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책, 예쁜 사람



  온누리에 예쁜 책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온누리에 예쁜 사람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온누리에 안 예쁜 책이나 안 예쁜 사람이 있을까요? 가만히 생각을 기울여 봅니다. 안 예쁜 책이 있다면, 어떤 책이 안 예쁠까요? 우스꽝스럽거나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다루는 책은 안 예쁠까요? 이웃을 괴롭히거나 깎아내리는 이야기를 싣는 책은 안 예쁠까요? 아무래도 이런 책은 안 예쁘다고 여길 만합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예쁜 책이라고 여기기 어렵습니다. 삶을 밝히지 못하는 책도 예쁘다고 하기 어렵고, 사랑과 등돌리거나 사랑을 가리거나 사랑을 도무지 모르는 책도 예쁘다고 하기 힘듭니다. 다만, 이러한 책도 앞으로는 스스로 어떤 모습인지 깨닫고 예쁜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앞으로 예쁜 모습으로 거듭나는 날까지는 ‘아직 예쁘지 않으나 이제부터 예쁜 길로 갈 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예쁘지 않다 싶은 사람도 이와 같으리라 느껴요. 우리 마음속에 깃든 고운 님을 알아차리거나 바로보지 못한 채 이웃을 괴롭히는 사람은, 이웃뿐 아니라 나 스스로 내가 나를 괴롭히는 셈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쁠 수 없어요. 그러나, 내가 나를 스스로 괴롭히는 사람이 내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앞으로는 예쁜 삶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모두 예쁜 사람이 됩니다. 이리하여 ‘아직 예쁘지는 않으나 이제부터 예쁜 사람으로 살아갈 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예쁜 책을 알아보고 장만해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예쁜 사람입니다. 예쁜 사람이 손에 쥐는 책은 모두 예쁜 책입니다. 4348.2.2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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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배움자리 11. 하루를 나무와 함께



  봄이 찾아온다. 곧 봄이다. 아니, 벌써 봄이라고 할 만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 봄을 생각하면 바로 이때부터 봄이다. 여덟 살 큰아이가 뒤꼍에 함께 올라가서 나무한테 인사하는 아침에 나한테 묻는다. “아버지, 봄은 언제 와?” “응, 벼리가 부르면 봄이 오지.” “불렀는데 안 와.” “자꾸 부르면 돼.” “자꾸 불러도 안 와.” 얘야, 네가 ‘안 온다’고 생각하니까 안 오지. 그래서 말을 돌리기로 한다. “자, 여기를 봐. 여기 쑥이 올라왔어. 아주 작고 예쁜 싹이지.” “나도 그거 봤어.” 그래, 이 아이들을 보았고, 우리 집 매화나무에 몽글몽글 부푸는 꽃몽오리를 네가 보면서 가만히 말을 걸고 웃음으로 인사를 했으면, 이제는 바야흐로 봄이란다. 봄에도 바람이 아직 쌀쌀할 수 있고, 봄이지만 해가 안 나오고 어둑어둑한 아침일 수 있어. 봄에도 비가 오고, 봄에도 흐린 날이 있지. 겨울에도 포근한 날이 있고, 겨울에도 맑은 날이 있어. 우리는 언제나 즐겁게 노래하면서 하루를 나무한테 인사하면서 기쁘게 열면 돼. 그러면 우리는 언제나 봄마음이 된단다. 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집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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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원마루 옮김 / 포이에마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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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30



작은 씨앗을 보살피는 흙과 같이

―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글

 원마루 옮김

 포이에마 펴냄, 2014.12.1.



  이월로 접어들어 하루하루 흐르면서 이월 한복판으로 접어들 무렵부터 우리 집 뒤꼍에서 쑥삭이 돋습니다. 쑥은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 키보다 훌쩍 크게 자라기도 하는데, 처음에는 그야말로 아주 조그마하면서 앙증맞습니다. 이 조그마한 싹이 나중에 우람한 풀줄기로 커서 꽃을 피우고 잎을 떨구다가 시들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요.


