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도 익혀야지

 (404) -께로 1


먼저 하나님께로 가세요. 제가 뒤따라갈게요

《박정희-나의 수채화 인생》(미다스북스,2005) 6쪽


 하나님께로 가세요

→ 하느님께 가세요

→ 하느님한테 가세요

→ 하느님에게 가세요

→ 하느님 있는 곳으로 가세요

→ 하느님 계신 곳으로 가세요

 …



  한국말에는 ‘-께 + -로’라는 토씨는 없습니다. ‘-께’면 ‘-께’이고, ‘-로’면 ‘-로’일 뿐입니다. ‘-한테/-에게’를 높이려는 뜻이라면 ‘-께’를 붙여서 “하느님께 가세요”처럼 쓰면 됩니다. 그런데, 높이는 자리에 ‘-께’를 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으레 ‘-한테’를 널리 씁니다. 아이한테 “할아버지한테 가 보렴”처럼 흔히 말하지, “할아버지께 가 보렴”처럼 잘 말하지 않습니다. 높이려고 한다면 ‘-께’를 붙여야 맞으나 “할머니한테 드리렴”처럼 흔히 말해요.


  아이와 할아버지 할머니를 놓고 본다면, 아이로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높여야 맞고, 아버지와 어머니 자리에 있는 사람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높여야 맞습니다. 그렇지만, 서로 살가운 흐름으로 이야기를 나누려는 뜻으로 굳이 ‘-께’를 안 쓰고, 부드럽게 수수한 말씨로 ‘-한테’를 붙이기 마련입니다.


  종교에서는 ‘거룩한 하느님’을 섬기면서 ‘-한테/-에게’는 거의 안 쓰고 으레 ‘-께’만 씁니다. 그러면, 이 토씨 ‘-께’를 알맞게 쓰면 됩니다. ‘-께로’처럼 엉뚱한 토씨를 억지로 꾸며서 쓰지 않아도 됩니다. 4338.4.18.달/4348.2.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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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느님한테 가세요. 제가 뒤따라갈게요


한국에서는 개신교를 믿는 분들이 ‘하나님’처럼 적습니다만, ‘하느님’으로 적어야 올바릅니다. 천주교를 믿기에 ‘하느님’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나 똑같이 ‘하느님’일 뿐이고, 종교가 아닌 곳에서도 ‘하느님’입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682) -께로 2


당신이 제 아들을 당신께로 불러 가셨음을, 조국이 아들을 가져가는 대신에 제 사랑하는 아이를 받아들였음을

《야누쉬 코르착-홀로 하나님과 함께》(내일을여는책,2001) 48쪽


 당신께로 불러 가셨음을

→ 당신한테 불러 가셨음을

→ 하느님 곁으로 데려가셨음을

→ 하느님 계신 곳으로 데려가셨음을

 …



  이 보기글에서는 “당신께로”를 “당신께”로 바로잡으면 됩니다. ‘-께로’로 적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께로’라는 토씨가 나타난 까닭은 일본말 때문입니다. 일본 말투가 얼결에 한국말로 스며들면서 이런 말투가 생겼습니다. 한국이 일본한테 식민지살이를 해야 한 탓에 생긴 얄궂은 말투 가운데 하나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께로 → -께/-한테’처럼 손질하고 나서 어딘가 아리송합니다. 말투가 좀 엉성합니다. “당신한테 불러 가셨음을”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제 아들을 하느님한테 불러서 가셨음을”이라고 하니 높임말 자리가 바뀌었습니다. “하느님이 제 아들을 하느님한테 부르셔서 갔음을”이 되어야 할 테지요. 그런데, 이렇게 높임말 자리를 바꾸어도 어쩐지 안 어울립니다. “부르셔서 갔음을”이든 “불러서 가셨음을”이든 맞갖지 않아요. 이 대목을 더 손질해서 “하느님한테 데려가셨음을”처럼 적어야지 싶습니다. 4340.1.12.쇠/4348.2.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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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제 아들을 하느님한테 데려가셨음을, 나라가 아들을 가져가려 할 때 제 사랑하는 아이를 받아들였음을


‘당신(當身)’이라는 한자말을 그대로 쓸 수도 있으나, 이러한 말을 쓴 지 얼마 안 됩니다. 한겨레는 예부터 ‘이녁’이나 ‘그대’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녁’이나 ‘그대’로 손질하거나, 이 보기글에서는 ‘하느님’으로 손질합니다. ‘조국(祖國)’은 ‘나라’로 손보고, “아들을 가져가는 대신(代身)에”는 “아들을 가져가려 할 때에”로 손봅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나라(정부)’에서 전쟁을 일으켜 아들을 군대로 끌어가려 하는 모습을 가리키니, ‘할 때에’로 손보아야지 싶습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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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699) 저희 


