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에서 글쓰기

 


  2014년 올해로 마흔 살이 되면서 내 글삶을 돌아보니, ‘글을 쓰며 살자’고 다짐한 뒤 스무 해가 넘었다. 이제부터는 글을 쓰며 누린 삶이 글을 안 쓰며 누린 삶보다 길다. 지난날을 가만히 되새기면, 글을 안 쓰며 살던 때에도 ‘글쓰기’를 놓고 여러모로 생각해 보곤 했구나 싶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얼마 안 있어, 우리 학교 국어교사 한 분이 교사 자리를 그만두었다. 이러면서 아침모임에 모든 학생을 운동장에 불러놓고 ‘퇴임 연설’을 하는데, 이녁은 앞으로 소설쓰기만 하겠다면서 국어교사를 그만둔다고 했다.


  그무렵 나는 피식 웃었다. ‘인천’에서 무슨 소설을 쓴다고. 날고 긴다고 하는 놈들 모조리 인천을 떠나 서울로 가서 끄트머리 하나라도 붙잡으려 용을 쓰는데, 꾸준한 벌이를 마다 하고 소설쓰기만 한대서 먹고살 수 있겠느냐 하면서 피식 웃었다. 국어교사 노릇이 무어 힘들다고, 밥벌이를 끊고 글쓰기만 하겠다고 저러할까 하고 생각했다. 1991년이었다.


  그런데, 이때 뒤로 ‘학교를 그만두고 소설쓰기만 하겠다는 국어교사’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다. 부디 다시 학교로 돌아오지 말고 소설쓰기로만 잘 살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 이녁 이름이 붙은 소설책이 널리 사랑받을 수 있는 날을 맞이하기를 빌었다.


  이녁은 다시 교사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소설책을 여러 권 냈고, 평전도 몇 권 썼다. 이제는 여러모로 알아주는 작가로 되어 전임교수까지는 아닌 듯하지만, 대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기도 한단다.


  2008년 가을, 이녁을 다시 만난다. 이때에는 교사와 학생 사이가 아닌, ‘동네이웃’으로서 인천 배다리에서 만난다. 막걸리잔을 앞에 놓고 열일곱 해 앞서 어느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느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때에 명함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전임교수이든 시간강사이든 교단에 서서 누군가를 가르친다고 하면 글을 쓸 겨를이 사라지지 않나?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돌아가지는 않았다지만, 예전처럼 ‘밥벌이’ 자리로 돌아간 셈 아닌가?


  나도 가끔 밥벌이 때문에 글쓰기를 못 할 때가 있다. 네 식구 먹고살 돈을 벌려고 다른 일을 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아무 일이나 할 수는 없어, 앞으로 내가 쓸 글에 밑틀이 될 만한 일거리만 조금 맡곤 한다. 그러나, 아무리 내 글쓰기에 밑틀이 될 만한 일거리라 하더라도, 이 일 때문에 몹시 힘들다. 일이 힘들지 않고, 내가 쓰고픈 글을 쓸 겨를을 가까스로 조금 내야 하니까 너무 힘들다.


  글을 쓰려면 글을 써야지, 돈을 벌 수 없다. 아이를 돌보려면 아이를 돌봐야지, 돈을 벌 수 없다. 자전거를 타고 싶은데 정작 자전거 타고 바깥에 나갈 틈이 없어 집안에 ‘자전거 운동기구’를 놓는 분이 있기도 하다. 그래 봤자 ‘자전거 타기’는 되지 않는다.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살아야 한다. 글을 쓰고 싶으면 글을 쓸 노릇이다. 그래야 글이 글다울 수 있고, 한결같이 내 온 사랑 담아 글을 쓸 수 있다. 이름이 좀 알려져서 대학교수 되거나 이곳저곳에 강의하러 다니면서 돈을 잘 벌면 무엇 하나? 이렇게 하자고 글을 썼나? 돈을 벌려고 글을 썼나? 글을 써서 돈을 벌 수도 있지만, 글을 쓰는 까닭은 글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삶을 빛내고 삶을 사랑하며 삶을 노래하는 글을 쓰고 싶기 때문에 글을 쓴다. 4347.1.2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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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책 102] 호미와 연필

 


  배우고 싶으면
  한손에는 호미
  다른 한손에는 연필.

