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그림 읽기
2014.1.30. 큰아이―그림에 담는 빛

 


  아이와 마주보고 앉아서 그림을 함께 그린다. 나는 나비를 그리면서 겹겹이 알록달록 빛깔옷을 입힌다. 큰아이가 아버지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저도 따라서 겹겹이 알록달록 빛깔옷을 입힌다. 나는 아이더러 그림을 어떻게 그리라고 시키거나 말하거나 알려주지 않는다. 아이는 아버지 그림을 따라해 보기도 하고, 제 나름대로 그리기도 하면서 하나씩 새롭게 느끼거나 익히리라 본다. 언제나 즐겁게 그리면 된다. 아름다운 그림이란, 즐겁게 사랑하는 웃음을 담을 때에 태어난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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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를 미워해 보리 어린이 2
요시모토 유키오 지음, 김리혜 옮김 / 보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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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46

 


돌멩이에 맞은 아이
― 왜 나를 미워 해
 요시모토 유키오 글
 김미혜, 황시백 옮김
 보리 펴냄, 1995.1.31.

 


  달팽이한테 빨리 달릴 수 있는 발을 달아 주면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토끼한테 무시무시한 뿔을 달아 주면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잠자리가 사람만큼 커다랗다면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작거나 여린 목숨들이 덩치가 커지거나 무서운 이빨과 뿔을 갖추면 이때부터 들볶이거나 시달리지 않을 만한지 궁금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자고들 말합니다. 아픈 이웃을 돌보자고들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어려운 이웃이며, 누가 도와줄 이웃이 될까요. 누가 아픈 이웃이며, 어떤 이가 도와줄 이웃이 될까요. 어려운 이웃한테는 돈을 모아서 건네면 되나요. 아픈 이웃한테는 바퀴걸상을 주거나 어깨동무를 해 주면 되나요.


  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칩니다. 어른은 아이더러 착하게 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자동차는 골목에서 빵빵거립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골목 놀이터에 자동차를 대 놓습니다. 대학교 마친 사람과 중·고등학교 마친 사람이 일터에서 받는 일삯이 다릅니다. 초등학교만 마치거나 초등학교조차 안 다닌 사람이 들어갈 만한 일터는 아주 드뭅니다. 어느 대학교를 나왔느냐에 따라 회사에 붙고 떨어지고가 달라지곤 합니다. 얼굴 생김새와 몸매로 사람을 가르곤 하며, ‘미인대회’가 버젓이 있어, 얼굴과 몸매로 사람을 쉽게 푸대접합니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공해를 일으킨다고 가르치거나 배우지만, 막상 자동차 배기가스가 사라지도록 마음을 쏟지 않습니다. 배기가스 그득히 나오지만 자가용을 장만하는 사람이 늘어날 뿐, 줄어들지 않습니다. 새로운 고속도로는 자꾸 내지만, 도시와 공장과 골프장과 관광단지를 숲으로 되돌리려는 움직임은 없습니다.


.. 타고난 고통이 아무리 심해도 요징은 고통을 나누어 가지고자 하는 부모 형제와 동무가 있었습니다 …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일로 만족을 얻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왜, 아이들은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아이들은 날 때부터 잔혹한 걸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요징을 괴롭힌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게 나쁜 아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평범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맑은 날에는 야구나 피구 따위를 하면서 사이좋게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아이들이 또 한편으로 약한 아이를 괴롭힙니다. 괴롭히는 것을 즐기고 있는 듯도 했습니다. 마치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  (29, 83∼84쪽)


  어른들은 전쟁무기를 만듭니다. 어른들은 군부대를 크게 키웁니다. 이러면서 평화를 말합니다. 총칼과 폭탄을 잔뜩 짊어진 몸으로 평화를 말합니다. 핵폭탄까지 만들면서 지구 평화를 말하곤 합니다. 평화를 바란다면 평화롭게 살 노릇이요, 전쟁무기나 군대에 들이는 어마어마한 돈으로 지구별이 평화롭도록 하는 데에 쓸 일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은 어른들 뒤를 고스란히 잇습니다. 아이들이 늘 지켜보는 어른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삶이요, 겉과 속이 다른 모습입니다.


