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달빛 마이노리티 시선 15
표광소 지음 / 갈무리 / 200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시와 싸움

― 지리산의 달빛

 표광소 글

 갈무리 펴냄, 2002.8.27.



  때때로 졸음이 쏟아집니다. 어 왜 이렇게 졸린가 하고 문득 돌아보면, 아하 하고 깨닫습니다. 나는 이른 새벽에 알림시계 없이 늘 스스로 일어납니다. 저녁에 잠들면서 이튿날 몇 시에 일어나야지 하고 마음속에 말을 걸면 언제나 그때에 일어나요. 그런데 낮에 졸음이 쏟아지면, 아침마다 하루를 열면서 오늘 하루 어떻게 무엇을 할는지 제대로 생각을 짓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때에 나는 두 가지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으이구 바보 같으니라구, 하면서 혼자 뉘우치거나 나를 스스로 깎아내릴 수 있습니다. 둘째, 아 그래 오늘 아침에 하루를 미처 안 지었네, 하면서 혼자 되새기거나 이제부터 비로소 하루를 새롭게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졸음은 졸음대로 받아들이면서 몇 분쯤 눈을 붙이면서 쉰 다음 맑은 넋으로 깨어날 수 있습니다. 졸음은 졸음대로 억지로 버티다가 하루 내내 고단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 간밤의 어둠이 깃들었던 / 계단 밑에 / 소주 병 하나, 종이 컵 하나, 귤껍질 하나 / 꽁꽁 얼어붙어 있다 ..  (방 한 칸)



  졸린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한껏 신나게 놀다가 졸음이 가득 두 눈에 고인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힘들고 지칠 때가 아니면 스스로 잠자리에 눕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힘들고 지칠 적에 잠자리에 스스로 눕기도 하지만, 놀다가 고개를 폭 꺾으며 곯아떨어지기도 합니다. 밥이나 과자나 빵이나 떡이나 뭔가를 먹다가 그만 고개를 폭 숙이며 곯아떨어지기도 합니다.


  졸음이 잠으로 바뀌어 곯아떨어진 아이들을 바라보면 몹시 즐겁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아이들은 아버지나 어버이를 믿거든요. 믿고 얼마든지 기대거든요. 내가 졸려서 곯아떨어지면, 나를 포근히 안아서 따스히 재우리라 믿고 기쁘게 곯아떨어져요. 나는 아무리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졌어도, 이 아이들을 안고서 천천히 걷습니다.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도 빙그레 웃으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에서 아이들이 곯아떨어졌으면 한동안 무릎에 누여 토닥토닥 달래다가 잠자리로 옮기지요.



.. 내 딸 / 은송이는 / 가난한 노동자와 병약한 어머니 사이에서 / 난산 끝에 태어나 / 뒤집기 / 배밀이 / 홀로서기 끝에 / 함박 웃으며 / “엄마” / “아빠” / “맘마” / “어부바”도 곧잘 하고 / 첫돌이 되어 잔치 준비를 하는 동안 / 첫걸음을 뗐다 / 예쁘기도 하지 ..  (잔치)



  설이나 한가위나 다른 날에 아이들과 먼 나들이를 다닙니다. 시외버스이든 기차이든 으레 예닐곱 시간이나 여덟아홉 시간을 달려서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찾아갑니다. 이동안 아이들은 새근새근 곯아떨어지기도 하고, 버스나 기차에서 개구지게 놀기도 합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움직이면서 몸이 힘들면, 나도 버스나 기차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한숨을 돌립니다. 나는 아이들을 믿습니다. 무엇을 믿느냐 하면, 아버지가 한동안 눈을 붙이더라도 두 아이가 씩씩하게 잘 놀면서, 버스나 기차에서 그리 크지 않은 알맞춤한 목소리로 재미있게 지내리라 믿습니다. 아이들은 나를 믿고 잠들고, 나도 아이들을 믿고 잠듭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기대면서 아낄 수 있는 삶을 누립니다.



