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쓰고 나들이



  고흥집에 보일러 기름을 넣도록 도와주려는 이웃님이 여럿 계시다. 이분들이 장만해 주시는 내 책을 도서관에 가서 봉투로 꾸리려 한다. 도서관으로 가기 앞서 먼저 그림엽서에 편지를 쓴다. 연필을 손에 쥐고 천천히 글을 쓴다. 이제 그림엽서 편지를 마무리짓는다. 아이들한테 아침을 먹이고 자전거를 몰아서 면소재지 우체국까지 다녀와야지. 이러고 나서 면소재지 기름집으로 가서 기름 이백 리터를 사들여야지. 오늘은 두 아이를 씻길 수 있겠네. 4348.2.23.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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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에 온 손님 그림책 보물창고 5
모디캐이 저스타인 글 그림, 신형건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81



슬기롭게 생각해야 삶을 짓는다

― 지구별에 온 손님

 모디캐이 저스타인 글·그림

 신형건 옮김

 보물창고 펴냄, 2005.5.10.



  모디캐이 저스타인 님이 빚은 그림책 《지구별에 온 손님》(보물창고,2005)은 우리가 이 지구별에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넌지시 보여줍니다. 나한테 찾아온 삶을 어떻게 누릴 때에 즐거우면서, 이 삶을 마친 뒤 죽음에 이를 적에 내 ‘다음 삶’을 어떻게 그려야 다시 지구별로 돌아와서 태어날 수 있느냐 하는 대목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는지 안 태어나는지 궁금할 수 있고, 안 궁금할 수 있습니다. 죽고 나서 다시 안 태어난다고 여길 수 있을 테고, 죽고 난 뒤에 틀림없이 다시 태어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든 다 옳습니다. 다만, 삶을 누리는 동안에는 늘 삶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삶을 마친 뒤에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려는가 하는 대목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아이는 밤마다 하늘을 쳐다보곤 했어요. 밤하늘엔 별들이 반짝이고 어디론가 은하수가 흘렀어요. “저 너머엔 무언가 다른 세상이 있을 거야. 언젠가 꼭 한번 가 봐야지.” 아이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했어요 ..  (4쪽)




  그림책 《지구별에 온 손님》에 나오는 나무꾼은 ‘나무꾼으로 살면서 키운 꿈’이 있습니다. 아마 이 나무꾼은 이 꿈을 이루려고 ‘다시 태어났’을 텐데, 스스로 꿈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그저 ‘일만 하느’라 바쁘게 하루하루 보내다가 죽음으로 들어섭니다. 그러니까, 어떤 꿈을 이루려고 다시 태어났지만, 막상 다시 태어났어도 스스로 꿈을 이루지 못해요. 이리하여, 죽은 뒤 찾아온 새로운 누리에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살펴서 고릅니다. 어느 별누리로 갈는지, 별누리 가운데 어느 별에 깃들는지, 별에서 어떤 목숨으로 깃들는지, 별에서 어떤 목숨으로 깃들되 어느 터전에서 어느 어버이를 만나려는지, 어느 어버이를 만나서 어떤 삶을 누리려 하는지, 하나하나 낱낱이 새로 살펴서 고릅니다.


  이 그림책에서는 ‘죽고 난 뒤에 다시 고르는 자리’가 있다고 나오지만, 죽기 앞서 이 모든 ‘다음 삶 이야기’를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죽고 난 뒤에는 그저 텅 빈 곳을 떠도는 넋이 되리라 느낍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데, 어떤 삶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스스로 생각하면서 가꾸는 삶이 아니라면 ‘살아서 움직일’ 때에도 내 꿈과 뜻을 이루지 못하는 쳇바퀴입니다. 삶을 마감하고 죽음으로 나아갈 적에도 아주 마땅히 ‘살아서 움직일’ 때 모습 그대로 갑니다. 여느 때에 생각이 없이 지냈으면, 죽은 뒤에도 생각이 없겠지요. 죽은 뒤에도 생각이 없으면, 이러한 사람은 아무것도 될 수 없습니다.



