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주는 책 돌려받기

 


  누군가한테 책을 빌려준다면, 이 책을 즐겁게 돌려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돌려받을 생각이 아니라면 빌려주지 않아요. 그냥 선물로 주거나 아예 안 빌려주어요. 누가 나한테 책을 빌려준다면 그이는 책을 즐겁게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그이가 즐겁게 읽은 책을 나도 즐겁게 읽은 다음, 그 책 하나를 놓고 즐거이 오순도순 이야기꽃 피우고 싶을 테지요.


  서로 아름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책을 빌려줍니다. 책에 깃든 아름다움을 기쁘게 나누고 싶으니 책을 빌려주고 빌려받습니다. 책 하나를 빌어 마음을 나눕니다. 책 하나를 사이에 놓고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빌려준 책을 오래도록 돌려받지 못한다면, 나한테서 책을 빌린 분은 그 책을 잊었을까요. 내가 누군가한테서 빌린 책을 오래도록 돌려주지 않는다면, 나한테 책을 빌려준 그이를 내가 잊었을까요.


  생각해 보면, 책은 얼마든지 빌려서 읽거나 빌려줄 수 있어요. 책종이는 닳을 테지만 줄거리는 누구한테나 똑같아요. 곰곰이 살피면, 책은 얼마든지 사서 읽을 수 있어요. 굳이 빌려야 하지 않아요. 새책방에 있으면 새책으로 사고, 판이 끊어진 책이라면 도서관을 찾아다닐 수 있으며, 여러 날이나 여러 해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찾아낼 수 있어요.


  돈을 누군가한테 빌려주려 한다면, ‘빌려준다’는 생각 아닌 ‘준다’는 생각을 하라 했어요. 돌려받을 날을 기다리면서 빌려주면, 빌려받는 사람이 힘들어 한다 했어요. 책을 빌려줄 적에도 돌려받을 날을 손꼽으면서 빌려주면, 빌려받는 사람이 힘들어 할 수 있어요. 사람마다 책을 읽는 빠르기가 다르고, 사람마다 꾸리는 삶이 달라, 나는 한두 시간만에 쉬 읽어낸 책이라 하지만, 다른 사람은 여러 해에 걸쳐 미적미적 읽을 수 있어요.


  돈을 빌린 사람이 즐겁게 잘 쓴 뒤 기쁘게 갚을 수 있어요. 돈을 빌리고 나서 오래지 않아 갚을 수 있고, 열 해나 스무 해 지나 갚을 수 있어요. 책을 빌린 사람이 바로 오늘 읽어서 돌려줄 수 있고, 열 해나 스무 해 지난 어느 날 문득 깨달아 뒤늦게 읽고는 뒤늦게 알맹이 알아채어 기쁘게 돌려줄 수 있어요.


  책을 읽는 우리들은 줄거리를 마음에 새겨요. 물건을 손에 쥐지 않아요. 책을 읽는 우리들은 이야기를 가슴에 담아요. 두툼한 종이꾸러미를 어깨에 짊어지지 않아요. 마음으로 읽어 마음으로 책을 선물합니다. 가슴으로 담은 책을 내 가슴에 놓은 사랑을 헤아리며 빌려줍니다. 4346.7.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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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7-26 22:14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읽으니 문득 오래 전에 자주 '책을 빌려 읽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책을 빌려주는 사람'이 있었어요. 한달에 얼마씩 내면 '무한정'으로 책을 빌려 읽을 수 있었는데, 알바생 비슷한 젊은 친구가 '돌려가며 읽는 책'을 책가방에 잔뜩 담고서 여의도의 여러 빌딩 속 '사무실'을 두루 누비며 다녔어요.

'회원' 입장에서는 정말 책값에 대해 아무런 부담없이 책을 실컷 빌려 읽고 돌려줄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그리고 '빌려읽는 책'들이 주로 이름난 문학작품들 중심이어서 금새 다 읽고 다시 빌리기를 반복하고 했던 것 같아요.

그게 아마도 1989년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까마득한 옛날이고 또 지금 생각해 보면 아련한 옛날 이야기 같네요.

숲노래 2013-07-26 22:34   좋아요 0 | URL
그런 재미난 '책 빌려주는 사람'이 있었네요.
오늘날에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그무렵은 책이 아주 널리 사랑받던 때였구나 싶어요.
 

