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
김일주 / 민음사 / 1996년 7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30

 


천천히 찾아서 오래도록 즐기는 맛
―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
 김일주 사진
 민음사 펴냄,1996.6.25./35000원

 


  내 살가운 사진벗 가운데 한 분은 로모사진기로만 사진을 찍습니다. 한 팔을 곧게 뻗어 거리를 잰 다음 찰칵 하고 눌러 사진을 빚습니다. 한 통을 다 찍으면 사진을 값싸게 만들어 주는 데에서 필름을 찾습니다. 누리사랑방에 ‘필름 한 통 찍은 사진’을 통째로 고스란히 올립니다. 이 사진들을 바라보며 참 좋구나 하고 느낍니다. 사진을 좋아하며 누리는 삶이랄까요, 사진과 벗삼으며 하루하루 즐기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여러 해째 ‘로모 사진’을 그분 누리사랑방에서 지켜보면서 오늘 문득, ‘사진은 천천히 찾아서 오래도록 즐기는 맛’이 있어 재미있다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김일주 님이 한국 문학가를 찾아다니며 찍은 ‘얼굴사진’을 그러모아 엮은 사진책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민음사,1996)을 곰곰이 들여다봅니다. 책머리에 “모쪼록 이 사진집의 발간으로 우리 문학과 문화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보다 더 문학과 가까워지고 우리 문학이 풍성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발간사).” 하는 말이 실립니다. 참말, 이 책머리 이야기처럼 이 사진책 하나가 조그맣게 밑거름 구실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진책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은 그닥 재미있지 않습니다. 이런 시인 저런 소설가 골고루 얼굴사진 실으려 하면서, 너무 밋밋한 책이 되고 말아요. 이런 작가한테는 이런 삶이 있을 테고, 저런 작가한테는 저런 생각이 있을 텐데, 사진책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이런 작가한테 어떤 삶이 있고 저런 작가한테 어떤 생각이 있는가 읽기 몹시 힘들어요. 여러 작가들 얼굴은 들여다볼 수 있지만, 작가마다 다른 삶과 생각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온갖 작가를 만나기 쉽지 않은 만큼, 비슷비슷한 행사 자리에서 마주치며 바지런히 찍은 사진을 실을밖에 없기도 하리라 봅니다. 그런데, 비슷비슷한 행사 자리에서 마주친다 하더라도, 작가마다 어떤 삶을 일구며 어떤 생각을 글에 녹였는가를 찬찬히 헤아린다면, 다 다른 얼굴빛 다 다른 삶빛 다 다른 넋빛을 사진으로 실을 만하지 않았을까요. 2008∼2009년에 사진잔치를 열 적에 김일주 님은 ‘8만 장’에 이르는 얼굴사진을 마흔 해에 걸쳐 찍었다고 밝혔습니다. 틈틈이 사진잔치를 여는 만큼, 8만 장 가운데 새롭게 선보이는 사진이 있을 테고, 거듭 선보이는 사진이 있겠지요. 그러면, 1996년에 처음 나온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 고침판을 한 번쯤 낼 만하지 않으랴 싶어요. 밋밋하거나 싱거운 ‘백과사전 같은 사진책’을 넘어, ‘작가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사진책’을 기쁘게 베풀 만하리라 생각해요. 작가들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태우는 모습도, 작가마다 다른 삶과 넋으로 술과 담배를 벗삼는 모습으로 보여줄 수 있어요. 작가들이 마이크 앞에서 이야기하는 모습도, 작가마다 다른 빛과 얼로 이야기꽃 피우는 모습으로 밝힐 수 있어요. 작가 한 사람 모습을 예전과 오늘을 견주며 드러낼 수 있겠지요.


  더 많은 글작가를 만나서 더 많은 사진을 남겨야 하지 않습니다. 흔한 말로 ‘아카이브 쌓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 사람을 즐겁게 마주하면서 즐거운 사랑을 느끼며 즐거운 사진으로 일굴 수 있으면 돼요.