.. 산다는 것은 / 거푸 / 기쁘다 ..  (거푸)



  표광소 님 시집 《지리산의 달빛》(갈무리,2002)을 읽습니다. 2002년에 처음 선보인 이 시집은 2015년에 어떻게 읽을 만할까 하고 곰곰이 돌아봅니다. 앞으로 열세 해가 더 흘러 2028년이 되면, 또 2050년이 되면, 이 시집은 앞으로 어떤 빛이 나거나 어떤 바람으로 사람들한테 다가갈 만할까 하고 헤아립니다.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집일까요. 사랑을 읊는 시집일까요. 아픔과 슬픔을 밝히는 시집일까요. 피가 튀기도록 싸우다가 다친 사람들을 달래는 시집일까요. 고단하거나 괴로운 삶에서도 웃음과 노래가 반드시 있는 대목을 드러내는 시집일까요.



.. 돈도 배경도 없는 / 노동자 구보 씨의 / 첫 직업은 / 독립문 청소부였다 ..  (독립문, 노동자 구보 씨의 일일 1)



  돈이나 뒷줄이 없기에 표광소 님은 서울 독립문에서 청소 일꾼을 맡았구나 싶습니다. 그리고, 표광소 님이 아니더라도 서울 독립문 둘레에서 청소 일꾼을 지낸 사람이 많습니다. 참말 이들은 돈이나 뒷줄이 없어서 이 일을 맡을 만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돈이나 뒷줄을 애써 바라지 않기에 이 일을 맡을 만합니다.


  돈은 돈대로 아름답습니다. 즐겁게 쓰면서 이웃과 나눌 수 있는 돈이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돈은 돈대로 안 아름답습니다. 돈을 손에 거머쥔 사람이 즐겁게 못 쓰거나 이웃과 살가이 나누지 못하면, 이러한 돈은 안쓰럽고 슬픕니다.


  서울 독립문에서 청소지기로 일한 사람은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할까요. 비질을 하면서 무엇을 마주하고 헤아리고 맞이할까요.


  어느 한쪽에서는 쓰레기를 버립니다. 어느 한쪽에서는 쓰레기를 줍습니다. 조금만 헤아려 보면, ‘내 집 방바닥’에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집 방바닥’을 남한테 치우라고 맡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요. 이러한 얼거리라야 맞지요. 그런데, 내 집 방바닥에다가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있고, 이러한 쓰레기를 남한테 치우라고 윽박지르는 사람이 있어요.



.. 너는 / 내가 부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가버릴 것 같다 / 그것이 무섭다 ..  (연애 감정)



  삶은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너와 내가 싸우면서 어느 한 사람이 외치는 목소리가 더 옳다고 내세우려 할 수 있습니다. 삶은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너와 내가 사랑하면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노래하는 기쁜 숨결이 될 수 있습니다.


  싸우는 사람은 늘 싸움을 생각합니다. 싸우는 사람은 누구하고 싸워야 할는지 자꾸 찾고 자꾸 따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늘 사랑을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하고라도 사랑을 하는 너르면서 깊은 품이 되어 언제나 웃음을 노래합니다.


  시집 《지리산의 달빛》을 덮습니다. 여덟 살 큰아이하고 글씨놀이를 하려고 조그마한 그림엽서 뒤쪽에 정갈하게 글 몇 줄 적습니다. 아이가 읽을 글이기에 어버이인 나는 가장 정갈하다 싶은 글씨로 노래를 씁니다. 아이와 함께 부를 노래를 글로 쓰고, 아이와 함께 사랑할 하루를 글로 담습니다. 4348.2.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날 아침 빨래



  설날 아침에 빨래를 한다. 두 아이를 먼저 씻긴 뒤, 두 아이가 밤새 입은 옷을 벗겨서 빨래를 한다. 씻은 아이들은 새옷을 입고, 새옷을 입은 아이들은 새로운 아침에 새롭게 웃으면서 논다. 나도 머리를 감고 나서 옷가지를 널고, 마룻바닥을 쓴다. 오늘 충청북도 음성에는 눈이 가볍게 쌓였다. 고흥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눈을 이 아이들이 모처럼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볼 수 있겠네. 4348.2.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빨래순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성노동자, 권리를 외치다 - 밀사와 연희의 성노동 이야기 철수와 영희를 위한 대자보 시리즈 6
밀사.연희.지승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03



‘사랑’을 모르거나 잊은 한국 사회

― 성노동자, 권리를 외치다

 연희·밀사·지승호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5.2.14.