저는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에 있는 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입니다. 저희 학교는 흙 냄새, 나무 냄새,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시골 학교입니다

《이경수-가슴으로 크는 아이들》(푸르메,2006) 머리말


 저희 학교는

→ 양곡고등학교는

→ 우리 학교는

→ 이 학교는

→ 이곳은

 …



  “저희 나라”나 “저희 회사”처럼 쓰면 잘못이라고 흔히 이야기합니다. 그럴 테지요. “우리 형”이나 “우리 어머니”이지 “저희 형”이나 “저희 어머니”가 아니니까요. 낮춤말로 쓰는 ‘저희’를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를 아우르는 대이름씨” ‘우리’와 헷갈리는 셈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헷갈릴까요. 왜 이렇게 잘못 쓸까요. 어릴 적부터 한국말을 제대로 못 배운 탓일 테고, 집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한국말을 올바로 익히지 못한 탓입니다. 오늘날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엉뚱하게 쓰면서 어느 누구도 제대로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틀린 말을 엉뚱하게 쓰더라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요. 이렇게 고쳐야지요.’ 하고 일러 줄 어른이 없기도 하고, 애써 일러 주어도 틀린 말버릇을 바로잡지 않은 탓입니다.


 ‘우리’의 낮춤말

→ ‘우리’를 낮춘 말

→ ‘우리’를 낮추어 쓰는 말

→ 이쪽을 낮추면서 저쪽을 높이려고 쓰는 말


  한국말사전을 찾아보면 ‘저희’를 풀이하면서 “‘우리’의 낮춤말”처럼 적습니다. 이 말풀이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의’를 넣는 말풀이보다 틀렸지요. 적어도 “‘우리’를 낮춘 말”로는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학교이름을 밝혀 주면 됩니다. “우리 학교”로 고쳐도 좋고 “이 학교”라고만 해도 됩니다. 보기글 끝에 “시골 학교입니다”라 말하니 “이곳은”이라고 해도 돼요.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왜 이렇게 잘못 쓸까요. 이렇게 잘못 쓴 말을 글쓴이가 몰랐다 해도, 이 글을 책으로 펴내는 사람은 왜 못 잡아챘을까요. 잡아챘어도 바로잡지 않을 수 있는데, 그렇다면 왜 바로잡지 않았을까요.


  부끄러운 줄 모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한국말을 깊거나 넓게 헤아리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에서 엮은 《표준국어대사전》 말풀이와 보기글도 얄궂습니다. 다른 한국말사전에서는 ‘저희’를 ‘우리 3’ 낮춤말로 다루지 않으나, 국립국어원에서는 ‘저희’를 ‘우리 3’ 낮춤말로 다룹니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한국말사전에서 ‘우리 3’을 보면 다음 같은 보기글이 나옵니다.


 우리 엄마 / 우리 마누라 / 우리 신랑 / 우리 아기

 우리 동네 / 우리 학교 교정은 넓지는 않지만 깨끗하다


  “저희 엄마”나 “저희 마누라”로 쓸 수 없습니다. “저희 신랑”이나 “저희 아기”라고 쓸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낮출 수는 있으나, 내가 다른 사람을 낮출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동네”와 “저희 학교”처럼 쓰는 말투는 모두 틀립니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 말풀이는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를 낮추어서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희 엄마

→ 제 어머니

→ 저를 낳은 어머니

 우리 아기

→ 제 아기

→ 제가 낳은 아기

 저희 학교

→ 제가 일하는 학교

→ 제가 다니는 학교

 저희 마을

→ 제가 사는 마을

→ 제가 사랑하는 마을


  ‘나’를 낮추려면 ‘저’를 쓸 노릇입니다. 어른 앞에서 ‘나’와 ‘언니(또는 누나나 형)’를 아울러서 낮추려 할 적에는 ‘저희’나 ‘저희들’처럼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저희 형”이나 “저희 언니”가 아닙니다. “제 형”이나 “제 언니”라고 해야 올바릅니다. ‘저희’를 쓰려면 “저희가 했어요”나 “저희들이 할게요”처럼 씁니다. 다만, 이런 ‘저희/저희들’은 형이나 언니 자리에 있는 사람이 쓰고, 동생이 말한다면 ‘우리’라고 쓰면 됩니다. 4340.2.11.해/4348.2.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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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에 있는 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입니다. 우리 학교는 흙 냄새, 나무 냄새,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시골 학교입니다


이 보기글을 보면 “양촌면의 양곡고등학교의 역사 교사”처럼 쓰지 않고 “양촌면에 있는 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처럼 알맞게 잘 적습니다.