  천천히 찾아서 오래도록 즐기는 맛이 사진에 있는 줄 되새길 수 있기를 빕니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찾아 즐기는 ‘바로사진(즉석사진)’도 있는데, 사진이 바로 나온다 하더라도, 종이에 그림이 뜨기까지 ‘천천히 기다리’지요. 디지털사진이라면 찍자마자 창에 짠 하고 뜨기에 ‘기다리는 맛’은 없다 할 텐데, 디지털파일로 들여다볼 때에는 어떠한 사진이든 ‘오래도록 즐기는 맛’이 없어요. 필름으로 찍거나 디지털로 찍거나, 내 집이나 일터에 붙이려 한다면 종이에 앉히잖아요. 종이에 앉히기까지 ‘잘 앉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벽에 ‘종이로 앉힌 사진’을 붙이고 나면 한 달 한 해 열 해 스무 해 두고두고 바라보는 ‘오래도록 즐기는 사진’으로 거듭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사진’이나 ‘얼굴사진’이란 사람 겉모습을 찍거나 얼굴 생김새를 찍는대서 이루지 못합니다. 이런 시인 저런 소설가를 더 많이 찍어야 “한국 현대 문학 얼굴”을 말하는 사진책을 엮을 수 있지 않습니다. 시인한테 어떤 삶이 있고 소설가한테 어떤 사랑이 있으며 수필가한테 어떤 꿈이 있는 한편 극작가한테 어떤 생각이 있는가를 환하게 드러내는 웃음꽃이 ‘사람들 얼굴 모습에서 피어날’ 때에 비로소 사람사진이나 얼굴사진이 됩니다. 한 사람을 찍더라도 ‘기나긴 해를 글 한 줄 쓰며 살아온 글벗 넋’을 내 넋으로 받아들여 어깨동무하는 손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시인이라 하더라도 시를 쓰는 동안에는 가난도 뭐도 모두 잊어요. 오직 글 하나에 삶을 바칩니다. 글꽃이란 삶꽃입니다. 빙그레 웃거나 슬프게 울면서 시를 씁니다. 웃음꽃이 시꽃이 되고, 눈물바람이 시바람이 됩니다. 노랫가락이 싯가락이 되며, 춤사위가 싯사위가 되어요.


  가만히 돌아보면, 내가 저이를 읽은 만큼 저이 모습이 내 사진 하나로 다시 태어납니다. 내가 내 삶벗을 헤아린 만큼 내 삶벗 이야기를 내 사진 하나로 살포시 앉힙니다. 어느 작가가 내놓은 작품을 열 권쯤 읽은 뒤하고, 어느 작가가 내놓은 작품을 아직 한 권도 안 읽은 뒤하고, 내가 찍을 사진은 같지 않습니다. 어느 작가하고 도란도란 오랜 나날 이야기꽃을 피운 뒤하고, 어느 작가하고 처음 마주한 자리하고, 내가 느끼며 찍을 사진은 조금도 비슷하지 않아요.

  천천히 찍으면 됩니다. 천천히 오래도록 찍으면 됩니다. 사진을 읽을 사람들이 천천히 오래도록 즐기기를 바란다면, 사진을 찍는 사람부터 천천히 오래도록 찍으면 됩니다. 사진을 읽을 사람들이 ‘더 많은 작가’ 얼굴을 바라보기를 바란다면, 사진을 찍는 사람도 그저 ‘더 많은 작가’를 만나려고 잰걸음 놀리면서 더 많은 작가를 찍으면 됩니다. 4346.2.1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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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14] 층집읽기
― 아파트에서 놀 수 없는 아이들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 집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실컷 뛰고 노래하며 구릅니다. 집안에서건 마당에서건 뒷밭에서건 논둑에서건 들판에서건 숲속에서건, 아이들은 뛰고 싶은 대로 뛰며, 노래하고 싶은 대로 노래하다가는, 구르고 싶은 대로 굴러요.


  내 어릴 적을 돌이켜보면, 나는 골목동네에서 실컷 뛰고 노래하며 굴렀습니다. 몸이나 옷이 흙투성이가 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집으로 들어가기 앞서 ‘아차, 오늘도 옷이 지저분하네.’ 하고 생각하면서 흙을 터느라 바빴어요. 어머니는 당신 아들내미가 또 옷을 다 더럽히고 들어온 줄 뻔히 알아챕니다. 땀에 절고 흙에 절어, 겉보기로 흙기운 털었다 하더라도 땀내음과 흙내음이 물씬 풍기니까요.


  오늘날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옷차림을 보면 아주 말끔합니다. 옷에 흙을 묻히고 다니는 아이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예전처럼 흙길이 있는 도시는 없고, 시골에서도 흙길을 시멘트로 덮으니까, 아이들 옷에 흙 묻을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 할 텐데, 아이들은 시멘트길에서든 흙길에서든 놀 겨를이 없곤 해요. 학원에 다니거나 방과후학교에서 지내느라 바쁜 오늘날 아이들이에요. 신나게 뒹굴거나 구르거나 뛰놀면서 옷과 몸이 흙투성이 되는 일을 찾아볼 수 없는 아이들이에요.


