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그림놀이] 구름·새 좋아 (2013.7.8.)

 


  바다에 아이들과 함께 갔는데, 모래밭 아닌 자갈밭 바닷가에 갔다. 그만 아이들과 바닷물에 들어가지 못한다. 큰아이는 몹시 서운해 하면서 그림놀이에는 그닥 재미를 안 붙인다. 돌을 주으면서 나무그늘에서 논다. 그러면 하는 수 없지. 아버지 혼자서 그림놀이를 해야지. 먼저 바닷물을 그린 뒤, 섬을 그린다. 섬 위로 드리우는 구름을 그린 다음, 해를 그리고 제비 네 마리를 그리는데, 크레파스가 굵어 제비답게 못 그렸다고 생각한다. 잠자리를 그린다. 풀포기를 그린다. 조개껍데기랑 나뭇잎을 그린다. 모두 넷씩 짝을 지어 그린다. 우리 식구는 네 사람이니 모두 넷씩 그려 본다. 그림 아래쪽에 무엇을 그려 넣을까 하다가, 사랑·꿈·빛·웃음, 이렇게 네 가지를 적는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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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3-07-09 22:59   좋아요 0 | URL
우와~!!!!!
사진만 좋은 줄 알았더니, 그림도 판.타.스.틱.하네요.
아웅~, 맞다.
우리말 안쓴다고 혼나기 전에 도망가야쥐~=3=3=3

숲노래 2013-07-09 23:35   좋아요 0 | URL
아이들이 그림 좋아하기를 바라면서, 또 아이들이 신나게 그림 그리기를 바라면서, 저도 스스로 즐겁게 그리는 그림일 뿐이에요 ^^;;;

그런데, 어느 모로 보면, 큰아이한테 배운 느낌이 있어서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도 모른답니다 ^^;;;
 
얘들아, 학교 가자
안 부앵 지음, 오렐리아 프롱티 그림, 선선 옮김, 상드린.알랭 모레노 사진 / 푸른숲주니어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22

 


어린이한테 사진을 보여주는 마음
― 얘들아, 학교 가자
 안 부앵 글,상드린·알랭 모레노 사진,오렐리아 프롱티 그림,선선 옮김
 푸른숲 펴냄,2006.12.15./18800원

 


  모두 서른 나라에서 저마다 아이들이 어떤 학교를 어떻게 다니는가 하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보여주는 책 《얘들아, 학교 가자》(푸른숲,2006)를 읽습니다. 사진을 찍은 ‘상드린·알랭 모레노’ 두 사람은 마흔여덟 나라를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이 사진책에는 서른 나라 학교 모습을 담는데, 사진작가 두 사람이 다니지 않은 나라는 다른 여러 사진작가들 사진으로 넣어요. 이 가운데에는 한국에서 신문사 사진기자로 일하는 강제훈 님 사진도 두 장 함께 들어갑니다. 한국(남녘) 학교를 다루는 자리에서는, 글을 쓴 ‘안 부앵’ 님이 “자연 속에서 흙을 만지고 물을 튕기며 놀던 아이들도 자라면서 도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게 되겠지요. 하지만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오솔길에서 다람쥐를 쫓으며 뛰고 걸었던 학교 가는 길을 잊을 수는 없을 거예요. 언제 문 닫을지 모르는 학교를 다니고 있는 시골 아이들의 고향이자, 이 시대 모든 어른이 그리워하는 마음속 고향이 사라지고 있어요(40쪽).”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국 학교는 ‘시골에서 사라지는 작은 학교’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참말 시골학교는 작습니다. 시골에서도 읍내에 있는 가장 큰 초등학교는 도시 초등학교 못지않은데, 읍내를 벗어난 면소재지 초등학교 가운데에는 전교 학생이 열이나 아홉이나 열하나인 데가 많아요. 이런 학교는 머잖아 문을 닫아요. 그러고는 더 큰 면소재지에 있는 더 큰 학교로 노란버스를 타고 다녀야 합니다.


