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름이 즐거워

 


  큰아이는 무엇이든 일손을 거들고 싶다. 큰아이로서는 놀이일 수 있지만 큰아이한테는 새롭게 땀을 흘리면서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요 며칠 부엌에서 “나도 칼로 썰 수 있는데. 저번에 달걀 썰었어. 얼굴도 안 다치고 손도 안 다쳤어.” 하고 말하면서, 저도 무를 썰도록 해 달라고 말했다. 칼질을 하는데 왜 얼굴이 다칠까 궁금했지만, 그냥 아이 입에서 터져나온 말이겠지.


  짐을 들어서 나를 적에 큰아이는 저도 한몫 거들고 싶다. 두 손으로 영차영차 힘을 모아 나르고 싶다. 꽤 무거워도 씩씩하게 나른다. 오랫동안 먼길을 나르지 못하지만 다문 몇 걸음이라도 나르는 매무새가 고마우면서 반갑다. 이렇게 천천히 온몸과 손아귀에 힘을 붙이면서 자라겠지. 이렇게 몸을 쓰고 움직이면서 튼튼하게 크겠지. 4347.1.2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빠 육아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설희 3
강경옥 글.그림 / 팝툰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서야 <설희> 셋째 권 느낌글을 쓴다. 앞으로 여섯 권이 남았다. 다른 여섯 권 느낌글을 쓰는 동안 10권이 나오려나. 10권이 나오면 10권 느낌글부터 쓸까. 아니면, 다음에는 9권 느낌글부터 쓸까. 흠...

 

..

 

만화책 즐겨읽기 310

 


사랑이 있는 자리에
― 설희 3
 강경옥 글·그림
 팝툰 펴냄, 2009.4.23.

 


  가장 큰 힘은 사랑입니다. 사랑 앞에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 앞에서는 어떤 것도 힘을 내지 못합니다.


  적잖은 사람들은 사랑을 힘이나 돈이나 이름으로 누를 수 있는 듯 여깁니다. 그뿐 아니라 참말 힘이나 돈이나 이름으로 사랑을 누르곤 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힘도 돈도 이름도 사랑을 누를 수 없는 줄 알아차립니다. 누군가는 서른 해나 쉰 해쯤 뒤에 깨닫고, 누군가는 죽을 때까지 못 깨달으며, 누군가는 이내 깨닫습니다.


- ‘세이도 설희 만나기 전에 이미 포기했고, 각자의 인생이 다를 뿐인 거야. 응.’ (26쪽)
- “뭐 이해는 하지만, 본인이 이 일을 좋아하면 그런 것쯤 문제도 아니잖아.” (33쪽)
- “넌 뭐 되고 싶은 거 없어? 꿈이라든지 어떤 일을 하고 싶다든지. 돈 많은 건 알겠는데, 그럴 돈이 있으면 무슨 공부나 뭐든 다 할 수 있잖아.” “꿈? 뭐, 꿈은 하나 있지만, 말할 만한 건 아냐.” (40쪽)

 


  가장 큰 힘은 사랑인데, 가장 작은 힘도 사랑입니다. 사랑으로는 어느 것도 못 이룰 듯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랑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다 여기기도 합니다. 사랑만으로는 전쟁을 못 막고 독재정권을 쫓아낼 수 없다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먹고살 수 없는 까닭은 사랑 때문이 아닙니다. 스스로 먹고살 수 없다고 생각하니 먹고살지 못해요. 스스로 전쟁을 못 막는다고 여기니 그예 전쟁을 못 막습니다. 스스로 독재정권을 쫓아낼 마음이 없기에 독재정권을 못 쫓아냅니다. 힘이 있기에 전쟁을 몰아내지 않습니다. 힘이 있어서 독재정권을 몰아내지 않습니다. 힘이 아닌 사람들 마음으로 전쟁을 몰아냅니다. 힘이 아닌 사람들 넋으로 독재정권을 몰아냅니다.


