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서 책을 내고, 책을 팔아 땅을 산 다음, 이 땅이 막개발과 도시물결에 휩쓸리지 않도록 시골숲이 되도록 지키는 일을 한다면 더없이 즐거우리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베아트릭스 포터 님이 살아가던 집이란 바로 이 같은 시골숲일 테지. 한국에서도 글로 책을 빚어 돈을 버는 이들이 시골마을 땅뙈기를 차근차근 사들여 아무런 농약도 비료도 항생제도 없을 뿐더러, 자동차 오가지 않도록 지키는 정갈한 숲으로 이어가도록 하면 얼마나 예쁠까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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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릭스 포터의 집- 피터 래빗의 어머니
수전 데니어 지음, 강수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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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 출판사에서 내놓았던 <씨앗의 희망>은 한동안 절판되었는데, <소로우의 강>이 새로 나오며 다시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씨앗의 희망>처럼 책시렁에서 사라지는 일이 없이, 두루 사랑받을 수 있기를 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지식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삶을 아름다이 고치는 길을 일깨우는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면 더없이 기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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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의 강- 강에서 보낸 철학과 사색의 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11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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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114] 물고기묵

 

  국어사전을 보면 ‘생선(生鮮)묵’이라는 낱말은 ‘어(魚)묵’으로 고쳐서 써야 한다고 나와요. 그런데, ‘생선묵’을 ‘어묵’으로 고쳐써야 하는 까닭은 밝히지 않아요. ‘생선묵’이라는 낱말은 ‘가마보꼬(かまぼこ)’라 일컫던 일본 먹을거리를 이런 일본말로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여긴 한글학자들이 해방 뒤 이처럼 고쳐쓰자고 외쳐서 나왔다 하는데, 요즈음에는 ‘생선묵’을 ‘어묵’으로 바로잡자고 다시 얘기한다면 ‘생선’이라는 한자말도 알맞지 않다는 소리가 될 테지요. 그러면 ‘어묵’이라 할 때에 ‘魚’를 붙이는 한자는 얼마나 알맞을까 궁금해요. 무엇보다 왜 해방 뒤에나 요즈음에나 한국사람이 가리키는 한국말인 ‘물고기’라는 낱말을 붙이는 ‘물고기묵’은 생각하지 못할까 아리송합니다. 물고기 살을 발라서 만든 먹을거리라면 ‘물고기묵’일 뿐이에요. 도토리를 갈아 만든 먹을거리는 ‘도토리묵’이고, 메밀을 갈아 만든 먹을거리는 ‘메밀묵’이에요. 바라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살아가는 대로, 말을 빚고 이름을 붙여요. 그러나, 학자들은 ‘어류학자’일 뿐 ‘물고기학자’가 없어요. 사전을 엮어도 ‘어류사전’일 뿐 ‘물고기사전’을 엮지 않아요. ‘고기잡이배’라 하면서 막상 ‘물고기장수’ 아닌 ‘생선장수’가 되고 말아요. 여느 사람들도 학자들도 ‘물고기’라 일컫거나 말하지 않아요. 차라리 ‘오뎅(おでん)’이라 하든 ‘가마보꼬’라 하든, 일본말을 쓸 때가 외려 덜 남우세스럽지 않나 싶기까지 합니다. 이 말도 저 말도 모두 생각이 없어요. 4345.11.2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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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이름으로

새 글을 하나

쓰기로 생각한다.

 

어젯밤 곰곰이 생각하다가

[당신은 어른입니까]라는 이름으로

이 나라 학부모나 어버이나 여느 어른한테

띄우는 글월을 써 보기로 한다.

 

앞서 "신문읽기"와 "교사읽기"를 썼는데,

두 가지 '읽기' 이야기는

다른 갈래로 묶어야 한다고 느끼다가,

비로소 이렇게 묶으면 되겠다고 느낀다.

 

아무튼, 모든 글이름에는 '-읽기'라고 붙는다.