  작은 쑥잎은 더 작은 씨앗에서 깨어납니다. 더없이 자그마한 씨앗에서 조그마한 쑥잎이 돋습니다. 흙은 아주 자그마한 쑥씨를 품어서 따스하게 어루만지는데, 이 따스한 품을 고맙게 맞아들인 쑥씨는 그야말로 무럭무럭 자라고, 쑥대가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꽤 많은 흙이 쑥대를 붙잡아 주어야 하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쑥대는 천천히 시들어서, 그동안 저를 붙잡느라 힘써 준 흙한테 다시 돌아가 ‘새로운 흙’이 생기도록 온몸을 내놓습니다.


  다른 풀씨를 보아도 쑥씨와 비슷합니다. 모든 풀씨는 대단히 작습니다. 깨알보다 훨씬 작은 풀씨입니다. 아주 작은 먼지조각으로 보이는 풀씨예요. 흙은 이 모든 풀씨를 고이 아낍니다. 풀씨를 고이 아끼면서 보듬고 돌보는 흙은 나중에 풀한테서 너른 사랑을 돌려받습니다.



.. 이 지구를 파괴하는 건 탐욕과 이기심이지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온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아이들이 우리의 선생으로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어쩔 수 없이 장시간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부모의 역할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 만다. 아침에 아이들에게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고, 병치레하는 아이를 돌보고, 밤에 아이를 재우는 일을 비롯해 전통적인 부모의 역할을 포기하고 있다 … 서구 사회에는 돈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 돈이 어린이집이나 학교로 흘러가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  (17, 18, 20쪽)



  아기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흙과 같습니다. 작은 씨앗이라고 할 아이들을 아끼고 돌보면서 섬기는 어버이는 흙과 같은 마음결입니다. 작은 씨앗인 아이들은 어버이를 흙처럼 반기고 고마워 하며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이리하여, 작은 씨앗은 흙을 믿고 기대면서 무럭무럭 자라요. 흙은 작은 씨앗을 사랑하고 어루만지면서 무럭무럭 자라도록 북돋우지요.


  풀은 흙이 있어서 자랍니다. 흙은 풀이 있어서 기름질 뿐 아니라, 비가 아무리 퍼부어도 쓸리지 않습니다. 드세거나 거친 비바람에 흙이 좀 쓸리면, 때로는 많이 쓸리면, 흙은 아파 하거나 슬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작은 풀씨가 해마다 나고 지고 자라고 시들면서 새로운 흙을 빚으니까요. 오랜 나날에 걸쳐서 흙은 제자리를 되찾습니다.


  높은 봉우리는 높이가 낮아지지 않습니다. 백두산도 한라산도 지리산도, 봉우리 높이는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새로운 풀씨가 끝없이 자라고 돋아서 시들어서 흙한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흙이 쓸리고 쓸려도 새로운 흙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 마음에 상처를 입은 아이도 여전히 희망을 품고 당신을 보며 묻는다. “제 손을 잡아 주실 수 있나요? 이 세상에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죠?” … 강제력을 동원해서는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 스스로 배우고 싶어 해야 한다 … 정부가 요구하는 학업 프로그램 탓에 아이들은 놀며 배울 기회를 점점 더 빼앗기고 교사들은 과도한 서류 작업에 짓눌리고 있다 … 1000년에 걸쳐 아이들은 마을 어른들 곁에 앉아 인생을 배웠다. 노인들의 말을 듣다가도 어디론가 뛰어가 흥미로운 걸 찾아 놀곤 했다. 이것 역시 배움이다 ..  (25, 33, 37, 43쪽)



  그런데 사람들이 억지로 삽차를 써서 흙을 파헤치면, 이때에는 흙이 앓는 소리를 냅니다. 이때에는 풀씨가 죽는 소리를 냅니다. 억지로 쥐어짜거나 뒤흔들거나 괴롭히면 풀씨도 흙도 모두 고달프면서 아파서 눈물을 흘립니다.