아이들이 아플 적에

 


  아침부터 볼이 부어 아프다는 큰아이를 안고 달래고 어르며 생각한다. 새벽 여섯 시에 아프다며 잠이 깼는데, 이 이른 때에 병원에 가야 하나 싶다가,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며 생각한다. 아이가 볼이 부은 까닭을 헤아리고, 내가 예전에 볼이 부었을 적에 어떻게 나았는가 돌아본다. 볼이 부었대서 병원에 간들 뾰족한 수가 없다. 주사나 항생제 처방을 하고 그치겠지. 게다가 작은아이를 깨워 안고는 택시 불러 병원 다녀오기도 너무 벅차다.


  작은 수건을 찬물에 적신다. 아이 볼에 댄다. 품에 안고 괜찮다 얘기하면서 자리에 눕힌다. 수건을 뒤집어 볼을 식히고, 수건을 다시 빨아 볼에 댄다. 아침이 되어 밥을 차린다. 큰아이는 밥을 못 먹고 작은아이만 먹인다. 작은아이를 밥 먹이고 나니 큰아이가 깬다. 큰아이를 달래고 보듬으면서 볼을 식히고는 드러누워 그림책을 읽어 준다. 큰아이 곁에 누워 찬물수건 갈다가 어느새 큰아이도 나도 나란히 곯아떨어진다. 같이 안 놀아 준다며 칭얼거리던 작은아이도 곁에서 함께 잠든다. 큰아이가 깨면 작은아이는 색색 잔다. 큰아이가 다시 잠들면 작은아이가 이내 일어난다. 가만히 살피니,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몸이 고단하고 나도 몸이 고단하구나 싶다. 4346.7.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아빠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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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7-26 22:02   좋아요 0 | URL
글 제목을 보고는 아이들이 많이 아프면 큰일이겠다 싶었는데 큰 병이 아니라서 참 다행이네요. 어릴 적에는 이래 저래 참 자주도 아팠다가 또 금새 나으면서 그렇게 컸던 것 같아요.

제 아이들은 어느새 다 커서(큰 애는 대학생이고 작은 애가 올해 고3이네요) 언제 '아프다'는 얘기를 들어본 지도 꽤나 오래 되었다 싶어요. 어릴 땐 '놀라고 당황스러워'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마구 정신없이 뛰어다녔었는데 말입니다. ㅎㅎ

숲노래 2013-07-26 22:35   좋아요 0 | URL
모두 다 어버이 되면서 어릴 적을 되새기고,
아이들도 어버이 되면서
어린 날 얼마나 사랑받고 자랐는지를 돌아보리라 생각해요~
 
동시란 무엇인가
최지훈 글, 박경희 그림 / 비룡소 / 199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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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37

 


평론이 할 일
― 동시란 무엇인가
 최지훈 글
 민음사 펴냄,1992.10.20./7000원

 


  아름다움을 그릴 때에 문학이 됩니다. 아름다움을 그리지 않을 때에는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은 예쁘장한 빛깔이나 무늬가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비싼 보석이나 옷차림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사랑스레 나누는 웃음과 눈물입니다. 아름다움은 살가이 주고받는 이야기입니다.


  즐겁게 웃으며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모습이 모두 아름다움입니다. 슬퍼서 울지만 씩씩하게 일어서며 새 길 꿋꿋하게 걸어가는 여느 사람들 하루가 모두 아름다움입니다. 환한 노래를 불러 따사로운 마음 나누는 사람들 삶이 모두 아름다움입니다. 따사로운 손길이 아름다움이요, 너그러운 눈길이 아름다움입니다. 나뭇가지 뭉텅뭉텅 자르고 이리저리 휘도록 억지로 만든 가녀린 소나무는 아름다움이 아니에요. 이렇게 괴로운 나무는 그만 비싼 값에 사고팔리는 상품이 되고 말아요. 아름다운 숨결 되도록 태어난 나무인데, 바보스러운 사람들 손을 타면서 아픈 생채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 아픈 생채기를 보듬는 누군가 있으면, 새삼스레 아름다움으로 거듭납니다. 권력을 노리거나 이름값에 사로잡히거나 돈에 휘둘리는 슬픈 사람들을 살살 타일러 착하면서 참다운 길로 접어들도록 이끄는 누군가 있으면, 이 또한 아름다움이에요.