  방방 뛰고 싶은데 뛸 자리가 없으면, 아이들은 집에서라도 뛰고 싶습니다. 뜀박질과 달음박질로 땀을 흘리고 싶은데, 학교나 학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얌전히 앉아 텔레비전만 바라보아야 한다든지 이런 영어교육이나 저런 학습지도에 따라야 한다면, 아이들은 온몸에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합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비로소 뛰거나 구르려 합니다. 도시에서는 저녁이건 밤이건 바깥이 전깃불로 환하니 아이들이 일찌감치 잠들지 않아요. 게다가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은 저녁에 일찍 불을 다 끄고 잠자리에 누우려 하지 않아요. 도시 어른들은 저녁 예닐곱 시면 ‘아직 낮’으로 여겨요. 도시 어른들은 저녁 열 시가 넘어도 ‘아직 저녁이 아니라’고 여겨요.


  도시 아파트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저녁 아홉 시나 열 시나 열한 시까지도 콩콩 뛸밖에 없습니다. 도시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웃집이나 아랫집 아이들이 참말 늦은 밤에까지 콩콩 쿵쿵 쾅쿵 우르르 소리를 내며 뛰거나 내지르는 소리에 들볶일밖에 없습니다. 더 생각해 보면, 도시에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뛸 터가 없어요. 조금이나마 빈 터가 있으면 자동차를 대는 도시예요. 아주 작은 빈 터조차 무슨 물건을 놓거나 가게를 차리거나 하는 도시예요. 흙이 몽땅 사라지는 도시이면서, 비어서 한갓진 터조차 없는 도시예요. 또한, 조금 빈 으슥한 데는 중·고등학교 푸름이들이 어른 몰래 담배 태우는 자리가 돼요. 아이들은 이래저래 놀 자리, 뛸 자리, 쉴 자리, 뒹굴 자리 없어요. 흔히 말하는 ‘층간소음’은 도시 얼거리 스스로 빚는 끔찍한 괴로움이에요. 도시에서 아이들이 놀 자리 쉴 자리 뛸 자리 있으면, 집에서 안 뛰어도 돼요. 집에서 뛰고 싶으면 바깥에서 한참 뛰다 들어오면 되거든요. 저녁 아홉 시나 열 시라 하더라도, 집 바깥 놀이터나 마당이나 빈 터에서 공차기를 하든 줄넘기를 하든 배드민턴을 하든 무얼 하든, 한참 땀을 쏟고 나서 집으로 들어오면 돼요. 그러나, 생각해 봐요. 오늘날 어느 도시 어느 아파트나 골목동네 한켠에 ‘한갓지게 비었으면서 늦은 저녁에 아이들이 걱정없이 뛰놀 자리’가 있는가요. 아이들은 다세대주택에서건 아파트에서건 ‘층을 이룬 집’에서 콩콩콩콩 뜁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쿵쿵쿵쿵 소리를 낼 적마다 뿔이 납니다. 아이들은 우당탕탕 꺅꺅 소리를 지르며 ‘갑갑한 속을 풀고’ 싶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이리 뒹굴거나 저리 뛸 적마다 골이 아픕니다.


  아파트에서는 아이들이 놀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놀 수 없는 아파트는 어른들 또한 놀 수 없는 자리입니다. 어른들이 술잔치를 벌인다 하더라도 아하하하 까르르르 웃음보 터뜨리면서 노래 몇 가락 뽑을 수 없어요. 어른들이 밤 열두 시나 새벽 두어 시에 노래를 부르면 아파트나 다세대주택에서 어찌 될까요.


  층으로 쌓는 집 아닌 마당을 두는 집을 마련해야 어른도 아이도 숨통을 트리라 생각합니다. 층으로 쌓는 집 아닌 마당을 두는 집을 마련하면서, 마당 한켠에 나무를 심어 돌보고, 마당 또한 시멘트로 바닥을 대지 말고 흙으로 바닥을 살려 빗소리와 눈소리를 새록새록 누릴 수 있어야, 도시사람이건 시골사람이건 숨결을 살리리라 생각합니다.


