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부치기 (사진책도서관 2015.2.23.)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



  설이 끝나 우체국이 문을 연다. 책을 부치러 우체국에 가기로 한다. 먼저 도서관에 들른다. 네 분한테 부칠 책을 차근차근 그러모은다. 책과 함께 띄울 그림엽서는 집에서 미리 썼다. 도서관 소식지를 곁들여서 봉투에 담는다. 오늘은 아이들이 따라나서지 않아 내 자전거만 샛자전거와 수레에서 떼었다. 무척 오랜만에 내 자전거만 몰면서 도서관에 들러서 우체국으로 가는데, 참으로 가볍다. 혼자 달리는 자전거가 이렇게 가벼울 줄이야. 막바지에 이른 겨울이 그냥 떠나기 아쉽다며 바람이 제법 불지만, 혼자 달리는 자전거는 맞바람에도 거뜬하다. 오늘 같은 날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면, 이 바람에 아이들도 찬기운을 실컷 먹고, 나도 자전거를 모느라 애먹었을 테지. 그렇지만 한겨울에 자전거를 달리던 일을 떠올리면 이만 한 바람은 아무렇지 않다.


  우체국에서 네 분한테 책을 부치는 데에 만육천 원 즈음 든다. 한 사람 앞에 사천 원씩 드는 셈이다. 꽤 된 일이기는 하지만, 인터넷책방에서는 배송비를 안 받고 책을 부쳐 준다. 그러면 택배회사는 어떻게 돈을 벌까? 인터넷책방에서 해 주는 무료배송도 곰곰이 따지고 보면 ‘독자 주머니에서 배송비가 나가’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무료배송’이니 택배비가 안 나간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이 모든 값은 어딘가에 숨기 마련이다. 우리가 제대로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까, 인터넷책방에서 해 주는 ‘무료배송’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도서정가제 같은 제도도 그예 허물뿐이라고 느낀다. 처음부터 책값에 ‘인터넷책방에서 에누리할 값’에다가 ‘무료배송을 할 값’까지 슬그머니 얹는 셈 아닐까. 이렇게 해야 인터넷책방이 비로소 책장사를 할 수 있으리라. 인터넷책방에서 주는 덤(적립금)도 틀림없이 처음부터 책값에 얹히리라. ㅎㄲㅅㄱ



* 도서관 나들이 오시려면 먼저 전화하고 찾아와 주셔요 *

*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을 씩씩하게 잇도록 사랑스러운 손길을 보태 주셔요 *

☞ 어떻게 지킴이가 되는가 : 1평 지킴이나 평생 지킴이 되기

 - 1평 지킴이가 되려면 : 다달이 1만 원씩 돕거나, 해마다 10만 원씩 돕는다

 - 2평 지킴이가 되려면 : 다달이 2만 원씩 돕거나, 해마다 20만 원씩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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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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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2 휘파람·바람·파람



  예부터 한겨레는 바람을 잘 읽었습니다. 흔히 뱃사람만 바람을 잘 읽은 줄 잘못 여기는데, 뱃사람뿐 아니라 뭍사람이나 멧사람이나 들사람 누구나 바람을 잘 읽어야 합니다. 바람을 잘 읽지 못하면 씨앗을 심거나 뿌리지 못합니다. 바람을 잘 읽지 못하면 애써 빨래를 해서 옷가지나 이불을 널었다가 죄 소나기에 흠뻑 적시고 맙니다.


  바람을 읽는 사람은 구름을 읽습니다. 구름을 읽는 사람은 비를 읽고, 아침과 저녁을 읽습니다. 손목시계나 괘종시계가 있지 않아도, 바람을 읽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때를 읽습니다. 바람을 읽기에 이 지구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아차립니다.


