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나라의 루시 - 물구나무 그림책 048 파랑새 그림책 48
소피 드 레슬러 지음, 김효림 옮김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80



씨앗 한 톨 심을 수 없어도

― 씨앗 나라의 루시

 소피 드 레슬러 글·그림

 김효림 옮김

 주니어파랑새 펴냄, 2006.6.25.



  그림책 《씨앗 나라의 루시》(주니어파랑새,2006)는 아주 대단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다만, 이 대단한 이야기를 가슴으로 느끼려면, 우리가 손수 씨앗을 건사해서 심을 땅이 있어야 합니다. 손수 씨앗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손수 씨앗을 심지 못하며, 손수 씨앗을 가꾸지 못한다면, 이 그림책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겉훑기’로만 지나치고 끝납니다.


  겉훑기를 한다고 해서 나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나오는 수많은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을 보면 ‘자연·환경·생태’를 다루는데, 막상 오늘날 어린이나 어른 모두 ‘자연·환경·생태’와는 아주 동떨어진 도시에서 살거든요. 도시에서 살며 모자란 대목인 ‘자연·환경·생태’를 책으로나마 아이한테 맛보게 하려고 이러한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을 읽히곤 하는데, 손수 밟을 흙땅이 없이 생태책이나 환경책이나 자연책을 읽는다면, 아이는 무엇을 배울까요? 아이가 둘레를 살펴보면 흙이고 풀이고 나무이고 없는데, 이러한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은 어떤 구실을 할까요?


  아파트에서 살며 집안에 꽃그릇을 두더라도 삶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집안에 꽃그릇을 두더라도, 마루나 방이나 툇마루에 흙이 굴러다니는 ‘꼴’을 두고볼 수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아파트에 있는 놀이터에 ‘흙’이나 ‘모래’가 거의 없기 일쑤입니다. 아파트 놀이터에 흙이나 모래가 있어서, 이곳에 씨앗이 드리워 싹이 트려 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파트 지킴이가 어느새 이 ‘풀싹’을 뽑아서 없앨 테지요.



.. 할아버지는 나무와 풀이라면 뭐든지 알고 있답니다. “씨앗도 여행을 해요?” 동생 앙트완느는 깜짝 놀란 것 같았어요. “얘들아, 텃밭으로 나오렴. 씨앗 나라로 떠나 보자!” ..  (7쪽)





  씨앗 한 톨 심을 수 없는 오늘날 도시 문명사회에서 《씨앗 나라의 루시》 같은 그림책은 어느 모로 본다면 ‘바보스럽’거나 ‘반동’이거나 ‘거꾸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밥은 무엇일까요? 밥은 풀열매입니다. 벼라는 풀에서 맺은 열매인 ‘벼알(볍씨)’이 바로 밥입니다. 다만, 벼알이 바로 밥이 되지 않아요. 벼알을 감싸는 껍질(겨)을 벗겨야 ‘쌀’이 되고, 이 쌀을 냄비에 넣고 물을 맞추어 끓여야 밥입니다.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다 하더라도, 돼지나 소나 닭은 모두 ‘풀알(풀열매)’과 ‘풀잎’과 ‘짚(마른풀)’을 먹으면서 자라는 짐승이에요. 요즈음에는 돼지와 소와 닭한테 사료를 주지만, 더군다나 풀짐승한테 ‘고기 성분이 깃든 사료’를 주는 끔찍한 짓을 일삼지만, 돼지와 소와 닭은 풀알과 풀잎과 짚을 가장 즐기면서 반기지요. 사람이 고기를 먹더라도, 곰곰이 따지면 언제나 ‘풀’을 먹는 셈입니다.



.. ‘저 낙하산처럼 생긴 건 왜 씨앗에 붙어 있는 걸까?’ 루시는 할아버지가 들려준 민들레 이야기를 떠올려 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씨앗을 날려 보내기 시작했어요. 루시는 어느새 하늘을 날고 있었어요 ..  (19쪽)



  삶을 먼저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 삶을 옳게 읽지 못합니다. 삶을 옳게 읽지 못한다면, 어른은 아이한테 아무런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합니다. 어른 스스로 흙과 동떨어진 시멘트나라에서 사는데, 아이가 ‘흙내음 이야기’를 반가이 들을 수 없습니다. 어른 스스로 풀이나 나무하고 등진 아스팔트나라에서 사는데, 아이가 ‘풀꽃 이야기’를 기쁘게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림책 《씨앗 나라의 루시》는 들을 가꾸는 할아버지한테서 슬기로운 숨결을 물려받는 아이들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시골에서는 살아야 이 그림책을 온몸으로 헤아릴 수 있고, 시골에서 살지 않더라도 틈틈이 흙땅을 두 발로 밟고 흙을 두 손으로 만지는 아이쯤 되어야 온마음을 기울여 이 그림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보금자리 둘레에는 자가용과 아파트와 건물만 그득한 도시에서 《씨앗 나라의 루시》를 아이한테 읽히려 한들 읽힐 수 없어요. 오늘날 도시 문명사회에서는 ‘닐스의 신기한 여행’조차 아이한테 읽히기 어렵습니다.