  농약을 어찌해야 할까요. 농약 때문에 망가지는 흙과 들과 냇물과 바다는 어찌해야 할까요. 농약을 바라는 도시 얼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농약을 쓰고 코팅까지 입혀 번들거리는 과일이 되어야 ‘맛있어 보인다’고 말하는 도시 얼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한겨울에 비닐집에 난로를 틀어 키우는 딸기를 먹는 도시 얼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이른봄에 비닐집에서 거두는 참외와 수박을 먹는 도시 얼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한국에서 거두는 밀은 아주 조금뿐이지만, 사람들은 빵과 라면과 피자와 햄빵과 과자를 아주 많이 사다 먹습니다. 어른이 사다가 아이한테 먹이는 밀가루밥은 얼마나 아이를 헤아리거나 살피거나 사랑하는 손길이 될까요.


  플라스틱 장난감은 아이들한테 도움이 될까요. 온갖 교과서와 문제집과 참고서는 아이들한테 빛이 될까요.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은 아이들한테 지식이나 슬기가 될까요. 대중문화는 아이들한테 즐거운 놀이가 될까요. 고장말을 몰아내는 표준말은 아이들한테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까요.


.. 나도 ‘어째서 이 아이가, 무리를 하면서까지 (중국에서 일본으로 와서) 일본어 공부를 해야만 할까? 중국에 있었다면 이렇게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중국에서 일본까지 오고, 몸도 불편하고 말도 잘 못하는 아이에게, 왜 그런 짓을 할까? 이 아이들은 해코지를 당하려고 일본에 온 건 아닌데.’ … 아이들을 꾸짖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반 아이들이 별 생각 없이 했던 해코지가 요징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있는데도, 모두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  (51, 60∼61, 86쪽)


  아침에 멧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포근한 겨울비 내리는 시골집에서 아침 멧새 소리를 듣습니다. 제법 추운 바람이 불 적에는 아침 멧새 소리를 거의 못 들었습니다. 날씨가 포근하니, 갓 이월로 접어들었지만 아침을 깨우는 멧새가 우리 집 둘레에서 지저귀면서 먹이를 찾습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영어 노래를 베풉니다. 자동차 소리와 텔레비전 소리와 전자제품 소리를 베풉니다. 새와 풀벌레와 나무와 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아이한테 베푸는 어른이 사라집니다. 도랑물 소리와 골짝물 소리를 아이한테 베푸는 어른은 자취를 감춥니다. 장작을 패고 아궁이에 불을 때는 소리를 베푸는 어른은 찾아볼 길 없습니다.


  회사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가요. 회사원이 되는 아이들은 무엇을 꿈으로 품는가요. 공공기관에서는 어떤 일을 하는가요. 공무원이 되는 아이들은 무엇을 사랑으로 품는가요.


  경제개발은 왜 해야 할까요. 경제개발은 누구한테 어떻게 도움이 될까요. 마실 물과 들이켤 바람과 먹는 밥이 싱그럽거나 깨끗하지 못하면서 경제개발만 할 적에, 우리 몸과 마음은 얼마나 튼튼하거나 즐거울까요. 민주와 평화가 없이 국가안보만 생각하면 될는지 궁금합니다. 평등과 통일이 없이 교육과 복지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농약을 써야 한다는데, 아이들한테 농약 듬뿍 묻은 곡식이나 열매를 먹으라고 건넬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대학교를 안 마치면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며 아이한테 참고서와 교과서와 문제집을 건네는 어른들 손길은, 참말 아이를 걱정하거나 생각하는 사랑인지 궁금합니다.


.. 아이들은 몸이 불편한 아이를 보면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를 특별한 눈으로 봅니다. 아이들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른들이 몸이 불편한 사람은 불쌍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니까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이어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아이는 자주 해코지를 당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해코지를 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해코지당하는 사람 눈으로 요징을 보면 요징이 착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요징이 언젠가는 반드시 이기겠다고 한 말은 언젠가 해코지한 아이에 대해 복수하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요징의 말에는 아무리 해코지를 당하더라도, 상대방을 용서해 주고, 그래서 동무가 된다면 그 동무들을 즐겁게 해 주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씨가 담겨 있습니다 ..  (102, 106, 112쪽)


  요시모토 유키오 님이 쓴 《왜 나를 미워 해》(보리,1995)를 읽습니다. 일본에 있는 ‘일본어 학급’ 교사로 지내면서 만난 ‘어버이 고향은 일본이지만 중국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 국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아이들’ 가운데 ‘칭요징’하고 보낸 나날을 돌아보면서 쓴 이야기책을 읽습니다.