  가만히 따지면, 한국땅 시골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더 큰 도시’로 가도록 길들어요. 시골을 떠나는 삶에 길들고, 도시바라기를 하는 삶에 길듭니다. 시골학교에서는 시골살이를 안 가르칩니다. 시골에서 이웃들이 흙을 만지거나 바닷물을 만지는 삶을 안 가르쳐요. 그런데, 도시에서도 이와 똑같아요. 도시에서도 시골사람들 시골살이를 안 보여주고 안 가르칩니다.

  이 나라 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나요. 이 나라 어른들은 학교를 어떻게 지으면서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려 하나요.


  《얘들아, 학교 가자》에는 한국 이야기가 한 꼭지 깃들지만, 머잖아 이러한 사진책에 한국 이야기가 함께 담기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초등학교 적부터 학원 뺑뺑이를 하거나 인터넷게임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꼭지 깃들는지 모르지요. 제 빛을 잃는 한국이요, 제 빛을 찾지 않는 한국이며, 제 빛과 스스로 동떨어지려는 한국이라고 생각해요.

 

 

 


  학교는 어떤 곳이어야 학교다울까 궁금합니다. 초등학교는, 중학교는, 고등학교는, 대학교는 저마다 어떤 곳일 때에 학교답다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어떤 구실을 할 때에 아름다울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줄 때에 아름다운 어른이 될까 궁금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어떤 학교를 어떤 꿈과 사랑을 담아서 지을까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품거나 어떤 이야기를 누릴까요. 시골과 도시에서 살아갈 아이들은 저마다 어떤 마음으로 자랄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책 《얘들아, 학교 가자》 끝자락에는, 책에 사진을 담은 ‘어른(사진작가)’들 짧은 말이 있습니다. 어른들 말을 살피면서, 이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어떤 사진을 어떻게 보여주려 했는가 하는 마음을 돌아봅니다. 먼저, “그 나라의 고유한 문화가 학교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짐작해 보려 애썼고요 … 우리는 이 글과 사진들이 그 아이들의 삶을 제대로 표현해 주었기를 바라요(상드린·알랭 모레노).”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한국에는 어떤 고유한 문화가 있고, 한국에 있는 학교는 아이들한테 어떤 ‘고유한 한국 문화’를 보여주거나 가르친다고 할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온통 대학입시에만 파묻힌 한국 학교 아닌가 싶어요. 한국사람다움을 배우기 어려운 학교라 할 텐데, 집이나 마을에서도 한국사람다움을 느끼거나 마주하거나 배우기 어렵습니다.


  “사진을 찍는 일은 다른 이들의 눈이 되기 위해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저만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프랑세스코 아세르비스).”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내 눈’을 북돋우겠지요. 나 스스로를 바라보고 내 이웃을 살펴보는 눈을 살찌우겠지요. 그런데, 아이들은 ‘내 눈’으로 ‘내 삶’을 얼마나 바라볼 만할까요. 아이들이 바라볼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한국 사회인가요. 사랑스러운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한국 문화인가요. 고속도로만 씽씽 달리려는 한국에서 아이들은 어떤 모습을 바라볼까요. 아파트만 더 높이 새로 짓는 한국에서 아이들은 어떤 모습을 살펴볼까요.


  “사진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 저 너머의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거지요(필립 앙드리외).”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모습조차 제대로 살피기 힘든데, 오늘 이곳을 넘는 꿈나라나 사랑나라는 얼마나 헤아릴까 알쏭달쏭합니다. 꿈이 아닌 직업전선을 생각해야 하고, 사랑이 아닌 현실안주에 파묻혀야 하는 아이들 아닌가 싶어요.


  텔레비전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나요. 인터넷과 손전화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알려주나요. 교과서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치나요. 문학책과 인문책은 아이들한테 어떤 빛이 되나요. 사진은 또 아이들한테 어떤 삶벗이나 길벗이나 이야기벗이 될 수 있나요.

 

 


  사진을 찍은 어느 한 분은 “어떤 장소에 도착했을 때, 사실 전 앞으로 제가 어떤 것을 발견할지, 어떤 것을 사진에 담게 될지 알지 못해요(마트 자코브).” 하고 이야기합니다. 어른이지만 어른도 ‘무엇을 보고 무엇을 찍을는지 모른다’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어떤 모습이 펼쳐질는지, 어떤 이야기가 스며들는지, 두근두근 설레면서 맞이한다는 뜻이에요.