.. 나무꾼의 눈앞에 우주 전체가 펼쳐져 있었어요. 우주는 새해 전날의 불꽃놀이처럼 눈부시게 반짝이며 소용돌이치고 있었지요. “이 우주에는 은하계라 불리는 수억 개의 세상이 있느니라. 은하계들은 저마다 다르게 생겼고 모두들 아름답지. 어느 은하계든 네가 살고 싶은 곳을 골라 보아라.” ..  (10쪽)




  그림책을 곰곰이 읽으면, 나무꾼으로 늙다가 죽은 사람은 늙으면서, 또 죽으면서, 이 삶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꿈을 돌아보았습니다. 스스로 돌아보았지요. 이러고 나서 죽었어요. 그러니까, 그림책에 나오는 나무꾼 할배는 죽음을 앞두고 ‘다음 삶’을 그린 셈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 스스로 돌아볼 노릇이에요. 오늘 이곳에서 살며 우리는 무엇을 그릴까요? 오늘 이곳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지으려 하나요? ‘다음 삶’은커녕 ‘오늘 이곳 삶’조차 하나도 안 그리면서 아침을 열지는 않나요? 오늘 하루도 늘 똑같이 쳇바퀴를 돌아야 하는 수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따분함과 고단함과 힘겨움만 잔뜩 끌어들이지는 않나요?


  나 스스로 아침부터 고단하거나 따분하거나 힘겹다고 생각하니, 참말 이 생각 그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단하거나 따분하거나 힘겨운 쳇바퀴를 돌아야 하지 않나요?



.. “나처럼 되세요! 그럼, 얼마나 신나겠어요!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생물들이 나무꾼을 향해 소리쳤어요 ..  (16쪽)




  생각이 삶을 바꿉니다. 기쁘게 스스로 짓는 생각이 내 삶을 스스로 기쁘게 바꿉니다. 남이 바꾸어 주는 내 삶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바꾸는 내 삶입니다. 남한테 기댄들 남은 나한테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내가 먹을 밥을 남이 먹어 준들, 내 배가 부를 수 없습니다. 내가 읽을 책이 남이 읽어 준들, 내 마음이 넉넉할 수 없습니다.


  내 밥은 내가 손수 지어서 내가 수저를 들어서 먹어야 합니다. 내 책은 내가 손수 골라서 내가 신나게 읽어야 합니다.


  내 삶은 내가 지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돈다발이 툭 하고 떨어져야 내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 삶을 바꾸려 하는 마음을 생각으로 키워야 비로소 내 삶을 바꿉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스스로 쳇바퀴를 돌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하겠노라 생각을 키우기에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얘야, 이리 오렴! 어서 우리 아이가 되렴!” 그때 나무꾼은 자신의 마음을 울리는 한 아버지의 미소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한 어머니의 미소도 보았습니다. “바로 저분들이 나의 부모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  (22쪽)



  슬기롭게 생각해야 삶을 짓습니다. 생각을 해야 삶을 짓지는 않습니다. 아니, 생각만 해서는 삶을 짓지 못합니다. 바보스레 생각하거나 멍청하게 생각할 때에는 삶을 바보스럽거나 멍청하게 지어요. 그러니, 생각을 하더라도 슬기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사랑스러움을 생각할 노릇입니다. 내가 누를 아름다움을 가만히 생각하면서, 내가 나아갈 사랑스러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때에 바로 내 앞길이 환하게 열립니다. 내가 여는 내 앞길이지요.