  오늘날 물질문명은 풀씨와 흙이 앓다가 죽는 소리에 귀를 닫습니다. 오늘날 학교교육과 제도권과 법률과 정치경제는 모두 풀씨와 흙이 아파서 죽어 가는 모습에 눈을 감습니다.


  피를 말리는 싸움을 붙이는 물질문명입니다. 피가 뒤도록 다투게 몰아세우는 현대사회입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작은 풀씨와 너른 흙은 모두 괴롭습니다. 물질문명 현대사회에서 아이와 어른 모두 고단하면서 힘에 부쳐서 쓰러지고 맙니다.



.. 요즘 부모들은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 주기보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아기의 두뇌 발달에 미치는 효과를 운운하는 연구 결과에 귀를 기울인다 … 제3세계 국가에서 아이들을 징병한다는 소식에 우리는 놀란다. 하지만 사실 우리 아이들도 제3세계에 있는 아이들 못지않게 잔인한 민병대의 일원으로 우리 가정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기업이 여러분의 자녀에게 어떤 친구를 사귀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라고 일러 주는 것이 과연 타당한 걸까 … 아이들에게 평생 남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부모가 주는 사랑이다 ..  (49, 69, 84, 92쪽)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님이 글을 쓰고, 원마루 님이 한국말로 옮긴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를 읽습니다. 책이름에서도 드러나지만, 아이들 이름은 ‘오늘’입니다. 아이들 이름은 ‘어제’도 ‘모레’도 아닙니다. 아이들은 바로 ‘오늘’입니다.


  그러면 어른들 이름은 무엇일까요? 어른들은 ‘어제’일까요? 어른들은 ‘모레’가 되면 될까요? 아니에요. 어른들도 이름은 아이들과 똑같이 ‘오늘’입니다. 모든 사람은 ‘오늘’을 삽니다. 모든 사람은 오늘을 살면서 어제를 돌아보고 모레를 내다봅니다. 모든 사람을 오늘을 지으면서 어제를 사랑하고 모레를 꿈꿉니다.



.. 무조건 복종하는 아이로 만드는 게 양육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아이들이 확신을 갖고 인생을 탐험하게 돕되 자신의 한계도 알게 해야 한다 … 하루하루가 새로운 출발이어야 하고 과거는 깨끗이 용서받아야 한다 … 아이들이 보이는 문제 행동을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하고 잠재적으로 위험성이 있는 약을 주는 것은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일한 길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다 … ‘정상’이라는 것이 있기나 하는 걸까? 어린아이를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대신 변화의 뿌리에 초점을 맞추는 게 어떨까 ..  (123, 125, 140, 146쪽)



  어버이가 할 몫은 삶을 지어서 아이와 함께 누리고 가꾸는 길입니다. 아이가 할 놀이는 삶을 짓는 어버이 곁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면서 웃고 노래하는 길입니다.


  어버이는 삶을 짓습니다. 아이는 놀이를 누립니다. 어버이는 일을 합니다. 아이는 노래를 부릅니다. 어버이는 살림을 가꿉니다. 아이는 웃음을 짓습니다. 이리하여, 어른(어버이)과 아이는 한집을 이루어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지요. 아름다운 보금자리에서는 사랑스러운 싹이 터서 새로운 숲이 우거집니다.


  학교에 맡겨야 할 교육이 아니라, 집에서 삶을 지으면 되는 하루입니다. 사회생활을 잘 해야 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삶을 슬기롭게 가꾸어야 할 아이들입니다.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예술에 이바지를 할 아이들이 아니라, 내 보금자리에서 숲을 돌보면서 사랑과 꿈으로 하루를 누려야 할 아이들입니다.