저희

1. ‘우리 2’의 낮춤말

   - 저희를 살려 주는 셈 치고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 

     저희 때문에 선배님이 고생하시는군요

2. ‘우리 3’의 낮춤말

   - 저희 회사에서 이번에 새로 개발한 신제품입니다 /

     언제라도 저희 집에 들러 주십시오

3. 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나 나온 바 있는 사람들을 도로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

   - 아들 내외가 사정을 하러 찾아 왔지만 저희가 뭐라 해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아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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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배움자리 12. 학교나무 심자



  ‘우리 집 학교’를 이루는 올해에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할까 하고 생각하니, 저절로 나온 ‘내 생각’은 ‘우리 학교 나무를 심자’이다. 그러면 어떤 나무를 심지? 여러 날과 여러 주에 걸쳐서 곰곰이 생각을 했으나 딱히 어떤 나무가 어울릴는지 수가 나오지 않았다. 이러구러 이월 끝머리가 되는데, 설을 앞두고 우리 마을에서는 마을 어귀에 있던 나무를 몇 그루 뽑고는 이 자리에 정자를 박았다. 군청에서 ‘완성형 나무 정자’를 짜맞추어서 마을 어귀에 박으면서, 이 자리에서 퍽 오래 자라면서 꽃을 베풀던 나무를 뽑았다. 뽑은 나무는 다른 곳에 옮겨심으려나 했더니 마을에서 아무도 안 옮겨심을 뿐 아니라 마을 어르신이 쓰레기를 태우는 자리에 그냥 버렸다. 깜짝 놀랐다. 제법 큰 나무였는데 그냥 버리다니. 이 나무를 다시 심으면 살아날 수 있을까? 그제 비가 와서 나무뿌리를 적셔 주었고, 어제는 우체국에 다녀오느라 바빴기에 오늘 아침에 수레를 끌고 나무를 실어서 우리 ‘도서관+학교’로 실어 간다. 어른 혼자 들 수는 있으나 짊어지고 나를 수는 없다. ‘도서관+학교’로 들어가는 문 앞쪽 빈터에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옮겨심기로 한다. 뿌리가 제법 넓게 퍼졌기에, 옮겨심을 구덩이를 파느라 한 시간 즈음 걸린다. 혼자서 삽으로 파니까. 나무를 천천히 들어서 자리를 잡고, 흙을 덮고 북돋운다. 다시 한 시간 즈음 들여 나무를 살핀다. 우리 학교 나무가 처음으로 선다. 이 나무가 이곳에서 새 숨결을 얻어서 씩씩하게 자라 아름답고 짙푸른 그늘과 꽃내음과 잎내음을 베풀어 주기를 빈다. 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집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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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9. ‘자유로운’ 생각과 삶과 말

― 아이한테 들려줄 노래에 담는 말



  어른이 지어서 아이와 함께 부르려는 노래를 가리켜 ‘동요(童謠)’라고 하지만, 이 한자말을 한국사람이 쓴 지 얼마 안 됩니다. 서양 현대문학을 받아들인 일본에서 널리 쓰던 말마디를 한국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동시’나 ‘동화’라는 낱말도 이와 같습니다. 일본을 거쳐서 들어왔기에 안 써야 할 낱말이 되지 않습니다. 일본을 거치든 중국을 거치든 미국을 거치든, 한국사람이 한국말로 가장 알맞고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새 낱말’을 지을 수 있는지 없는지 먼저 생각한 뒤 즐겁게 쓰면 됩니다.


  한국말사전에는 아직 안 실리지만 ‘어린이노래’라는 낱말을 새롭게 지어서 쓰기도 합니다. 어린이와 함께 부를 노래요, 어린이가 즐기는 노래라는 뜻에서 ‘어린이노래’입니다. 곰곰이 헤아린다면, 한국에서는 지난날에 그냥 ‘노래’라고만 했습니다. 지난날에는 어른과 아이가 따로 없이 모두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를 굳이 가른다면 ‘일노래’와 ‘놀이노래’가 있습니다. 어른은 일을 하니 ‘일노래’이고, 아이는 놀이를 하니 ‘놀이노래’입니다. 지난날에 아이가 부르던 노래는 모두 놀이를 하며 부르던 노래예요. 그러니, ‘어린이노래’란 모두 ‘놀이노래’이면서 그냥 ‘노래’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이들은 노래를 얌전히 앉아서 듣거나 부르지 않아요. 춤을 추거나 웃거나 뛰놀면서 노래를 불러요. 어른들은 무대나 공연장 같은 데에 다소곳하게 앉아서 노래를 듣기도 하지만, 아이들한테는 이런 노래가 몹시 힘듭니다. 좀이 쑤시지요. 한편, 노래를 더 살피면 지난날 어른들이 일을 하며 부르던 노래는 ‘들노래’와 ‘마을노래’로 가를 수 있어요. 들에서 일하며 부르는 노래가 있고, 마을에서 일하며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가르면 ‘살림노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바느질을 하거나 베틀을 밟거나 절구질이나 방아질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빨래를 하거나 다듬이질을 하며 부르는 노래는 ‘일노래’이면서 ‘살림노래’로 여길 만해요.