  우리가 먹는 밥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헤아려 봐요. 농약을 치고 비료를 주면 쌀이 잘 되거나 배추와 무가 잘 될까요. 볍씨 한 톨에 사랑을 담고, 배추씨와 무씨 한 톨에 사랑을 실을 때에, 쌀과 배추와 무가 잘 될까요.


  우리가 돌보는 꽃나무를 헤아려 봐요. 쳐다보지 않고 아끼지 않으면 잘 자랄까요. 늘 바라보면서 어루만지고 아낄 적에 잘 자랄까요.


-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폐인처럼 살아가는 것도 선택이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선택이지. 적당히 살아가는 것도 선택. 올바르다든가 올바르지 않다든가 그런 거 알아도 자신은 어쩔 수 없어. 폐인처럼 살다 뒈져도 자기 안에 바꿀 힘이 없으면 끝인 거야. 그저 자기 방식대로 주어진 결과대로 끝을 맺겠지.” (43쪽)
- ‘보면 볼수록 큰 집. 만약 이 큰 집에 내가 없다면 설희 혼자 산다는 걸까? 뭔가 되게 비현실적인 느낌. 하긴, 20년이나 외딴 섬에서 홀로 자랐다는 것도 좀 이상하지.’ (57쪽)

 


  제아무리 전쟁을 벌여도, 먹지 않으면 전쟁을 못 합니다. 제아무리 무시무시한 전쟁터라 하더라도 잠을 안 자면 싸우지 못 합니다. 제아무리 대단한 싸움꾼이라 하더라도 옷을 입고 집에서 지내며 살림을 꾸려야 합니다. 나무와 풀이 베푸는 푸른 숨결을 마셔야 대통령이고 군인이고 할 수 있습니다. 빗물과 냇물을 마셔야 소설가이고 운전기사이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도시사람이 99요 시골사람은 1밖에 안 되는데, 도시사람이 99.9가 되고 시골사람이 0.1이 되더라도 흙을 일구는 시골사람이 없으면 모조리 굶어죽을 뿐 아니라, 푸른 숨결과 맑은 물을 누리지 못합니다. 더욱이, 시골 논밭과 숲과 들을 푸르고 아름다우며 맑고 싱그럽게 돌보는 따사로운 손길이 없으면 아무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농약이나 농기계가 흙을 일구어 주지 않습니다. 따순 손길이 흙을 일굽니다. 비료가 흙을 살리지 않습니다. 나뭇잎과 풀잎과 벌레와 새와 비와 바람과 햇볕이 흙을 살립니다.


  사랑이 있는 자리에 삶이 있습니다. 사랑이 피어나는 자리에 삶이 있습니다. 사랑을 노래하는 자리에 삶이 있습니다.


  강경옥 님 만화책 《설희》(팝툰,2009) 셋째 권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어떤 힘으로 살아가는지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어떤 사랑을 마음으로 품으며 살아가는지 생각합니다. 돈이 많으면 삶이 즐거울까요. 돈이 없으면 삶이 힘들까요. 이름이 있으면 삶이 대단할까요. 이름이 없으면 삶이 따분할까요.


- ‘나 지금 불행한가? 자신의 처지에 조금의 자긍심도 못 느낄 만큼 불행하다고 느끼는 걸까.’ (59쪽)
- “가격표는 보지 마. 그게 약속이야. 원하는 것만 골라 봐.” (94쪽)
- ‘하지만 가격표를 보지 말라는 제의는, 그거 끌리네. 단지 원하는 것만을 본다는 거.’ (96쪽)

 


  마음에 드는 옷은 비깐 값을 치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음에 드는 님은 얼굴이 이쁘장하거나 몸매가 좋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음에 드는 집은 부동산 값어치가 높기 때문이 아닙니다.


  백 살을 살기에 더 즐거울는지 궁금합니다. 아흔아홉 살을 살거나 여든아홉 살을 살면 덜 즐거울는지 궁금합니다. ㄱ대학교를 나왔거나 ㄴ대학교를 다니니 보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ㄷ고등학교만 마쳤거나 ㄹ중학교만 마쳤으면 보람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일곱 살 어린이는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할까요. 다섯 살 어린이는 한글을 떼어야 할까요. 열네 살 푸름이는 영어를 뛰어나게 해야 할까요. 스물다섯 살 젊은이는 큰회사 사무직으로 뽑혀야 할까요.