  그림책 《지구별에 온 손님》은 우리 모두가 저마다 ‘지구별 손님’인 대목을 밝힙니다. 맞아요. 우리는 지구별에 온 손님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다른 별에서 지구별로 온 손님입니다. 이 지구별에서 사랑과 평화와 꿈을 이루려고 모인 손님입니다. 그래서, 다 다른 나라와 겨레를 이루고, 다 다른 삶을 지으면서, 다 다른 사랑을 노래하지요.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4348.2.23.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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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보라는 웃음보따리



  산들보라가 웃는다. 그림을 하나 그리고 나서 웃는다. 이리 해도 웃고 저리 해도 웃는다. 버스에서 오랫동안 시달렸어도 웃고, 할머니와 삼촌을 만나면서도 웃는다. 밥을 먹으면서 웃고, 놀면서 웃는다. 자다가도 꿈에서 재미난 일이 있는지 웃는다. 언제나 웃음이 터져나오는 보따리가 마음속에 있겠지. 너도 나도 우리 모두 웃음보따리를 안고 살 테지. 4348.2.23.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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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0 온눈



  오늘날 한국에서 나오는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온’을 “전부의”나 “모두의”로 풀이합니다. 아주 잘못된 풀이라 할 수 있고, 아주 그릇된 풀이라 할 만하며, 아주 엉터리로 붙인 풀이일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은 이런 낱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940년에 나온 《문세영 조선어사전》을 살피면, ‘온’을 “= 온통”으로 풀이합니다. 이 또한 어설픈 뜻풀이라 할 테지만, 오늘날 한국말사전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면 ‘온통’은 무엇을 가리키는 낱말일까요. ‘온통’은 첫째, “있는 모두”를 가리킵니다. 둘째, “쪼개거나 나누지 않은 덩어리”를 가리킵니다. 쪼개거나 나누지 않은 덩어리란 무엇일까요? “오롯한 것”이요, 한자말로 하자면 “온전한 것”이나 “완전한 것”입니다.


  ‘온통·온’은 왜 ‘오롯한(온전한/완전한)’ 것일까요? ‘온’은 숫자로 ‘100’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숫자 ‘100’은 한자로 ‘百’이기도 하고, ‘百’이라는 한자는 숫자로 ‘100’일 뿐 아니라 빈틈이 없는 모습(새하얗다)을나타내고, 오롯이 있거나 옹글게 있는 모습을 가리켜요. 한국말 ‘오롯이’는 한자말 ‘온전(穩全)’과 같고, 한국말 ‘옹글게’는 한자말 ‘완전(完全)’과 같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한국말을 쓰는 한국사람이니, 이 땅에서 오랜 옛날부터 쓰던 한국말부터 제대로 바라보면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넋에 깃드는 숨결을 제대로 마주해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한국말 ‘온’으로 숫자 100을 가리키려는 한국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작 백(100) 해 사이에 한국말 ‘온’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참으로 재미난 노릇입니다. 고작 ‘100’ 해 사이에 ‘온’이라는 숫자말이 사라지니까요. 왜 그러할까요? 왜 100이라는 숫자만 지나가도 우리는 우리가 수만 해에 이르도록 즐겁게 쓰던 말을 잃거나 잊을까요?


  종(노예)이 되기 때문입니다. 남이 이끄는 대로 휘둘리거나 휩쓸리면서 갇히거나 눌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끄는 대로 가지 못하고, 남이 이끄는 대로 ‘남이 시키는 짓’만 하면서 내 삶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백 해라는 나날은 사람을 슬기롭게 바꿀 수 있기도 하면서, 사람을 바보스럽게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지난 백 해에 걸쳐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잃거나 잊으면서 바보가 되었다면, 오늘부터 앞으로 백 해에 걸쳐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찾거나 헤아리면서 슬기로운 이슬떨이가 될 수 있습니다.


  ‘온’이라는 낱말을 한국사람 스스로 잊도록 정치권력이나 사회제도나 학교교육이 자꾸 짓밟거나 들볶습니다. 이리하여, 요사이는 ‘백’이라는 한자말이 아니면 알아듣지 못하는 흐름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라 하더라도 ‘온통·온갖’ 같은 자리에서 ‘온’이 살아남습니다. 사회의식을 우리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하는 이들은 한국사람한테 한자말을 억지로 쓰도록 밀어붙이고, 이에 따라 ‘전심(全心)’과 ‘전력(全力)’ 같은 한자말을 쓰라고 시키지만, ‘온마음’과 ‘온힘’이라는 한국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있으니, 국립국어원에서는 ‘온힘’을 사전 올림말로 다루지만 ‘온마음’은 사전 올림말로 일부러 안 다루어서 ‘온 마음’처럼 띄어서 써야 한다고 밝힙니다. 이 대목을 깊이 들여다보면 무척 무시무시한 꿍꿍이가 있는 줄 알 수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 몸은 우리 마음에 따라 움직이기에, ‘마음’을 가리키는 낱말을 사람들이 덜 쓰거나 안 쓰거나 잘못 쓰거나 엉터리로 쓰도록 이끌면, 사람들 몸도 엉터리로 흐르기 일쑤입니다.