  ‘사랑’을 제대로 바라보는 사람이 무척 드문 오늘날입니다. 사랑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사랑을 제대로 모르기 일쑤인데, 오늘날 사람들은 나 스스로 사랑을 제대로 모르는 줄 생각조차 못 하기까지 합니다.


  한자말 ‘연애’는 사랑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영어 ‘섹스’는 사랑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대중노래나 연속극이나 영화에 으레 나오는 ‘사랑’ 가운데 사랑이라고 할 만한 숨결이나 넋이나 이야기는 거의 없거나 아예 없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시내와 사내 사이에서 마음이 끌리거나 살갗을 부비는 몸짓은 어느 한 가지도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랑을 제대로 말하는 사람이 없는데, 사랑을 제대로 바라본 적 없으니 사랑을 알 턱이 없어서 사랑을 제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순 엉터리만 흐릅니다. 집에서는 아이와 어른 모두 바깥으로 나돌도록 내몹니다. 마을에서는 돈으로만 얽힌 사회 얼거리만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시험공부만 시키면서 대학바라기가 되고, 대학교에서는 취업바라기에다가 어설픈 놀음놀이만 판칩니다. 사회는 서로 피가 튀는 돈다툼이기 일쑤입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사랑을 제대로 보여주거나 드러내거나 함께하는 일이란 참말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 사회는 여성에게 정숙할 것을 요구하죠. 그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는 여성은 낙인찍고 추방하고요. 여성을 ‘성녀’ 혹은 ‘창녀’로 가르는 폭력적이고 이분법적인 시선이 이 사회에는 만연합니다. 그렇기에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서 자신이 ‘창녀’가 아니라는 것을, ‘창녀’와 다르다는 것을, 그렇기에 자신은 ‘창녀’를 증오하고 경멸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어필하고 증명해야 합니다 … 내심은 그냥 그 운동이 싫은 거예요. 남성들의 기득권을 흔드는 여성주의 운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다 … 성노동은 여성 빈곤의 문제와도 닿아 있어요. 절대다수의 성노동자들에게 성노동은 생계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성노동자임을 알리라는 요구는 너무 가혹해요 ..  (13, 22쪽)



  마음이 끌리는 일은 ‘마음 끌리기’입니다. 눈이 맞는 일은 ‘눈 맞음’입니다. 마음이 끌리거나 눈이 맞는대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살을 섞는대서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이성애나 동성애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사랑은 아닙니다. 이성끼리 끌리거나 동성끼리 끌리는 모습일 뿐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끌릴 적에는 ‘좋아하다’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마음이 끌려서 그리로 내 마음과 몸이 가니까 ‘좋아하다’입니다. 어느 한쪽이 없으면 살맛이 안 난다거나, 어느 한쪽이 있으면 살맛이 난다고 하는 마음은 ‘좋아하다’입니다.


  그래서 ‘좋아하다’라는 마음일 적에는 어느 한 사람을 놓고 기쁘거나 싫거나 아쉽거나 즐겁거나 벅차거나 서운하고 안쓰럽거나 하는 뭇느낌이 불거집니다. 그저 ‘좋아할’ 뿐이니까요.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취미나 취향입니다. 이상형을 따지는 마음이란 ‘좋아하는’ 틀입니다. 어느 한 가지에 끌리자면, 내 마음에 들거나 끌리는 데가 있어야겠지요. 그러니까, 취미와 취향과 이상형 같은 모습을 살필 뿐인데, 이러한 모습이나 흐름을 섣불리 ‘사랑’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걸맞지 않습니다.