- “그런 선물을 받는다면 사랑을 해 보고 싶어.” (106쪽)
- “하지만 뭔가를 원하는 욕구가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최대의 증거가 아닐까. 그것 때문에 힘내서 살 수도 있잖아.” “그 욕구 때문에 힘들거든요, 님하.” “그렇겠지. 그럼 모든 게 이루어져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고 싶어?” (194∼195쪽)

 


  지팡이는 가게에서 살 수 있고, 숲에서 나무 한 그루를 베어 천천히 깎아 만들 수 있습니다. 푸성귀는 가게에서 살 수 있고, 텃밭에서 거둘 수 있으며, 아파트에서 살더라도 작은 꽃그릇에서 키울 수 있습니다. 가게에서 라면을 사다 먹을 수 있고, 밀가루를 사서 반죽하여 손수 끓일 수 있으며, 밭에 밀씨를 심고 거두고 절구질까지 해서 밀가루를 얻은 뒤, 이렇게 얻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천천히 끓일 수 있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마다 다 다른 삶입니다. 다 다른 삶에는 다 다른 사랑이 피어납니다. 꼭 이렇게 해야 아름답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 길로 가야 참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착하고 너그러우며 따사롭고 맑을 때에 즐거운 사랑이 됩니다. 만화책 《설희》 셋째 권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사랑뿐 아니라 스스로 나를 아끼는 사랑은 무엇인지 넌지시 들려줍니다.


  사랑이 있는 자리는 저 먼 곳이 아닙니다. 사랑이 있는 자리는 바로 내가 선 이곳입니다. 사랑이 있는 자리를 다른 데에서 찾으려 하면 찾지 못합니다. 사랑이 있는 자리는 바로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느끼고 깨달으며 아낄 때에 곱게 빛납니다. 4347.1.2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책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통사고

 


  낮에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면소재지 마실을 다녀온다. 마을을 벗어날 즈음, 짐차 한 대가 자전거 옆으로 지나간다. 수레에 앉은 네 살 작은아이가 문득 코를 싸쥐며 “아우 냄새. 자동차 냄새 싫어.” 하고 말한다. 큰아이도 어릴 적부터 이 말을 곧잘 했다. 참말,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배기가스와 기름 타는 냄새가 난다. 우리 식구는 자가용을 안 타고 두 다리로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냄새를 잘 느낀다. 곁님은 몸이 많이 안 좋다 보니 한결 이런 냄새를 잘 느끼고, 나 또한 그리 몸이 튼튼한 사람이 아니다 보니 이런 냄새를 똑똑히 느끼곤 한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시골에서 살아가며 늘 마시는 싱그러운 바람하고는 사뭇 다른 ‘죽음 냄새’인 터라 달갑지 않다.


  저녁에 아이들 재우고 영화를 하나 본다. 〈벚꽃, 다시 한 번 카나코〉라는 영화이다. 영화이름이 애틋하구나 싶어 찬찬히 보는데,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가려는 어린 ‘카나코’가 그만 자동차에 치여 죽는다. 이런. 처음부터 이렇게 아픈 이야기가 나오나. 어여쁜 아이를 잃은 어머니와 아버지 아픔이 잔잔히 흐른다. 이 아픔을 어떻게 말로 나타낼 수 있을까. 이 슬픔을 어떻게 그림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한다. 통계에도 나오지만, 전쟁터에서 죽는 사람보다 자동차에 치여 죽는 사람이 훨씬 많다고 한다. 이 나라에 총이나 칼이 마구 춤추지 않지만, 곰곰이 살피면 ‘자동차’라는 총칼과 탱크와 전투기와 미사일과 폭탄이 춤춘다고 할 수 있다.