.. 나는 모든 아이가 태어날 때 창조주의 흔적을 안고 태어난다고 믿는다 …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 마음만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아이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 … 규칙이나 금지 따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부모가 사랑을 보여주면 아이들에게는 안정감이 선물로 따라온다 ..  (163, 179, 185, 186쪽)



  우리 모두 씨앗을 심어요. 우리 모두 텃밭을 일구어요. 도시에는 텃밭 삼을 땅이 없다구요? 그러면 자가용을 내다팔아요. 자가용을 내다팔고 땅을 한 평이든 두 평이든 내 몫으로 장만하고, 아이 이름으로 마련해요. 자가용은 돈을 더 모아서 나중에 다시 장만해도 돼요. 그러나, 내 땅은 바로 오늘 장만해야 해요. 도시에서도 한 평짜리 자투리땅부터 장만해요. 그리고 이 땅에 씨앗을 심어요. 두 평을 장만할 수 있으면 한 평에는 풀씨(푸성귀 씨앗)를 심고, 다른 한 평에는 나무를 심어요. 이윽고 석 평과 넉 평을 더 장만하고, 자꾸자꾸 땅을 넓혀서 열 평과 백 평을 이루도록 해요. 시골에서는 백 평이나 천 평씩 꾸준히 땅을 넓혀서 아름다운 숲으로 가꾸어요. 도시에서도 텃밭과 조그마한 숲정이를 이루어서, 아이와 어른이 함께 웃고 노래할 터전으로 가꾸어요.


  땅값이 비싼가요? 땅값이 비싸면 이 땅값을 댈 만큼 즐겁고 씩씩하게 돈을 벌어요. 아니면, 땅값이 싼 곳으로 집을 옮겨서 ‘부동산’ 아닌 ‘보금자리’가 될 곳을 찾아야지요. 그대로 머무르지 마셔요. 그대로 고인 물이 되지 마셔요. 우리는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씨앗을 손수 심어서 가꿀 수 있는 땅뙈기’에 보금자리를 지어야 합니다. 우리 집을 우리가 손수 지어야 합니다.


  건물까지 손수 지으면 가장 나으나, 건물은 남이 지은 데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러나, 땅만큼은, 씨앗만큼은, 바로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심어서 숲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교육을 학교한테 맡기지 마셔요. 삶을 사회한테 맡기지 마셔요. 사랑을 정치한테 맡기지 마셔요. 살림을 경제한테 맡기지 마셔요. 꿈을 인문학한테 맡기지 마셔요. 이야기를 종교한테 맡기지 마셔요. 놀이를 스포츠한테 맡기지 마셔요. 노래를 영화나 예술한테 맡기지 마셔요. 모든 배움(교육)과 삶과 사랑과 살림과 꿈과 이야기와 놀이와 노래를 우리가 손수 지어서 기쁘게 누려요. 바로 오늘 이곳에 내 삶을 날마다 새롭게 짓는 길이 있어요. 4348.2.2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배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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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두 갈래



  책을 읽는 두 갈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보기를 들 만합니다. “우리한테는 불가능이 없다”와 같은 말씨로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가능만 있다”와 같은 말씨로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사람이니, 이 말씨를 한국말로 고쳐서 “우리한테는 못 할 일이란 없다”와 “우리한테는 할 수 있는 일만 있다”처럼 말하듯이 책을 읽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그리는’ 대로 삶을 짓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삶을 지으려는 대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마음속에 그리는 대로 하루를 열고, 스스로 마음속에 그리는 대로 ‘내가 바라는 책’을 만나서 손에 쥐어 읽습니다. 내가 바라지 않는 책이 나한테 오는 일은 없습니다. 자질구레한 책이든, 쓰레기처럼 느끼는 책이든, 이 모든 책은 ‘내가 바랐기에’ 나한테 옵니다.


  내 눈에 뜨이는 책은 모두 내가 바라던 책입니다. 바라지 않는 책은 내 눈에 아예 안 보입니다. 내 눈에 뜨여서 내가 손에 쥐어 읽는 책에서는 ‘내가 바라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책마다 백 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내가 바라는 이야기를 골라서 읽기에, 백 가지 가운데 열 가지나 한 가지만 읽을 수 있고, 참말 누구나 이렇게 책을 읽습니다. 이리하여, 거의 모든 사람은 ‘백 가지 이야기가 깃든 책에서 고작 한두 가지나 열 가지쯤 읽’고 나서 이 책 하나를 ‘마치 다 읽거나 다 안다’고 하는듯이 느낌글을 쓰거나 서평을 쓰거나 독후감을 쓰거나 비평을 합니다.


