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는 눈빛 130. 내가 나를 볼 적에



  사진을 찍다 보면,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은 사진에 나오지 않고, 사진기 앞에 선 사람만 사진에 나옵니다. 여러 사람이 어느 곳에 나들이를 가서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찍는 사람’은 늘 찍고, ‘찍히는 사람’은 늘 찍힙니다. 이리하여, 여러 사람 가운데 ‘찍새(사진가)’ 한 사람만 사진에 없기도 합니다. 이때에 누군가 한 사람이 ‘너도 함께 찍어야지. 너는 한 장도 안 나왔잖아.’ 하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흔할 텐데, 이런 말을 듣는 ‘찍새(찍는 사람)’는 ‘난 괜찮아. 너희들 많이 찍어.’ 하고 말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이 둘레를 지나가는 사람을 살펴서, 누군가 마땅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사진기를 맡겨서 다 함께 찍도록 하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 봅니다. ‘찍는 사람’은 사진에 한 번도 안 찍혔을까요? ‘찍히는 사람’만 늘 사진에 찍혔을까요?


  사진을 보면 ‘사진을 찍는(찍은) 사람’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진에는 ‘사진을 찍는(찍은) 사람’ 마음이 드러납니다. 사진 한 장은 ‘사진을 찍는(찍은) 사람 얼굴이요 모습이자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 한 장에 ‘사진을 찍는(찍은) 사람 겉모습과 차림새’가 담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진에는 이 사진을 찍는(찍은) 사람이 어떤 숨결이고 생각이며 마음인가 하는 대목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리하여, 어디 나들이를 가서 여럿이 사진을 찍을 적에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은 이녁이 사진에 함께 찍히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하거나 쓸쓸하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은 모든 사진에 이녁 숨결과 손길과 마음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녁이 찍은 사진에 드러나는 모습을 보면서 ‘이때에는 무엇을 했고, 어디에 있었으며, 언제였는가를 모두 압니다. 사진에 나오지 않은 다른 사람들 모습과 몸짓과 이야기까지 떠올립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 한 장을 찍으면서 ‘사진 한 장’에 갈무리하는 모습뿐 아니라 둘레 모습과 이야기와 삶을 함께 마음으로 담습니다.


  내가 나를 볼 적에 사진을 찍습니다. 내가 어떤 마음인가 하고 가만히 바라볼 수 있을 때에 사진을 찍습니다. 여럿이 함께 나들이를 가서 기쁘고 설렌다면, 기쁨과 설렘이 사진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혼자서 어느 마을을 찾아가서 천천히 걷거나 자전거를 달리면서 둘러보면서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을 느낀다면, 혼자 다니며 찍은 모든 사진에 아름다운 빛과 멋스러운 꿈이 드러납니다.


  내가 나를 보지 않는다면 사진기를 손에 못 쥡니다. 내가 나를 보지 않으면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아무 이야기가 없이 밍밍하거나 따분한 사진이 태어납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4348.2.2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 찍는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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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기를 두려워 말아요 - 미술 치료사 정은혜의 공감 노트
정은혜 지음 / 샨티 / 201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읽기 삶읽기 180



즐거움과 두려움은 늘 함께

― 행복하기를 두려워 말아요

 정은혜 글

 샨티 펴냄, 2015.1.30.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내 팔과 다리가 거꾸로 섭니다. 그런데, 물구나무를 서서 가만히 있다 보면, 거꾸로 서는 모습이란 무엇인가 하고 다시금 돌아보곤 합니다. 거꾸로란 무엇일까요. 어떤 모습이 거꾸로일까요. 두 다리로 땅을 디디면 ‘바로’이고, 두 팔로 땅을 디디면 ‘거꾸로’일까요. 동그란 모습인 지구별에서 북녘과 남녘은 서로 어떤 자리가 되고, 어느 쪽이 ‘바로’이고 어느 곳이 ‘거꾸로’일까요. 지구별 바깥쪽과 안쪽은 서로 어떤 터전일까요.