.. 성노동을 인정하게 되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성노동이 만연한 것입니다 …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돈과 힘을 가진 남자는 언제든 손쉽게 여성의 성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성매매금지가 법으로 제정된 이후에도 그런 현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요 … 남자들이 보기에 여자들의 섹스는 ‘몸만 대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성노동은 육체노동과 감정노동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  (25, 27, 64쪽)



  마음이 끌리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으면 ‘좋다’입니다. 좋다는 마음과 함께 ‘싫다’는 마음도 있을 테지요. ‘좋다·싫다’는 뭇느낌(감정)이 아닙니다. 뭇느낌에 따라 좋거나 싫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어떤 느낌에 따라 휘둘리거나 휩쓸리지 않으면서 차분하게 드러나는 ‘좋다·싫다’입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라든지 ‘좋은 사이’라든지 ‘좋은 동무’라든지 ‘좋은 이웃’처럼 말합니다.


  ‘좋아하는 나라’라 한다면, 그저 내 마음이 끌리는 나라를 가리키고, ‘좋은 나라’라 한다면, 내 마음이 끌리지 않더라도 살 만하다 싶은 나라를 가리킵니다.


  좋은 사람이라면, 이녁이 나한테는 내키지 않거나 못마땅하거나 마음에 안 들더라도, 얼마든지 동무로 사귑니다. 좋은 사람이니까요. 좋은 사람은 허물이 없습니다. 좋은 사람은 금을 긋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때에는 ‘좋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리하여, 아주 많은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사람’ 사이에서 갈팡질팡합니다. 마음이 끌리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가겠느냐, 아니면 마음이 안 끌려도 좋은 사람한테 가겠느냐, 이렇게 두 갈래이지요.


  어느 쪽으로 간대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삶이 되지는 않습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간다면, 나 스스로 눈먼 매달림일 테고, 좋은 사람한테 간다면, 내 느낌을 숨기거나 가리거나 감추는 셈일 테지요.



.. 성노동자라고 밝히면 성추행·성희롱에 바로 노출되더라고요. 운동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여성들은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그 앞에서는 섹스 이야기도 꺼리면서도 성노동자들 앞에서는 그러지 않아요 … 온라인 유흥가 사이트에서는 업소에 많이 다니고 후기를 올린 사람은 권력이 돼요. 구매자들이 그 사람의 글을 신뢰하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거예요 … 그분들 생각에 성노동 즉 성매매라는 것은 그 자체로 여성들에 대한 폭력이고 사라져야 할 악입니다.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나는 그 일이 좋다. 자부심을 갖는다. 내 스스로 선택한 거고 앞으로도 계속하겠다’ 이렇게 말하니 불편할 수밖에 없는 거죠 ..  (78∼79, 83, 87쪽)



  우리는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서로 ‘그릴’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하고 함께 있지 못한다면, 몹시 애가 타거나 괴롭거나 힘듭니다.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옆에 없으니 안절부절 못할 뿐 아니라 기운이 빠져요. 좋은 사람이 옆에 없으면 아쉽습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옆에 없다 해서 안절부절 못할 일은 없고, 기운이 빠질 일도 없습니다.


  ‘그리운 사람’은 옆에 있건 없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무리 먼 데 떨어졌어도 마음과 마음으로 만날 수 있기에 다 괜찮습니다. 그리움은 엽서 한 장으로도 가슴을 부풀도록 하고, 그리움은 말 한 마디로도 기운이 샘솟도록 합니다. 그리움 하나에 기대어 서른 해나 쉰 해를 얼마든지 기다립니다. 그리움은 ‘때와 곳(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마음입니다. 서로 그릴 수 있기에 거룩하고, 서로 그릴 수 있으니 아름답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그리움도 사랑은 아닙니다. 그리움은 그리움이지요. 그리움을 놓고 사랑이라 말할 수 없어요. 그리고, 사랑을 놓고도 그리움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움은 거룩하거나 아름답게 보일 수 있습니다만, 언제나 꼭 이만큼입니다.