  삶은 기쁨이에요. 날마다 새로운 빛이 드리우는 기쁨이에요. 사진을 찍는 이들은 기쁨을 한 장 담습니다. 삶은 노래예요. 언제나 눈부시게 환한 노래예요. 사진을 찍는 이들은 노래를 두 장 싣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기쁘게 웃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환하게 노래합니다. 사진을 찍는 동안 내 둘레 사람들은 기쁜 웃음을 나누어 받습니다. 사진을 담는 사이 내 곁 삶벗과 길벗한테 환한 노래 눈부시게 퍼집니다.


  “사진은 달라요. 사진작가는 사람들과 최대한 가까이 있어야 해요 … 사진을 찍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에요. 사진작가는 사진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자신이 그 이야기 속에 살고 있어야 하는 유일한 직업이거든요(그레구아르 코르가노).”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곰곰이 헤아립니다. 글도 그림도 사진도 모두 이야기예요. 모양은 다르지만 저마다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꽃과 풀과 나무가 서로 모양은 다르지만 저마다 푸른 숨결 뿜으며 지구별을 포근히 감싸듯, 글과 그림과 사진은 저마다 다른 모양새로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살뜰히 밝힌다고 느껴요.

 


  사진을 찍자면,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나 집이나 숲이나 목숨들 앞에서 사진작가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야 합니다. 글을 쓸 적에도, 글로 쓰려는 이야기에 나올 사람이나 집이나 숲이나 목숨들 앞에 이녁 모습 그대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구경꾼이 되어서는 찍지 못하는 사진이고, 구경꾼일 때에는 쓰지 못하는 글이며, 구경꾼이라면 그리지 못하는 그림입니다. 어깨너머로 구경할 바에야 사진기 들 까닭이 없어요. 귓동냥으로 들으려면 연필 쥘 까닭이 없어요. 호박씨 까듯 흐르는 뒷말이라면 붓을 잡을 까닭이 없어요. 사랑스러운 삶으로 맞아들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아름다운 삶이라고 느껴 글로 엮습니다. 즐거운 삶으로 함께 누리면서 그림으로 옮깁니다.


  아이들한테 사진을 보여준다 할 적에는 ‘아이들이 앞으로 아름답게 살아갈’ 모습을 찍어서 보여줍니다. 아이들한테 글을 읽힌다 할 적에는 ‘아이들이 앞으로 사랑스레 살아갈’ 모습을 엮어서 읽힙니다. 아이들한테 그림을 내보일 적에는 ‘아이들이 앞으로 즐겁게 누릴’ 모습을 꿈꾸면서 내보입니다.


  “사진을 마구 찍어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카나카 민중학교가 바로 그러했어요. 제가 찍어야 할 사람들이 작가인 저를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고, 나아가 제 작업이 진정한 참여의 중거로 남아야 했기 때문이지요(장 프랑수아 마랭).” 같은 이야기를 새삼스레 읽습니다. 사진은 한 장을 찍어도 되고, 백 장을 찍어도 되는데, 굳이 한 장조차 안 찍어도 됩니다. 사진은 열 장을 찍어도 모자랄 수 있고, 천 장이나 만 장을 찍었는데 모자랄 수 있어요. 적게 찍었기에 모자라지 않고, 많이 찍었기에 쓸 만하지 않습니다.


  아이들 찍는 사진에서 아이들과 어른이 서로 어떤 사이가 되어 만나느냐 하는 대목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내려다보는 사진이라면? 올려다보는 사진이라면? 스쳐 지나가는 사진이라면? 문득 들여다보는 사진이라면?

