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도 익혀야지

 (400) 것일 것이다 1


우리가 어떠한 정신적 자세와 태도를 유지하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오다 마코토/양현혜·이규태 옮김-전쟁인가 평화인가》(녹색평론사,2004) 3쪽


 -하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 -하느냐 하는 것이다

→ -하느냐 하는 대목이다

→ -하느냐이다

→ -하느냐에 달린다

→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



  글이나 말을 끝맺으면서 ‘-는 것이다’처럼 쓰는 분이 부쩍 늘어납니다. 이러한 글투나 말투는 한국말이라 할 수 없지만, 어느새 아주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이 같은 말투를 쓰지 말자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 “-하느냐 하는 것이다”처럼 ‘것’을 한 번쯤 넣는 말투는 이럭저럭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할 만할 텐데, 다시금 ‘것’을 더 넣어서 “-는 것일 것이다”처럼 쓴다면, 참으로 얄궂습니다.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분이 이처럼 ‘것’을 겹으로 쓰면서 힘있게 뜻을 나타내려고 하는구나 싶습니다. 일부러 같은 말을 잇달아 적으면서 힘주어 말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리하여 “-는 것일 것이라는 것이다”처럼 ‘것’을 세 차례 쓰는 분도 있어요.


  그러면 곰곰이 생각할 노릇입니다. 한국말에는 이런 말투가 없습니다. 이처럼 ‘것’을 쓰는 말투가 없는 한국말에서는 그동안 어떤 말투로 힘주어 말했을까요?


 -하느냐에 따라 달린다고 하겠다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다시금 말하겠다

 -하느냐를 더 생각할 노릇이다

 -하느냐를 새삼스레 돌아볼 일이다


  말끝에 여러모로 다른 낱말을 넣으면서 힘주어 말합니다. ‘것’을 넣지는 않습니다. 말끝을 이어서 새로운 낱말을 붙일 때에 비로소 ‘제대로 힘주어 외치는 투’가 됩니다. 4338.3.24.나무/4348.2.15.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우리가 어떠한 마음과 몸짓을 지키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마음과 몸짓을 잇느냐 하는 대목이다


한자말 ‘자세(姿勢)’는 “사물을 대할 때 가지는 마음가짐”을 뜻한다 하고, ‘태도(態度)’는 “어떤 일이나 상황 따위를 대하는 마음가짐. 또는 그 마음가짐이 드러난 자세”를 뜻한다 합니다. 그러니, 두 한자말은 똑같은 한 가지를 가리키는 셈입니다. ‘자세 = 마음가짐’이라 하면서, ‘태도 = 마음가짐이 드러난 자세’라고 한다면, ‘태도 = 마음가짐이 드러난 마음가짐’이란 소리이니,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말풀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한편, 말뜻이 터무니없는 두 한자말을 나란히 쓰는 보기글도 얄궂습니다. “정신적(精神的) 자세와 태도”는 “마음과 몸짓”으로 손질합니다. ‘유지(維持)하느냐’는 ‘지키느냐’나 ‘잇느냐’로 손봅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545) 것일 것이다 2


아마 유명한 ‘57 버라이어티’와 유사한 모든 것을 낙인찍는 잘못된 관습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나탄 라이언스/윤택기 옮김-사진가의 사진론》(눈빛,1990) 21쪽


 잘못된 관습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 잘못된 버릇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 잘못된 버릇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 잘못된 버릇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느낀다

→ 잘못된 버릇에서 비롯되었지 싶다

→ 잘못된 버릇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 잘못된 버릇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



  “것일 것이다”처럼 쓰기에 더 힘주어 나타내는 말투가 되지 않습니다. 이 보기글은 “비롯되었다고 본다”처럼 쓰면 됩니다. “비롯되었으리라 생각한다”처럼 써도 됩니다. “비롯되었다고 굳게 믿는다”처럼 쓰거나 “틀림없이 비롯되었다고 본다”처럼 써도 되어요. 4339.4.26.물/4348.2.15.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아마 잘 알려진 ‘57 버라이어티’와 비슷한 모든 것을 (한쪽으로) 몰아세우는 잘못된 버릇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본다