  몸이 무거울 적에는 물구나무를 서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무겁다면, 몇 킬로그램쯤 되어야 무거운 셈일까 궁금합니다. 무겁다와 가볍다를 가를 만한 잣대나 틀이 있을까요. 키가 몇 센티미터에 몸무게가 몇 킬로그램이면 무겁거나 가벼울까요.


  힘이 있으면 물구나무서기를 잘 할는지 궁금합니다. 힘이 없으면 물구나무서기를 못 할는지 궁금합니다. 힘이 있거나 없다는 잣대는 어떤 크기로 따질 만한지 궁금합니다. 어느 만큼 힘이 있으면 힘이 ‘있’거나 ‘없’어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거나 ‘못 할’까요.



.. 이러한 일들을 계속 겪으니 짜증이 났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자 이것이 왜 그 사람들 잘못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 없고 가족 없고 소외당하고 무시당하고 정신병이 있어서 사회의 언저리에서 멍하게 삶을 보내는 그들이 그렇게나마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아닌가? 하는 일 없이 하루 종일 미국의 쓰레기 같은 낮 텔레비전 방송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홍콩 무술 영화 비디오를 보고 또 보는 이들이 이렇게라도 나에게 관심을 갖는 것 아닌가 … ‘당신은 참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이 말을 열심히 텔레파시로 보내니 그것을 받았는지 어쨌는지 그녀의 입술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다. 내가 따라서 살짝 웃으니 그녀도 살짝 웃는다 ..  (31, 50쪽)



  밥을 잘 짓는 길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잘 지으면 됩니다. 밥을 못 짓는 길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못 지으면 됩니다. 잘 지으려고 하면 잘 지을 수 있지만, 못 지으려고 하면 못 지을 수 있습니다. 불을 살짝 잘못 맞추어도 밥을 못 짓고, 물을 살짝 잘못 맞추어도 밥을 못 짓습니다. 다 그렇습니다. 국을 끓일 적에도 이와 같아요. 간을 살짝 잘못 맞추어도 국맛이 떨어지고, 간을 살짝 잘 맞추어도 국맛이 나아져요.


  그러니까, 언제나 내 마음에 따라서 달라지는 삶이라고 느낍니다. 내 마음이 너그럽다면, 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 너그럽습니다. 내 마음이 괴롭거나 고단하다면, 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 괴롭거나 고단합니다. 내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하다면, 내가 하는 말은 언제나 사랑으로 가득해요. 내 마음이 미움이나 시샘으로 넘친다면, 내 입에서 흐르는 말은 으레 미움이나 시샘이기 마련입니다.



.. 정상인이든 정신병자이든 “당신은 미쳤소. 그러니 당신 이야기도 다 미친 거요.”라고 하면 대화할 여지가 없어진다 … 그들의 작품을 보면 우리가 그들을 정신병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정신병과 동일시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곤 한다 … 실제로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감정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어 어렸을 때부터 엄하고 호된 행동 요법을 치료라는 이름으로 받아 온, 그래서 마치 사육당하다시피 살았다며 그러한 치료를 거부하는 자폐운동가의 말이 생각난다 ..  (67, 83, 130쪽)



  정은혜 님이 쓴 《행복하기를 두려워 말아요》(샨티,2015)를 읽습니다. 정은혜 님은 ‘미술 치료사’로 일한 이녁 삶을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이 책은 ‘미술 치료’란 무엇이고, ‘미술 치료’를 어떻게 했는가를 밝힌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미술 치료는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미술 치료이면 어떻게 마술 치료이면 어떠하겠습니까. 글쓰기 치료도 사진찍기 치료면 또 어떠하겠어요. ‘무엇’으로 ‘치료’를 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대수롭게 돌아볼 대목은, ‘무엇’을 다루어서 ‘어떤 일’을 하든,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이 되어 어떤 삶을 짓느냐에 있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삶을 일구면 삶이 즐겁습니다. 스스로 고단하게 삶을 돌보면 삶이 고단합니다. 스스로 웃음으로 삶을 엮으면 삶에 웃음이 가득하고, 스스로 눈물로 삶을 쥐어짜면 삶에 눈물만 흘러요.