  칭요징은 일본사람이면서 중국사람입니다. 칭요징은 중국을 사랑하면서 일본을 미워하고 싶지 않습니다. 칭요징은 그저 사람입니다. 칭요징은 따사로운 숨결입니다. 칭요징은 동무와 이웃 모두 사랑스러운 넋인 줄 느낍니다. 서로 어깨동무하고 싶습니다. 서로 즐겁게 어울리고 싶습니다. 함께 놀고 일하면서 아름다운 빛이 이 땅에 드리울 수 있기를 꿈꿉니다.


  그런데, 일본땅에서 칭요징을 마주하는 일본 어린이는 칭요징한테 돌을 던집니다. 작은 돌 큰 돌 골고루 던집니다. 칭요징은 일본 어린이한테 돌을 마주 던지지 않습니다. 말없이 돌을 줍습니다. 일본 어린이가 저한테 던진 돌을 고스란히 모읍니다.


.. 요징은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아무것도 못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데 소중한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 도시아키를 보는 주위 어른들의 눈은 너무나 지나치게 냉정합니다. 어른들은 좀처럼 도시아키의 마음속을 살펴보아 주지 않습니다. 도시아키를 따뜻한 마음으로 보아 주었으면 하고 바라면 지나친 욕심이 될까요 ..  (150, 159쪽)


  돌을 맞은 아이는 ‘돌을 맞을 만한 까닭’이 있을까요? 가해자인 아이들한테도 ‘핑계로 둘러댈 이야기’가 있을까요.


  학교폭력과 따돌림이 큰 골칫거리라 합니다. 그런데, 학교폭력 가해자인 아이들을 돌보는 어버이는 ‘폭력에 시달린 아이’ 앞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좀처럼 안 꺼냅니다. 동무를 따돌리는 ‘내 아이’를 꾸짖거나 타이르거나 잘못을 바로잡도록 이끄는 어버이도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합니다.


  가만히 보면, 어른들은 뺑소니 사고를 쉽게 일으킵니다. 어른들은 사고를 내고도 외려 큰소리를 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를 이루는 법을 보면, 모든 법은 어른들 때문에 생깁니다. 어른들이 워낙 거짓말을 하고 남을 괴롭히며 들볶기 때문에 법이 생깁니다.


  아이들 때문에 생기는 법은 없습니다. 갓난쟁이가 징징 운대서 법이 생기지 않습니다. 갓난쟁이가 밥투정을 한대서 법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쉬 마렵다며 풀밭에 쉬를 눈대서 법이 생기지 않아요.


  싸움을 일으키거나 남을 괴롭히는 쪽은 늘 어른입니다. 어른들이 이 사회를 안 아름답게 망가뜨리니 법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이 사회와 나라와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을 엉망진창으로 일그러뜨렸기에 법이 있습니다. 모든 어른들 잘잘못 때문에 아이들이 괴롭습니다.


.. 요징은 해코지를 당해도 가만히 참고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코지한 사람의 마음도 헤아려 그 사람도 틀림없이 ‘외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해코지한 아이를 용서했습니다 … 남을 괴롭히는 일 말고는 자신을 만족시킬 길이 없는 아이들은 분명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요징은 그렇게 판단한 것입니다 ..  (183, 184쪽)


  어린 칭요징은 “나는 여러 사람과 동무가 되고 싶습니다. 나는 다만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수화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친구가 되기 위해섭니다. 보통 사람과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 모두 동무로 사귀고 싶습니다(190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칭요징한테 일본말을 가르친 요시모토 유키오 님은 “학교가 지식만을 가르치는 곳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저마다 다른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알려주는 곳, 학교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9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돌에 맞은 아이가 눈물을 삼킵니다. 돌에 맞은 아이가 ‘돌을 던진 아이’ 마음속에 슬픈 외로움이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부디 그 아이 마음에 따사로운 빛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돌을 던진 아이는 두 발을 뻗고 시원하게 잘 만할까요. 돌을 던진 아이는 ‘돌에 맞은 아이’가 얼마나 아프거나 슬픈 줄 알까요.


  학교에서 교사는 어떤 노릇을 하는지요. 교과서는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치는지요. 교사는 아이한테 무엇을 보여주나요. 여느 동네 여느 어버이는 여느 아이한테 어떤 삶을 물려주는가요.