‘유명(有名)한’보다는 ‘잘 알려진’이나 ‘널리 알려진’으로 손보고, ‘유사(類似)한’은 ‘비슷한’으로 손봅니다. ‘낙인(烙印) 찍는’은 ‘못박는’이나 ‘몰아넣는’이나 ‘몰아세우는’으로 손질하고, ‘관습(慣習)’은 ‘버릇’으로 손질합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587) 것일 것이다 3


여름철에 큰바위 밑에서 능구렁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는 것은 무당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능구렁이의 울음소리로 착각한 것일 것이다

《백남극·심재한-뱀》(지성사,1999) 43쪽


 능구렁이의 울음소리로 착각한 것일 것이다

→ 능구렁이 울음소리로 잘못 들었기 때문이다

→ 능구렁이 울음소리로 잘못 알아서이다

→ 능구렁이 울음소리로 잘못 알아들은 셈이다

→ 능구렁이 울음소리로 잘못 알아들은 탓이다

→ 능구렁이 울음소리라고 엉뚱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 자리에서는 “착각한 것이다”로 끝맺을 만합니다. 적어도 이렇게 끝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ㄴ 것이다” 꼴도 아닌 “-ㄴ 것일 것이다” 꼴로 말끝을 늘어뜨립니다.


  말끝을 늘어뜨리면서 힘주어 말하려 한다면, “엉뚱하게 생각하고 그리 들었겠지”라든지 “잘못 들어서 그랬을 테지”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4339.7.12.물/4348.2.15.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여름철에 큰바위 밑에서 능구렁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면 무당개구리 울음소리를 능구렁이 울음소리로 잘못 알아들은 셈이다


“능구렁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로 썼으면 “무당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무당개구리 울음소리”라고 쓸 줄 아는 셈입니다. “능구렁이의 울음소리”도 “능구렁이 울음소리”로 손봅니다. ‘착각(錯覺)한’은 ‘잘못 안’이나 ‘잘못 본’이나 ‘잘못 생각한’으로 손질합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순백의 소리 3
라가와 마리모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467



내가 부르는 소리

― 순백의 소리 3

 라가와 마리모 글·그림

 이상은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3.6.25.



  설날을 앞두고 시골에서는 마을마다 ‘큰 청소’가 한창입니다. 그동안 시골을 떠나 살던 사람들이 시골에 계신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절을 하러 오기 때문입니다. 도시사람은 시골에 모처럼 찾아와도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 줄 못 느낄 테고, 풀이 얼마나 자랐는지, 또 고샅이 어떠한지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니, 이런 모습을 아예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동차로만 움직일 뿐이니까요. 무엇보다 도시에는 풀도 꽃도 나무도 둘레에 없습니다. 자동차가 오가기에 알맞도록 아스팔트 찻길이 있을 뿐입니다. 나무를 심는다 하더라도 시늉일 뿐이고, 그나마 시늉으로 심은 나무조차 제대로 바라보거나 쓰다듬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그래도 시골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설을 앞두고 풀을 뽑습니다. 아니, 설 앞이니 풀을 뽑지는 않고 밭두렁과 논두렁을 태웁니다. 온통 불잔치입니다. 이곳에서도 불을 피우고 저곳에서도 불을 피웁니다. 불을 피우는 김에 이런저런 쓰레기도 함께 태웁니다. 나중에 설이 지나고 보면, 설을 맞이해서 도시에서 가지고 온 선물꾸러미에 있던 플라스틱과 종이도 함께 태워요.


  마을에서는 곳곳에 불을 지르느라 부산하고, 면소재지에서는 마을방송으로 ‘논둑과 밭둑을 함부로 태우지 말라’고 알리느라 부산합니다. 면소재지 공무원은 마을을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그저 면사무소 책상맡에서 녹음테이프로 방송을 할 뿐입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 집은 온통 새하얀 연기에 둘러싸입니다. 마당에 서도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고, 창문을 꼭꼭 닫아도 연기 냄새가 스며듭니다.