.. 중심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손에 꼽힐 정도의 몇 가지 주제의 변주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 제일 어려웠던 일은 바늘에 손가락이 찔리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꼬맹이 남자애들에게 바느질은 여자만 하는 게 아니라 멋있는 남자도 하는 것이라고 꾀는 일이었다 … 내게 선물로 주어진 간결한 음식을 앞에 놓고, 그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이 나무 그릇이 어디서 왔는지, 이 음식을 키운 땅이 어떻게 왔는지 등을 생각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177, 199, 232쪽)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듣습니다. 귀가 있으니 소리를 듣지요. 눈을 크게 뜨고 온갖 모습을 봅니다. 눈이 있으니 온갖 모습을 보아요. 그러면, 우리는 또 무엇을 할까요? 살갗이 있어서 서로 만지거나 쓰다듬거나 얼싸안습니다. 머리가 있어서 생각을 합니다. 마음이 있으니 사랑을 길어올립니다.


  곰곰이 보면, 우리는 우리한테 있는 모든 것을 골고루 써서 삶을 아름답게 누릴 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돈을 다루어 삶을 누릴 테지요? 그런데, 돈은 있되 사랑이 없다면? 이때에는 돈은 넘쳐도 사랑이 메말라서 삶이 썩 아름답지 않습니다. 거꾸로, 사랑은 가득하되 돈이 없으면?


  사랑은 가득하면서 돈이 없을 적에도 삶이 메마를까 궁금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이때에도 삶이 메마르리라 여길 수 있으나, 정작 ‘사랑 가득 돈 없는’ 사람들을 보면, 삶이 메마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밥은 돈이 있어야 먹지 않거든요. 손수 흙을 일구어도 밥을 먹어요. 손수 집을 지어서 살림을 하지요.



.. 밖에 나가는 시간이 아주 적고, 나가도 단체로 우르르 가거나 운동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이렇게 남몰래 꽃 한 송이를 옮겨 심고 돌보고 있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다 … 다른 날은 비가 내렸는데, 숲에 누워서 빗방울 하나가 높은 나무 꼭대기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까지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비가 오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마냥 신비로웠고, 그 신비로운 경험에 눈물이 났다 … 대다수의 미술 치료사들도 자신을 위한 치유적이고 창조적인 작업을 할 시간과 여유가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 사람들은 치료사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친구가 없어서 불행하다 ..  (247, 255, 278, 314쪽)



  있어야 할 것이 있을 때에 삶이 아름답습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에 삶이 고단합니다. 우리한테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 하고 생각할 노릇입니다. 우리가 먼저 갖추면서 다스릴 대목은 무엇인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길에서 무엇을 즐겁게 먼저 해야 할까 하고 헤아릴 노릇입니다.


  즐거움과 두려움은 늘 함께 있습니다. 두 가지 느낌은 모두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멀리 떨어진 데에 있는 두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똑같은 일을 놓고도 어느 때에는 즐겁고 어느 때에는 두렵습니다. 이 대목을 슬기롭게 읽어야 합니다. 똑같은 일을 마주하고도 어느 때에는 왜 즐겁고 어느 때에는 왜 두려운지 또렷하게 헤아려서 알아야 합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제대로 느끼지 못하며, 제대로 알지 못할 때에는, 우리 삶은 늘 즐거움과 두려움이 엇갈리고 맙니다.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즐거움이기에 더 좋고 두려움이기에 더 나쁘지 않은 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즐거움과 두려움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으면, 내 삶을 슬기롭게 헤아리면서 온통 사랑으로 넘실거리는 노래를 부르면서 웃는 하루를 엽니다. 4348.2.2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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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404) -께로 1


