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89) 석줄노래


 삼행시(三行詩) : 세 줄로 이루어진 시



  ‘아침바람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로 첫머리를 여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위바위보를 하기 앞서 이런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데, 이 노래를 가만히 살피면 “두 장 말고 세 장이요, 세 장 말고 네 장이요”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오늘날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을 “세 장”과 “네 장”으로 쓰지만, 이 말마디는 “석 장”과 “넉 장”으로 바로잡아야 올바릅니다.


  “세 사람·네 사람”에서는 ‘세·네’이지만, “석 장·넉 장”과 “석 줄·넉 줄”처럼 ‘석·넉’으로 적어야 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이는 한자를 배우거나 가르칠 적에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한자 ‘三’과 ‘四’는 “석 삼”과 “넉 사”입니다. “세 삼”이나 “네 사”로 읽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놀이나 재미 삼아서 꽤 많은 사람들이 ‘삼행시’를 쓰거나 읊습니다. 한국말사전을 찾아보면, “세 줄로 이루어진 시”로 풀이하는데, 이 풀이말은 틀립니다. “세 줄”이 아닌 “석 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행시’를 ‘세줄시’로 고쳐서 쓰는 사람이 대단히 많아요.


 세줄시 (x)

 석줄시 (o)


  어느 모로 본다면, 사람들이 하나같이 잘못 말하거나 엉터리로 말하더라도 ‘거의 모든 사람이 잘못 말하거나 엉터리로 말하는 투’가 오히려 ‘바른 말투’인 듯이 굳을 수 있습니다. 사회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뿌리나 바탕을 살핀다면 틀리거나 잘못이거나 그릇된 노릇이지만, 사회 물결에 휩쓸리는 사람들은 옳고 바름을 안 따지거나 안 살피기도 합니다. 그냥 휩쓸려 가고 맙니다.


  그나저나, 나는 ‘석줄시’를 조금 더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시(詩)’라는 낱말을 그냥 쓰기는 하는데, 석 줄로 쓰는 시란, 가만히 따지면 석 줄로 지어서 즐기는 노래와 같아요. 무엇보다 예부터 우리 겨레는 모든 ‘시’가 언제나 ‘노래’였습니다. 줄줄이 읊는 말은 ‘이야기’라 했고, 가락을 붙여서 읊는 말은 ‘노래’라 했어요.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산문·수필’은 지난날에 ‘이야기’였고, 오늘날 ‘시’는 지난날에 ‘노래’였어요.


  ‘석줄시’는 ‘석줄노래’라 할 만합니다. 석 줄로 지어서 즐기는 노래이기에 ‘석줄노래’입니다. 누구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기쁘게 지어서 오순도순 나누는 노래이기에 ‘석줄노래’입니다. 4348.2.2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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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희 9
강경옥 글.그림 / 팝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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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471



너를 만나기까지

― 설희 9

 강경옥 글·그림

 팝툰 펴냄, 2013.3.4.



  순천에서 고흥으로 나들이를 오신 이웃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뱀과 개구리와 들딸기가 얽힌 이야기를 듣다가 빙그레 웃음이 터집니다. 참말 그렇지 하면서 절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들딸기가 돋는 곳에는 으레 뱀이 나옵니다. 뱀이 나오는 곳에는 으레 개구리가 삽니다. 들딸기가 넝쿨줄기를 뻗는 데는 사람들이 가시에 긁히거나 찔리니 딸기를 훑을 때가 아니면 좀처럼 다가가지 않는 자리이고, 이런 곳에는 개구리가 깃들기 일쑤예요. 들딸기는 물기 적은 데에서도 줄기를 뻗지만, 물기 많은 곳이나 도랑 둘레에 아주 흐드러집니다. 이래저래 들딸기와 개구리와 뱀은 함께 어우러집니다.