- “간판? 연주자를 그런 기준으로 보십니꺼?” “보지. 나는 일반론으로 하는 말이야.” (27쪽)

- “사와무라 마츠고로, 네 할아버지 맞지? 그 연주는 신기였어. 그런데도 세상에 나오지 않고, 아는 것은 일부 연주자와 그 지방 사람들뿐. 평생 가난에 찌들었지?” “할배는, 그래도 행복했어예!” “난 말이야! 그 재능을! 그 보배를! 후세를 위해 남기지 않은 게 안타까워 죽겠다고! 마츠고로는, 보물을 혼자 끌어안고 죽어 버렸어!” (28∼29쪽)



  낮이 지나면서 비가 옵니다. 겨울비입니다. 겨울비는 마을마다 지핀 불을 잠재웁니다. 곳곳으로 퍼지던 연기는 비를 맞으면서 사그라듭니다. 이제 조금 숨을 쉴 만합니다. 겨울을 떠나 보내려는 비가 오면서 시골자락은 한결 샛노란 빛이 되고, 겨우내 시든 누런 풀잎은 곧 흙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흙이 될 테지요.


  뒤꼍에 서서 비를 맞으며 겨울눈을 바라봅니다. 우리 집 복숭아나무와 매화나무에 돋는 겨울눈을 쓰다듬습니다. 앞으로 한 달 뒤면 움이 틀까요. 아니면 보름 뒤에 움이 틀까요. 포근하게 부는 바람과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은 들과 숲과 마을에서 자라는 나무가 새롭게 깨어나도록 북돋웁니다. 나는 아이들과 이 고운 바람과 기쁜 햇볕을 맞이하면서 웃고 노래합니다.




- “다른 사람이 쓰는 게 더, 내가 쓰면 샤미센이 불쌍할 것 같아서.” “불쌍해? 샤미센의 마음을 니가 아나?” (38쪽)

- “샤미센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잖아?” “응?” “사와무라가 가르쳐 주면 좋겠는데, 라고 다른 애들도 생각할 거야.” “그치만도 나는 누가 갈키 주나?” “뭐? 사와무라도 누군가한테서 배우고 싶었어?” (39∼40쪽)



  라가와 마리모 님이 빚은 만화책 《순백의 소리》(학산문화사,2013) 셋째 권을 읽습니다. 샤미센을 켜는 아이들이 나오는 《순백의 소리》인데, 셋째 권에서는 ‘샤미센을 켠 적이 없는 동무’한테 샤미센을 가르쳐야 하는 아이가 나오고, 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소리를 어떻게 삭혀야 할는지 헤매는 아이가 나옵니다.


  소리란 무엇일까요.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소리란 무엇일까요. 할아버지하고 똑같이 낼 수 있는 소리란 무엇일까요. 할아버지한테서 소리를 물려받은 아이가 새롭게 들려줄 수 있는 소리란 무엇일까요.


  아마 할아버지도 처음에 혼자서 소리를 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할아버지도 처음에 ‘어린이’였을 적에는 이녁 할아버지나 둘레 다른 사람한테서 소리를 물려받았으리라 생각해요. 온갖 소리를 받아들이면서 마음으로 담고, 온갖 소리를 하나하나 녹여서 ‘내 소리’로 누리는 동안, ‘새로운 내 소리’ 하나가 태어났으리라 생각해요.




- “한 가지 걱정이 있는데, 니는 처음부터 잘 치는 사람만 봐 오지 않았나. 우선은 초보자를 상대로, 썽내지 말그라.” (59쪽)

- “내 주위엔 그 정도는 당연히 켜는 사람밖에 없었다. 소리도 제대로 못 내는 사람이 대회까지 얼마나 늘지 내 우예 아노? 대회 때, 나는 느그들 수준에 맞춰 줄 생각 없다.” (61∼62쪽)



  내가 부르는 소리는 내가 사는 소리입니다. 내가 부를 소리는 내가 살아갈 소리입니다. 내가 부른 소리는 내가 살아온 소리입니다. 나는 언제나 내 삶에 따라 내 소리를 빚습니다. 내 소리는 오롯이 내 삶이면서 내 꿈이요 내 길입니다. 내 소리는 옹글게 내 사랑이면서 내 빛이며 내 손짓입니다.


