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푸공의 아야 2
마르그리트 아부에 지음, 이충민 옮김, 클레망 우브르리 그림 / 세미콜론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할 일이 없을 때에 사람들은

― 요푸공의 아야 2

 마르그리트 아부에 글

 클레망 우브르리 그림

 세미콜론 펴냄, 2011.2.18.



  할 일이 없을 때에, 사람들은 참말 할 일이 없어서 무엇이라도 하려고 합니다. 그 일이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나쁜지 아름다운지 안 아름다운지 따지지 않습니다. 너무 따분하고 재미없고 심심한 나머지 어떤 일이라도 하려고 합니다.


  할 일이 있을 때에, 사람들은 참말 할 일이 있어서 아무 일이나 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제 할 일을 합니다. 아주 마땅하지요. 스스로 즐겁게 할 일이 있는데 왜 아무 일이나 건드릴까요.


  ‘할 일’이란 ‘직업’이 아닙니다. ‘할 일’이란 ‘돈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할 일’이란 스스로 삶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기쁘게 짓는 일입니다. ‘할 일’은 언제나 새롭게 마주하면서 웃음과 노래로 누리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 “자네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시골의 친척들을 잊지 않고. 마을을 떠나면 마음도 떠나는 게 보통인데 말이야. 자네와 가족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비네.” “감사합니다, 아저씨. 속담에도 있잖아요. 파리는 아무리 급해도 똥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법이죠!” (12쪽)

- “아주아, 누가 보비의 진짜 아버지인지 그냥 실토해. 간단하잖아.” “그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아주아, 넌 인생을 뭐 하러 그렇게 복잡하게 살아?” “빈투, 네 일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아주아, 빈투 말이 맞아. 보비는 지나가다 자꾸 들르는 그 사람 닮았잖아.” “아야, 돌려 말할 것 없어. 그냥 마마두라고 해.” (19쪽)





  마르그리트 아우에 님이 글을 쓰고, 클레망 우브르리 님이 그림을 그린 《요푸공의 아야》(세미콜론,2011)라는 만화책 둘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코트디브아르라는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 이야기가 흐르는 만화라고 해서 가만히 눈여겨봅니다. 그런데 이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들 ‘할 일’이 없습니다. 커다란 회사를 꾸리는 사람이든, 커다란 회사에서 어느 지사장을 맡는 사람이든, 그저 빈둥거리는 사람이든,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는 사람이든, 길거리에서 먹을거리를 구워서 장사하는 사람이든, 참말 다들 ‘할 일’이 없습니다. 이러면서 ‘돈’을 바라고 ‘놀이’를 바랍니다. ‘새로운 일’이 아니라 ‘뭔가 짜릿한 어떤 일’을 바랍니다.



- “얘는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우는 거야?” “배고파서 그래. 불쌍한 것. 업어 줘야겠다. 근데 넌 어디 가는데?” “나 파리지앵이랑 약속 있어.” “빈투! 그 남자는 또 어디서 만났어?” (35쪽)

- “너 좀 맘에 든다?” “귀찮게 좀 하지 마. 요푸공 남자들은 왜 하나같이 이렇게 야만적이야?” “뭐? 왜 사람을 무시하는 건데?” “야, 나는 이런 동네 남자들과는 볼일 없어. 나는 파리에서 온 것들만 상대한단 말이야.” “아, 그래? 그래서 뭐, 파리에서 온 차라도 있다는 거냐?” “넌 귀가 먹었냐? 애인이 파리에서 왔다고. 날 파리로 데려가서 같이 살 거라고! 그러니 넌 그냥 찌그러져 있어!” “음, 파리만 상대한다, 사람한텐 찌그러져라. 무서운 여자네.” (65쪽)




  코트디브아르라는 나라는 언제부터 이런 모습이었을까요? 프랑스라는 나라가 없을 적에도 이런 모습이었을까요? 서양사람이 전쟁무기를 앞세워서 문명이라는 허울을 붙인 온갖 종교와 교육을 들이밀 적부터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요?