  오늘날 한국말사전에는 ‘온마음’이라는 낱말도 안 실리지만, ‘온넋’이나 ‘온얼’이나 ‘온뜻’이나 ‘온머리’나 ‘온삶’이나 ‘온사랑’ 같은 낱말도 안 실립니다. 게다가 ‘온누리’와 ‘온나라’조차 한 낱말로 일부러 안 삼습니다.


  ‘온누리’란 무엇일까요? 오롯한 누리이자 옹근 누리입니다. 모자람도 빈틈도 없는 누리와 나라가 ‘온누리·온나라’입니다. ‘온누리’는 ‘우주(宇宙)’를 가리키는 오래된 한국말이기도 합니다. 왜 그러한지는 앞서 밝혔듯이, ‘모든 누리’가 ‘온누리’이니 ‘모든 터’를 가리키는 한자말 ‘우주’는 한국말로 ‘온누리’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뜻이 더 있어요. ‘온누리’는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누리입니다. 전쟁도 미움도 다툼도 시샘도 없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만한 누리가 온누리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낱말을 정치권력이나 사회제도나 학교교육은 몹시 싫어하고 사람들이 못 쓰게 가로막습니다.


  ‘온힘’을 다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무엇을 할까요? 언제나 ‘온마음’을 씁니다. 온마음을 써야 온힘을 낼 수 있습니다. 몸에서 온힘을 내자면, 먼저 마음에서 ‘온기운’을 써야 합니다. 온마음을 쓰면서 이웃과 사랑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눈을 뜨려 합니다. 모든 귀를 열려 하며, 모든 꿈을 꾸려 합니다. 이리하여, 온기운은 온힘을 내도록 이끌어서, ‘온눈’과 ‘온귀’가 됩니다. 온눈을 뜨는 사람은 ‘오롯한 눈(완전한 눈)’을 뜨는 셈입니다. 이를테면 ‘제3의 눈’을 뜨는 셈이고, ‘제3의 눈’이란 바로 ‘온눈’입니다.


  그런데 사람한테는 ‘셋째 눈’만 있지 않습니다. 셋째 귀도 있어요. 그래서 ‘온귀’입니다. 셋째 눈과 귀가 있으니, 셋째 몸과 머리와 팔과 다리가 있을 테지요. 이 모두 ‘온몸·온머리·온팔·온다리’입니다. 오롯이 모든 것을 쓰는 삶이란 ‘온삶’이고, 온삶일 때에는 뇌를 100퍼센트 씁니다.


  자, 이제 실마리나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할 만합니다. 뇌를 100퍼센트 쓰는 일이란, 뇌를 ‘온(100)’으로 쓰는 일입니다. 그러니, 한국에서 정치권력과 사회제도와 학교교육으로 똘똘 뭉친 사회의식은 한국사람이 ‘온’이라는 낱말을 잊거나 잃도록 몰아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막아야, 이 나라 사람들 모두 종이 되어서 ‘정치권력과 사회의식이 시키는 짓’만 되풀이하는 굴레에 갇히거든요. 이 나라에서 한국말을 슬기롭게 가르치거나 배우는 얼거리는 하나도 없이, 영어 바람에 미치고 한자 지식에 짓눌리도록 하는 까닭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온꿈’과 ‘온사랑’으로 퍼집니다. 모든 것을 바라볼 뿐 아니라 꿰뚫어볼 수 있으니, 아무것에도 안 휘둘리면서 내 길을 갑니다. 온눈으로 바라보면서 온길을 걷습니다.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기에 ‘온빛’이 흐릅니다. 온빛이 흘러서 ‘온어둠’이 조용히 잠듭니다. 온어둠에서 새로운 삶이 태어납니다. ‘온새’라고 하지요. 온통 새롭기에 ‘온새’입니다. 온빛을 받아 온어둠에서 온새로 나아가는 온삶일 때에, 우리는 저마다 ‘온사람’으로 섭니다. 홀가분하게 삶을 짓기에 온사람이 되니, 온넋은 온바람을 타고 온곳(온갖 곳/모든 곳/온전하거나 완전한 곳)에 온씨(온갖 씨앗/모든 씨앗/온전하거나 완전한 씨앗)를 뿌립니다. 이제 온별(온 우주에 있는 별)에 환한 무지개가 뜹니다. 온겨레(온별에 있는 모든 사람)가 어깨동무를 합니다. 온나라를 이룹니다. 작은 점 ‘온’에서 비롯하여 ‘온나라’로 갑니다. 4348.2.14.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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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 새로읽기



