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하는 삶

 


  하루나 이틀쯤, 또는 사흘이나 나흘쯤 빨래를 안 한대서 입을 옷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빨래는 날마다 한다. 하루 빨래 안 하면 그만큼 하루치 빨랫거리 늘고, 이틀 빨래 안 하면 그만큼 이틀치 빨랫거리 는다. 무엇보다 날마다 빨래를 해야, 날마다 밥을 하고 날마다 비질과 걸레질 하는 결을 맞춘다. 꼭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는 틀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다잡거나 다스리는 즐거움 누리고 싶기에 빨래를 한다.


  퍽 바쁘거나 부산스럽다 할 만하지만, 차근차근 받아들일 수 있으면 모든 일을 다 즐겁게 해낼 수 있다. 즐겁게 해내는 일은 ‘잘’ 해낸다거나 ‘훌륭히’ 해내는 일하고는 좀 다르다. ‘잘못’ 해내거나 ‘어설피’ 해낼 수 있다. 그렇지만, 즐겁게 어떤 일을 할 적에는 웃음이 묻어나고 이야기가 태어난다.


  나는 내 삶에서 ‘빨래’를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겼다. 남한테 맡기지 말자고, 아픈 옆지기가 차근차근 몸과 마음이 나으면 옆지기 스스로 빨래를 잘 맡을 테니까 그때까지 씩씩하게 도맡자고, 또 아이들이 자라면 아이들이 저마다 저희 옷가지를 스스로 맡아서 빨래할 테니, 그날까지 기다리며 재미나게 도맡자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러모로 빨래하는 즐거움을 누리려고 생각한다.


  먼저, 맑고 시원한 물로 빨래를 하고 싶다. 다음으로, 밝으며 따사로운 햇볕에 옷가지를 말리고 싶다. 이런 뒤, 보송보송 잘 마른 옷가지에 코를 부비면서 까르르 웃는 얼굴로 정갈하게 개서 옷장에 놓고 싶다.


  맑고 시원한 물로 빨래를 하면, 손과 몸과 얼굴 모두 맑으면서 시원한 기운이 감돈다. 밝으며 따사로운 햇볕을 누릴 마당에 빨래를 널면, 나 또한 밝으며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즐겁다. 보송보송 잘 마른 옷가지를 걷고 나서 갤 적에, 이 보드랍고 살가운 기운 살갗으로 살뜰히 스며드는구나 하고 느낀다.


  빨래하는 삶을 되새겨 밥하는 삶과 비질하는 삶을 북돋운다. 빨래하는 삶을 돌아보면서 글쓰고 책읽는 삶 살찌운다. 빨래하는 삶을 밝혀 사랑과 꿈이 우리 보금자리에 깃드는 길을 연다. 4346.10.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골마을 빨래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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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958) 있다 14 : 되풀이하고 있다

 

일본정부의 장관들이 우리 겨레를 모욕하는 미치광이 같은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도 까닭이 있다
《이오덕-무엇을 어떻게 쓸까》(보리,1995) 227쪽

 

  이오덕 님 예전 글에도 ‘-의’가 곧잘 나옵니다. 이오덕 님 스스로 이 말씨를 씻거나 털려고 몹시 애쓰셨지만, 미처 손질하지 못하곤 했어요. 그러나, 스스로 힘쓰고 애쓰신 만큼, 아무 곳에도 ‘-의’를 붙이지 않았고, ‘-의’ 없이 어떤 말씨로 글을 엮을 때에 아름다운가 하는 길을 밝혔습니다. “일본정부의 장관들”은 “일본정부 장관들”로 손질합니다. ‘모욕(侮辱)하는’은 ‘깔보는’이나 ‘얕보는’이나 ‘깎아내리는’으로 손봅니다.