  한겨레는 예부터 층집을 세우지 않았어요. 한겨레는 예부터 누구나 흙땅 딛고 살았어요. 한겨레는 예부터 누구나 흙을 만지며 숨을 쉬고, 흙에 몸을 눕혀 살았어요. 한겨레는 예부터 어른도 아이도 흙하고 한몸이 되어 넋과 얼을 살찌웠어요. 층집이 늘면 늘수록 한겨레 삶자락은 더 메마르거나 차갑거나 갑갑하거나 쓸쓸하게 뒤틀리겠다고 느낍니다. 4346.2.1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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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책 앞날은 어디로 (도서관일기 2013.2.8.)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종이책 앞날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차츰 불거진다. 그도 그럴밖에 없는 까닭이, 종이책 다루는 책방이 크게 줄어든데다가, 얼마 안 남은 ‘종이책 다루는 책방’조차 앞으로 얼마나 버틸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2013년 오늘 문을 열어 책손을 기다리는 책방들은 참으로 씩씩하게 책넋을 돌본다 할 만하다. 나라에서도 종이책보다 전자책을 북돋우는 정책을 내놓지, 종이책을 아끼거나 돌보려는 정책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도서정가제 이야기가 불거지기는 하지만, 막상 ‘종이책 다루는 책방’과 얽힌 삶과 문화와 이야기는 제대로 터져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종이책 다루는 책방’을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 먹여살려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그저, 징검돌 하나 놓아 주면 된다. 이를테면, ‘중소기업 도와주는 밑돈’을 싼 이자로 빌려주듯, ‘종이책 다루는 책방’이 깃든 건물을 ‘종이책 다루는 책방’마다 ‘내 건물로 사들일’ 수 있게끔 돕는 징검돌 하나 놓으면 좋겠다. 새책방이든 헌책방이든 ‘내 건물’로 꾸릴 수 있게끔 하면 좋겠다. ‘건물임자한테 달삯 내기’가 아니라, 중앙정부나 지역정부한테 ‘건물 사들이는 데에 들인 돈 갚기’를 하도록 하면 좋겠다. 그런 다음, ‘종이책 다루는 책방’에서 여러 가지 책잔치를 꾀할 때에 잔치값을 얼마쯤 보태면 좋으리라. 더 생각해 보면, 책을 만드는 곳, 출판사도, 출판사 깃드는 건물을 ‘내 출판사 터’로 삼을 수 있게끔, 건물 사는 밑돈을 도우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는 숲에서 자란다. 나무는 햇살을 먹고 바람을 마시며 흙에 뿌리를 내려야 자란다. 책은 책터, 곧 책숲에서 자란다. 책은 책터가 있을 때에 책이다. 도서관뿐 아니라 새책방과 헌책방이 골고루 아름답게 있을 때에 책은 책으로서 책빛을 낼 수 있다.


  나무는 햇살이나 바람이나 흙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책은 책터가 없으면 책빛을 내지 못한다. 전자기기 있으면 전자책 읽을 수 있겠지. 그러면 전자기기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전기 없이 전자기기 움직일 수 있는가. 나무는 종이가 되어 책으로 다시 태어나는데, 전자기기 전자파일은 어떻게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을까. 나무내음은 사람과 뭇목숨을 살리는데, 전자파는 사람과 뭇목숨한테 어떻게 스며드는가.


  중앙정부이든 지역정부이든 ‘돈벌이 쏠쏠한 새로운 산업’에 치우치거나 끄달리지 않기를 바란다. 삶을 바라보고 사랑을 생각하며 꿈을 어깨동무하는 길을 차근차근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서재도서관에는 종이책만 있다. 내 사진책도서관은 시골마을 한복판에 있다. 내 책들은 나무 곁에서 숨을 쉰다. 나와 우리 식구들은 시골숲에서 시골바람 마시면서 시골내음을 누린다.


  종이책 앞날은 어떻게 될까? 아주 쉬우리라 생각한다. 사람 앞날을 생각해 보면, 종이책 앞날도 환하게 깨달을 수 있으리라 본다. 사람이 앞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 때에 아름다울까를 헤아리면, 종이책이 앞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빛날 때에 아름다운가를 슬기롭게 깨우치리라 본다. (ㅎㄲㅅㄱ)


*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을 씩씩하게 잇도록 사랑스러운 손길 보태 주셔요 *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 도서관 지킴이 되어 주는 분들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1.341.7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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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2-16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이책이 좋아도 도심생활속에서 놓아둘 공간이 없어 넘 힘들더군요.그래선지 전자책에 자꾸 관심이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ㅡ.ㅡ

숲노래 2013-02-16 15:13   좋아요 0 | URL
음, 그럴 때에는 도시를 떠나
넉넉한 시골로~~~ 휙휙휙~~~ ^^
 

사진빚기
― 나 스스로 사진입니다

 


  스스로 삶을 즐길 때에 내 삶이 즐겁습니다. 스스로 삶을 즐기지 못하면, 나한테 돈이 억수로 많더라도 삶이 즐겁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을 즐긴다면, 내 은행계좌에 돈이 아예 없다 하더라도 삶이 즐겁습니다.