  하나 더 헤아린다면, ‘좋아하다’가 ‘좋다’나 ‘그리다’보다 낮지 않습니다. ‘그리다’나 ‘좋다’가 ‘좋아하다’보다 높지 않습니다. 세 가지 마음은 높낮이가 아닙니다. 그저 마음 움직임일 뿐이고, 마음결일 뿐입니다.



.. 진보는 자신이 얼마나 양심적인지를 호소하는 인정투쟁에만 머물러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문제는 그런 식의 자기만족이 과연 진보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 이분법적인 대립관계 속에서 투쟁방향을 설정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뜻으로 커밍아웃을 했다고 해도 언론에서 진지하게 그 취지를 살려 줄까요? 일단은 ‘알리는’ 게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많이 알리는 게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19, 40, 45쪽)



  《성노동자, 권리를 외치다》(철수와영희,2015)라는 책을 읽습니다. 연희·밀사 두 사람이 지승호 님과 주고받은 이야기가 흐르는 책입니다. ‘성매매자’가 아닌 ‘성노동자’가 누구인지 밝히면서 말하는 책이고, ‘성노동’이란 무엇인지 드러내면서 다루는 책입니다. ‘성매매 심판’이 아니라 ‘성노동 바라보기’로 이끄는 책이요, 사랑과 꿈이 자라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성노동을 하는 성노동자한테도 권리(노동권)가 있다는 대목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와 아울러, 제도권으로 똘똘 뭉친 여성운동과 진보운동 모두 어설픈 울타리에 갇혀서 삶과 동떨어진 모습을 찬찬히 드러내는 책입니다. 



.. 간파를 했어야죠. ‘아, 이걸 놓쳤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게 운동가로서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왜 저들이 나를 거부할까?’ 이런 생각 자체가 오만한 겁니다. 자기들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성노동자들을 위한 법을 만든다는 사람들이 성노동자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잖아요. 있었다면 법을 그런 식으로 만들지는 않죠. 성매매특별법을 만들 때 법의 당사자인 성노동자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의 성찰도 없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할 일인 거예요 ..  (48쪽)



  여성운동이나 진보운동이 나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성운동과 진보운동은 좋을 까닭도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한국 사회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도 학교교육만 받았을 뿐이기에, 사회와 삶과 사랑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어요.


  학교에서 성교육은 시키지만, 그나마 허울뿐인 성교육입니다. 임신과 피임을 다루는 성교육이지만, 성추행이나 성폭력이나 성희롱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못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어떤 몸이고, 사람은 어떤 숨결이며, 목숨은 어떠한 빛인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청소년이나 어린이한테 들려주는 성교육은 과학(생물학) 언저리조차 못 닿습니다.


  여성운동을 하더라도 여성과 남성을 제대로 읽지 않습니다. 진보운동을 하더라도 사람과 사랑과 삶을 제대로 읽지 않습니다.


  여성운동을 하는 이들은 남녀평등을 외칠 테지만, 평등이란 무엇일까요. 가사분담이 평등일까요? 남자도 아이를 돌보도록 이끌어야 평등일까요? 그러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남자나 여자는 아이를 낳고 키우고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돌보고 하는 흐름을 제대로 배우기나 하는지요? 의무교육 열두 해에다가 대학교육 네 해를 받은 젊은이(여성·남성)는 아이를 낳을 만한 몸과 마음이 어느 만큼이라고 할 만할까요? 아이를 왜 낳고, 아이를 어떻게 낳는가를 알면서 살곶이(섹스)를 하는 젊은이인지요?