..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때 그 어린이들은 우리의 새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튼튼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몸을 튼튼히 하면서 정직한 마음들을 가꾸며 자랐습니다. 어려운 시절, 전쟁까지 겪으면서도 꺾이거나 절망하지 않고 나라를 지키고 가꾸어 오늘날 세계에 자랑하는 훌륭한 나라를 이룩한 어른들이 되었고,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은 이 노래를 배우고 즐겁게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우리 나라는 언제나 싱싱한 새라나이며, 이 노래를 부르는 어린이는 서로 돕고 정직하게 자라면서 싸움하지 않는 평화의 나라를 지켜 가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유명하고 훌륭한 노래를 지으신 분도 육석중 선생입니다 ..  (16쪽)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밝히면 평론이 됩니다.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을 어떻게 즐겼는가 하고 보여줄 때에도 평론이 됩니다. 어떤 예술 흐름이나 문예 흐름에 따라 재거나 따진다고 해서 평론이 되지 않습니다. 문학은 동심천사주의도 아니고 사실주의도 아니며 현실주의니 이상주의도 아닙니다. 문학은 그저 문학이지, 문학에 다른 이름을 붙이지 못해요.


  그림이나 사진이나 노래나 춤을 바라볼 때에도 이와 같습니다. 그림은 그림일 뿐입니다. 사진은 사진일 뿐입니다. 물감으로 그리거나 연필로 그리거나 크레파스로 그리거나 모두 그림입니다. 붓으로 그리거나 먹으로 그리거나 모두 그림이에요. 목탄이나 숯으로 그려도 그림이며, 모래밭에 나뭇가지로 그려도 그림이지요.


  문학이나 그림이나 사진 모두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아름다움을 이야기 한 자락 실어서 보여줍니다. 곧, 아름다움을 보여주기에 문학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고, 문학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라는 이름이 붙을 적에는 이야기 한 자락 나눌 수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겉이나 틀, 한자말로 하자면 형식으로는 문학 꼴이나 그림 꼴이나 사진 꼴을 갖추었어도,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못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면, 문학이 될 수 없고, 그림이 될 수 없으며, 사진이 될 수 없습니다.


  문학평론이라면, 문학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밝힐 때에만 문학평론입니다. 예술 흐름이나 문예 흐름을 놓고 재거나 따지면 연구논문이에요. 이런 글은 학술논문입니다. 이런 글에는 ‘평론’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어요. 연구논문은 연구논문이지 평론이 아닙니다. 학술논문은 학술논문일 뿐, 문학평론이 되지 않아요.


  문학평론으로 주고받을 글을 쓰고 싶다면, 스스로 문학을 어떻게 즐겼는가 하고 이야기하면 됩니다. 아름다운 이야기 깃든 문학을 읽으면서, ‘문학 즐김이’로서 어떻게 문학을 즐기면서 내 삶에 어떠한 새 이야기 샘솟는가 하는 대목을 밝히면 됩니다.


.. 동요시는 일제 강점기부터 6·25전쟁 이후까지 활발하게 발표되었으나, 5·16 이후에는 자유시로서 동시가 왕성하게 발표되었고, 동요시는 20년 동안 푹 쭈그러들었습니다. 새로운 동요시의 발표가 없으니 좋은 새 동요 가사가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동시는 세련되었으나 어린이들이 쉽게 즐기기엔 무리한 점이 많았고, 새로 불리는 동요 가사들의 대부분은 시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  (62쪽)


  칭찬을 하는 글은 칭찬글입니다. 추켜세우는 글은 추켜세움글입니다. 기리는 글은 기림글입니다. 칭찬글이나 추켜세움글이나 기림글은 평론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문학작품을 읽고서 참 좋았다고 느껴, 이렇게 좋은 문학작품 내놓은 사람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겠지요, 하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글은 칭찬글이나 추켜세움글이나 기림글이에요. 이런 글을 쓰면서 섣불리 평론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돼요.