  입시에 얽매인 학교 아닌, 사랑이 자라는 학교가 되기를 빕니다. 입시를 다그치면서 아이들한테 일찌감치 영어를 비롯한 시험공부만 시키는 학교 아닌, 아름다운 사랑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기를 빕니다. 시골 아이를 몽땅 도시로 보내는 바보스러운 학교 아닌, 마을마다 마을사람 되도록 가꾸고 돌보면서 사랑스러운 눈빛 되도록 북돋우는 학교가 되기를 빕니다. 아이들이 동무한테 돌을 던지는 까닭은, 먼저 학교가 아이들한테 돌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와 교사 모두 아이들한테 돌을 던지면서 ‘스스로 아이한테 돌을 던지는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한테 입시지옥이라는 돌은 그만 던지고, 아이들을 따사로운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기를 빕니다. 4347.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동화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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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림놀이] 꿈빛 사랑 노래 (2014.1.30.)

 


  음성 할머니한테 그림 하나 선물로 남긴다. 무엇을 그려서 드릴까. 큰아이와 함께 그림놀이를 하며 생각하다가 나비를 그리기로 한다. 음성 할머니가 정갈하게 돌보는 앞뜰과 텃밭에 찾아들 나비를 떠올리면서 한 꺼풀 두 꺼풀 무지개옷을 입힌다. 그러고는 사름벼리와 산들보라 두 아이가 호미와 연필을 쥐며 웃는 모습을 그린다. 제비 네 마리 날고, 별빛과 꽃빛이 흐드러지는 한복판에 “꿈빛 사랑 노래” 세 가지가 춤추기를 바라는 이야기를 넣는다. 큰아이가 그린 그림이랑 나란히 마루벽에 살며시 붙여놓는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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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임석재 (‘골목마실’ 사진에 붙이는 말)

 


  《서울, 골목길 풍경》(2006)이라는 책을 내놓은 건축가 임석재 님이 있다. 나는 이 책이 ‘소재는 골목길’이지만, 그저 ‘건축 이야기’만 풀어놓는다고 느낀다. 골목도, 골목빛도 보여주지 못하는 책이라고 느낀다. 건축을 읽으려고 골목 몇 군데를 돌아보았을 뿐, 골목이 이루어지는 흐름과 까닭과 삶과 사랑은 한 줄조차 못 담았다고 느낀다.


  왜 그럴까? 안타깝게도, 이녁은 골목을 거닐면서 ‘사람내음’을 맡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골목동네를 이룬 사람들 냄새, 골목동네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냄새, 골목동네에서 어깨를 맞대며 작은 집이 촘촘히 이어진 그곳에서 사랑하는 냄새, 들을 맡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반드시 골목에서 나고 자라야만 골목 이야기를 잘 읽거나 제대로 읽는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골목에서 나고 자랐어도 ‘하루 빨리 골목을 떠나고픈 사람’한테는 골목빛이 안 보인다. 조용히 삶을 즐기는 사람일 때에는 골목동네에서 살지 않아도 ‘골목마실을 하는 동안 골목빛을 느낀’다.


  2005년에 숨을 거둔 김기찬 님이 있다. 나는 김기찬 님 사진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김기찬 님은 ‘나그네’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골목동네를 마실하면서 살갑고 사랑스러운 사진을 찍었으나, ‘나그네’라는 옷을 벗지 못하셨다. 나그네 허울을 벗었으면 얼마나 예뻤을까. 사진잔치를 골목동네에서 했다면, 골목동네에 조그마한 달삯방을 얻어서 한 주에 하루쯤이라도 작은 달삯방에서 먹고자면서 골목숨을 느껴 보셨으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날마다 ‘출근 도장’을 찍듯이 찾아와서 나들이를 하는 동안 마주하는 즐겁고 재미난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골목집에서 먹고자면서 새벽에 느끼고 아침에 맞이하며 낮에 복닥이면서 저녁에 어스름과 함께 찾아들다가 밤이 되어 그윽하게 서리는 빛이 있다. 이러한 빛은 골목동네 사람으로서, ‘동네 주민’으로서 살 때에 비로소 맛본다. 김기찬 님 골목 사진에는 바로 이 ‘골목맛’이 없다.


  그렇지만, 김기찬 님은 ‘출퇴근 도장’을 찍듯이 아주 자주 골목마실을 하셨다. 비록 동네 주민은 못 되었지만 ‘나그네’로서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겼다. 나그네답게 동네 주민과 따사롭게 만나고, 홀가분하게 어울리면서, 골목동네 사람들 속내와 속살과 속말을 사진으로 푼더분하게 담았다.