  호텔집에 가서 밥을 먹야 밥맛이 돌지 않습니다. 시골집 둘레에서 풀을 뜯어 먹을 때에 밥맛이 없지 않습니다. 손수 텃밭을 일구어 나물밥 먹더라도 이러한 삶을 즐기지 못하면 밥맛이 돌지 못합니다. 호텔집에 가든 뷔페집에 가든 스스로 삶을 즐기면 어디에서 밥을 먹더라도 맛나고 즐겁습니다.


  어떤 사진장비를 쓰든 스스로 사진을 즐길 때에 아름답거나 곱거나 반갑거나 기쁜 사진 하나 얻습니다. 스스로 사진을 즐기지 못하면, 어떤 사진장비를 손에 쥔다 하더라도 하나도 안 즐거울 뿐 아니라, 아름답거나 곱거나 반갑거나 기쁜 사진을 조금도 못 얻습니다. 스스로 사진을 즐길 줄 안다면, 값싼 사진장비를 쓰거나 값비싼 사진장비를 쓰거나, 스스로 가장 기쁘며 즐겁게 받아들일 사진을 얻어요. 스스로 사진을 즐기지 못하니까, 자꾸 사진장비에 눈길이 가거나 마음이 기울어져요.


  그러나, 아직 적잖은 사람들은 사진장비에 끄달립니다. 어쩔 수 없다 할 텐데, 사진장비와 사진이 서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제대로 풀어내거나 밝히거나 이야기하는 ‘사진벗’이나 ‘사진스승’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슬기로운 사진벗이나 사진스승을 스스로 사귀지 않았고 만나려 하지 않았으며 마주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 테지요.


  살림돈이 적은 사람은 ‘적은 살림돈에 맞추어’ 사진장비를 갖출 텐데, 살림돈이 조금 넉넉한 사람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값싼 사진장비부터 값진 사진장비’까지 두루 갖출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나는 살림돈이 적었기에 가장 값싼 사진기부터 하나하나 쓰면서 몸으로 익혔는데요, 사진길을 걸어가며 ‘나한테 맞는 사진장비를 잘 모르겠다’ 싶으면, 아니 ‘사진을 찍는 즐거움을 더 깊이 누리고’ 싶으면, 이렇게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미놀타, 캐논, 니콘, 펜탁스, 라이카, 이런저런 회사 사진기 가운데 가장 값싸고 널리 쓰이는 장비를 하나씩 갖춰요. 그러고서 일회용 사진기도 갖추고 로모 사진기하고 두어 가지쯤 되는 토이카메라도 갖춰요. 그러고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상을 다 다른 사진기로 몇 장씩 찍어 봐요.


  사진기가 다 다르니까 똑같은 결이나 무늬나 빛살이나 빛깔은 나오지 않습니다. 필름사진기라면 다 다른 회사에서 만든 필름을 넣으며 찍어 봐요. 인터넷 사이트에서 떠도는 ‘장비 비교’나 ‘필름 비교’ 영상이나 파일을 들여다보지 말고, 나 스스로 내가 장비와 필름을 갖추어 사진을 찍어 봐요. 디지털사진일 때에는 화이트밸런스하고 색감을 다 다르게 해서 몇 장씩 찍어 봐요.


  이렇게 사진을 찍으면서 한 가지를 더 살핀다면, 내가 이렇게 찍은 사진들을 ‘어떤 장비 어떤 필름(또는 디지털데이터)으로 찍었는가’를 숨긴 채, 오직 사진 작품으로만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셔요.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이 이처럼 찍은 사진을 ‘그저 사진으로만 들여다보’셔요. 이때에 내 마음에 가장 와닿는 사진이 어느 것인가를 찾아보셔요.