 


  우리 집 큰아이를 그릴 적에 언제나 한손에 호미를 먼저 그려 넣고, 다른 한손에 연필을 그려 넣습니다. 처음에 큰아이는 “아버지, 여기 내(그림에 나오는 아이) 손에 뭘 그렸어?” 하고 묻습니다. “무엇을 그렸을까? 네가 알아맞혀 봐.” “음, 음. 아, 호미로구나. 여기는 연필이네.” 큰아이 모습을 그리면서 왜 호미와 연필을 그려 넣는지 더 알려주지 않습니다. 아이 스스로 느끼고 깨달으리라 믿으면서 기다립니다. 호미만 쥐기보다는, 책만 잡기보다는, 호미와 책을 한손에 하나씩 굳세게 쥐고는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7.1.2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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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에 쏘였다
남호섭 지음, 고찬규 그림 / 창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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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23

 


동시란 얼마나 쉬운가
― 벌에 쏘였다
 남호섭 글
 창비 펴냄, 2012.11.30.

 


  동시쓰기란 아주 쉽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동시이든 어른시이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씁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면 어떠한 글도 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시가 되는 이야기란, 마음속에서 차분하면서 즐겁게 피어나는 꽃과 같아, 마음읽기를 기쁘게 할 때에 솔솔 글로 이루어집니다.


  꾸미거나 보태거나 할 까닭이 없습니다. 다듬거나 손질하거나 할 까닭이 없습니다. 꾸민대서 사랑이 되지 않아요. 보탠대서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다듬으면 사랑이 빛날까요. 손질하면 사랑이 환할까요. 모과꽃에 붉은 물감을 바르면 한결 곱지 않아요. 감꽃을 커다랗게 늘여야 더욱 곱지 않아요. 모과꽃은 모과꽃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감꽃은 감꽃 그대로 곱지요.


  사랑을 꾸밀 수 없듯, 글과 시와 문학 모두 꾸밀 수 없습니다. 가슴속에서 기쁘게 샘솟는 이야기를 깨달아 차근차근 적바림하면 글이 되고 시가 되며 문학이 됩니다.


- 저녁 강가에 우리 선생님 / 가방을 멘 채 / 노을빛에 물들고 있다. // 구름은 잔잔히 흘러가는데 / 오래오래 붉은 나무처럼 서 있다 ..  (노을)


  글을 쓰자면, 가슴속에서 샘솟는 이야기를 제대로 느끼거나 읽거나 알아챌 수 있어야 합니다. 제대로 느껴야 제대로 적바림합니다. 제대로 읽어야 제대로 씁니다. 제대로 알아채야 제대로 바라봅니다.


  숲에 깃들면서 숲바람을 마시지 못한다면, 숲 이야기를 쓰지 못합니다. 바다에 머물면서 바다내음을 들이켜지 못한다면, 바다 이야기를 쓰지 못해요.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아이를 사랑하고 돌보는 삶노래를 부르지 못합니다.


  동시쓰기란, 어른시쓰기란, 글쓰기란, 언제나 아주 쉽습니다. 누구나 아주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딴 데 두니 어렵습니다. 마음을 엉뚱한 데에 돌리니 늘 어려울 뿐입니다.


  아이가 먹을 밥을 어떻게 차리는지 떠올려요. 이것저것 조미료 잔뜩 쳐서 혀를 건드리면 되나요. 이런 영양소 저런 조리법을 따져야 맛난 밥이 되나요. 마당에서 뜯은 풀 한 줌과 된장 한 숟갈에다가 밥 한 그릇만 있어도 아이는 밥을 맛나게 먹어요. 왜냐하면, 아이들은 ‘배를 채우는 먹을거리’가 아닌, ‘어버이가 나누어 주는 사랑’을 먹기 때문입니다.


  동시란, 어른이 아이한테 나누어 주는 사랑입니다. 글빛이나 문학빛이 아닙니다. 글치레나 문학잔치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동시’라는 틀에 맞추어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동시라는 그릇에 어른들이 담은 사랑을 아이들이 하나둘 받아먹어요.


.. 모과 하나 따 들고 / 주호가 내게 왔다 ..  (모과)


  글치레를 하면 글이 될 수 없습니다. 글‘치레’가 될 뿐입니다. 문장작법을 익히면 ‘문장’‘작법’에 따르는 복제품이 될 뿐입니다. 글쓰기 강의를 들어도 이와 똑같아요. ‘강의’를 들을 뿐, 글쓰기를 하지 못해요. 글쓰기 이론책을 읽어도 이와 같지요. 이론책을 읽었으니 ‘이론’을 알 뿐, 글을 쓸 수는 없어요.


  글을 쓰고 싶으면 ‘글이 될 삶’이 ‘어떤 이야기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삶이 없이는 아무 글을 못 써요. 삶이 없다면 어떤 글도 못 써요. 오직 삶을 쓰는 글입니다. 잘난 삶도 못난 삶도 아닌, 나 스스로 누리는 삶을 쓰는 글입니다. 내가 노래하는 삶을 쓰고, 내가 사랑하는 삶을 씁니다. 내가 아끼는 삶을 쓰며, 내가 가꾸는 삶을 씁니다.