  이와 달리 임석재 님은 나그네도 아니고 주민도 아니었다. 그저 ‘구경꾼’으로 골목을 드나들었다. 이 눈길과 발걸음은 얼마나 다른가? 왜 학자는 하나같이 구경꾼이 되기만 할까? 강 건너에서 구경하는 불이란 얼마나 잘 바라보면서 ‘기록’하는 학문이 되는가?


  학자들이 ‘강 건너 불구경 학문’에 머물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학자들이 강 너머로 헤엄쳐서 건넌 뒤, 불난 동네에서 불을 끄려고 하든, 불난 사이사이를 거닐든 하기를 바란다. 사진 한 장 덜 찍어도 된다. 사진 한 장 더 찍어야 하지 않는다. 스스로 동네 주민 되어 동네에 녹아들면, 사진 한 장을 덜 찍더라도, 이녁이 담는 사진마다 아름다운 빛이 스민다. 이때에 시나브로 골목빛이 태어난다.


  ‘인간미 없는 학문’은 재미없다. ‘인간미 없는 학문’으로 골목을 바라보아 기록했다면, 이런 기록은 학문이 될는지 모르나, 골목동네 사람들한테 스며들거나 다가설 수 없다.


  얼마쯤 지내다가 떠날 구경꾼으로서 바라보는 골목 모습이란 무슨 멋이 있겠는가. 몇 차례 드나들다가 더는 찾아오지 않을 구경꾼으로서 지켜보는 골목 모습에 얼마나 잘 속속들이 찬찬히 살가이 따사롭게 바라본 이야기가 있겠는가.


  김기찬 님은 언제나 나그네였지만, 아예 작정하고 나선 나그네였기에, ‘아름다운 인간미’를 잃지 않고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임석재 님은 ‘학문에 매달린 구경꾼’ 발걸음만 이은 탓에 학문은 되었을는지 모르나, 이야기는 풀어놓지 못한다.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면, 바로 이런 삶이 모인 나라가 아름다운 나라가 된다. 대통령이나 정치지도자가 잘 해야 아름다운 나라 되지 않는다.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제 삶자리에서 아름답게 살아가면, 이때에 아름다운 나라이다.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구경꾼이나 나그네 아닌 ‘마을사람’이나 ‘동네사람’으로서 제 보금자리에서 아름답게 살아가며 ‘제 보금자리 이야기’를 적바림하기를 빈다. 4347.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골목길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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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잡지 《포토닷》 3호가 나왔다. 설을 앞두고 우체통에 꽂힌다. 지난 한 달 사이 이 사진잡지 정기구독자는 얼마나 늘었을까. 예술스럽지 않은 여느 ‘사진 즐김이’ 이야기가 조금 더 늘어나면 좋겠지만, 차근차근 자리를 넓힐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포토닷》 3호에는 ‘사진 저작권’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이 진보신문이라 일컫는 ㅎ신문 이야기도 보수(또는 수구)신문이라 일컫는 ㅈ신문과 얽혀 나오는데, 이 신문이고 저 신문이고, ‘사진작가 사진작품’을 ‘보도자료’라는 이름을 붙여 ‘저작권 사용료’를 한푼도 안 주고 함부로 쓴다는 글을 읽는다. 그래, 나도 내 사진을 신문사나 잡지사에 보내주면 ‘사진 저작권 사용료’를 안 주기 일쑤이다. 그 진보신문이라는 ㅎ신문과 ㄱ신문 기자하고 열 해 앞서 말다툼을 벌이기까지 해야 했다. ㄱ신문은 내 사진 원본을 빌렸다가 잃어버렸다면서 안 돌려주기도 했다. 신문사 가운데 내 사진을 쓰고 사진값을 치른 곳은 지난해에 ㅁ신문 한 군데뿐이다. 사진을 빌려쓰면서 사진값 안 치르는 기자들이 늘 하는 말은, ‘보도자료’라는 핑계에 앞서 ‘우리 신문사는 가난해서 사진값을 드리기 어렵습니다’이다. 그래서 나는 ‘신문사가 어려워도 사진값으로 1만 원조차 못 주나요?’ 하고 되묻는데, ‘어렵습니다’ 하고 말하고들 한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밥을 사겠다’이다. 밥 사 주지 말고, 술도 사 주지 말고, 사진값을 치르면 되잖은가? 사진잡지 《포토닷》이 있어, 이런 간지러운 이야기를 긁어 주는구나. 4347.2.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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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지음 / 포토닷(월간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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