  사람마다 삶이 다르고 생각이 다릅니다. 저마다 다른 사람이요 생각이며 삶이기에, 저마다 마음이 끌리는 꽃과 풀과 나무가 달라요. 누군가는 벚나무한테 마음이 갈 테고, 누군가는 뽕나무한테 마음이 갈 테며, 누군가는 잣나무한테 마음이 갈 테지요. 누군가는 동백나무한테 마음이 갈 테고, 누군가는 능금나무한테 마음이 갈 테며, 누군가는 오동나무한테 마음이 갈 테지요. 호두나무를 좋아하거나 석류나무를 좋아한대서 ‘남보다 거룩하거나 남보다 못하지’ 않아요. 그저 호두나무를 좋아하거나 석류나무를 좋아할 뿐이에요.


  곧, 사진은 내가 가장 즐기고 좋아하는 사진을 즐기면서 좋아하면 됩니다. 나는 내 삶을 빛낼 내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사진잔치를 벌인다고 할 적에도, 남들 앞에서 자랑할 만한 사진을 보여주기보다, 나 스스로 가장 좋아하면서 즐긴 사진을 함께 나눈다고 생각하셔요. 내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적에는 어떻게 하는지 돌아보셔요. 내 아이를 이쁘장하게 찍은 사진도 눈길이 갈 테지만, 내가 내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적에는 ‘내 아이하고 어울리며 보낸 살갑고 사랑스러운 이야기’ 깃든 사진에 가장 눈길과 마음이 끌리기 마련이에요. 빛이 좀 안 맞거나 살짝 흔들렸다 하더라도, ‘내 아이하고 어울리며 보낸 살갑고 사랑스러운 이야기’ 깃든 사진처럼 내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해요.


  나 스스로 사진입니다. 내 삶이 내 사진이고, 내 사랑이 내 사진입니다. 내 눈길이 내 사진이요, 내 마음이 내 사진입니다. 이런저런 사진틀에 맞추어 내 삶이나 사랑이나 눈길을 바꾸지 마셔요. 내 삶이나 사랑이나 눈길에 맞추어 내 사진틀을 새롭게 빚어요. 내 삶에 따라 내 사진을 즐기고, 내 사랑에 따라 내 사진을 누려요. 내 눈길에 따라 내 사진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내 이야기를 흐드러지게 빚어요. 4346.2.1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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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2-16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좋은 글입니다.요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진기 자체에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비싼 카메라가 굳이 아니어도 가벼운 카메라르 늘상 몸에 지니면서 주변의 일상을 찍는것이 좋은데 말이죠.

숲노래 2013-02-16 15:13   좋아요 0 | URL
언제나 스스로 즐길 줄 알면
무엇을 하거나 다루어도
모두 아름답게 되리라 느껴요
 
투구꽃 창비시선 307
최두석 지음 / 창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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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나무
[시를 말하는 시 12] 최두석, 《투구꽃》

 


- 책이름 : 투구꽃
- 글 : 최두석
- 펴낸곳 : 창비 (2009.10.20.)
- 책값 : 7000원

 


  시골 면소재지나 읍내는 서울 시내하고 사뭇 다릅니다. 시골 면소재지는 참 작고, 시골 읍내 또한 아주 작습니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대구나 인천이나 대전 같은 데는 자동차로 한참 달려도 가게와 아파트가 끝나지 않기 일쑤인데, 시골 면소재지나 읍내는 두 다리로 조금 걸어도 가게가 끝나고, 아파트가 드문드문 있어도 건물 몇 나즈막하게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적게 살아가니 가게도 적고 아파트도 몇 안 될 테지요. 사람이 많이 살아가니 가게 또한 많으며 아파트는 아주 많을 테지요.


  사람이 적으니 자동차가 적은 시골입니다. 사람이 많으니 자동차가 많은 서울입니다. 자동차가 적은 만큼 찻길이 한갓지거나 덜 붐빕니다. 자동차가 많은 만큼 찻길이 넓으면서도 빽빽하게 차고 으레 막힙니다. 자동차가 적을 때에는 배기가스가 적고, 자동차가 많을 적에는 배기가스가 그득그득 넘칩니다.


  시골은 자동차로 한참 달려도 들과 멧골과 숲과 바다가 끝나지 않습니다. 서울은 자동차로 시내를 한참 달려 벗어나야 비로소 들이나 멧골이나 숲이나 바다를 만납니다.


.. 꿩 가족의 삶터에 / 허락도 없이 들어온 나는 / 잠시 운전대를 놓고 그들의 안녕과 행운을 빈다 ..  (꿩 가족)


  서울 같은 데에서 살아가는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가지치기 때문에 해마다 앓고, 배기가스 때문에 날마다 앓으며, 전깃줄과 전자파 때문에 언제나 앓습니다.


