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어른 사이



  아이와 어른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나이가 있을까요? 나이가 있다고 본다면, 나이가 있습니다. 아이와 어른 사이에는 무엇이 있나요? 사랑이 있나요? 사랑이 있다고 본다면,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대로 서로 마주합니다. 어른과 어른 사이이든, 아이와 어른 사이이든, 우리가 보는 대로 서로 만나서 사귀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내가 ‘나이 더 많은 사람’이라 여기면, 내 둘레에서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은 ‘내가 너보다 많’으니까, 내가 너를 가르치는 자리에만 있겠다는 마음이 됩니다. 내가 너를 ‘나이’가 아닌 ‘사랑’으로 바라본다면, 나는 나하고 마주한 아이한테서 얼마든지 ‘사랑을 보고 배우’면서 ‘내 사랑을 아이(너)한테 보여주고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어린이문학이란 ‘나이 많은’ 어른이 아이한테 선물로 주는 책이 아니고, 교훈으로 삼을 교과서도 아니며, 사회의식을 먼저 일깨우려고 하는 규칙이나 도덕이나 모범도 아닙니다. 어린이문학은 언제나 ‘사랑’으로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아이와 어른 사이에 ‘나이’나 ‘학력’이나 ‘이름값’이나 ‘권력’ 같은 겉치레를 모두 걷어치운 다음에, 아이와 어른 사이에 오직 ‘사랑’을 놓고 ‘꿈’을 두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려고 할 때에 비로소 어린이문학입니다.


  어린이문학은 오롯이 사랑입니다. 오롯이 사랑으로 삶을 짓는 사람일 때에 어린이문학을 쓰고 읽습니다. 어린이문학을 아이한테 읽힌 뒤에 독후감을 쓰라고 시키지 마셔요. 사랑을 아이한테 베푼 어른 가운데 어느 누구도 ‘얘야, 너 나한테서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받은 느낌을 독후감으로 발표하렴!’ 하고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어린이문학은 언제나 오롯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인 어린이문학을 아이한테 읽히려 한다면, 그저 읽히고 함께 읽으면서 언제나 노래하면서 누리셔요. 이렇게 하면 됩니다.


  독후감 숙제를 내도록 읽히는 어린이문학이 있다면, 이 책이나 문학은 어린이문학이 아닙니다. 그저 교과서요 법률이며 도덕이고 교훈인데다가 딱딱하고 어려운 짐덩이입니다. 4348.2.24.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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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2015-02-24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이문학은 오롯이 사랑이다. 새겨봅니다. 늘 어린이문학을 교과서처럼 생각했지요. 함께 즐거이 읽고 이야기 나누어야겠어요. ^^

파란놀 2015-02-25 04:58   좋아요 0 | URL
적잖은 작가와 출판사와 비평가에다가 독자까지,
어느 때부터인가
어린이문학을 `교과서`로 여기는 바람에
그만 어린이문학이 `교훈`만 다루면 되는 줄 잘못 퍼지고 말았어요.
이리하여 요즈음 어린이문학을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학교생활 따돌림과 시험지옥 이야기`라든지
`엄친아` 이야기라든지
`환경을 지키자`는 구호만 나도는 이야기라든지...
재미없는 창작책만 잔뜩 쏟아져 나옵니다......
 

아름다운 책



  아름다운 이야기는 늘 이곳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저곳에 있지 않아요. 아름다운 이야기는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내가 있는 이곳’과 ‘네가 있는 이곳’에 있습니다. 내가 바라보기에 ‘네가 있는 이곳’은 ‘저곳’일 수 있지만, 우리는 저마다 ‘이곳’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누립니다.


  삶이 즐거우면 언제나 아름다운 이야기가 흐른다고 느껴요. 삶이 즐겁기에 언제나 아름다운 이야기가 흐른다고 느껴요. 삶이 즐겁지 않다면 안 즐거우니까 안 아름다울 테지요. 즐거움이 없는 곳에는 아름다움이 없으니까요.


  노래하는 사람이 즐겁습니다. 노래하는 사람이 즐거우니 아름답습니다. 노래하지 않는 사람은 안 즐겁습니다. 노래하지 않는 사람은 안 즐거우니 안 아름답습니다. 구성지거나 멋들어지게 뽑는 목소리려야 아름다운 노래가 아닙니다. 스스로 즐거움을 길어올려서 부르는 노래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책 하나가 아름답습니다. 즐겁게 노래하는 마음으로 쓴 글을 엮은 책 하나가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책을 쓴 이웃을 알아서 즐겁고, 이 아름다운 책을 읽으면서 내 하루를 즐겁게 열 수 있기에 나한테도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서 더없이 기쁘게 서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4348.2.24.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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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129. 흙손