.. 다람쥐는 배불리 먹었는지 남은 솔방울을 자기만 아는 곳에 숨겨 놓으려고 바쁘게 왔다갔다 했어요. “겨울을 나려고 먹이를 쌓아 두는 거야.” 루시가 속삭였어요. “그렇구나. 깜빡 잊고 먹지 않은 씨는 자라서 나무가 될 수도 있겠네?” 앙트완느가 덧붙였어요 ..  (29쪽)



  씨앗 한 톨은 시멘트나 아스팔트에 깃들지 않습니다. 씨앗 한 톨은 언제나 흙 품에 안깁니다. 흙은 씨앗을 반깁니다. 씨앗과 흙은 서로 아끼고 섬기면서 돕는 이웃입니다. 씨앗은 흙이 있어서 포근하게 잠들고, 흙은 씨앗을 만나면서 한결 아름답게 거듭나요. 씨앗은 흙이 품는 포근한 기운을 받으면서 새로운 숨결로 깨어납니다. 싹이 돋아 풀이나 나무로 자라요. 흙은 ‘풀이나 나무로 자란 씨앗’이 무럭무럭 올라가면서 뿌리를 내리는 동안, 뿌리가 붙잡는 온갖 기운을 맞아들여 기쁠 뿐 아니라, 가을이 되어 풀잎이나 나뭇잎이 흙으로 돌아와서 새 기운을 살찌워 주니 반가우면서 고맙습니다. 씨앗과 흙은 서로 돕고 아끼는 사이,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 할아버지는 루시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 주며 말했어요. “우리 루시는 앞으로 식물학자가 될 씨앗 같구나!” ..  (36쪽)



  사람은 씨앗을 흙에 심습니다. 사람은 씨앗과 흙을 잇는 징검돌이자 이음고리요 사랑입니다. 씨앗과 흙한테 사람은 멋진 손길이에요. 씨앗과 흙은 저마다 제 가슴에 고운 님이 감도는데, 이 고운 님을 깨우는 손길은 바로 사람들이 일으켜 주는 상큼한 산들바람입니다.


  우리는 밥을 먹으려고 씨앗을 심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을 가꾸려고 씨앗을 심습니다. 우리가 삶을 가꾸려고 씨앗을 심는 땅은 바로 우리 보금자리입니다. 우리 보금자리에는 어떤 ‘나쁜 기운’도 들어서지 못합니다. 우리 보금자리에서 우리가 심은 씨앗이 ‘숲’으로 자라고, 우리가 심은 씨앗으로 ‘흙’이 기름지니, 이 아름다운 터전은 ‘숲집’으로 거듭나요.


  지구별이 예부터 푸르면서 파랗게 빛나는 눈부신 터전이었던 까닭은, 씨앗을 심는 사람이 있고, 씨앗을 심을 흙이 있으며, 씨앗이 자라는 보금자리(집)가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 한 톨 심을 수 없는 도시에서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씨앗을 심을 수 있습니다. 시멘트땅이 갈라진 틈바구니에 씨앗을 심어요. 일부러 시멘트땅을 쪼개어 흙땅을 넓히고 텃밭을 가꾸어요. 농약이나 비료나 항생제에 기대지 말고, 우리 사랑을 쏟아서 흙을 북돋우고 지구별을 살려요. 그러면, 우리는 누구나 씨앗나라로 기쁘게 나들이를 다닐 수 있습니다. 4348.2.2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믿거나 말거나 글쓰기



  누가 나를 믿는대서 내 할 일을 잘하지 않는다. 누가 나를 못 믿거나 ‘증거를 보여주어야 믿는다’고 해서 내 일을 못하지 않는다. 나는 늘 내가 할 일을 하면서 내 갈 길을 간다. 그동안 내가 보여준 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 하면, 새로운 것을 보여주어도 ‘또 새로운 것(증거)’을 바랄 테니, ‘내가 아닌 남’이 믿도록 이끌 수 있는 길은 없다. 다만, 나는 늘 나를 바라보면서 내 길을 가기에, 나는 ‘곧·제때에·제대로’ 내 길을 기쁘게 걸어가면서 내 삶을 내 넋에 따라 제자리에서 제결을 살리는 제구실로 흐르는 제모습으로 드러나도록 하리라 본다. 나는 늘 내 일을 하면서 숨을 쉬고 사니까. 그러니까, 나는 누가 내 글을 더 많이 읽어 준대서 글을 더 잘 쓰지 않는다. 누가 내 글을 거의 안 읽어 준다 하더라도 글을 못 쓰지 않는다. 한 권 팔리고 그치는 책을 쓰든, 십만 권이나 백만 권이 팔릴 만한 책을 쓰든, 두 가지 책에 깃든 넋은 같다. 나는 ‘남한테 보여주는’ 글이 아니라, ‘나 스스로 삶을 짓는 길을 걷는 동안’ 글을 쓴다. 4348.2.2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삶과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름벼리 솜사탕 먹겠어