  사진을 찍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라도, 어린이와 어른은 누가 더 높거나 낮을 수 없습니다. 서로 같은 자리에 섭니다. 나란히 어깨동무를 합니다. 함께 웃고 같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고 보면, 어른을 어른이 찍는 사진에서도 서로 같은 자리에 설 때에 참 아름답구나 싶은 사진이 태어납니다. 어른이 어른을 찍는 사진에서도 나란히 어깨동무를 할 적에 비로소 사랑스러운 사진이 샘솟는구나 싶어요. 어른과 어른 사이에서도 아이와 어른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함께 웃고 같이 노래할 적에 환하게 빛나는 눈부신 사진 한 장 얻어요. 어린이한테 사진을 보여주려 하는 어른은, 내 이웃과 동무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돌아보도록 돕고픈 따사로운 마음이라고 느낍니다. 4346.7.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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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15] 고샅길에서
― 두 아이 함께 바라보는 마을

 


  마실을 나가려 할 적에 언제나 아이들이 앞장섭니다. 아이들은 저 앞에서 콩콩 달립니다. 우리 집 앞 고샅길에서 마을 어귀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지만, 아이들은 이 내리막이 익숙합니다. 마을 할매나 다른 사람들은 아이들 넘어질라 걱정하지만, 아이들은 걱정없이 달립니다. 가끔 이 길에서 털썩 소리 내며 넘어지곤 하지만, 훌훌 털고 일어납니다.


  고샅길이 흙길이라면 넘어져도 무릎 까질 일 거의 없지만, 이제 흙길로 된 고샅은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경운기를 모는 마을 할배로서는 시멘트길이 낫다 여기고, 또 도시로 간 이녁 딸아들이 자가용을 몰고 오니 시멘트길로 닦여야 번듯하다고 여깁니다.


  고샅길이 흙길이었을 적에는 아이들 누구나 작은 돌멩이 주워 흙바닥에 금을 그으며 놀았습니다. 도시에서도 골목길이 아직 흙바닥이었을 적에는 누구라도 조그마한 돌멩이 주워 흙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네모를 그립니다. 작은 동그라미 그리면 구슬치기 놀이를 한다는 뜻이거나 땅따먹기를 한다는 뜻입니다. 큰 동그라미를 그리면 잡기놀이를 한다는 뜻입니다. 네모를 그리면 땅밟기놀이를 한다는 뜻입니다.


  어른들이 도시와 시골 어디에서나 골목과 고샅을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바꾸는 동안, 아이들은 놀이터를 빼앗깁니다. 골목과 고샅이 흙길이면서 자동차 거의 안 다닐 적에는 골목도 고샅도 온통 아이들 차지였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놀이를 안 가르쳐 주어도 스스로 놉니다. 아이들은 책에서 배운 적 없고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어도 스스로 놉니다. 흙바닥이면 놀이바닥이고, 흙길은 놀이길입니다.


  시멘트 부은 논밭에서는 아무것도 거둘 수 없습니다. 흙으로 된 논밭일 뿐 아니라, 곱고 고소한 흙으로 이루어진 논밭일 때에 쌀이든 보리이든 감자이든 무이든 배추이든 싱그럽고 알뜰하게 거두어들입니다. 시골 논도랑을 시멘트로 바꾸고 시골 밭둑을 시멘트로 덮더라도, 논바닥과 밭바닥은 언제까지나 흙바닥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시멘트로 덮인 고샅길과 골목길도 흙길로 돌려놓아야겠지요. 앞으로는 이 나라 어른들이 바보스러움을 깨닫든, 이 나라 아이들이 자라 ‘어른들 바보스러움’을 무너뜨리거나 달래면서, 지구별에 아름다운 흙길, 흙터, 흙밭, 흙누리 이루는 사랑을 펼쳐야겠지요. 4346.7.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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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선수 기성용이 누구인지 거의 모르고 지내다가

우연하지 않게

기성용 이야기를 읽었고

여러 날 수많은 기사와 댓글까지

찬찬히 살폈다.

 

왜 이랬을까.

 

나는 어제나 오늘쯤

<이오덕 일기> 넷째 권 느낌글을 쓰려 했는데

밑글은 썼지만 아직 글머리를 못 잡았다.

오늘은 새벽부터 집살림 해바라기 시키고 청소하느라

눈이 빠지게 일했다.

 

이제 작은아이 달래서

낮잠 재울 때가 된다.

 

그래도, 기성용이라는 축구선수 이야기를 썼다면

무언가 뜻이 있었겠지.