  손수 밥을 지어서 먹는 사람한테는 늘 ‘할 일’이 있습니다. 손수 밥을 짓는 사람은 손수 옷을 짓고, 손수 옷을 짓는 사람은 손수 집을 짓습니다. 이리하여 밥과 옷과 집을 손수 짓는 사람은 언제나 삶을 손수 짓습니다.


  ‘할 일’은 남이 나한테 주지 않습니다. 나는 남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삶을 가꿀 만한 일을 스스로 찾습니다. 나는 내 숨결을 아끼면서 사랑으로 밝힐 일을 스스로 일굽니다.


  어느 만큼 나이가 찬 가시내랑 사내가 살을 섞어야 재미있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살을 섞고 저기에서 살을 섞을 때에 재미나지 않습니다. 남이 차려 주는 밥을 먹어야 기쁘지 않고, 남이 갖다 바치는 옷을 입어야 신나지 않아요.



- “여자애가 그렇게 데리고 다니기 부끄러운 애야? 오빠는 어떻게 여자를 한 번도 집에 안 데려와?” “양파 썩는 거나 신경 쓰고 나는 좀 내버려둬.” “걱정 마. 보비와 나는 어떻게든 헤쳐나갈 테니까. 보비가 있는 게 다행인 줄 알아. 아이 앞이라 욕 안 하고 참는 거라고. 얘가 얼마나 순진한지 알아? 들쥐처럼 남들 눈을 피해 다니는 놈들하고는 다르다고!” “아주아,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 쥐새끼가 썩으면 냄새가 진동하게 될걸!” (98쪽)





  스스로 ‘할 일’이 없으니 제자리를 잃고 떠돕니다. 떠도는 사람들은 제 할 말을 잊거나 잃습니다. 제 할 말을 잊거나 잃기에 거치거나 쓸쓸한 말이 튀어나옵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아끼지 못하기에, 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한테 따사롭게 말을 건네지 못합니다.


  지구별에서 어느 나라가 아름다운 삶을 누릴까 궁금합니다. 번쩍거리는 자가용을 몰고, 번쩍거리는 넓은 시멘트 아파트에서 살면 아름다울까요? 온갖 전쟁무기를 갖춘 엄청난 군대가 나라를 지켜 주는 곳에서 살면 평화로울까요? 국민투표로 뽑힌 정치 일꾼이 모든 법을 이녁 마음대로 지어서 온갖 세금을 주무르면서 경제개발을 하고 스포츠와 영화를 키우면 재미있을까요?


  사랑이 사랑을 낳습니다. 꿈이 꿈을 낳습니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사랑이 흐르지 않습니다. 꿈이 없는 곳에서는 꿈이 흐르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없는 곳에서는 이야기가 흐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알록달록 눈부신 옷을 차려입더라도, 마음에 사랑이나 꿈이 없으면 아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겉치레로 번드레레하고 꾸미는 말은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삶을 가꾸지 않으면서 입만 놀리는 말로는 아무런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이 살을 섞으니 ‘바람둥이’가 되고, 서로 바람둥이로 하루를 지새우니 아름다운 노래가 없습니다. 만화책 《요푸공의 아야》는 현대문명과 물질문명과 도시문명이 치닫는 막다른 벼랑을 낱낱이 보여주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4348.2.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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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 (리 호이나키) 달팽이 펴냄, 2010.7.16.