  교통사고란 무엇일까. 교통사고는 그저 교통사고일 뿐인가. 앞으로도 자동차만 헤아리는 정책이 끊이지 않아야 할까. 앞으로도 고속도로와 고속국도는 끝없이 늘어나기만 해야 할까. 4347.1.2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여행자 - 히말라야 도서관에서 유럽 헌책방까지
김미라 지음 / 호미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읽기 삶읽기 156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책들
― 책 여행자
 김미라 글
 호미 펴냄, 2013.12.24.

 


  김미라 님이 쓴 《책 여행자》(호미,2013)를 읽습니다. 김미라 님은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녔고, 여러 나라 책방을 찬찬히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지구별을 떠도는 책을 만났고, 스스로 지구별을 누비면서 책 하나 깃드는 삶자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요.


  책은 여행을 합니다. 책이 하나 태어나기까지 숲에서 오래오래 자라다가 잘린 나무가 책이 되니, 종이에 어떤 이야기가 얹히든, 모든 책은 여행을 합니다. 기나긴 나날 새들 노랫소리를 듣고 살던 나무입니다. 오랜 나날 풀내음을 맡고 햇볕을 먹으며 빗물을 마시던 나무입니다. 온갖 짐승들 나고 자라는 삶을 지켜본 나무요, 숱한 벌레들 한살이를 바라본 나무입니다.


..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옮겨 가는 동안 어느덧 나는 키가 쑥쑥 자라나 글씨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 드넓은 바다를 건너 이 높은 히말라야까지 오게 된 이 책들은 대체 어떤 기억을 담고 있을까 … 인간은 책을 남겼다. 그리고 책은 우리에게 희망을 남겨 주었다 … 이 비극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렇게 과격하게 테러를 행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이 책을 제대로 읽어 본 일이 없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  (8, 12, 19, 23쪽)


  푸릇푸릇 풀이 돋습니다.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덮인 땅이 아닌 흙으로 된 땅에서는 한겨울에도 푸릇푸릇 풀이 돋습니다. 우리 집 마당 한쪽 쪼개진 틈에서 풀이 돋고, 대문 아래쪽 시멘트 갈라진 자리에서 풀이 돋습니다. 날마다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대문 아래쪽에서 유채풀과 갓풀이 씩씩하게 잎사귀를 벌립니다. 집 둘레 흙땅에서도 갓풀은 검푸르게 잎사귀를 키웁니다.


  조물조물 올라오는 쑥풀을 바라봅니다. 뒤꼍 매화나무 가지마다 불긋불긋 조그마한 봉오리가 오릅니다. 이 봉오리마다 새봄에 고운 꽃잎을 벌리겠지요. 봄바람 따라 살랑살랑 향긋한 매화내음을 나누어 주겠지요.


  작은아이를 안고 후박나무 봉오리와 동백나무 봉오리를 만지도록 합니다. 큰아이는 키가 제법 크니 스스로 봉오리를 만져 보라고 말합니다. 두 나무 모두 겨우내 짙푸른 잎사귀를 달고, 새봄부터 천천히 봉오리를 터뜨립니다. 동백나무가 먼저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후박나무는 천천히 꽃봉오리를 터뜨려요.


  동백꽃은 사람들이 곧 알아챕니다. 동백꽃을 보면서 꽃놀이를 즐기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와 달리 후박꽃이 필 적에 알아채거나 알아보는 사람은 드뭅니다. 후박꽃이 지고 후박알 맺힐 적에 알아채거나 알아보는 사람 또한 드뭅니다. 그러나, 후박꽃이 피면서 후박알 맺힐 적에 누구보다 멧새가 곧바로 알아채요. 누구보다 멧새들은 후박알을 먹으려고 후박나무를 찾아듭니다.