  평론이란 아주 다른 글이에요. 그렇다고 평론은 차갑게 쓰는 글이 아닙니다. 아무나 못 쓰는 글도 아니면서, 아무렇게나 쓸 수 없는 글이 평론입니다. 칭찬에도 추켜세움에도 기림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쓸 수 있을 때에 평론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어떻게 아름다우며 어떤 이야기인가를 밝히는 한편, 내 삶에서 어떤 아름다움과 새 이야기가 샘솟는가를 드러내는 글에는,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칭찬이나 추켜세움이나 기림이 끼어들지 못하겠지요.


  평론글은 수수하게 쓰기 마련입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수수한 자리에서 샘솟거든요. 평론글은 투박하게 쓰기 마련입니다. 즐거이 나누는 이야기란 서로 투박하게 주고받는 말씨에서 자라거든요.


.. 대개 시인은 시를 쓸 때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아껴서 나타냅니다. 깊고 큰 생각이라도 될수록 적은 수의 말로 나타내어야 좋은 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마디의 시어에는 수많은 생각과 느낌을 담게 됩니다. 시를 이해하기 힘든 까닭도 여기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시를 어렵게 써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해하기 쉬울수록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짧은 글 속에, 큰 생각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담는 일, 그것이 시를 빚는 기본입니다. 그러나 정작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은 율격으로 된 형태에 있습니다. 짧은 글 속에 큰 뜻을 담은 말이라면 속담이나 격언이나 경구나 표어도 있지만, 그런 것들이 시가 될 수 없는 것은 율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  (74∼75쪽)


  최지훈 님이 한국 동시 작가 이야기를 적은 책 《동시란 무엇인가》(민음사,1992)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최지훈 님은 1977년에 문덕수·이재철 추천으로 아동문학평론가로 되었다 하며, 《동시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1986∼1988년 사이에 쓴 글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는 열다섯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윤석중, 권오순, 신현득, 이오덕, 유경환, 김종상, 박경용, 석용원, 김녹촌, 문삼석, 최춘해, 김구연, 공재동, 전원범, 정두리, 이렇게 열다섯 사람입니다.


  열다섯 사람을 이야기하며 붙인 글이름을 보면, ‘노래 할아버지 윤석중 선생’, ‘통일을 기원하는 만년소녀의 기도’, ‘동요시의 즐거움’, ‘평화를 갈구하는 시정신’, ‘인간을 살리는 자연’, ‘땀에 젖은 무명치마’, ‘어른은 모르는 불빛과 빛깔’, ‘썩어야 다시 사는 생명’, ‘바닷마을, 산마을’, ‘이슬의 노래’, ‘생명의 젖줄, 흙의 노래’, ‘사랑과 그리움’, ‘별, 풀잎, 이슬 그리고 새’, ‘꿈의 공을 차라’, ‘물음표 시인의 정결한 행복’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 《동시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자꾸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맙니다. 이 책을 평론책이라 할 만한지 알쏭달쏭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작가 작품인가를 떠나, 〈새나라의 어린이〉라는 동요를 어릴 적부터 익히 들었고, 학교에서는 이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지만, 나는 하나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가 무엇이 좋은지 알 노릇이 없는데, 어느 어린이라 하더라도 잠꾸러기가 될 턱이 없습니다.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아이들 가운데 잠꾸러기는 거의 없습니다. 아니, 없다시피 합니다. 아이들은 늦게까지 놀고, 아침에 또 일찍 일어나서 놉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일이 많아 바쁘면, 아이들은 퍽 어린 나이에도 어버이 일손을 거듭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아이들은 스스로 나서서 어버이 곁에서 도우면서 살아요. 나는 국민학생 때부터 〈새나라의 어린이〉 같은 동요나 동시가 거짓말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어린이)한테 어른이 들려줄 말이란 고작 이뿐인가 하고 생각했어요. ‘퐁당 퐁당 돌을 던져라’ 하는 동요를 어른들이 부르라 하니 어쩔 수 없이 부르지만, 도시에는 냇물이 없는데 이런 노래 불러서 뭐 하자는 뜻인지 알 수 없었어요. 냇물에서 누나가 나물을 씻는다니, 이런 모습을 본 적도 없는데, 노랫말만 이쁘장하게 붙인 셈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우리(어린이)를 얕잡거나 낮추어 본다 하더라도 이렇게 바보스레 얕잡거나 낮추어도 되는가 궁금했어요.