  에스파냐를 찾아가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을 걷는 사람이 퍽 많다. 유럽에서도 많고 한국에서도 많다. 이들은 그 길을 걸으면서 무엇을 보고 느끼면서 생각할까. 에스파냐로 가는 이들을 볼 때면 으레 속으로 묻는다. 이녁이 사는 마을 둘레를 하루쯤 걸어 보았느냐 하고. 이녁이 사는 마을에서 서울까지 걸어 보았느냐 하고. 서울부터 해남이든 부산이든 강진이든 남해이든 고흥이든 통영이든 여수이든 …… 이렇게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레나 열흘이나 스무 날 즈음 걸어 보았느냐 하고.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에스파냐처럼 ‘삶을 돌아보도록 이끄는 길’이 없다고 할 만하다. 지자체와 정부에서 관광객을 끌어모으려고 마련하는 길은 수없이 생기지만, 막상 ‘삶길’은 없다. 한국에서는 모든 길이 고속도로요 ‘고속화도로’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고속도로와 고속화도로 때문에 ‘시골길’이 생긴다. ‘옛 국도’가 시골길이 된다. 1번 국도나 2번 국도가 아닌 ‘세 자릿수’나 ‘네 자릿수’ 시골길을 걷는 마음이 될 수 있다면, 지도책에 안 나오는 길을 걷는 마음이 될 수 있으면,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누릴 만하리라 본다. 따로 어떤 길을 골라서 걸어도 좋으나, 여느 때에 늘 길을 걸으면서 삶을 되새기고 내 모습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으면, 우리 하루는 언제 어디에서나 거룩하며 아름다운 삶길이 된다고 느낀다. 리 호이나키 님이 쓴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을 읽는데, 텔레비전이 어떤 것인지 일찍부터 알아챘다고 하는 이녁 마음결이 여러모로 내 눈길을 끈다. 재미있다. 4348.2.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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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 리 호이나키의 카미노 순례기
리 호이나키 지음, 김병순 옮김 / 달팽이 / 2010년 7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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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온의 숨어 있는 방 (황선미) 창비 펴냄, 2006.9.7.



  ‘라온’은 잊혀진 한국말 가운데 하나로, ‘즐거운’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이 낱말은 머리소리를 바꾸는 흐름하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라온’으로 쓴다. 오늘날에는 ‘랍다’라는 그림씨로 한국말사전에서 다루는데, ‘나온’처럼 쓰는 일은 없는 줄 안다. 아무튼, 《나온의 숨어 있는 방》이라는 어린이문학에서는 ‘나온’과 ‘라온’으로 이름을 나누어 쓰는 ‘쌍둥이 이야기’가 흐른다. 똑같은 말을 둘로 갈라서 쓰는데, 한쪽은 삶이고 한쪽은 죽음이다. 한쪽은 빛이 가득한 사랑이고, 한쪽은 어둠으로 가득한 굴레이다. 삶을 누리면서 이 땅에 있기에 언제나 사랑일까? 죽으면서 이 땅을 떠났기에 늘 굴레일까? 어쩌면 이 지구별에서 사는 사람들은 ‘살았으나 산 목숨이 아닌’ 하루를 보내지는 않을까? 이 지구별에서 태어나 사는 수많은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제대로 사랑을 못 받고, 학교교육에 휘둘리며, 꿈을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시름시름 앓지는 않는가? 아이들을 아끼는 몸짓은 무엇인가? 어버이는 어떻게 해야 이녁 아이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아이들 몸과 마음을 아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 실마리를 품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 싶은 아이들 이야기가 《나온의 숨어 있는 방》에서 흐른다. 4348.2.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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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온의 숨어 있는 방
황선미 지음, 김윤주 그림 / 창비 / 2006년 9월
10,800원 → 9,720원(10%할인) / 마일리지 54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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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날 마무리 (사진책도서관 2015.2.22.)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