.. 같은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을 때마다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새로움이 발견된다 … 지금까지 어떤 책을 금지한다고 해서 읽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책을 읽도록 강요한다고 해서 영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 상상력 없이는 아무리 위대한 예술 작품이라도 사람을 편협하게 만들고 만다 … 고전이 이토록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읽고 또 읽게 만드는 숨겨진 힘이 있어서가 아닐까 … 여행하는 동안에는 글을 쓰지 않았다. 아니 쓸 수가 없었다. 그냥 나는 걷고, 보고, 듣고, 느끼기에만 충실했고,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이란, 그 순간들의 경험이 다였다 ..  (25, 36, 39, 59, 76쪽)


  매화꽃이 질 무렵 매화잎이 돋습니다. 매화잎이 돋고 매화꽃이 저물면서 매화알이 익어요. 처음에는 푸르딩딩한 빛이요 차츰 누르스름한 빛입니다. 매화알도 살구알처럼 노오란 빛이 맑으면서 곱지요. 다만, 매화알은 살구알처럼 달콤하지 않습니다. 살구알은 달면서 시큼한 맛이 좋아 먹지만, 매화알은 이도 저도 아닌 맛이 돌아요.


  사람들은 봄에 으레 벚꽃이나 매화꽃을 보며 즐거워 합니다. 벚꽃이나 매화꽃이 지면 꽃놀이는 한동안 잊습니다. 그런데, 꽃이 진 뒤에도 잎빛은 곱습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빛과 푸르게 빛나는 새잎 빛깔은 무척 잘 어울려요. 여기에, 푸른 빛에서 노르스름 익는 열매빛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립니다.


  고들빼기라든지 씀바귀라든지, 사람들은 흔히 뿌리만 캐서 먹습니다. 고들빼기잎이나 씀바귀잎을 먹는 사람은 드뭅니다. 고들빼기꽃이나 씀바귀꽃을 곱다고 들여다보는 사람도 드물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즐겨 찾아서 먹지 않으니 고들빼기잎이나 씀바귀잎이 써요. 사람들이 늘 들여다보면서 꾸준히 뜯어서 먹으면 고들빼기잎이나 씀바귀잎도 쓰지 않습니다. 스스로 즐겨먹지 않으니 쓴맛만 짙어요.


  민들레잎도 즐겁게 뜯어서 먹을 적에 쓴맛이 감돌지 않으면서 싱그러워요. 토끼풀잎도, 괭이밥풀잎도 모두 똑같아요. 즐겁게 자주 먹으면 싱그러운 풀맛이지만, 눈여겨보지 않거나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저 쓰기만 한 맛이 되고 말아요.


.. 정말 중요한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미련을 두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 내가 노란 조명을 나지막이 켜 놓고 밤이 늦도록 책을 읽는 걸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어떤 빛보다도 나를 깨우는 푸른 새벽 햇살만큼 설레게 하는 건 없다 … 시간이 흘러 영어를 배우게 되고 수업도 따라가게 되면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유명한 회사에 취직할 가능성이 높아져서도 아니고 외국인한테 척척 말을 걸 수 있게 되어서도 아니었다. 세상에 내가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엄청나게 늘었다는 점이 단연 최고로 신나는 일이었다 ..  (125, 133, 176쪽)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나무입니다. 나무 한 그루는 수백 해나 수천 해를 살아갑니다. 나무 한 그루가 스러져 죽어도 새로운 나무들이 뒤이어 자랍니다. 나무마다 푸른 바람을 내뿜고 푸른 열매를 내놓습니다.


  나무를 마주하는 사람은 모두 다릅니다. 시골에서 나무를 마주하는 사람이 있고, 도시에서 나무를 마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즐겁게 나무를 마주하는 사람이 있으며, 아무 생각 없이 나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풀입니다. 풀포기는 수천 수만 수억 포기 골고루 돋습니다. 피고 지고 또 피고 지면서, 돋고 시들고 또 돋고 시들면서, 들과 숲에 푸른 옷을 입혀요.