  흙을 만지는 손은 흙손이 됩니다. 흙손이 되면 흙내음이 나고 흙빛이 감돕니다. 흙기운이 서려서, 이 흙손으로 무엇을 만지면 어디에나 흙숨을 가만히 옮길 수 있습니다. 사랑을 어루만지는 손은 사랑손이 됩니다. 사랑손이 되면 사랑내음이 나고 사랑빛이 흐릅니다. 사랑기운이 서려서, 이 사랑손으로 무엇을 만지면 언제나 사랑숨을 퍼뜨릴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손은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손은 흙빛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고, 내 손은 사랑빛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내 손은 참을 사진으로 담을 뿐 아니라, 거짓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어요. 내 손은 아름다움과 미움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으며, 내 손은 꿈이나 노래도 얼마든지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다만, 무엇을 사진으로 담든, 내가 스스로 움직이고 내가 스스로 손을 뻗어야 합니다. 언제나 내가 스스로 움직이는 만큼 내 사진이 태어납니다. 내가 스스로 손을 뻗어서 다가가는 만큼 내 사진이 드러납니다.


  이웃과 살가이 어깨동무를 하는 사람이 사진을 찍으면, 이 사진에는 언제나 살갑고 포근한 기운이 서립니다. 이웃과 살가이 어깨동무를 하지 않은 채 사진을 찍으면, 이 사진에는 겉보기로는 놀랍거나 훌륭할는지 모르나, 어떠한 따순 기운도 흐르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두멧자락(오지)을 찾아가야 ‘두멧자락(오지)’ 기운이나 모습을 사진으로 찍지 않아요. 우리가 두멧자락이라 하는 곳은 우리가 처음 선 이곳에서 따졌을 적에 멀디먼 곳이지만, 그곳(두멧자락)에서 사는 사람은 그곳(두멧자락)이 그들 보금자리요 삶터이며 고향입니다. 그러니까, ‘오지 여행’을 하는 이들은 ‘내 이웃한테 보금자리요 삶터이며 고향’인 곳을 ‘내 얕은 생각과 눈길’에 따라서 재거나 따져서 함부로 잘라내어 사진에 담는 셈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오지 여행’을 할 수 없어요. 우리는 언제나 ‘내 이웃 보금자리’를 찾아갈 뿐입니다. 우리는 늘 ‘내 이웃 삶터와 고향’을 만날 뿐이에요.


  사진기를 손에 쥔 손은 어떤 손인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손은 흙손인가요? 내 손은 사랑손인가요? 내 손은 웃음손인가요? 내 손은 눈물손인가요? 내 손은 꿈손인가요? 내 손은 어떤 손인지 먼저 또렷이 바라보고 나서 사진기를 쥐어야 합니다. 4348.2.24.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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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1 고요누리



  고요한 곳에는 소리도 몸짓도 없습니다. 고요한 터에는 노래도 춤도 없습니다. 고요한 자리에는 눈물도 웃음도 없습니다. 고요한 삶에는 이야기도 사랑도 없습니다. 그런데, 고요한 곳에는 이 모두가 함께 있습니다. 어찌 된 셈일까요?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누리에 모든 것이 함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기에 모든 것이 새롭게 자랍니다. 모든 것이 없기에 어느 것이든 새롭게 태어납니다. 어떠한 것이든 홀가분하게 내려놓아 씨앗이 되도록 땅에 심었기에, 이 땅에서는 이 모든 새로운 숨결이 천천히 거듭납니다.


  ‘고요누리’입니다. 고요누리는 ‘가능성’이자 ‘제로포인트’입니다. 아주 조그마한 점이면서 모든 것이 싹틀 수 있는 바탕입니다. 씨앗이면서 온누리입니다. 삶이면서 죽음입니다.


  우렁차게 지르는 소리라야 다른 사람이 듣지 않습니다. 말 없는 말을 마음속에 담아도 모든 사람이 듣습니다. 꽥꽥 목청을 돋아야 저 먼 데까지 소리가 퍼지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면서 마음자리에 고요한 숨결을 씨앗으로 심으면, 이 씨앗은 별누리 모든 숨결한테 한꺼번에 퍼져서 그야말로 기운차고 곱게 모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움직임으로 드러나는 몸짓이 되어야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움직임으로 드러나는 몸짓으로 보여주어야 삶을 밝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오늘 이곳에서 바로 나 스스로 모든 것을 합니다. 왜냐하면, 움직임으로 드러나는 몸짓이 있더라도 이 몸짓을 이끄는 생각이 없으면 부질없는 움직임이나 몸짓일 뿐입니다. 나 스스로 키우거나 살찌우거나 북돋우거나 보듬는 생각이 없다면, 어떠한 움직임이나 몸짓도 싹을 틔우지 못합니다.


  이 땅에 씨앗을 심지 않고 비료와 농약과 항생제를 뿌리고 또 뿌린들 아무것도 안 돋습니다. 이 땅에 씨앗을 심지 않고 물만 주거나 볕만 잘 들도록 한들 어떠한 것도 안 나옵니다.