  바람을 읽지 못하면 옛사람은 아마 모두 죽었을 테지요. 이를테면, 모든 숲짐승과 풀벌레는 바람을 매우 잘 읽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바람을 못 읽으면 ‘내 몸내음’을 바람에 실려 퍼뜨리니, 큰 짐승이나 벌레가 나를 잡아먹고 말아요. 범이나 이리나 늑대한테서 살아남으려고 할 적에도 바람을 읽어야 합니다. 예부터 숲길이나 멧길을 다닐 적에는 맞바람으로 다녔지, 등바람으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바람이란 무엇일까요? 바람은 모든 냄새를 실어 나릅니다. 바람은 모든 물기를 실어 나릅니다. 바람은 모든 숨결과 기운을 실어 나릅니다. 그래서 바람을 읽는 사람은 숨결과 기운을 읽는 사람입니다. 바람을 읽는 사람은 나한테 밥이 될 것을 읽을 뿐 아니라, 내 둘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차립니다. 버섯도감을 펼쳐야 ‘먹는버섯’인지 아닌지 알아채지 않습니다. 바람을 읽을 적에, 코와 온몸으로 버섯 기운을 느껴서 ‘먹는버섯’인지 아닌지 알아챕니다.


  어떤 목숨이든 바람을 마실 적에 숨결을 잇습니다. 바람을 목으로 넘겨야 숨이 살지요. 들과 숲에서 흐르던 바람은 내가 스스로 기운을 내어 맞아들일 적에 내 숨결이 되고, 내 목숨을 이룹니다. 내가 스스로 바람을 맞아들이지 않는다면, 바람은 그냥 떠도는 기운일 뿐입니다. 내가 스스로 바람을 맞아들이기에, 바람은 내 숨결이 되면서 내 목숨을 이루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보금자리를 닦기 마련입니다. 저마다 제 마음이 맞는 자리에 삶터를 짓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늘 새롭게 마실 만한 바람이 흐르는 곳에 제 보금자리나 삶자리나 일자리나 놀자리를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삶은 어떤 바람을 마시려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셈이라 하겠습니다.


  바람을 몸으로 받아들이면, 아주 빠르게 온몸을 돕니다. 바람 한 줄기는 빛과 같은 빠르기로, 또는 빛보다 더 빠르다 싶은 움직임으로 우리 몸을 휘돕니다. 우리 몸을 휘돈 바람은 다시 밖으로 나옵니다. 바람이 들고 나는 움직임이 얼마나 빠른지는 사람들 스스로 깨닫거나 헤아리지 못합니다. 다만, 바람이 아주 빠르게 들고 나기에 우리는 모두 살아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 몸밖(살갗)을 휘감던 바람 가운데 내가 스스로 기운을 내어 맞아들인 바람이 우리 몸속(내장과 뼈와 살)을 휘돌면서 빠져나옵니다. 바람은 늘 바람입니다. 산소도 이산화탄소도 아닙니다. 바람은 늘 바람입니다. 이 바람을 어느 만큼 내 몸이 맞아들여서 삭일 수 있느냐에 따라 내가 낼 수 있는 힘이 달라집니다. 바람을 오롯이 맞아들여서 온몸을 활활 태울 수 있으면 엄청난 힘이 솟습니다. 바람을 제대로 맞아들이지 못해 온몸이 불타오르지 못한다면, 아파서 앓아눕는 모습이 되지요. 아파서 드러누운 사람은 누구나 숨을 제대로 못 쉬어요. 아픈 사람은 바람을 제대로 못 마십니다. 튼튼한 사람은 숨을 아주 빠르게 거칠게 신나게 재미나게 기쁘게 많이 들이마십니다. 우리는 ‘밥’이 아닌 ‘바람’으로 움직이는 몸입니다. 바람이 있어야 헤엄을 치고 일을 하며 연장을 다루고 손을 놀리고 생각을 짓습니다. 잘 모르겠다면 운동선수를 보셔요. 운동선수는 운동하는 사이에 밥을 먹지 않습니다. 땀을 많이 흘려 물을 마시기는 하지만, 운동선수는 바람을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 운동량이 달라집니다. 여느 일꾼도 이와 같아요. 숨(바람)을 어떻게 골라서 한꺼번에 힘을 모아 연장을 다루느냐에 따라 일매무새가 달라집니다. 시골에서 호미나 삽이나 괭이로 땅을 쫄 적에도 숨(바람)을 찬찬히 골라야 정갈하면서 수월하게 논밭을 갈 수 있습니다.