  나는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사람을 바라본다. 내가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이라면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을 바라보았을 테지. 한국사람 가운데 ‘일본에서 한국을 더 깊이 아끼거나 돌보려고 하는 몸짓이나 마음’을 보여줄 적에 괜히 시샘을 하거나 까탈을 부리려는 사람을 곧잘 본다. 왜 그럴까? 참 웃기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시샘이나 까탈을 가만히 보면, 다른 나라나 겨레에서 한국 문화와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면서 “한국은 참 좋아!”나 “한국은 아주 훌륭해!” 하고만 말하면 시샘이나 까탈을 부리지 않는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걸어온 길을 찬찬히 살피면서 모든 문화와 역사와 사회를 깊고 넓게 건드리거나 헤아리는 이야기를 말하면 어김없이 시샘이나 까탈을 부린다. 이러면서 으레 말 한 마디를 붙잡고 늘어지려 한다.


  야나기 무네요시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있고, 이녁은 ‘조선(한국이 아닌 조선)’이라는 나라를 처음 찾아올 수 있던 때에 몹시 놀라면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고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권력은 쓸쓸하지만, 정치권력이 어떠하든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루어 살림을 가꾸는 여느 수수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이 몹시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웠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도 쓰고, ‘조선사람 스스로 아끼지 않아서 그대로 버려지는 조선 문화재(민속문화재)’를 온돈을 들여서 그러모았으며, 이렇게 그러모은 조선 문화재(민속문화재)를 아낌없이 조선 사회에 돌려주었다. 조선 사회에는 전형필이라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사람 몇몇이 있어도 거의 모든 사람은 조선 문화재(민속문화재)를 들여다보지 않았고 깎아내리거나 아예 쳐다보지 않았다. 이를 처음으로 짚으면서 밝힌 사람이 야나기 무네요시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본에서도 전쟁을 끔찍하게 싫어할 뿐 아니라, ‘반전론’을 대놓고 글로 밝히기도 한 사람이다. 이러면서 ‘유행에 따르기를 거스르’고, ‘겉치레로 겉모습을 꾸미기를 하지 않’으며, ‘삶을 사랑으로 가꿀 때에 비로소 참답게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이녁 다짐(좌우명)으로 삼으면서, 이를 ‘문화를 읽는 눈길’로 드러낸 사람이다.