  이 땅에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비료도 농약도 항생제도 끌어들이지 마셔요. 이러한 것은 어느 한 가지조차 없어도 됩니다. 씨앗을 틔워서 키우는 기운은 비료도 농약도 항생제도 아닙니다. 종교도 철학도 교육도 학문도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예술도 ‘사랑’이라고 하는 씨앗을 틔우지 못합니다. ‘삶’이라고 하는 씨앗도, ‘이야기’라고 하는 씨앗도, 노래와 춤과 웃음이라고 하는 씨앗도, 다른 어느 것으로도 틔우지 못합니다.


  고요한 넋이 되어 심는 씨앗에서 모든 것이 자랍니다. 고요한 숨결이 되어 바라보는 씨앗 한 톨을 이 땅(마음)에 심기에 비로소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씨앗 한 톨은 늘 기다립니다. 씨앗 한 톨은 이 씨앗을 우리가 손수 이 땅(마음)에 심는 날까지 고요하게 기다립니다. 씨앗 한 톨은 내 손길을 거쳐서 바람을 타고 이 땅(마음)으로 스며듭니다. 이리하여, 내 손길과 바람을 누린 씨앗은 흙(땅/마음) 품에 안겨서 포근하면서 아늑하게 잠듭니다. 포근하고 아늑하게 잠들면서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꿈을 꾸기에 ‘씨앗’이라고 하는 허물을 비로소 벗으면서 ‘나비’로 깨어나듯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첫누리(1차 의식)가 새누리(2차 의식)입니다. 첫걸음(비기닝)이 새걸음(어드밴스)입니다. 첫걸음을 떼는 첫누리에서 한누리(1차 단계)를 밟습니다. ‘한누리’는 아름답지요. 좋음과 싫음도, 미움과 살가움도, 전쟁과 평화도, 아이낳기와 살곶이도, 지구별 사회에서 일어나거나 터지는 모든 일과 놀이는 다 아름답지요. 그러나 한누리에만 머물 수 없어요. ‘두누리(2차 단계)’로 갑니다. 차분한 곳인 두누리로 갑니다. 사회를 이루고 모임을 엮습니다. 두누리는 한누리와 대면 한결 낫다 싶지만, 두누리에만 머물 수 없어요. 해님이 깃드는 ‘세누리(3차 단계)’로 갑니다. 세누리에서 살짝살짝 놀라운 모습을 엿볼 수 있을 텐데, 세누리에만 머물 수 없어요. 우리는 기쁘게 ‘네누리(4차 단계)’로 갑니다. 네누리에서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사랑을 마주합니다. 너와 내가 하나이면서 둘인 사랑을 마주하고, 너와 나는 둘이지만 하나인 사랑을 만납니다. 이윽고 내 몸과 마음에서 온힘을 뽑아내는 터전인 ‘닷누리(다섯누리/5차 단계)’로 갑니다. 닷누리에서 마음껏 힘껏 새로움을 누립니다. 이윽고 ‘엿누리(여섯누리/6차 단계)’로 갑니다. 힘이 아닌 차분한 숨결로도 얼마든지 모든 것을 이루면서 다스릴 수 있는 거룩한 빛을 만납니다. 이리하여 ‘일곱누리(7차 단계)’에 닿습니다. ‘고요누리(제로포인트)’에서 씨앗 한 톨을 심은 우리는 한누리부터 일곱누리까지 찬찬히 걷습니다. 고요한 일곱누리에 닿아서 가없고 끝없는 누리에서 부는 바람을 쐽니다.


  바람을 먹고 바람을 마십니다. 바람을 불러 바람노래가 됩니다. 바람으로 이루어진 ‘바람누리’에서 우리가 가는 곳은 지구라는 별이 깃든 ‘온누리’요, ‘별누리’입니다.


  가슴에 빛을 담습니다. 빛누리에 섭니다. 빛은 ‘까만누리’에서 새롭게 퍼집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서 씨앗 한 톨이 되는 고요누리에 닿습니다.


  한누리는 흙누리입니다. 두누리는 꽃누리입니다. 세누리는 해누리입니다. 네누리는 하늘누리입니다. 다섯누리는 알(열매)누리입니다. 여섯누리는 꿈(구름)누리입니다. 일곱누리는 씨(씨앗)누리입니다. 홀가분하게 흐르고, 신나게 오가는, 고운 하루입니다. 삶을 마음껏 누려요. 우리 ‘삶누리’를 기쁘게 가꾸어요. 4348.2.16.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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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보라는 봄비에 장난돌이



  산들보라는 언제나 장난돌이로구나 하고 느낀다. 그래, 장난꾸러기이다. 그러니, 장난으로 하루를 누리지. 밥상맡에서도, 마당에서도, 자전거에서도, 언제나 장난스럽게 뛰놀면서 웃지. 이 마음을 찬찬히 읽으라면서 아버지한테 말을 건다. 아버지도 어릴 적에 장난꾸러기였을 테지요, 하고 묻는다. 4348.2.24.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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