  더 나은 소리가 없고 덜떨어지는 소리가 없습니다. 대회에 나가서 1등이 되어야 훌륭한 소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다운 소리를 찾을 때에 나 스스로 즐겁습니다. 나다운 소리를 찾으려고 저마다 새롭게 배워서 새롭게 거듭나려고 애써요.




- ‘이때 나는 자기 자신에게 짜증이 나 있었다. 자기 자신의 무엇에 짜증이 나느냐고 그걸 알면 이렇게 짜증나지도 않지!’ (96∼97쪽)

-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소리가 되고 싶다!’ (105쪽)

- “다들 나한테는 관심 없다. 내 뒤에 버티고 있는 할배의 ‘소리’를 듣고 싶은 것뿐이지.” (128쪽)



  빗소리를 듣습니다. 이제 겨울빗소리는 끝납니다. 이월이 무르익다가 삼월로 접어들면, 이때부터는 봄빗소리입니다. 겨울비와 봄비는 다르고, 가을비와 여름비는 달라요. 겨울볕과 봄볕은 다르며, 겨울노래와 봄노래는 다르지요.


  똑같은 날이 없으니 똑같은 소리도 없습니다. 똑같은 하루가 없으니 똑같은 노래도 없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으니 똑같은 사랑도 없습니다. 우리는 늘 모두 다른 꿈을 가슴에 품고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다른 삶을 짓습니다. 만화책 《순백의 소리》에 나오는 아이들이 웃고 노래합니다.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이 겨울빗소리를 가만히 귀여겨들으면서 내 하루를 웃고 노래합니다. 4348.2.15.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넋·삶 17 ‘차다’와 ‘모자라다’


  우리가 어떤 일이나 놀이를 할 적에는 ‘마음에 차’야 비로소 끝낼 수 있습니다. ‘마음에 차’지 않으면 일이나 놀이를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에 덜 차’더라도, 다음에 다시 해서 ‘마음이 차’도록 하겠다고 생각하면 일이나 놀이를 끝냅니다.

  밥을 먹을 적에는 ‘배에 차’도록 먹습니다. ‘배부르다’라는 낱말로 ‘배에 밥이 찬’ 모습을 나타냅니다. 배에 차도록 밥을 먹지 않으면, 남이 보기에는 많이 먹었다고 여길지라도 ‘배고픈’ 모습이에요. ‘배에 차도록 먹는 밥’은 남 눈길로는 따질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두어 숟가락으로도 배가 찹니다. 어떤 이는 두어 그릇이 되어야 배가 찹니다. 사람마다 먹는 부피가 다르니 ‘배가 차는 부피’가 다르고, 배가 차는 부피가 다른 만큼, 내 둘레에서 다른 사람이 먹는 모습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거나 따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에 차다’ 같은 말을 씁니다. 성에 차지 않으면 안 되지요. 옷을 손수 짓든, 아니면 옷집에서 옷을 사든, 이런저런 물건을 장만하든, 또는 이런저런 물건을 선물로 받든, ‘성에 찰’ 때에 비로소 즐겁거나 기쁩니다.

  차다 → 보람차다 . 알차다 . 올차다 . 옹골차다 . 기운차다 . 힘차다 . 우렁차다

  ‘차다’라는 낱말은 여러 가지로 가지를 뻗습니다. ‘찬 모습’에 따라 어떤 느낌이거나 마음인가를 놓고 ‘배부르다’라든지 ‘기쁘다’나 ‘좋다’ 같은 낱말을 쓰기도 하는데, ‘차다’를 넣는 낱말로 ‘올차다’가 있고, 이와 맞물려 ‘올차다’라든지 ‘옹골차다’ 같은 낱말이 있어요. 사람은 예부터 일과 놀이를 하면서 으레 노래를 불러요. 그래서, ‘우렁차다’ 같은 낱말이 있습니다. 일을 하든 놀이를 하든 기운을 씁니다. 마음으로 기운을 쓸 적에는 ‘기운차다’일 테고, 몸으로 힘을 쓸 적에는 ‘힘차다’일 테지요. 머리로 생각을 지어 내 숨결이 생각을 씨앗으로 받아서 마음에 심을 때에 기운이 생기니, ‘기운차다’라는 낱말을 먼저 썼을 테고, 기운차다라는 낱말과 함께 곧바로 ‘힘차다’라는 낱말이 태어났으리라 느낍니다. 마음과 몸이 함께 움직였을 테니, 두 낱말(기운차다·힘차다)은 같은 때에 태어났으리라 봅니다.