  휘감던 바람이 휘돌며 나올 적에 휘파람이 됩니다. 바람에는 아무 빛깔이나 무늬가 없다고 할 만한데, 우리가 올려다보는 하늘은 늘 파랗습니다. 바닷물은 하늘빛을 받아들여 하늘처럼 파랗습니다. 바람에는 아무 빛깔이나 무늬가 없다지만, 하늘을 이루는 기운이 바로 바람이기에, 바람빛은 파랑이라 할 만합니다. “파란 바람”을 마시는 몸이고, 우리 몸이 파란 바람을 마시다 보니, 우리 몸을 이루는 얼거리는 “파란 거미줄”과 같습니다. ‘파람’은 ‘휘파람’을 가리키는 옛말입니다.


  한겨레 뱃사람은 ‘새·하늬·마·높’이라는 곳이름(방향 낱말)을 썼습니다. 한국말로는 새(동)와 하늬(서)와 마(남)와 높(북)입니다. 어느새 이 한국말은 자취를 감추고 마는데, 이 한국말이 자취를 감추도록 ‘동서남북’이라는 한자말만 쓰게끔 정치권력과 문화권력이 내모는 까닭이 있으리라 느낍니다.


  네 갈래 바람 가운데 마녘(남녘)에서 부는 바람은 ‘마파람’입니다. ‘마바람’이 아닙니다. 왜 남녘바람만 ‘파람’일까요? 오늘날 사람으로서는 아주 오래된 낱말에 얽힌 수수께끼를 알 수 없지만, 남녘바람이 어떤 기운인가는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남녘바람이란, 그러니까 너른 바다에서 부는 바람이란,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와서 여름과 첫가을을 밝히면서 보듬는 바람입니다. 이 땅에 따스하고 넉넉한 기운을 북돋우는 바람이 ‘마파람’입니다.


  휘파람은 무엇일까요? “노래가 되는 바람”이 휘파람입니다. 내가 스스로 받아들여서 내뿜는 바람을 노래로 바꿀 적에 ‘휘파람’입니다. 우리 삶터는 마파람을 마시면서 싱그러운 숲으로 피어나고, 우리 몸은 휘파람을 불면서 새롭게 깨어납니다. “파란 바람”이 들과 숲을 푸르게 가꿉니다. “파란 바람”이 우리 몸과 마음을 푸르게 짓습니다. 4348.2.20.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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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온의 숨어 있는 방 창비아동문고 228
황선미 지음, 김윤주 그림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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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82



눈과 마음을 모두 닫은 사람들

― 나온의 숨어 있는 방

 황선미 글

 김윤주 그림

 창비 펴냄, 2006.9.7.



  우리는 누구나 모두 다 볼 수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누구나 모두 다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모두 다 보는 눈’을 차츰 잃거나 잊습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은 없으나,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보는 일’을 잃거나 잊으면서 쳇바퀴에 올라탑니다.


  학교에서는 시험공부만 시킵니다. 시험공부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서로 어우러져 놀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따돌림이나 편가르기나 괴롭히기 따위를 하거나, 홀로 컴퓨터게임으로 빠져듭니다. 어버이나 어른은 아이들을 시험공부와 학원에 몰아넣으면서 삶과 사랑과 꿈하고는 등을 지도록 합니다. 삶과 사랑과 꿈을 내려놓아야 하는 아이들은 이제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코앞에 있는 것조차 두 눈으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밥 한 그릇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농약을 친 푸성귀를 알아채지 못하며, 햇볕·바람·빗물을 먹은 싱그러운 나물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오직 돈만 벌어야 한다는 사회·경제 얼거리에 갇힙니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일자리가 아니라면 아무 뜻이 없는 줄 여깁니다. 삶을 가꾸는 일이나, 사랑을 나누는 일이나, 꿈을 키우는 일하고는 아예 등을 집니다. 이리하여, 스무 살쯤 될 무렵에는 사람을 제대로 마주할 줄 모르고, 서른 살쯤 될 무렵에는 사람한테 깃든 착한 숨결을 찬찬히 바라볼 줄 모르며, 마흔 살쯤 될 무렵에는 사람한테 서린 참된 넋을 옳게 읽을 줄 모릅니다.



