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짝물

 


  한여름 무더위 내리쬐는 한낮, 아이들과 더위 식히러 어디를 다닐까 생각하다가, 마을에서 천등산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가 떠오른다. 발포 바닷가에는 사람이 많아 아이들이 느긋하게 놀기 어려울 테고, 짠물에서는 모래알 씻기느라 번거롭다. 올해에는 아직 골짝물에서 놀지 않았구나 싶기도 해서, 자전거수레와 샛자전거에 두 아이 태우고 달린다. 저번에 이곳으로 올 적에는 걸어서 왔다. 오늘은 자전거로 달리는데, 생각보다 비탈이 가파르다. 아니, 맨몸 자전거라면 이만 한 비탈이야 거뜬히 올라갈 테지만, 수레에 샛자전거를 달았으니 비탈에서 낑낑댄다.


  무거운 자전거수레와 샛자전거로는 벅차다 싶은 데는 내려서 자전거를 끌어당긴다. 비탈이 끝나면 다시 자전거를 달린다. 비탈이 또 높으면 내려서 자전거를 끌어당긴다. 이때에 큰아이가 샛자전거에서 내리며 “나도 내려서 달릴래.” 하고 말해 준다.


  이윽고 골짜기에 닿는다. 골짜기는 지난해 가을에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달리 끔찍하게 파헤쳐졌다. 우거진 나무와 자연스럽던 고불고불한 물줄기가 사라졌다. 억지로 시멘트 둘러치고 억지로 땅 파헤치고 억지로 나무 베어 치운 티가 또렷하다.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이럭저럭 물놀이를 할 만하다. 군 행정이 이렇게 망가뜨렸어도, 열 해 지나고 스무 해 지나면 물살에 따라 모난 돌멩이 다시 동글동글해질 테고, 우리 아이들 커서 어른 되고 저희 아이들 새로 낳으면 그때에는 새삼스럽게 달라지는 아름다운 골짝물로 돌아오리라 생각한다.


  얘들아, 들어 보렴. 이렇게 관청 사람들이 망가뜨리고 나무를 베어 넘겼지만, 나무는 아직 많이 남았고, 이 나무마다 매미가 신나게 운단다. 매미소리와 함께 골짝물소리 한껏 누리자. 4346.7.3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과 헌책방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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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농약 항공방제

 


친환경농약 항공방제 헬기
우리 집 파란 대문 위로
포록 치솟더니
마당으로 농약 쫘악 뿌려
햇볕에 말리던 이불 옷가지를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 머리를
옴팡 적신다.

 

바로 대문 박차고 나가
헬기농약 뿌리는 농협직원더러
뭐 하는 짓이냐 따지니,
“인체에 무해합니다.” 한다.

 

헬기농약 뿌리기 멈추지 않는
농협직원한테 대고
꽥꽥 소리지르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농약헬기 찍은 사진을
시골 인터넷신문에 올린다.

 

한 시간이 안 되어
항의전화 빗발친다.
친환경농약인데 왜 그러느냐,
시골 할배 대신 농약 쳐 주니 좋은 일이다,
귀촌한 젊은 사람이 뭘 모르는갑다,
이 소리 저 소리 듣는다.

 

나는
조용히 암말 않는다.

 

하루 지나서
농협 도화면 지부장과 수행원들이
이장 어른 이끌고 찾아와
시골 인터넷신문 기사 내려라 한말씀.

 

어느 누구도
아이들이 농약 뒤집어쓴 일
사과하지 않는다.

 

나는
시골 인터넷신문 조그마한 기사
내리지 않는다.

 

기사제목 슬쩍 바꾼다.
처음에는 “죽고 싶으면 고흥쌀 먹어라?”,
이제는 “아이들한테 농약 뿌리는 항공방제”.

 

항공방제 사흘 내리 들이부은 뒤부터
마을에 논개구리 몽땅 죽고
제비 나비 잠자리 크게 준다.

 

그래,
사람은 아직 안 죽었네.

 


4346.7.2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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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7-30 09:26   좋아요 0 | URL
헬기로 뿌려댄 농약이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 머리를 옴팡 적신다,는 귀절에
아이구,하는 말이 저절로 나오네요..

그래,
사람은 아직 안 죽었네.-
뭐라 할 말이 없군요...ㅠㅠ

숲노래 2013-07-30 11:07   좋아요 0 | URL
할 말 없던 일이지만,
돌이켜보니
이렇게 시 하나 쓸 수 있게 해 주었어요......
 

다시 '어른시'를 쓰기로 한다.

한 해에는 동시를 쓰고

다음 한 해에는 어른시를 쓸 생각이었는데,

굳이 갈마들며 쓰지 말고,

그때그때 쓰자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어느 출판사에서

아직 시집을 한 권도 안 냈으나,

앞으로 시집을 내겠다며

'기존 출판사와 문단'에서

받아들여 주지 않는 '숨은 작가'

시집을 먼저 20권 내고

앞으로 꾸준히 낸다고 한다.

 

옳거니,

바로 '나를 두고 하는 기획'인가,

하고 혼자서 생각한다.

 

시골에서 아이와 함께 살며

자전거 타는 아저씨 이야기를

시집 하나로 영글고 싶다.

 

어제부터 새로 '어른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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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 쓰는 재미

 


  ‘읽을 만한 국어사전이 없다’고 느껴, ‘언젠가는 내가 스스로 국어사전을 만들어야겠어’ 하고 생각한 때가 1994년이다. 이때부터 어느덧 스무 해 흐른다. 2013년 한여름, 올 한글날에 내놓을 ‘어린이 우리 말 이야기책’에 넣을 ‘낱말풀이’를 한참 달다가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는다. 벌써 이렇게 흘렀나 싶어 부랴부랴 일을 마무리짓는다. 옆지기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났기에 홀로 집일 건사하면서 아이들과 놀며 지내야 하는데, 밤을 지새우고 새벽까지 잠들지 않으면, 아침이 힘들다. 낮에 더 일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려 한다. 그런데, ‘낱말풀이 새롭게 붙여서 쓰는’ 일이 아주 재미있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아주 빠르게 흐른다. 쓰고 싶은 글을 쓰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일 테지. 스무 해 동안 벼르면서 꿈꾸던 일을 비로소 붙잡기 때문일 테지. 내 스무 살 적에 내 마흔 살 언제 다가오는가 하고 손꼽으면서, 마흔이 되는 날까지 씩씩하게 한길 달리자고 생각한 대로 스무 해를 살았다. 지난 스무 해에 걸쳐 한국말을 익히고 가다듬은 결을 살려 2014년에는 ‘어린이 첫 국어사전’ 한 권을 기쁜 웃음꽃 피우면서 신나게 쓰자. 4346.7.3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글쓰기 삶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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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흙을 만지면서 살아가면 ‘흙사람’입니다. 흙사람은 흙을 만지면서 일하니 ‘흙일’을 합니다. 흙일은 일이면서 삶이라 ‘흙삶’이요, 흙삶을 누리는 사람은 흙으로 놀아요. ‘흙놀이’를 하지요. 흙놀이는 시나브로 ‘흙사랑’이 되어요. 흙이 있을 때에 밥도 집도 옷도 지을 수 있다고 깨닫는다면 ‘흙마음’ 북돋아 ‘흙누리’ 살찌우는 길을 걷겠지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늘 흙을 만지고 바라보며 밟을 때에 착하고 참다운 길 씩씩하게 걸어가리라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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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난 도시농부, 흙을 꿈꾸다- 정화진 산문집
정화진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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