시골사람은 누구나, 그러니까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누구나 당신 스스로 하느님인 줄 안다. 당신 스스로 ‘하느님이 내려준 선물 같은 손과 발’로 흙을 만지는 줄 안다.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 되어 흙을 만지고 풀을 만지면서 목숨을 일구는 줄 안다. 도시사람은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직 씩씩하게 살아서 흙을 만지는 동안 하루 빨리 ‘내 마음을 읽어 하느님 찾는’ 일을 해야 한다. 예배당 아닌, 성경책 아닌, 십자가 아닌, 바로 내 마음속에 깃든 하느님을 찾아, 저마다 하루를 어떻게 빚고 하루를 어떻게 누리며 하루를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아름다운가를 깨달아야 한다.


  내 웃음 하나가 퍼져 온누리를 밝힌다. 내 비아냥이나 짜증이 퍼져 온누리를 어둡게 한다. 내 사랑으로 온누리를 따스히 돌본다. 내 거친 말과 막된 몸짓으로 온누리를 뒤흔든다. (4345.11.2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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