.. “나무 좀 베었다고 세 살던 사람을 내보낸 건 성급한 처사지. 나무가 워낙 커서 창문도 가리고, 볕도 안 들어 그랬다는데.” “그럼, 집주인에게 물어 봤어야죠. 그렇게 오래 살고 약이 되는 나무를 물어 보지도 않고 벤 걸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나요. 당숙모가 얼마나 애지중지하던 나문데.” … 여기에 살았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오늘은 여기가 꼭 우리 집인 것처럼 반갑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  (13, 68쪽)



  오늘날 꽤 많은 사람들은 장삿속을 가리지 못합니다. 장삿속을 가릴 줄 알더라도 그냥 장삿속에 휘둘립니다. 오늘날 퍽 많은 사람들은 겉치레나 눈속임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정치나 경제나 사회나 문화를 휘어잡은 이들이 꾸미는 겉치레나 눈속임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거짓말에 쉬 넘어갑니다. 참이 아닌 거짓을 쏟아내는 신문과 방송이 흘러넘쳐도, 참과 거짓을 스스로 가릴 줄 모릅니다. 곁에서 눈밝은 사람이 참과 거짓을 제대로 가려내어 알려주어도 이를 귀담아듣거나 눈여겨보지 못합니다. 아주 종(노예)이 되고 맙니다.


  이를테면, 요즈음 아이들은 딸기가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돋는 열매인지 모릅니다. 딸기꽃을 아는 아이는 매우 드뭅니다. 딸기는 비닐집이 아니라 들과 숲에서 나는 열매인 줄 생각하는 아이는 아주 드뭅니다. 가게에 나도는 거의 모든 딸기는 비닐집에서 겨우내 석유난로 기름내음을 먹으면서 비료와 농약과 항생제와 수돗물로 자란 줄 생각하지 못하고, 이런 모습을 보더라도 아무것도 못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막걸리라 ‘쌀로 빚은 술’인 줄 잊습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막걸리는 ‘쌀’로도 안 빚고 수입밀로 빚습니다. 한국에서 나는 쌀로도 안 빚고 수입쌀로 빚기 일쑤입니다. 여기에 갖가지 첨가물과 화학약품을 집어넣어 단맛을 돋웁니다. 그렇지만 이를 깨닫는 어른은 대단히 드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닭우리에 갇힌 닭처럼 길드는 오늘날 사람인 탓에, 비닐집에서 농약과 비료와 수돗물로 키우는 딸기나 푸성귀를 먹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학교와 사회와 제도권에 길들여진 사람은 ‘길들여진 밥’과 ‘공장에서 똑같이 찍은 밥’만 먹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아이들도 길드는 종이 되는 길로 접어드니까, 스스로 놀이를 새롭게 지어서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컴퓨터게임에만 빠져들어야 할밖에 없는지 모릅니다. 눈은 있으되 눈으로 못 보고, 귀가 있으되 귀로 못 듣고, 마음이 있으되 마음으로 만나지 못합니다.



.. 강우가 이상해질 수밖에 없는 일을 겪기는 했다. 아파트가 떠들썩하게 싸워대던 부모님이 이혼하고 나가 버려서 할머니랑 살게 된 것이다. 그게 우리 집 일이었다면 난 미쳐 버렸을지 모른다 … 엄마는 내가 여자답기만 바라지, 그게 나를 힘들게 한다는 건 모른다 … “너네는 어디로 간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야말로 갈 데가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넝쿨 집. 어쩌면, 안 그럴지도 모르지만…….” “좋은 집인가 보다. 이름이 예쁘네.” “응. 거긴, 예쁘고 좋아.” ..  (27, 33, 222쪽)



  황선미 님이 쓴 어린이문학 《나온의 숨어 있는 방》(창비,2006)을 읽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아이는 ‘내 삶’이 없습니다. 아이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학교를 다니고, 옷을 입으며, 밥을 먹습니다. 아이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학원을 다니고, 하루를 보냅니다. 이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할 줄 아는 일이 없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놀 줄 모릅니다. 아이는 스스로 동무를 사귀지 못합니다.