  풀을 먹는 사람은 다 다릅니다. 시골에서 집 둘레 풀을 그날그날 뜯어서 먹는 사람이 있고, 도시에서 가게에 찾아가 풀을 사다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손수 씨앗을 뿌려 푸성귀를 얻는 사람이 있고, 풀씨 스스로 날려 돋은 풀을 고맙게 얻어서 먹는 사람이 있어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책입니다. 내가 읽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내가 읽어도 그 자리에 있어요. 내가 읽은 책은 우리 집 책꽂이에 깃들고, 내가 읽지 않은 책은 새책방이나 도서관 책시렁에 깃들다가, 누군가 따사로이 내민 손길을 타고 이웃집 책꽂이에 깃듭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저마다 다릅니다. 스스로 책값을 벌어서 한 권씩 사서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 책을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버이한테 돈이 많아 어느 책이든 걱정없이 사서 읽는 사람이 있고, 어버이한테 돈이 없어 어느 책이든 걱정하며 구경조차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 눈을 돌려 보니 작은 책방 한쪽에서 어머니가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고 있다. 그 이야기에 온갖 표정을 지으며 빠져드는 아이의 모습을 본다 … 골목을 돌 때마다 새로운 서점이 나타나는 이 경이로운 도시는 … 이 공간에서 만나는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난해한 철학서든 아기자기한 요리책 들은 누군가가 읽고 좋았던 기억이 담겨 있다 ..  (191, 196, 259쪽)


  책은 누가 읽을까요. 책방은 어떤 곳일까요. 책을 많이 읽은 사람 넋은 어떠할까요. 책방에는 어떤 책이 모일까요. 책을 쓰는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까요. 책방을 꾸리는 사람은 이웃들한테 어떤 책을 알려주고 싶을까요.


  책은 누가 안 읽을까요. 책방이 없는 마을은 어떤 삶터일까요. 책을 못 읽거나 안 읽은 사람 얼은 어떠할까요. 책방이 없는 마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책을 안 읽는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가슴에 담으면서 살아갈까요.


  《책 여행자》라는 책은 어떤 책이 될까 생각합니다. 《책 여행자》라는 책을 책꽂이에 건사하는 책방에는 어떤 이야기가 흐를까 생각합니다. 《책 여행자》라는 책을 쓴 분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합니다. 《책 여행자》를 읽은 내 이웃들은 어떤 빛을 가슴에 새기면서 오늘 하루를 누릴까 생각합니다.


  박주가리 씨앗을 후후 불며 마당에서 날리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그믐을 지나 보름으로 다가서는 달빛을 가만히 느끼며 생각합니다. 설을 앞두고 할머니 할아버지 뵈러 길을 나서기 앞서, 일찍 잠들려 하지 않으면서 더 놀고 더 조잘조잘 노래하려는 아이들을 다독이며 생각합니다. 방바닥에 불을 넣으며 생각합니다. 설거지를 하며 생각합니다. 빨래를 하며 생각하고, 다 마른 옷가지를 개며 생각합니다.


  책은 어디에서 태어날까요. 책은 어디로 흐를까요. 책에 스민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 손길을 타면서 어떤 사랑꽃으로 새로 태어날까요.


  풀씨가 날려 풀밭이 넓어집니다. 꽃씨가 날려 꽃밭이 넓어집니다. 나무씨가 퍼져 숲이 깊어집니다. 책씨가 한 사람 두 사람 손길을 거쳐 널리 퍼지면서 책숲이 이루어집니다. 4347.1.2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을 말하는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ttp://blog.naver.com/kko314

 

만화가 강경옥 님이 새해로 접어들어

이녁 만화 작품 <설희>를 표절한 연속극을

고발했다.

 

저작권을 침해했기 때문이다.

 

<설희>를 표절해서 만든 연속극 시청율이 어떠하건,

이 연속극을 재미있게 보건 말건,

다른 사람 작품을 훔쳐서 만든 연속극인 줄

사람들이 제대로 깨닫기를 바란다.

 

'생각있는 알라디너'라면

이러한 일이 생겼을 때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하고

모두한테 묻고 싶다.

 

다른 사람 작품을 표절해서

베스트셀러가 되거나 인기작가가 된다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행동을 하겠는가?

 

나는 새삼스럽게

내 알라딘서재 이웃뿐 아니라,

이곳 알라딘서재를 드나드는 모든 분들한테

정중하게 묻고 싶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