  사람은 왜 이 땅에 태어날까요.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무엇을 할까요. 평화란 무엇이고 진보란 무엇인가요. 경제성장이나 경제개발은 진보가 아닙니다. 권리와 의무와 법률과 행정이 조금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진보가 아닙니다. 바보스럽거나 멍청한 권력이나 언론하고 맞서기에 진보가 아닙니다. 덜 바보스러운 사람이 진보일 수 없습니다. 조금 바보스럽든 많이 바보스럽든 모두 바보스러울 뿐입니다. 진보라 할 때에는, 스스로 제대로 삶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제대로 거듭날 줄 아는 숨결입니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이면서 진보를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읽지 못하며 알지 못하면서, 진보운동이나 여성운동을 하기에, 모두 삶과 동떨어지고 이웃과 어깨동무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 제가 처음에 집창촌에 있었는데, 그때 여성단체들이 자주 와서 반성매매 운동을 했었거든요. 그때는 그게 운동인지도 몰랐는데, 여자들 몇 명이 와서 과자 몇 개 주고, 머리끈도 주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지도 아닌데. 그러면서 이런 나쁜 일 하지 말고 업소에서 나와라, 자기들이 도와주겠다고 해요. 솔직히 불쾌했어요. 자기들이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것도 아니잖아요. 당장 일을 그만두면 어떻게 먹고살겠어요 … 업주한테서 받은 선불금을 ‘마이킹’이라고 하거든요. 이게 큰돈인데 법적으로 무효라고 판결이 났다는 거예요. 하지만 아가씨들 입장에선 쉽게 소송을 못 걸죠. 업주나 일수쟁이들이 다 조폭 끼고 장사를 하는데, 후환이 두려운 겁니다 ..  (73, 78쪽)



  사랑이란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야 하고, 제대로 헤아려야 하며, 슬기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마음 끌리기(좋아하다)’가 아닙니다. 사랑은 ‘싫고 좋음을 따지는 마음’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리워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사랑은 거룩하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랑은 늘 사랑 그대로입니다. 사랑은 너와 나를 잇습니다. 사랑은 너와 내가 하나로 되는 길로 나아갑니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일 수 있는 삶을 밝힐 때에, 비로소 사랑으로 가는 길을 엽니다.


  사랑은 징검다리 구실을 합니다. 사랑은 이음고리 노릇을 합니다. 사랑은 너와 나를 잇는 징검다리가 되어, 서로 한마음인 줄 느끼도록 합니다. 사랑은 너와 나 사이에 아무런 울타리가 없음을 보여주면서 서로 한몸인 줄 알도록 합니다.


  넉넉하고 너그러우면서 넓은 ‘사랑’입니다. 따스하면서 포근하고 밝은 ‘사랑’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사랑일 적에는 아픈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일 적에는 다치거나 슬픈 사람이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일 적에는 기쁨이나 즐거움도 없습니다. 사랑은 ‘뭇느낌(감정)’에 따라 휘둘리거나 휩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기쁨일 뿐이지, 사랑이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즐거움은 즐거움일 뿐, 사랑이 아니로구나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사랑이 될 때에는, 바야흐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나아가는 길로 접어듭니다. 내가 스스로 사랑으로 거듭날 적에는, 이제부터 삶다운 삶을 짓는 길에 한 발자국 들어섭니다.



.. 우선 불우한 환경에서 시작한 사례가 있어요.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라다가 집을 나와 일을 시작한 사람이 있고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전형적인 경우지요. 돈을 벌려고 시작한 분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언니는 20대 때 악착같이 일해서 모은 돈으로 지금은 다른 일을 하면서 잘 지냅니다. 또 알바 삼아 잠깐 나오는 사람, 특히 학생들이 많아요. 학비나 자취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잠깐씩 일하러 오는 경우지요 … 어쩔 수 없이 성노동을 택하는 건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건 구조적인 문제잖아요. 그렇다면 빈곤해소,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죠. 그 사람들을 피해자로 낙인찍는다고 해서 해결이 되느냐는 거예요. 아무 대책도 없이 말입니다 … 성노동자는 피해자도 아니고 죄인도 아니라는 점, 열악한 현실에서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고 있는 성노동자들이 바로 나와 같은 평범한 한 인간이라는 점을 꼭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  (98, 106, 118쪽)



  인문책 《성노동자, 권리를 외치다》를 읽으려면, 우리 마음을 ‘사랑’으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사랑으로 가다듬지 못하면서 이 책을 펼친다면, 이 책에서 흐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눈을 밝히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책 한 권을 읽어서 알고 느끼며 거듭나야 할 슬기는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삶과 사랑과 사람을 알고 느끼면서, 새로운 숨결이 되는 슬기를 얻습니다.