  그저 책에 나오는 이야기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도시를 보면 사람도 많고, 어른과 아이도 많습니다. 그러나, 도시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은 서로 이웃이나 동무로 여기지 않습니다. 도시에 있는 학교는 얼마나 크고, 학급도 얼마나 많은가요? 그러면, 그 많은 ‘학교 아이’는 서로 동무일까요?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이웃이나 언니 오빠 누나 동생으로 지내는가요?


  시골에는 마을마다 아이가 없어서 동무를 사귀지 못합니다. 도시에는 동네마다 아이가 넘치지만 동무를 사귀지 못합니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똑같습니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막힌 모습은 똑같습니다.



.. “와아! 누가 이걸 다 키웠대?”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사방이 꽃이었다. 평평한 곳이든 언덕진 곳이든, 돌 틈이든, 장독 옆이든, 나무 근처든 어디든 갖가지 색의 크고 작은 꽃들이 들쭉날쭉한 풀과 더불어 사방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꽃이 진 자리에는 갈색이나 짙은 보라색 열매가 맺혀 있었다. 그 애는 콧노래를 부르며 꽃들 사이를 걸어갔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머리가 시원해!” ..  (146쪽)



  마음이 있으면, 우리는 눈을 감아도 서로 알아봅니다. 마음을 열면,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어떤 느낌이요 생각인지 환하게 알아챕니다. 마음이 없기에, 우리는 눈을 떠도 서로 살가이 사귀지 못합니다. 거짓과 속임수와 눈가림과 겉치레만 판칩니다. 마음을 열지 않으니, 우리는 하루 내내 한곳에 함께 있어도 기쁘게 웃거나 노래하지 못합니다.



.. 울음이 멎자 할머니가 다시 나를 마주보고 섰다. “아가. 무엇이든 자신이 속한 시간에 살아야 한단다. 라온과 내가 속한 시간, 네가 속한 시간은 달라. 넌 살아 있는 영혼이고, 우린 아니지. 그런데 네가 여기 있구나. 그래서 내가 찾아내기 어려웠던 게야. 넌 지금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 그래서 위험해. 자기 시간에 속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냐. 떠돌이나 마찬가지란다. 라온과 나는 곧 우리만의 시간을 따라갈 거야. 네가 속해야 할 시간으로 가렴. 내가 도와주마.” … “할머니가 잊으신 게 저 신발이에요?” “아니다. 그리고 난 무얼 잊은 적이 없다. 아주 요긴한 때 쓰려고 잘 숨겨 두었지. 봐라, 나뭇잎 신발을 받쳐 줄 바람이 오고 있지 않느냐. 태 항아리 덕분이야. 저 바람은 라온을 잡아 주는 삼신할미 손길이란다. 오랜만에 저걸 타는구나. 라온은 바람의 잔등을 타는 걸 참 좋아했지.” ..  (238, 239쪽)



  눈과 마음을 뜨지 못하면, 몸뚱이는 ‘산 목숨’으로 보여도 ‘죽은 목숨’과 같습니다. 눈과 마음을 뜨면, 몸과 마음이 싱그럽게 빛납니다. 눈과 마음을 닫으려 하면, 몸뚱이와 마음은 그저 죽음길로 치닫습니다. 눈과 마음을 열려 하면, 몸과 마음은 눈부시게 깨어나서 아름답게 거듭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부터 풀과 나무와 꽃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부터 흙하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부터 새와 짐승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섞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도시나 시골 모두 풀·나무·꽃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냥 아무 들이나 숲을 삽차로 밀어붙여서 고속도로나 골프장이나 관광단지나 발전소나 송전탑이나 군부대나 아파트나 이런저런 쓰레기더미로 바꾸고 맙니다. 오늘날에는 도시와 시골 모두 흙이나 새나 짐승을 동무로 삼지 않습니다. 흙이 죽든, 새와 짐승이 숨을 거두든, 참말 하나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평화하고는 동떨어진 전쟁무기를 잔뜩 갖추느라 어마어마한 돈을 퍼붓지만, 막상 더 무섭고 아프며 괴로운 사회가 되는 줄 깨달으려 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짓밟는 전쟁무기를 갖춘 군부대에 젊은이를 집어넣어 바보로 만들지만, 정작 이렇게 스스로 바보가 되는 줄 옳게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나온의 숨어 있는 방》에 나오는 아이 ‘나온’은 몸뚱이가 깃든 이곳(이승)에서 즐겁지 않습니다. 즐거운 날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쌍둥이로 함께 태어났으나 먼저 저곳(저승)으로 떠난 ‘라온’과 함께 가려 합니다. 삶도 사랑도 꿈도 없어 보이는 이곳에 있을 뜻이나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린 ‘나온’은 이곳에서 삶을 찾을 수 있을까요? 나온을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제라도 뉘우치고 깨달으면서 사랑과 꿈을 키우는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바로 옆에 있는 아이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제 ‘나온’과 ‘라온’을 함께 바라보도록 눈을 뜨면서 삶을 새롭게 지을 수 있을까요?