  조선 백자이든 조선 막사발이든, 이러한 질그릇을 야나기 무네요시가 눈여겨본 까닭도 ‘유행에 따르지 않’으면서 ‘겉치레를 하지 않’는데다가 ‘조선 서민(백성)이 여느 삶자리에서 수수하게 쓰는’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석굴암을 놓고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 말을 아주 뒤트는 사람들이 많기도 한데, 여러모로 안쓰러운 ‘내 이웃인 한국사람’이다. 참말 석굴암을 뭘로 생각하기에 그런 안쓰러운 말을 일삼을까? 석굴암이건 팔만대장경을 모신 건물이건 아주 마땅히 ‘과학’이다. 그러나, 석굴암과 팔만대장경 모신 건물은 ‘자연(숲)을 거스르지 않은 과학’일 뿐 아니라, ‘자연(숲)을 그대로 살린 과학’이다. 한국사람은 스스로 바보인가? 아니, 오늘날 한국사람은 ‘한국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는 일본사람을 그저 깎아내리거나 못마땅하게 여겨야 ‘한국사람이 일본사람보다 높아져서 우쭐할 수 있다’고 멍청한 생각을 하는가? 석굴암에는 ‘아무런 전기 시설’을 하지 않고도 물방울이 생기지 않고 저절로 바람이 드나들면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이를 어설피 건드리는 바람에 다 망가뜨렸다. 팔만대장경 모신 건물에 무슨 에어컨이나 환풍기나 백열전구나 이런저런 것이 있는가? 이런 것들 하나조차 없어도 나무글판이 썩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대로 건사할 수 있도록 지은 바탕은 ‘자연(숲)을 제대로 읽어서 자연(숲)을 그대로 살리는 손길’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한국미(아름다운 한국)’란 바로 ‘자연미(숲내음)’라고 할 수 있고, 이 말이 맞으며,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를 제대로 읽어서 말했다. 조선 민화가 ‘자연미’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자연미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아니더라도, 〈에밀레 박물관〉을 손수 연 조자용 님이 밝히기도 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를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리고 싶다면, 조자용 님도 똑같이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릴 노릇이다. 두 사람이 한국 문화와 역사와 사회를 보는 눈은 ‘한동아리’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한(恨)’이나 ‘정(情)’이란 무엇인가? 한겨레는 정치권력 때문에 여느 사람들(백성, 옛날에는 백성이 모두 시골사람이었다)이 몹시 괴로웠다. 정치권력자와 지주와 양반이 여느 사람(백성, 시골사람)을 얼마나 모질게 짓누르거나 짓밟았는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토지수탈을 한 까닭은 ‘조선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소작료가 비싼 나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작쟁의는 일제강점기에만 불거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아닌 조선 사회에서도 끝없이 일어난 일이 소작쟁의이다. 한겨레 시골사람은 임금·권력자·지식인·양반한테 끝없이 짓눌리는 아픔(한)을 삭여서 눈물을 흘리다가도 웃음으로 녹여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정)으로 드러내는 수많은 노래(민요)와 이야기(민담, 설화, 옛이야기)와 춤(농악, 굿)과 두레와 품앗이와 울력과 놀이(마을잔치, 전통놀이) 들로 새롭게 나타냈다. ‘아픔을 달래어 이를 사랑으로 끌어올린 마음’이 바로 조선 사회를 이룬 이 나라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사람들, ‘백성’이 보여준 삶이고, 이러한 삶이 조선 막사발이나 소반 같은 데에서 애틋하게 나타났다.


  야나기 무네요시를 한국사람이 깎아내리든 비아냥거리든 그리 대수롭지 않다. 그러나, 우리한테 ‘마음’과 ‘생각’이 있다면, 우리 문화와 역사와 사회가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란다. 다른 나라에서, 또 이 나라 전문가나 학자라는 이들이, 이러쿵저러쿵 읊는 말에 기대지 말고, 우리 스스로 우리 문화와 역사와 사회를 ‘정치집권자 입맛에 맞추어 뒤바꾸거나 뒤튼 이야기’도 쳐다보지 않으면서, 가만히 우리 삶을 돌아보기를 바란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일구었는지 되새기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고 나서 야나기 무네요시를 읽어 보라. 그리고, 조자용과 예용해와 진성기와 한창기를 읽어 보라. 이러면서 송건호와 이오덕과 인병선을 읽어 보라. 이들이 쓴 책을 한 권도 빼놓지 말고 모두 읽어 보라.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손수 삶을 지은 사람들이 이룬 이야기’를 아끼는 마음을 읽어 보라. ‘시골에서 숲을 지으면서 아이들한테 사랑을 물려준 사람들이 빚은 이야기’하고 어깨동무하는 마음을 읽어 보라.  4348.2.23.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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