먼저 하나님께로 가세요. 제가 뒤따라갈게요

《박정희-나의 수채화 인생》(미다스북스,2005) 6쪽


 하나님께로 가세요

→ 하느님께 가세요

→ 하느님한테 가세요

→ 하느님에게 가세요

→ 하느님 있는 곳으로 가세요

→ 하느님 계신 곳으로 가세요

 …



  한국말에는 ‘-께 + -로’라는 토씨는 없습니다. ‘-께’면 ‘-께’이고, ‘-로’면 ‘-로’일 뿐입니다. ‘-한테/-에게’를 높이려는 뜻이라면 ‘-께’를 붙여서 “하느님께 가세요”처럼 쓰면 됩니다. 그런데, 높이는 자리에 ‘-께’를 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으레 ‘-한테’를 널리 씁니다. 아이한테 “할아버지한테 가 보렴”처럼 흔히 말하지, “할아버지께 가 보렴”처럼 잘 말하지 않습니다. 높이려고 한다면 ‘-께’를 붙여야 맞으나 “할머니한테 드리렴”처럼 흔히 말해요.


  아이와 할아버지 할머니를 놓고 본다면, 아이로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높여야 맞고, 아버지와 어머니 자리에 있는 사람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높여야 맞습니다. 그렇지만, 서로 살가운 흐름으로 이야기를 나누려는 뜻으로 굳이 ‘-께’를 안 쓰고, 부드럽게 수수한 말씨로 ‘-한테’를 붙이기 마련입니다.


  종교에서는 ‘거룩한 하느님’을 섬기면서 ‘-한테/-에게’는 거의 안 쓰고 으레 ‘-께’만 씁니다. 그러면, 이 토씨 ‘-께’를 알맞게 쓰면 됩니다. ‘-께로’처럼 엉뚱한 토씨를 억지로 꾸며서 쓰지 않아도 됩니다. 4338.4.18.달/4348.2.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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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느님한테 가세요. 제가 뒤따라갈게요


한국에서는 개신교를 믿는 분들이 ‘하나님’처럼 적습니다만, ‘하느님’으로 적어야 올바릅니다. 천주교를 믿기에 ‘하느님’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나 똑같이 ‘하느님’일 뿐이고, 종교가 아닌 곳에서도 ‘하느님’입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682) -께로 2


당신이 제 아들을 당신께로 불러 가셨음을, 조국이 아들을 가져가는 대신에 제 사랑하는 아이를 받아들였음을

《야누쉬 코르착-홀로 하나님과 함께》(내일을여는책,2001) 48쪽


 당신께로 불러 가셨음을

→ 당신한테 불러 가셨음을

→ 하느님 곁으로 데려가셨음을

→ 하느님 계신 곳으로 데려가셨음을

 …



  이 보기글에서는 “당신께로”를 “당신께”로 바로잡으면 됩니다. ‘-께로’로 적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께로’라는 토씨가 나타난 까닭은 일본말 때문입니다. 일본 말투가 얼결에 한국말로 스며들면서 이런 말투가 생겼습니다. 한국이 일본한테 식민지살이를 해야 한 탓에 생긴 얄궂은 말투 가운데 하나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께로 → -께/-한테’처럼 손질하고 나서 어딘가 아리송합니다. 말투가 좀 엉성합니다. “당신한테 불러 가셨음을”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제 아들을 하느님한테 불러서 가셨음을”이라고 하니 높임말 자리가 바뀌었습니다. “하느님이 제 아들을 하느님한테 부르셔서 갔음을”이 되어야 할 테지요. 그런데, 이렇게 높임말 자리를 바꾸어도 어쩐지 안 어울립니다. “부르셔서 갔음을”이든 “불러서 가셨음을”이든 맞갖지 않아요. 이 대목을 더 손질해서 “하느님한테 데려가셨음을”처럼 적어야지 싶습니다. 4340.1.12.쇠/4348.2.25.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하느님이 제 아들을 하느님한테 데려가셨음을, 나라가 아들을 가져가려 할 때 제 사랑하는 아이를 받아들였음을