  오늘날에는 ‘보람차다’라는 낱말을 퍽 널리 씁니다. ‘차다’가 붙은 낱말 가운데 아마 가장 널리 쓰는 낱말이지 싶어요.

  이 여러 가지 낱말을 하나하나 살핍니다. 먼저 말뜻을 살핍니다. ‘차다’는 “가득 있어 흐뭇하다”를 뜻합니다. ‘보람’은 “잊지 않거나 다른 것과 잘 가려서 알아보도록 할 때에 쓰는 것”과 “어떤 일을 한 뒤에 반갑거나 좋은 열매를 맺어서 흐뭇한 마음”을 뜻합니다. ‘알차다’는 “속에 가득 있어서 아주 야무지다”를 뜻하고, ‘올차다’는 “풀(곡식)에 맺는 열매(알)가 일찍 들어서면서 가득 있다”와 “흐뭇하면서 기운이 가득 있다”를 뜻합니다. ‘옹골차다’는 “속이 매우 야무지게 꽉 차다”를 뜻하고, ‘우렁차다’는 “소리가 매우 크면서 힘이 가득 있다”를 뜻해요.

  ‘차다’와 맞서는 낱말은 ‘모자라다’입니다. ‘차다’는 사람마다 다 다른 부피와 무게와 모습이나 숫자가 되는데, ‘모자라다’도 사람마다 다 다른 부피와 무게와 모습이 되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밥을 네 그릇을 먹었으나 모자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100억 원을 벌었으나 모자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열 시간 동안 쉬잖고 했지만 모자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책을 100만 권 읽었으나 아직 모자라서 더 읽고 싶을 수 있습니다.

  ‘차다·모자라다’는 ‘많다·적다’하고는 사뭇 결이 다릅니다. 찬 모습이나 모자란 모습은 ‘많다’나 ‘적다’로 가리킬 수 없습니다. 마음에 들 때에 ‘차다’요,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 ‘모자라다’입니다. 마음대로 될 때에 ‘차다’요, 마음대로 안 될 때에 ‘모자라다’입니다. 이리하여, ‘차다·모자라다’를 읽을 수 있다면 ‘좋아하다·좋다·그리다·사랑’이 어떻게 다른지 더 깊고 넓게 헤아릴 만합니다.

  ‘좋아하다’는 차거나 모자란 모습을 따지거나 살피지 않습니다. 무턱대고 들이미는 몸짓이 ‘좋아하다’입니다. 하나도 안 찼어도 ‘마냥 좋아할’ 수 있습니다. ‘좋다’는 어느 만큼 마음에 찬 모습입니다. 어느 만큼 모자랐어도 어느 만큼 차다고 여기니까 ‘좋다’고 합니다. ‘그리다’는 ‘모자람이 없다’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다만, ‘마음에 차다’라고 할 수는 없어요. ‘차다’를 따지지 않고 ‘모자람이 없다’를 헤아리는 마음일 때에 ‘그리다’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어떤 마음일까요? 네, ‘사랑’은 마음에 찬 모습입니다. 마음에 찰 적에는 ‘모자람이 없다’를 따지지 않습니다. 오로지 ‘마음에 차다’만을 헤아리는 마음이 바로 ‘사랑’입니다.

  ‘차다’를 더 생각하면, ‘올차다’는 “일찍 알이 차다”를 가리킨다 할 수 있고, ‘알차다’는 “알이 차다”를 가리킨다 할 수 있습니다. ‘알’은 ‘열매’입니다. 열매는 동그랗습니다. 동그란 모습이 바로 ‘찬’ 모습입니다. 찬 모습은 ‘가득’ 있는 모습입니다. 빈틈이 없고, 가장 튼튼하거나 단단한 모습입니다. 사랑이란 바로 동그라미 같은 모습이면서 빈틈이 없고 튼튼하면서 단단한 결이라고 할 만하지요. 4348.2.10.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 말도 익혀야지

 (1050) 2% (2퍼센트/2프로/2%부족할때)