  시외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 즈음 달려야 하는 길에서, 사름벼리는 ‘과자 한 점’ 고르라 하니 솜사탕을 고른다. 이에 작은아이도 솜사탕을 고르겠다 한다. 너희 솜사탕 하나로 되겠니? “응.” 앞으로 우리 갈 길이 아주 먼데, 솜사탕 하나로 든든하겠니? “응.” 좋아, 그러면 솜사탕 하나면 되지. 마실길을 즐겁게 가자. 솜사탕 하나와 미리 챙긴 주전부리로 먼먼 마실길을 달린다. 4348.2.2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산들보라는 이것 타고 싶은데



  인천으로 마실을 가서 찬찬히 동네를 거닐 적에, 자유공원 한쪽에서 산들보라가 ‘인천시 상징인형’을 보았다. 다섯 살 산들보라는 이 인형이 돈을 넣으면 움직이는 놀잇감으로 여긴 듯하다. 그러나 얘들은 안 움직인단다. 네 아버지가 이 인형 앞으로 같이 간다 한들 얘들을 움직여 주지는 못하지. 산들보라는 이리 만지고 저리 살핀 끝에 ‘안 움직인다’는 대목을 깨닫고는 ‘타고 놀자’는 생각을 넌지시 내려놓고 그냥 논다. 4348.2.2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집’으로 돌아가는 책읽기



  음성에 계신 아이들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서 사흘을 지낸 뒤 고흥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갔다가 ‘집’에 돌아온다. 두 집 사이를 오가면서 ‘집’을 곰곰이 생각한다. 나는 스무 살에 제금을 났으니, 이제는 ‘내 어버이 집’에서 살던 나날보다 ‘내 집’에서 사는 나날이 더 길다. 앞으로는 ‘내 집’에서 보내는 나날이 훨씬 길어지리라.


  지난날에는 한 집안에서 제금을 날 적에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더 생각해 보면, 제금을 나더라도 굳이 멀리 갈 까닭이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아이를 낳는 어버이는 ‘어버이 스스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여기는 터전’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두고두고 물려받아 두고두고 물려줄 만한 ‘숲집’을 가꿀 적에는 굳이 멀리 떨어진 데에 살 까닭이 없다.


  오늘날에는 아이들이 제금을 나면서 한 집안에 그대로 머무는 일이 드물다. 요즈음 어버이는 아이들이 제금을 날 수 있도록 몇 억 원에 이르는 돈을 아파트나 자가용을 장만하는 돈으로 쓰려고 허리띠를 졸라맨다. 이리하여, 이 나라에서는 아파트 산업과 자동차 산업이 끝없이 내달린다.


  곰곰이 생각할 노릇이다. 도시에서 산다면,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어서 산다면, 굳이 어버이와 아이가 제금을 날 까닭이 있을까? 한 집안을 이루면서 자가용을 함께 쓴다면, 돈을 훨씬 아낄 뿐 아니라, 아낀 돈으로 훨씬 기쁜 나날을 누리지 않을까? 어버이와 아이가 한 집안을 이루면, ‘어른이 된 아이’가 새로운 아이를 낳을 적에, 아주 홀가분하면서 부드럽고 따스하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새 아이’를 맡아서 돌보리라.


  ‘새로 태어나는 아이’는 어버이 사랑뿐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을 받아야 한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는 어버이 슬기에다가 할머니 할아버지 슬기를 배워야 한다. 여러 어른이 한 집안에서 지내는 일은 서로서로 즐거우면서 아름다운 살림이 된다. 오늘날 도시 문명사회가 왜 ‘한 집안을 뿔뿔이 가르려 하는가’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읽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슬기로움을 스스로 길어올리지 못하면서 인터넷이나 책이나 전문가나 학교 따위에서 얻으려 한다. 그러나 슬기로움은 스스로 길어올릴 수 있을 뿐, 다른 데에서는 찾을 수 없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물려주면서, 아이가 스스로 깨닫는 슬기이지, 책이나 지식이나 철학이나 종교나 학교에서는 아무런 슬기가 없다.


  우리가 돌아가는 ‘집’은 어디인가. 우리는 어느 집에서 무슨 살림을 가꾸는가. 우리는 우리 집을 어떤 보금자리로 가꾸는가. 4348.2.20.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삶과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