  서울 같은 데에서 살아가는 나무는, 둘레에 사람들이 아주 많지만, 나무 곁 지나가는 사람 가운데 이녁을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따사로이 바라보는 눈길은 거의 없습니다. 셀 수 없도록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서울인데, 어느 누구도 길가 나무 한 그루 살며시 쓰다듬는다든지 어루만진다든지 보살핀다든지 하지 않아요. 자동차 배기가스로 더럽혀지거나 망가진 나뭇줄기는 새까맣기 일쑤라, 아예 안 건드린다고 할까요. 나무를 나무로 여기지 못한달까요.


  나무가 서울에서 자라면 참 슬픈 노릇인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나무는 시골에서 자라야 참 기쁜 일인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사람 아닌 목숨은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서울이요 부산이며 대구이자 인천인데다가 대전인데, 이런 곳에 나무나 꽃이나 풀을 들일 까닭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사람조차 아무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데다가, 사람 사이에 금을 그어 신분이나 계급이나 지위 따위로 마구 뭇칼질하는 서울 같은 데에, 사람이 굳이 깃들어야 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나무는 시골에서 살고, 풀과 꽃도 시골에서 살며, 사람 또한 시골에서 살아야 아름다운가 하고 생각에 잠깁니다. 나무도 풀도 꽃도 사람도 오롯이 살아가기 어려운 서울에는 누가 살아야 아름다운가 하고 생각에 젖습니다.


.. 숲에서 잘 자란 나무를 만나면 / 다가가 안고 싶은데 / 박달나무를 만나면 더욱 간절해진다 ..  (박달나무)


  서울은 끝없이 달라집니다. 몇 해쯤 지나면 건물이나 가게마다 껍데기를 바꿉니다. 몇 열 해쯤 지나면 건물이나 가게를 헐어 새로 올립니다.


  따지고 보면, 시골도 끝없이 달라집니다. 시골은 봄 여름 가울 겨울에 따라 모습이 달라요. 시골은 봄에도 다달이 모습이 달라요. 시골은 달에도 날에 따라 모습이 다릅니다. 무언가 부수거나 세우거나 하지 않지만, 시골살이는 한결같이 다른 이야기가 어우러집니다. 무언가 부수거나 세우거나 하는데, 서울살이는 껍데기만 달라질 뿐, 속내는 조금도 안 달라집니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나무는 서울사람 하는 짓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그러다가 큼지막하게 재개발을 한다며 나무를 뭉텅뭉텅 베어 죽일 적에 조용히 눈을 감으며 이녁 아이를 씨앗으로 흙에 떨구어 놓습니다. 나중에 고요한 땅이 되고,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걷히면 씩씩하게 다시 태어나기를 꿈꿉니다.


  내 고향 인천을 찾아갈 적마다, 또 다른 도시로 나들이를 할 적마다, 나무를 가만히 살핍니다. 나무로 빚은 전봇대를 찾아가서 인사를 합니다. 골목집 마당마다 씩씩하게 자라난 나무를 올려다보며 앞으로도 오래오래 이 마을을 예쁘게 지켜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찻길에서 서른 해 마흔 해 쉰 해 배기가스 먹으며 푸른 바람 내뿜은 나무들한테 더 씩씩하고 튼튼히 숨결 이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손을 살며시 뻗어 살살 쓰다듬습니다. 손바닥을 가만히 대고 귀와 볼을 살그마니 댑니다. 나무뿌리에서 나뭇줄기를 타고 나뭇잎까지 오르는 물결을 느낍니다. 나무가 쉬는 숨을 느낍니다. 나무는 서울에서도 나무요 시골에서도 나무입니다. 나무는 어디에서나 나무입니다. 서울 같은 데에서는 배기가스 먹느라 시름시름 앓지만, 사람들 누구한테나 고운 빛을 나누어 주고픈 꿈으로 자라는 나무입니다. 오늘날 시골사람들은 농약과 비료에 길들고 말지만, 시골사람 누구한테라도 맑은 빛을 베풀어 주고픈 사랑으로 자라는 나무입니다.