  내가 즐기던 동요로는 〈고향의 봄〉과 〈겨울나무〉가 있어요. 두 가지 노래에 나오는 이야기도 도시 아이였던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앞으로 내가 살아갈 길을 이 동요에서 읽을 수 있었어요. 다만, 어릴 적에는 〈고향의 봄〉과 〈겨울나무〉를 쓴 사람 이름을 몰랐고,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동요를 쓴 사람 이름을 제대로 알았으며, 이 동요를 쓴 사람 작품도 어른이 된 뒤에 처음으로 읽었어요.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하는 동요도 재미나게 부르면 깜찍하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래는 두 번 세 번 부르면 머리가 아파요. 이야기가 보이지 않고, 그저 이쁘장한 말만 죽 늘어놓으려 하니, 마음으로 와닿지 않아요. 우리 집 두 아이한테는 이런 동요 불러 주지 않기도 하지만, 누군가 이런 동요 불러 준다 하더라도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런 동요는 ‘동심천사주의’조차 아니라고 해야 하는구나 싶어요. 아이들을 철부지나 인형으로 삼는 슬픈 어른들 허수아비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야지 싶어요.


  어린 두 아이를 돌보며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나는 아이들한테 이원수 님 동시에 가락을 입힌 〈햇볕〉 같은 작품을 날마다 여러 차례 부릅니다. “햇볕은 고와요,하얀 햇볕은, 나뭇잎에 들어가서 초록이 되고, 봉오리에 들어가서 꽃빛이 되고, 열매 속에 들어가선 빨강이 돼요.” 하는 노랫말에서 이야기를 느끼고 사랑과 생각과 꿈을 읽습니다. 그렇구나, 햇볕이 이렇게 고운 손길로 나무와 풀을 살리고 꽃과 열매를 맺으니, 사람들도 아름답게 삶을 누리는구나, 사람들은 서로서로 햇볕 같은 마음씨로 어깨동무할 때에 즐겁겠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원수 님 동시 〈겨울 물오리〉도 아이들한테 날마다 들려주는 동요이자 동시입니다. “얼음 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 귀여운 새야. 나도 이젠 찬 바람 무섭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하는 노랫말에서 삶을 느끼고 웃음과 눈물을 함께 깨닫습니다. 그렇구나, 오리들은 한겨울에도 얼음장에서 노는구나,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오리뿐 아니라 다른 짐승들은 어떻게 지내지, 또 풀과 나무는 겨울을 어떻게 나고, 씨앗은 새봄을 어떻게 기다리는가, 하고 곰곰이 헤아려요. 아이들한테 이 동요와 동시를 들려주면서도 스스로 새로운 생각을 자꾸자꾸 틔웁니다.


.. 박경용 시인은 1960년대 이래 신현득·유경환·김종상 시인 들과 더불어 우리 나라 동시의 수준을 높이 끌어올린 분입니다 … 박경용 시인은 동시뿐 아니라 어른을 위한 일반 자유시도 쓰고 시조도 열심히 발표했기 때문에 그 방면에도 만만치 않은 업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어린이를 위한 시조, 이른바 동시조를 처음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조 운동을 열심히 펼쳐 나가기도 했습니다 ..  (127쪽)


  최지훈 님이 쓴 《동시란 무엇인가》에서 이원수 동시를 미처 못 다루었는지 모릅니다. 윤동주와 백석, 권태응과 권정생 동시를 아직 못 다루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최지훈 님은 시와 동시를 아이들한테 어떻게 밝히려 하는지 좀 궁금합니다. “정작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은 율격으로 된 형태에 있습니다(75쪽)” 하고 말하는데, 율격이란 무엇일까요. 율격이라 하는 틀(형식)이 없으면 시도 동시도 동요도 될 수 없을까요.


  그러면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빚는 한국 동시와 시에서 율격은 어떤 틀을 보여줄까요. 아쉽게도, 최지훈 님이 쓴 《동시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는 한국 동시와 시에서 갖출 율격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밝히지 않습니다. 3·4조나 4·4조나 7·5조가 어떻게 해서 태어나고, 이러한 율격은 한국말 빛깔과 어떻게 어울리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합니다.