 

기성용이라는 젊은이와 전두환이라는 늙은이를 빗댄 글은

참 슬픈 글이로구나 싶었는데,

둘 모두 너무 슬프게 이녁 삶을 망가뜨리니

하는 수 없다.

 

두 사람 스스로 아름다운 삶으로 거듭날 노릇 아닌가.

 

선풍기도 에어콘도 없이 지내는 여름이

올해로 스무 해를 넘는다.

 

부채만 있어도,

때로는 부채조차 없어도

여름은 시원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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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7-09 12:47   좋아요 0 | URL
예..내 마음이 시원하고 좋으니 좋은 여름이지요. ^^
곡식들이 알차게 무르익어 가는 뜨거운 여름입니다~.

숲노래 2013-07-09 17:07   좋아요 0 | URL
후끈후끈 더우면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요 @.@
 

기성용과 전두환

 


  축구선수 기성용은 예전에 대통령 자리에 있던 전두환이라는 사람을 알까. 군사쿠테타를 일으켜 대통령 자리를 거머쥐다가 물러난 전두환은 축구선수로 뛰는 기성용이라는 사람을 알까. 두 사람은 서로를 알는지 모르고, 서로를 모를는지 모른다. 그런데 두 사람은 한 가지 모습이 꼭 닮았다. 이녁 스스로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한테 어떻게 퍼지는가를 모르고, 이녁 스스로 하는 일을 스스로 돌아볼 줄 모른다.

  전두환이라는 사람한테 물린 ‘죄값’이나 ‘추징금’은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있을 때에 따지지 않았다.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 물러나고 한참 지나서야 겨우 따질 수 있었다. 그리고, 전두환이라는 사람한테 물리는 죄값이나 추징금은 아직 ‘시효가 끝나’지 않았다.


  기성용이라는 축구선수가 저지른 ‘잘못’이나 ‘바보스러운 몸가짐’은 이녁이 훨씬 젊거나 어릴 적에 저질렀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도 이러한 잘못과 바보스러운 몸가짐을 되풀이하니까 뭇화살을 맞는다.


  내가 전두환이라는 사람을 봐주느니(용서하느니) 감싸느니 하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전두환이건 누구이건 ‘사람 탓’을 하지 말라는 옛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렇게 흐르도록 내몬 제도권 톱니바퀴 얼거리를 따질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전두환이라고 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은 오늘까지도 예쁘지 않고 착하지 않으며 참답지 않다. 참 슬픈 노릇이다. 스스로 사람다움을 찾지 않으려는 모습은 얼마나 가녀리며 딱한가.


  내가 기성용이라는 사람을 함부로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말할 까닭조차 없다. 그런데 참 안쓰럽고 안타깝다. 그 아름다운 스물너덧 풋풋한 나이에 아름다운 사랑으로 나아갈 낌새가 안 보이니 안쓰럽고 안타깝다. 기성용은 하루빨리 아기를 낳아 아이가 자라 보아야 무언가 깨우칠까. 철없이 살아가면 기성용 스스로한테뿐 아니라, 옆지기와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 모두한테까지 나쁘게 퍼지는 줄 조금도 못 깨달을까.


  글을 아무리 잘 써도 사람됨이 엉망이라면 기쁘지 않다. 그림이 아무리 훌륭해도 착한 넋이 없으면 반갑지 않다. 만화도 사진도 노래도 춤도 이와 같다. 손재주 발재주 몸재주 좋다 한들 무엇이 대수로울까. 아름다운 사랑이 없다면 빼어난 손재주나 발재주나 몸재주는 한낱 ‘다람쥐 쳇바퀴질’에서 그친다.


  기성용도 전두환도 착한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나는 국가대표 선수들 공차기보다 동네 아이들 공차기가 훨씬 재미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그런데, 동네 아이들이 서로 다투고 혼자 공 차지하겠다며 동무한테 건네주지 않고 다툼질을 하면, 동네 아이들 공차기마저 재미없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기성용 선수여, 축구라는 운동경기를 이녁 혼자서 하는가? 전두환 할배여,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이녁 혼자서 맡아 나라를 돌보는가? 제발 제 넋 좀 찾기를 빈다. 4346.7.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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