  설날이 지나간다. 올해 설날은 목요일에 걸리니 설날이 깃든 이레 동안 ‘설놀이’라 할 만큼 느긋하면서 조용하다. 다만, 시골마을에서는 ‘도시로 떠나서 지내는 아이들(어른이 된 아이들)’이 모처럼 시골을 찾아오는 때이고, 이런 때에는 마을을 청소하느니 무엇을 하느니 부산하다. 참말 올해에도 명절을 앞두고 마을마다 논둑과 밭둑을 태우고 쓰레기를 태우며 이것저것 한다면서 여러 날 매캐하고 고단했다. 그나마 겨울이었으니 이쯤에서 그친다. 여름이나 가을이라면 곳곳에서 농약을 치느라 농약내음까지 마셔야 한다. 이는 모두 새마을운동 탓이라고도 할 만하다. 왜냐하면, 새마을운동이 휘몰아치면서 시골사람은 도시 공장노동자로 떠나야 했고, 모처럼 명절을 맞아서 시골로 돌아오는 ‘공장노동자’를 반기자면서 ‘깨끗한 시골’을 보여주도록 ‘새마을 지도자’가 다그쳤다. 그런데, ‘깨끗함’이란 무엇인가? 풀이 없고 나뭇가지를 벌거숭이처럼 치면 깨끗할까? 자동차가 드나들기 좋도록 길을 닦아야 깨끗할까?


  올해 설에 아이들과 함께 내 아버지(아이들 할아버지)한테 다녀오면서, 여덟 살 큰아이는 ‘제도권학교’에 안 보내는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여덟 살 큰아이가 ‘제도권학교에 들어가는 나이’가 된 일을 아주 기뻐하고 반기면서 큰아이 새 겉옷과 가방과 신주머니까지 선물해 주고 싶어서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할아버지를 마주하니, ‘우리 집 큰아이는 우리 도서관을 학교로 고쳐서 이곳에서 함께 가르치고 배우기로 했어요’ 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고흥집으로 돌아가면 천천히 손으로 편지를 써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설놀이가 끝나는 일요일에 순천에서 손님이 찾아온다. 도서관 지킴이로 계신 이웃님이다. 고흥은 이월 끝자락에도 포근한 날씨이지만, 우리 도서관에서는 손님 대접을 아직 마땅히 하지 못한다. 그래도 즐거이 찾아와 주시는 손님과 이웃님이 더없이 고맙다. 책 하나를 바라보고, 시골에 뿌리내리는 사진책도서관을 헤아리며, 시골지기로 사는 네 식구를 얼싸안으려는 손님과 이웃님이 가없이 반갑다.


  아이들과 도서관으로 간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세 갈래이다. 하나는 옆길, 하나는 앞길, 하나는 뒷길, 이렇게 셋이다. 그동안 으레 옆길로 다녔으나, 이제 뒷길로도 다니기로 한다. 이 뒷길로 마을 할배나 할매가 곧잘 다니시는지, 짚이 반듯하게 누웠다. 빙 돌아서 다니기보다 학교를 가로질러 뒷길로 다니면 논을 오가기에 훨씬 수월하시겠지.


  학교 건물을 빙 둘러보다가, 본관 뒤쪽에 있는 후박나무를 새롭게 마주한다. 그동안 잘 몰랐는데, 본관 뒤쪽 후박나무는 줄기가 매우 굵다. 그런데 줄기 위쪽이 잘렸다. 언제 잘렸을까? 언제 누가 잘랐을까? 키가 자라지 못하게 저렇게 자른 때는 언제인가? 이 후박나무가 줄기를 뎅겅 잘리지 않고 곧게 섰다면 이 후박나무는 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멋스럽고 아름다웠겠다고 느낀다. 고흥 이곳저곳 다녀 보았을 때 이렇게 줄기가 굵은 후박나무를 보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이만큼 굵은 후박나무는 고흥에 더 없을는지 모른다.


  참으로 안타깝다. 아니, 아프다. 그러나, 이 후박나무는 이 굵은 줄기를 뎅겅 잘렸어도 씩씩하게 살아났고, 오늘까지 짙푸른 잎사귀를 베푼다. 나무란 참으로 놀랍도록 아름답다. 나무란 그지없이 사랑스러우면서 야무지다. 나무가 우거져서 이루는 숲은 언제나 사람들한테 푸른 숨결을 나누어 주면서, 사람도 얼마든지 씩씩하고 아름다우면서 푸른 넋이라고 알려준다고 느낀다.