  율격을 곰곰이 살피면, 율격은 글을 읽는 사람 스스로 빚습니다. 낱말 숫자가 4·5나 4·6으로 이루어졌어도, 읽는 사람으로서는 4·4나 3·4로 얼마든지 읽을 수 있어요. 율격은 글잣수가 아니에요. 율격은 마음으로 그리는 가락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글잣수로는 율격을 따지지 못해요. 글을 쓴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이 마음속으로 찬찬히 가락에 맞추면서 율격을 누립니다. 생김새만으로는 율격을 이야기할 수 없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생김새만으로는 율격을 이야기할 수 없기에, 율격은 처음부터 따질 까닭이 없기도 하고, 율격은 작가와 독자가 얼마든지 새롭게 지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동시 작가들이 동요를 널리 짓지 못한다 하더라도 작곡가들이 아름다운 동시에 아름다운 가락을 입히면 아름다운 동시이면서 동요가 돼요. 이런 모습은 백창우 님이 아주 잘 보여줍니다. 율격이나 운율이 겉으로 드러나기에 아름다운 동요 가락을 짓지 않아요. 동시에 깃든 아름다운 이야기를 느껴서,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아름다운 가락으로 옷을 입히니 아름다운 동요가 됩니다.


  평론이란,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밝히는 글이라고, 또한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을 어떻게 즐겼는가 하고 보여주는 글이라고, 앞서 이야기했어요. 동요란,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가락을 입혀서 밝히면서 태어나는 열매입니다. 아름다움을 그린 문학을 어떻게 즐겼는가를 가락을 입혀서 보여주기에 동요가 태어납니다.


  모든 실마리는 아름다움과 이야기에 있어요. 아름다움을 밝히고 이야기를 찾자는 뜻에서 쓰는 글인 평론입니다. 아름다움인지 아닌지 밝히지 못한 채 칭찬만 한다면 평론이 아닌 칭찬글입니다. 칭찬만 하는 글이란 문단을 이리저리 줄세우기 하듯 쪼갭니다.


  최지훈 님은 “박경용 시인은 1960년대 이래 신현득·유경환·김종상 시인 들과 더불어 우리 나라 동시의 수준을 높이 끌어올린 분입니다(127쪽)” 하고 말하기는 하지만, 최지훈 님은 ‘동시 수준’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고, ‘높은 동시 수준’이란 무엇인지 얘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 때에 이 나라 동시 눈높이가 올라갈까요? 동시 눈높이는 왜 높이 올라가야 할까요?


  아이들이 즐겁게 누리면서 어른들은 이 나라 삶과 삶터와 삶자락을 아름답게 일구는 몫 즐거이 맡으면 될 노릇 아닐까요? 아이들한테 어떤 마음밥을 동시라는 그릇으로 나누어 주려는 어른일까요? 동시 평론을 할 적에는 아이들 삶을 꾸밈없이 바라볼 뿐 아니라, 슬기롭게 살펴보면서, 아이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똑똑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시지옥이 고스란히 있고, 사회차별과 분단과 불평등이 언제나 드러나는 이 나라에서, 어른들은 무엇을 하고 아이들은 어떻게 기운을 내야 하는가를 함께 밝힐 때에 비로소 문학도 되고 평론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 어린이는 설움에만 젖어 있을 수 없습니다. ‘미래의 인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새 세계를 열어야 할 생명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린이는 아무리 기림을 받고 격려를 받아도 부족합니다. 어린이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어 날기도 하고, 꽃과 같이 아름다움도 창조하고, 창공 높은 곳에 이상으로 빛나는 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254쪽)


  ‘미래의 인간’과 ‘희망’과 ‘설움’이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새 세계’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최지훈 님이 《동시란 무엇인가》를 쓴 때는 1986∼1988년입니다. 이무렵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는가요? 이무렵 한국에서 동시를 쓴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들려주려 했는지요?


  최지훈 님은 책 머리말 첫 줄에서 “나는 여의도 광장 같은 데서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활발하게 도는 아이들을 보면 참 건강하고 씩씩하게 보여서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5쪽).” 하고 말합니다. 뛰노는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튼튼하고 씩씩해 보일 테지요. 그런데, 아이들은 여의도 광장 같은 데 빼고 어디에서 이렇게 놀 수 있나요? 서울이나 큰도시 아이들은 몇 군데 광장 빼놓고 어디에서 홀가분하게 뛰노는가요? 아니, 서울이나 큰도시 아이들은 제대로 뛰놀 겨를조차 없이 학원과 입시에 어린 나이부터 휘둘리지 않나요? 시골 아이들도 시골에서 뿌리내리며 사는 길이 아니라 도시로 내몰리거나 떠나게끔 등떠밀리지 않나요?