  ‘라온’은 바람을 타고 저곳으로 갑니다. ‘나온’은 할머니가 가로막아서 라온과 함께 바람 타고 가는 길로 가지 못합니다. 나온은 앞으로 어떻게 살까요? 나온은 앞으로 스스로 눈을 뜰 수 있을까요? 4348.2.27.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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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419) 귀하


  편지나 소포에 적는 말을 살피면, 지난날에는 ‘귀하(貴下)’라는 한자말을 널리 썼으나, ‘님’이라는 한국말도 함께 썼고, 오늘날에는 ‘귀하’라는 한자말보다는 ‘님’이라는 한국말을 조금 더 널리 쓴다고 느낍니다. 아마 앞으로는 ‘님’이라는 낱말로 자리를 잡고 ‘귀하’라는 한자말은 자취를 감추리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 땅에서는 맞은편이나 다른 사람을 섬기거나 높이거나 모시려고 할 적에는 ‘님’을 붙여서 ‘벗님’이나 ‘이웃님’이나 ‘임금님’처럼 쓰거든요.


 아무개 님 귀하 (x)

 아무개 귀하

→ 아무개 님

→ 아무개 앞


  어떤 곳에서는 “님 귀하”를 함께 쓰기도 합니다. 둘을 함께 쓰면 겹말이 되는 줄 모르는 셈입니다. 편지나 소포를 받는 쪽이나 보내는 쪽이 서로 가깝거나 살가운 동무라고 하면 ‘앞’을 쓰기도 합니다. 어른이 아이한테 편지나 소포를 띄운다면, 이때에도 ‘앞’을 쓸 수 있을 테지요. 4334.11.24.흙/4348.2.27.쇠.ㅎㄲㅅㄱ


..



 우리 말도 익혀야지

 (425) 까닭에


까닭에 교과서 속의 미국의 표상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전염시키느냐가 중요한 관건인데, 그것은 각 교과마다 통일된 것이 아니었다 … 까닭에 모든 교과서의 앞에 실렸다가

《이치석-전쟁과 학교》(삼인,2005) 141, 164쪽


 까닭에

→ 그래서

→ 이리하여

→ 이 때문에

→ 이런 까닭 때문에

 …



  ‘까닭’은 이름씨일 뿐, 이음씨가 아닙니다. ‘까닭’은 홀로 글 맨 앞에 올 수 없습니다. 글 첫머리에 이 낱말을 쓰려 한다면 “이런 까닭 때문에”나 “그러한 까닭이 있어”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이 보기글에서 첫머리를 열 적에는 ‘그래서’나 ‘이리하여’나 ‘이 때문에’ 같은 말마디를 넣습니다. 4338.8.7.해/4348.2.27.쇠.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그래서 교과서에 나온 미국 모습을 아이들한테 어떻게 그려 넣느냐가 큰일이었는데, 이는 교과마다 똑같지는 않다 … 이리하여 교과서마다 앞쪽에 실렸다가


“교과서 속의 미국의 표상(表象)을”은 “교과서에 나오는 미국 모습을”로 손질하고, “어떻게 전염(傳染)시키느냐가”는 “어떻게 그려 넣느냐가”나 “어떻게 퍼뜨리느냐가”나 “어떻게 물들이느냐가”로 손질합니다. “중요(重要)한 관건(關鍵)인데”는 “큰일인데”로 손보고, ‘그것은’은 ‘이는’으로 손봅니다. “각(各) 교과마다”는 겹말이니 “교과마다”로 바로잡습니다. “통일(統一)된 것이 아니었다”는 “똑같지는 않다”로 다듬고, “모든 교과서의 앞에”는 “모든 교과서 앞에”나 “교과서마다 앞쪽에”로 다듬습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622) 가져오다 1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에 기초한 동서 간의 교류 증대야말로 동유럽의 체제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전망이 옳았던 것이다