‘당신(當身)’이라는 한자말을 그대로 쓸 수도 있으나, 이러한 말을 쓴 지 얼마 안 됩니다. 한겨레는 예부터 ‘이녁’이나 ‘그대’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녁’이나 ‘그대’로 손질하거나, 이 보기글에서는 ‘하느님’으로 손질합니다. ‘조국(祖國)’은 ‘나라’로 손보고, “아들을 가져가는 대신(代身)에”는 “아들을 가져가려 할 때에”로 손봅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나라(정부)’에서 전쟁을 일으켜 아들을 군대로 끌어가려 하는 모습을 가리키니, ‘할 때에’로 손보아야지 싶습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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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699) 저희 


저는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에 있는 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입니다. 저희 학교는 흙 냄새, 나무 냄새,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시골 학교입니다

《이경수-가슴으로 크는 아이들》(푸르메,2006) 머리말


 저희 학교는

→ 양곡고등학교는

→ 우리 학교는

→ 이 학교는

→ 이곳은

 …



  “저희 나라”나 “저희 회사”처럼 쓰면 잘못이라고 흔히 이야기합니다. 그럴 테지요. “우리 형”이나 “우리 어머니”이지 “저희 형”이나 “저희 어머니”가 아니니까요. 낮춤말로 쓰는 ‘저희’를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를 아우르는 대이름씨” ‘우리’와 헷갈리는 셈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헷갈릴까요. 왜 이렇게 잘못 쓸까요. 어릴 적부터 한국말을 제대로 못 배운 탓일 테고, 집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한국말을 올바로 익히지 못한 탓입니다. 오늘날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엉뚱하게 쓰면서 어느 누구도 제대로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틀린 말을 엉뚱하게 쓰더라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요. 이렇게 고쳐야지요.’ 하고 일러 줄 어른이 없기도 하고, 애써 일러 주어도 틀린 말버릇을 바로잡지 않은 탓입니다.


 ‘우리’의 낮춤말

→ ‘우리’를 낮춘 말

→ ‘우리’를 낮추어 쓰는 말

→ 이쪽을 낮추면서 저쪽을 높이려고 쓰는 말


  한국말사전을 찾아보면 ‘저희’를 풀이하면서 “‘우리’의 낮춤말”처럼 적습니다. 이 말풀이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의’를 넣는 말풀이보다 틀렸지요. 적어도 “‘우리’를 낮춘 말”로는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학교이름을 밝혀 주면 됩니다. “우리 학교”로 고쳐도 좋고 “이 학교”라고만 해도 됩니다. 보기글 끝에 “시골 학교입니다”라 말하니 “이곳은”이라고 해도 돼요.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왜 이렇게 잘못 쓸까요. 이렇게 잘못 쓴 말을 글쓴이가 몰랐다 해도, 이 글을 책으로 펴내는 사람은 왜 못 잡아챘을까요. 잡아챘어도 바로잡지 않을 수 있는데, 그렇다면 왜 바로잡지 않았을까요.


  부끄러운 줄 모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한국말을 깊거나 넓게 헤아리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에서 엮은 《표준국어대사전》 말풀이와 보기글도 얄궂습니다. 다른 한국말사전에서는 ‘저희’를 ‘우리 3’ 낮춤말로 다루지 않으나, 국립국어원에서는 ‘저희’를 ‘우리 3’ 낮춤말로 다룹니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한국말사전에서 ‘우리 3’을 보면 다음 같은 보기글이 나옵니다.