  어린이문학평론이라 하는 《동시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으며 어린이문학과 평론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어린이문학은 어떤 길로 나아갈 때에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고 곱씹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평론하는 글은 사회와 나라와 교육과 문화와 삶을 어떻게 바라보면서 어떤 이야기를 빚을 때에 즐겁게 나눌 만한가 하고 되새깁니다. 4346.7.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어린이문학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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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책 40] 곁에서

 


  곁에서 지켜보니 사랑입니다.
  두 눈으로 지켜보고,
  마음으로 지켜봅니다.

 


  곁에서 지켜보지 못하면, 제대로 사랑할 수 없구나 싶어요. 그런데, 몸과 몸을 가까이 두어야 곁에서 지켜본다고 하지 않아요. 멀리 떨어졌어도 마음과 마음으로 같이 있을 때에, 비로소 곁에서 지켜본다고 할 만하다고 느껴요. 그저 몸과 몸을 가까이 두는 일이란, 지켜보는 사랑스러운 눈길 아닌, 윽박지르거나 억누르는 차가운 눈길이리라 생각해요.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면서 아낄 수 있기에, 몸과 몸은 멀리 떨어진다 하더라도 늘 새롭게 만납니다. 마음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아요. 마음으로 생각을 뻗어요. 마음으로 삶을 짓습니다. 4346.7.2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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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울음 삶의 시선 23
고영서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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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울음
[시를 말하는 시 31] 고영서, 《기린 울음》

 


- 책이름 : 기린 울음
- 글 : 고영서
- 펴낸곳 : 삶이보이는창 (2007.3.30.)
- 책값 : 6000원

 


  바람이 올 때에는 바람결이 얼굴에 와닿기 앞서 먼저 소리로 알아챕니다. 풀잎과 나뭇잎 사르르 건드리면서 온통 쏴아아 뒤집는 소리를 내요. 커다란 나무도 바람결 따라 살짝 흔들리고, 나뭇가지는 나뭇가지대로 이렁저렁 춤을 추며, 풀잎은 풀잎대로 파닥파닥하면서 잎 뒤쪽 허연 곳이 드러나 반짝반짝합니다.


.. 길가에 널브러진 하찮은 풀이라도 / 고마리야, 여뀌, 강아지풀아 부를 때면 / 그것들 화안하게 흔들어 대는데 ..  (공명共鳴)


  바람이 오면 여름이든 겨울이든 늘 시원하네, 하고 느낍니다. 여름에는 더위를 식히는 시원함이라면, 겨울에는 추위를 한껏 베푸는 시원함입니다. 여름에는 바람이 불어 더위를 가시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겨울에는 바람이 있어 겨울다운 추위가 온 들과 숲에 드리우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여름이 있어 풀이 자라고 잎이 돋으며 온 목숨이 싱그러이 춤춥니다. 겨울이 있어 풀이 죽고 잎이 잠들며 온 목숨이 고요히 쉽니다.


  새벽에 기운차게 일어나 저녁에 즐겁게 잠자리에 들듯,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은 해마다 찬찬히 되풀이되면서 우리 삶을 맑게 빛냅니다. 봄에는 봄빛으로 물들여요. 여름에는 여름빛으로 적셔요. 가을에는 가을빛으로 가꾸고, 겨울에는 겨울빛으로 보듬습니다.


  바람은 우리한테 오늘 하루 어느 철인가를 알려줍니다. 바람빛은 우리한테 오늘 하루 어떤 삶인가를 깨우칩니다.


.. 떡갈나무 아래 잠이 들었네 / 저녁 먹고 평상에 누우면 할머니 옛이야기 따라 / 흘러가는 물소리 ..  (천잠天蠶)


  작은아이 아침을 먹이다가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소리를 들으며 문득 멈추어 바깥을 내다봅니다. 작은아이도 아버지 따라 문득 밥먹기를 멈추고 함께 바깥을 바라보았을까요. 나는 바람소리 따라 풀잎과 나뭇잎 바라보느라 작은아이 얼굴은 못 봅니다. 그저, 작은아이도 아버지 따라 마당을 내다보면서 풀잎과 나뭇잎이 한들거리는 빛을 느끼겠거니 생각합니다.