  백 가지 이야기 가운데 한두 가지나 열 가지를 읽는다는 말은, 고쳐서 말하면 무슨 소리인가 하면, 우리는 누구나 ‘내 뇌(머리)’를 10퍼센트조차 제대로 못 쓴다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우리 뇌(머리)를 100퍼센트 다 쓴다면, 어느 책을 읽든 백 가지 이야기를 모두 살피고 헤아려서 모두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뇌(머리)를 쓰는 만큼 어느 책 하나를 읽습니다.


  책을 잘 읽는 길은 따로 없습니다. 책을 손에 쥐기 앞서, 내 몸과 마음을 아름답고 사랑스레 추스르면 될 뿐입니다. 내가 어떤 책을 골라서 읽든, 나는 늘 내 몸과 마음에 맞추어 ‘몇 가지 이야기’만 골라서 읽으니까요. 4348.2.2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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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가 되려고 훈련할 수 없다



  람타가 곧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스터이다.”라고. 그러니, 우리는 마스터가 되려고 훈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스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스터가 아니기 일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마스터가 무엇인지 제대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며, ‘마스터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스터가 무엇인지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에, 그리고 마스터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을 때에, 우리는 ‘늘 마스터’입니다.


  람타가 곧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다.”라고. 여기에 덧붙여 “우리는 모두 잊혀진 하느님(신)이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언제 어디에서나 모든 것을 지을(창조)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사람’이면서 ‘하느님’인 줄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알’면 이 모두를 늘 언제 어디에서나 제대로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사람인 줄 잊거나 잃’으며, 우리 스스로 ‘잊혀진 하느님’이라는 생각을 아예 안 하기까지 합니다. 그냥 ‘감정 차원에 허덕이거나 맴돌기를 즐깁’니다.


  이런 틀로 저 사람을 바라본다든지, 이런 잣대로 저 사람을 재려고 한다면, 이를테면 이런 보기도 들 수 있는데, ‘네가 창조한 것을 나한테 보여주어서 증명하면 네 말을 믿겠다’ 같은 말조차, 우리가 스스로 사람이며 하느님인 줄 잊거나 잃은 채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사람이면서 하느님이면, ‘남이 나한테 보여주어서 증명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느껴서 알고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마음으로 느끼려 하지 않으면서 ‘내 몸뚱아리인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갖다 줘 봐’ 하고 아무리 말한들, ‘두 눈 앞에 갖다 주어’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뇌는 이런 것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뇌가 이런 것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떴으면, ‘네가 아무리 보여주려고 온갖 증거를 들이밀면서 증명하려고 해도, 네가 보여주지 않았을 때에 나는 다 알았어’ 하고 말합니다. 또는 ‘네가 아무리 온갖 증거를 보여주면서 증명하려고 하지만, 이는 다 거짓이고 속임수인데’ 하고 말할 테지요.


  나는 ‘람타 공부’를 하면서 처음부터 참 아리송했습니다. 람타가 말하듯이, 또 람타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마스터”인데, 왜 람타 공부와 훈련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훈련에서 마스터가 되려 할까요? 마스터인 우리들이 왜 마스터가 되려 하지요? (이 수수께끼는 2015년 1월 강화에서 열흘 동안 배우면서 나 스스로 궁금한 대목을 내가 나한테 물었기에 스스로 실마리를 다 풀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인데 왜 사람이 되려 하지요? 우리가 사람인 줄 모르니까 사람이 되려 하는구나 싶지만, 우리가 사람인 줄 모르더라도 우리는 늘 사람입니다. 아니면, 사람이라는 옷을 입은 인형일까요?