  그나저나 왜 웃음이 터졌느냐 하면, 이웃님이 뱀과 개구리를 이야기했기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뱀과 개구리는 ‘시골’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오늘날이요, 나는 오늘 시골자락에서 사니까 으레 뱀과 개구리를 만나는데, 고흥으로 나들이를 오신 순천 이웃님도 ‘순천 시골자락’에서 지내시니까, ‘시골내음’이 흐르는 이야기를 나누는구나 하고 느껴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 ‘거침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리카 앞에서 난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건 마치 내 애정을 표현하면 안 된다는 압박이랄까.’ (38쪽)

- “하지만 그럼 너는 전생의 꿈에서 연인이어서 사귀자는 거지. 지금 내가 진짜로 좋아서 사귀자는 건 아니라는 거야?” “진짜로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가 중요해졌어?” “당연하잖아! 네가 말한 내 전생이야 어쨌건 나는 나거든. 난 과거의 사람이 아니야! 다른 사람으로 생각해서 사귀자는데 기분 좋을 리 없잖아!” “알아. 알고 있어. 넌 너야. 그럼 넌 내가 좋다는 거야?” (45∼46쪽)




  내가 시골에서 살기에 시골 이야기를 나눌 적에 즐거울 수 있습니다. 내가 도시에서 산다면 시골 이야기를 나누다가 웃음이 터질 일은 드물리라 느낍니다. 내가 아파트에서 산다면 아마 이웃들과 아파트 이야기를 나눌 테지요. 내가 운동경기를 좋아한다면 이웃들과 운동경기 이야기를 나눌 테고, 내가 사진을 좋아한다면 이웃들과 사진 이야기를 나눌 테며, 내가 정치에 눈길을 둔다면 이웃들과 정치 이야기를 나눌 테지요.


  아이들과 시골에서 삶을 짓는 하루에 눈길을 둔다면, 나는 내 이웃님하고 기쁘게 ‘시골에서 삶짓기’란 무엇인가를 놓고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아이들과 곁님하고 시골에서 삶을 노래하는 하루에 마음을 기울인다면, 나는 내 모든 이웃님하고 언제나 즐거이 ‘시골에서 노래하는 삶’은 얼마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가를 놓고 이야기잔치를 벌입니다.


  내 마음이 가는 흐름에 따라 내 삶을 손수 짓습니다. 내 이웃도 이녁 마음이 가는 흐름에 따라 이녁 삶을 손수 짓습니다. 이리하여, 나와 이웃(나와 너)은 마음과 마음으로 만납니다. 나와 너(나와 이웃)는 나이나 재산이나 권력이나 학력이나 이런저런 겉모습이 아닌 마음으로 만납니다. 나와 이웃(나와 너)은 성별도 지역도 신분도 계급도 아닌, 오롯한 사람으로서 만납니다.



- ‘애정이란 게 누가 더 많이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 것인 건가?’ (56쪽)

- ‘만약 가능하다면 나와 함께 세상을 구원한다는 연애를 하면 어때요?’ (65쪽)





  강경옥 님 만화책 《설희》(팝툰,2013) 아홉째 권을 곰곰이 되새깁니다. 열한째 권까지 나온 《설희》를 모두 읽고 나서 아홉째 권을 다시 넘기니, 이야기 얼거리가 살짝 성기거나 조금 늘어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조금 더 단단하게 틀을 짜서, 한결 더 빠르면서 야무지게 엮을 수 있을 텐데, 어딘가 아무래도 끈이 풀린 듯합니다. 이를테면, 만화에 나오는 스물 갓 넘은 젊은이들이 차라리 더 가볍게 말을 섞고 어우러지다가 차츰 삶을 깊이 들여다보려 하면서 차근차근 철이 드는 얼거리를 보여준다든지, 나이를 떠나 모든 주인공이 더 꼼꼼하고 야무지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더 깊고 너른 마음읽기를 보여준다든지, 어느 한쪽으로 또렷하게 만화 얼거리를 짜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무심코 튀어나와 버렸지만, 사실 난 계속 그걸 생각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90쪽)

- ‘그럼 도대체 설희는 어떤 마음으로 세이를 보는 걸까? 스물한 살의 나는 이런데, 도대체 얼마를 살았을지 모를 설희가 세이에게 가진 감정은 무엇일까? 전생의 감정?’ (117쪽)



  만화책 《설희》에 나오는 ‘눈아이(설희)’는 사백 해나 오백 해쯤 죽음이 없이 살아왔다고 할 만합니다. 이동안 눈아이는 다른 사람이 죽고 나면서 ‘되살이(윤회)’하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런데, 되살이로 새롭게 사는 이들은 예전 삶을 좀처럼 떠올리지 못합니다. 틀림없이 되살이로 이 땅에 다시 왔으나 예전 삶을 도무지 떠올리지 못해요.