  어른이 써서 아이한테 내주는 동시란, 어른 스스로 가꾸는 삶이 아이한테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스밀 수 있기를 바라는 꿈입니다. 이쁘장한 사탕과 같은 동시가 아니라, 어른 스스로 아름답게 가꾸는 삶빛이 곱게 드러나는 이야기가 바로 동시입니다.


.. 간밤에 내린 비로 / 숲이 맑다. // 아침 햇살에 / 잎들은 반짝이고 // 나무와 풀과 / 깃든 벌레 / 다들 살아나서 ..  (숲)


  어버이가 부르는 모든 자장노래가 동시입니다. 어버이가 여느 때에 아이한테 들려주는 말이 모두 노래요 동시이며 동화입니다. 전래동화책을 펼쳐서 읽혀야 동화가 아니에요. 여느 때 여느 자리에서 여느 어버이가 여느 아이한테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가 동화입니다.


  곧, 동시나 동화란 따로 없습니다. 우리들 어른이 누리는 하루하루가 고스란히 동시이면서 동화입니다. 문학이란 따로 없습니다. 우리들 어른 누구나 하루하루 살아내면서 마주하고 만나는 이야기가 모조리 문학입니다.


  그러니, 동시쓰기란 쉽습니다. 아이하고 나누고 싶은 생각을 가만히 헤아려 보셔요. 아이하고 함께 부르고 싶은 꿈을 곰곰이 짚어 보셔요. 아이와 나란히 활짝 웃으면서 두고두고 즐기고 싶은 사랑을 찬찬히 보듬어 보셔요.


.. 뒷집 마당에 / 매화가 활짝 폈다 ..  (돌아오실까 돌아가실까)


  모든 시와 동시는 우리 가슴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끄집어내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아직 안 느끼거나 못 느꼈을 뿐입니다.


  작가나 교수나 평론가 되어야 쓰는 동시가 아닙니다. 모든 어른이 쓰는 글이 동시입니다. 어느 어른이나 쓰는 글이 동시입니다.


  동시는 동시이면서 문학이고 이야기이면서 삶입니다. 동시는 동시인 한편 노래요 춤이고 빛입니다. 동시는 동시다운 글이고 밥이자 책입니다.


  날마다 먹는 밥처럼, 날마다 즐기는 동시입니다. 마음을 살찌우는 책처럼, 아이와 함께 살아가고픈 길을 밝히는 이야기책 노릇을 하는 동시입니다.


.. 새들도 숲에서는 / 걷는다 ..  (새들도)


  남호섭 님이 쓴 동시를 모은 《벌에 쏘였다》(창비,2012)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남호섭 님은 가슴속에서 샘솟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줄 줄 압니다. 그러나, 가슴속에서 샘솟지 않은 이야기를 머리로 지어서 쓰기도 합니다.


  굳이 머리로 무언가 뚝딱뚝딱 지어서 써야 할까 모르겠지만, 스스로 이와 같은 삶을 꾸린다면, 이와 같은 동시도 나올 만하다고 느낍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글쓴이 삶 그대로 동시가 태어나니까요.


  새들도 숲에서는 걷습니다. 그렇지요. 그뿐입니다. 그런데, 새들은 숲에서 아주 싱그럽고 예쁘게 납니다. 새들은 숲에서 살며 숲내음을 맡아요. 새들은 숲에서 살며 숲빛을 누려요. 숲에서 어떻게 날아야 하는가를 잘 아는 새입니다. 날개가 커다란 새는 숲에서 좀처럼 날 줄 모르지만, 소쩍새만 해도 숲에서 아주 멋지게 날아요. 작은 새들은 늘 숲에서 바지런히 날아다닙니다.


  뒷집 마당에 매화가 활짝 피고, 뒷집 텃밭 둘레에 감꽃이 활짝 핍니다. 모과꽃이 핍니다. 뽕나무꽃이 핍니다. 동백꽃과 후박꽃이 핍니다. 솔꽃이 피고 잣꽃이 핍니다. 치자꽃이 피고 탱자꽃이 핍니다.


  그예 바라보셔요. 바라보는 대로 시가 됩니다. 바라보고 느끼는 대로 동시가 됩니다. 바라보고 느끼면서 사랑하는 대로 문학이 됩니다. 바라보고 느끼면서 사랑하는 삶을 누리는 결이 낱낱이 이야기로 거듭납니다.