앞으로 쉰 가지 남짓 쓸 생각이고

어쩌면 백 가지쯤 쓸는지 모르는데,

 

사람읽기 - 생각읽기 - 학교읽기 - 정치읽기 - 사진읽기 - 문화읽기 -

영화읽기 - 버스읽기 - 미국읽기 - 평등읽기 - 사랑읽기 - 아이읽기 -

책읽기 - 꽃읽기 - 숲읽기 - 풀읽기 - 길읽기 - 흙읽기 - 글읽기 -

헌책방읽기 - 도서관읽기 - 발전소읽기 - 자전거읽기 - 공동체읽기 -

......

 

이런저런 '-읽기'를 밑바탕 삼아

어른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갈 넋이 무엇인가를

짚으려고 한다.

 

왜 '어른한테 쓰는 글월'인가 하면,

아이들은 '학생'이라는 신분(?)을 얻으면서

이래저래 조금이나마 배우려는 티를 내지만,

막상 학생 신분을 마친(졸업) 이들은

도무지 스스로 배울 생각을 안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언제까지나,

새롭게 배우는 사람이다.

 

스스로 배우지 않고

스스로 배우는 길을 안 걸어간다면,

이는 사람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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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3] 살림읽기
― 스무 해쯤 밥돌이로 살며

 


  나는 어느새 스무 해쯤 밥돌이로 살아갑니다. 그동안 지은 밥은 얼마나 많을까 어림해 봅니다. 여태껏 밥을 슬기롭게 짓거나 훌륭히 지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짓는 밥은 내가 먹거나 손님한테 차리거나 아이들한테 내주거나, 참으로 맛있다고 느낍니다. 이제 나는 내 어버이한테 밥을 즐겁게 차려서 올릴 수 있습니다.


  이제껏 기나긴 해를 돌고 돌아 이렇게 밥을 차릴 수 있었구나 싶습니다. 처음부터 내 어버이가 나한테 밥·옷·집을 스스로 건사하는 삶을 물려주었으면, 스무 해를 빙 에둘러 밥돌이가 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어버이가 내 어릴 적부터 나한테 밥·옷·집을 알뜰히 보여주며 물려주었으면 나는 열다섯이나 스물 나이부터 즐거이 밥을 차릴 줄 아는 밥돌이 삶을 누렸으리라 생각해요.


  아침저녁으로 두 끼니 차리는 밥삶을 떠올립니다. 나는 세 끼니를 차리지 않습니다. 세 끼니를 먹자면 배가 더부룩해서 힘들다고 느낍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말에는 ‘낮밥’이라는 낱말이 없습니다. 한자말로 ‘점심’이라는 낱말이 어느 때부터 슬그머니 스며들었지만, 한국사람 한국살이에는 낮에 먹는 밥이 없어요. 곧, 아침에 먹어 아침밥이고 저녁에 먹어 저녁밥일 뿐, 오래도록 한겨레는 두 끼니 밥차림으로 지냈어요.


  사이에 배가 출출하면 샛밥을 먹습니다. 샛밥이란 ‘참’이라고도 했고 ‘새참’이라고도 일컫습니다. 곧, 들에서 일하며 들밥을 샛밥으로 먹는데, 이러한 밥은 낮에 먹는 밥이라 할 만해요. 이렇게 따지자면 세 끼니를 먹은 셈이라 여길 텐데, 한겨레는 샛밥은 끼니로 넣지 않아요. 이름 그대로 ‘샛’밥, 사이에 배를 채워 일할 기운을 북돋우는 주전부리로 여겨요.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아침-아침밥’과 ‘저녁-저녁밥’이라는 말 얼거리를 배운 적 없습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이 같은 말 얼거리를 배우지 못합니다. 나 혼자 생각하며 느꼈고, 홀살이를 퍽 길게 하면서 몸으로 깨달았습니다. 이제 두 아이 어버이로 살아가며 더 깊이 느낍니다. 그리고 나 혼자 물어 봅니다. 왜 오늘날 어버이들은 하나같이 시골에서나 서울에서나 모조리 ‘아이들을 시험공부 생체기계가 되도록 들볶거나 등을 떠미’는 짓을 하는가 하고 스스로 물어 봅니다.