  나무처럼 살 적에 나무 같은 마음이다. 바람처럼 살 적에 바람 같은 숨결이다. 꽃처럼 살 적에 꽃 같은 노래이다. 해님처럼 살 적에 해님 같은 가슴이다. 사람은 나무와 바람과 꽃과 해님을 모두 품에 안으면서, 스스로 곧게 서는 슬기로운 목숨이다. ㅎㄲㅅㄱ



* 도서관 나들이 오시려면 먼저 전화하고 찾아와 주셔요 *

*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을 씩씩하게 잇도록 사랑스러운 손길을 보태 주셔요 *

☞ 어떻게 지킴이가 되는가 : 1평 지킴이나 평생 지킴이 되기

 - 1평 지킴이가 되려면 : 다달이 1만 원씩 돕거나, 해마다 10만 원씩 돕는다

 - 2평 지킴이가 되려면 : 다달이 2만 원씩 돕거나, 해마다 20만 원씩 돕는다

 - 평생 지킴이가 되려면 : 한꺼번에 200만 원을 돕거나, 더 크게 돕는다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도서관 지킴이가 되신 분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0.5341.7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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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87] 딛고 밟는 땅

― 보금자리와 집과 삶터



  내가 딛는 곳이 내 삶터입니다. 내가 두 다리로 딛는 곳이 내 보금자리가 됩니다. 내가 즐겁게 딛는 곳을 내 집으로 삼고, 내가 가장 오랫동안 두 다리로 딛고 서서 움직이는 자리에서 삶이 피어납니다.


  사람들이 도시에서 가장 많이 몰려서 사는 까닭은 도시에서 하려는 일이 가장 많고, 도시에서 하고 싶은 일이 가장 많으며,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가장 많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시골에서 하려는 일이 많다면 아주 마땅히 시골에서 살 테며, 사람들이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여기면 아주 저절로 시골에서 보금자리를 찾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시골에서 삶자리나 일자리나 놀자리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첫발을 떼는 날부터 ‘도시바라기’가 됩니다. 도시사람도 도시바라기요, 시골사람도 도시바라기입니다.


  우리가 먹는 밥은 모두 시골에서 납니다. 쌀밥이든 보리밥이든 시골 논에서 거둡니다. 콩을 즐기든 나물을 즐기든 채식을 하든 육식을 하든, 돼지와 닭과 소도 모두 시골에서 기릅니다. 도시사람은 채식이나 육식을 따로 가리지만, 시골사람은 이것저것 굳이 가리지 않아요. 시골사람은 스스로 먹을 밥을 스스로 가꾸고 돌보며 아끼면서 얻습니다.


  도시사람이 채식이나 육식을 가리면서 ‘이것이 좋’거나 ‘저것이 안 좋’다고 가르는 까닭은, 손수 삶을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수 흙을 짓지 않는 삶이니 ‘좋아하는 밥’이 따로 있습니다. 손수 집을 짓지 않는 삶이기에 ‘보금자리’가 아닌 ‘부동산(재산)’을 바라봅니다.


  도시가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도시에 깃들면서 삶을 짓는 하루하고 너무 크게 동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채식을 하고 싶으면 밭을 가꾸면 됩니다. 육식을 하고 싶으면 짐승우리를 치면 됩니다. 그뿐입니다. 손수 나아가려는 길을 손수 갈고닦으면 됩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보면, 시골이든 도시이든, 모든 아이를 도시로 보내서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전문가나 학자로 키우려고만 합니다. 시골학교에서 시골아이를 시골지기로 키우지 않습니다. 도시학교에서 도시아이를 시골지기로 가르치지 않을 뿐 아니라, 도시학교에서조차 시골지기를 이웃으로 보여주지 못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뛰놀며 밟고 딛는 땅을 아이들과 함께 바라봅니다. 이 땅이 우리 보금자리입니다. 이 터가 우리 삶터입니다. 이곳이 우리 집입니다. 나는 삶을 지으려고 곁님과 아이들하고 시골에서 삽니다. 4348.2.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고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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