  예전 삶을 떠올리지 못하는 이들이 예전 삶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들은 이제껏 몇 차례에 걸쳐서 몇 해쯤 되살이를 했을까요? 설희도 ‘죽음 없는 삶’을 사오백 해를 누리기는 했으나, 이러한 ‘죽음 없는 삶’에 앞서 얼마나 기나긴 나날에 걸쳐서 되살이를 했을까요?


  우리한테 나이란 무엇일까요? 나이가 쉰 살이면 많을까요? 나이가 여든 살이면 많을까요? 고작 열 살이나 스무 살이라 하더라도, 그동안 지나온 되살이를 치면 오천 살이나 오만 살쯤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스스로 떠올리지 못할 뿐, 우리는 그동안 온갖 삶을 죄다 누리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지난날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으로서 무슨 일이나 짓을 했을까요?




- ‘밖에는 눈이 오고, 여기엔 희망이 있는 것 같은, 왠지 따스한 분위기.’ (178쪽)



  우리는 지난날에 몹시 바보스럽거나 멍청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매우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만 돌아보면서 ‘예전이 좋았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곳을 또렷하게 바라보면서 ‘오늘 이곳에 내 삶을 새롭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게 짓겠어’ 하고 다짐할 수 있습니다.


  만화책 《설희》에 나오는 ‘눈아이’는 ‘너’를 만나려고 이곳에서 새롭게 살려 합니다. 눈아이하고 만난 ‘나’는 어제와 오늘과 모레를 잇는 삶에서 무엇이 참이고 거짓이며,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는지 아직 갈팡질팡합니다.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살면 어제를 바꿀 수 있을까요?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살아도 모레에 죽고 다시 태어나면 또 바보스러운 짓을 할까요? 오늘부터 앞으로 언제까지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게 삶을 짓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게 삶을 짓는 길을 걸으면, 어제까지 내가 보여준 모든 바보스럽거나 멍청한 발자국을 돌이키거나 새롭게 추스를 수 있을까요? 만화책 《설희》는 이러한 실타래와 수수께끼를 앞으로 어느 만큼 풀거나 맺을 수 있을까요? 4348.2.2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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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노래 59. 어제오늘



날마다 보는 구름은

왜 늘 다를까.

구름은 어떻게 제 모습을

날마다 바꾸며 흐를까.

생각해 보면 내 모습도

어제하고 오늘이 다르고

오늘이랑 모레가 다르니

구름도 늘 다를 테지.

풀잎도 꽃송이도 풀벌레도

제비와 딱새도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도

날마다 참말 다르겠네.



2015.1.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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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과 전체 (하이젠베르크) 지식산업사 펴냄, 1982.7.16.



  1982년에 《부분과 전체》가 한국말로 나올 수 있었으니, 아주 놀랍다고 할 만하다. 한자말을 빈다면 기적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한국에도 핵물리학자가 있었으니, 훨씬 일찍 한국말로 나올 수 있었을 터이나, 한국에서는 학교에서 고전물리학만 겨우 가르칠 뿐, 양자물리학을 가르치지 못한다. 양자물리학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있을까? 양자물리학을 가르친다면 어떻게 가르칠까? 한국에서는 시험공부와 시험문제로 과학을 다룬다. 이공학과에 다닌다면 수학방정식으로 양자물리학을 조금 살필는지 모른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이나 양자역학이 ‘삶을 바라보면서 읽는 길’인 줄 느낄 만한 이공계 학생은 얼마나 될까. 문리계 학생은 양자물리학이나 양자역학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눈길을 둘 수 있을까. 작은 점 하나와 큰 모두를 함께 아우를 수 있는 마음이 될 때에, 비로소 학문이든 철학이든 과학이든 교육이든 문화이든 경제이든 할 수 있다. ‘조각(부분)’과 ‘온(전체)’을 함께 바라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삶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깨달을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 님이 쓴 《부분과 전체》는 누구나 읽으면서 저마다 생각을 북돋우는 길동무로 삼을 만한 책이다. 4348.2.2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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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과 전체- 개정신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지음, 김용준 옮김 / 지식산업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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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88) 이야기