  성노동이란 무엇일까요. 가사노동과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이란 무엇일까요. 더 높은 노동이 있을까요? 더 낮은 노동이 있을까요? 성노동자란 누구일까요. 공장노동자와 시골노동자와 사무직노동자란 누구일까요? 더 높은 노동자가 있을까요? 더 낮은 노동자가 있을까요?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가 가장 거룩할까요? 1급 공무원이 가장 높을까요?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이 가장 훌륭할까요? 청소부나 재벌그룹 우두머리가 가장 대단할까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거룩하거나 훌륭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을 사람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을 삶 그대로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에, 우리는 사랑을 사랑 그대로 맞아들이면서, 내 삶을 내 손으로 짓는 길을 걷고, 내 삶을 내 손으로 지을 수 있을 때에, 서로 하나되는 넋으로 거듭납니다. 서로 하나로 어우러지는 숨결로 다시 태어납니다.


  사랑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사랑은 어디에서나 새롭습니다. 사랑으로 몸과 마음을 가눌 수 있는 사람은, 늘 웃고 노래하면서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는 새로운 하루를 엽니다. 우리는 바로 이곳 지구별에서 사랑을 하려고 태어나고, 어른이 되며, 아이를 낳습니다. 4348.2.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청소년 인문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큰아이 글씨쓰기



  큰아이는 한글을 익힌다. 이제 거의 모든 한글을 다 읽을 줄 알지만, 아직 아이 스스로 입으로 하는 말이나 둘레에서 들려주는 말을 모두 옮겨서 적지는 못 한다. 그러니 아직 한글을 익히는 나이라 할 만하다. 어떤 아이는 예닐곱 살에 한글쯤 수월하게 뗐을는지 모르는데, 우리 집 여덟 살 큰아이는 이 아이 삶결에 맞게 슬기롭게 글을 익히면서 논다고 느낀다. 아이 스스로 궁금할 때에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고,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 적마다 새로운 기쁨으로 글누리를 한껏 밝힌다.


  나는 어떠했을까? 나는 예닐곱 살 적에 한글을 어떻게 만났을까? 나는 여덟 살에 들어선 뒤 비로소 한글을 읽지 않았을까? 어쩌면 일곱 살에 한글을 미리 읽었을까?


  새로운 기쁨을 누릴 수 있기에 배우는 삶이 아름답다. 새로운 기쁨을 나눌 수 있기에 가르치는 사랑이 곱다. 아이가 처음 글씨를 익히면서 또박또박 쓰고 다시 쓰면서 손에 야무진 힘이 깃들듯이, 어른이 처음 제 넋과 삶을 글로 옮길 적에도 기쁘고 씩씩하게 쓰고 새롭게 쓰면서 온몸과 온마음에 따순 기운이 깃든다. 4348.2.18.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삶과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이젠베르크 읽는 재미



  1982년에 김용준 님이 한국말로 옮긴 《부분과 전체》를 새롭게 읽는다. 이 책을 언제 처음 만나서 읽었을까? 나는 이 책을 꽤 예전에 장만했고, 꽤 오랫동안 아끼면서 건사했다. 하이젠베르크 님은 플랑크 님과 함께 나한테 늘 새롭게 깊은 숨결을 보여주던 사람이었고, 언제 다시 살피고 헤아리더라도 푸른 빛이 되었다. 아직 장만하지 못한 하이젠베르크 님 다른 책도 머잖아 내 손에 쥘 수 있고, 우리 도서관에 건사할 수 있으며, 우리 아이들이 물려받아서 읽을 수 있을 테지. 내가 곁님과 가꿀 ‘우리 집 학교’에서 하이젠비르크와 양자물리학과 람타를 아이들한테 이야기할 수 있으니, 이 대목을 가만히 생각해 보기만 하더라도 가슴이 들뜨고 설레며 춤춘다. 서른 몇 해 앞서 하이젠베르크 님 이야기를 한국말로 옮긴 김용준 님은 참으로 고마운 넋이다. 4348.2.18.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람과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