 

 되풀이하고 있는 것도 까닭이 있다
→ 되풀이하는 것도 까닭이 있다
→ 되풀이하는 까닭이 있다
 …

 

  쉬우며 곱고 바른 한국말이 있는데 부질없이 한자말을 쓰는 일이란 알맞지 않습니다. ‘쉽다’라는 한국말이 있으니 구태여 ‘평이(平易)하다’라든지 ‘용이(容易)하다’ 같은 한자말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돼요. ‘올바르다’와 ‘바르다’와 ‘곧바르다’ 같은 한국말이 있기에 ‘정의(正義)롭다’ 같은 한자말을 불러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한국말을 밝히려 하는 길에서 한국 말투를 살리거나 북돋우는 길을 찾으면 더욱 아름답습니다. 한국 말법을 서양 말법 틀에 짜맞추어 과거분사나 현재진행형 쓸 까닭이 없어요. ‘-었었다’를 쓸 일이 없는 한국 말투요, ‘-고 있다’를 쓸 일이 참말 없는 우리 말투입니다. 4346.10.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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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 장관들이 우리 겨레를 깎아내리는 미치광이 같은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까닭이 있다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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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69) 몸으로 겪다

 

몸으로 겪은 것을 그대로 잘 생각해 내어서 쓰면 꾸며낸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고 감동을 준다
《이오덕-무엇을 어떻게 쓸까》(보리,1995) 39쪽

 

  국어사전에서 ‘겪다’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어렵거나 경험될 만한 일을 당하여 치르다”로 풀이합니다. ‘경험(經驗)’을 찾아보면 “자신이 실제로 해 보거나 겪어 봄”으로 풀이합니다. ‘체험(體驗)’은 “자기가 몸소 겪음”으로 풀이합니다. 한국말 ‘겪다(겪음)’는 ‘= 경험’인 셈이요, 한자말 ‘경험/체험’은 ‘= 겪음(겪다)’인 셈입니다.

 

 겪다·몸겪기·몸으로 겪다 (o)
 경험·체험 (x)

 

  굳이 ‘몸겪기’ 같은 낱말을 지어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겪다’라는 낱말을 쓰면 되고, 흐름이나 자리에 따라 ‘몸으로 겪다’처럼 쓰면 됩니다. “어떤 일을 맞닥뜨리어 배우거나 깨닫다”를 뜻한다고 할 만한 ‘겪다’입니다. “몸으로 배우다”가 “몸으로 겪다”라고 할까요.


  가만히 돌아보면, ‘몸배움’이라고 따로 쓰지 않습니다. ‘배움’이라 할 뿐입니다. 겪거나 배운다고 할 적에는 늘 몸으로 겪거나 배웁니다. 마음으로 겪거나 배운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몸으로 배운다”처럼 말한다든지 “몸으로 겪는다”처럼 말하면 자칫 겹말로 쓴 셈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때에는 뜻을 더 또렷하게 나타내거나 힘주어 가리키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몸으로 한결 깊게, 몸으로 더욱 뚜렷하게 배우거나 겪으면서 잘 알 수 있다는 뜻이지 싶어요.


  이렇게 ‘겪다’를 차근차근 살필 수 있으면, ‘추체험(追體驗)’ 같은 한자말을 쓸 일이 사라집니다. “다른 사람의 체험을 자기의 체험처럼 느낌”을 가리키는 ‘추체험’이란 ‘마음읽기’예요. 다른 사람이 겪은 일이 어떠한가를 스스로 몸으로 겪듯이 헤아리는 일이란, 스스로 몸으로 겪거나 부딪힐 적에도 헤아려서 알 수 있고, 마음으로 읽으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스스로 몸으로 겪더라도 이녁 마음을 읽지 않으면 알 수 없어요.


  몸으로 겪으며 아는 일이란 ‘몸읽기’라 할 수 있습니다. 몸읽기일 때에는 내 삶을 읽습니다. 마음으로 느끼며 아는 일이란 ‘마음읽기’가 됩니다. 마음읽기일 때에는 내 삶과 함께 이웃 삶을 함께 읽습니다. 4346.10.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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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化)' 씻어내며 우리 말 살리기
 (180) -화化 180 : 무독화

 

어떻게든 ‘죽음의 재’를 무독화할 수 없을지 열심히 연구를 해 왔습니다. 무독화하지 못한다면 큰일이 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이데 히로아키/고노 다이스케-원자력의 거짓말》(녹색평론사,2012) 182쪽

 

  “열심(熱心)히 연구(硏究)를 해 왔습니다”는 “바지런히 살펴보았습니다”나 “힘껏 찾아보았습니다”로 손볼 수 있습니다. “큰일이 난다는 것을”은 “큰일이 나는 줄”로 손질하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는 “압니다”나 “알지요”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로 손질합니다. “죽음의 재”는 “죽음 재”나 “죽음을 부르는 재”나 “죽음을 낳는 재”로 다듬으면 한결 또렷합니다.