  제대로 바라보면 다 됩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제대로 바라보려면 ‘제대도 된 말을 써’야 합니다. 제대로 된 말을 새롭게 쓰려 하지 않고, 고정관념과 선입관으로 가득 찬, 게다가 정치권력이 우리를 바보(노예, 종)로 만들려고 망가뜨린 ‘얼토당토않은 얄딱구리한 한국말(그러니까 온갖 영어와 중국·일본 한자말로 범벅이 된 한국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면서, 이러한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 헤아리지 않고, 이러한 뜻을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냥저냥 쓰면서 ‘무슨 새로운 지식’이나 ‘어떤 새로운 삶’이 될까요?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쓰기 어렵다면 왜 어려운지 생각해야 합니다. 람타 공부와 훈련이 처음부터 쉬운 사람이 있다면 한번 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람타 공부와 훈련을 여러 해에 걸쳐서 했는데, 언제나 쉽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 두 손을 번쩍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말을 쓰기 힘들면 영어를 쓰셔요. 그렇지 않다면 한국말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제대로 새롭게 배워서 쓰셔요. 한국말로 람타 공부와 훈련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영어나 독일말이나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쓸 노릇이고, 한국말을 앞으로도 쓸 생각이라면 ‘람타한테서 배우듯이’ 이제껏 정치권력이 우리한테 망가뜨린 채 쑤셔넣은 멍청한 한국말은 모두 활활 태우고 ‘새로운 한국말’을 배우셔요.


  람타 강의를 듣다 보면, 람타는 문득문득, “이 공부는 새로운 언어 수업이다” 하고 외칩니다. 거듭 이 말을 외칩니다. 그런데, 람타를 배우는 사람 가운데 ‘새로운 말’을 쓰려고 ‘새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은 뜻밖에 좀 드문 듯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왜 새로운 배움을 새로운 말로 배우려 하지 않고, 정치권력이 우리를 종으로 부리려고 억지로 뒤튼 말에 갇힌 채 람타를 배우려 하고, 또 ‘내 모습’을 바라보려 할까요?


  람타 훈련은 ‘언어 수업’이 아닌 몸으로 하는 삶입니다. 그러니, 훈련에서는 훈련을 잘 해도 얼마든지 깨어날 만하리라 느낍니다. 나는 람타 훈련 가운데 ‘숨보기(숨터뜨리기, 씨 앤 이)’ 훈련을 ‘마스터’했을 적에 엄청나게 크면서 크지 않고 엄청나게 뜨거우면서 뜨겁지 않으며 엄청나게 밝으면서 밝지 않은 ‘샛노란(금빛) 구슬’을 내 두 손에 모을 수 있었고, 이 금구슬이 두 손에 모이니 ‘두 손 모습’은 ‘꽃잎을 벌린 모습’이 아니라 ‘오른손이 위로 가고 왼손이 밑을 받치는 모습’으로 저절로 바뀌었습니다. 내 두 손이 이 모습으로 안 바뀌게 하려고 두 손에 내 몸을 써서 힘을 주려고 했지만 내 몸은 이를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2015년 1월 강화에서도 그랬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러한데, 씨 앤 이를 할 적에 어느 때가 되면 내 손 모습이 ‘위(오른손)와 아래(왼손)를 살며시 덮는 모습’으로 바뀌는데, 이러한 손 모습으로 바뀌면서 금구슬이 나타나면, 내 몸이 방바닥에서 뜨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몇 센티미터나 몇 미터를 떠오르지는 않습니다만, 씨 앤 이를 가르치는 람타가 문득 “떠올라!” 하고 외치는 말 그대로 몸이 떠오릅니다. 이런 경험을 늘 하면서, 이런 것이 ‘훈련 마스터’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다만, 나는 훈련 마스터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람타 공부를 하는 분들이 자꾸 ‘마스터’를 말하기에, 왜 마스터인 우리들이 또 마스터가 되어야 하는가 궁금해 하면서 이런 일을 겪었을 뿐입니다. 마크 선생님이 말씀하듯이, ‘카드찾기 달인’이 될 생각이 하나도 없고 ‘금구슬 손에 쥐고 붕 떠오르기 달인’이 될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마스터 되기’가 우리가 갈 길이 아닌 줄 깨달아서, ‘마스터에도 일곱 단계’가 더 있는 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마스터 일곱 단계’를 끝내면, ‘첫 일곱 단계’로 돌아오는 흐름도 깨달았습니다. 모든 흐름은 ‘알(씨앗) → 애벌레(고치) → 나비’로 이어지는 삶입니다. 우리는 양자역학(양자물리학)과 함께 람타를 배우는데, 온누리(우주)는 ‘두 결(양자)’로 이루어지되, ‘두 결’은 늘 ‘세 고리’가 되어서 움직입니다. 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으면 ‘공부 마스터’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마스터’이기 때문에, 훈련이나 공부에서 굳이 마스터가 될 까닭이 없습니다. 이러한 얼거리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삶을 제대로 바라보면 됩니다. 이를 제대로 바라보면, 비로소 나는 모든 공부와 훈련을 홀가분하게(자유롭게, 그러나 ‘자유롭게’는 ‘아무렇게나’나 ‘함부로 바꾸어서’가 아닌, ‘홀로 가벼운 몸과 마음이 되어 기쁘게’를 뜻합니다) 하면서, 내 삶을 손수 짓는 길을 걸을 수 있어요.