.. 몇 년 뒤, 만주군 장교 출신 대통령도 죽었다. 십팔 년 동안이나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어이없게 자기 부하의 총에 맞았다. 어떤 일본인은 일본 제국의 마지막 군인이 죽었다고 슬퍼하기도 했다 ..  (두 청년)


  서슬 퍼런 아무개가 권력이라고 하는 한줌조차 안 되는 부스러기를 거머쥔다면서 용을 썼어요. 그러나, 그래 보았자 백 해조차 못 가요. 아니, 쉰 해조차 못 갑니다. 이녁 아이가 권력을 다시 물려받는다 하더라도 얼마 못 갑니다. 열 해나 갈까요. 다섯 해나 갈까요.


  그런데, 배롱꽃은 해마다 피어요. 해마다 피며 백 날을 가요. 해마다 백 날씩 배롱꽃이 짙붉습니다. 우리 마을 어귀에 있는 배롱나무를 볼 적마다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지난해에도 그러께에도 즐거웠고, 올해에도 다음해에도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앞으로 쉰 해나 백 해뿐 아니라, 오백 해 뒤에도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머리로 짓는 문학은 온갖 비평과 평론을 붙인다 하더라도 길게 간다면 쉰 해쯤 갈는지 모르나, 가슴으로 빚는 이야기는 가만히 두어도 오백 해 천 해는 고이 흐릅니다. 빗물에 무덤이 떠내려간 개구리 이야기는 몇 해쯤 된 이야기일까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는 몇 해쯤 된 이야기일까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몇 해쯤 된 이야기일까요. 아마 아무도 모를 테지요. 아무도 모를 만큼 오래되었겠지요.


  왜 아무도 모를까 궁금해 하는 어른이 있을까요. 왜 아무도 모를 만큼 오래도록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면서 흐르는 이야기일는지 돌아보는 어른이 있을까요.


  마음으로 읽으면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읽으면 모두 알아챌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읽으려 하면 하나도 알 수 없습니다. 머리로 읽으려 하면 온갖 이론책 들추어도 알 수 없습니다.


  동시쓰기는 쉽습니다. 마음으로 쓰면 아주 쉽습니다. 동시쓰기는 어렵습니다. 머리로 쓰면 아주 어렵습니다. 동시읽기도 늘 같아요. 머리로 읽으면 언제나 골이 아픈 동시읽기예요. 마음으로 읽으면 언제나 즐겁고, 마음으로 사랑하면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4347.1.2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동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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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1-28 05:15   좋아요 0 | URL
어느 어린이가 썼다는 동시 한편 적어 볼께요.
" 나뭇잎이 떨어지면서 외쳤다
수퍼맨~~"
이게 전문이랍니다 ^^
함께살기님의 '쉽다'라는 낱말은 제가 사용하는 '쉽다'라는 낱말과 다른가봐요. 제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쉽다라는 말씀을 하신걸 종종 보니까요 ㅠㅠ 동화 쉽다, 동시 쉽다, 아이들 키우기 쉽다...전 이것들 모두 어렵기만 합니다. 마음으로 하지 못해서이겠죠.

숲노래 2014-01-28 05:41   좋아요 0 | URL
'쉽기' 때문에 '어렵기'도 하는구나 싶기도 해요.
저는 언제나 '쉽다 어렵다' 하는 생각을 아예 안 해요.
그냥 할 뿐이랍니다.

그래서, 곁님한테서 가끔 '아무 생각이 없이 사는 듯하다'는 소리를 들어요.
이 말을 듣고 보면, 또 그렇구나 하고 느끼기도 해요.
이제껏 '아무 생각 없이 살았'으니 남들이 어렵다 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다고 느끼기도 해요.

그러니, 앞으로는 '제대로 생각을 하면서 아름답게 하는 길'을 걸어가자
하고 느껴, 이제는 '즐거운 생각이 있으면서 살자'하고 다짐해요.

즐겁게 생각하며 살 적에도
쉽고 어려움은 따지지 않으면서
어떤 일이든 다 '제 나름대로 예쁘게' 할 수 있구나 싶더라구요.

hnine 님이 옮겨 주신 시는
저도 언젠가 읽었어요.