《곤도 다카히로/박경희 옮김-역사교과서의 대화》(역사비평사,2006) 70쪽


 체제에 변화를 가져온다

→ 틀을 바꾼다

→ 틀을 뜯어고친다

→ 틀을 새롭게 한다

→ 틀을 고칠 수 있다

 …



  요즈음 한국말사전 말풀이를 보면 ‘가져오다 (2)’을 “어떤 결과나 상태를 생기게 하다”로 풀이합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한국말사전을 찬찬히 살피면, ‘가져오다’를 이처럼 풀이하지 않습니다. 1980년대로 접어들고 1990년대가 되고부터 한국말사전에서 “어떤 결과나 상태를 생기게 하다” 같은 뜻을 나타낸다는 ‘가져오다’를 이야기합니다.


  곰곰이 생각할 노릇입니다. “변화를 가지고 온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져오다(가지고 오다)’는 물건을 가지고 온다고 하는 자리에서만 쓰는 낱말입니다. 아마 빗대는 말로 “꿈을 가져오다”나 “사랑을 가져오다”처럼 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꿈이나 사랑을 가지고 온다고 하면, 저쪽에 있는 꿈과 사랑을 이쪽으로 가지고 온다는 뜻입니다. 생기게 하거나 만든다는 뜻으로 ‘가져오다’를 쓰지 않습니다.


  “변화(變化)를 생기게 한다”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변화가 나타나게 한다’는 소리이고, 이는 ‘바꾼다’는 소리입니다. ‘새롭게 하다’나 ‘뜯어고치다’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4339.10.3.불/4347.1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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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나라들과 관계를 고치며 동서 사이에 교류를 늘리는 일이야말로 동유럽 틀을 바꾼다는 생각이 옳았다


“동유럽 국가(國家)들과의 관계개선(關係改善)에 기초(基礎)한”은 “동유럽 나라들과 관계를 고치며”나 “동유럽 나라들과 사이좋게 지내며”로 손질하고, “동서 간(間)의 교류 증대(增大)야말로”는 “동서 사이에 교류를 늘리는 일이야말로”로 손질합니다. “동유럽의 체제(體制)”는 “동유럽 틀”이나 “동유럽 얼거리”로 손보고, “전망(展望)이 옳았던 것이다”는 “생각이 옳았다”로 손봅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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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388) -로부터/-으로부터 6


그로부터 봄까지 얀은 더 튼튼해졌고

《시튼/햇살과나무꾼 옮김-작은 인디언의 숲》(두레,1999) 67쪽


 그로부터 봄까지

→ 그때부터 봄까지

→ 그날부터 봄까지

→ 그 뒤로 봄까지

 …



  어느 때나 날을 살피면서 말할 적에는 ‘그때부터’나 ‘그날부터’로 적어야 올바릅니다. ‘그로부터’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보기글처럼 ‘때’나 ‘날’이 아니라 ‘-로’라는 토씨를 ‘-부터’라는 토씨에 붙이는 사람이 제법 많습니다. 이렇게 한국말을 잘못 쓴 글이나 책을 읽는 사람도 이런 말투에 길들거나 물듭니다. 잘못 퍼지는 번역 말투가 걷잡을 수 없이 더 퍼지는 셈입니다. 4338.1.25.불/4348.2.2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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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432) -로부터/-으로부터 7