  서울에서든 시골에서든, 아이 낳아 돌보는 어버이 가운데, 어버이 나이가 되도록 ‘어버이다운 삶’을 보거나 듣거나 느끼거나 배운 이는 아주 드뭅니다.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이든, 대학교 네 해이든, 어느 학교에서도 아이들한테 ‘너희는 앞으로 어버이로 살아갈 테니, 어버이 삶이란 무엇인지 몸소 느끼고 배우렴’ 하고 이야기를 들려준 어른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아이들은 중학교 즈음 비로소 성교육이라고 배우고는, 고등학교 마칠 무렵 살곶이를 즐기고, ‘어른(성인)’이 되었다고 할 때에 시집장가를 가며 아이를 낳아요. 그런데, 막상 아이낳기가 무엇인지 배운 적 없고, 아이를 어떻게 낳고, 낳은 아이는 어떻게 사랑하며, 아이를 사랑하는 삶은 어떻게 일구어야, 나 스스로 즐거운 나날이 되는가를 몰라요.


  오늘날 어버이는 스스로 삶을 모르고 못 즐기며 안 사랑합니다. 오늘날 어버이는 아이한테 물려줄 만한 슬기가 없습니다. 삶을 모르니 삶을 물려주지 못해요. 돈이 있고 집이 있으며 자가용이 있어, 이런저런 물건이나 물질이나 문명은 물려준다지만, 막상 ‘물건이나 물질이나 문명을 건사하는 넋과 매무새’는 하나도 안 갖추었으니 못 물려줘요. 어마어마한 돈이든 빈털털이 가난이든, 어버이가 아이한테 무엇인가 물려주면서 ‘사랑과 꿈’을 나란히 물려주지 못하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돈을 물려받는 아이는 이 아이대로 망가집니다. 빈털털이 가난을 물려받는 아이는 이 아이대로 흔들립니다. 있는 돈이든 없는 돈이든 어떻게 건사하며 삶을 누리거나 즐길 때에 아름다운가를 모르니, 망가지거나 흔들려요.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며 시험성적 잘 나온들 무엇에 쓸까요. ㅅ대 ㄱ대 ㅇ대 같은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붙는들, 이 아이들이 저희 삶을 아름답게 여밀 수 있을까요.


  요즈음 아이들은 손수 도시락 쌀 줄 모릅니다. 손수 차린 밥으로 어버이와 손님한테 내주지 못합니다. 자, 열다섯이나 스물쯤 된 사람으로서, 손수 밥을 차리지 못하고 도시락을 싸지 못한다면, 이 나이란 얼마나 덧없이 흐른 나날이 될까요. 제 옷가지를 제 손으로 빨래할 수는 있을까요. 전기가 끊어지면 빨래기계를 못 쓸 텐데, 손빨래는 얼마나 할 수 있을까요. 서울에서는 전기가 끊어지면 수도물도 끊어질 텐데, 이때에는 어떻게 밥·옷·집을 건사할 수 있을까요. 서울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무엇을 안다고 할 만할까요.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아이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학교에‘도’ 갈 수 있는 아이입니다. 아이들은 무엇보다 ‘삶을 배울’ 아이입니다. 삶을 배우면서 ‘사랑을 누리’고 ‘꿈을 나눌’ 아이입니다.


  삶·사랑·꿈이 없으면 하루가 얼마나 따분하고 뜻이 없을까 생각할 노릇입니다. 오늘날 어버이와 어른 누구나 삶·사랑·꿈을 건사하지 않기에, 오늘날 아이는 삶·사랑·꿈을 물려받지 못하기도 하고, 구경하지 못하기도 하며, 이야기를 듣지도 못해요.


  어른들한테 묻습니다. 어버이들한테 여쭙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며 삽니까. 당신은 아이들한테 어떤 삶을 물려줍니까. 4345.11.2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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