  오늘날 널리 퍼진 어린이노래 가운데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으로 첫머리를 여는 노래가 있고,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로 첫머리를 여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를 처음 지은 어른이나 오늘날 이 노래를 부르는 아이나 그냥 듣고 부릅니다. 그런데, 두 어린이노래에서 크게 잘못된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산 위에서”와 “산 속 옹달샘”입니다.


  바다에서 부는 바람은 바닷바람입니다. “바다 위에서” 부는 바람이 아닙니다. 들에서 부는 바람도 “들에서” 불 뿐, “들 위에서” 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산에서 부는 바람”이나 “멧골에서 부는 바람”으로 바로잡아야 해요. 사람들은 “산에 나들이를 갈” 뿐, “산 속에 나들이를 간다”고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잠을 자지 “집 속에서” 잠을 자지 않습니다. “깊은 산에 옹달샘”이나 “깊은 멧골 옹달샘”처럼 어린이노래를 바로잡아야 옳습니다.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잘못 쓰는 말투라 하더라도 이러한 말투를 ‘자유’로 보아야 할까요? 널리 퍼진 노래라 하더라도 잘못 쓰는 말투가 더 퍼지지 않도록 바로잡아야 할까요? 널리 퍼졌으면 잘못된 말투라 하더라도 그대로 써야 할까요? 널리 퍼지기 앞서 바로잡았으면 가장 나았을 테지만, 노래를 선보이거나 문학을 선보이거나 책을 선보이는 어른들은 ‘낱말 하나’와 ‘말투 하나’까지 얼마나 올바르거나 알맞은지 제대로 안 살피기 일쑤입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살피지만, 말다운 말인지 헤아리지는 않습니다.


  다른 갈래에서 생각해 봅니다. 이를테면, 가게에 놓인 과자에 ‘독성 물질’이 섞였으면 어른들은 어떻게 할까요? 빵집에 놓인 빵에 곰팡이가 피었으면 어른들은 어떻게 할까요? 광우병이나 조류독감이라고 해서 소와 닭을 수십만 마리나 산 채로 파묻기까지 하는 어른들 모습은 무엇일까요? 입에 들어가는 밥에서 아주 조그마한 잘못이 하나라도 드러나면, 하늘이 무너지듯이 깜짝 놀라면서 아주 발빠르게 바로잡으려고 애씁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들어가는 말은? 생각을 가꾸는 말은? 사랑을 살찌우는 말은? 넋을 북돋우는 말은?


  우리가 늘 쓰는 말은 우리 마음을 이끕니다. 아주 자그마한 말 한 마디가 바로 우리 마음과 생각과 사랑과 넋을 움직입니다. 널리 퍼진 노래에서 한두 군데 잘못된 대목이니, 슬쩍 눈을 감고 지나쳐도 될까요?


  자유로운 말이란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말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말이란 서로 아끼고 돌보는 마음을 북돋우는 말이라고 느낍니다. 내 삶을 곱게 가꾸면서 이웃과 동무가 저마다 이녁 삶을 곱게 가꾸도록 북돋울 때에 참다운 자유가 되리라 느낍니다.


  말 한 마디를 찬찬히 살피는 까닭을 돌아봅니다. 마음을 알뜰살뜰 여미어 이웃과 사랑스레 어깨동무하는 꿈을 짓고 싶기에 말 한 마디를 찬찬히 살핍니다. 글 한 줄을 곰곰이 헤아리는 까닭을 짚습니다. 생각을 슬기롭게 가꾸면서 내 보금자리와 우리 마을을 모두 아름답게 일구고 싶기에 글 한 줄을 곰곰이 헤아립니다. 규칙이니까 지켜야 하는 말이 아니라, 서로 즐겁게 마음을 살찌우고 싶기에 말을 곱게 가다듬습니다. 원칙이니까 따라야 하는 글이 아니라, 다 함께 기쁘게 노래하듯이 생각을 키우고 싶기에 글을 정갈히 추스릅니다.