문자로부터 소외된 사람들과의 연대, 민중과 예술의 모순을 부수는 작가가 되라

《김곰치-발바닥 내 발바닥》(녹색평론사,2005) 259쪽


 문자로부터 소외된 사람들과의 연대

→ 글에서 멀어진 사람들과 함께하고

→ 글에서 따돌림받은 사람들과 어깨동무

→ 글과 책이 내친 사람들과 어깨동무

→ 글과 책을 못 누리는 사람들과 손잡기

 …



  글을 쓰거나 읽는 사람이 부쩍 늘어서 제법 많지만, 글과 동떨어지거나 멀어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학교에서는 누구나 글을 쓰도록 가르치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글과 등돌리거나 짓눌리는 아이도 많습니다. 수많은 책이 쏟아지고 인터넷이 널리 퍼지기에 이 모두 두루 누리는 사람이 있는 한편, 수많은 책도 너른 인터넷도 못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못 쓰는 사람하고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나 지식인은 책하고 동떨어진 곳에 있는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지구별에서 함께 사는 벗님이 누구인지 돌아보면서, 함께 기쁜 삶을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담을 허물고 울타리를 치울 수 있는 글을 쓸 때에, 글넋이 싱그러우면서 글빛이 눈부시겠지요. 4338.9.8.나무/4348.2.2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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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 멀어진 사람과 어깨동무하고, 민중과 예술을 가르는 담을 부수는 글을 쓰라

글을 못 누리는 사람과 손 잡고, 겉과 속이 다른 민중·예술을 부수는 글을 쓰라


‘문자(文字)’는 ‘글’이나 ‘글과 책’으로 손보고, ‘소외(疏外)된’은 ‘따돌림받은’이나 ‘멀어진’이나 ‘못 누리는’으로 손봅니다. ‘연대(連帶)’는 ‘함께하기’나 ‘어깨동무’나 ‘손잡기’로 손질합니다. 그런데, “민중과 예술의 모순(矛盾)”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민중과 예술이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가리킬까요, 민중과 예술을 “가르는 담이나 울타리”를 가리킬까요?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 뚜렷하지 않습니다. “작가(作家)가 되라”는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글을 쓰라”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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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440) -로부터/-으로부터 8


그로부터 사흘 뒤, 이번엔 부천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황안나-내 나이가 어때서》(샨티,2005) 92쪽


 그로부터 사흘 뒤

→ 그 뒤로 사흘 지나서

→ 그 뒤로 사흘 있다가

→ 그러고 사흘 뒤

→ 그러고 나서 사흘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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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보기글에서는 ‘그로부터’를 ‘그때부터’나 ‘그날부터’로 손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로 손볼 수 있는데, “사흘 뒤”라는 말마디가 곧바로 나오니, 앞뒤를 살짝 손질해서 “그 뒤로 사흘 지나서”처럼 쓸 만합니다. 또는 “그러고”나 “그러고 나서”로 첫머리를 열어도 돼요. 4338.10.4.불/4348.2.2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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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1052) -로부터/-으로부터 10


예로부터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고 꿋꿋이 그 길을 지켜온 진창, 숲, 벌판, 산과 함께 있었다

《리 호이나키/김병순 옮김-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달팽이,2010) 76쪽


 예로부터

→ 예부터



  ‘예’는 한 낱말입니다. 이름씨이지요. ‘옛부터’로 잘못 쓰는 분이 많은데, ‘예부터’로 적어야 올바릅니다. 그런데, ‘예부터’나 ‘옛날부터’가 아닌 ‘예로부터’나 ‘옛날로부터’로 잘못 쓰는 분이 꽤 많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니, 이 한국말사전에도 “예로부터 괴이한 전설이 하나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같은 보기글이 나옵니다. 이 보기글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 내놓은 한국말사전도 ‘예로부터’를 ‘예부터’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에서 엮은 한국말사전에 나오는 보기글을 살피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전(傳)하다’는 “이어지거나 남겨지다”나 “옮기어 주다”나 “물려주다”를 뜻하는 외마디한자말입니다. 그러니까, “전해 내려오고”는 겹말입니다. “예부터 전설이 하나 전한다”나 “예부터 전설이 하나 내려온다”나 “예부터 전설이 하나 있다”로 고쳐야 올바릅니다. 4348.2.27.쇠.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예부터 수천 해 동안 바뀌지 않고 꿋꿋이 그 길을 지켜온 진창, 숲, 벌판, 산과 함께 있었다


“수천 년(年)”은 “수천 해”로 손보고, ‘변(變)하지’는 ‘바뀌지’나 ‘달라지지’로 손봅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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