감도 안 오는 ‘2퍼센트 부족’의 이유를 찾아 헤매야 하나

《정은혜-행복하기를 두려워 말아요》(샨티,2015) 284쪽


 2퍼센트 부족

→ 조금 모자람

→ 살짝 모자람

→ 조금 아쉬움

→ 살짝 아쉬움

 …



  1999년에 ‘2%(이프로) 부족할 때’라는 이름이 붙은 마실거리가 나온 적 있습니다. 이 마실거리를 내놓은 회사에서는 ‘2%’라는 말마디를 엄청나게 광고를 해서 사람들한테 퍼뜨렸습니다. 이무렵부터 사람들은 광고에 휩쓸리면서 ‘조금 모자라다’거나 ‘살짝 못 미친다’고 하는 이야기를 ‘2%’라는 말마디로 나타냅니다.


  왜 1퍼센트도 3퍼센트도 아닌 2퍼센트일까요? 마실거리 이름이 ‘2%(이프로/이퍼센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보기글처럼 “2퍼센트 부족”이라는 말마디를 쓰는 일은, 얼결에 이 마실거리를 광고해 주는 셈입니다. 사람들 스스로 미처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젖어든 말투요, 어느새 버릇으로 얄궂게 굳은 말투입니다.


  유행말이나 광고말을 쓴다고 해서 나쁘다거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요. 내 뜻을 내 말로 제대로 나타내려 한다면 나쁠 일이 없고 잘못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돈을 들이고 이름난 배우나 연예인을 써서 광고를 하는 까닭을 조금이나마 생각할 수 있다면, 살짝이라도 헤아릴 수 있다면, ‘2%(이프로) 부족할 때’이든 ‘2%’이든 우리가 구태여 써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저 조금 모자랄 뿐이고, 살짝 아쉬울 뿐이며, 가까스로 못 미칠 뿐입니다. 4348.2.15.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잘 모르겠는 ‘모자란 곳’이 있는 까닭을 찾아 헤매야 하나

어디가 ‘조금 모자란’지 모르는 까닭을 찾아 헤매야 하나

아리송한 ‘살짝 모자란’ 까닭을 찾아 헤매야 하나


“감(感)도 안 오는”은 “느낌도 안 오는”으로 손볼 수 있는데, “잘 모르겠는”이나 “아리송한”이나 “알쏭달쏭한”으로 손보아도 잘 어울립니다. “부족(不足)의 이유(理由)”는 “모자란 까닭”으로 손질합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성노동자, 권리를 외치다 (밀사·연희·지승호) 철수와영희 펴냄, 2015.2.14.



  성을 팔아서 살림을 꾸리는 사람이 있다. 몸을 팔아서 살림을 꾸리는 사람이 있다. 지식을 팔거나 졸업장을 팔아서 살림을 꾸리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돈을 팔아서 더 커다란 돈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이 있다. 정치를 팔기도 하고, 두려움을 팔기도 한다. 예수를 팔기도 하며, 부처를 팔기도 한다. 오늘날 문명사회에서는 무엇이든 팔아야 비로소 돈을 얻고, 이 돈으로 밥·옷·집을 마련한다. 어느 모로 보면 더없이 끔찍하지만, 손수 일굴 땅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도시에서 무엇이라도 팔아야 먹고 입고 자면서 살 수 있다. 《성노동자, 권리를 외치다》는 몸노동자(육체노동자)와 지식노동자와 종교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인 성노동자 목소리를 갈무리해서, 오늘날 사회와 문화와 정치와 경제에서 ‘성노동’을 하는 사람이 어떤 자리에 놓였는가를 보여준다. 권리라고 하는 것을 누리거나 구경한 적이 없는 사람들도 다른 노동자와 함께 권리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권리를 말할 수 있어야 하며,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보여준다. 아무렴, 성노동자도 우리 이웃이며 동무이고 곁님이 아닌가. 4348.2.15.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한 줄 책읽기)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성노동자, 권리를 외치다- 밀사와 연희의 성노동 이야기
밀사.연희.지승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5년 2월
8,500원 → 7,650원(10%할인) / 마일리지 42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5년 02월 15일에 저장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