  바람이 불 적에 나비는 바람을 탑니다. 바람이 불 때면 잠자리는 바람을 타요. 제비도 까마귀도 까치도 비둘기도 바람을 타요. 모든 새들은 바람을 타며 하늘을 훨훨 납니다. 바람을 타지 않고서는 날 수 없어요. 바람이 없으면 어느 새도 날갯짓 하지 못합니다.


.. 무얼 보고 나를 그리 믿어줬을까 그 할마씨 ..  (오치동 할미꽃)


  사람한테는 바람 없으면 숨을 못 쉬어 죽음이 찾아오겠지요. 사람들은 바람을 타고 날지는 않으나, 바람을 마시면서 숨을 쉽니다. 들숨 날숨 천천히 고르게 알맞게 날마다 꾸준히 숨을 쉽니다.


  사람들이 쉬는 숨은 몸뚱이를 살리는 바람인 한편, 풀과 나무를 살리는 숨결입니다. 풀과 나무는 사람을 살리고, 사람은 풀과 나무를 살려요. 들과 숲에 사람을 비롯해 온갖 벌레와 새와 짐승이 없다면, 들과 숲은 푸른 빛깔을 건사하지 못해요. 거꾸로, 사람과 벌레와 새와 짐승도, 들과 숲이 없다면 맑은 목숨 지키지 못합니다.


  바람은 사람과 숲을 잇는 고리라고 할까요. 바람은 들과 사람을 잇는 다리라고 할까요.


  바람맛을 느끼면서 하루를 헤아립니다. 바람빛을 살피면서 아이들 눈빛을 바라봅니다. 바람결을 어루만지면서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겨요. 바람내음 맡으며 오늘 하루 즐겁게 누리자고 생각합니다.


.. 참치를 잡으러 수퍼에 간다 / 단돈 천 원이면 질리도록 먹을 수 있는 참치 / 비린내가 나지 않아 / 아이들이 더욱 좋아하는 참치 / 장바구니 가득 싣고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면 / 포만감에 젖어든 우리는 / 세일가격에 겹겹이 쌓아둔 참치를 본다 ..  (참치를 찾아서)


  고영서 님 시집 《기린 울음》(삶이보이는창,2007)을 읽습니다. 고영서 님은 조그마한 시집에서 ‘울음소리’를 들려줍니다. 울음소리는 기린이 낼까요 시인이 낼까요. 울음소리는 바람에 실려 찾아들까요, 시인 마음속에서 샘솟을까요.


  사람들 누구나 슬퍼서 울지만, 사람들 누구나 기뻐서 웁니다. 슬플 때에도 울고 기쁠 적에도 울어요. 눈물은 슬플 때뿐 아니라 기쁠 때에도 나요. 웃음은 기쁠 때에도 나면서 슬플 때에도 나요.


  그러면, 삶이란 웃음과 눈물이 갈마드는 하루가 되나요. 삶이란 기쁨과 슬픔이 골고루 섞인 나날이 되나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있어요. 살림과 죽음이 나란히 있어요. 하늘과 땅이 마주보아요. 어둠과 빛이 어깨동무를 해요. 그런데, 두 가지는 쪼개지 못해요. 두 가지는 늘 하나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똑같이 소담스러운 사람입니다. 살림과 죽음은 동떨어지지 않아요. 하늘도 땅도 한동아리 지구별입니다. 어둠과 빛은 서로 어우러져요. 곧, 울음소리를 들려주는 노래란, 웃음소리를 나누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 찢긴 딸아이 바지에 개나리꽃을, / 다리미에 눌어붙은 남편의 셔츠에는 / 아름드리나무를 심어놓았다 / 자전거 타다 넘어진 아들의 무릎에선 /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팔랑나비 ..  (아플리케)


  노래하고 싶은 삶이 이야기 되고, 이야기는 싯말 하나로 내려앉습니다. 춤추고 싶은 꿈이 사랑 되어, 사랑은 웃음과 눈물 한 자락으로 살포시 태어납니다. 울음소리 내는 사람들이 시를 읽고 시를 쓰며 시를 이야기합니다. 4346.7.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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