 우리 엄마 / 우리 마누라 / 우리 신랑 / 우리 아기

 우리 동네 / 우리 학교 교정은 넓지는 않지만 깨끗하다


  “저희 엄마”나 “저희 마누라”로 쓸 수 없습니다. “저희 신랑”이나 “저희 아기”라고 쓸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낮출 수는 있으나, 내가 다른 사람을 낮출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동네”와 “저희 학교”처럼 쓰는 말투는 모두 틀립니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 말풀이는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를 낮추어서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희 엄마

→ 제 어머니

→ 저를 낳은 어머니

 우리 아기

→ 제 아기

→ 제가 낳은 아기

 저희 학교

→ 제가 일하는 학교

→ 제가 다니는 학교

 저희 마을

→ 제가 사는 마을

→ 제가 사랑하는 마을


  ‘나’를 낮추려면 ‘저’를 쓸 노릇입니다. 어른 앞에서 ‘나’와 ‘언니(또는 누나나 형)’를 아울러서 낮추려 할 적에는 ‘저희’나 ‘저희들’처럼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저희 형”이나 “저희 언니”가 아닙니다. “제 형”이나 “제 언니”라고 해야 올바릅니다. ‘저희’를 쓰려면 “저희가 했어요”나 “저희들이 할게요”처럼 씁니다. 다만, 이런 ‘저희/저희들’은 형이나 언니 자리에 있는 사람이 쓰고, 동생이 말한다면 ‘우리’라고 쓰면 됩니다. 4340.2.11.해/4348.2.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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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에 있는 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입니다. 우리 학교는 흙 냄새, 나무 냄새,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시골 학교입니다


이 보기글을 보면 “양촌면의 양곡고등학교의 역사 교사”처럼 쓰지 않고 “양촌면에 있는 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처럼 알맞게 잘 적습니다.



저희

1. ‘우리 2’의 낮춤말

   - 저희를 살려 주는 셈 치고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 

     저희 때문에 선배님이 고생하시는군요

2. ‘우리 3’의 낮춤말

   - 저희 회사에서 이번에 새로 개발한 신제품입니다 /

     언제라도 저희 집에 들러 주십시오

3. 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나 나온 바 있는 사람들을 도로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

   - 아들 내외가 사정을 하러 찾아 왔지만 저희가 뭐라 해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아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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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배움자리 12. 학교나무 심자



  ‘우리 집 학교’를 이루는 올해에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할까 하고 생각하니, 저절로 나온 ‘내 생각’은 ‘우리 학교 나무를 심자’이다. 그러면 어떤 나무를 심지? 여러 날과 여러 주에 걸쳐서 곰곰이 생각을 했으나 딱히 어떤 나무가 어울릴는지 수가 나오지 않았다. 이러구러 이월 끝머리가 되는데, 설을 앞두고 우리 마을에서는 마을 어귀에 있던 나무를 몇 그루 뽑고는 이 자리에 정자를 박았다. 군청에서 ‘완성형 나무 정자’를 짜맞추어서 마을 어귀에 박으면서, 이 자리에서 퍽 오래 자라면서 꽃을 베풀던 나무를 뽑았다. 뽑은 나무는 다른 곳에 옮겨심으려나 했더니 마을에서 아무도 안 옮겨심을 뿐 아니라 마을 어르신이 쓰레기를 태우는 자리에 그냥 버렸다. 깜짝 놀랐다. 제법 큰 나무였는데 그냥 버리다니. 이 나무를 다시 심으면 살아날 수 있을까? 그제 비가 와서 나무뿌리를 적셔 주었고, 어제는 우체국에 다녀오느라 바빴기에 오늘 아침에 수레를 끌고 나무를 실어서 우리 ‘도서관+학교’로 실어 간다. 어른 혼자 들 수는 있으나 짊어지고 나를 수는 없다. ‘도서관+학교’로 들어가는 문 앞쪽 빈터에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옮겨심기로 한다. 뿌리가 제법 넓게 퍼졌기에, 옮겨심을 구덩이를 파느라 한 시간 즈음 걸린다. 혼자서 삽으로 파니까. 나무를 천천히 들어서 자리를 잡고, 흙을 덮고 북돋운다. 다시 한 시간 즈음 들여 나무를 살핀다. 우리 학교 나무가 처음으로 선다. 이 나무가 이곳에서 새 숨결을 얻어서 씩씩하게 자라 아름답고 짙푸른 그늘과 꽃내음과 잎내음을 베풀어 주기를 빈다. 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집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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