  나는 내가 그리는 모든 그림을 이룹니다. 어느 그림은 그림을 그리기 무섭게 1분 만에 이루고, 어느 그림은 한두 해 지난 뒤에 이룹니다. 언제 이루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 마음힘(집중력, 포커스)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내 몸뚱이가 깃든, 이 1차 단계 차원(세상)에서 내가 겪고(경험) 느끼면서 받아들일 새로운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은 곧바로 이루고 어느 것은 천천히 이룰 뿐입니다.


  창조란, 벼락에 콩 볶아먹듯이 할 수 있습니다만, 사람이라는 목숨이 지구별에서 1차 단계에 몸뚱이를 둔 까닭은, 벼락에 콩 볶아먹는 재미는 그리 기쁘지 않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가끔은 벼락에 콩 볶아먹는 재미를 누릴 만하지요. 그러나, 우리 삶이 기쁨이면서 아름다운 사랑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다 함께 이 길을 걷는 이웃이라고 느껴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나아가면서 웃고 노래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혼자서 저 멀리 앞으로 나아가려는 지구별 삶이 아니라,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차근차근 한 걸음씩 걸어서 함께 나아가려는 지구별 삶입니다.


  그래서, 나는 람타 공부와 훈련을 하면서 그때그때 새롭게 바라보아서 새롭게 깨달은 이야기를 글로 씁니다. 그러나, 내가 쓰는 이 ‘새로운 글’은 ‘마스터 되기를 보여주는 글’이나 ‘사람이 되는 삶을 보여주는 글’이 아닙니다. 함께 공부하고 훈련하는 이웃 가운데 하나가 스스로 삶을 바라보면서 찾고 짓는 얼거리를 보여주는 글입니다. 이러한 글을 읽을 수 있다면, ‘제대로 바라보면서 읽고 우리 스스로 삭일 수 있다’면, 저마다 기쁘게 공부와 훈련을 하면서, 저마다 제 결에 맞게 삶짓기(현실창조)를 할 테지요.


+ + +


  함께 생각을 나누면서 ‘말을 새롭게 스스로 지어’서 공부와 훈련이 날마다 기운차고 아름답게 거듭나기를 바라면서 여러 가지 ‘훈련 성과(창조한 결과)’를 글로 쓰지만, 이 글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느껴 주는 이웃이 있기도 하지만, 이러한 이웃 이야기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이웃이 있기도 하구나 싶습니다.


  어떠하든 대수로울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짓기는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하는 기쁜 놀이요 일이면서 웃음과 노래이니까요.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고 싶은 사람은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합니다. 삶을 날마다 짓고 싶은 사람은 삶을 날마다 짓습니다.


  고맙습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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