 토론(討論) :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각각 의견을 말하며 논의함

 논의(論議) : 어떤 문제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내어 토의함

 의견(意見) : 어떤 대상에 대하여 가지는 생각

 토의(討議) : 어떤 문제에 대하여 검토하고 협의함

 검토(檢討) : 어떤 사실이나 내용을 분석하여 따짐

 분석(分析) : 얽혀 있거나 복잡한 것을 풀어서 개별적인 요소나 성질로 나눔

 협의(協議) : 여러 사람이 모여 서로 의논함

 의논(議論) : 어떤 일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음



  학교나 사회나 공공기관에서는 으레 ‘토론’을 하거나 ‘토의’를 한다고 합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흔히 ‘공개 토론’이나 ‘전문가 토론’을 한다고 합니다. 이러면서 ‘토론’과 ‘토의’는 서로 다르다고 가르기도 합니다. 그러면, 참말 ‘토론·토의’는 다르게 쓰는 낱말일까요?


  ‘토론 = 의견 논의’라고 합니다. ‘토의 = 검토 협의’라고 합니다. ‘논의 = 의견 토의’라고 합니다. ‘협의 = 의논’이라 합니다. ‘의논 = 의견’이라 합니다. 그리고, ‘의견 = 생각’이라 합니다.


  이리하여 ‘토론 = 의견 + 논의 = 생각 + 의견 토의 = 생각 + 생각 검토 협의 = 생각 + 생각 살펴 의논 = 생각 + 생각 살펴 생각 나눔’이 되고, ‘토의 = 검토 협의 = 살펴 의논 = 살펴 의견 나눔 = 살펴 생각 나눔’이 되어요. ‘토론’이든 ‘토의’이든 “생각을 살펴서 나눔”을 가리키는 셈입니다.


  ‘토론·토의·의논·논의·협의’라는 한자말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 다섯 가지 한자말은 모두 엇비슷한 자리에서 엇비슷하게 쓰는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한자말은 모두 “생각을 주고받는 일”을 가리키는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할 노릇입니다. 이 다섯 가지 한자말 ‘토론·토의·의논·논의·협의’를 한국사람이 쓴 지는 기껏해야 백 해쯤 되고, 한국 사회나 학교나 공공기관에서 두루 쓴 지는 쉰 해나 서른 해쯤 된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한자말이 한국 사회나 학교나 공공기관에 퍼지기 앞서 한국사람은 어떤 낱말을 쓰면서 생각을 살피거나 나누었을까요?


 이야기

 이야기터 . 이야기꽃 . 이야기판

 이야기마당 . 이야기자리 . 이야기잔치

 이야기한마당 . 이야기큰잔치 . 이야기한누리


  ‘토론’이나 ‘토의’를 하자고 하면, 아이들은 무척 어려워 합니다. 어른들도 퍽 어려워 합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는 일인지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이야기’를 하자고 하면 누구나 술술 말을 풀어놓습니다. 누구나 손쉽게 알면서 생각을 기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론·토의’ 같은 한자말을 쓰는 일이 나쁘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쓸 만한 낱말이라고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야지 싶습니다. 즐겁게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기쁘게 생각을 북돋아서 아름답게 생각날개를 펼쳐야지 싶습니다.


  ‘이야기’는 네 생각과 내 생각이 만나서 ‘우리 생각’으로 거듭나도록 이끕니다. 네 생각과 내 생각이 어우러져서 ‘슬기’가 됩니다.


  어느 한 사람이 내놓는 생각에 꼭 맞장구를 치거나 손가락질을 해야 하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오순도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됩니다. 한마당을 이루고 큰잔치를 열며 한누리를 일구면 됩니다. 어우러지는 마당에서 도란도란 자리를 깔고 하하호호 웃으면서 잔치를 벌이면 됩니다. 삶터에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꽃이 피어나듯이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한판 신나게 이야기를 벌입니다. 4348.2.2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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