  ‘무독화(無毒化)’는 국어사전에 실립니다. “독성을 없애는 일”을 뜻한다고 합니다. ‘독(毒)’은 “건강이나 생명에 해가 되는 성분”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해(害)’는 “이롭지 아니하게 하거나 손상을 입힘”을 가리키고, ‘이(利)롭다’는 “이익이 있다”를 가리킵니다. ‘이익(利益)’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탬이 되는 것”을 가리켜요. 여러모로 살피면 ‘독’이란 “나쁜 것”이거나 “보탬이 안 되는 것”입니다. ‘무독화’라 할 적에는 “나쁜 것을 없애다”나 “보탬이 안 되는 것을 없애다”를 가리킵니다.


  ‘무독화’는 “중금속 무독화”라든지 “수은 무독화”라든지 “니코틴 무독화”처럼 쓰곤 한다고 합니다. 중금속이나 수은이나 니코틴에 깃든 나쁜 것을 없앤다는 뜻으로 쓰는 셈인데, 쓰임새를 살피면 “중금속 없애기”나 “수은 없애기”나 “니코틴 없애기”처럼 쓸 만합니다. 굳이 “독을 없애기”처럼 안 쓰고 “없애기”라고만 쓰면 됩니다. 때와 곳에 따라 “지우기”나 “덜기”나 “씻기”나 “털기”를 넣을 수 있습니다.

 

 무독화할 수 없을지
→ 독을 없앨 수 없을지
→ 없앨 수 없을지
 …

 

  예부터 우리 겨레는 ‘씻김굿’을 했습니다. 씻김굿에서 ‘씻김’이나 ‘씻기다’가 바로 “없애는 일”이요 “나쁜 것이나 궂은 것이나 아쉬운 것이나 슬픈 것을 없애는 일”입니다.


  중금속이나 수은이나 니코틴이나 방사능 같은 것들은 오늘날 생겼으니, 오늘날 생긴 나쁜 것을 씻어야 한다는 자리에서 ‘무독화’ 같은 낱말을 써야 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독화’가 되든 다른 한자말이나 영어를 쓰든, “없애는 일”인 줄 느낀다면, 알맞으면서 쉽고 바르게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길을 열 수 있습니다. 4346.10.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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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죽음을 부르는 재’를 없앨 수 없을지 힘껏 찾아보았습니다. 없애지 못한다면 큰일이 나는 줄 모두가 알았습니다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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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초피나무 풀빛

 


  어린나무는 어리다. 어린나무는 쑥쑥 자라지 않는다. 여러 해에 걸쳐 아주 천천히 자란다. 이동안 어린나무를 둘러싼 숱한 풀은 높이높이 자란다. 다른 풀은 봄부터 가을까지 어린나무 위를 몽땅 덮을 만큼 높다라니 자라기 일쑤이다. 그렇지만, 다른 풀은 가을이 되어 시들고는 모두 말라죽는데, 어린나무는 가을이 되건 겨울을 맞이하건 시들지 않고 죽지 않는다.


  어른 아닌 어린이 손가락 마디보다도 작기 일쑤인 어린나무를 바라본다. 줄기도 작고 잎사귀도 작다. 어른인 내 눈길 아닌 아이들 눈길로 바라보아도 어린나무는 참 작다. 그러나 이 작은 어린나무에는 어른나무와 똑같은 기운이 서린다. 어른나무와 똑같은 숨결이 흐르고 어른나무와 나란히 하늘바라기를 하면서 하늘숨을 쉰다.

 

  어린나무 곁에는 으레 어른나무가 있다. 어른나무가 벼락을 맞거나 사람들이 베거나 했다면, 어린나무는 한결 씩씩하고 야무지게 자라서 스무 해 마흔 해 지나면 새 어른나무 되어 숲을 밝히고 마을을 빛낸다. 그리고, 어른나무 된 이 작은 어린나무는 지난날 저 스스로 겪으며 살아냈듯이 조그마한 씨앗 흙땅에 떨구어 새 어린나무 자라도록 아름드리 그늘과 품을 베푼다. 4346.10.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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