.. 느티나무가 자라 옹이투성이 거목이 될 때까지 /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자라다 부러진 / 까치집 삭정이 같은 이야기들 보시게 ..  (느티나무)


  겨울 지나 봄이 찾아오면, 옆지기랑 아이들하고 이웃마을 천천히 마실을 하면서 새로 잎을 틔우는 나무들을 만납니다. 봄잎 틔우는 나무 앞에 서서 자그마한 잎사귀 살살 어루만지다가 톡 따서 아이들 잎에 하나씩 넣고, 옆지기 입에 하나 넣으며, 마지막으로 내 입에 하나 넣습니다.


  감나무는 감잎을 느낍니다. 모과나무는 모과잎을 느낍니다. 매화나무는 매화잎을 느낍니다. 뽕나무는 뽕잎을 느끼고, 느티나무는 느티잎을 느껴요.


  여린 나뭇잎을 씹으며 나무마다 어떤 빛이고 결이며 무늬인가 하고 헤아립니다. 작은 나뭇잎을 삼키며 나무마다 어떤 내음과 소리와 이야기를 건사하는가 하고 떠올립니다. 권정생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뒤 먹을거리 없어 느티잎 훑어 느티떡 먹었다는 말씀을 되씹으며, 느티잎으로 어떤 떡을 찔 만한가 생각합니다. 아마, 다른 잎으로도 떡을 찔 수 있을 테고, 땔감이 모자라면 단풍잎이든 은행잎이든, 그냥 날잎으로 오래도랙 씹어서 먹었겠지 싶습니다. 예전 사람 누구나 풀잎을 먹고 나뭇잎을 먹으면서 숨결 푸르게 건사했으리라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나뭇잎과 풀잎 먹고 살아온 어버이들이 낳고 낳고 다시 낳고 또 낳아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목숨입니다. 내 몸뚱이 가운데 어느 만큼은 나뭇잎이요 풀잎입니다. 나도 나무 가운데 하나요, 내 어버이가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가면 내 옛 어버이들 몸뚱이는 흙에서 삭으며 나무한테 스며들어요. 곧, 나무 몸뚱이 가운데 어느 만큼은 사람입니다. 나무는 사람한테 오고, 사람은 나무한테 갑니다. 나무는 사람을 살찌우고, 사람은 나무를 살찌웁니다. 나무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은 나무를 사랑합니다.


.. 나무마다 모양과 / 빛깔이 다른 단풍잎 / 우수수 날리는 ..  (불바라기 가는 길)


  최두석 님 시집 《투구꽃》(창비,2009)을 읽습니다. 여러 꽃과 나무하고 얽혀 이야기 하나 빚어서 시집을 꾸립니다. 퍽 이쁘장하네 싶습니다. 꽤 예쁘게 글을 쓰네 싶습니다.


  다만, 꽃이나 나무는 꼭 이쁘장하지 않아요. 꽃은 꽃이고 나무는 나무예요. 잘생긴 꽃이 따로 없고 못생긴 꽃이 딱히 없어요.


  꽃마다 이름이 다르고 나무마다 이름이 달라요. 머나먼 옛사람은 이녁 삶자리에서 저마다 꽃이름 풀이름 나무이름 붙이며 살았어요. 학자나 임금이 붙인 꽃이름은 없어요. 시골에서 흙 만지며 살아가던 여느 시골 여느 사람이 꽃이름 붙였어요. 물고기이든 새이든 벌레이든 모두 마찬가지예요. 모든 ‘목숨붙이 이름’은 시골에서 흙을 만지고 아끼며 사랑하던 여느 사람이 붙여요.


  게다가, 고을마다 이름이 달라요. 고을마다 다른 이름이, 멧자락이나 고개나 냇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더 작은 마을로 나뉠 적에는 자그마한 마을마다 이름이 또 달라요. 민들레 하나를 두고 수십 수백 가지 이름이 있어요. 냉이나 부추 하나를 두고도 수십 수백 가지 이름이 있어요.


  시골에서 흙을 먹으며 살아가던 옛사람은 누구나 시인이었구나 싶어요. 이녁 이름은 구태여 남기지 않았지만, 냉이, 씀바귀, 엉겅퀴, 달래, 원추리 같은 이름을 붙인 옛사람은 모두 시인이에요. 소나무, 잣나무, 미루나무, 대나무, 참나무,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벚나무 같은 이름을 지은 옛사람은 누구나 시인이에요.


  오늘 이 나라에서 시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이름을 붙이며 살아가나요. 오늘 이 나라에서 풀과 꽃과 나무를 노래하는 시인들은 어떤 이름을 지으며 삶을 짓는가요. 4346.2.1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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