  전남 광주에서 다달이 나오는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2015년 1월호를 보면, 전남 곡성 수월리 김봉순 할매가 들려주는 “우덜이 날마다 밭고랑으로 기어댕긴께 도시사람들 묵제. 내 손이 키와서 전국이 다 묵제. 힘들다고 모다 호맹이 자리 땡개불문 모다 못 묵제(27쪽).” 같은 말마디가 고스란히 나옵니다. 전라말이요 곡성말이면서 수월마을 사람들이 쓰는 말입니다. 표준말이나 서울말로 고쳐서는 말맛이 나지 않습니다. 곡성 옆에 있는 구례에서는 구례말을 쓸 테고, 구례 옆에 있는 하동에서는 하동말을 쓸 테지요. 마산은 마산말, 진주는 진주말, 순천은 순천말을 씁니다. 자유롭게 쓰는 말이란 내가 나고 자란 터전에서 싱그러이 살아서 숨쉬는 말이지 싶습니다. 이웃을 아끼고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쓸 때에 참으로 자유로우면서 아름다운 말이지 싶습니다. 4348.1.11.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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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어른 사이



  아이와 어른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나이가 있을까요? 나이가 있다고 본다면, 나이가 있습니다. 아이와 어른 사이에는 무엇이 있나요? 사랑이 있나요? 사랑이 있다고 본다면,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대로 서로 마주합니다. 어른과 어른 사이이든, 아이와 어른 사이이든, 우리가 보는 대로 서로 만나서 사귀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내가 ‘나이 더 많은 사람’이라 여기면, 내 둘레에서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은 ‘내가 너보다 많’으니까, 내가 너를 가르치는 자리에만 있겠다는 마음이 됩니다. 내가 너를 ‘나이’가 아닌 ‘사랑’으로 바라본다면, 나는 나하고 마주한 아이한테서 얼마든지 ‘사랑을 보고 배우’면서 ‘내 사랑을 아이(너)한테 보여주고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어린이문학이란 ‘나이 많은’ 어른이 아이한테 선물로 주는 책이 아니고, 교훈으로 삼을 교과서도 아니며, 사회의식을 먼저 일깨우려고 하는 규칙이나 도덕이나 모범도 아닙니다. 어린이문학은 언제나 ‘사랑’으로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아이와 어른 사이에 ‘나이’나 ‘학력’이나 ‘이름값’이나 ‘권력’ 같은 겉치레를 모두 걷어치운 다음에, 아이와 어른 사이에 오직 ‘사랑’을 놓고 ‘꿈’을 두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려고 할 때에 비로소 어린이문학입니다.


  어린이문학은 오롯이 사랑입니다. 오롯이 사랑으로 삶을 짓는 사람일 때에 어린이문학을 쓰고 읽습니다. 어린이문학을 아이한테 읽힌 뒤에 독후감을 쓰라고 시키지 마셔요. 사랑을 아이한테 베푼 어른 가운데 어느 누구도 ‘얘야, 너 나한테서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받은 느낌을 독후감으로 발표하렴!’ 하고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어린이문학은 언제나 오롯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인 어린이문학을 아이한테 읽히려 한다면, 그저 읽히고 함께 읽으면서 언제나 노래하면서 누리셔요. 이렇게 하면 됩니다.


  독후감 숙제를 내도록 읽히는 어린이문학이 있다면, 이 책이나 문학은 어린이문학이 아닙니다. 그저 교과서요 법률이며 도덕이고 교훈인데다가 딱딱하고 어려운 짐덩이입니다. 4348.2.24.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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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2015-02-24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이문학은 오롯이 사랑이다. 새겨봅니다. 늘 어린이문학을 교과서처럼 생각했지요. 함께 즐거이 읽고 이야기 나누어야겠어요. ^^

파란놀 2015-02-25 04:58   좋아요 0 | URL
적잖은 작가와 출판사와 비평가에다가 독자까지,
어느 때부터인가
어린이문학을 `교과서`로 여기는 바람에
그만 어린이문학이 `교훈`만 다루면 되는 줄 잘못 퍼지고 말았어요.
이리하여 요즈음 어린이문학을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학교생활 따돌림과 시험지옥 이야기`라든지
`엄친아` 이야기라든지
`환경을 지키자`는 구호만 나도는 이야기라든지...
재미없는 창작책만 잔뜩 쏟아져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