뭔가 하고 생각하다가, 그래, 이 글 쓴 아이는
이 아이대로 '이런 삶을 누렸'으니 이렇게 썼다, 하고,
이 아이는 느끼고 살아가는 결대로 썼다, 하고 깨달았어요.
그러니, 이 아이는 이 마음을 고이 지켜서
다른 삶을 누리면 다른 빛이 고이 드러나는
이야기를 쓸 수 있겠지요.

hnine 님도 '쉽다 어렵다'는 틀이 아닌
'즐거운 빛'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어떤 것이나 일이든 활짝 웃으면서 맞이해 보셔요~~~~ ^^

oren 2014-01-28 14:37   좋아요 0 | URL
남호섭 님의 시가 교과서에도 몇 편 실려 있다는 걸 '알라딘 책소개'를 보고 첨 알았네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라면서 벌에 쏘인 추억이 아주 많은데, 아주 재미있을 듯한 '벌에 쏘였다'는 시는 도통 찾지를 못하겠네요. ㅎㅎ

숲노래 2014-01-28 17:21   좋아요 0 | URL
다른 분들한테는 재미있을는지 모르고
이 동시집 제목이기도 하지만,
저는 '그리 재미가 있다고 느낄 수 없어'서
이 느낌글을 쓰며 그 시는 옮겨적지 않았어요 ^^;;;

그리고, 옮겨적은 시도 한두 대목만 땄어요.
다른 대목은...
마음으로 울리지 못하는
살짝 아쉬운 '군말' 같더라구요 ^^;;;

교과서에 실린 작품이라고 해서
남다르다고 느낀 적이 없어서,
오히려 교과서에 안 실리는 작품이
한결 훌륭하지 않느냐 싶기도 해요.

이원수 님 동시도
권정생 님 동시도
이오덕 님 동시도
교과서에 '안 실린' 작품 가운데에
참으로 빛나는 보배들이 반짝반짝 빛나더라구요 ^^
 


  처음 장만한 지 이태가 흐르고서야 만화책 《바람의 빛》을 읽는다. 만화책을 이태쯤 묵히고 읽는 사람도 있을까. 아무렴, 있겠지. 바로 여기에도 있고. 장만하자마자 읽어도 즐겁고, 다시 읽어도 즐거운데, 처음 읽는 맛이 있기에, 언제 읽으면 가장 좋을까 하고 헤아리면서 가장 기쁜 때를 기다린다. 글책도 그림책도 만화책도 사진책도 가장 재미나면서 아름답게 읽을 만한 때를 기다린다. 줄거리를 훑으려 읽는 책이 아니라, 삶을 빛내고 싶어 읽는 책인 만큼, 가장 좋은 때가 시나브로 찾아온다고 느낀다. ‘바람빛’을 노래하는 이 만화책은 언제나 ‘삶빛’을 밝히고, 넌지시 ‘사랑빛’을 속삭인다. 어여쁜 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곱게 빛난다. 4347.1.2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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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빛 5
와타나베 다에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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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1월 28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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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곁에 서면 작다

 


  아이들은 작다. 아이들은 참 작다. 키도 작고 몸도 작다. 얼굴도 작고 손과 발도 작다. 그런데, 여느 때에는 아이들이 작은 줄 으레 잊는다. 밥을 차리면서 수저를 밥상에 얹다가 ‘그래, 아이들은 작지.’ 하고 깨닫는다. 아이들한테 밥을 먹이면서 조그마한 입을 보며 ‘그래, 아이들은 작아.’ 하고 깨닫는다. 아이들 옷을 갈아입히고 빨래를 하면서 ‘그래, 아이들은 작은걸.’ 하고 깨닫는다. 졸리거나 힘들다는 아이를 안고 거닐면서 ‘그래, 아이들은 작잖아.’ 하고 깨닫는다. 그리고, 마당에 이불을 널어 해바라기를 시키는데, 이불 사이사이 오락가락하면서 머리를 디밀며 놀곤 하는 아이들을 보다가 ‘그래, 아이들은 작구나.’ 하고 새삼스레 깨닫는다.


  얼마나 작은 아이들인가. 이렇게 작으면서 얼마나 곱게 빛나는 아이들인가. 이처럼 작은 숨결에서 예쁜 웃음은 얼마나 사랑스레 피어나는가. 사람이 만드는 문화와 문명이 끝없이 발돋움하더라도, 갓 태어난 아기가 자라는 빠르기는 도무지 발돋움하지 않는다. 예나 이제나 아기는 똑같이 아기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을 살고,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도 열 몇 해를 천천히 큰다. 생명공학이나 유전자공학이 사람 목숨을 어떻게 헤집거나 건드릴는지 모르나, 사람한테 ‘아기’와 ‘어린이’란 얼마나 커다란 빛이요 꿈인가. 이 작은 사람들이 콩콩 뛰고 달리는 모습이란, 어른들한테 얼마나 고마운 빛살이요 꿈날개인가. 아이들이 천천히 자라는 뜻이 있다. 4347.1.2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빠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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